최근 수정 시각 : 2023-09-18 04:59:54

초소왕

초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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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초(楚)나라 13대 왕
소왕
昭王
미(羋)
웅(熊)
진(珍, 軫)
아버지 초평왕(楚平王) 웅거(熊居)[1]
어머니 맹영(孟嬴)
아내 월희(越姬)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489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15년 ~ 기원전 489년

1. 개요2. 왕자 시절3. 치세 초기4. 수도가 함락 당하다5. 천도와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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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29대 군주, 13대 왕. 초평왕진(秦)나라 공주 맹영의 아들이며 초혜왕의 아버지이다. 출토된 초나라 문헌에는 시호가 '소왕'(卲王)이라고 나온다. 본명은 '진'(珍)이나, '진'(軫)으로 개명했다. 오왕 합려와 명장 손무 및 오자서의 맹공으로 초나라가 멸망할 뻔한 초유의 대위기를 여러 충신들의 활약과 외가인 진(秦)나라의 원조로 극복하고 부흥하는데 성공했다.

2. 왕자 시절

초 평왕은 즉위 이듬해 진(秦)나라와의 친선을 위해 태자 건의 아내를 진(秦)나라에서 구했는데, 진 애공의 여동생인 맹영(孟嬴)이 매우 예뻤기 때문에 비무기는 초 평왕에게 그녀를 차지하도록 꼬드겼다. 거기에 넘어간 평왕이 아들 건에게는 같이 따라온 제나라 여자를 넘겨주고, 자기가 며느리 될 맹영을 차지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웅진, 즉 훗날의 초 소왕이었다. 비무기는 태자 웅건이 왕이 되면 초 평왕에게 맹영을 차지하라고 꼬드긴 것 때문에 해를 입을까봐 태자를 모함해 해치려고 했다. 결국 태자 건은 오자서와 함께 정나라로 망명했다. 더 자세한 것은 오자서와 초평왕 항목 참조. 태자 건이 망명하자 당연히 맹영이 낳은 진이 태자가 되었다.

초 평왕 14년(기원전 516년), 평왕이 사망하고 태자인 그가 왕위에 오른다.

기원전 527년에 초 소왕의 어머니 맹영이 진(秦)나라에서 초나라로 오고, 소왕이 태어나자 비무극이 태자를 모함한 것으로 보면 생년은 기원전 526년~524년 사이가 되고, 기원전 516년에 즉위하였으니 즉위시 나이는 9~11세 정도로 추정된다.

3. 치세 초기

초 소왕 2년(기원전 514년), 오나라의 왕 (吳王 僚)는 초 평왕의 상을 틈타 초나라를 쳤다. 그래서 공자 엄여(公子掩餘)[2] 와 촉용(燭庸)을 보내 초나라의 육과 장 두 개 읍을 포위했다. 그런데 오군은 초군 때문에 길이 끊겼고[3], 이에 오왕 료의 친위세력이 묶이자 오나라 내에서 공자 광(公子光)[4]이 오왕 료를 살해하고 왕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5] 그리하여 공자 엄여는 서(舒)나라로, 공자 촉용은 종오국(鍾吾國)으로 달아났다.

이때 왕이 바뀐 나라를 공격하면 상서롭지 못하다면서 오군을 몰아치지 않고 달아날 수 있도록 극완이 퇴로를 열어주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간신계의 레전드인 비무기(費無忌)의 세치혀를 거쳐서 집안이 몰살당했다...... 이 사단 때 훗날 오나라의 내정을 튼실히하고 외교를 담당할 태제 극완의 동성(同姓) 백비(伯嚭)가 오나라로 튀어서 오자서와 함께 복수를 노린다.(동병상련의 고사.)

이 비무기(費無忌)[6]가 사람들을 간사한 말로 해쳤기 때문에[7]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비무기를 초 소왕(10살 전후인 왕이라서 실제로는 모든 실권을 가지고 있던 영윤 낭와(囊瓦))이 가을에 처형해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참고로 극씨 일족을 주살한 것도 낭와고 비무기를 주살한 것도 낭와이며 그리고 오나라의 공격으로 수도 영이 함락될 때 군권을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뻘짓하여 대패하고 작은 나라로 도망간 것도 낭와이다.

4. 수도가 함락 당하다

초 소왕 4년(기원전 512년), 오왕 합려는 2년 동안 국력을 키운 뒤 오자서, 손무, 백비, 공자 부개와 함께 초나라를 침공했다. 이때 서나라와 종오국을 쳐서 공자 엄여와 촉용을 죽여버렸다. 그후 오왕 합려는 초의 수도 영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손무가 간했다.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닙니다."

오왕 합려는 그 말을 옳게 여겨 따랐다.

초 소왕 5년(기원전 511년), 오나라가 육읍과 잠읍을 점령했다. 초나라의 사마 심윤술(沈尹戌)[8]은 잠읍을 구하러 갔다.

초 소왕 7년(기원전 509년),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여긴 소왕은 영윤 낭와(囊瓦)를 보내 오나라를 치게 했으나 예장에서 탈탈 털렸다.

초 소왕 10년(기원전 506년) 봄에 진(晉), , , , , 위(衛), 진(陳), , , , 주(邾), 돈, 호, 등, 실, 기, 소주 등 제후국들이 힘을 합쳐 초나라를 치는 와중 오왕 합려는 5,000명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대별산맥을 넘어서 수도인 영(郢)을 급습했다. 이때 낭와는 중앙군을 거느리고 심윤술의 계책[9]에 따르기로 하고는 독자적으로 거짓후퇴를 하는 오군을 추격하다가 대별산맥 초입에서 3번 대패하고 흩어지는 군대를 추슬러서 백거(柏擧)에서 대항하며, 심윤술의 군대를 기다렸지만 합려의 동생 부개의 돌격에 의해 또 한번 와장창 무너지고 후퇴하면서 청발수(淸發水, 한수의 지류)를 건너다가 얻어터지고, 후퇴하다가 배고파서 밥짓는데 또 다시 급습당한 끝에 결국 수도 영의 인근 옹서에서 완전히 와해되었다. 패장 낭와는 몸성히 주변의 소국으로 튀었고, 심윤술은 옹서까지 군대를 겨우 이끌고 갔으나 장거리 행군에 피로한 초군이 오나라에게 대패하였고, 이때 장렬히 전사하였다.

백거에서 대치한지 10일만에 수도인 영이 함락되자, 초 소왕은 운(鄖)나라를 거쳐 속국인 수(隨)나라로 달아났다. 《좌전》에는 이때 소왕이 오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코끼리 꼬리에 불을 붙여 오군 진지로 코끼리를 내달리게 해 오군을 혼란에 빠뜨린 기록이 남아 있다. 어떻게 보면 화우지계의 원조. 왕의 서형인 공자 신은 왕의 복식을 갖추고 수도 영의 인근 비설(脾洩)에서 일종의 분조를 이끌면서 초나라 사람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한 오군은 대규모의 약탈, 방화, 강간 등의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10] 또한 전공이나 전리품을 다투면서 규율이 무너진 모습이 보였다.

오자서의 친구인 신포서는 이 위기 상황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진(秦)나라에 가서 원병을 요청했으나 당시 진나라의 군주진애공은 초나라는 신의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7일간이나 부탁하자[11] 그 정성에 감복한 애공은 초나라에게 원군을 보낸다. 진(秦)나라 군대는 신포서와 함께 영으로 갔다. 이때가 바로 초 소왕 11년(기원전 505년)이었다. 또한 초나라에게 호재가 일어났는데, 바로 오나라의 왕제 부개가 딴 마음을 품고 왕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켜서 오왕 합려가 물러난 것이다. 이로써 초나라는 기사회생하였지만 수도 영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오자서가 물러나는 조건으로 태자 건의 아들인 왕손 승을 우대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초 소왕이 이를 받아들여 왕손 승을 백공으로 임명한다. 허나 이것은 훗날 화근이 된다.[12]

5. 천도와 말년

초 소왕 12년(기원전 504년), 영(郢)성[13]이 오나라의 전쟁으로 폐허가 되자, 수도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초 소왕은 수도를 약(鄀)으로 천도했다.[14] 그리고 오나라가 초나라를 쳐서 파 땅을 취했다.

초 소왕 16년(기원전 500년), 돈나라와 호나라를 쳤다.

초 소왕 20년(기원전 496년) 2월, 돈나라를 멸했다.

초 소왕 21년(기원전 495년) 2월, 호나라를 쳐서 멸하고, 호나라의 자작 포를 포로로 잡았다.

초 소왕 22년(기원전 494년) 봄, 소왕은 진(陳)나라, 수나라, 허나라와 연합해 채나라의 도읍을 포위했다. 그래서 채나라가 예물을 바치고 투항했다. 초 소왕은 채나라를 장강과 여수 사이로 옮겼다.[15]

초 소왕 25년(기원전 491년) 여름, 소왕은 북방을 공략할 것을 획책했다.

초 소왕 27년(기원전 489년) 봄, 오나라가 진(陳)나라를 치자, 초 소왕이 병사를 보내 구원에 나섰다. 그리고 그 해에 초 소왕이 죽었다. 아들 웅장이 즉위하니 그가 초 혜왕이다.


[1] 즉위 이전에는 웅기질(熊棄疾)[2] 오·초 간의 종리 전투(기원전 519년)에서 좌군을 지휘했다.[3] 엄밀히 말하면 초군의 좌윤 극완(郤宛)이 수군을 끌고 오의 수군을 상류에 가두었다.[4] 이 사람이 훗날 오왕 합려다.[5] 이때 활약한 사람이 오자서와 전제다.[6]춘추좌씨전》에는 이름이 비무극(費無極)으로 기록됨.[7] 채나라 조오(초평왕을 세운 공신), 채나라 태자 주(위성국가의 군주를 갈아치움), 태자 건, 오자서 가문, 극씨 가문, 백씨 가문, 진씨 가문, 양씨 가문 등등[8] 달리 심윤수라고 하는데, 아마 戌자와 戍자와 비슷하게 생겨서 두 가지 표기가 쓰이는 듯 하다. 이것과는 상관없지만 달리 예를 들자면 진목후의 이름이 많은 원인도 비슷한 모양의 글자가 많은 탓이기도 하다. '심윤'은 심 지방의 장관을 뜻하는 직책이고, 성은 미(羋), 이름은 술이었다. 심윤술은 심윤을 씨(氏)를 삼아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심나라의 후손으로 알려진 사람으로서 한때 오나라에서 합려를 섬긴 적이 있었지만 초나라로 돌아와 심 지역에서 오나라 전문가로 10년 넘게(죽을 때까지) 대오 전선을 담당하였다.[9] 영윤 낭와가 한수에서 오나라의 도강을 견제하면서 시간을 끌면(모루) 심윤술이 초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정예병으로 오나라의 후방을 치는(망치) 계책.[10] 당시에도 그 행위가 욕을 먹지만, 오히려 병사들에게 사기를 올려주는 행위로 사용되었다. 즉 일종의 포상으로 이런 행위를 한 것이다. 전국시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지 않고 민심을 다독인 악의가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시대 불문하고 악의 같은 행위를 해야 욕 안먹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11] 진애공은 남의 나라에 간섭하기 싫어서(덤으로 진애공의 누이를 태자비이자 미래의 왕후로 삼는줄 알았는데 강제로 빼앗아 후궁으로 취한 초 평왕 때문에 진나라 공실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도 한몫했다.) 그냥 좋게 좋게 신포서를 돌려보낼려 했는데 신포서는 장장 7일간 죽기 일보 직전까지 곡을 하며 진심을 보였고 결국 진애공이 구원군을 보내준다.[12] 초 혜왕 때 백공 승은 기어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심윤술의 아들 심제량에게 진압된다. 이 백공 승도 오자서에게 배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지팡이를 거꾸로 잡아서 끝이 턱을 찔러 피가 나는데도 집에 돌아가서야 알았다는 일화가 있다.[13]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14] 지금의 허난성 난양 부근. 춘추시대 때의 제후국으로 약나라가 있었다. 바로 그 땅이 초나라의 수도가 되었다.[15] 여담이지만 주나라의 힘이 건재했을 시절 옹주 지방에 있던 정나라를 낙읍 근처로 옮긴 바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제후국이 옮겨지는 일은 종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