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2 23:38:42

초도왕

초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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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초(楚)나라 17대 왕
도왕
悼王
미(羋)
웅(熊)
의(疑)
아버지 초성왕(楚聲王) 웅당(熊當)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381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81년

1. 개요2. 생애 초기3. 오기의 부국 강병책4. 최후5. 평가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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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33대 군주. 17대 . 초나라에서 출토된 문헌에서는 시호를 '도절왕'(悼折王)으로 기록하였다.[1] 이름은 의(疑).

아버지 초성왕(楚聲王)이 도적들에게 시해당한 뒤에 왕위를 이었다. 초기 치세에 삼진(三晉)에게 패배했으나 위(魏)나라에서 망명한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개혁을 행한다.

2. 생애 초기

초 성왕 6년(기원전 402년), 초나라 내부에 혼란이 일어나고, 강도들이 성왕을 습격하여 살해하자, 웅의가 뒤를 이어 초나라 왕으로 즉위했다.

초 도왕 원년(기원전 401년), 당시 중국은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바뀌는 전환점으로 삼진(조•위•한)이 제후가 되었으며, 제나라는 대부 전씨(田氏)가 군주인 강씨(姜氏)를 쫓아내고 군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초나라는 여러 국가들에게 압박을 받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초 도왕 2년(기원전 400년), 초나라는 불리한 정세하에 있었다. 이를 틈탄 삼진 연합군이 초나라를 공격하자, 초군은 삼진 연합군에게 맞서다 승구 땅에서 패배했다. 이 때 삼진의 의도는 초나라를 압박하는 것으로, 위 문후의 치세때 삼진은 서로 간에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당시 위 문후와 우호적인 관계였던 한(韓)나라도 같이 움직여서, 그 효과로 초나라를 압박할 수 있었다.

초 도왕 9년(기원전 393년), 초나라가 한나라를 쳐서 부서 땅을 차지했다.

초 도왕 11년(기원전 391년), 삼진 연합군이 그에 대한 보복으로 대량(大梁)[2]과 유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초나라는 진(秦)나라와 예물을 주고 받으면서 동맹을 맺었으며, 이렇게 삼진을 견제하려 한 초 도왕은 위기 상황에서 그것을 타개할 계책이 필요했다.

3. 오기의 부국 강병책

초 도왕 15년(기원전 387년), 오기가 위(魏)나라에서 초나라로 망명하자, 평소 그가 현명하고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있었던 도왕은 오기를 영윤으로 삼았다. 그리고 도왕은 오기와 함께 부국 강병책에 대해 논했는데, 이에 왕이 매우 기뻐했다.

초 도왕을 기뻐하게 한 오기의 부국강병책은 이러하였다.

1. 왕족 출신의 대귀족에게 공로가 없으면 벼슬과 녹봉을 주지 않는 것으로 견제한다. 그럼으로써 공금이 함부로 세나가지 않게 한다.

2. 관제의 정비를 시도해 쓸데없는 관직을 없앰으로써 거기서 생긴 돈을 공금으로 사용한다.

3. 농지를 개간한다. 황무지를 개간해 거기서 수확한 농산물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한다.[3]

4. 군제를 개혁한다. 군제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일단 뒷받침되는 경제력이 중요한데, 위의 3가지가 이뤄지면 경제력은 자연스럽게 상승하여 군제를 개혁하기 쉬워진다.[4] 오기는 자신이 중원에서 갈고 닦아온 군재를 바탕으로 병사들을 키워 강병을 만들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귀족들이 공로가 없으면, 벼슬에서 내쫓고, 그 빈 자리 중 쓸모없는 자리(한직)는 정리하며, 농지를 개간해 그것을 바탕으로 생산력을 키워 국부를 늘리고, 경제력을 기반으로 군사를 키우는데, 오기는 제자백가 중에 하나인 병가(兵家)였고[5], 그래서 병법에 능해 병사들을 키우니 강해지고, 나라가 부유해져 정복 전쟁에 나서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리하여 초나라는 전국시대의 살벌한 무대에 잘 적응하기 시작했다.

초 도왕은 오기가 시행하기로 한 부국강병책을 받아들여 초나라의 법령을 정비하고,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면서, 초나라 미성 웅씨 왕실의 촌수가 먼 일족들의 봉록을 폐지하고, 군사들을 양성했는데, 이는 병력을 강화해 합종, 연횡을 말하는 유세객들의 주장을 물리치는 것으로 이러한 정책이 시행되자, 남쪽으로는 백월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陳), (蔡)를 병합하면서 삼진을 격퇴할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진(秦)나라를 토벌해 제후들이 초나라의 강성함을 우려했다고 한다.[6]

4. 최후

초 도왕 21년(기원전 381년), 도왕이 죽자, 예전에 특권을 누렸던 초나라의 왕족이었던 자들이 오기를 죽이려고 했다가, 그 와중에 오기가 도왕의 시신에 엎드리자, 왕의 시신에 화살이 꽂히는 일이 일어났고, 이 일에 연루된 초나라 왕족이 처형된 자가 70여 집에 이르렀다.[7]

5. 평가

초 도왕은 아버지 성왕이 국정 혼란으로 시해당하는 것을 지켜봤으므로 국력을 키우기 위해 아등바등했으나, 삼진 연합군의 힘을 당해내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고심하던 차에 위나라에서 망명해 온 오기가 유능한 것을 알고 그 계책을 받아들여 전국시대의 적응에 성공해 당대를 주름잡았다.

하지만 오기의 계책은 귀족들의 특권을 깎는 일이었으므로 귀족들이 반발하여 오기를 죽였다.[8] 그리고 초나라는 위왕 때 월나라를 멸하고, 고열왕노나라를 멸했지만, 그 뒤로는 진나라에게 밀려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6. 미디어 믹스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038.jpg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 '웅의'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1] 청화간 계년에는 '도철왕(悼哲王)'으로 기록되어있다.[2] 현재 중국의 허난성 카이펑.[3] 참고로 공원국 교수의 저서 《춘추전국이야기》에서 관중이 그것을 시도해 제나라가 강성해졌다고 나왔으니 초나라는 그것을 오기에 의해 늦게 실시한 셈이다. 참고로 제나라는 그것을 춘추시대 때부터 시행했다.[4] 경제력과 군사는 상관 관계가 있는데, 《손자병법》의 첫머리인 <시계> 편의 정치는 어느 편이 더 나은가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5] 비록 병가이나 상앙법가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법가 사상가로도 분류되기도 한다.[6] 그럴만도 한게 여기서 말하는 진(秦)이란 바로 진시황제의 진나라를 의미한다. 이 당시 진나라는 강대국이라서 이 진나라랑 1:1 떠서 이긴 것 자체가 다른 제후국들에게 두려움을 줄 만하다. 안그래도 초나라는 전국시대 국력 랭킹 3위 내의 강대국이었다.[7] 예전에 오자서가 오나라 군사로 초나라를 개박살내고 오자서의 원수이자 도왕의 현조부인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구리채찍질을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왕위를 계승한 숙왕(肅王)이 부왕의 시신을 훼손한 무리를 용납할 리가 없었다. 동서고금 물론이고 왕의 시신에 훼손을 일으킨 사건은 얄쨜없이 극형이다.[8] 이게 바로 결국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와의 차이점이다. 상앙의 법가를 전적으로 지지해주면서 그의 훌륭한 국정파트너이기도 했던 진 효공이 죽고, 상앙에게 원한이 많은 효공의 아들 혜문왕과 상앙의 개혁에 반발한 구세력 귀족들에 의해 결국 상앙이 거열형에 처해져 죽임을 당했지만 혜문왕은 구세력 귀족들이 다시 옛법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물리치고, 상앙의 신법이야말로 백성들의 생활과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그대로 다시 채택했고, 이에 반발한 구세력 귀족들을 숙청하면서 상앙의 법치를 준수한 반면 초나라는 오기를 죽였고, 다시 오기 이전으로 돌려버렸다. 결국 이 차이로 인해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