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7-11-22 17:20:14

항우

초의 역대 군주
초의제(楚義帝)
웅심(熊心)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적(項籍)
초나라 멸망
파일:서초패왕 초상.jpg
왕호 서초패왕(西楚覇王)
묘호 없음
시호 없음
항(項)
적(籍)
우(羽)
고향 하상(下相)[1]
생몰년도 기원전 232년 3월 29일 ~ 기원전 202년
재위기간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2년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은통을 죽이고 거병하다2.3. 반(反) 진 전쟁2.4. 신안대학살과 함양 입성2.5. 서초패왕2.6. 초한전쟁
2.6.1. 제나라 공격2.6.2. 팽성대전2.6.3. 형양 함락2.6.4. 광무 대치2.6.5. 몰락의 길2.6.6. 사면초가패왕별희2.6.7. 패왕의 최후
2.6.7.1. 역사적 사실인가?
3. 평가
3.1. 군사적 능력3.2. 정치적 능력
3.2.1. 복고주의3.2.2. 학살
3.3. 인격의 흠점3.4. 인사상 실책3.5. 총평
4. 기타 이야깃거리5. 대중문화 속의 서초패왕 항우6. 관련 문서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서 8년이 되었다. 그 동안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조리 목을 베어 죽였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하였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2]

1. 개요

만인지적(萬人之敵) /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초(楚)나라의 군주로서, (漢)의 유방(劉邦)과 함께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다. 소위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로 표현되는 어마어마한 용력과 천부적인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중국 역사에서 손 꼽힐 정도였으며, 몇천 명의 병사로 수십만 대군을 패주시키는 등 기록만 보면 현실의 기록이 아니라 무협지의 묘사로 착각할 정도.[3] 사기는 고대 사료로서 물론 시대적 한계가 있으나 춘추필법(#) 이라는 고대에 보기 드문 사실만을 쓰겠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신뢰성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4]

이러한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초한쟁패기 당시에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를 압도하면서 사실상 중원 통일을 눈 앞에 두기까지 했다.[5] 그러나 이런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것의 반대급부로 군주로써의 능력은 바닥이었다. 충성스럽고 유능한 신하들을 잔뜩 두고서도 그들을 한직에 방치하거나 되려 의심하다 결국 상대편에 붙게 만드는 한심한 용인술은 물론, 초왕을 옹립하여 자신이 확보한 정통성을 제 발로 걷어차는 뻘짓과 불필요한 학살 및 약탈로 백성들의 민심이 완전히 떠나게 만드는 등, 온갖 삽질을 반복한 끝에 끝내는 판도를 잃고 몰락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진나라 말기와 초한 쟁패기를 통틀어 항우는 공성전 등을 제외한 야전에서 패배한 적은 해하전투 단 한 번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3배가 훨씬 넘는 규모의 적을 상대로 처음에는 밀어붙이고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결국 졌으니...

여하간 그 포스가 너무나 강렬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초한쟁패기의 무수한 영웅호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임과 동시에, 후대에 여러 이야깃거리의 소재가 되었던 인물. 그 높은 이름과 권력, 엄청난 용맹에다가 평생 동안 여자가 한 명밖에 없었다는 점 등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항우의 가문은 할아버지가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項燕)이었고, 그 집안인 항 씨는 항(項)[6]에 봉해져서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를 지낸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물론 항우가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조국이 멸망하고 난 후였다.

하지만 항우와 같이 살고 있던 작은아버지 항량(項梁)[7]은 오(吳) 땅에서 상당한 명망을 가진 지방의 유지였고, 오나라 땅에서 유명한 사대부들은 모두 그 밑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의 인맥이었으니 생활에 큰 부족함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항량은 이 조카를 위해 공부를 시켰는데, 항우는 글공부를 했지만 전혀 진전이 없어 때려치웠다. 그러자 이후에는 을 다루는 검술을 가르쳤지만, 항우는 여기에서도 끝을 보지 못했다. 끝도 못 본 검술로 그렇게 무쌍을 찍고 다니다니, 검술로 끝을 봤으면 이기어검도 날렸을 듯 이것도 안 한다, 저것도 안 한다고 하자 항량도 벌컥 화가 나 항우를 꾸짖었지만, 항우는 주눅이 들기는 커녕 이렇게 항변했다.
"글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할 뿐입니다. 검술 역시 한 사람과 싸워 지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둘 다 배우기는 충분치 못하니, 만인(萬人)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을 배우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항량은 조카가 큰 인물이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여 크게 기뻐하며 항우에게 병법을 가르쳤는데, 이에 항우는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공부를 하긴 했지만 대략 "이해했다"고 느끼자 또 지겨움을 느끼고 때려치웠다(...) 훗날 보여주는 전술을 넘어 전략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항우의 부족함은 이게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인내력이 약간만 더 있었으면 중원을 일통했을 듯 실제 손자병법에서 공심위상이라 하여 인심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항우는 인심을 버리기만 했다.

어느 날, 진시황(秦始皇)이 회계 땅으로 순수(巡狩)[8]를 하러 나와 절강(浙江)을 지날 때, 흔치 않은 구경거리라 항량도 항우를 데리고 나와 구경을 했다. 그때 구경하던 항우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해야지!"[9]

이 말을 들은 항량은 기겁하며 항우의 입을 틀어막고 "이놈아, 우리 다 목이 달아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라고 꾸짖었지만, 내심 속으로는 이 맹랑한 꼬마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항우는 나이가 자라면서 키가 8척을 넘었고[10] 힘도 장사라 큰 솥을 번쩍번쩍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오 땅의 자제들은 모두 항우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 외에 특이사항으로는, 사마천(司馬遷)은 항우는 눈동자가 두 개인 중동자(重瞳子)였다고 언급했다. 사실 양눈에 하나씩 도합 2개다[11] 그러면서 과거의 "임금도 눈동자가 두 개였다고 하는데, 혹시 항우는 순임금의 후예가 아닐까?" 라고 상상을 덧붙이기도 했다. 물론 그 다음에 (그렇게 잔인한 일을 했던 항우가) "어떻게 순임금의 후예이겠는가?"라는 식으로 넘어가긴 하지만.

참고로 중국 신화 속의 무신(武神) 치우도 눈이 넷이라는 전승이 있긴 있다. 어쩌면 치우나 항우 둘 중 하나에게 다른 한 쪽의 이미지가 덧씌워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2.2. 은통을 죽이고 거병하다

항우가 장성했을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BC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한 진승 · 오광의 난이 발발했고, 진승 등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진승과 오광이 거병한 지 두 달 정도 지난 9월, 회계 태수 은통(殷通)은 지방의 유력자였던 항량을 꼬드겨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항량은 여기서 더 나아가 오히려 항우를 시켜 은통을 죽여버리고 자신이 회계의 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항우의 공이 지대했는데, 항우는 은통의 목을 베었을 뿐 아니라 저항하는 군사들 백여명을 베어 죽여 은통의 남은 세력을 굴복시킨다.[12]

이후 항우는 비장(裨將)이 되어 아직 복종하지 않은 관하의 현(縣)들을 돌아다니면서 복종시켰다.

2.3. 반(反) 진 전쟁

이후 소평(召平)의 말을 들은 항량이 회계를 떠나 움직이기 시작하자 장수로서 종군했다. 항량의 여러 전쟁에 함께 참여했는데, 이 무렵의 독자적인 전투로는 별동대를 이끌고 양성(襄城)을 공격한 일이 있다. 그런데 외외로 항우는 이 전투에서 결사항전하는 양성 주민들 때문에 상당히 힘든 싸움을 했고, 그 분풀이로 양성이 함락되자 성 내 사람 5000여 명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죽였다. 어찌되었건 항우와 항량은 초나라를 부활시키고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장한(章邯)의 진나라 군대가 (魏)를 멸망시키고 (齊)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항량은 북상해서 장한과 교전을 벌여 승리했다. 그 직후 항우는 패공(沛公) 유방과 함께 별동대를 이끌게 하고 성양(城陽)을 공격하였는데, 훗날 두 사람의 사이를 생각하면 꽤 흥미로운 일이다. 별동대는 이후 여러 성을 함락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런데 정작 항량의 주력은 이후 장한이 심기일전하여 펼친 역습 때문에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고, 심지어 항량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항우와 유방은 일단 퇴각했다.

잠시 초나라가 숨을 돌리며 패전의 충격을 극복하는 사이, 항량을 죽이고 북상한 장한 때문에 조나라(趙)는 최악의 형세에 몰렸고, 조나라가 무너지면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될 수밖에 없기에 여러 제후들도 구원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초회왕은 송의(宋義)를 임명한 후에 항우는 차장(次將)으로 삼아 구원에 나서게 하였다.

그보다 앞서, 초회왕은 "먼저 관중(關中)에 입성하는 사람이 그 곳의 왕이 될 것이다" 라고 엄포를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장수들은 관중으로 향하는 건 꺼려하고 있었는데, 항우만은 항량이 살해된 일에 격분하여 서쪽으로 향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향하고 싶었던 항우가 조나라로 향한 것은 항우를 꺼려한 여러 늙은 장수들 때문이었다. 초회왕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항우는 심심하면 사람을 죽이니, 이 경우에는 유방을 보내 적당히 다독이는 편이 낫다면서 유방을 추천했던 것. 그 때문에 서쪽으로 향하는 것은 항우가 아닌 유방이 되었다.

그러나 송의에게 불만이 적지 않았던 항우는 출정하여 송의를 살해하고[13], 군사들을 탈취해서 자신의 지휘 아래 조나라로 진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경포, 포장군과 함께 왕리(王離)가 이끄는 진나라군을 격파하고 최강의 제후가 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항우는 장한을 항복시켜 사실상 진나라의 멸망을 결정지었고, 곧바로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2.4. 신안대학살과 함양 입성

그러나 이때 항우는 치명적인, 그리고 도저히 실드의 여지가 없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당시 20만에 이르는 진나라군의 포로들이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阳市)에 있는 신안(新安)에서 이들 모두를 생매장해 죽인 것이다. '모두' 라는 건 과장이 아니라 실제 항우의 발언이다.
"여전히 수가 많은 진나라 항졸들이 아직도 마음 속으로 우리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관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우리들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일이 매우 위험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그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죽이고 장한, 장사(長史) 사마흔, 도위(都尉) 동예(董翳) 등 세 사람만을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야 되겠다."
《사기》 항우본기 中

대학살 이후 다시 서쪽으로 진군한 항우는 함곡관(函谷關)에서 잠시 막혔으나, 유방이 함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경포를 시켜 함곡관을 뚫어버리고 관중에 들어와 희수(戱水) 서쪽에 주둔했다. 조무상(曹無傷)의 이야기를 들은 항우는 4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유방을 박살내버릴 생각이었으나, 항백(項伯) 때문에 일단 싸움을 멈추고 유방과 회담을 치루게 되었다.

파일:external/www.geocities.jp/KOUMONNOKAI008.gif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6px-Crystal_Clear_app_xmag.png 홍문연 문서 참조.

이 화담에서 범증(范增)은 유방을 죽여버릴 심산이었으나 항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유방을 죽이지 못한 항우는 함양에 입성해서 성 안의 백성들을 도륙하고, 항복한 진왕 자영을 죽였으며, 진나라의 궁궐에 불을 지르고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이후 항우는 관중에 남을 것을 충고하는 간의대부 한생의 반대도 물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관중을 버리고 말았다. 기가 막힌 그 한생이 항우를 일컬어 관을 쓴 원숭이 꼴이라고 조롱하자 그걸 듣고 그를 삶아서 죽였다.

2.5. 서초패왕

함양을 점령한 항우는 이후 초회왕을 의제(義帝)로 올렸는데, 이는 회왕을 공경한다기 보다는 자기가 초나라 왕이 되고 싶어서 행한 조치였다. 항우는 노골적으로 "의제는 아무런 공도 세운 게 없고, 진나라 멸망은 나랑 장수들이 다 한 일"이라고 발언하며 여러 제후들을 각지에 분봉했으며,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칭하고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삼게 되었다.

이후 걸리적거리는 의제는 장사(長沙)의 침현(郴縣)으로 옮겨가게 하여 대놓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였고, 그나마도 사람을 시켜[14] 의제를 장강 한가운데서 죽이고 만다. 대체 왜 선양을 받지 않은 건지 의문이다[15][16]

그리고 이 무렵에는 낭중(郎中)의 벼슬을 하고 있던 한신도 초나라군에 있었다. 한신은 이미 그때부터 항우에게 몇 차례 제안을 올렸지만 항우는 이 제안들을 철저하게 무시했고, 이에 상심한 한신은 유방의 진영으로 달아나 버렸다.패배 플래그

2.6. 초한전쟁

2.6.1. 제나라 공격

이러한 항우의 분봉 조치는 모든 제후들의 요구 조건을 맞춰주지 못했고, 특히 제나라의 전영(田榮)은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전담 일족이 재건한 제나라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건국 과정에서 진승의 장초나 항량의 초의 도움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다. 전담이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전사했을 때 항량이 자신을 도와줘 목숨을 건지고 본국으로 돌아가 실권을 잡을 수 있긴 했는데, 이후 전영에게 반대한 세력의 망명을 항량이 받아줘 전영과 항씨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그래서 사실 전영이 항우에게 불만이 있는 것 만큼이나 항우 역시 전영에게 불만이 있었다.

더구나 이 당시 제나라 국내 사정상 항우가 제나라를 전부 만족시켜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전담 일족의 제나라 재건은 완전하지 못했고, 제북군 일대에는 마지막 제나라 왕 전건의 손자 전안이 독자적인 세력을 일구고 있었다. 항우의 동맹군 중에는 전도(田都)라는 제나라 장수가 이끄는 제나라 군이 있었는데, 앞서 말했듯 항씨를 싫어하는 전영은 항우에게 군대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으나 전도는 전영에게 반기를 들고 조나라 구원에 나섰다. 전안과 전도는 이후 항우를 위해 공적을 세웠다. 전담이 죽었을 때 제나라에서는 전건의 아우 전가를 왕으로 세웠으나 전영이 전가를 내쫓았는데, 전가는 항량에게 망명해 초나라 신세를 지고 있었다.

즉 항우와 전영의 사이도 나쁜 데다, 전영에 반대하는 제나라 세력은 항우의 산하에서 항우를 위해 싸웠고, 이제는 그 콩고물을 받아먹을 때가 됐다고 여겼다. 항우는 전도를 제나라 왕으로 삼고 전영이 세운 허수아비 왕 전불에게는 제나라에서 교동나라를 쪼개어 주었다. 전안은 제북왕이 됐다.

그러나 전담 일족의 세력은 역시 제나라 최강이었다. 전영은 전도의 입국을 저지해 초나라로 내쫓았고, 전영에게 추대되었지만 겁을 먹은 전불은 도망치다 이를 눈치 챈 전영에게 잡혀 즉묵(卽墨)에서 살해당했다.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된 전영은 여기서 더 나아가 서쪽으로 진군해서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까지 살해하여 삼제(三齊)를 망라한 세력이 되었다.

여기서 멈추지도 않고 팽월(彭越)을 회유하여 양나라 땅에서 초나라를 흔들게 만들고, 비슷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진여(陳餘)[17]에게 군사를 주어 장이를 날려버리는 등, 항우가 세운 천하를 죄다 흔들어버리는 수준의 분탕질을 해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때마침 심기일전한 유방이 한신을 얻고 파촉의 험지를 넘어 삼진을 뚫고 나오는 참이었다. 항우는 일단 정창(鄭昌)을 한(鄭) 왕으로 삼아 유방을 막게 하고 소공각(蕭公角)을 파견해서 팽월을 상대하게 했으나 팽월에게 격파당하고, 이후 "유방이 그저 관중을 먹으려 할 뿐이지, 더 욕심은 없다"장량의 기만책에 속아 유방을 막지 않고 전영을 먼저 제압하기 위해 북진했다.[18]

결국 그렇게 제나라와 전쟁을 치루게 되었는데, 항우는 성양(城陽)에서 벌어진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전영을 완전히 박살내고 전영은 도망치다 평원(平原)에서 백성들에게 잡혀 죽었다. 이렇게 해서 전영 자체는 순식간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유방이 미친 듯이 동쪽으로 진군하고 있을 때 항우는 뜬금없이 북진을 계속하면서 제나라의 성곽과 가옥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항복한 전영의 군사들은 생매장을 하는 한편, 힘 없는 여자들이나 늙은이들을 밧줄로 묶어 포로로 삼았다.

이처럼 모든 것을 파괴하는 죽음의 행진은 북해(北海)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행진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마을들은 초나라군의 진격 루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몰살되었다. 항우가 이토록 엄청난 짓을 벌인 이유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데, 아마도 항량의 죽음을 제나라의 탓이라 여겨 저지른 앙갚음이었거나, 혹은 민초들의 공포심을 부추겨 더 이상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도에서 벌인 일이라면 항우의 행동은 완전한 삽질이었다.

항우의 이런 충격과 공포 수준의 만행을 목격한 제나라 사람들은 겁을 먹고 버로우를 타기는 커녕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은 심정으로 모여서 반기를 들며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죽은 전영의 동생인 전횡(田橫)은 여기에 도망친 제나라 군사 수 만 명을 수습해서 성양에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항우는 성양을 깨기 위해 수 차례 공격을 퍼부었으나 워낙 저항이 완강하여 도저히 함락이 되질 않았다.

2.6.2. 팽성대전

비수대전, 곤양대전과 더불어 소수의 군대로 대군을 격파한 대표적인 사례.

그 무렵, 삼진을 완전 평정한 유방은 관중을 지배 영역으로 확고하게 다지고 다섯 제후들을 모아 56만이라는 어마어마한 군세로 동진을 시작했다. 중간에 가로막는 제후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연합군의 압도적인 군세 앞에 모조리 박살이 나버렸고, 제후 연합군은 별다른 문제도 없이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을 장악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나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항우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성양의 공격을 맡긴 채, 단 3만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엄청난 속도로 남하,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고 그때부터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처럼 밞아 죽였다. 이때 양군의 전력차는 무려 19배 정도. 심지어 과장을 고려해 한군의 전력을 10분의 1로 줄여도 초나라군의 숫자 열세는 변함이 없다. 제후 연합군은 숫적으로 압도했지만 여러 제후들의 군대가 모여 통일된 체계가 아니었고, 그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 모랄빵을 먹자 제대로 반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다.

결국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여 명의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수수(睢水)에서 무참하게 살육당하여 10만여 명이 물귀신이 되었다.[19]

그러나 항우는 이 싸움에서 유방을 완전히 끝장내는 데 실패했다. 유방을 사로잡을 기회가 두 번 정도 있었으나 한 번은 모래폭풍 때문에, 또 한 번은 정공(丁公)이 유방을 보내주어 놓치고 만 것이다. 이후 유방은 주려후(周呂侯) 여택(呂澤)의 군세와 합류해서 전력을 추스리고 형양(滎陽)으로 이동했고, 때마침 소하가 미친 듯이 보급을 해주어 한숨을 넘기게 되었다. 초군은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후방에 도착한 한신이 이끄는 한군[20]에게 패배해 추격을 멈추어야 했다.

이 싸움이 항우의 엄청난 대승이라는 사실은 분명한데, 항우는 '팽성의 수복' 외에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하지는 못했다. 유방을 죽이거나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고, 한군은 형양을 기점으로 계속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고, 후방에 관중과 파촉이라는 확고한 근거지가 있어 그 세력이 건재했기 때문.

또한, 항우가 남쪽으로 돌아간 틈을 타 전횡은 초나라의 세력을 제나라 땅에서 대부분 몰아내고,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왕으로 추대하여 다시 한 번 제나라를 부활시켰다. 즉 제나라에서 벌인 그동안의 싸움이 거의 의미가 없게 되었던 것. 다만 이 싸움의 결과로 한군에 붙었던 여러 제후들을 다시 초나라의 세력으로 끌어올 수는 있었다.

2.6.3. 형양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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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유방은 형양을 중심으로 항우에 저항했고, 양 군은 주로 경(京)에서 교전을 벌였다. 팽성대전 이후 기세를 보자면 단박에라도 한군을 부숴버릴 수 있을 법한 초군이었지만 의외로 한군을 시원하게 몰아내지 못했고, 한군은 거의 1년 동안 형양에서 초군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초군이 한군의 군량을 끊어버리자 농성은 한계에 봉착했고 BC 204년 5월, 형양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다. 유방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항우에게 강화 요청을 하고, 형양의 이서 지역을 경계로 하여 초나라와 한나라의 국경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범증(范增)은 유방이 위험한 인물이니 강화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항우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더욱 강하게 형양을 공격했다.

이에 진평(陳平)은 항우의 고질적 문제였던 인색한 포상을 건드리는, 그간 그렇게 공을 세웠는데도 왕 자리는 커녕 봉토 한줌도 주지 않는 항우에게 불만을 품은 종리말, 계포, 용저, 범증 등이 유방과 내통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휘하 제장들과의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작전을 실행했는데, 항우가 이들에게 베풀어 다독이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안해하고 눈총을 주며 분위기가 무거워지던 중, 초나라의 사자가 오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는 뒤늦게 깜짝 놀라는 체하며 "어, 우린 범증의 사자가 온 줄 알았는데 항우의 사자구만?" 이런 소리를 하며 대접한 음식을 모조리 빼앗고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주었다. 그런데 항우는 이런 간단한 수작에 넘어가 범증을 의심했고, 격분한 범증은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도 않아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하지만 범증이 죽었다고 당장 성을 포위한 초나라 군사들과 항우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에 진평은 2천여 명의 여자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눈속임을 하고[21], 기신(紀信)이 스스로 유방 행세를 하여 성 밖으로 나가 초군에 항복하며 시선을 끄는 사이 유방은 그곳을 탈출했다.

속임수에 당한 것을 깨달은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이후 잠시 형양을 내버려 두고 팽월을 격파한 후, 다시 형양으로 돌아와 주가(周苛), 종공(樅公)이 지키는[22] 형양을 함락하고 주가를 팽형으로 죽였다.

형양과 성고를 함락시킨 항우는 완읍에 주둔한 유방을 쫓아갔지만, 유방은 버티며 방어만 할 뿐이었다. 항우가 유방에게 낚여서 시간이 끌리는 사이, 슬금슬금 초나라 지역으로 숨어들어간 팽월은 초나라의 동아(東阿)[23]를 공격해서 초나라의 장수 설공(薛公)을 죽여 초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급기야 수도인 팽성에까지 들이닥칠 기세로 움직였다. 이런 상황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항우가 팽월을 잡으러 떠나자마자 유방은 재빨리 나와 성고를 탈환하고 그곳에 주둔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돌아온 항우가 다시 공격을 가하자 유방은 성고가 함락되기 전에 하후영과 함께 도망쳐 한신의 군영으로 이동하여, 한신이 잠 자는 사이 강탈한(...) 군대로 다시 항우를 상대하려 했다. 하지만 그 사이 성고는 이미 함락되었고, 마침내 항우에게 거칠 것 없이 서쪽으로만 진격하면 지긋지긋한 유방과 한나라를 끝장낼 기회가 눈 앞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이 시점에 미쳐 날뛰는 팽월의 활약으로 항우는 절호의 기회를 잃고 만다. 유방이 항우와의 결전을 포기하는 대신 초나라 후방으로 잠입시킨 유가, 노관의 군대와 합류한 팽월은 작정하고 초나라 군대를 박살내며 무려 성 17개를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는데, 팽월이 입히는 피해가 워낙 막대하다보니 항우는 하필 조금만 더 나아가면 이기는 상황에서 팽월을 막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 항우가 대사마 조구에게 가만히 성만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으나, 팽월 덕에 구사일생한 유방이 오창의 곡식을 포기하는 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역이기의 간언을 받아들여 수비가 아닌 공격을 선택,[24] 조구를 욕설로 꼬여내어 쳐부순 뒤 성고를 다시 수복했고, 광무(廣武)[25]에 주둔하면서 오창(敖倉)의 양식을 확보, 장기전을 벌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26]

이렇게 기껏 잡은 승기가 멀어지는 사이 팽월을 잡으러 간 항우는 동쪽으로 나아가 진류(陳留)와 외황(外黃)을 공격했는데, 외황은 생각보다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외황이 함락되고 난 후 항우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성 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는데, 13살의 소년이 항우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팽월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여 외황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짐짓 항복한 척하고 대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오시더니 외항의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고 하십니다. 어찌 백성들이 대왕께 몸을 의탁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곳 외황 동쪽 양나라 땅의 10여 개 성은 모두 두려워하여 필사적으로 항거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그럴 법도 하다고 하여 죽이지 않고 그냥 항복을 받아들였는데, 이전에 사람들을 죽일 때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던 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 우리 항우가 달라졌어요 줄줄이 항복해왔다. 그러나 항우가 교훈을 얻기에는 일이 너무 늦어버렸다. 항우가 이러는 사이 유방이 조구를 죽였다는 소식이 들어갔고, 항우는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귀환했다.

2.6.4. 광무 대치

팽월을 물리친 항우는 다시 돌아와 수개월 동안 광무에서 주둔했지만 산 위에 틀어박힌 유방을 물리치기도 곤란했고, 또다시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팽월 때문에 항우는 골머리를 앓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판사판으로 항우는 큰 도마를 만들고, 그 위에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을 올려놓고 "항복하지 않으면 삶아서 죽이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상당히 막무가내 식의 작전인데, 당시 항우가 얼마나 초조해져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유방은 이런 충격과 공포 급 제안에 "우리가 예전의 의형제를 맺었는데, 지금 우리 아버지를 죽이면 너는 네 아버지를 스스로 죽이는 거다. 그래도 죽이려면, 아버지 요리한 국물 나한테도 한 사발 다오!"라고 더욱 충격적인 발언으로 응수, 항우는 격분하여 정말 태공을 죽이려고 하다가 항백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하지만 항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금 천하가 혼란한 건 우리 둘 때문인데, 차라리 우리가 맞짱 한 번 떠서 이 싸움을 끝내자"고 제안했다. 물론 항우와 대결할 생각이 전혀 없던 유방은 "난 힘이 아니라 지혜로써 싸우려고 한다"고 거절했고, 대신 누번(樓煩)이라는 활 잘 쏘는 인물이 나서 초나라의 장수를 쏘아 죽였다.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완전무장을 하고 누번에게 달려들었고, 누번은 항우에게 활을 쏘려고 하다가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 소리에 식겁하고 그대로 한군의 진영으로 도망쳐 와 버렸다. 유방은 튀어나온 장수가 항우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항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나가 유방에게 말을 걸었고, 유방 역시 항우와 마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유방은 항우가 지금까지 저지른 10가지의 죄목을 열거하며 항우를 비판했다.
"하나, 팽성에서의 약속을 위반했다. 당초에 초회왕과 제후들이 먼저 관중에 입성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될 것이라 서로 굳게 약속하였지만 스스로의 욕심으로 이러한 제후들과 회왕의 맹약을 묵살하고 최초로 관중에 진입한 자신을 협박하여 파촉으로 쫓아버렸다."

"둘, 주군인 초회왕이 직접 임명한 송의를 왕명을 사칭하여 살해함으로써 상전에 칼을 들이밀었고 초회왕과 그의 군신들의 위엄을 무너뜨림으로서 그들이 이를 갈게 만들었다."

"셋, 초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폭행과 노략질을 하지 말 것을 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살로 함양성을 피로 물들이고 아방궁을 불살라 파괴만을 일삼으며 시황의 능묘를 파헤쳐 진나라의 보물을 착복하고 죽은 자마저 모독했다."

"넷, 대의에 따라 명을 받고 조나라를 구원하였으나 스스로의 욕심으로 마땅히 그 결과를 회왕에게 보고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지 않고 제후들을 협박해 관내로 들어갔다."

"다섯, 진왕 자영이 이미 투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멋대로 죽여버렸다."

"여섯, 투항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속여 신안 경내에서 하룻밤 사이에 이들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어 유례없는 대학살을 벌이고 그들의 장수인 장한과 사마흔을 보란 듯이 왕에 봉하니 진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자아내게 했다."

"일곱,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사사로이 좋은 땅을 주고 왕에 봉하며, 공이 있음에도 아랫사람들을 농락하며 유배지를 주었다. 원래의 제후들은 벽지로 내쫓아버리고 그들의 장수들은 중요한 땅의 왕으로 삼아버리니 군신의 법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지역의 신하들이 앞다투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덟, 진의 도읍을 불태운 후 자신의 마음대로 팽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에 초회왕을 의제로 지칭하며 끌고 와 감금하였다. 한왕의 봉지를 빼앗고 양나라와 초나라 땅을 마음대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아홉, 의로서 우리 모두가 초회왕을 섬기기로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성품으로 결국 강남에서 의제를 살해해버리고 그 시체를 장강에 처넣으니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칠 지경이다."

"열,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치를 함에 공정함이 없고, 약속을 초개처럼 버렸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 이미 항복한 자를 죽였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신의를 저버리니 이야말로 천하가 용납하지 않는 대역무도함이다."

"나는 정의로운 제후들과 함께 한낱 도적놈을 토벌하려는 것 뿐이니, 너 따위는 내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죄지어 군역을 하는 천한 자들만으로도 충분하다!"

더이상 참지 못한 항우는 미리 숨겨놓은 쇠뇌를 쏴서 유방을 맞춰버렸다. 하지만 가슴팍에 화살을 맞은 유방은 또 다시 한술 더 떠 "저 도둑놈이 내 발가락을 맞추네!"라고 능청을 떨며 달아났다. 당연히 쇠뇌에 가슴을 맞았으니 유방의 부상이 가볍지는 않았지만 허세를 부려서 무마한 것. 이 때가 항우가 승리할 수 있었던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괴상한 제안과 기습은, 역으로 당시 항우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항우는 어떻게든 기책으로 난국을 돌파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때, 항우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2.6.5. 몰락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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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바로 한신의 북벌이 거의 완수 직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유방이 항우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사이 한신은 위, 대, 조, 연나라를 모두 평정하고 이제 제나라마저 평정 직전에 놓였다.

그나마 항우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오긴 했다. 언변으로 제나라를 복속시킨 역이기를 시기한 한신이 동맹 성사 직전에 괜한 공격을 한 덕에, 뒤통수를 맞은 제나라 잔존 세력이 크게 분노하여 원수 항우와 손을 잡는 강수를 택한 것. 이에 응한 항우는 용저(龍且)에게 20만이라는 대군을 주어 한신을 막게 했으나 지가 직접 갈 것이지[27] 한신은 오히려 유수전투에서 용저가 이끄는 제, 초 연합군을 격파하고 용저를 참살하였다. 이로서 화북의 대부분이 한신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한신은 사실상 항우, 유방과 맞먹는 거대한 세력권을 가지게 되었다.

항우는 이 때문에 두려워 하면서 수하의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설득하게 했지만, 한신은 "항우 그 인간이 날 어떻게 대접했냐? 유방은 밥 주고 옷 주고 장군 시켜주고 다해줬는데 이제 와서 날 개차반 취급한 항우의 편을 하라고?"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며 거절해 버렸다.

2.6.6. 사면초가패왕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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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는 유방의 세력이 건재하고, 북방은 한신이 모조리 평정해버린 상황. 게다가 경포 역시 유방의 편을 들고 있고 후방에서는 팽월이 계속해서 날뛰고 있었다. 이렇다 할 패전도 없이 항우는 최악의 형세에 놓이고 말았는데, 한군은 오창의 보급을 통해 군량이 풍부한 반면 초군은 저 지독한 팽월 때문에 보급도 충분하지 못했다.

이때 유방은 후공(侯公)을 보내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 서쪽은 한나라의 영토로 하고 동쪽은 초나라의 영토로 하자는 협약을 맺자고 했다. 형양 포위 때는 이러한 제안을 거절했던 항우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선 결국 어쩔 수 없이 제안을 승낙했고, 사로잡았던 태공과 여후를 보내주었다. 협약을 맺은 후 항우는 자신에게 아직까지 협력을 했던 제후들의 군사를 해산하고 팽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유방 역시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장량진평은 그런 유방을 만류했다.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끝장 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 것. 이 말을 들은 유방은 다시 군사를 모아 돌아가는 항우를 기습하였지만, 고릉(固陵)[28]에서 항우의 군대에게 패하고 말았다.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하고,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오면서,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결국 이 마지막 해하전투에서 항우는 패배하였고, 이윽고 한군은 초나라 군을 포위하고는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를 불렀다. 패배에 상심해 있던 항우는 이 노랫소리를 듣자 크게 놀라워했다.
"한군이 이미 초나라의 모든 땅을 점령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이렇듯 그 수효가 많단 말인가?"

마음이 복잡해진 항우는 밤 중에 술을 마시면서 슬픔에 젖어 노래를 불렀다.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지만
역발산혜기개세
時不利兮骓不逝 시세가 불리하니 추[29]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시불리혜추불서
骓不逝兮可奈何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추불서혜가나하
虞兮虞兮奈若何 우희여, 우희여! 너를 어찌해야 하는가.
우혜우혜내약하

이 노래를 듣고, 항우가 사랑하여 항상 데리고 다니던 우미인도 답가를 불렀다.
漢兵己略地 한나라의 병사가 이미 (초나라의)땅을 차지하였고
한병기략지
四面楚歌聲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사면초가성
大王義氣盡 대왕의 의기가 다 하였으니
대왕의기진
賤妾何聊生 천첩이 살아 무엇하리오
천첩하료생

결국 그 패왕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항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노래를 부른 후 우미인이 자결했다거나 항우가 죽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사기 등의 사서에서는 이후 우미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물론 항우의 연인이었던만큼 뒤끝이 영 좋지 않았거나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자결했거나 항우가 죽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아무튼 워낙 극적인 장면이라서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각색된 경극장국영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한 패왕별희다.

2.6.7. 패왕의 최후

항우는 그 날 밤으로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를 수 있는 병사 800여명을 이끌고 한군의 포위망을 뚫었고, 날이 밝은 뒤에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방은 관영(灌嬰)을 시켜 5천여 기병으로 항우를 추격했고, 항우가 회수를 건넜을 때는 남은 수하가 겨우 100여 명밖에 없던 형편이었다. 이윽고 항우는 음릉(陰陵)[30]에 이르렀는데, 길을 잃어버린 항우는 밭을 가는 노인에게 길을 물어 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일부러 길을 속여 왼쪽이라고 거짓 정보를 알려주었고, 항우는 결국 늪지대로 접어들어 한군의 추격군과 조우하고 말았다. 항우가 천신만고 끝에 동쪽으로 길을 뚫어 동성(東城)에 이를 무렵에는[31], 수하의 병사가 고작 28명에 이를 뿐이었다. 그리고 한군의 추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추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긴 항우는 그때까지 자신을 따르고 있던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32]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서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었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희들로 하여금 알게 해주겠다."

그리고는 남은 기병들을 4방향으로 달려나가게 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한나라 장수의 목을 베겠다!"

이윽고 항우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고, 그 모습을 본 한나라 군사들은 모두 엎드려 버렸다. 결국 항우는 한나라 장수 한 명의 목을 베었는데, 마침 항우를 추격하던 적천후(赤泉侯) 양희(楊喜)는 항우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질책하자 양희와 양희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서 몇 리를 달아나 버렸다. 패기 과연 패왕

항우와 그 기병들이 다시 모일 무렵, 또다시 한군은 포위하여 왔다. 그러자 항우는 말을 달려 한나라 도위 한 명을 죽이고 수십에서 백여 명에 이르는 병사들을 죽이고는 기병들을 다시 모으니, 두 명만이 전사했을 뿐이었다. 항우는 기병들에게 물었다.
"어떠한가?"

병사들은 모두 엎드려서 말했다.
"대왕의 말씀이 맞습니다."

항우는 계속 도망쳐서 오강(烏江)에 이르렀는데, 오강의 정장(亭長)[33]은 배를 타고 기다리다가 항우에게 말했다.
"강동(江東)의 땅은 비록 협소하다고 하나 사방 천리에 달하고, 백성들의 숫자는 수십 만에 이르고 있어 가히 그곳을 다스릴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속히 배에 오르시어 강을 건너시기 바랍니다. 이 강 안에는 오직 이 배밖에 없어, 비록 한군이 쫓아오더라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항우는 웃으면서 거절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강을 건너서 무엇하겠는가? 또한 옛날 내가 저곳 강동의 자제 8천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왔다가 모두 전사하고 오늘 단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 준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비록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항우 혼자만 부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가지고 있던 오추마를 정장에게 주었다.
"나는 그대가 장자(長者)임을 알겠다. 나는 이 말을 5년 동안 타고 다니면서 이르는 곳에는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었다. 내가 차마 죽일 수 없어 그대에게 이 말을 맡기겠다."[34]

사기와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항우는 말도 없이 한군과 정말 최후의 싸움을 벌였는데, 항우 혼자 수백여 명의 한군을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항우도 몸에 열 군데가 넘는 상처를 입었는데, 항우는 문득 여마동(呂馬童)을 발견하고 "너는 내 부하였던 녀석이 아니냐?"고 물었다. 여마동은 차마 대꾸하기가 겸연쩍었는지 옆에 있던 왕예(王翳)에게 "저 사람이 항우가 맞다"며 딴청을 부렸고, 항우는 그런 여마동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 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겠노라."

그리고는 자살해버렸다. 천하무적의 항우가 이렇게 죽자 왕예는 그 목을 베어 가졌고, 뒤이어 수십여 명의 기병들이 서로 항우의 몸을 밟는 난리통 끝에 자기들끼리도 죽이면서 항우의 시체를 마구 찢어발겼고 병림픽 잘 한다 결국 양희, 여승, 양무, 여마동이 남은 시체 조각을 하나씩 취하고 상을 받았다. 이후 그 시체를 한 번 조립해서 맞춰보자 딱 맞아 떨어졌으므로 5명은 모두 책봉되어 열후가 되었다. 고조공신후자연표을 보자면 고조공신열후 143인 중 양무가 서열 94위, 여마동이 서열 101위, 항우의 머리를 가져간 왕예가 서열 102위, 양희가 서열 103위, 여승이 서열 104위가 되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젊은 패왕은 30세의 나이에 이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이제 천하의 주인은 유방이 되었다.
2.6.7.1. 역사적 사실인가?
항우의 이 마지막 장면이 단순한 설화인 게 아닐까? 하고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야사가 아니라 사기와 자치통감이라는 정식 역사서에 분명하게 나오는 기록이기는 하지만, 정작 사기에서는 그 다음에 항우가 동성에서 죽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성에 도착한 이후 오강으로 갔다는 기록과 모순이 된다. 또한 동성에서 28기만이 남아있었다는 기록과는 달리 사기 관영전에서는 동성, 역양에서 초나라 장병 1만 2천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링크.

사실 위의 링크에 달린 많은 질문에 무리수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동성에서 28기만이 남아있었다는 구절은 지휘 체계의 붕괴로 얘기해도 들어맞는다. 12000명의 지휘 체계가 유지되었다면 관영의 5000철기는 되려 잡아먹힐 뿐이다. 동성, 역양 인근에서 12000명의 지휘 체계가 무너진 패잔병을 잡았다고 봐야 한다. 28기 이후 바로 오강으로 날아가며 구성이 듬성해지는 것은 여기까지 28기에서 사로잡은 인원의 진술을 바탕으로 쓰였으며, 이후 항우 이외의 인원의 이탈과 죽음 등으로 쓸 만한 기록이 남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오강의 이야기는 오강, 정장 등을 비롯해서 전해지는 민간설화일 테지만, 사마천 생각으론 여러 이야기가 나름대로 아귀가 맞아서 쓰일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블로그에서 항우가 우희의 목을 말 안장에 걸고 싸웠다는 둥 다른 여러 민간설화들을 제치고 쓰여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링크에서 설명하는, 몇 가지 무시하기 어려운 근거들이 있다.
  • 위에도 언급된 대로 사기의 항우에 대한 총평에서는 "5년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에서 죽었다" 고 기술한다. 또한 사기의 고조본기에서도 관영을 보내어 항우를 동성에서 추살했다고 기술한다.
  • 한서의 고제기와 관영전에서도 관영이 장졸 5명과 함께 항우를 동성에서 참했다고 서술한다.
  • 한서 고후문공신표제에서 5명의 공적이 항우를 참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체를 얻었다는 것과는 명백히 다르다.

물론 사기에서 항우의 죽음에 대해 서술한 것도 정사인 것은 분명하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3. 평가

"항적과 같은 이는 이를 가질 수 없었다. 범증을 얻고도 쓸 수 없었고, 진평을 얻고도 쓸 수 없었고, 한신을 얻고도 쓸 수 없어, 모두 원망하여 엎어져서 버리고 떠나게 했고, 단지 필부의 하찮은 용기로, 도전하는 중에 자웅을 가리고자 해, 힘과 세력이 곤궁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장차 달려나가 한의 장수 한 두 명을 죽여, 사지에 할 힘이 있음을 보였으니, 이것이 초가 천하를 잃은 까닭이다. 그런즉 항적이 망할 때, 또한 어찌 천하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범준(范浚)의 향계집(香溪集)

항우는 한때 천하의 주인이었으며, 그 위세는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최후는 대단히 비참했는데, 사실 이는 자업자득에 가까웠다. 결국 패배자가 된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체 왜 졌는가?"를 따져보는 작업이 될 텐데, 항우는 패배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조조, 아돌프 히틀러의 전생과 같은 인물.

3.1. 군사적 능력

초한지 세계관 최강자.압도적인 무력을 겸비한 무신
일신의 무공은 물론이고 뛰어난 지휘력과 통솔력을 모두 갖춘, 장수로서는 완전체

'야전 지휘관 항우'를 얕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록대전, 전영을 물리친 전투, 팽성대전, 고릉에서의 싸움, 심지어 마지막 해하전투조차도 측면부대가 움직이기 전까지 항우는 한군을 몰아붙였다.[35] 전술적 영역에서 그는 당대 최고의 지휘관이었으며, 수천 년 역사를 지닌 중국 역사에서도 단기간에 항우만큼 무지막지한 전공을 쌓아올린 인물은 드물다.

또한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군사적 영역에만 한정했을 때에는 전략적 안목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거록대전에서 적의 보급을 끊거나 한신보다도 먼저 병법에서 배수의 원리를 응용하는 등,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다른 장수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심지어 저돌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전략적 후퇴 판단 역시 완벽에 가까운 수준이다. 수도 팽성이 점령당하자 지체 없이 원정군에서 정예만 추려서 구원군을 편성하고, 후방에서 편성한 전력을 거의 손실하지 않고 팽성으로 왔다는 것 사실만으로 항우의 전략적·전술적 능력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다. 특이하게 중국사에 흔하지 않은 기동전 스타일의 지휘관인데, 수수대전을 보면 먼거리를 신속하게 달려와서 분산된 적을 기습해서 각개격파하는 전술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동성을 이용해서 적의 취약한 지점을 찔러 돌파한 뒤 그 여파로 혼란에 빠진 적을 분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나라 원정이나 유방과 대치 상황에서도 최전선과 후방을 오가며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면, 야전 지휘관으로써 그 능력은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

물론 당시는 형편 없는 수준의 농민군이 태반이라, 한 번 군사를 모으면 수만은 기본이고 심하면 깃발 좀 세우면 수십만에 이르며, 마찬가지로 이런 부대는 조금이라도 패색이 짙어지면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지며 탈주하는 수준[36]의 병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날려버린 병사들의 숫자는 조금 시대상을 감안해서 봐야 할 측면도 있긴 하다. 하지만 항우의 병력 대다수 역시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 조건은 비슷한 셈이다. 물론 항우의 부대 중에는 처음 거병을 했을 때부터 항우를 따르며 거록대전을 거쳐 제나라 전역 등을 거친 정예 병력도 있었을 테지만, 그 숫자는 8천여명 정도로 전투의 향방을 절대적으로 결정할 수준의 규모는 아니었다.

이상과 같이 항우의 전술적 판단력과 전투 지휘 능력은 기나긴 중국 전사(戰史)에서도 그 맞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전쟁, 그것도 초한대전만큼 규모가 큰 전쟁의 승패는 단순히 전투에서 몇 번을 승리했는지 그 횟수를 합산해서 승패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초한대전 전체에 걸쳐 항우의 활약을 보면 분명히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국력과 지속적인 전쟁 수행력에 이익을 가져오지 못하거나 도리어 손해를 보게 되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전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정략적 판단에서는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었다. 전영과 같이 분봉 문제로 괜히 척을 져서 싸우지 않아도 될 세력을 적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잠재적인 적들을 줄인답시고 민초들을 학살하고 다닌 끝에 민심을 크게 잃은 것, 아군을 늘려도 모자랄 판에 항우의 질투심과 의심에 질려버린 천하의 인재들이 줄줄이 적인 유방 측에 붙어버리게 만드는 등, 항우가 초한대전 내내 보여주는 행보는 과연 그에게 대전략이라는 개념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다. 정치적 능력과 연계된 전략적 개념에서 항우는 어이가 상실할 정도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라이벌인 유방이 스스로는 항우를 맞서 지구전을 펼치고, 한신을 보내 북방을 평정하고 여러 제후들을 하나하나 끌어모아 소모전으로 항우의 전쟁 수행 능력 쪽을 고갈시킨다는, 시대를 한참 앞서간 총력전 개념을 실행한 것에 비하면[37] 항우는 일단 눈 앞에 적이 있다면 때려 부수고 보자는 정도. 실제로 항우는 광무대치 상황에서 눈 앞의 상대인 유방에게만 집중하느라 별동대를 이끌고 하북을 평정하고 있던 한신을 전혀 제지하지 못했다.[38]

물론 이는 유방이 의외로 잘 버틴 탓도 있지만, 항우는 막판 용저에게 20만 대군을 맡겨 한신을 상대하도록 했다. 번개처럼 일을 처리한 한신의 솜씨와 그 시대의 조악한 연락 수준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유방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20만이라는 대군을 별도로 꾸릴 여력이 있었다면 이미 한신이 조, 연, 제나라를 모조리 평정해버린 시점이 아니라 조금 더 일찍 견제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적어도 용저가 대패하고 참살당하고 난 뒤에도, 항우는 유방을 야전에서 격파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은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유방이 관중과 파촉에서의 지원은 물론, 형양 북쪽의 오창(敖倉)을 일찌감치 확보해서 군량 문제의 곤경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반면에 항우는 끝까지 보급으로 발목을 잡혔고, 팽월의 원맨쇼도 제어하지 못했다. 항우는 여러 차례 팽월을 격파했으나 결국 끝까지 팽월의 뿌리를 뽑아내지 못했다. 팽월과 유방의 기각지세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모습은 애처로울 지경.

결과적으로 항우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끈 전술적 차원의 싸움에서는 해하 전투 이전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항우 개인의 승리였을 뿐이고, 전략적으론 이겼다곤 해도 쓰러뜨리지는 못한 실속 없는 승리였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초나라라는 국가총력전에서 뒤떨어지고 항우가 없는 곳에선 패배만을 거듭하며 피해가 누적된 끝에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분명히 전술적 차원에서는 천재가 맞으나, 그것을 넘어선 전략적 개념은 전무한 지휘관. 최고의 야전 사령관이 전역을 총괄하는 지휘관이 된 것이다. 만슈타인 이러한 전략적 개념이라는 것이 결국 정치적인 부분을 총괄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항우의 정치가로서의 능력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항우의 정치적인 능력은 어떠하였을까?

3.2. 정치적 능력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 있을지언정 다스릴 수는 없다고 하는데 항우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지도 못하였다. 세계사의 사례들을 봤을 때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던 누군가의 말이 절대 빈말이 아니다.

전사로서는 가히 하늘이 내린 신장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냥 초나라 원숭이였다. 농담으로라도 항우는 군왕의 재목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이는 항우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사방에 적 만들기와 대학살 매니아. 중국에 강림한 코른의 츄즌 워리어 적을 쓰러뜨리는 것도 잘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적을 만들어서 제 무덤을 파는 사나이.

정말로 아군도 죽이거나 적으로 만들었다. 정상적인 마인드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도 많이 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서 항우에 대한 지나친 폄하와 날조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았다면 적의 기록에서도 그렇게까지 이겼는데 사람들이 떠나가고 세력이 계속 축소되어 패배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나치 독일의 경우처럼, 전술적이나 개인적인 용맹 면에서는 뛰어난 지휘관이었지만 정치적인 능력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다. [39] 유일하게 잘했다고 평가받는 건 옛 초 왕실의 의제를 옹립한 것인데, 그 의제가 자신을 깐다는 이유로 죽여서 자기 발판을 무너뜨린 작자가 항우다.[40]

심지어 성 안의 사람들이 항복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그냥 다 죽여버리는가 하면, 주요 지역만 가지고 있으면 자연히 손에 들어오는 지역에까지 굳이 직접 납셔서 주민들을 학살했던 항우의 행적으로 볼 때,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면 자연스럽게 항우를 따르는 사람들만 남게 될 거라는 사고를 지니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베스트셀러 소설이자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한국에도 인지도가 있는 대진제국(大秦帝國)의 저자 손호휘(孫皓暉)는 학살 사례를 보고 화들짝 놀라 "어이쿠, 이런 놈이 영웅 취급을 받다니!" 하고 노골적으로 까기도 했다. 항우의 정치적 혜안의 부재를 넘어선 정치적 만행을 언급하며 항우와 항우를 별 생각 없이 영웅처럼 다루는 후세의 대중매체나 민중 문학가, 아마추어 역사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그의 평가는 상당히 정확하게 항우의 실책을 언급하고 있어 상당히 인용할 만하다.

항우의 정치 전략을 평가하며 6가지 광(狂)으로 그를 평가하는 손호휘의 평가를 차례대로 보면,
  1. 복벽광 (復辟狂). 즉 개혁적인 측면이 전혀 없는 수구 꼴통으로,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긴 했지만 통일 중국이라는 긍정적 신체제를 처음으로 제시하기도 했던 진시황의 제국을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없이 일거에 무너뜨리고,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중국을 전국시대의 혼란으로 몰아넣은 막연한 회고론자일 뿐이었다는 얘기. 반면에 유방측은 진나라가 어떠한 이유로 민심을 잃었는지를 포착하고 약법삼장 같은 것을 내세우기도 하면서 진나라의 긍정적인 부분인 통일 중국을 달성하였다.[41]
  2. 혹형광 (酷刑狂), 즉 불필요할 정도로 잔혹한 형벌을 즐겨 사용하는 새디스트 변태였다. 허구헌 날 사람을 삶고 쳐죽이고 파묻어 죽이는 등 자기 맘에 안 드는 사람에게는 잔인한 형벌을 아무 이득도 없이 일삼았다. 자신을 위해 관중을 도읍으로 하라고 충고한 사람이 욕했다고 하여 삶아죽이고, 형양을 함락한 후 주가가 '너는 나의 주군인 한왕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자 삶아죽였다. 왕릉의 어머니도 삶겼고, 유방 또한 아버지인 태공이 눈 앞에서 솥에 내걸려 삶길 뻔 했다. 어떤 이득을 생각했거나 정치적 고려가 있어서 형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그냥 화풀이 삼아 마구 삶아댔다.찜 페티쉬라도 있는듯
  3. 살해광 (殺害狂), 인명을 경시하는 살인마라는 뜻이다. 상관인 송의를 의견 다툼으로 죽이고, 20만의 진 장병을 죽이고, 함양의 민중을 학살하고, 항복한 진의 자영을 죽이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군주인 의제까지 죽였다.그 말로조차 심지어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자살.
  4. 훼멸광 (毁滅狂), 훈족 같은 파괴마라는 뜻. 항우가 무엇을 건설했다는 말은 거의 없고, 가는 데마다 도시와 궁궐을 파괴하고 부수었다는 말밖에 없다. 특히 함양에 대해서는 인명은 물론이고 사회 인프라나 민간 가옥까지 잔인하게 파괴했다고 전한다. 심지어 분서갱유보다도 항우가 태워버린 책이 더 많다고 할 정도다.
  5. 도묘광 (盜墓狂), 도굴꾼이라는 뜻. 진시황릉을 파헤치고 모욕을 주며 보화를 다 빼내 가는 추잡한 짓을 저질렀다고 까인다. 유교적 전통이 있는 중국에서 상대의 무덤을 어지럽히는 것은 최악의 모욕으로 인식되었으며, 심지어 춘추전국시대 때 초나라 평왕에게 부모형제를 잃은 오자서가 후에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마구 채찍으로 때렸던 경우처럼 나름 명분이 있던 경우도 결코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다. 복수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중국에서도 저런 고인드립은 정당화가 안 되는 것이었으며, 진시황의 무덤을 파헤친 항우의 행위는 그야말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짓.
  6. 겁략광 (劫掠狂), 약탈자라는 뜻. 항우의 군대는 가는 데마다 약탈과 강간, 파괴를 일삼는 등 기본적으로 민중에 대한 존중이나 대의, 엄정한 군율이 없었다는 뜻이다.

재앙 그 자체다. ' 위에서는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말 위에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의 사례인데 공교롭게도 이 유명한 말 자체가 육가(陸賈)라는 인물이 학문을 무시하는 유방에게 했던 말이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이내 자신의 좁은 식견에 겸연쩍음을 느끼고는 반성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정작 저 충고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항우가 저 말을 들었더라면 당장 육가의 몸뚱아리 역시 깨끗하게 끓인 솥 안으로 처넣어졌을 것이다. 위 평가가 어느 정도 현대적 문명인, 그 중에서도 공산주의적인 관점에서 서술된 면이 있지만, 항우는 이미 당대에도 원숭이 소리나 들으면 들었지 좋은 평가는 못 들었다.

그야말로 거시적인 안목이 전혀 없는 인물로, 전략적인 이점의 설명을 듣고도 관중을 버리고 '고향에 자랑하기 위해' 되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항우가 취한 행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또한 관리가 힘들다는 이유로 20만의 포로를 묻어버리고, 함양에 입성해서 진왕 자영을 죽이고 대학살을 자행하는 모습, 그리고 이후 제후들을 분봉하는 모습은 항우의 국가관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자신의 오른팔, 왼팔인 인물들도 믿지 못했다. 그걸 아주 철저하게 이용한 게 진평인데, 진평은 고작 사신에게 대하는 밥상 하나만 갖고 항우와 범증을 이간질시켜 항우를 몰락의 구렁텅이로 던져넣는 데 성공했다. 항우의 전투 지휘력과는 대조되게 허무할 정도로 쉽게 계략에 빠져 최고의 책사를 잃었다. 자세한 사항은 진평 문서 참조.[42]

이런 모습을 보면 항우는 '천하를 아우른다' 는 의미보다는 마치 전국시대의 개념으로 진나라를 대했다. 타국을 정복하고 '외국인'을 학살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본래 관중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던 강소성 출신 유방이 관중의 사람들을 위로해서 인심을 후하게 산 부분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부분.[43] 이후 이어지는 분봉 조치도 마찬가지다. 이때의 모습으로 보면 항우는 중국통일이라는 개념에 대해 아예 이해를 못하거나 혹은 조국을 멸망시킨 진나라 때문에 군현제 등에 극도의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또한 항우는 항상 자신이 최고인 양 생각하고 뭐든 자신 혼자만의 생각 위주로만 다 하려는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면모가 강했다.

초회왕, 즉 의제를 대하는 항우의 태도에서도 그 정치력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데, 훗날 위 태조실권은 없지만 자신에게 명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군주를 어떻게 다뤘는지만 봐도 항우의 선택은 모범 답안과 한참 거리가 동떨어진 한심한 수준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의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양치기 신분으로 그 출신이 의심스럽다 해도 자신의 숙부인 항량이 직접 찾아 모셔오며 초나라 왕으로 받들면서 정통성을 확보한 인물이었고, 항우가 의도적으로 의제를 배제하고 분봉을 통해 각지로 흩어버리기 전까지 초회왕 밑에서 항우와 함께 싸운 군웅들은 그 속내가 어떠했건 간에 명목상으로는 회왕(의제)의 신하들이었다. 거기다 항우의 견제로 의제는 제대로 권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항우의 뜻에 휘둘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라 굳이 암살해야 할 힘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의의를 굳이 찾자면 항량 사후 항우와 척을 진 것에 대한 분풀이 뿐이었다. 이후 삼국지의 조조에게 예속힌 헌제가 400년 통일왕조의 정통성을 잇고 있던 것에 비해 의제의 존재감이 미약한 측면은 있었다곤 해도 의제를 살해한 건 엄연한 반역행위였으며, 그전의 항우와의 친분을 따라서 이루어진 분봉 책정도 합쳐서 기존의 도리와 위계질서를 완전히 붕괴시킴으로써 말 그대로 군사만 많이 모아서 깃발을 내걸면 어떤 인간이든 왕을 칭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난세를 열었다.[44] 항우 사후 반란을 일으켜 유방과 대치한 영포가 당당하게 나도 황제 한번 해보려고 반란했다!라고[45] 유방에게 일갈할 정도로 초한전쟁에 이르러선 명분이란 것의 가치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고, 이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누구보다도 정치적 입지에서 앞서있었던 항우였다.[46]

의심 가는 신하를 숙청하는 방식 또한 세련되지 못했는데,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한 마당에 굳이 초회왕의 약속을 형식상으로나마 지키겠다며 유방을 한중의 왕으로 봉하거나[47], 진평의 이간질 작전에 흔들렸을 땐 범증을 바로 실각시키거나 하다못해 구금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야금야금 자잘한 권한만 빼앗는 등 소심하고 이도저도 아닌 대응을 취하곤 했다. 범증의 경우 바로 출사표를 내고 떠났으니 망정이지, 아예 항우와 대립각을 세워 다투었다면 다른 장수들과의 사이까지 엉망이 되고[48] 그 시점에서 초나라 진영은 말 그대로 개판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항복하려는 진나라 군사들을 인정도 없이 다 죽여버린 신안대학살 역시 최악의 행보였다. 이 때문에 항우에 대한 평판이 급속도로 나빠졌음과 동시에 비록 전쟁은 전투머신급의 활약을 보였으나 되려 이기면 이길수록 점점 불리해지는 희한한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항복한 병력들을 데리고 있기 부담스러우면 무장 해제를 한 후 변방으로 내쫓아버리면 그만인데 항우는 모조리 죽여버리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항우의 패배는 한(漢)민족, 오늘날의 중국인들에게는 그만큼 큰 다행인 것이다.

이쯤되면 항우도 적이 막장인 호해라서 2년만에 진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어서 망정이지, 부소나 적어도 조금만 정상적이라 진나라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만한 왕족이 황제로 즉위했다면, 함곡관을 못넘고 몇년만 대치했어도 내분으로 자멸했을 가능성이 크다.[49]

3.2.1. 복고주의

이러한 모습을 항우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항우가 가진 세력로 문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스스로가 초나라 귀족의 후예이자 초나라 땅에서 거병하여 그 세력이 주축이 된 항우로서는 초나라 땅이 아닌 관중을 중심지로 삼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진나라에 대한 잔혹한 모습 역시 통일 진나라와 그 제도에 반감이 극심한 세력으로서는 당연하다는 가설이다.

이러한 모습이 항우라는 개성의 개인적인 모습 때문이든, 혹은 그 세력 자체의 모습 때문이든 초나라 귀족 가문 출신 항우가 춘추전국시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과 반대로, 유방과 그 패거리는 오히려 그 출신 성분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한없이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다만, 이 '구시대적', '복고주의'이라는 평가는 항우의 문제점을 단순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 일단 당시 반진을 기치로 일어난 군벌과 인물 가운데 구 육국 귀족 출신은 사실 적지 않다. 위왕 유표, 한왕 한신, 장량 등. 하지만 이들 가운데 누구도 항우와 같은 심각한 문제점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특히 항우의 학살은 사실 진나라에 대한 적대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항우는 진나라가 아니더라도 제나라에서도 잔혹무도한 모습을 보였고, 그 심각한 대학살은 당시는 물론 춘추전국시대에도 그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잔혹한 악행이었다. 춘추전국시대 기준으로도 항우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괴물'이었을 것이다. 항우의 인격 자체가 학살광에 가까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항우가 복고적인 봉건제를 택하여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주어 분봉한다고 해도, 실제 그 조치도 엉망 그 자체였다. 유방은 견제를 위해 파촉에 처박아 놓았지만 항백의 설득 하나로 한중까지 지배 영역으로 퍼주는가 하면,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제나라의 장수에 불과했던 전도를 제나라 왕으로 봉하고 본래 제나라 왕을 교동왕(膠東王)으로 옮겨버린 일 때문에 전영의 분노를 샀으며, 그 전영은 자신이 직접 들고 일어남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후원해서 항우가 세운 천하를 단번에 뒤흔들어 버렸다.

전영의 협조를 얻은 진여도 항우가 자신을 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왕에 봉하지 않아 불만이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이후 정말 지독하게 항우를 괴롭힌 팽월에게 항우는 아무런 봉국도 내리지 않았다. 결국 알아서 적을 만든 셈이나 다름없는 것. 항우가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씨앗은 결국 스스로가 뿌린 셈이다.

항우의 분봉은 춘추전국시대의 가치관으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항우가 명분으로 삼은 '복고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항우는 '정통성 있는 구 육국의 후예'를 제대로 예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각한 자기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정통성 있는 한왕 성을 유방과 가깝다는 의심 만으로 살해해버리고 대신 자기 부하를 한왕으로 앉혔으며, 위왕 유표는 땅을 반쯤 빼앗기고 항우의 직속 부하가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결국 한왕 성의 조카 한왕 신은 유방의 충실한 부하가 되었고, 위왕 유표는 항우를 한 번 배신하고 유방 측에 붙었다.

항우는 형식적으로는 초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여 천자로 삼고, 자신은 패왕(覇王)이 됨으로써 춘추오패와 같은 모습을 정치적 위치에 자신을 놓았다. 하지만 결국 초회왕을 죽여버렸으니 오히려 스스로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 쓴 꼴이 되어버렸다. 구 세대의 춘추시대의 패자들은 비록 실질적으로 천하의 권력을 잡고 패도를 펼치기는 했으나, 그 패자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이 모시던 주 천자를 살해한 전례는 없다. 그러고도 스스로 패왕임을 계속 자칭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모순의 극치였다.

이처럼 항우의 정치적 행동은 근본적으로 체계적인 사상적 기초가 없이 그저 감정적으로 움직인 것 뿐이었으며,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자기 모순 투성이의 정치 활동을 오직 군사력으로만 밀어붙이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그 잘못을 지적하면 같은 편이라고해도 가차없이 잔인하게 죽여버리니 누구도 나서지 못한다. 이처럼 근본적인 정치 사상 측면에서 결함을 가지고 있는 항우의 통치는 항구적인 체계가 될 수 없었다. 항우와 같은 막나가는 방식으로는 유방이 아니더라도 대규모 반란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제나라 전씨는 유방이나 한나라 세력과는 딱히 관련이 없었다.

3.2.2. 학살

항우의 최악의 결점으로, 항우가 단순히 무식한 싸움꾼을 넘어서 범죄자 수준의 취급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다. 가장 잘 알려진 건 신안대학살이지만, 살인광스런 항우의 학살은 한두번이 아니다. 기록된 사례만 하더라도 다음과 같다.
  • 양성 학살: 항량 생전, 별동대로 출전하여 양성이 쉽게 함락되지 않자, 성을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생매장했다.
  • 성양 학살: 유방과 별동대로 움직일 때 성양을 함락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다만 이 건은 항우 본인만의 결정인지, 유방의 동의가 있었는지, 주체가 유방이었는지 불분명하다.
  • 신안 학살: 항복한 진나라 군 20만을 생매장한 전대미문의 학살이다.
  • 제나라 학살: 제나라에서 주민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고 포로들을 생매장해서 죽였다.
  • 외황 학살 미수: 여기서도 학살을 자행하려고 하다가 소년의 설득을 듣고 그만두었다.

그 외에도 사람을 태워 죽이거나 삶아 죽였다는 내용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물론 각종 협약 등이 체결된 현대의 전쟁과 과거의 전쟁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를 동일선상에서 놓을 순 없다. 하지만 항우는 그 당대에도 이미 심각하게 비판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윤리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대에도 항우의 경쟁자인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본다면 이는 윤리적인 부분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전략적으로도 최악의 악수였다.

상식적으로 점령을 해도 고을의 백성들을 모두 죽여버리면 영토를 수복한 이득이 전혀 없다(세금, 군역, 노역을 누가 담당하겠는가). 전쟁이 많았던 춘추전국시대에서조차 전쟁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사는 '읍성'을 땅따먹기 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땅과 백성'을 지배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민간인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춘추전국시대에도 진나라백기장평대전에서 조나라군 40만을 몰살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물론 백기의 학살은 당대에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항우의 학살은 이를 한 수 뛰어넘었는데, 백기는 군인인 '적군'을 학살했지만, 항우는 적군뿐만 아니라 민간인인 '고을' 자체를 학살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백기조차도 잡은 적군 가운데 어린 소년들은 살려보냈으나 항우는 조금의 자비심도 없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싸그리 학살하는 잔혹성을 보였다. 게다가 백기의 경우, 비록 잔혹성으로 인해 전국에서 욕은 먹었지만 학살의 목적(...) 이었던 '조나라를 일어서지도 못하는 불구로 만들어버린다'는 목표 자체는 달성한 것에 비해 항우는 그것도 아니었다.

항우의 학살에서 분풀이 외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면 '본보기'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학살은 전혀 본보기가 되지 못했으며, 각국의 백성들은 그저 '죽지 않기 위해서는' 항우에 대항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갔다. 가장 극심했던 진나라에서는 당연히 적대감이 폭발하여 한신은 유방에게 전략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더욱이 항왕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학살과 도륙을 당하여 살아남은 것이 없게 되어 천하 백성들은 모두가 원망하며 아무도 항우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나, 단지 그의 위세에 눌려 복종하고 있는 체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겉으로는 패자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천하 인심을 잃고 있습니다."

"또한 삼진(三秦)의 왕은 모두 진나라 장수들 출신으로, 그들이 진나라 장군으로 몇 년간을 군사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싸움 중에 전사시킨 진나라 자제들의 수효는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더욱이 그 남은 군사들을 속여 제후군들에게 항복시킨 다음 진나라에 들어오다가 신안(新安)에 이르자 항왕이 20여 만에 달하는 그들을 속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놓고도 유독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 등만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진나라의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은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오늘 항우가 그의 위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삼진의 왕에 임명했으나 진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무관(武關)을 통해서 관중으로 진입하실 때, 터럭 하나도 건들지 않음으로 해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하고 법삼장(法三章)만을 두기로 백성들과 약속함으로 해서 진나라 백성들치고 대왕께서 진왕(秦王)이 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기》회음후열전 中

이후 관중은 유방의 세력권이 되었는데, 진나라 사람들이 항우와 유방 중 누가 이기기를 바랄지는 너무 뻔한 일이다. 또한 유방이 동진하고 있을 때 재빨리 끝낼 필요가 있던 제나라에서의 싸움은 쓸데없는 학살로 오히려 사람들의 공분만 사고 한없이 길어지게 되었다. 일단 유방의 세력은 팽성대전으로 격파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전횡이 제나라를 다시 부활시키는 바람에 항우의 제나라 원정은 결과적으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팽성대전 이후의 한나라는 법까지 뜯어고치며 징병 제외 대상인 노인들도 전쟁터로 보내고, 자원은 나오는 족족 보급으로 보내는 수탈이 따로 없는 가혹한 총력전 체제로 이행했는데, 이러고도 한나라에선 반란 한 번 없었다. 얼마나 항우에 대한 공포와 원한이 사무쳤으면(...) 사실 이쯤 되면 백성들도 자기들 쥐어짜고 사지로 보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도 '그래도 안 그러면 항우가 우리 다 죽이겠지?'하고 자기들끼리 납득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높아보인다. 가난해지고 죽을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보내는 유방이랑 100% 죽일 항우랑 누가 낫냐고 보면 당연히 전자니까(...)

어느 한 지역을 점령하기는 힘들지만 민심을 얻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다. 점령하기 위해 들인 손해를 그대로 감수하면서 점령지를 위해서 베풀어야 하는데 결국 손해가 갑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상에서도 쥐어짜인 백성들의 봉기나 어설프게 민심을 베풀다가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반란으로 몰락한 정복자들도 꽤 많다. 그런데 유방의 경우에는 그게 아주 쉬웠다. 유방이 성인군자라고 불릴 만큼 선행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식인들을 감화시킬 만큼 학식이 있던 것도 아니고, 백성들이 경외할 만큼의 명문가는 더더욱 아니었다.[50] 하지만 항우가 앞뒤 구분 없이 다 죽여버리는 바람에 유방으로서는 아무 것도 베풀 필요 없이 그냥 목숨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항우가 저질러 놓은 짓들은 유방 도와주는 일들 뿐이었다.[51]

이런 항우과 굉장한 유사점을 보이는 건 과거 나치 독일독소전쟁 당시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이나 일본군중일전쟁 도중 벌였던 삼광 작전(三光作戰)인데, 이 경우도 공포심으로 저항을 눌러버리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52] 이후 13살 짜리 어린 아이의 설득을 따르자 학살을 자행할 때는 그토록 저항하던 성들이 항복하는 장면은 블랙 코미디 급. 덤으로 유방의 상황이 아무리 열악해도 항우에게 붙을 생각은 안 하던 측근들이 나중엔 흉노로는 잘만 도망간다(...). 이쯤되면 항우는 오랑캐이하의 무언가취급을 받은 수준이다야만족만도 못한 놈 취급이라니

3.3. 인격의 흠점

역사의 박한 평가와는 다르게도 그의 연대기는 너무나도 드라마틱하며, 또한 개인적인 면모에서 비롯되는 일화도 많이 남겼기에 중국 본토에서는 역사적 평론과 관계 없이 크게 흠모받는 인물이다.

평민 출신 유방이 욕을 입에 달고 살며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거나[53] 목숨을 건지고 대업을 이루는 일에는 자기 가족조차 없는 사람 취급할 정도임에 비해, 기본적으로 귀족 출신인 항우는 사람을 대할 때는 인자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54] 또한 병에 걸린 사람이 있거나 하면 눈물을 흘리고, 그러다가도 한 번 화를 내면 모두가 벌벌 떨었다고 하니 인간적인 매력과 카리스마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한신이 처음에 항우에 비해 유방에게 부족한 것 중에 인자함을 꼽았으니.

그러나 그런 겉모습을 벗기고 보면, '남자다움' 과 '로망'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항우의 인간성에는 그 겉모습과 다른 면모가 있다. 일단 작은 일에는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작 사람을 쓸 때는 쓸데없는 의심을 가졌으며, 통 크게 양보를 해야 할 때는 아까워하기 일쑤였다. 한신은 이에 대해 필부의 용맹, 아녀자의 인정이라는 평가를 내리며 항우를 깠다. 초인목후이관의 한생은 뒤에서 욕한 것으로도 곧바로 팽형에 처했으면서 범증은 남들 눈앞에서 자신을 모욕했을때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그렇다고 앙금까지 털어버린 것도 아니라서 이후 지속적으로 불화를 겪다가 끝내 진평의 계략에 넘어가 파탄났는데 이러한 범증과의 관계는 지인을 편애하면서도 애매모호한 항우의 이런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다. 정치적인 면에서 문제가 되었던 제후들의 분봉도 기본적으로는 자기와 친하거나 도움을 되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였기에 사달이 나버렸던 일이다. 범증을 그렇게 간단하게 의심했던 항우지만, 아예 대놓고 스파이 짓을 벌인 항백은 자기 인척이라서인지 별다른 처벌을 받은 적도 없었다.

반면에 유방은 면전에서 욕을 퍼붓던 인물이라도 그가 쓸모 있는 충고를 하면 곧바로 사과를 하면서 받아들였고, 자기 뒤통수를 쳤던 옹치를 공신들의 불안을 종식시키기 위해 열후에 봉하는 등 자신의 개인적인 악감정보단 대의나 이득[55]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였다.[56] 물론 말년에 토사구팽을 벌이기는 했지만 항우마냥 아무 인간이나 다 잡아 죽인 것도 아니고, 제후왕들이 아닌 이전부터 자신을 따라다닌 수하들은 많이 챙겨준 편이다.

항우를 심하게 비판하는 경우는 항우는 사이코패스이며 동네 건달에 도덕적 결함이 있는 유방마저도 항우보단 인격적으로 낫다는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있다. 사마천의 항우본기에는 항우가 '기뻐했다'라거나 '즐거워했다' 등 인간적인 감정을 피력하는 장면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크게 노했다', '분노했다', '눈을 부라리며 화냈다'라는 표현만 보이고, 심지어 사랑하는 여인을 앞에 두고 남긴 절명시에서도 자신의 패배에 대한 분함을 먼저 토로할 뿐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은 맨 마지막으로 밀려있고, 심지어 그 구절에서도 인간적인 요소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 항우인 것을 생각해보면 아주 근거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수는 없다

3.4. 인사상 실책

"항왕이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지르면 1000명이 모두 엎드리지만 어진 장수를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니 그저 보통 남자의 용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고 자애로우며 말씨가 부드럽습니다. 누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부리는 사람이 공을 세워 벼슬을 주어야 할 경우가 되면 인장이 닳아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선뜻 내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저 아녀자의 인(仁)일 뿐입니다."
《사기》회음후 열전. 한신이 항우를 평하며.
"항우는 그나마 있는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해서 나에게 패한 것이다."
유방이 자신이 승리한 이유를 논하며.

한신과 유방이 입을 모아 비웃을 만큼 항우는 사람을 부리는 데는 정말 노골적으로 무능했고 이는 항우가 겪게 되는 모든 난관의 근원이 된다. 최측근에 대한 대우도 미묘한 면이 있었고,[57] 인재들을 버리거나 중용하지 않아서 이들이 유방측에 붙어서 대활약을 하거나 항우의 실책을 유방이 대폭 활용하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아래는 그 예시.

3.4.1. 한신

유방의 천하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장군인 한신은 원래 항우의 사람이었다.

한신은 항량 시절부터 항씨 일가를 따라다니며 종군했고, 항우에게는 여러 계책을 전했지만 항우는 모조리 씹어버리고 한신을 한직에 머무르게 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죽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도록 어르고 달래지도 않았다. 용저와 유방이 알고 있던 한신의 찌질한 인생을 항우라고 몰랐을 리 없을 테니, 범죄자가 되지 않은 결단은 인정하지만 끽해야 딱 그 정도의 팔푼이로 취급했거나, 그 정도의 관심도 없어서 그저 키만 크고 칼 찬 놈으로 취급했든가 두 시궁창 중 하나.

물론 한고제 측에 가서도 처음엔 별 중용되지 않았으나, 소하의 추천으로 유방은 그를 중용하게 된다. 결국 신하의 조언을 받아들인 유방은 한신을 중용해 항우를 멸하게 된다.

한신도 자기 스스로가 밑에 사람을 함부로 대한 항우를 비웃은 만큼 밑에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배풀었으나 이와는 정 반대로 위엣 사람들에 대한 처신은 개차반이었고, 유방에 의해서 결국(...)

3.4.2. 팽월

항우의 숨통을 끊은 것이 한신이라면 전쟁 내내 항우의 숨줄을 조른 것은 팽월이다. 유방을 밀어낸다 싶으면 후방 쪽에서 난장판을 벌이는 팽월의 유격전에 항우는 한 번은 다 이긴 상황까지 가놓고도 결국 몰락하고 말았는데, 이 팽월은 항우의 분봉 당시 아무것도 받지 못한 원한으로 유방에게 가담했다.

3.4.3. 진평

반간계를 이용해 항우의 거의 유일한 책사인 범증을 몰락으로 이끄는 큰 성과를 내고, 훗날 여씨의 횡포로부터 유씨들을 구원해 천하를 안정시킨 한나라 최고의 충신 진평 또한 원래는 항우의 사람이었다. 진평은 항우 밑에서 은을 꼬드기는 데 큰 공을 세우는데, 은왕 사마앙이 다시 유방에게 붙어버리자 항우에게 혼날까 무서워서 그의 무리로부터 도망가게 된다.

진평은 결국 친구의 추천으로 유방 밑에 들어가게 되고, 멀리서 헐레벌떡 도망쳐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좀 쉬라는 말에도 내가 지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에게 계책을 올리는 게 중요하다는 태도를 보였고, 이에 감복한 유방은 진평이 이것저것 비리를 저지르고 구린내를 풍기고 다님에도 불구하고[58] 살아생전은 물론 죽어서까지 진평을 아주 요긴하게 써먹는다.[59]

3.4.4. 영포

초한쟁패 말엽에 유방의 밑에서 용맹하게 싸우며 초나라를 괴롭힌 영포도 원래는 항우의 사람이었다.부하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패왕의 위엄 유방은 영포를 설득하기 위해 자기 밑의 수하라는 사람을 영포에게 보냈는데, 영포가 저울질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항우의 사신도 영포에게 도착했다. 그러자 수하는 항우의 사신에게 영포가 유방 측에 투항했다고 외쳤고, 결국 영포는 사신을 죽여버리는데 항우도 이에 질세라 영포의 가족을 죽여버렸다(...). 그런데 사신을 죽였으면 이미 돌아섰다고 판단하는 게 일반적인 선택이긴 하다 항우가 자신을 다시 설득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가족을 죽여버리자 영포는 유방 밑으로 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3.4.5. 의제

항우는 의제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기 주장을 세우기 시작하자 그를 죽여버리는데(...) 이로 이득을 본 사람 또한 유방 뿐이었다. 실권은 항우에 비하면 약했지만 의제는 분명 대륙의 황제였으며, 반진 운동의 구심점이었기 때문이다. 항씨 가문이 반진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범증의 의견을 따라 몰락한 초나라 왕통을 이었다는 정통성[60]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으며, 이는 대대로 초나라에 충성한 명문가로서 충의를 보여준 것이었다. 근데 항우는 그것을 깨버렸을 뿐더러 그 시기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61] 이도 결국 유방 좋은 일만 한 셈이 되었다.

중국 사학계에서는 항우의 결정적인 패착을 의제를 시해한 것에서 찾는다. 대부분의 초한쟁패기를 다룬 창작물에서는 의제를 그냥 시체쯤으로 치부하지만, 역사학적 관점으로 볼때 의제의 시해는 단순히 볼 수 없다. 아무리 실권이 없고, 세력이 약해도 의제는 그 자체로 항우의 주군이며 초나라의 왕(君)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세가 강하다는 이유로 신하(臣)인 항우가 의제를 죽였다는 것은 단순한 세력다툼이 아니라 당대의 가치관 자체를 뒤엎는 엄청난 패륜이기 떄문이다. 굳이 유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칠국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춘추전국시대부터 군주는 신하와는 다른 격으로 존재하였으며, 유교의 군정지론, 군주별이신을 끌어붙일 것도 없이 신하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군주에게 충(忠)을 바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그런 시대상에서 단순히 자신과 의견이 다르고 유방만을 편애한다는 이유로 주군인 의제를 시해한 것은 당대의 가치관을 완벽히 부정하는 행위였으며, 그런 항우에게 반감을 가진 것은 둘째치고 "너도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주군을 죽이는데, 나라고 못할 것은 뭐냐?"라는 명분을 주게 되어 중국 전역에서 반란의 씨앗을 심게 만든다.

사실 초한쟁패 당시 명분이란 것의 가치가 유독 희미하기도 했고, 그렇게 만든 게 항우긴 하지만 항우가 딱히 내부반란으로 몰락한 것도 아니므로[62] 의제의 정치적 존재감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지만, 일단 의제 암살 과정에서 영포가 항우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어 이후 유방 쪽으로 붙어버렸고, 명목상의 주군조차 없어진 유방은 아무것도 꺼리낄 것 없이 왕을 거쳐 황제까지 자연스럽게 오를 수 있었으니 이득은 없이 손해만 봤다는 점에선 크게 차이는 없다.

3.4.6.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항우의 인사상 실책 끝판왕.

진나라 멸망 이후 항우는 천하를 재편할 기회를 잡았으나 논공행상을 엉망진창으로 처리해버림으로써 제나라에서 반란이 터지고 아버지, 아들 하던 장이, 진여는 완전히 원수가 져서 분란이 끊이질 않았다. 냉정하게 사람을 쳐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만족시키지도 못했다. 대표적으로 제나라 전씨들은 제나라 땅을 빼앗겨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결정적으로 유방은 진나라 땅을 받지 못해 속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결국 제나라 땅에서 난이 터지고 유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중 땅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천하 대권을 잡을 기회를 잡는다.

3.5. 총평

파일:wOX2Jbg.jpg
사기 항우본기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격언을 체현해 보인 최후의 전국시대 호걸

결론을 내리자면 항우라서 성공했고, 항우라서 몰락한 아이러니한 사람. 항우는 최고의 야전 지휘관인 동시에, 군주라는 과분한 자리에 있어 패망해버린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순전히 군사적인 능력으로 한때마나 천하를 얻었으니, 그 부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 평범한 경우였다면 유방에게 먼저 관중을 장악당하고 군주의 총애도 빼앗긴 시점에서 유방의 천하로 흘러갔어도 이상하지 않은 구도였으나, 오직 군사적 역량만으로 유방을 비롯한 모든 제후를 힘으로 무릎 꿇리고 중국의 패자로 섰다.

그러나 지존의 자리에 올랐을지언정 항우의 사고관은 일개 군벌 감각을 벗어나지 못했고, 따라서 지위는 왕에 올랐으되 행동거지는 건달 두목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기 나라'인 초나라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천하의 백성들을 모두 아우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 안팎을 극단적으로 차별하여 세상 사람의 인심을 잃었고, 상벌이 공정하지도 못하여 아랫사람에게 미움을 샀으며, 어떤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순전히 자신의 기분 여하에 따라 일관성없이 대응을 바꾸기도 하였다. 결정적으로 지나치게 잔혹했다. 난세의 군주로서 필요한 요소가 철저하게 결여되어있던 셈이며, 이는 오만무도하다는 소리[63]를 들었어도 군주가 가지고 있어야 할 장점을 모조리 가지고 있는 유방과는 크게 대조되는 점이다.

항우의 이런 실패는 항우의 출신 성분과 나이, 항량의 죽음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결과이기도 하다. 항우는 초나라 귀족 출신인데, 춘추전국시대 귀족으로써 과거 제도와 문물에 대한 향수가 있었고, 출신 성분과 주위의 사상은 덕분에 기본적으로 복고주의를 내세웠다. 사실 학살 문제만 해도 항량 및 범증 등 모두가 방관했던 행동이므로, 항우 개인보다는 당시 초나라 군 전체의 문제로 보이는 면도 있다. 신안대학살의 계기 중 하나가 초나라 군사들의 포로 학대로 인한 반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문제는 시대는 변하는데 애매한 복고주의만으로 세상을 바꾸기에는 항우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본질적으로 사상적 구심점도 없었고, 자신에게 거스른다는 이유로 초나라의 군주였고 당시 천자인 초희제를 죽여서 하극상을 일으켜서 자신이 만든 질서를 부정해버렸다.

나이도 문제인 게 거병할 때가 24세, 오강에서 자결할 때가 31세. 즉, 너무 젊었던 탓도 크다. 아무리 과거에는 10대 중후반부터 성인 대우해주었다고 하지만 경험이 없는 풋내기인 건 어쩔 수 없었다. 타고난 무장으로 능력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미묘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는 정치적 안목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정치적 능력 결여는 항우의 제후 봉분에서 알 수 있지만 기준도 없고 정의롭지도 않아서 모두에게 불만을 주었다. 젊은 만큼 새로운 시대상에 맞는 사상과 문물 습득에 개방적일 법도 한데, 성격이 모나서 남의 말도 안 들어서 공부할 이유도 없었다. 거기다 너무나 일찍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 자신감이 문제였다. 차라리 유방을 그대로 관중왕으로 인정하고 의제 체제 하에서 정치 싸움을 벌였다면 군사적 역량 외의 요소의 필요성을 느끼고 성장할 길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범증이 주도한 홍문연에 의해 항우는 자신의 무력을 맹신하게 되었다. 이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깨달았을 땐 이미 모든게 늦은 후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항우가 믿고 따랐던, 그렇기 때문에 항우를 제어할 수 있었던 항량이 너무나 이른 시점에 죽었다는 것. 항량은 항우에게 없는 귀족으로써 식견과 정치적 역량, 사상적 구심점, 행정적 능력 등을 갖추고 있었다. 항량이 정치적, 행정적 문제를 직접 다루고 항우는 군대만 관리했다면 항우가 보여준 정치적 실패나 전략적 문제는 발생 안 했을 터였다. 항량 밑에서 경험을 쌓고 정치를 맡았다면 훨씬 괜찮은 성과가 나왔을 수도 있었다.[64]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나도 이 말이 잘 어울린다. 풍운아인 동시에 대국적이지 못한 용장. 만약 한고조를 이겼더라도 쳐도 잘해봐야 나디르 샤처럼 전쟁질로 노략질이나 하다 반란으로 죽고 중국은 다시금 캐발살났었을 가능성이 높다.

항우는 죽기 전에 "나를 망하게 한 건 하늘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날렸다. 보통 이 말에는 항우가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는 해석이 따라붙는다. 싸움만은 잘했다지만 그런데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맹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오히려 '매우 정확한 평가'가 된다. 민심을 잡는 데 실패하여 하늘에게 버림받은 것이라고 해석하면 지금까지 살펴본 항우의 패인과도 들어맞기 때문이다. 주나라천명 사상과 연관지어 해석한다면, 이는 항우의 입을 빌어서 항우의 부도덕함을 스스로 자인하게 하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우는 싸움은 잘 했지만 천명을 잃은 탓에 하늘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던, 다른 말로 하면 천벌을 받은 것이다.

물론 항우는 철저한 패배자이고, 기록을 남기게 된 건 승리자인 한나라 뿐이라서 그 기록을 얼마만큼 신뢰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사마천이 패배자인 항우를 본기(本紀)에서 언급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중국 역사 서술의 관점으로는 패배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어쩌면 도가 넘을 정도의 행동으로 그보다 더 높게 대우해주기도 힘든 일이다.[65] 이런 점을 고려하면 사기의 서술에서 항우가 가지는 위상이 억지로 깔아뭉갰다고만 보기는 힘들 것이다.

재밌는 점은 항우의 초인적인 행적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항우를 물리친 유방은 대단하다' 는 의미로 사서에서 항우의 기록은 정치적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부풀려 졌다고 여기고, 항우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경우에는 '패배자인 항우를 깔아뭉개기 위해' 승자의 입장인 한나라가 정치적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항우의 악행을 부풀렸다고도 말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극과 극은 통하는 셈.

사마천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진나라가 실정하자 진섭(陳涉)이 먼저 일어났다. 이어서 천하의 호걸들이 벌떼처럼 그 뒤를 따라 서로 다투었으니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항우는 한 치의 영토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진나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서 들판에서 일어나 세력을 잡고 3년만에 다섯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멸했다."

"이어서 천하를 나누어 휘하의 장수들을 왕과 후에 봉했으며 모든 정령은 그로부터 나와 스스로를 패왕이라 칭했으니 비록 그의 권세가 끝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그와 같은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이윽고 항우가 관중을 버리고 초나라에 돌아와서는 의제를 쫓아내 죽이고 자립하자 제후왕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해서 난이 일어났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했다."

"이에 5년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66]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기》 항우본기

양웅(揚雄)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초가 해하(垓下)에서 패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었는데, 말하기를 '하늘아!'라고 하였다니, 믿겠습니까?" 이에 대답하였다. "한은 여러 정책을 다하였고, 여러 정책은 여러 명의 힘을 다하게 하였지만, 초는 여러 정책을 싫어하고 스스로 그 자신의 힘을 다하였던 것이오. 다른 사람을 다하게 하는 사람은 이기고, 스스로 다하는 사람은 지는 것이오."

"그러니, 하늘이 무슨 까닭이겠소."

4. 기타 이야깃거리

  • 패자라고는 해도 짧고 굵게 살다 간다는 남자의 로망을 체현한 인물이라 그런지 후세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높다. 중국인들이 한을 고대 '중화'의 집대성으로 보면서도 한과 대립한 항우를 한 축으로 삼은 초한지라는 소설까지 나왔다는 걸 생각해 보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을 씹어먹는 사례로도 꼽히고. 사마천사기에서는 한고조에게 패배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제후를 다루는 세가나 신하나 반역자를 다루는 열전 대신 천자의 기록을 수록하는 본기에 항우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67]
  • 의 시인 두목(杜牧)은 항우가 죽은 오강에 와서 그를 디스하는 기리는 시를 짓기도 했다.

    勝敗兵家不可期(승패병가불가기) 병가의 승패는 기약할 수 없으니
    包羞忍取是男兒(포수인취시남아) 부끄러움을 참는 것도 남아의 일이다.
    江東子弟多才俊(강동자제다재준)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았으니
    捲土重來未可知(권토중래미가지) 권토중래를 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여기서 나온 말이 바로 권토중래.
  • 패왕이라는 칭호는 항우가 호칭이 필요하다고 부르자 장량"삼황오제, 춘추오패, 전국9왕 같은 거 많으니 걍 택일하셈" 라고 답하여 패와 왕을 섞어서 스스로 패왕이라 붙였다고 전한다. 여담이지만 이 때 범증은 춘추오패의 결말이 모두 좋지 못했다는 점과 왕 칭호의 격이 너무 낮다는 점을 들어 항우에게 다른 명칭을 권했으나 묵살되었다. 그리고 범증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패왕이라는 호칭 때문에 '패'라는 글자의 의미도 어느 정도 변질이 되어서 무력적이고 강압적인 의미를 많이 띠게 되었다.
  • 삼국지조조에게 데꿀멍하는 민담도 있다. 어느 날 조조가 항우에게 바위를 기어다니는 를 가리키며 "공께서는 힘이 산을 뽑을 정도로 강한데 이 이를 죽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항우는 코웃음을 치며 다른 바위를 들어 이가 기어다니는 바위를 내리 찍었는데 이는 죽지 않고 여전히 바위 위를 기어다녔다. 이를 본 조조는 항우를 비웃으며 "천하장사가 이만한 이도 못 잡는단 말인가!"라고 말한 후 손가락으로 이를 톡 터뜨려 죽여 버렸다. 이것을 본 항우가 기겁을 하여 조조에게 굽신굽신댔다는 훈훈한(?) 민담 한 토막. 항우가 저 정도로 무식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항우가 능력을 가지고도 그 힘을 엉뚱한 데다가 쓰기도 했던 역사적 행적을 생각하면 이 민담은 항우와 조조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민담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종종 삼국지의 최강 무장이라 꼽히는 여포와 비교를 하는 경우도 보인다. 당장 네이버에 검색에도 "항우하고 여포하고 누가 더 쎔?"이라는 초딩 삘의 질문이 굉장히 많이 보일 정도. 그러나 이런 최강 논쟁은 언제나 그렇듯 무의미한 것이다. 근데 기록만 보면 항우가 먼치킨이다 그러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중국에서의 무력 비교는 거의 대부분 항우가 기준이다. 이 때문에 삼국지에서는 그 어린 나이에 인간병기급 활약을 보인 손책항우의 재래라며 그의 용맹을 있는 대로 추켜세우는 묘사도 존재한다. 중국의 용맹한 장수에 대한 묘사를 보면 거의 언제나 '그 모습과 무용이 능히 항우와 견줄 만했다'는 뜻을 가지는 구절이 등장한다.[68] 사실 여포가 삼국지 최강자라는 인식도 연의가 띄워준 것이 크다. 삼국지평화 등의 연의 이전의 소설을 보면 일대일로 장비나 하후돈을 당해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대에 과거 맹장에 대한 우위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중국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항우가 중국 역대의 최강 장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맞는 듯 하다. 말 그대로 남자의 로망이 형상화되었다 볼 수 있는 것이 항우이기 때문. 이에 비하면 여포의 명성은 다소 삼국지빨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크로스오버로 다른 시대의 용장들과 비교하긴 어렵다.
  • 항우장사는 바로 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단어다.
  • 시각에 따라서 항우를 페이크 최종보스로 보고 흉노묵돌을 진 최종보스로 여기기도 하는데 아주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지휘력은 항우가 월등히 뛰어나긴 했지만 유방, 항우, 묵돌의 직업은 군주이지 장수가 아니다. 항우가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전투에서 승승장구했음에도 전쟁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은 위에서 이미 강조된 바이다. 훗날 후한 말의 공손찬, 이각, 곽사 역시 비슷한 케이스라 하겠다.
  • 일본 센고쿠 시대 아키의 다이묘였던 다케다 모토시게[69]는 항우에 비견되는 무용을 지녔다고 칭송받았다. 모리원취전 1장에서 모리 모토나리에게 순살 당한 그 다케다 모토시게 맞다(...)
  • 비슷한 시기에 대부분 승리하고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비슷한 카르타고한니발 바르카와 비교되고는 하지만 사실 한니발을 항우에게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한니발에게는 모욕이다. 한니발은 라틴동맹의 붕괴와 로마의 고립이라는 최적의 전략을 선택했고 거기에 따라 한쪽눈까지 멀어가며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구전으 펴는 로마군을 끌어내 섬멸하고 10년동안 로마를 견제해왔다. 더불어 초나라에는 종리말, 용저, 영포 등 항우 정도는 아니지만 유방군을 어느정도 상대할 장수들이 있었지만, 카르타고에는 한니발 아니면 로마군을 상대할 인간이 단 한명도 없었고 때문에 다른 카르타고군은 1번의 전투 빼고는 전부 패배했다. 무엇보다 군주였던 항우와 달리 한니발은 카르카고의 일개 총독&장군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일개 장군의 지위와 미개척지인 히스파니아의 적은 자원 만으로 로마를 멸망직전까지 몰고갔다. 한니발의 최대실수는 자기가 로마정예병들을 대부분 몰살 시켰으면 다른 카르타고군이 적어도 이탈리아까지는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 것이다.
추가하면 제 3차 십자군 전쟁당시 살라딘을 상대로 전승을 기록하고도 목표인 예루살렘 정복을 달성하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간 리처드 1세의 경우도 있다. 물론 리처드의 전략적 식견은 (라이벌인 살라딘이나 필리프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기 힘들기는 하지만, 항우는 리처드보다 훨씬 상황이 좋았다. 리처드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3차 십자군은 그 전에 이미 사고애초에 십자군에 관심이 없었던 군주 때문에 반토막난 상황이었던 데다, 살리딘 휘하에 통합된 이슬람 세력을 맞상대해야 했으므로 전략적으로 주도권을 잡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심지어 필리프는 일찍 프랑스로 돌아가서 리처드의 동생 존과 힘을 합쳐 그의 배후를 찌르려고 준비 중이었다. 리처드도 아크레 함락 후 항우처럼 포로 학살을 저지르긴 했지만 이는 살라딘과의 포로 협상 합의가 불이행되었기 때문으로, 중세적 관점에서는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는 행위로 살라딘도 리처드의 학살을 비난하지는 않았고, 전략적으로도 이 학살이 없었다고해도 이슬람의 아미르들이 살라딘에게 떠나 리처드의 편을 든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 외에 3차 십자군에서 리처드의 전략적 행동, 예컨대 예루살렘을 직공하지 않고 해안지대를 점령하려 한 것등은 나름대로 전략적 이유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한 것은 그의 전략적 실수에서 기인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근본적으로는 십자군이 갖는 역량의 한계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항우는 분명 한때 유방보다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전국의 주도권을 쥐었음에도 불필요한 학살과 근시안적인 행보, 일관성 없는 전략으로 우위를 다 깎아먹었다. 뭐, 물론 정치력으로 따지면 둘 다 낙제점이란 점은 비슷하지만. 같은 낙제라도 빵점과 40점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5. 대중문화 속의 서초패왕 항우

항우/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

6. 관련 문서



[1] 지금의 강소성 숙천현(宿遷縣) 서남.[2]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정확한 것도 후술되겠지만, 항우의 제일 큰 문제는 그놈의 저돌적인 성격 때문이다. 그 호전적인 성격과 용맹함은 장군에게나 필요한 재능이지 절대 통치자가 가질 만한 재능이라고 보긴 힘들다. 거기에 민심도 관리 안하고 즉흥적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하거나, (아무리 허수아비라지만) 자기가 모시던 왕도 암살하고 자기의 양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로 보이는 군사 범증마저 추방시키는 등, 대부분은 그놈의 앞뒤 고려도 안하는 막돼먹은 성격이 벌인 일이었다.[3] 그런데 사실 윙드 후사르처럼 기병이 수십 배 혹은 백배가 넘는 적을 썰어버리는 일이 그렇게까지 비현실적인 일은 아니었다. 물론 말은 아무래도 생물학적 한계점이 있지만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기병은 매우 강력한 병종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며, 정예 기병대들의 활약은 무시무시할 정도다.[4] 실제로 사실만을 쓰겠다는 사상이 주류가 된 나라는 고대에 매우 드물었다. 심지어 꽤 후세에도 에드워드 기번처럼 알면서도 주작질을 하는 학자들도 많았다 그리스 사서 역시 미화와 왜곡이 심한 편 페르시아의 500만 대군과 싸워 이긴다 이며, 로마도 미화된 기록을 남기는 걸 당연시 여기기도 했다. 그외 다른 문명권에서도 미화를 당연시하고 거의 최근까지 역사를 사실대로 쓰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아시아도 마찬가지로 일본서기고사기의 경우에도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무척이나 강한 사서이며, 인도 같은 문명은 아예 역사를 기록한다는 사상 자체가 거의 었다.(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던 마우리아 왕조도 기록이 전무해 고고학 발굴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다만 한반도 국가들의 경우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괴력난신술이불작에 충실하게 역사서를 저술한다는 인식이 강했다.[5] 사마천은 제왕의 일을 기록하는 본기(本紀)에 항우의 행적을 적었다.[6] 원래 춘추 때 지금의 하남성 심구현(沈丘縣)에 있었던 소 제후국의 이름이었으나, 노희공(魯僖公) 18년 기원전 643년 노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가 후에 다시 초나라의 영토가 되었다.[7] 다른 곳에서 사람을 죽여 오(吳)로 숨어들어 왔다.[8]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는 일.[9] 유방은 비슷한 상황에서 "사내라면 저 정도는 해봐야지!" 라고 말했다.[10] 당시 한 척은 약 23cm이므로 지금으로 따지면 약 184cm 정도다. 저때 항우는 거인이었다. 2017년 시점에서도 키 184cm면 남녀노소를 막론한 장신이다. 정사 삼국지에서도 키가 8척이라고 언급되는 인물은 정욱이나 사마준 정도다. 그 외에 상당한 신장으로 언급되는 제갈량, 조운, 유표, 마등도 8척으로 180cm를 넘기는 정도였다. 관우, 장비는 키가 언급되지 않는다.[11]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듣기로는..." 이라는 식으로 언급하는 정도.[12] 여기서 선즉제인(先則制人)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13] 초회왕의 최측근이었던 송의는 이 무렵 아들을 제나라로 보내 교섭하여 제를 회왕의 측근으로 끌어들이려는 공작을 하고 있었다. 거록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14] 항우 본기에서는 공오(共敖)와 오예(吳芮)가 이 일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 경포 열전에서는 경포가 부하를 시켜 죽인 것으로 나온다.[15] 굳이 첨언하자면, 항우 당시까지만 해도 선양은 일종의 '옛날 얘기 속 미담'이었지 현실 정치의 수단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하, 상, 주, 진 등의 왕조 교체도 전부 무력 정벌로 이루어졌지 선양 같은 (표면상으로라도) 온건한 방식의 천자 교체는 없었다. 선양이 현실에서 명분 채우기용 정치적 쇼로 사용된 건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킨 시점부터다.[16] 이런 기록이 사기에까지 적었으니, 선양을 하지 않으면 항우급으로 폭군으로 역사에 남겨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한-조위로 넘어가는 시기에서 조비가 9번이나 제위를 거절하며 선양 쇼를 벌인 이유가 항우 때문이다.[17] 원수가 된 장이는 항우의 결정으로 상산왕이 되었지만 진여는 왕이 되지 못했다.[18] 이때 항우는 경포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경포는 병을 핑계로 수천명의 병사만 부하 장수에게 딸려 보내는 적당한 시늉만 보여주었다.[19] 패닉 상태에 빠진 병사들이 아예 수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해서 피해가 더욱 컸다. 수수는 한군의 시체 때문에 물이 흐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20] 패잔병들을 규합한 군대였으며 관영이 큰 활약을 했다.[21] 초나라 군대는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사방에서 공격을 가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살해당했을 듯. 항우의 전적, 그리고 기신이 화형당한 걸 보면 살아남은 여인들도 윤간 등의 매우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22] 본래 위표도 있었지만 주가와 종공에게 살해당했다.[23]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 동북의 아성진(阿城鎭).[24] 당초에 유방은 공성(鞏城), 지금의 하남성 공의시(鞏義市) 경내 서쪽 낙수(洛水) 서안에 있는 고을로, 중원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전략적 거점 중의 하나에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초나라 군의 서진을 저지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25]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 동북의 광무산(廣武山).[26] 성고를 탈환하긴 했지만 이제까지의 험난했던 전투로 인해 성벽이 많이 훼손돼서 방어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오창을 지킬 수 있고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있는 광무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27] 고작 보름 정도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방에게 조구가 패배해 모든 게 틀어졌으니 같은 행동을 하기가 불안했을 수도 있다. 소설 같은 매체의 영향으로 유방의 군사적 능력이 폄하되는 편이지만, 유방은 결코 군사적으로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항우와의 싸움을 제하면 유방은 자신이 나선 거의 대부분의 싸움에서 승리했던 장수다.[28] 하남성 태강현(太康縣) 남쪽.[29] 항우의 애마인 오추마를 말한다.[30]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서북.[31] 100여명으로 5천군의 포위를 뚫는 항우의 위엄[32] 여담으로 이 다음부터의 기록은 본래 묘사가 풍부한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거의 소설 수준으로 묘사가 살아있는 부분이다.[33] 진나라 때 가장 적은 지방 행정 단위로, 매 10리마다 정(亭)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 관리를 정장이라고 했다. 유방도 본래 정장 출신이었다.[34] 초한지 등 설화에서는 오추마가 배 위에서 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나온다. 또한 마지막까지 따르던 26명의 장병들은 끝까지 항우와 함께 하려 했으나, 항우가 강제로 배에 태워서 도망치게 했다고 묘사한다.[35] 실제로 해하 전투 직전에 벌어진 고릉 전투에서도 또 압도적으로 이긴다. 적들에 의해 보급 끊김 + 퇴각 도중 뒤치기 + 숫적 우세로 인해 전략적, 전술적으로도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 있었는데, 오히려 적의 절반이 괴멸되었다고 한다. 사실 해하 전투도 한신, 유방, 경포, 팽월 등이 다굴쳐서 이긴 것이라 한신보다도 더 뛰어난 지휘관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원래 한고조가 3,000 ~ 8,000 가량의 정예 병력(항우가 직접 양성한 부대로, 다른 부대들과 다르게 평생 수련하는 전사 + 기병이라 까놓고 전력으로 봐도 개인당 평균 10명의 보병 정도는 썰어 죽일 수 있는 강력한 병력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을 이기지 못하고 있던 것도 있어서, 한고조와 대결 초창기에 항우가 급사라도 했다면 단순히 강병들을 지휘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로 여길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으나, 그 정예 병력들이 상당수 소모되어 전력이 약화되었던 초한대전 막판 전투들에서도 매우 잘 싸워서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항우를 마지막까지 따르던 정예병들이 점점 죽어 나가자 다른 부하들은 승세가 없다고 판단하여 간단히 도망 혹은 열심히 항복하기 시작한다.[36] 진나라의 장한도 장초 군이 함양 근처까지 접근한 상황에서 주문(周文)의 수십만 대군을 단박에 무너뜨린 일이 있었다.[37] 유방이 경포를 회유한 시기는 팽성에서 막 패배한 직후였다.[38] 게다가 실제로는 그 유방에게만 집중하지도 못해서 초한전쟁 내내 유방이 있는 성고, 형양과 제나라를 똥개 훈련하듯 몇 번이나 왕복해야 했는데, 이는 팽월이 항우가 없을 때는 뒤에서 보급을 끊고 항우가 오면 재빠르게 도망치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39] 물론,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정치능력은 뛰어났다. 무력, 지식등으로 성공한 항우와는 다르게 정치적인 선동능력만으로 성공한 인물인셈.[40] 사실 의제를 옹립한 것도 항우 본인이 아니라 그의 숙부인 항량이었다. 항량이 의제를 옹립한 이유가 정통성에 있음을 볼 때, 아직 천하를 차지하지 못한 항우가 의제를 죽이는 것은 스스로 정통성을 차버리는 짓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정치적 식견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41] 진나라 타도와 6국 부활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선 것을 보면 당시에도 '통일 중국'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항우보다 나았을 것만큼은 확실하다 하나의 중국 이념과 혁명을 높이 평가하는 공산주의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42] 그런데 범증과 틀어져 범증이 죽게된 것은 범증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 홍문연을 열 때 유방을 죽이라고 계속 고집을 부릴 때도 위세가 천하를 울리는 항우 입장에서 자존심과 체면 다 팽개치고 유방을 암살하라고 하면 선뜻 따를 리 없다. 게다가 범증은 평소 언행이 거칠었기에 이를 권할 때 역시 거칠게 말하여 항우의 심기를 건드리더니만 결국 암살이 실패하자 "넌 애 같아서 결국 유방한테 죽을거다."라는 폭언을 퍼부어버렸다. 항우가 잠시 자기 막하에 있던 장량을 우대한 것이 단순히 지략 때문만이 아닌 부드러운 언동과 장량의 처세술 때문임을 알면 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서로 불협화음을 제공했기 때문이다.[43] 각 국가간의 배타적인 소속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있던 유방이 유독 특이했던 면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항우의 외국인 차별은 심한 수준이었으며 이 와중에 장한 등은 또 총애했으니 여기서도 일관성이 없었다.[44] 그래서 유방은 초한전쟁 후 숙손통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런 위계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45] 영포 쪽이 오리지널이고 오스카 폰 로이엔탈은 영포의 에피소드를 듣고 따라한 것이다.[46] 특히 자신의 숙적인 유방에게 엄청난 정치적 이득을 선사한다. 한마디로 원래라면 반란군으로 비난받아야 할 유방을 역적 항우를 치는 의로운 인물의 대표격으로 만들어버렸다.[47] 이건 원래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였어야 했는데 유방의 조리있는 변명과 번쾌의 대담한 시위에 의해 실패하면서 유방에게 관중왕 자리는 주기 싫지만 그렇다고 죽이지도 못했으면서 그냥 내쫒으면 자신의 권위에도 손상이 올 것 같으니까 대충 얼머무리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48] 사실 이쪽이 진평의 원래 노림수였다.[49] 하지만 중국 역사상 최악의 간신 중 한 명인 조고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또 모르는 일이긴 하다. 일단 부소가 제위를 이어받고 이사와 몽염을 문무관 최고위로 임명하였다면 가능성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사와 몽염은 또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화합할 수 있었을지는 또 의문이다.[50] 삼국지유비처럼 황실의 친족이라는 타이틀도 없었다.[51] 칭기즈 칸이나 알렉산드로스 3세도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이 군사적으로 뛰어났고, 이들도 대형 스케일급 학살을 벌였지만 항우와는 그 결과가 다르다. 칭기즈 칸은 자신과 싸웠던 상대는 용서 없이 도륙했고 그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엔 풀포기 하나 남지 않았지만, 먼저 항복을 청하는 경우엔 그대로 받아줌으로써 상대의 저항 의지를 꺾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주로 반란에 대해서 학살을 벌였지만 자신이 군사적으로 점령한 지역에 대해서는 관대한 정책을 베풀었고, 그 유력자들은 자신의 신하들과 동등하게 대우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들의 문화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점령지에서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도 했다.[52]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의 저자 르네 그루세몽골의 학살로 인한 공포 작전이 중동에선 잘 먹혔지만 중국에서는 그리 큰 효과가 없었던 이유로, 중국인은 숫자가 너무 많아서 학살로 공포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53] 유방이 무례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은 상당히 많다. 관고의 유방 암살 음모도 유방이 장오에게 모욕을 준 일 때문에 생긴 일이다. 왕릉은 황제가 된 유방에게 아예 대놓고 "폐하는 무례하고 오만방자하십니다" 하고 말했다. 역이기가 찾아왔을 때와 영포가 찾아왔을 때는 아예 발씻고 있어서 역이기는 화를 냈고 영포는 자살할까 고민했다.[54] 이는 한신과 왕릉이 모두 이야기한 사실이다.[55] 물론 개인적인 이득 뿐만이 아니라 공리 또한 포함한다.[56] 심지어 황제 시절에 대놓고 "너는 딱 걸주 같은 폭군이다!"라고 욕을 퍼붓는 신하를 보고 웃어 넘기기도 했다.[57] 항우를 내내 따르며 공을 숱하게 세운 종리매, 용저, 계포, 범증 모두 18제후 분봉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고 따로 영지를 챙겨주었다는 얘기도 없었으니, 이런 점을 진평이 이간질에 이용해먹은 결과 제일 먼저 범증이 이탈. 용저는 군공으로 제나라 땅을 취하고 싶었던 욕심에 한신에게 굳이 정면으로 덤볐다가 역으로 패배해 사망하고, 나머지는 사면초가에 이르자 모두 항우를 버리고 떠난다. 계포의 경우엔 아예 3대에 걸쳐서 한나라 왕조를 섬기기도.[58] 여기에는 원래 진평이 하는 일이 이간질 같은 구질구질한 일이니 '장 담그는 데 구더기 좀 묻을 수도 있지 뭘' 하는 식으로 유방이 배려해 주었다는 의견도 있다.[59] 유방 사후 여씨천하가 된 한나라에서 여씨들을 축출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신하들이 진평과 주발이다.[60] 범증은 항량에게 "초나라 사람들은 진승이 초회왕의 한을 풀어 초나라를 다시 일으킬 줄 알고 환호했는데 걔는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망해도 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사람들이 강동 출신인 당신에게 호응하는 건 당신이 초나라 귀족 출신이라 그런 것이니, 왕 될 생각은 접고 회왕의 후예를 옹립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걸"이라 하였고, 이를 들은 항량이 회왕의 후손을 찾아 초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의제였다.[61] 물론 언젠가는 의제를 제거하긴 해야겠지만, 시기도 방법도 완전히 글러먹었다는 게 문제다. 항우가 천하의 패권을 완전히 잡은 뒤 눈치를 줘서 선양을 받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물론 항우의 머릿속에서 천하는 이미 평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유방은 한중에 짱박아뒀으니 설마 뭔 일을 하겠냐는 게 홍문 이후 그의 일관적인 생각이었으니.[62] 항우가 도주 끝에 오강까지 도달했다는 이야기를 믿는다면 자살하는 순간까지 항우의 근거지인 강동은 여전히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팽월에게 점령당한 외항 등의 성들이 잠시 저항하기도 했지만 그거야 항우가 포로에게 워낙 잔혹한 인물이었기에 선택지가 없다고 여겨 나온 행동일 뿐이지 완전히 항우에게 등을 돌려서는 아니었다.[63] 아예 걸주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생전에 신하 입에서 "폐하는 진짜 개 같은 폭군입니다"라는 얘기나 다름없는 말을 들은 것이다![64] 실제로 초나라의 상황이 열악해지고 한신의 북벌이 완수되는 형양 전투 후반부터 광무 대치 기간의 항우는 어린아이의 말을 받아들여 학살을 중지하거나, 하찮게 여겼던 한신의 독립마저 인정할 생각으로 회유를 시도하고, 그토록 이를 갈았던 제나라 전씨와 동맹을 맺는 등 그저 감정 가는 대로 움직이는 행동에서 벗어나 전투 외에 다른 수단을 꽤 많이 시도해보는 모습을 보인다. 그동안의 행실이 있어서 번번히 실패하고, 때는 이미 항우의 성장을 기다려줄 형세도 아니었지만. 항우를 옆에서 보좌하며 항우를 그나마 말 듣게 할 수 있던 숙부 항백은 유방의 측근인 장량과 친해서 사실상 첩자 짓을 했다.[65] 이를테면 실질적으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오삼계의 도움으로 산해관을 넘어오기 직전, 잠깐이었지만 중국의 지배자였던 이자성은 『명사』의 「유적전(流賊傳)」에 그 전기가 실려 있다. 다만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했을 때에는 남명 같은 명나라 지방 세력이 잔존하고 있었다. 이자성이 대륙의 지배자라고 보기엔 어려운 면도 있다.[66]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바로 이 구절이 논란의 원천이다. 동성에서 다시 오강으로 갔다가 강을 건너라는 정장의 말을 거절한 후 단신으로 적병 수백 명을 죽이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묘사하고는, 정작 죽은 곳은 동성이라는 모순된 기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67] 사기는 천자와 제후를 나누는 데 있어서 명분론보다 실제 세력과 영향력을 중시했던 것 같다. 본기에서 유방 다음에 나오는 것도 명분상 천자가 아니라 태후로서 실제로 천하를 호령한 여후다.[68] 하다못해 송대가 배경인 수호지에서도 찾아보면 나온다. 오히려 안 나오는 작품을 찾는 것이 나을 정도.[69] 카이의 다케다 신겐과는 별 관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