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3 23:50:07

진헌공(24대)

진(秦)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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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나라 24대 국군
헌공
獻公
영(嬴)
조(趙)
사습(師隰)[1] / 연(連)[2]
아버지 진영공(秦靈公)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424년 ~ 기원전 361년 (63세)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84년 ~ 기원전 361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치세
2.2.1. 진 헌공의 개혁2.2.2. 진 헌공의 대외 진출

[clearfix]

1. 개요

진(秦)나라의 24대 군주. 진 영공(秦靈公)의 아들. 진 출공의 숙부. 시호는 기록에 따라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세본》(世本)에는 '진 원헌공'(秦元獻公), 《월절서》에는 '진 원왕'(秦元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헌공이 출공을 죽이고 찬탈하여 후위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영공이 사망한 뒤에 진나라의 군주가 되어야 했으나 간공이 뒤를 이어버렸으니[3], 엄밀히 말하면 후위 계승권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아무튼 찬탈로 진나라의 군주가 되었지만, 진나라의 폐단을 개혁해 부강의 길로 이끌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위 문후 때 위나라에게 빼앗긴 하서 땅을 회복했다. 이런 업적들은 그 아들 효공상앙을 등용해 법가 체제를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을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 진 목공 영임호 사후 숱한 후위 계승 싸움으로 피폐해진 진나라를 안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죽기 전에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맏이인 영건이 아니라 둘째인 영거량을 세우는 혜안을 발휘하면서 진나라가 전국시대의 초강대국으로 우뚝 서는 기반을 갖춰 진나라 역사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군주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그는 소년 시절 영공의 뒤를 이어 진나라의 군주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작은 할아버지가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진 간공이다. 영사습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위나라로 망명했다. 당시 위나라는 위 문후의 훌륭한 통치 체계 덕에 중원의 최강국으로 명성이 높았다. 위 문후는 오기, 이극, 서문표, 악양을 등용해 중앙 집권, 법치, 부국강병을 이룩했던 까닭이다. 그러니 이때 진나라는 위나라보다도 허약했다. 오기가 활약해 진나라는 큰 위기에 빠졌다. 이 시기 진나라에서는 간공이 죽은 뒤 후혜공, 출공 순으로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진나라는 위나라를 당해낼 뾰족한 수가 없었다.[4]

설상가상으로 출공 대에 태후가 환관의 말만 듣고 국정을 문란하게 하니 영사습은 진나라로 돌아갈 마음을 품었다. 이에 위 문후의 뒤를 이은 위 무후는 공자 사습을 진나라로 보냈다. 사습은 서장 개의 도움을 받아 출공을 시해한 후 출공과 태후의 시체를 연못에 버리고 진나라의 군주가 되니 그가 진 헌공이다.

2.2. 치세

2.2.1. 진 헌공의 개혁

헌공 원년(기원전 384년), 헌공은 가장 먼저 5대 국군 무공 때 제정된 순장 제도를 폐지했다.

헌공 2년(기원전 383년), 헌공은 수도를 옹에서 역양으로 옮겼다.[5]

헌공 4년(기원전 381년), 정월 경인일에 효공이 태어났다.

헌공 6년(기원전 379년), 헌공은 남전, 선, 명씨 등에 현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곳을 군주의 직할지로 삼아 임기제 관리를 파견해 다스렸고, 그리하여 군주의 권위가 강력해졌다.[6]

헌공 7년(기원전 387년), 헌공은 세금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그 내용은 상인들을 관리해 국가에서 그들의 이익에 세금을 매겨 국력은 날로 신장되어 갔다.

헌공 10년(기원전 375년), 헌공은 그 유명한 오가작통법을 실시해 5가 사람 중 하나가 죄를 지으면 연좌제로 책임을 물었다.[7] 그런 일련의 개혁으로 진나라는 옛날의 부정부패와 허약함이 사라지고 국력은 날로 신장되어 갔다.

2.2.2. 진 헌공의 대외 진출

헌공 11년(기원전 374년), 주나라의 태사 담[8]이 헌공에게 인사하며 주나라와 진나라는 나눠졌다가 500년 뒤에 합쳐지는데, 17년 뒤에 패왕이 출현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헌공 19년(기원전 366년), 위 혜왕, 한 의후가 함께 현왕을 위협해 그 입을 빌려 근왕병을 일으키고자 했다. 진군은 낙양에서 위군과 한군을 쳐서 주 현왕이 헌공에게 상을 내리니 진나라의 위세가 더욱 커졌다.

헌공 21년(기원전 364년), 헌공은 위나라를 쳐서 석문 등 하서의 고토를 수복했다. 그리고 위군 5만명을 죽였다. 하서 땅은 원래 목공 때 진(晉)나라에게서 획득한 영토였다. 그 이후 그 땅을 빼앗겼는데, 국력을 신장시켜 되찾은 것이었다. 주 현왕은 그 일을 축하하며 보불(흰 실과 검은실, 푸른 실로 도끼 모양과 두 개의 己자를 수놓은 의복)의 복장을 하사하였다.[9]

헌공 23년(기원전 362년), 진군은 소량을 쳐서 위군을 크게 물리쳤다.[10] 그리고 위군 장수인 공숙좌를 포로로 잡았다. 또한 방성을 차지했다. 그 후 공숙좌를 위나라로 돌려보냈다.

헌공 24년(기원전 361년), 헌공이 죽고[11] 그 아들 영거량(嬴渠梁)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상앙을 등용해 진나라를 부국강병의 길로 이끈 효공이었다.


[1] 《사기색은》(史記索隱)에 기록된 이름.[2] 《여씨춘추》(呂氏春秋)에 기록된 이름.[3] 즉 헌공 입장에선 작은 할아버지가 후위를 먼저 찬탈한 것이다. 영공의 숙부가 간공이었지만 영공이 간공보다 나이가 많았다고 한다.[4] 진나라 군주들도 무능했지만, 위 문후가 매우 유능한 탓이 크다. 게다가 대진 전선에 배치되었던 것이 오기였으니, 오기가 실각하기 전까지 위나라는 싸우기만 하면 이겼고, 진나라는 싸우기만 하면 족족 패배했다.[5] 옹의 귀족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군주의 권한을 강화시키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고려의 인종이 묘청의 말을 듣고 서경으로 천도하려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6] 즉 군현제를 실시했다는 말이다. 단, 다른 나라도 조금씩 실시하였다.[7]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감시 효과가 생겨난 것이다.[8] 이 인물은 《도덕경》의 저자인 노자로 추측되는 3인 가운데 한 명이다. 다른 한 사람은 노담(老聃){혹은 이이(李耳)}, 또 다른 한 사람은 노래자(老萊子)였다.[9] 이것의 내막을 보면 실로 씁쓸한데, 주나라가 위나라와 한나라 등에게 무시당한 것을 보복한 것이 기뻐서이기도 하지만, 진나라를 축하해야 할 만큼 주나라의 권위가 바닥을 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10] 전에는 오기가 지켜서 감히 진나라가 쳐다보지도 못했던 땅이었다.[11]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가 위군이 쏜 녹슨 화살에 맞아 쇠독에 의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