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 군주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시조 | - | - | - |
비자 | 진후 | 공백 | 진중 | |
추존 국군 | 초대 국군 | 제2대 국군 | 제3대 국군 | |
장공 | 양공 | 문공 | 헌공 | |
제4대 국군 | 제5대 국군 | 제6대 국군 | 제7대 국군 | |
출자 | 무공 | 덕공 | 선공 | |
제8대 국군 | 제9대 국군 | 제10대 국군 | 제11대 국군 | |
성공 | 목공 | 강공 | 공공 | |
제12대 국군 | 제13대 국군 | 제14대 국군 | 제15대 국군 | |
환공 | 경공 | 애공 | 혜공 | |
제16대 국군 | 제17대 국군 | 제18대 국군 | 제19대 국군 | |
도공 | 여공공 | 조공 | 회공 | |
제20대 국군 | 제21대 국군 | 제22대 국군 | 제23대 국군 | |
영공 | 간공 | 후혜공 | 출공 | |
제24대 국군 | 제25대 국군 | 초대 국왕 | 제2대 국왕 | |
헌공 | 효공 | 혜문왕 | 무왕 | |
제3대 국왕 | 제4대 국왕 | 제5대 국왕 | 제6대 국왕→초대 황제 | |
소양왕 | 효문왕 | 장양왕 | 시황제 | |
제2대 황제 | 제7대 국왕 | |||
이세황제 | 자영 | |||
추존 | ||||
정공 · 이공 | ||||
삼황오제 · 하 · 상 · 주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한 삼국시대 · 사마진 · 오호십육국 · 남북조 · 수 · 당 오대십국 · 송 · 서하 · 요 · 금 · 원 · 명 · 청 중화민국 국가원수 · 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 }}}}}}}}}}}} |
진(秦)나라 20대 국군 영공 靈公 | ||
성 | 영(嬴) | |
씨 | 조(趙) | |
휘 | 실전 | |
할아버지 | 진회공(秦懷公) | |
숙부 | 진간공(秦簡公) | |
아버지 | 진소자(秦昭子)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415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424년 ~ 기원전 415년 |
[clearfix]
1. 개요
진나라의 20대 군주. 진 회공의 손자. 진 소자의 아들. 진 헌공(秦獻公)의 아버지. 진 간공의 조카. 《사기》 <진시황 본기>에는 시호가 '진 숙령공'(秦肅靈公)[1]으로 기록되어 있다.2. 재위 기간
진 영공 원년(기원전 424년), 진 헌공을 낳았다.진 영공 3년(기원전 422년), 오양에 머물며 상치를 만들어 황제 헌원씨에게 제사지내고, 하치를 만들어 염제 신농씨에게 제사지냈다.
진 영공 6년(기원전 419년), 위(魏)군이 소량에 머물며 성을 세우자 진나라가 군대를 몰아치니 2년 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진 영공 8년(기원전 417년), 위군은 진군을 물리치고, 소량에 다시 성을 쌓았다. 진군은 위군의 방어 기지 공사를 막지 못했다. 같은 해 하백에게 여자를 바쳤다. [2]
진 영공 10년(기원전 415년), 번방성을 보수했고, 적고에 성을 쌓았다. 같은 해 진 영공이 죽어 구리의 진 도공의 무덤 서쪽에 묻혔다. 그런데 아들 진 헌공이 잇지 못하고, 진 소자의 아우 진 간공이 즉위했다. 이에 진 헌공은 위나라로 망명했다.
[1] 《사기지의》(史記志疑)의 저자 양옥승(梁玉繩)은 '숙'(肅)자가 잘못 기록된 글자라고 했다.[2] 여담이지만 같은 시기에 위문후가 업의 현령으로 임명한 서문표는 하백에게 죄없는 여자를 바쳐 제사지내는 사기꾼 무당과 그 공모자들을 처형함으로써 풍속을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