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8-16 23:58:13

상앙


사기 | 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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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鞅 | Shāng Yā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hangyang.jpg
출생 기원전 390년 (추정)
위(衛)나라
사망 기원전 338년 (향년 52세)
작위 상군(商君)
(姬)
공손(公孫), 위(衛), 상(商)
이름 (鞅)
최종 직위 대량조(大良造)

1. 개요2. 인생 전반기3. 진에서의 변법
3.1. 인정을 받기까지3.2. 개혁의 내용
4. 몰락과 최후
4.1. 사후
5. 평가
5.1. 옹호5.2. 비판
6. 기타7. 창작물8. 둘러보기

1. 개요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재상이자 법가 정치가. 제나라관중, 북송왕안석, 명나라장거정 등과 더불어 중국사에 이름을 남긴 변법가(變法家)이기도 하다.

2. 인생 전반기

본래 위(衛)나라[1] 군주의 서자인 공족으로써 본명은 공손앙(公孫鞅)[2]이며 그 외에 '위앙'(衛鞅)등으로도 불렸다. 또한 훗날 진나라에서 상읍(商邑)을 봉지로 받아 상을 씨로 사용하여 '상앙(商鞅)'이라고 부른다.[3][4]

사기》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형명학(刑名學, 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학문)에 관심을 가졌고, 성인이 되어서는 고국을 떠나 위(魏)나라의 재상인 공숙좌의 가신이 되었다. 공숙좌는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위 혜왕[5]에게 추천하지만 혜왕은 공손앙을 등용할 생각이 없었다. 후일 공숙좌가 병으로 죽기 전에 문병 온 혜왕에게 '왕께서 공손앙을 쓰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죽여서 후환이 없게 하소서'라고 조언했지만, 막상 말을 하고보니 그 재능이 아까워 공손앙을 불러서 '왕에게 그렇게 말했으니 빨리 떠나도록 해라'라고 말했다. 그 말에 공손앙은 "왕이 저를 쓰라는 말도 안 들었는데 죽이라는 말은 듣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위나라를 떠나지 않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혜왕은 노망이라 여기고 그냥 공손앙을 내버려뒀다.

공숙좌의 동생 공자 앙도 위혜왕에게 상앙을 추천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3. 진에서의 변법

3.1. 인정을 받기까지

결국 공숙좌는 병석에서 세상을 떴고, 후견인을 잃은 공손앙은 진 효공(孝公)이 내건 구인령을 듣고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향했다.

각처에서 몰려온 제자백가의 인재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상황에서 효공과 대면할 수 있는 지름길을 찾으려 연구한 끝에 효공이 총애하는 신하인 경감(景監)이란 자[6]에게 줄을 대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효공을 알현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처음 효공을 만났을 때 삼황오제의 도인 '성인의 도'를 설파했으나, 단기간에 강국의 반열에 올라가기를 원한 효공은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이런 왕도론 따윈 아웃 오브 안중이어서[7] 내내 코를 골며 졸았다.
상앙은 재차 경감에게 부탁해서 효공을 두 번째로 만났는데, 이번에는 하나라-은나라-주나라 3대의 성군들의 정치철학인 '천자의 도'를 설파했다. 그러자 효공은 저번보다는 관심을 기울이는 듯했으나 그다지 솔깃한 기색은 아니었다.
사정사정해서 세 번째로 효공을 만난 상앙이 '패자의 도'를 소개하니 비로소 효공은 상앙의 말에 흥미를 가졌다.
이후 상앙이 네 번째로 효공을 만난 자리에서 패자의 도를 상세히 설명하자 효공은 몇날며칠이 지나도록 넋이 나간 채 상앙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당시 진나라는 사실 내부 사정이 썩 좋지 않았다. 국력도 그저 지방의 중견세력 정도였고, 무엇보다 왕권은 진나라 자체가 대대로 왕가와 귀족세력이 나눠가지던 시국에 효공 몇 대 전부터는 아예 귀족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효공은 이런 상황을 타파하고 좁게는 왕권을 키우고 넓게는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으니, 이 목표에 적합하는 상앙은 곧잘 효공의 총애를 받고 권신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상앙은 효공의 지지를 등에 업어 군제, 세제, 법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를 시행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이로 인하여 진나라는 일개 주변국에서 중앙집권화된 군사강국으로 성장하였다. 행정적으로는 농업에 중점을 두어 진행되었고, 자연스레 귀족의 권력은 줄어들었다.

3.2. 개혁의 내용

상앙이 추진했던 개혁, 즉 변법은 당시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였다. 천대받는 서생이었던 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자신의 정치사상과 법가를 실현할 나라로 진나라를 선택했다. 마침 강력한 부국강병을 원했던 효공과 뜻이 맞아떨어져 2류에 불과했던 진나라를 전국칠웅 최강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상앙 변법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8]
  • 십오제(什伍制)[9]: 5가구/10가구를 한 단위로 묶어 상호감시 체제를 만들었다. 이는 납세와 징병의 단위가 되었고, 한 집에서 죄를 지으면 같은 단위로 묶인 나머지 네 집도 연좌제를 적용해 처벌함으로써 상호 감시용으로도 활용했다. 이 제도는 훗날 명청대의 이갑제, 조선오가작통제, 일본 에도 막부의 고닌구미(五人組)제와 같이 후세의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 심지어 근현대 조선총독부북한(소위 5호담당제)도 활용할 만큼 효과가 좋았다. 상앙의 가장 큰 업적으로, 동아시아 특유의 주민 통제 수단의 조상격이라 할 만하다.
  • 억상정책: 상앙은 강력한 중농주의자로 상업농업보다 낮게 보고 농업에 전념하기 위해 상업을 강력히 탄압했다. 당장 농업의 생산량을 늘린 사람은 요역을 면제해 준 반면, 상업을 하다가 실패한 사람은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그러나 상업을 매우 하찮게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에 후에 진나라가 어느 정도 국력이 상승하자, 농업과 상업의 균형있는 성장을 꾀했다.
  • 노예제 폐지: 노예제를 폐지하고 지주들의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이들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징세와 징병의 대상인 양민의 수를 늘려 재정과 군대를 확충했다.
  • 군공수작제(軍功授爵制): 누구라도 전쟁터에서 국가를 위해 공을 세웠다면 그에 마땅한 작위를 내렸고, 반대로 군공이 없으면 귀족이라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이는 국가에 대한 백성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민심을 모으기 위함이었으며, 반대로 국가나 군주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면 삼족을 멸하는 등 각종 엄벌을 내렸다.
    예를 들어 불이 났을 때 불을 끄는 데 공헌했거나 불을 끄다가 죽었다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거나 공을 세우고 죽은 걸로 인정했으나,[10] 반대로 그렇지 않았다면 전쟁터에서 도망치거나 반역을 꾀하는 걸로 규정했다. 이때 병사가 벤 적의 머리를 작위 1등급과 동등하게 적용하게 하면서 전시에 벤 적군의 머리를 '수급(首級)'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수급을 취했다"라는 말은 동시에 엄마 나 승진했어라는 의미였다. 평민에게 주어진 것은 하급의 작에 한정되었고 높은 작을 받으려면 아군의 손실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평민이 높은 작에 오르기는 어려웠지만, 어쨌든 전쟁에서 공훈을 제대로 세우면 더 많은 토지를 할당받고, 지위도 올라가 출세의 길이 열렸기 때문에 전투력이 급속히 상승하였고, 이것은 후에 진나라가 수행할 정복전쟁, 엄격한 법가의 규율과 엄청난 시너지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행정조직, 군대조직 모두 적군의 목을 딴 순서대로 계급이 정해지는 데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바로 불이익이 떨어지니 조직의 살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진나라는 이웃에 서융과 접해 있는 등의 상황으로 인해 군국주의적 분위기가 강했다고 하니 이러한 정책이 안착하는 데 별 탈이 없었을 것이다.
  • 악습 및 구습 타파: 진나라에 내려오는 악습이나 오랜 전통을 타파함으로써 백성들의 의식 향상을 도모하였다. 이 덕분에 진나라는 오나라, 월나라, 초나라같이 변방 오랑캐가 세운 야만국이란 중원 사람들의 기존 인식에서 벗어나게 됐다. 물론, 이는 쉽게 해결되는 게 아니었기에 진효공은 악습 퇴치령을 몇 번이고 내리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잔재가 남았는지 소양왕의 친모인 선태후의 경우, 죽으면서 자신의 애첩을 순장시키려다 철회했다. 심지어 훗날 호해가 자기 형제자매와 서모들을 순장한 걸 보면 순장은 완전히 퇴치되진 못했는 듯하다. 물론, 호해가 워낙 상상초월의 폭군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게다가 소양왕 시기에 선태후가 자신이 죽고 순장을 하려고 했을 때 용예라는 자가 말려 그만뒀다는 것을 보면 순장을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했다 쳐도 그게 나쁜 것이라는 인식은 확실히 심어준 듯하다.
  • 신고제 확립: 타인의 잘못을 신고한 자는 상을 주고 타인의 잘못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는 적에게 투항한 것과 같은 죄로 처벌하는 신고제를 확립했다.
  • 함양 천도: 원래 대대로 수도였던 옹 땅은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했기에, 지금의 서안(장안) 부근에 있던 함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중원으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다. 효공의 5대손인 시황제 때의 천하 통일 이후로 함양은 천하 굴지의 도시로 발전했으며, 시황제의 손자인 진왕 자영이 항우에게 피살되고 함양이 파괴될 때까지 수도로 번성했다. 함양이 훗날 장안이 되어[11] 전한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린 것은 유명한 이야기. 현재에는 과거보다야 위상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시안시라는 이름으로 산시성의 성도로 군림하고 있다.
상앙은 일명 신상필벌로 요약할 수 있는 법제 개혁을 단행했으며, 이때 제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행한 일화가 있다.
令旣具 未布 恐民之不信
법령은 이미 갖추어졌으나 백성이 새 법령을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아직 널리 알리지 않았다.
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
그래서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도성 저잣거리의 남쪽 문에 세우고
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
백성을 불러 모아 말하길, 이 나무를 북쪽 문으로 옮겨 놓는 자에게는 10금을 주겠다.
民怪之 莫敢徙 複曰
그러나 백성은 이것을 이상히 여겨 아무도 옮기지 않았다. 다시 말하길
能徙者予五十金
이것을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주겠다.
有一人徙之 輒予五十金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겨 놓자 즉시 그에게 50금을 주어
以明不欺 卒下令
나라에서 백성을 속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고 나서 새 법령을 널리 알렸다.

어떤 제도나 정책을 시행할 때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로 현대에도 종종 인용되곤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이목지신(移木之信)으로, 약속을 지켜서 신뢰를 얻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상앙이 이렇게 법 제도를 확실히 하자 시민들은 그 제도를 칭찬했는데, 상앙은 병사들을 시켜 그들을 잡아오게 했다. 이유인 즉 "법을 싫어하는 자 못지않게 찬양하는 자도 잡아야 한다"라고. 즉 '이런저런 감정을 넣지 말고 그냥 지켜라'는 의미다.[12]

당연하지만 노비제를 폐지하고 신분이 아닌 공과로만 직위고하를 논하겠다는 방식은 귀족들의 권력을 깎아먹겠다고 대놓고 선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특히 상앙은 좋게 말하면 우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괴팍한 인물인지라 툭하면 귀족들과 부딪히기 일쑤였다. 특히나 진나라 최고의 유력부족인 맹, 서, 백씨 부족의 반발과 당시 태사였던 감룡과 두지의 반대로 변법은 여러 번 중단 위기를 맞았다. 효공에게 이르는 반대 상소만 하루 수천 개였다 하니 실로 나라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앙은 주변의 격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변법을 멈추길 용납하지 않았고, 이에 맞서는 자는 엄벌주의로 일관했다. 이에 대한 유명한 일화로 당시 태자였던 조사와 갈등을 빚은 건이 있는데, 태자 조사가 변법으로 바뀐 상황이 불편하다며 일부러 어기는 모습을 보여주자 상앙은 태자 본인을 벌하진 못하였지만, 대신 그를 계도시키지 못한 스승의 책임이라 하여 두 스승 중 한 명인 공자 건(효공의 형이자 태자의 백부 즉 왕족)에게 죄를 물었고 다른 스승에게는 먹으로 죄명을 얼굴에 새기는 형벌을 내렸다. 이후 건이 또 죄를 저지르자 코를 베는 형벌에 처했고, 결국 건은 영원히 은둔하게 되었다. 이 일 때문에 건과 태자가 상앙에 대해 증오를 품게 할 정도였다.

이렇듯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많았으나, 이렇게 밀어붙여진 개혁은 진나라를 크게 안정시킨다. 《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行之十年 법령이 시행된 지 10년이 되자
秦民大說 진나라 백성은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道不拾遺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지 않으며
山無盜賊 산에는 도적이 없고
家給人足 집집마다 풍족하며 사람마다 마음이 넉넉했다.
民勇於公戰 백성은 나라를 위한 싸움에는 용감하고
怯於私鬦 사사로운 싸움에는 겁을 먹었다.
郷邑大治 도시나 시골이 모두 잘 다스려졌다.

이렇게 착실히 쌓은 국력을 바탕으로 상앙의 진나라는 하서(河西) 지역을 수복했고[13] 당시 마릉 전투 이후 흔들리는 위나라를 치자는 주장을 해 군사령관에 임명된 후 패권 국가였던 위(魏)나라를 제압하고 패자로 등극하게 되었다.[14] 이 과정에는 다소 졸렬한 꼼수가 있었는데, 상앙과 친분이 있었던 공자 앙(卬)이 위나라의 사령관이 되자 상앙이 회담을 구실로 그를 유인해 사로잡자마자, 기습대를 보내 사령관 없는 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것이다.[15]

노비가 줄고 양인이 늘어났으며, 또한 농사를 우대하고 백성들의 사기를 고취시켜 자진하여 병사가 되게 하였으므로 자연스레 귀족들의 권력이 줄고 왕권과 군사력이 강대해졌다. 상앙은 이 공로로 대량조에 오르게 되었으며, 이 시기의 상앙은 과장좀 보태 효공과 공동군주나 다름없는 위세를 누렸다. 또한 이 당시 제후에 봉해져 '상'땅을 받았으며 상앙이라 불린 것도 이 시기이다.

4. 몰락과 최후

진효공의 치세가 끝나갈 무렵, 상앙은 다른 이의 소개로 조량(趙良)이라는 숨은 현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상앙이 조량에게 직언해 줄 것을 부탁하자, 조량은 진목공 때의 명재상 백리해와 상앙을 비교해 말했다.
오고대부 백리해가 나라를 다스릴 때, 어진 정치를 펼쳐 모든 이들이 그를 존경했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세운 제도는 도리를 등지고 당신이 고친 국법은 이치에 어긋나니 이를 교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극형으로 사람을 다스리니 원한을 사고 재앙을 쌓아놓았습니다. 백리해가 나라를 순시할 때 무장한 호위병을 동행할 필요가 없었으나, 당신은 무장한 병사들이 탄 수십 대의 수레가 없으면 외출조차 하려 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처지가 이토록 위태로운 데도 더 오래 영화를 누리기를 바라십니까? 관직과 영지를 돌려주고, 물러나 꽃과 풀에 물을 주며 사는 게 어떻습니까? 숨어 사는 현인을 세상에 나오게 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고아를 보살피며 부모와 형을 공경하고, 공을 세운 자를 추천하며 덕있는 이를 존중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한다면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까지 더 많은 영지를 탐내며 진의 정치를 농단하니 백성들의 원한을 사고 있습니다. 진왕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어찌 진나라가 당신을 제거하는 명분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당신의 파멸은 한 발을 들고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요약하면 덕으로 다스려 주변의 호의를 받은 백리해와 정반대로 법과 엄벌로 다스린 상앙은 주변에 적의만을 뿌렸으니, 앞으로 만수무강 하고싶다면 일선에서 물러나 인재를 천거하는 등 후견인 노릇이나 하라는 의미였다. 당연하게도 상앙은 이 말에 따르지 않았다.

조량이 말한 대로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는 점차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상앙에게 증오를 품고 있던 태자(혜문왕)는 즉위함과 동시에 상앙의 반대파를 규합했다. 이들은 이제껏 상앙의 변법에 반대를 해온 진나라의 주요 원로세력이었다 여기에는 옛날에 혜문왕 대신 벌을 받은 공자 건도 포함돼 있었다. 왕과 귀족이 단결하여 상앙을 탄핵시키고자 하니 얼마 못가 그의 탄핵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당연하지만 이들은 상앙을 가만히 냅둘 생각이 없었고, 상앙또한 자신이 반역도당으로 몰려 참수당하기 전에 위(魏)나라로 망명하고자 국경이었던 함곡관을 밤에 몰래 넘으려고 했다.[16] 그러나 "새벽 첫닭이 울 때까지", 즉, 해 진 이후부터 해 뜰 때까지 관문을 여는 건 금지돼 있다는 게 진나라의 법이었기에[17] 할 수 없이 그날은 여관에 머물고자 했다. 그러나 여관은 여행증이 없는 사람을 받아줄 수 없는 법이 있었기에 그는 여관에서도 거절당했다. 한때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가 한순간 동네 여관에도 못 지내는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것. 당연하지만 이런 법들을 내세운 것은 다름아닌 상앙 본인이었다. 그야말로 자승자박의 극치. 정작 자신의 목숨이 급해지자 자신이 만든 법들도 까맣게 잊고 어기고자 했으며 자기가 만든 법 때문에 자기의 목숨이 위험해지게 되었으니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작법자폐'(作法自斃)다.

상앙은 결국 어찌어찌하여 위나라로 갔지만,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은인이었던 공자 앙을 속이고 감금시켜서 전쟁에서 이겼던 일[18]을 잊지 않았기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상앙이 다른 나라로 떠나려고 하자,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다른 곳으로 고이 보내면 진나라의 보복이 있을까봐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상앙은 할 수 없이 살기 위해 일단 자신의 영지였던 상 땅으로 가서 군대를 모았는데, 강대한 진나라 군대와 맞설 자신이 없어 일단 정현(鄭縣)을 공격해 영토와 인력물자를 확보하려고 했다.[19] 하지만 민지라는 땅에서 혜문왕의 군대가 그의 배후를 쳐 대패하고 포로가 됐으며 결국 살해당하고 만다. 상앙의 시신은 함양으로 보내져 거열형에 처해진 다음에 분해된 조각들이 각 지방에 보내졌고, 연좌제로 삼족이 몰살당했다.

그는 생전에 《상군서》라는 책을 집필해 남겨놓았다. 이는 전국시대 역사연구에 아주 중요한 사료가 되며 상앙 자신의 생각을 아주 잘 알 수 있어 귀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선진문헌이 다들 그러듯 상앙 본인이 집필한 게 아닌 걸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20] 하지만 유비가 죽을 때 유선에게 《상군서》를 열심히 읽으라고 유언한 걸로 보아 이미 후한-삼국시대에도 널리 퍼져있었던 듯하다.[21]

4.1. 사후

그렇게 상앙이 처절하게 죽었으니, 귀족들은 자연스레 변법이 생기기 전 과거로 회귀할 것 만을 꿈꿨고 또한 자신들을 규합한 혜문왕이면 자연스레 그렇게 해줄 것이라 믿었다. 당연하게도 혜문왕은 개인적인 복수를 끝맺자마자 변법을 유지하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이들을 제대로 통수치게 된다.

혜문왕은 과거의 일로 상앙에게 앙심을 품기는 했으나, 그와 별개로 위정자의 입장으로써 왕권과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선 상앙의 변법을 유지시키고 귀족들을 억누를 필요가 있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고 오히려 변법의 덕으로 국력이 증가하는걸 실시간으로 확인한 이후 그걸 신봉하다시피 할 정도로 충실히 따랐다. 당연히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였으나 이미 왕권을 제대로 굳힌 혜문왕은 자신의 눈에 특출나게 거슬리는 이들을 일일히 숙청해가며 변법 시행을 멈추질 않았고, 이후 그의 대에 진나라는 명실상부 전국칠웅 최강국의 위용을 갖추게 되며 혜문왕의 현손진 시황제천하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5. 평가

법가를 따르는 정치인으로써 상앙은 분명 능력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당장 왕의 지지를 등에 업은 덕택이라고 해도 단 1대만에 왕권이 귀족들을 억누를 수 있게 성장시켰음은 물론, 이후 그가 세운 변법이 혜문왕까지 물려내려가 지방에서나 자리를 굳히던 진나라를 최강국으로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상앙의 변법은 변방 강국에 불과했던 진나라를 단숨에 강대국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는 훗날 진나라의 천하통일의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만이 모든 걸 이룰 수 있다고 믿었으며 교육과 교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사람의 마음이나 인정 등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법가 성향이 짙은 제갈량조차 상앙은 덕으로 교화함이 부족했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가혹한 법률과 억압적인 정치는 반대파를 양산했고 결국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에 목숨을 잃었다.
"상군(상앙)은 천성이 각박한 사람이다. 효공에게 등용되기 위해 제왕의 도를 말한 것은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인 것일 뿐 본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왕의 총애를 받던 경감을 이용했고, 자리에 오른 뒤에는 공자 건을 처형하고 위나라 공자 앙을 속였으며 조량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이 또한 그가 각박한 자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나는 일찍이 저 《상자》(商子)[22]의 개색과 경전 등 여러 편을 읽었는데, 그 내용은 그의 행적과 비슷했다. 진나라에서 그의 악명이 높았던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사마천
다만 그는 법가에 대한 신뢰가 지나친 수준으로 강했고, 또한 본인의 성품도 좋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강력한 만이 모든 걸 이룰 수 있다고 믿었으며 교육과 교화, 사람의 마음이나 인정 등에 대한 요소는 모조리 필요없는 것이라 치부했다. 법가 성향이 강한 제갈량조차 상앙은 덕으로 교화함이 부족했다고 지적했으며 《사기》를 쓴 사마천또한 상술한대로 상앙을 두고 '인정머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잔학무도한 정치가'로 평가했다.[23] 사마천은 이외에도 《사기》 <열전>의 '혹리' 편을 쓸 당시 그들에 대한 평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은 혹독한 법령에 있는 게 아니라 도덕에 있다"고 천명한 적이 있다. 물론, 본인도 상앙이 나라를 강하게 만든 건 인정했다.

상군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상앙 본인조차도 자신의 방법은 단기간에 나라를 강성하게 할 수 있으나 덕치에 있어서는 은, 주에 못 미친다고 시안하였다.
"상앙은 진국을 강하게 만든 천재였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은인을 배반하였으며 진나라 백성들에게 지나치게 긴장의 끈을 강요하다가 그 긴장의 끈이 끊어지자 자신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사마광

반면에 유교 문화가 꽃피운 송나라 시대에 살았던 사마광은 옛 제도를 유지하자는 구법당에 속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자는 신법당과 대립했다. 그런데 그런 사마광이 유교의 안티에 가깝던 법가를 따른 데다가 나라의 제도를 이것저것 뜯어고친 상앙을 두고 나라를 강하게 만든 천재라고 평가했으니 사마광이 상앙을 상당히 호평했다고 할 수 있다.[24]

그리고 상앙이 철저한 법치주의자로 평등주의를 내세웠지만 지나치게 가혹한 법률을 집행한 탓에 원한을 많이 샀다. 1200년 후 상앙처럼 철저한 법치주의자이지만 가혹한 형벌을 지양하면서 인권을 우선시한 포청천과는 대조적이다.

5.1. 옹호

상앙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강력한 법치가 주로 대토지 소유자 출신인 식자층의 기득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요컨대 상앙에 대한 선비들의 부정적인 서술은 호족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출신배경을 감안하여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법이 명확하지 않고 관례에 따르는 일이 많아지면 행정/사법에 인적/물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개입할 수 있는 지주 호족/귀족들에게 유리하다. 일례로 초기 법가이자 상앙에게 큰 영향을 미친 위나라의 명재상 이회는 유가의 예법(관습법 혹은 관례)이 귀족의 특권을 옹호하는 기능을 한다고 여겨 예법의 실천에 반대한 바 있다. 다른 예로 한고조 유방은 함양에 입성한 후 약법삼장[25]을 발표하고 법치를 대폭 완화하였는데, 이는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포석이 깔려있는 것이었다.

또한 상앙의 변법이 지나치게 대민통제에 치중했다는 비판도 오류가 많은 것이 애당초 전 세계 그 어느 지역과 문화권을 막론하고 전근대 왕조들 중 대민통제를 추구하지 않았던 왕조는 없다. 즉 전근대 시절 피지배민들을 상대로 있었던 대민통제로 말할 것 같으면 근대에 접어들면서 인권 의식 등이 발달하기 이전 인류 역사의 전반적인 잔학함을 지적해야지, 유독 상앙에게만 그와 같은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중국 대륙의 경우에는 이미 법가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인 상나라 시절에도 온갖 지독한 대민통제와[26] 인신공양이 가득했던 곳인데 이에 비하면 상앙의 진나라는 차라리 훨씬 온건한 축에 속했다.

지방 유력자들에게 토지를 빼앗기는 등의 횡포에 시달리던 전근대 중국의 가난한 평민 처지에서는 가혹할지언정 평등한 법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당장 사마천은 사기에서 변법 시행 후 10년이 지나자 백성들이 만족해하고 사람마다 마음이 넉넉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사사로운 싸움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상앙의 가혹하지만 공평한 법은 역설적으로 밑바닥 백성에게는 힘 센 이의 횡포를 막는 보호막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수급을 베어오면 관작을 올려주는 제도는 신분상승의 기회가 크게 제약돼 있던 전근대 사회에서 능력주의에 따른 출세를 국가에서 보장해 주는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상앙변법이 상앙이 죽은 뒤에도 진나라에서 쭉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패도를 꿈꾸던 왕의 의도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어느 정도 지지받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는데, 상앙 변볍과 관련하여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약자를 억압하는 것은 자유이고, 해방하는 것은 법이다.

심지어 상앙은 진나라 당시에도 높게 평가받았다. 이는 진시황 때 축객령이 내려졌을 때 이에 대해 이사가 간축객서를 올렸을 때 드러나는데 이사는 여기서 진효공이 상앙의 변법을 채택했기에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5.2. 비판

다만 식자들이 단순히 특권층이었고, 법가와 다른 사상인 유가 신봉자라서 상앙을 극딜했다는 것 또한 여러 가지 제반 사항을 고려해서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상앙에서부터 시작된 법가적 통치가 빠르게 중국 전역으로 번진 이후, 처음 발생한 가장 큰 반란인 진승과 오광의 난은 권력자들의 궐기가 아닌 대규모 민란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앙은 물론이고, 그의 정책을 계승한 진 제국의 황제인 시황제, 그리고 그를 곁에서 보좌했던 이사와 법가의 대표적 사상가인 한비자와 같은 여타 인물들을 혹독하게 극딜했던 사마천은 극렬 유가 신봉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가 살았던 한나라에 무조건 충성하는 인물도, 부유한 권력자하고도 거리가 있었다. 심지어 항우여후를 실질적인 통치자로 보고 열전이 아니라 본기에 넣은[27] 태사공은 왜 상앙과 그 후예들을 비판했으며, 후대의 정치가인 제갈량은 왜 상앙의 법가적 통치를 무시하지는 아니했으나 한편으로는 상앙과 법가가 가진 한계를 고찰했을까?

일단 법가에서 말하는 '법'과 근대를 거쳐 지금에서 확립된 우리가 알고 있는 '법'의 체계의 사상적 근간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긍정적인 평가에서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거론하며 은근슬쩍, 상앙을 위시한 법가가 추구한 법의 근간을 만민의 합의에 의거한 법의 정신과 동일시하고 있으나 상앙이나 한비자, 이사 같은 법가에 속한 이론가와 정치가의 법의 근간은 군주의 절대 권력 확립, 이기적이고 믿을 수 없는 인간을 혹독한 형벌과 적당한 상을 통해 군주가 철저히 통제하는 것에 두고 있으며, 법가를 따르는 정치가 중 군주는 이러한 법 체계와 여러 모략 등을 통해 신하와 백성들이 감히 군주의 생각에 반항조차 할 수 없게끔 통제케 하고, 신하는 군주가 제시하는 의견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면서 군주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처세에 초점을 두었다. 물론 이토록 군주의 권위와 권력이 강하고, 신하가 군주의 의중에 유연하게 처신하도록 할 때, 이 군주와 신하가 사회 전반의 발전과 역량 강화, 백성의 삶에 대한 안정을 염두에 둔다면, 강력한 권위와 그에 순응하는 정책 제안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며 이것이 진나라가 거대 제국으로 발돋음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러나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고작해야 21년이라는 통치기간 끝에 허망하게 붕괴된 것, 그리고 법가적 통치를 통한 강력한 전제 군주를 꿈꾸었던 한무제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법가적 사상의 한계에는 이토록 강력한 권위와 권력을 쥔 군주 스스로가 어떤 인격과 목표를 지녀야 하는지, 그것이 강화된 권력에 의한 통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고찰이 빠져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또 상앙의 정책이 전국시대와 같은 정복전 체제에서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천하가 평정되어 전쟁이 적어진 이후에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억압하게 되어 있다는 비판도 있다. 원래 진나라의 법이 엄격해도 전공으로 얻은 작위 반납으로 처벌을 면하는 구조였는데, 이건 달리 해석하자면 까다로운 법과 연좌제로 백성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어서 그 처벌을 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공을 세워야만 하는 착취 시스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대규모 전쟁이 사라져서 전공을 챙기지 못하게 되니 백성들(특히 피정복민)은 가혹한 진나라 법의 처벌에 그대로 노출된다. 그래서 결국 민심 폭발로 이어지는 것이다.

6. 기타

상뤄시에는 상앙광장이 있다.#

7. 창작물

  • 2009년 드라마 대진제국1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효공에게 사실상 국정을 일임받고 법가사상으로 소국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나 기득권세력을 중시한 혜문왕에 의해 처형된다. 상앙이 처형되는 씬으로 드라마는 막이 내린다.
  • 고우영 십팔사략에서 등장한다. 보통 상앙이 늙은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는 데 비해, 여기서는 눈매가 치켜올라가서 매서운 인상의 청년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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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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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晉)에서 갈라져 나온 위(魏)나라가 아니라 주 무왕의 아우 강숙 봉을 시조로 하는 위(衛)나라이다.[2] 중국 발음 궁쑨양[3] 상앙의 봉지인 상읍은 무관 근처에 있다.[4] 정작 생전에 상앙이라 불린 시간이 극히 짧았다. 상 땅을 봉지로 받은 건 진효공 21년인데 진효공은 이후 3년 뒤에 죽기 때문이다.[5]맹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양 혜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위나라가 영토를 상실하면서 수도를 대량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 시기 이후의 위나라를 수도의 이름을 따서 양나라라고도 불렀다.[6] 경감은 이름이 아니고 경씨 성을 가진 환관이라는 뜻이다.'감'이 춘추전국시대에는 환관을 뜻하기도 했다.[7] 애초에 효공의 입장에서는 아직 일개 변방국인 진나라가 성인의 도니, 천자의 도니 따지는 건 먼 미래의 얘기고, 당장 주변 국가들을 제압하고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패자의 도가 더 와닿았을 것이다. 실제로 법가가 본격적으로 비판받은 것도, 성인의 도니 천자의 도니 따질 만한 여유가 된 것도 제대로 된 통일왕조인 한나라 때부터였다.[8] 이는 상앙이 처음부터 전적으로 만들었다기보단 전대 왕들이 구축한 제도를 가져온 것도 다수 있다. 다만 변법의 의의는 결과적으로 귀족들에게 밀려나 폐지할 수 밖에 없었던 전대 왕들과 달리 귀족들의 반발에 밀리지 않고 이를 끝까지 실행시켰음에 있다.[9] 십오(十五)가 아니다. 갖은자이기도 하면서 각각 "열 사람", "다섯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10] 동아시아에서는 근대 전까지는 목조 건물이 대부분이라 한번 화재가 나면 번질 위험성이 매우 컸고 특히 실화라면 모를까 방화라면 방화 그 자체만으로도 범법적인데 방화범에게 명백한 목적(재물 약탈 등)이 있다면 더 골치아파진다. 옛날엔 방화는 중죄고 화재는 중대한 재난인 만큼 그걸 진압한 사람이 전공을 세운 것 취급을 받는 것도 아주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다.[11] 다만, 함양과 장안은 바로 옆이지만 다른 도시다. 함양은 위수 북쪽, 장안은 위수 남쪽이다. 한고제서한을 건립할 때 장안을 건설한 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 함양시는 아직도 서안시 북쪽에 존재한다. 바로 시안 셴양 국제공항의 소재지로 여기서의 "셴양"이 바로 함양이다.[12] 그냥 꼬장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의외로 현대 법리와도 통하는 바가 있는 중요한 행동이다. 법을 따르는 것에 사사로운 감정을 넣는 순간, 내용이 마음에 안 들거나 자신에게 불리한 것 같으면 설령 합리적인 법이더라도 무시하고 거부하려는 경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13] 원래 효공의 조상이었던 목공이 진(晉)나라의 내분을 수습해 주고, 진 혜공(문공의 이복 동생)을 군주로 세워주는 조건으로 황하 이서 지역을 받기로 했는데 결국 받지 못하자 힘으로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진나라 문공의 아들인 진 양공 시대에 이걸 빼앗겼고, 진나라가 분열된 후 위(魏)나라가 차지하고 있다가 손에 넣은 것이다.[14] 이 패전 이후 위나라의 국력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고 하서 지역을 잃으며 기존 수도인 안읍이 위험해지자 대량으로 천도했다.[15] 드라마 대진제국에서는 공자 앙이 무능하고 오만한 찌질이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이 공자 앙도 공숙좌처럼 위 혜왕에게 상앙을 적극 추천했던 인물이었고 상앙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준 인물이었다. 비록 공과 사를 엄격히 분리해야 하는 전쟁이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은인에게 회담을 요구해놓고서 회담장소에서 납치하는 상앙의 비열한 행동은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 다만 이런 사회적 규탄과 별개로 이 편법에 제대로 맛들인 진나라는 상대국과 회담하자면서 초청을 해놓고 상대국의 왕이나 고관을 납치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16] 함곡관은 크게 보면 위나라를 동-서로 나누는 중간 지점에 설치됐으니, 상앙의 변법에 힘입어 위나라 영토를 절반이나 잡아먹은 것이다.[17] 나중에 혜문왕의 아들이었던 소양왕 시대에 그 유명한 제나라맹상군이 진나라에서 달아날 때도 이런 상황에 놓였는데 그의 식객 중에 닭 울음소리를 기똥차게 흉내낼 수 있는 자가 있었기에 속아 넘어간 수문장들이 문을 열어줘서 달아날 수 있었다. 국경을 지키던 이들은 법을 어긴 셈이었지만 (가짜라곤 해도) 닭 우는 소리가 들리자 연 건데 어쩌겠냐는 식으로 그냥 넘어갔다고 하며, 혹은 닭 울음소리를 흉내낼 수 있는 자가 닭 울음소리를 내자 그 동네 닭들이 죄다 같이 울음소리를 내서 그냥 통과시켰다는 말도 있다.[18] 전쟁에서 아무리 공사를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회담을 청하고선 상대 지휘관을 포로로 잡은 것은 당시 시대상으로 봐도 용납하기 힘든 폭거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전쟁으로 위나라의 국력은 하락세를 걸었으니 상앙은 철천지 원수였던 셈.[19] 상앙이 죽던 해에는 이미 정나라가 멸망한지 한참 뒤였다.[20] 심지어 상앙 사후 수십 년 뒤에 발생한 장평대전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이 정도면 추정이 아니라 확실하다.[21]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흔히 유비는 인덕의 아이콘으로 실용적인 모습을 떠올리기 어렵지만 유선에게 남긴 유언에는 상군서와 같이 치국을 위한 여러 서적들을 권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인품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22] 상앙의 법가 이론을 담은 책으로, 위에 나온《상군서》와 같은 책이다. 귀족의 특권을 억누르고, 엄벌주의와 연좌제를 실시하는 등 혹독한 통치의 전형을 보여준다.[23] 이는 시대상의 차이도 있는데, 한나라는 진나라의 법 체계를 잇는 한편, 정치에 있어서 법가보다는 도가를 우선시하여 백성들을 상대로는 진나라 시절에 비해 한층 살갑게 풀어주었다. 이는 한나라의 시조인 유방이 이런 인덕으로 사람을 모으고자 했었으며 또한 초한전쟁 이후 중원의 인력이 크게 쇠한지라 백성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입장에서 진나라의 명사이자 법가의 대표격인 상앙을 마냥 좋게 평가하긴 힘든 점도 있었을 것이다.[24] 어쩌면 당시 신법을 주창하여 신법당을 이끌었던 왕안석과의 애증 때문일 수도 있다. 구법당의 사마광은 신법당의 왕안석과는 정적관계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 존중하고 공경하는 관계였다. 또한 사마광은 왕안석의 신법의 가치는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신법이 가져다올 부작용을 우려했고 실제로도 부작용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즉 본인은 무조건적으로 개혁을 기피하는 것도, 개혁가를 혐오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정치성향이나 상앙이 개인적으로 한 일과 무관하게 '상앙의 개혁으로 진나라가 강해진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기에 사실 그대로를 쓴 것이라 볼 수 있다.[25]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를 입힌 자와 재물을 훔친 자 역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행한다. 이 세 개의 법만을 남기고 다른 모든 법을 폐지하였다.[26] 예를 들어 백성을 뜻하는 한자 자는 본래 노예로 잡혀온 사람의 눈()에 날붙이를 쑤셔넣어 멀게 만드는 것에 기인한 상형문이었다.[27] 후한 초기에 편찬된 한서에는 항우본기와 여후본기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