逐客令
1. 개요
중국의 통일 이전, 진의 시황제가 시행했던 외국인(客)에 대한 추방령.해당 일화에서 유래된 관용구로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을 돌려보낼때 "축객령을 내린다"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외교 용어이자 라틴어인 페르소나 논 그라타를 축객령으로 번역하여 보도 등에 사용하기도 하며, 두 문구는 다른 언어이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의미이다.
2. 특징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에는 여러 나라 출신이 모여들어 일자리를 얻고 있었다.[1] 이 때문에 진나라 귀족들은 외국 출신의 인재들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받았다. 토목 기술자로 일하던 정국(鄭國)이라는 인물은 대규모 수거(관개수로) 사업을 진언하고 이를 승인받았는데, 이것이 진나라의 국력을 깎아먹으려는 한나라의 사주로 밝혀지자 귀족들은 간첩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외국인들을 모두 진나라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를 후에 시황제가 되는 진왕 정에게 진언했고, 진왕은 이를 받아들여 추방령을 선포하였다. 이 추방령이 축객령이다.축객령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 중에는 초나라 출신인 이사(李斯)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간축객서를 통해 타국인을 배척하는 것이 진에게 불리함을 지적함으로써 왕을 설득하였고, 결국 축객령은 철회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축객령의 원인을 제공했던 정국은 "수거는 단기적으로는 한나라에게 이익이 되겠지만 결국은 진나라에게 더 이익이 될 것"이라고 변명했는데 이게 먹혀서 결국 자기 손으로 공사를 마무리했다(…).[2]
3. 관련 문서
[1] 전국시대처럼 천하가 사분오열된 시기에는 어느 나라나 이랬다.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는 그만한 인물을 긁어모아야 하는 마당인데 국적 따질 상황이 아니니까…이는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자국에서 중용받지 못했거나 자국이 그다지 강한 나라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타국으로 넘어가곤 했다. 전국시대의 유명한 인물들을 보면 태어난 나라와 활약한 나라가 다른 이들이 더 많다. 단적으로 공자가 이렇게 중국 온 나라를 떠돌아다녔다.[2] 정말로 정국거가 완공된 이후 진나라에 흉년이 없었다고 한다. 전근대만 해도 농업이 국가산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감안하면 흉년이 없다는 것은 패널티 없이 국력을 쌓을 수 있다는 의미이니 정국의 말이 맞아떨어진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