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鄭國생몰년도 미상.
중국 전국시대 한(韓)나라의 인물.
2. 생애
전국시대 칠웅 중에서 최약체였던 한나라는 내심 상앙변법으로 강해진 진(秦)나라의 침공을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국력으로 맞설 길이 없어서 계략을 구사하니 바로 진나라를 피로하게 하는 계책, 일명 피진계다.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진나라가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유도하여 국력을 소진하게 하여 침략할 여력이 없게 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하여 정국이 진나라에 보내졌다.
정국은 궁녀를 추행하다 한나라에서 쫓겨난 척하여 진나라로 갔는데 육국의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진나라는 뛰어난 토목기술자였던 정국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여 줬다. 피진계에 따라 정국은 진나라 왕 영정에게 진나라를 흐르는 위수(渭水)의 지류인 경수(涇水) 중류에 위치한 중산(中山)에서 관중평야로 들어오는 지점인 호구(瓠口)까지 서북쪽은 높고 동남쪽은 낮은 지형이라는 걸 이용해 호구에서 북산(北山)을 따라 동쪽으로 위수의 또다른 지류인 낙수(洛水)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수로를 파 경수의 물을 낙수로 공급하는 대규모 수리시설 건설을 제안하였다. 영정은 이를 옳다 여겨 받아들였고 진나라는 제안자인 정국의 지휘 아래 대규모 수로인 정국거(鄭國渠) 건설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국의 목적은 곧 발각되었고 이에 정국은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다. 정국은 "신이 처음에 간첩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수로가 건설되면 진나라에도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한나라는 잠시 목숨을 보존할 뿐이지만 진나라는 만세의 공으로 남을 것입니다."라며 영정을 설득하였고 일리가 있다고 여긴 영정은 정국의 목숨을 살려주고 수로의 공사도 계속 이어가도록 명하였다.
정국의 장담대로 정국거가 완성되자 위수 북쪽의 건조한 평원 지대에 물을 대면서 4만여 경(頃), 약 73,000 헥타르에 달하는 비옥한 농지가 새로 생겼고 이후 진나라가 위치한 관중에는 큰 흉년이 없었다고 한다.[1]
여담으로 이렇게 정국거가 한나라의 예상과는 반대로, 정국의 예상대로 진나라에게 유용한 결과로 돌아온 것은 진나라와 한나라의 주식 차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한나라는 관개사업이 딱히 중요하지 않은 조가 주식이지만 진나라는 관개사업이 중요한 밀, 보리가 주식이었기 때문에 한나라 입장에서는 관개사업으로 국력을 쏟아부어 낭비가 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실제로는 진나라의 생산량이 늘어나 진나라에게는 득만 되었다는 것.
한편 정국거와 별개로 진나라 귀족들은 정국을 빌미로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외국 출신 인재들을 모두 진나라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를 영정에게 진언했고, 영정은 이를 받아들여 축객령를 선포하였다. 축객령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 중에는 초나라 출신인 이사(李斯)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쫓겨날 위기에 처한 그는 간축객서를 통해 타국인을 배척하는 것이 진에게 불리함을 지적함으로써 영정을 설득하였고, 결국 축객령은 철회되었다.
[1] 허나 조나라 멸망 직전에 조나라에서 대기근이 들었고 조나라와 가까운 관중 지역에서도 기근이 들어 진왕 정이 조나라 정복을 미루려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라 정벌을 단행하고 성공시킨걸 보면 조나라보다는 나았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