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商)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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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E16350> 상(商) 제22대 국왕 고종 / 무정 高宗 / 武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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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호 | 고종(高宗) | |
| 왕호 | 무정(武丁) | |
| 시호 | 무정왕(武丁王) | |
| 성 | 자(子) | |
| 휘 | 소(昭) | |
| 아버지 | 소을(小乙) 렴(斂) |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13세기 전반 ~ 기원전 1192년 (추정)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1250년경 ~ 기원전 1192년경[1] |
| 배우자 | 부호(婦好), 부정(婦妌), 부계(婦嬕) 등 60여 명 | |
| 자녀 | 효기(孝己)[2], 조경(祖庚), 조갑(祖甲), 권씨(權氏), 소신타(小臣妥) 등 | |
1. 개요
무정중흥(武丁中興)상나라의 제22대(또는 제21대/23대) 국왕. 묘호는 고종(高宗), 왕호는 무정(武丁). 휘는 소(昭).
쇠락해가던 상나라를 다시 부흥시킨 명군으로, 후대에 무정성세(武丁盛世)라 불릴 만큼 강력한 왕권과 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그 이전의 상나라 왕들이 문헌상으로만 존재하거나 전설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무정은 갑골문을 통해 그 실존과 재위 기간이 동시대 유물로 검증된 최초의 중국 군주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3]
2. 생애
2.1. 즉위 이전
무정은 소을(小乙)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소을은 아들인 무정을 바로 궁궐에서 키우지 않고, 민간(하, 河)에서 자라게 하여 평민 및 천민들과 함께 섞여 살게 했다. 이때 무정은 힘든 노역도 마다하지 않고 다 같이 했기에 백성들의 고단한 삶과 농사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사치를 경계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 그의 스승은 감반(甘盤)이었다.2.2. 3년의 침묵과 인재 등용
왕위에 오른 무정은 즉위 초반 3년 동안 말을 아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書經)이나 《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왕의 3년상을 치르는 동안 묘막에 거처하며 침묵했고(양암, 亮陰), 상이 끝난 후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국사를 우려하자 그는 글로써 "내 덕이 선왕들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말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는 그가 섣불리 권력을 휘드르기보다, 총재(冢宰)에게 정무를 맡긴 뒤 자신은 뒤에서 묵묵히 나라의 기풍을 관찰하고 신하들의 됨됨이를 파악하며 정국을 구상했던 기간으로 해석된다.침묵을 깬 무정은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여 국정을 쇄신했다. 그는 죄수 혹은 노역꾼 신분이었던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등용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사기》에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무정은 꿈속에서 한 성인을 만났는데, 깨어난 후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신하들에게 찾게 했다. 그 결과 부암(傅巖)이라는 곳에서 성벽 쌓는 노역을 하던 죄수(혹은 인부)를 찾아냈는데, 그가 바로 부열이었다는 것이다. 무정은 그를 재상으로 삼았고, 부열은 무정을 보좌하여 상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현대 학계에서는 갑골문에 등장하는 '후작'(侯雀)이라는 인물이 부열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무정은 어린 시절 스승이었던 감반(甘盤, 혹은 사반)을 비롯해 망승(望乘), 지발(沚瞂), 적신(藉臣), 월(戉), 금비(禽匕, 소신 비), 서리(西吏) 지(旨), 창후 호(仓侯虎), 후고(侯告) 등 출신을 가리지 않고 능력이 뛰어난 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또한 남성뿐만 아니라 왕비인 부호(婦好), 부정(婦妌), 부계(婦癸) 등 여성들도 장군으로 기용하여 군사를 통솔하게 하거나 정사를 돕게 했다. 덕분에 소신왕 대부터 다시 쇠락하던 상나라는 그의 치세기에 반등하여 중흥을 맞이할 수 있었다.
3. 치세와 업적
3.1. 정복 전쟁과 영토 확장
무정의 재위 기간은 잦은 전쟁과 영토 확장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소신왕 대부터 상나라를 위협하던 주변 이민족들과 방(方)족들을 대규모로 정벌하여 복속시켰는데, 총 81개에 달하는 적국과 반란 세력을 평정했다고 전해진다.우선 서북방으로는 상나라 북서쪽에 위치한 강력한 유목 세력이었던 귀방(鬼方)을 3년 간의 끈질긴 전쟁 끝에 복속시켰으며, 토방(土方), 공방(贡方), 기방(基方), 구방(苟方) 등을 차례로 정벌하여 변경을 안정시켰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본래 상탕(商湯) 시대부터 상나라의 방백(제후)이었으나 세력이 커져 조공을 바치지 않던 대팽(大彭)과 시위(豕韋)를 정벌하여 병합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했다. 남쪽으로도 눈을 돌려 초(楚) 지역의 전신으로 보이는 형만(荊蠻) 지역의 호방(虎方)을 공격하여 영토를 남쪽으로 크게 넓혔는데, 평정 후에는 현지 주민들을 교화하고 안무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이러한 정복 전쟁에는 무정 본인뿐만 아니라 왕비인 부호(婦好)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갑골문 기록에 따르면 부호는 상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인 1만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방(羌方)을 토벌했으며, 파방(巴方)과의 전쟁에서는 매복 작전을 통해 대승을 거두었다. 무정은 정복한 새로운 영토에 소신 비(小臣 畢) 등을 보내 죄수들을 이끌고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여 상나라의 경제력을 크게 발전시켰다.
3.2. 문화 발전과 종교 개혁
무정 시대는 문화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특히 갑골문이 폭발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의 약 70% 이상이 무정 시대의 것이다. 당시의 제사, 전쟁, 수렵, 질병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해독 결과 무정이 거느린 전문 정인(貞人, 점치는 사람)만 70명이 넘었다고 한다. 청동기 기술 또한 정점에 달해 구리, 주석, 납의 3원 합금 기술이 등장했다. 무정의 또 다른 왕비인 부정(婦妌)을 기리기 위해 만든 '후모무정(后母戊鼎)'[4]은 세계에서 출토된 청동기 중 가장 무거운 것으로 그 위용을 자랑한다. 군사 기술 측면에서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과의 접촉을 통해 전차(Chariot)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상나라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다.무정은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제사 제도를 개혁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이와 관련하여 '고종융일(高宗肜日)'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무정이 선왕인 성탕(成湯)에게 제사를 지내던 날 난데없이 꿩 한 마리가 솥(鼎)의 귀에 앉아 울어대는 변괴가 생겼다. 무정이 이를 불길하게 여겨 두려워하자 아들인 조기(祖己)가 "제사상의 풍성함보다 하늘의 뜻에 맞게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간언했고, 무정은 이를 받아들여 공물의 수량을 줄이고 민생을 돌보는 데 더욱 힘썼다고 한다.
또한 무정 시기부터 갑골문에서 선왕을 상제(上帝)와 같은 격인 제(帝)로 높여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신권(무당)의 힘을 왕권 아래로 귀속시키고, 국왕을 신격화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은허에서 발굴된 인신공양 유구의 4분의 3 이상이 무정 시대에 집중되어 있어, 당시 왕권 강화와 정복 전쟁의 과정에서 수많은 포로들이 희생되었음을 보여준다.
4. 가족 관계
- 부왕: 소을(小乙) - 이름은 렴(斂).
- 숙부: 반경(盤庚) - 은허로 천도한 왕. 무정은 반경을 매우 존경하여 제사를 지낼 때 그의 도움을 청하곤 했다. 치통이 생기자 반경에게 낫게 해달라고 비는 갑골문이 있을 정도.
- 배우자: 갑골문 기록에 따르면 무정에게는 부진(婦嫀), 부주(婦周), 부초(婦楚) 등 총 64명에 달하는 비빈(비)이 있었으나, 그중 주요 왕비(법적 배우자)는 3명이다.
- 부호(婦好): 묘호는 비신(妣辛). 뛰어난 장군이자 제사장이었으며 무정의 가장 큰 총애를 받았다.
- 부정(婦妌): 묘호는 비무(妣戊). 농업과 수확을 관장했던 것으로 보이며, 상나라 최대의 청동기인 '후모무정(后母戊鼎)'의 주인공이다.
- 부계(婦嬕) 또는 부계(妣癸): 묘호는 비계. 조경의 생모.
- 자녀
5. 평가
전통적인 유교 사관에서 무정은 덕치와 무공을 겸비한 상고의 성군(聖君)으로 묘사된다. 쇠락해가던 상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점에서, 후대 사가들은 그의 치세를 무정중흥(武丁中興)이라 칭송했으며 묘호도 '높을 고(高)'를 쓴 고종(高宗)으로 올려졌다.현대 고고학적 관점에서도 무정의 재위기는 상나라 후기의 명백한 전성기로 확인된다. 은허 유적의 방대한 유물과 갑골문 기록은 그의 시대가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매우 번영했음을 보여준다. 영토는 사방으로 확장되었고, 청동기 기술과 문자 생활은 정점에 달했다.
다만, 이 시기에 인신공양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점은 당시의 종교적 잔혹성을 보여주는 어두운 단면이기도 하다. 발굴된 상나라 인신공양 유구의 약 75%가 무정 시대의 것인데, 이는 그만큼 정복 전쟁이 활발했고 잡아 온 포로가 많았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6. 여담
- 은허 발굴 이전까지 서구 학계에서는 상나라를 실증적인 증거가 없는 전설상의 왕조로 취급했으나, 무정 시대의 갑골문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해독되면서 비로소 실존하는 역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점을 쳤는데, 갑골문에 따르면 불길한 징조(무지개 등)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1192년경 사망하였다.
- 무정의 무덤은 은허 왕릉 구역의 1400호 묘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반면 그의 아내인 부호의 묘는 기적적으로 도굴되지 않은 채 온전하게 발견되어 세기의 발견이 되었다.[6]
- 대만 게임 《헌원검 외전 궁지비》에서 주연급 인물인 '봉욱(鳳煜)'으로 등장한다.
[1] 하상주단대공정에 따른 연대. 문헌에 따라 55년설, 59년설, 100년설 등 다양한 이설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연대는 기원전 1324년 ~ 기원전 1266년이나 현대 학계에서는 오류로 본다.[2] 혹은 조기(祖己)[3] 1899년 발견된 은허의 갑골문 중 약 70% 이상이 무정 시대의 것이다.[4] 과거에는 '사모무정(司母戊鼎)'으로 불렸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후(后)'로 판독하는 추세이다.[5] 계모의 모함으로 쫓겨나 굶어 죽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6] 무정의 무덤보다 부호의 무덤이 더 화려했을 것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