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0:07:21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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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儒敎|Confucianism[1]・ Ruism[2]
파일:공자 전신.jpg
공자의 모습
<colbgcolor=#345799><colcolor=#fff> 시작 시기 기원전 8세기~7세기 춘추시대
창시자 공자
경전 십삼경
신관 조상 숭배, 이신론, 비신론[3]
견해에 따라: 불가지론[4], 무신론[5]
근원 유가
1. 개요2. 특징3. 중국에서의 발전
3.1. 선진유학3.2. 진과 분서갱유3.3. 한당유학3.4. 송명유학3.5. 청대 유학3.6. 대만3.7. 현대
4. 한국에서의 발전
4.1. 조선 건국 이전4.2. 조선 전기4.3. 조선 중기4.4. 조선 후기4.5. 근현대사4.6. 21세기
5. 일본에서6. 류큐 왕국에서7. 베트남에서8. 북한에서9. 종교? 철학?
9.1. 천명(天命)9.2. 제사(祭祀)9.3. 인문화의 역사
10. 경전
10.1. 한국
11. 교육12. 비판과 반론13. 변질된 유교적 전통14. 다른 종교, 사상과의 관계15. 유명한 유학자
15.1. 중국15.2. 한국
15.2.1. 신라15.2.2. 고려15.2.3. 조선15.2.4. 대한민국
15.3. 일본15.4. 류큐15.5. 베트남
16. 시설, 의식17. 관련 개념18. 관련 이념19. 관련 기관2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유교()는 춘추시대에 태동한 종교적 체계로서 동아시아철학을 지탱하는 소위 "동양삼교(정확히는 동아삼교)"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처음 등장했던 춘추시대부국강병을 꿈꾸는 지배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자 등장한 제자백가 중의 하나로써 등장했는데, 당시에는 법가, 도가와 함께 가장 잘나가는 가르침 중 하나였다. 도가가 일반 백성들에게나 인기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당시 유교와 경쟁을 하던 최고의 가르침은 법가였고, 법가를 따르던 진시황이 결국 진나라로써 대륙을 최초로 통일했지만 곧 다시 분열하고 유교를 받아들인 한고조 유방이 최초의 유교제국 한나라를 건국함으로써 민간사상으로써 성공한 도가도교와 함께 제자백가의 가()에서 벗어나 교()의 칭호를 받고 동아시아 핵심 이념 중 하나로써 발돋움한다.

당시 제자백가 중 가장 현실주의적이었던 법가를 누룰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법가가 세계 최초의 법치주의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것을 세상에 선보이는 것을 성공했으나, 당시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발생되기 전의 시대로써 시대적 한계로 공익이란 개념을 담지 못했고, 더 나아가 신분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군주와 지배층을 통제할 수 있는 개념인 헌정이란 개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바람에 법가를 이용해서 진시황이 중국 최초로 세운 중화제국인 진나라가 사분오열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지배층을 통제할 수 없다는 약점을 시대적 한계로 유교에게 자리를 주고 사라졌지만 유교가 법가적 행정원리를 흡수하게 만들어서 훗날 유교국가들이 고도의 관료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법가를 흡수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일 뿐, 사실 법가만 흡수한 것도 아니다. 유가법가를 상대로 승리하고 고대 유교를 성립하기 전부터 농가[6], 도가[7], 음양가[8] 등의 다른 가르침을 융통성있게 흡수해 왔으며, 고대 유교가 성립하여 훈고학이 자리매김한 후에도 불교도교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했다. 유교가 다른 학문들을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의 근본적 성격이 종교보다는 철학에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이 등장하기 이전의 유교는 상당히 포용적인 학문이었기 때문이었다.[9] 덕분에 유교는 자연과학을 제외한 광범위한 분야를 망라한 거대한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서구 열강이 본격적으로 유교세계를 침략하는 19세기 초까지도 동아시아정치. 제도, 이념, 가치관 등에 넓게 걸쳐서 모든 분야의 근간으로써 존립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증흥하던 유교는 서구 열강이 근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복합적으로 발전시킨 서양철학, 종교, 제도, 이념 등에 밀려서 도태되었으며, 결국 1897년에,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유교 정부를 유지하던 조선이 광무개혁으로 근대국가인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에 국가를 통치하는 이념으로써는 명맥이 끊겼다. 하지만 유교라는 가치는 동아시아에서 계속 명맥을 이어와서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전까지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가치 중 하나였고, 한국에서는 아직도 유교적 가치[10]와 유교적 문화가 남아있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유교란 를 정하는 학문으로 예()라는 것은 사람들이나 집단들 간의 상호작용 형식을 정하는 학문이다. 예를 정하는 이유는 존재하는 사람 간이나 집단간의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사회관습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써 쉽게 말하면 서로 존중하는 관습을 만드는 학문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당연하지만 유교는 자연상태의 힘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강자와 약자간의 평등을 전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강자는 약자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 것을 강조하고 약자는 정당한 강자를 향하여 존경과 순종을 할 것 요구한다. 단 이것이 약자에게 매우 불리하거나 부당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이론을 만든 것은 강자에게 의무와 책임을 지우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11] 이렇기에 유교 교리의 핵심은 정명론[12]과 정명론에 의한 지배층의 통제를 견제하고 지배층의 타락을 막기위해 존재하는 역성혁명론[13]이다. 유교가 다른 제자백가의 이론을 받아들이거나 형이상학적인 불교도교의 받아들여서 여러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유교는 정명론을 기반으로 쌓아온 학문[14]이며, 뒤의 모든 이론은 정명을 구현하거나 실현하기 위한 이론에 불과하다. 이 이론 중 가장 먼저 생겨났고 다른 이론의 근간이 되는 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유교가 정명사상을 구현하고자하는 방식을 이론화한 것이다. 수기치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서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즉, 유학자들은 모두가 서로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그 이후에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고 봤으며, 그 이후에 붙은 부가적인 이론과 학설들은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특징

공자는 사상적 측면에서 동아시아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인()'을 최초로 제시하였다. 공자가 제시한 인이란, 도덕적,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적인 의미의 사람다움, 즉,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었고, 또한 공자가 말하는 '사람다움'이란, 논어의 仁者 愛人('인'은 남을 아끼는 것이다)에 따르면, 우리네 어머니들이 자식을 대할 때 그러하듯이, 배려하고 걱정하는 등, 조건없이 남을 챙기고 아끼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배신 속에서 죽는 것을 본 공자는 '남을 챙기고 아끼자. 그래서 사람답게 살자.'라는 외침을 한 것이었다.

주변을 아끼고 챙기는 사람다움(仁), 이것을 잘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신뢰(信)를 얻게 된다. 주변의 수많은 신뢰를 통해 높혀진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무리의 장(長)이 된다. 공자는 올바름을 '의'(義)라고 하였고, 공정하고 의로운 자가 높은 위치에 있어야 그 사회가 안정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주변 친한 사람을 챙기는 것도 너무 지나치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상하관계의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있어서 순서가 없으면 미숙한 아랫사람이 그 미숙함으로 윗사람을 우습게 보아 가르침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친하더라도 거리를 지키게 하고 상하관계에서는 순서를 따르게 하였는데, 또 이러한 형식을 '예(禮)'라고 불렀다. 즉, 인(仁)한 사람은 결국 높은 자리로 자연스럽게 나아가 의로움(義)을 펼치게 되는데, 이러한 인과 의의 적절한 순서를 지키는 행위가 바로 예라는 것. 여기서부터 효제자(孝悌慈), 서(恕), 경(敬)의 윤리관, 예치(禮治), 덕치(德治)의 정치관 등이 만들어졌다.

공자는 이러한 개념 아래, 당시 세상이 혼란한 연유를 이러한 인(仁)의 부재와 예악(禮樂)의 상실에서 찾았던 것이며, 예악을 따르는 인군(仁君)을 일으켜 주나라 초기와 같은 성세(聖世)를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게 되었다. 정치는 인을 갖추고 예에 밝은 군자(君子)[15]가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 군자를 양성함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 교육을 베풀었다. 그가 정립(正立)한 사상, 그리고 그의 사후 후대 학자들이 그 사상을 뼈대로 하고 여러 사상을 곁들여[16] 발전시켜온 일련의 사상계(思想界)를 바로 유학(儒學), 또는 유교(儒敎)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자세히 짚자면, 공자는 주나라 전성기의 이상적인 질서를 숭상하였고[17] 패악질이 난무하는 춘추시대의 사회 질서의 재건을 시도했으며, 이를 위해 '사(士)'로 불리는 계층을 교육하는 데 노력했다. 흔히 이 글자의 뜻은 선비로 알려져 있지만, 사는 주 대의 하층 귀족이었다가 춘추전국시대 들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유력 인사들이 유입되어 형성된 계층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무질서로 인해 이들 중에는 문적 교양이 전혀 갖추어지지 못한 인물들이 많았고, 공자는 이들을 교육해 바로잡으려 한 것. 공자는 단순한 부국강병이나 패도의 결과주의에 안주하지 않고 도덕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덕목들을 규정하여 후에 '유(儒)'로 불리게 된 학문적인 집단을 구축했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귀족사회에서 능력주의 전국시대로 이행하는 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사회와 국정 경영을 위해 필요한 덕목과 실력을 교육하여, 학파에 따른 인재 육성과 등용을 처음으로 구체화하였다. 정확히는 능력주의[18]라기보다 동아시아판 원시적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 백성을 노동자처럼 보고 내심 귀족들보다 중시하였다.[19] 이러한 유가의 학문적인 성과는 유가뿐만 아니라 묵가, 법가 등 여러 유파의 형성이나 사상적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20]

이에 따라 오늘날 세간에서는 보통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 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적어도 공자는 자신이 무언가의 창시자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긴 했다. 공자는 다만 스스로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예악(禮樂) 전통을 정리하고 계승했을 따름이며, 자신의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옛 성왕(聖王), 성현(聖賢)의 행적에 깃든 참뜻을 밝혀낸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저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은 아니다."는 말은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요순우탕문무주공의 사상을 잇는 것이었다. 실제로, 흔히 유교 문화로 알려진 것들 중에는 공자 이전부터 있었거나 혹은 나중에 가서야 형성된 관습들이 많다. 또한, 공가(孔家)라고 부르지 않고, 유가(儒家)라고 부르는 것도 후대의 학자들이 이런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유교'는 '유학(儒學)', '정학(正學)', '도학(道學)' 등으로 널리 불렸고, '유교'라는 표현은 '유학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추후 20세기가 되어 교(敎)라는 글자가 종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례가 한정되면서 '유교'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게 되었지만, 유교는 이러한 발전을 거쳐왔다는 면에선 우리가 흔히 논하는 종교들과는 퍽 다르다는 점은 자명하다.

다만 그렇다고 유교가 종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사실 현대에 와서는 이 유교라는 것을 종교와 깔끔하게 분리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부터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이는 유교 자체의 가르침에는 내세에 관한 일정한 기준점이 있어서 다른 종교와 동시에 행하기는 어려운 탓이다. 특히 그리스도교 계열 종교들이 유교적 제례인 제사 참여를 허용하느냐 안 허용하느냐는 식의 쟁점은 심심하면 등장하는 주된 종교적 떡밥 가운데 하나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지금에 와서는 젊은이와 어르신을 가릴 것 없이 현대인은 모두 유교를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종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유교는 종교이고, 종교의 정의적 관점에서도 유교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유교를 보는 시각은 어떠하였을까.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겐 종교와 학문을 깔끔하게 분리하여 구분을 지으려는 현대인의 관점이 없었을 것이다. 당장 유교의 경전이나 사상가들에게 대한 선비들의 태도는 종교의 경전이나 성인(聖人)에게 대한 종교인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단적으로 알고리즘 교과서를 라면 냄비받침대로 쓴다고 격심히 비난할 현대인은 없지만, 논어를 라면 받침대로 쓰는 모습을 조선 시대 선비가 보면 난리가 날 것이다. 요컨대 과거엔 학문을 대하는 자세가 원천적으로 달랐고, 당연히 현대의 구분 기준이 과거의 그들에게 적용될 리 없다. 이는 유교 말고도 많은 고대 학문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다. 수학을 대하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태도나 영혼을 대하는 플라톤의 논의 등 고대 철학의 많은 분야에서 이러한 종교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 행동거지를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결론은 과거에도 또한 유교는 학문이자 도(道)이자 철학이자 숭상, 숭배의 대상이었다는 것. 따라서 유교는 다른 종교들과의 출발점은 분명 다르나, 현대에나 과거에나 종교 그 자체, 내지는 종교 같은 것일 수는 있다 말하겠다. 더 자세한 것은 아래 9번 문단에서 서술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유교를 단순히 공자 및 그를 따르는 집단의 개인주관적 철학, 혹은 단순히 과거 역사에 짙게 흘렀던 한 종교였을 뿐이라고 그렇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인이 입을 모아 동의하듯, 유교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국가제도와 법질서를 모두 포괄하는, 그 자체로 동아시아의 문명, 문화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동아시아의 각국 언어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친 한자부터가 기본어휘 상당수를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에서 비롯하였다.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대부분 국가들, 특히 한국, 베트남, 일본 역시 모두 한자를 사용했고 사용하는 나라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국은 또한 조선의 영향으로 그 어떤 나라보다 유교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들였다. 한중일 3국은 개화기 이후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기존에 없던 서구의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 용어들의 대다수를 아예 유교경전에서 따와서 번역하기까지 하였다. 사실상 생활의 모든 것이 유교에서 시작되었고 유교로 이루어졌다. 서방에서 그리스도교가 끼친 영향이 역사, 문화적으로 지대하듯, 동방에서 유교가 끼친 영향도 그에 지지 않을 만큼 지대하다.

물론 19세기 서구의 침공과 근대의 충격으로 기존의 유교질서가 상당히 붕괴하였고, 20세기 초반에는 유교가 서양에 뒤쳐진 원인으로 지목되어 탈유교 또는 반유교적인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국가통치 주요 사상에서는 한 번 완전히 몰아냈던 것은 맞으나, 그럼에도 현재 멀쩡히 존재하는 종법적 질서, 연공 중시, 상급자에 대한 순종, 조상 숭배, 가부장제 같은 유교적인 관습과 정서는 동아시아 사회에 계속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이렇게까지 유교가 길게 살아남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유교가 부의 재분배, 평등을 외쳐서 사람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던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맥락이 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면, 예를 들어, 유교의 공은 평분(平分 :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고 사는 간사함이라, 개인 재산이 많은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남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야 한다. 공자는 심지어 "군자는 백성의 살림이 모자라는 것보다 도리어 고르지 않음을 근심하라"고 했다. 덕분에 유교적 성인군자들은 돈을 크게 벌었더라도 다 뿌리고 청빈하게 살았다고. 유교의 가르침들이 다 이러하니 극히 최근까지도 유교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 다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그 인기가 다 날아가기는 했다. 유교가 구시대의 악습을 모조리 뒤집어 쓴 이미지가 되어 인식이 완전히 나빠졌기 때문. 물론 이는 유교 이념 자체보다는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라는 파행적 현상이 더 주목받기 때문이기는 하다. 유교를 어느정도라도 안다면 가르침부터가 다 틀려서 유교는 필요없고 쓸모없고 날려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에서는 유림고려 시대 말부터 정치세력화하여 조선왕조 500년을 지배하기도 하였으나, 조선왕조 말부터 크게 쇠락하면서 대원군 실각 이후에 정치세력으로서의 구실을 거의 잃게 되었다. 1919년 파리 장서 사건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향력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 현재 유교 종단 측에서는 자체집계 통계로 신자가 한국에만 1,000만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인구주택총조사의 종교통계를 보면 10만 명 정도로 나타난다. 물론 위에서 말했듯 이것이 실제 유교의 위세를 딱 잘라 나타내는 해석이 될 수는 없다. 유교를 구미~중동식의 종교 개념이 아닌 생활 사상이나 정치 철학, 순수 철학 등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 즉 애초에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프레임 자체가 굉장히 다르다. 이는 불교도교[21]가 구미~중동식의 종교 개념으로 말미암아 빠르게 정의된 것과는 다른, 동아시아 사상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 때문에 '나는 유학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현대인도 여전히 '유학적 삶의 형태'는 많이 따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유학 자체의 본질이나 학문적 성격관 거리가 멀고, 말 그대로 유학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관습과 사고가 그대로 문화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3. 중국에서의 발전

파일:종교표지_유교_흰색.png
중국에서의 유교 변천사
선진유학 훈고학 성리학 양명학 고증학 공양학 현대 신유학

3.1. 선진유학

3.1.1. 주나라의 종교

유교의 사상적인 기초는 공자가 이상화한 주공단으로서 상징되는, 주나라의 종교이자 종법질서다.

공자는 이를 주공이 만든 것으로 보았지만, 역사적으로 주나라의 종법 질서는 왕위 계승 분쟁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서히 만들어졌다.

찬란한 문명을 가진 주나라는 다양한 문헌을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유교에서 채택된 것이 바로 '삼경'으로서 이는 시(詩), 역(易), 서(書)이다. 이 역시 역사적으로는 순수하게 주나라만의 문헌은 아니며, 주나라 시기에 기반을 두고 춘추시대에 점진적으로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3.1.2. 춘추시대

유교는 다른 학파보다 더 중국의 이전 시대의 역사 전통을 보전하고 계승하려는 태도를 강하게 보였다. 이는 공자가 패자들이 날뛰는 춘추시대에 살면서 주나라의 이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려는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이 때 공자가 제시한 원칙이 바로 정명(正名)이었다. 그리고 공자 스스로는 춘추를 통해 주 귀족들의 파행적 행태를 지적하면서 자기 직분의 훼손을 지탄하고, 주 대에 형성된 천하 질서[22]의 수호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왕이 제 역할을 못하거나 제후가 참람하면 지위를 깎아내려 기록하는 식이다.

이 정명 사상을 설명할 때 명분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본래적 의미가 오히려 전달이 안 되는 측면이 있는데, 명분이라는 말을 그냥 '자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다해야 할 원칙'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23] 쉽게 말해서 왕은 왕으로서 신하를 의롭게 대하고, 신하는 신하로서 왕을 진심으로 보좌해야 한다는 것. 단순히 수직 관계적으로 닥치고 충성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왕이 불의를 자행하고, 신하가 사익에 눈이 멀어서 세상이 어지러워졌으니 똑바로 하라는 뜻이다. 아버지면 아버지답게, 아들이면 아들답게[24]라는 말도 마찬가지 맥락이며, 그냥 아비에게 두들겨맞아도 복종하라는 수준의 소리가 아니다.[25] 기존의 귀족 질서가 상명하달식의 질서에 가까웠다면 공자는 '위에서 똑바로 안 하면 그것도 당연히 지탄받아야 한다' 식의 의문을 제기하고 실천에 옮긴 것. (정작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면서는 지배자의 권위를 공고화하는 쪽으로 변질되지만) 우리가 아는 상명하복식 유교는 순자대의 일이며 오히려 맹자는 걸왕을 몰아낸건 한 '놈' 을 처단한것이니 대의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등 우리가 흔히 아는 유교와는 조금 다른 이미지를 가진다.

이러한 기본적인 정명 사상에 따라 '사람도 사람다워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었고 이 '사람답다'는 말을 '인(仁)'이라고 하며, 이것이 사람에게 내재된 '도(道)'이다. 이 시점에서 유가는 인간의 차원을 넘어 온 세상을 운행하며 모든 것을 계속해서 바꾸어놓는 천도(天道)에서 제 역할을 찾는 도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유가에게도 천도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26] 유가는 도가와는 달리 천도의 실현을 개인과 개인에게 주어진 직분에게서 찾는다. 초기 유가가 도가와 달리 신비주의를 거세하고 현실 학문으로 방향을 튼 것이 이 지점이다.

그런데 사람이 가져야 할 자기 직분은 개인 스스로가 만들 수 없고, 사회가 형성되어 자기 일을 나누어 받으면서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는 자연히 인적인 관계를 중시하게 되고, 내적인 인(仁)을 외부로 표현하며 형성되는 제반 사회 관계의 통칭이 '예(禮)'이다. 흔히 예를 설명하면서 단순한 '예절, 에티켓'뿐만 아니라 유교 사회에서 형성되는 거의 모든 사회 활동을 포괄하게 된다는 설명이 많이 등장하는데, 크게 어려운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인을 외부로 잘 실현하는 것 그 자체가 예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상을 찾아내는 출구가 바로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성인군자의 모범이고, 이를 모방하여 익혀나가는 것, 즉 학(學)이 또다른 유가의 축이다.[27][28] 이를 통해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기 사회 직분에 맞추어 인과 예를 잘 실천하게 되면,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사회는 조화롭게 잘 운영되게 된다(和而不同).

어쨌건 이러한 유가의 이상을 잘 실현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표현으로 '성인'(聖人)이라고 하고, 공자가 자신을 군자라고 칭하면서 군자라고도 하고, 맹자 대에 대인이라는 표현도 나타나고 뭐 기타 다양한 표현이 많지만, 유교를 따르는 이들의 정체성이 된 표현은 말 그대로 '유(儒)'이다.[29][30] 본래 유()는 제사를 치르는 사회 신분을 의미하는 말인데, 주 대에 종묘를 비롯한 시조 제사 등의 여러 제사가 확립되면서 인문주의적이고 신분 질서에 입각한 제사가 보편화되었다. 이후 유가에서 이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들을 규정하는 말로 정의하였고, 후대에 계속해서 전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공자가 정립(正立)한 유교의 기본 교리는 (유토피아인) 주나라의 천하 질서를 회복하고, 자신의 직분에 따라(正名) 사람다움(仁)을 실현함으로써 예(禮)를 회복하여,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조화로운 사회(和而不同)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용옥 등을 중심으로 이 시대의 유가가 도가와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는데, 물론 선입견을 깨는데 이러한 비판이 중요하기는 하나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논어의 첫 구절부터가 "배우고 또 때가 날 때마다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인 반면, 노자 48장에서는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더해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 덜고 또 덜어내면 하는 것이 없는 것(무위)에 이른다. 하는 것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것이 없다(爲學日益、爲道日損、損之又損、以至於無爲、無爲而無不爲)."고 했다. 애초에 노자 1장에서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항구적인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고 하여 유가의 기본적인 정명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31].

3.1.3. 전국시대

전국시대는 특히 혼란한 시대를 바로잡고 인간이 해야 하는 도리를 퍼뜨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던 시기이다. 대부분 학자들은 일생을 제후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하거나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쏟아부었다. 당시 시대에 지배계층의 도덕관은 상당히 아스트랄한 편이기도 했다. 근친상간을 저지른 제나라의 군주 제양공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32][33]

춘추시대에는 그나마 나았지만, 전국시대가 되면서 국가나 사상이나 여러모로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고, 이 과정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체계가 잡혔다. 사실 제자백가 상당수가 공자의 제자들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인물 중 하나가 맹자인데, 사실 송나라 이전까지는 잘 조명받지 못했다.

맹자에 들어서면 시대 상황에 따라 더욱 날카로워진다. 맹자 시대에는 이미 주나라의 질서가 갈 데까지 간 상황이라, 주 천자를 중심으로 천하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맹자는 새로운 천자가 될 인물을 찾아다녔는데, 이를 주나라 대부터 전해지던 '천명(天命)' 이론을 통해 정당화한다. 옛날에는 공자춘추를 써서 왕과 제후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자극을 줄 수 있는 시대였다지만, 맹자 시대에는 그런 게 씨알도 안 먹히는 전국시대였으니, 아예 천도를 따르지 않는 군주나 제후는 천에 의해 갈려버린다(革命)는 게 맹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맹자의 시대에는 이제 새 천자가 나올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나마 주나라 시기에 봉건된 제후들의 가문 혈통이 유지되고 있던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국시대에는 봉건 제후들의 가문이 단절되는 사태가 왕왕 벌어졌다. 본래 진(晉)의 신하였던 위(魏), 조(趙), 한(韓)의 삼진에 의한 진(晉)의 분할, 제나라 강씨(姜氏)의 신하였던 전씨(田氏)에 의한 제(齊)의 찬탈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외 수없이 많은 소국이 병탄되어 아예 소멸해버렸고, 강력해진 공후(公侯)들은 감히 주나라 천자만이 자칭할 수 있었던 왕(王)을 칭하기 시작하여 각지에 왕이 난립하게 되었다. 주나라 왕실 자체마저도 분열과 대립하는 시대였으니, 주 천자의 권위는 커녕 현실 중국에 어떤 통합된 권위란 것이 존재하는 지도 불확실하게 보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며, 이러한 현실에서 '혁명'을 주장한 것도 당연히 나타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명은 세계 질서에 가깝다. 인격신으로 보는 시각은 현대 유학보다는 보다 고대 주나라 종교의 시각에 가깝다.[34] 그렇다고 백성들을 천이라고 보는 것은 오히려 동학에 가깝다. 물론 어느 정도 의인화되어 인격신적으로 서술되는 면모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맹자의 서술은 일관적으로 '천도를 거스르면 저절로 백성이 떠나가고, 저절로 왕조가 망하게 된다'는 개념에 의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격신보다는 일종의 법칙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나 일반 인민들 사이에선 차별없는 사랑 즉 겸애(謙愛)를 주장하고 쓸데없는 전쟁을 반대한 묵가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유가의 눈에는 3년상을 폐지하여 기본적인 인도를 저버리고 음악을 폐지하여 예악을 중시하던 공자의 기본을 뒤흔드는 묵가가 좋게 보일 리 없었고, 맹자양주와 함께 묵자를 실컷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혁명 사상'만을 들어 맹자의 유학이 기존에 유가가 중시하던 격식을 완전히 저버리려 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맹자주자로 대표되는 송대 성리학 이전에는 유가 사상의 주류를 차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주자 이전엔 순자공자의 적통으로 인정받는 경향도 있었다. 순자는 인간은 타고나면서 탐욕을 타고났다는 성악설을 주창했으며, 따라서 군주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여 예(禮)를 확립하여 인민을 교화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주장하여 결과적으로 전체주의를 옹호하였는데, 이는 후술하듯 군현제로 인해 군주권이 급격히 상승한 전국시대의 기풍을 탔기 때문이다. 순자는 후에 이사, 한비자 등을 가르쳐 법가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만 법가는 이미 기원전 4세기 경 존재한 사상으로, 기원전 3세기의 인물인 순자에 의해 만들어진 사상은 아니다.[35]

3.2. 진과 분서갱유

전국시대 이후 유가는 당시 유력하게 대두되던 법가와 충돌했다. 전국시대에는 기존에 유가가 숭상하던 주의 질서가 한껏 파괴되고, 주의 질서에 의거한 신분제가 하극상에 의해 나날이 뒤집어지며, 한편으로 법가의 변법(變法)에 의해 새로운 제도가 들어섰다.

변법의 여러 내용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봉건제에서 군현제로의 전환'이다. 이는 제후, 경, 대부 등의 중간 권력 계층이 사라지고 일원적 권력의 전국 직할 통치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법가는 세습적 봉건 제후들을 완전히 소거시키고, 그 자리에 철저히 법(法)에 의거해 국가 행정을 처리할 일종의 행정 관료를 채워 넣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결과 신권은 하락하고 군권은 급속히 상승한다. 중국은 이를 통해 제국의 시대로 나아가지만, 지식인 계층의 역할을 강조하던 유가 입장에서 이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이자 완전한 군현제 국가를 이룩한 법가 제국 진(통일왕조)의 시대에 유학자들과 법가 국가가 분서갱유라는 충돌을 낳게 된 것은 진시황 개인의 폭정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필연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급격한 제국 질서의 구축과 광대해진 영토로 인한 법가 통치의 비효율[36]로 인해 진은 멸망하고, 전한이 들어섰다.

3.3. 한당유학

초한전쟁 이후 무너진 권위를 다잡기 위해 한고조숙손통를 위시로 한 유학자들을 받아들였지만[37] 여전히 주류 학문은 아니었고 소하나 문경지치에서 알수 있듣이 실제론 법가와 도가의 복합적 사상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허나 한무제의 후원으로 서서히 중용되기 시작되었고 후한 광무제에 이르러서야 법가와 도가를 밀어내고 주류 학문으로 완전히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알려졌듯이 한고조에 의해서 유학이 중용 받았던건 아니다.[38] 오히려 한고조는 유생을 모욕하는걸 좋아할 정도로 매우 싫어하던 편이나 옳다고 생각되면 설령 원수라도 포용할 수 있던 한고조의 유화적 통치 정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39] 실제로 흔히 유교가 지배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는 한무제 시대, 아니 이후의 후한 시대까지 하더라도 법가의 유풍은 계속해서 강하게 남아 있었다.[40]

한편 한나라 시대에는 훈고학이 발전했다. 진시황의 분서정책과 항우의 함양 방화로 인해 많은 문헌이 파괴되고 전승이 끊어졌기 때문에, 필사본이나 암기를 통한 구전으로 퍼져있는 유교 경전을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암송에 의해 정리된 경전을 금문경전, 필사본 및 분서당시 숨겨놓은 원본[41]의 발굴로 인해 정리된 것이 훈고경전이었다. 이 둘은 시대의 주류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으나 당시에 주류를 차지한 것은 금문이었다. 그러나 후의 대세가 된 것은 고문이며, 금문경전은 『춘추』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더 자세한 것은 고문학금문학을 참조.[42]

훈고학은 사실상 동아시아권 서지학의 뿌리라고 인식되는 학문이며,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고증학과 유사점이 많아, 서지적 연구가 중시되는 훈고학고증학을 한데 묶어서 '한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사회적으로 법제 등의 차원에서는 진을 많이 계승했으나, 한 초의 과진론[43]이 활발히 전개됨으로서 실패의 경험을 갖고 있는 법가 통치의 대안으로 유가적인 통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법에 의한 철저한 지방 통제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호족 세력이 유학을 학습하고 향거리선제 등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면서는 황제권 - 법가와 신권 - 유가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다만 예외적으로 왕망은 오히려 근본주의적인 유교를 도입하여 호족을 억누르려 했으나 철저히 실패하고, 호족의 지지를 받으며 들어선 후한 정권은 이들을 거스르는 통치를 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역사를 거치며 법가적 통치에 유가적 질서가 포용되는 상황이 한무제동중서의 유교 확립을 통해서 서서히 유가적 명분이 법가적 도구를 통해 실현되는 상황으로 전환된다. 특히 전한 시대 중기를 넘어서면서 유가는 기(氣) 철학, 천재지변을 왕의 통치를 나타내는 지표로 파악하는 천인상관설(재이설), 음양오행설 등을 받아들여 사상의 폭을 넓혀나간다.

한이 멸망하며 오호십육국시대가 도래하며 이민족의 중국 유입과 혼란한 사회상, 그리고 이를 통제하기 위한 막부 체제의 형성 등으로 정적인 사회에서 많이 받아들여진 유교는 쇠퇴하였다. 대신 그 자리는 불교도교가 차지했으며, 화엄종, 천태종, 현학 등의 철학적 발전은 후에 성리학에서도 받아들일 정도로 체계적으로 발전하였다.

당나라는 유교를 관학으로 삼아 과거제를 정비하고 유학자 공영달을 시켜 오경의 해석들을 집대성한 유학 참고서 <오경정의>를 만들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강력한 해설서는 역으로 하나의 해석을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을 불렀고 결국 학문의 본격적인 발전을 막아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게다가, 위진남북조의 영향을 이어받은 당나라 대는 다양한 생각이 제한없이 넘나들던 시대로 불교도교가 함께 황실의 지원을 받으며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에는 외래 이념에 대한 대대적인 거부감으로 인해 불교가 회창폐불 등의 사상 탄압을 당하고, 노자의 본성이 이(李) 씨라는 점과 당의 국성이 이(李) 씨라는 점에서 도교를 많이 지원해주었던 당 황실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로인해 당나라 후기부터는 고유 이념의 복원과 중국 고문의 계승 등을 주장한 한유, 이고 등의 고문 운동이 유교의 부활에 불씨를 지폈다.[44]

3.4. 송명유학

주희 이전의 송유학 학파
  • 송초삼선생: 송나라 초의 세 유학자 호원[45], 손복[46], 석개를 이른다.
  • 신학(형공신학): 신법파를 이끈 왕안석이 이끈 학파
  • 관중학파: 성리학의 선구자이자 기일원론(태허설)을 주장한 학자 장재의 학파
  • 촉학: 촉당이라고도 불리며, 시인으로 유명한 소식과 아우 소철 등으로 이루어진 학파. 사마광의 구파에서 분할되었으며 촉 지방(사천) 출신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유불도 삼교의 화합을 주장했다.
  • 삭학: 삭당이라고도 불리며, 촉학, 낙학과 함께 송 철종연간 동안 세 붕당을 이루었다. 사마광 문하의 류즈 등이 속해 구파의 적통이었으며, 촉학과 낙학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 낙학: 성리학의 종조 정이, 정호 형제의 학파. 도학이라고도 불린다.

3.4.1. 성리학

이후 태극, 이[47] 등의 개념을 받아들여 기(氣)의 개념과 결합시키는 성리학의 조류가 당 후기부터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송나라 대의 주희(후에 주자라 불림)가 종합하여 성리학을 완성했다(이 때문에 성리학은 '주자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외에 성리학은 정주학,[48] 신유학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모습(이기론, 심성론)은 이때 다 만들어졌다. 이전까지의 유교는 현실적 도덕과 삶의 규범을 제시하는 매우 상식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영역은 별 관심이 없었으나, 이것으로는 사후세계나 인간의 지각, 영혼, 형이상, 세계관의 문제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한 불교도교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그네들의 방대한 우주론과 개인적인 심성론을 흡수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성리학과 양명학 같은 흐름을 현대에는 신유학으로 따로 부르기도 한다.

주자학은 '리'를 형이상으로 치고 '기', 그러니까 대강 뭉뚱그려 말하면 사람의 기질이나 마음을 형이하로 간주했다. 이 형이상과 형이하의 사이에 선악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데, 형이상 쪽은 순전한 선이며, 형이하는 선일 수도 있고, 선이 아닐 수도 있다. 즉 재언하면, '리'는 형이상학적인 이치로 절대선이며 개개인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다 사람이 악하고 방종해지는 이유는 '리'라는 불변의 보석이 진흙 속에 묻힌 것처럼 형이하학적이고 동요되기 쉬운 기질이나 마음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선해지고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내재된 '리'를 밝혀내야 한다.

왜 이게 가능한가? 주자에게 있어 '리'라는 것은 불변하는 천성적 선으로, 사람뿐 아니라 온갖 사물에 다 깃들어 있는 일종의 절대이치이기 때문이다. '리'가 나무에 깃들어 나무의 '리'가 발현되어 나무라는 실재 사물, 그러니까 기로 형성이 되고, 기왓장의 '리'는 기왓장에 깃들어 기왓장이라는 실재 사물이 나타나는 원리이며,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리'가 깃들어 하나의 인간 개체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리'라는 건 조약돌에 깃들어 있는 '리'도, 풀때기에 깃들어 있는 '리'도, 인간에게 깃들어 있는 리도 다 똑같은 '리'다. 모든 사물에 깃든 '리'가 똑같지만 사물이 제각기 다른 이유는 그 '리'가 형이하학의 기로. 구체적인 사물로 발현되는 방식 또한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는 모두 동일하다. 여러 사물들에 차이가 있는 건 '리'가 발현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종류라 할지라도 개체마다 성격에 차이가 있는 건 그 개체마다의 "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리'는 천지만물에 깃들어 있으므로 학문을 이루기 위해 하나의 사물을 깊이 살펴서, 그러니까 격물함으로, 그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를 파악한다. 한 사물의 '리'를 파악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앞마당의 대나무의 '리'를 파악하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의 '리'를 파악하고, 하여튼 이런저런 '리'를 다 파악하면 어느새 치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결코 서두르면 될 것도 안 되고, 될때까지 차근차근 모든 사물의 '리'를 하나하나 파악해야 된다!

주자는 이를 위한 수련방법으로 격물치지를 천명했다. 물론 주자가 처음 한 말은 아니고 경전에 있는 말이다. 즉 악의적으로 말하면 주자가 일종의 견강부회를 했다고 할 수도 있다. 격물, 사물의 이치를 궁리해서, 치지, 깨달음에 다다른다는 얘기이다.[49]

하지만 결국 성리학은 기존의 소박한 유교에 불교의 세계관과 도교의 음양사상에 영향을 받아 우주론적 해석을 적용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자는 사서집주를 만들면서 사실상 사서를 자기 스타일로 변형시켰다. 공자의 유교와 주자의 성리학이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음에도 일정한 간극을 두고 보아야 하는 점은 이 때문.

원나라 대에는 일시적으로 유학자들이 천대받으면서 쇠퇴하였으나[50] 원 말에는 중단되었던 과거를 재시행하는 등 성리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성리학이 한반도로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도 이 시기로, 충선왕이 원의 유학자들과 교류하고 안향원나라에 유학을 가면서 들여온 것이다. 이후 성리학사대부 계층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이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명청시대에도 관학은 여전히 성리학이었다. 다만 과거가 장기화되고 명청시대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경쟁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는 양식이 완전히 고정되었는데 이를 팔고문(八股文)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제국의 이념은 한층 통일되었고 신사 계층이 확고해졌으나, 과거의 형식화를 불러오는 폐해를 낳았다.

3.4.2. 양명학

명나라 후기에는 사회 혼란이 심해지면서 각지에서 자체적인 개혁론이 일어나는데, 왕양명으로 알려진 왕수인이 특히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왕수인향약과 십가패법 보급을 통해 혼란스러워진 사회에 대한 통제와 질서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는 심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양명학으로도 통칭되는데, 이는 왕수인의 이름에서 따온 물건으로, 주자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은 주자학과 동일한 맥락하에 이름지어진 것이다.

양명학은 심즉리설을 세계관으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누구나 마음 안에 세상의 이치가 있음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려 노력하면 성인군자의 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 속에 원리가 있다는 건 양명학과 성리학 역시 사람 안에는 '리', 즉 세상의 이치가 있음을 설파했기 때문이다. 양명학주자학의 차이라면, 주자의 성즉리를 왕양명의 심즉리와 대비시켜 볼 때 그 요지는, 리, 그러니까 하늘의 이치는 형이상학적인 성이며 형이하학적이고 갈대와 같은 우리의 마음과는 다른 물건이란 얘기다.

반면 왕양명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런 요식적 행위는 뜬구름 잡는 짓이다. 내가 우리집 앞마당의 대나무를 몇 달 몇 년을 보고 있었는데 '리'가 파악되기는커녕 머리만 아프고 우울증만 더해졌을 뿐. 사물을 파악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내면이나 제대로 파악하고, 밑도 끝도 없이 형이상학을 궁구할 시간이면 실천적인 행동에 나서라!" 결론적으로 왕양명의 주장에 따르면 그냥 우리 마음인 심이 즉 하늘의 이치인 '리'이니 양지(良知)하기만,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을 그것을 올바르게 알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치양지(致良知), 양지에 다다름인 격물치지이다.

그 수련법은 다르나, 똑같이 마음 속에 그 이치가 구비되어 있다는 점에 관해선 둘이 같아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세세히 구별해 보면, 주자는 우리의 마음을 기로 여기고 절대선이자 이치라 할 수 있는 리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마음 속에 또 내재되어 있는 성을 '리'로 여기고 구체적 현상인 마음 자체에 대해선 경계했다. 왕양명은 구체적 사물인 '기'가 있다면 그 이치인 리가 없을 수는 없지만 구체적 사물인 '기' 없이는 이치인 리가 나타날 길이 없으니 리가 형이상의 세계에 고고하게 실존한다는 건 뜬구름 잡는 얘기이고 사실상 기와 리는 다를 바가 없으며 그러므로 기의 발현인 우리의 마음이 곧 리라 할 수 있다. 또한 리라 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을 제쳐놓고 외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해 봤자 우리의 마음과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의 외물이란 것도 뜬구름 잡는 얘기다.[51]

왕양명은 제자들에게도 항상 외물을 살피는 것과 같은 개수작은 관두고 니 마음이 곧 리니까 그것을 잘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설파했다. 즉 치지, 먼저 깨닫고 나서 격물하라고 했는데 격물은 주자의 해석과 달리 했다. 주자는 격물을 사물을 바라보고 연구하라는 뜻으로 해석했으나 왕양명은 격물의 격자를 바르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물자를 사물이 아니라 활동, 사건 등으로 해석하였으니 간단히 말하면 일 잘하라는 뜻이다. 즉 왕양명이 논한 치지격물은 격물치지, 거경궁리나 독서 등을 중시하는 성리학과는 달리 수행자에게 그 행동을 촉구하는 바가 있다.

여기서 성리학과 양명학의 신분관에 차이가 생긴다. 성리학은 격물치지와 성즉리의 실행방법으로 선지후행(先知後行)을 내놓았다. 선지후행 자체는 도덕적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도덕상의 사리를 완전히 알아야만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결론은 도덕(≒정치)의 주체가 성리학을 배우는 귀족계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명학은 심즉리와 치양지의 실행방법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들었다. 성리학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의 주신 본성(혹은 천명)이 리가 아니라, 마음이 곧 리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행동을 함에 앞서서 도덕을 배울 필요는 없고, 행위는 양지를 실현시키는 존재로만 보는 것이다. 결국엔 도덕의 주체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다는 것.

결국엔 양명학은 신분제의 붕괴에 기여했다는 의미를 가졌다. 그 후엔 급진 세력과 온건 세력으로 나누어져 사회상에 대한 담론을 논하고 서민 계층에게까지 스며드는 등 명 후기 번성하였으나 명의 멸망 이후에는 쇠퇴하였다. 따라서 청조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잊혀졌으나 신해혁명이 벌어진 직후에는 육왕학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부활하여 공양학과 함께 전통 유교 시대의 끝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최후의 유학자"라고 불리는 양수명이 육왕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88년 사망)

이렇게 새로운 학문을 내걸며 기존의 유교적 신분질서를 흔들어놓았다는 의의를 높이 평가받지만, 이론부터 '원리보다 행동이 먼저다'라는 양명학의 성격상, 양명학은 성리학에 이론적으로 수시로 공격받기 쉬웠다. 성리학이 청나라 말기까지 관학으로서의 패러다임을 놓지 않았던 이유. 대표적인 양명학 비판자였던 이황의 <전습록변>에선 양명학의 성리학 비판을 4방향으로 제시하는데, 그 중 하나로 양명학은 "예의를 마음 밖에서 배운다고 치자, 근데 만약 내가 예의를 글로 배운다음 그냥 흉내만 낸거면 연극배우와 다를게 뭔가? 그러니까 모든 원리의 근본은 마음 아니겠나?"[52]는 주장으로, 이황은 여기에 대해 "예의를 연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외부세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외부(객관)와 내부(주관) 둘다 포함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으니까 두 개가 일치하는 거 아닌가? 왕양명 말대로 마음이 전부면 유교가 도대체 명상으로 도닦다가 깨우치는 선불교와 뭐가 다른가?"라고 반박한다.

현대적으로 생각하면 양명학의 가장 큰 문제는, 양명학 말대로면 자연과학은 없다. 서양에서 과학적 방법론은 베이컨의 경험주의에 기반해 발전을 시작하고 경험주의는 바로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시작하라'는 것이며, 현대의 과학사상은 양명학의 내성적 격물치지가 아닌 성리학의 외재적 격물치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베이컨까지 갈 것도 없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만 이르러도 왕양명과는 많이 다르다.[53]

이론과 실천이라는 틀로 따지자면 성리학은 이론을 마음 밖의 경험에서 찾아내느라 지식을 쌓는데 오래 걸리고, 실천으로 넘어갔다면 그 사람은 이미 높으신 분이 되어있을 것이다. 반면 양명학은 이론이 마음 안에 있으므로 굳이 지식을 쌓을 필요 없이 아무나 마음 속 이론에 따라 실천할 수 있지만, 과연 그 이론이 맞을까 라고 하면 양명학은 마음도 이(理)의 일부니까 맞다고 넘겨짚어 버린다는 것이다.

명나라 멸망 이후 양명학이 쇠퇴한 것은 양명학이라는 이단 학문이 퍼진 것이 명나라의 약체화를 불러왔다는 해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양명학은 말하자면 어느 정도 인기를 얻은 일종의 이단이었던 셈이었는데, 이는 심학이 흔히 양명학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이 깊다. 성리학에서는 정호, 정이 형제나 주돈이 등 주희 이전의 고명한 사상가들도 많았으며, 불교가 위태롭고 유교가 흥성하려는 시절에 나타난 성리학과 큰 상관이 없는 유학자들도 재빨리 성리학의 계보에 갖다 붙였다. 주자도 당대 자신과 대립하던 심학 계열의 거두 육상산이 죽자 그를 조문하고 나서 고자가 죽었다면서[54] 강렬한 오럴 어택을 가했다.

물론 왕양명의 학문적 업적 역시 주자에 비해 밀렸다. 주자는 당시까지의 유교사상을 거의 집대성해서 자신의 철학사상을 이루었으며 온갖 경전에 대한 주석을 다는 등 업적이 다대했으나 왕양명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또 왕양명의 후계자들 역시 사상적으로는 변변치가 못해 불교도교의 논설을 끌어다 쓰거나 유불도 일치점 따위의 학설을 논했으니 당시엔 핫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굉장히 사변적인 관념론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당시의 양명학 흐름에 반대하며 경세치용의 학의 기치를 세우고 들고 일어난 동림당 등 여러 실학파도 이때 일어난 것.

청대에 양명학이 쇠퇴한 이유 중의 핵심은 청나라가 이민족에 의해 세워졌다는 약점에서 비롯한 측면에 있다. 이민족에 의해 세워진 왕조라는 이유에서 정통성에서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한족보다도 더 굳건한 전통파 유교에 집착했던 것이다. 물론 청에서 양명학자가 어느 정도 관리로 뽑혔지만 주로 성리학자가 뽑혔으며, 그 양명학도 고증학에 밀려 쇠퇴하였다.

3.5. 청대 유학

청나라는 왕조 초기부터 정통 주자학을 강조하며 청나라 황실은 유교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였다. "이민족이건 한족이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화문명의 핵심인 유교 정신에 누가 더 가깝냐 만주족이 세운 왕조이긴 하지만 한족보다도 훨씬 유교와 학문에 밝으면 우리야 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따라서 청나라에서는 양명학과 같이 자유로운 해석을 허용하는 학문을 이단으로 탄압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곧 정부의 기틀이 잡히면서 문자의 옥이란 사상탄압 정책이 이어지며 유학자들을 탄압하고 정치에 대한 담론을 가로막으면서 자유로운 학설 연구가 위축되며 고대 경전을 다시 연구하여 고증하는 학문이 발달하게 된다. 고증학은 이기론의 성리학과 심즉리설의 양명학의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면에 집착한다는 점을 공격하며, 고전을 꼼꼼이 연구하여 '실사구시'와 '경세치용'를 구현하고자 한 학문이다.[55] 특히 근기학파는 경세치용을 기치로 내세워 많은 현실 개혁안을 내놓았다. 극단적으론 고대의 기록을 깡그리 부정해버리는 의고학파도 존재했다.

고증학 연구가 진척되는 동시에 문자옥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며 결국 가장 데미지를 입던 건 송나라 시대부터 줄곧 중화의 주류사상으로 기능했던 성리학이었다. 양명학이 사상적 측면에서 성리학을 공격했다면, 고증학은 아예 사실판단에서부터 성리학의 각을 떴다. 간단히 말하면 "너네들이 공자의 말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데, 공자가 정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나 할까?" 이런 송대 유학의 형이상학적인 경향을 도교·불교의 테이스트가 섞인 변종으로 간주하는 흐름이 성장하며 건륭제 즈음엔 경전 자체를 중시하는 한대 유학이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고전의 철저한 검증이라는 측면은 검증에만 매달릴 경우 현실과는 동떨어진다는 모순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청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문제점이 부각된다. 이것은 고증학이 실용성을 구현하려 했다는 데에 반해, 한편으론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지적이 공존하는 이유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이 유학을 관학 삼은지 2000년이 넘었고 그 기간 동안 닦아진 유교의 헤게모니가 보통 공고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정책을 펴거나 사상을 주장하려면 옛 성인의 어록에서 그 근거를 채집할 수밖에 없었기에 실사구시나 경세치용을 주장하면서도 성리학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결국 주자보다 끗발 좋은 성현의 말씀을 찾아 옛 경전과 경전의 업데이트 기록을 뒤적거릴 수밖에 없고 그러자니 또 현실과는 자연히 멀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증학 연구가 본질적으로 문자의 옥이라는 희대의 학술 탄압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생각할 여지도 있다. 즉 고증학 자체가 정치적 요인으로 발달했다는 주장. 이에 따르면, 옹정제 때부터 슬슬 심해지더니 건륭제 시기엔 청나라를 입에 올리기만 하면 목이 날아날 지경에 달하면서 청나라 학자들은 아예 당대의 이슈에는 학을 떼고 손도 대지 않게 되면서, 자연히 청대와 아예 엮일 일 없는 고대 기록이나 평론하는 자기위로적 학문으로 치우치게 되었으며, 결국 성리학을 반박해놓고 정작 대안이 될 참신하고 깊은 내용은 제시하지 않은 채 외려 옛날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반동적 악순환이 나타나는 진짜 이유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청 후기에는 드디어 유학의 마지막 흐름이라 할 수 있는 공양학이 등장했다. 청 대의 고증학이 형식에 치우치며 고증에만 치빠져 현실과 동떨어지자 이를 비판하며 등장했으나, 공양학이 등장하게 된 가장 커다란 계기는 서양 "오랑캐"들의 침공일 것이다. 이제껏 중국이 수많은 오랑캐들의 침략을 받았고, 현재 청 왕조도 오랑캐 왕조고, 오랑캐가 힘이 강하다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서양 오랑캐들의 침략은 이제까지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이, 지금까지는 설사 창칼로는 지더라도 기술 문물로 미개한 오랑캐들을 압도한 이후 다시 새로운 정신 승리 체계를 짜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서양 오랑캐들의 기술문명은 중화문명의 기술문명을 압도했고, 그것을 따라잡으려는 노력이 사상적인 면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말이 기술문명에 대한 선망이었지, 실질은 압도적 군사력에 대한 열등감과 다른 말이 아니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개항기의 비극적 역사이다. 이 맥락에서 조금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기술문명의 추적이 생사의 문제가 되었으니, 자극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강력한 기술 문명의 기원으로서 서양 사상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점점더 제국주의 압박은 강해지기만 하여왔고,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모든 방면에서 뒤떨어진 오랑캐로 폄하하는 중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기존 사회가 뿌리째 흔들리자, 기존 사회의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이치의 사회적 효용이 크게 공격당하게 된다. 이에 공양학파는 성리학과 같은 기존 학설들을 과감하고도 거부한 후, 유교의 뿌리인 공자의 흔적을 더듬어 '춘추공양전'을 더듬어냈다. 그들은 춘추공양전의 해석을 중심으로 학설을 수립, 발전 사관을 제시하여 변법자강 운동 당시 캉유웨이량치차오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은 변혁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공양학파의 시절까지도 유교의 거대한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힘들었을 만큼 유교는 중국 사상의 근간이었다. 중세의 신학에 비견할 수 있다.

이들에게 반대해서 '중학위체, 서학위용'을 제시한 자강파 장지동의 사상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격변의 시대를 겪고 있던 조선에게도 지침이 되었다. 동도서기론이 이 계통이다. 그런데 '중학위체, 서학위용'은 사실 조리가 맞지 않았다. 중국의 철학에서 사용되는 체와 용의 개념은 단일한 실재의 상호 관련된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적인 가치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서양의 학문을 단순한 도구라고 헐뜯을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널리 사용되었다.

3.6. 대만

대만 같은 경우에는 17세기 대륙에서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서자 평생을 명나라 부흥운동에 바쳤고 명나라의 옛 도읍 난징을 거의 되찾을 뻔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한 정성공청나라의 해안 봉쇄에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명나라 부흥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거점으로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대만 섬을 노렸다. 1661년 4월 29일에 타이난을 공격[56], 네덜란드령 대만의 반네덜란드파의 원주민들, 한족들과 함께 동맹을 맺고 봉기하여 네덜란드 세력을 공격해서 질란디아 요새를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원군도 격파하여 인프라를 통째로 빼앗고[57] 대만 남서부를 차지하여 그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는 동녕 왕국(명정시기)을 건국하였다. 이때 포로로 잡은 수백명의 네덜란드 남성을 고문, 학살하고 여성들은 노예로 삼았다.[58] 이후 동녕 왕국은 융화정책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들지 못한 대만 원주민들의 관계에 신경을 많이 쓰며 다두 왕국을 통해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고 이들에게 농사, 중국어, 사냥, 덫이나 옷 등의 물건제작을 가르쳐 주는 등 적당한 주변 관계를 맺어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항쟁체제를 꾸렸고 청나라와는 독립적인 사회 제도를 구축했는데 이를 통해 대만 원주민들에게도 한족의 유교 문화가 수입됨으로써 대만은 동북아시아사로 편입되었다.

3.7. 현대

그러나 이러한 유교의 변양은 사회변혁을 온전히 감당해낼 역량을 지니지는 못했다. 공양학자들이 사회의 근간 사상을 새롭게 발기해 보려고 고심하는 사이, 서구의 사상은 급속도로 들어왔다. 중국의 서양학자들은 공양학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나날이 더욱 격렬하고 더욱 빠르게 '문명국'이 '후진국'을 점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제국주의적 사회진화론'을 전파했다. 또한 실증으로 이룩한 과학과 논리술에 바탕한 철학이야 말로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중국만의 상황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더욱 유효했다.

이러한 상황의 영향은 과학기술뿐 아니라 정신문명에도 해당한다. 그 나름대로 복잡한 전개가 있지만 공산혁명, 민주혁명도 서구 사상 전파의 예시가 될 수 있다. 결국 젊은 시절 공양학파였던 캉유웨이량치차오같은 거목들마저 유교와 멀어지면서 유교가 국가의 기반 이념으로 존재하던 역사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제국주의를 벗어난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유교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사상들을 재독하기도 한다. 서구의 문명사 사상사에 대한 이른바 유럽중심주의적 함몰에서 벗어나는 주요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고에서이다.

장제스가 통치하던 중화민국에선 유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삼아 유교정신을 통한 국민통합을 이루려 했다. 장제스 본인부터 군인 출신에 여러 유교경전을 독파한 인물이었고 군벌과 서구열강의 침탈에 중국적 전통이 파괴되고 모럴헤저드와 서구적 사고로 부터의 잠식을 막기위해 중국의 전통은 유교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타락한 서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부터 중국을 지켜내려 했다. 그렇지만 결국 독재정권을 정당화 시키는 논리였고 중일전쟁국공내전으로 국가적 정체성의 확립이 불가능 했고 결국 대만으로 쫓겨나 아득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수천 년 이어온 공자 가문의 직계 후손 쿵더청국부천대 때 데려가서 미약하나마 유교적 전통을 잇는 중이다.

마오쩌둥공산주의자로서 자신이 갖고있는 공산주의의 변형을 공산중국에 탑재하려 했다. 농민을 국가의 주체로 보고 농촌 커뮤니티의 발전이 곧 국가적 성장으로 본 모택동주의는 전통적 유교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듯 했지만 그렇게 해서 벌인 대약진 운동 이 몇천만의 아사로 종결되어 마오 본인의 실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후에 마오쩌둥이 권력을 되찾기 위한 문화대혁명이 벌어지자 홍위병들은 공산주의를 방해할 만한 전통을 없애야 한다며 공자묘를 파괴하고 유교경전을 불태운 뒤(비림비공운동) 나이가 적고 많음을 떠나 반동으로 몰린 인물들을 죽이거나, 죽을만큼 모욕을 줘 중국의 전통은 크게 훼손됐고 유교적 정신가치도 그에 따라 파괴되었다.

마오쩌둥 사후 중국 공산당은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수단으로 유교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노력을 하고있다. 그러나 수십년전 파괴된 유적과 같이, 유교는 더 이상 중국인들의 이념 속에서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이념, 사회적으로 중국에서는 완전히 파괴된 문화이면서, 동시에 중국에서 발생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대한 이념 체계이자 문화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발전을 이룬 다음에는 이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충족을 이루었기에 관념적인 부분에서의 발달을 촉구하는 것. 하지만 오랜기간 쇠퇴하여 왔기 때문에 중국의 학자들이 한국에 방문해 유교를 연구하기도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4. 한국에서의 발전

4.1. 조선 건국 이전

한국에서는 당장 삼국시대부터 유학의 기본 개념이 수용되었으나, 관학이나 외교 문서, 고대 문헌의 해석 수단 정도에 그쳤을 뿐 백성들 사이에서는 불교도교만큼의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신라독서삼품과, 시조 등을 보면 이때까진 귀족들의 공부용 혹은 문학적 유희 용도의 학문에 지나지 않았다.[59] 다만 국학 설치로 유학을 전파하고, 중국 빈공과에 붙어 경력을 쌓고 신라에 돌아오면 관례적으로 공직에 임용되었기 때문에 6두품 미만 계층은 출세를 위해서라도 유학을 공부했다. 화랑들은 유학 교리를 포함한 유불도 삼교를 모두 공부했고, 충주 출신의 유학자 강수의 예와 같이 전국 각 지방에서도 유학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 전문이 남아있는 문무왕유조는 그 내용에서 유학에 바탕한 왕도정치 사상이 적어도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는 완전히 자리가 잡혀 있었음을 보여준다.[60]

한편으로 고려 시대 초기에는 과거시험 제도를 도입하고, 중기에는 최충 등에 의한 사립 학교의 건립, 그리고 이에 맞서기 위한 정부 차원의 국자감 지원과 도서관 성립 등으로 문생들의 수효는 증가했으며, 향교의 건립도 이루어졌다.

무신정변으로 한때 문신들이 몰살당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곧 이들이 없으면 국가운영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무신 집정자들에 의해 등용되거나 무신 유력가문과 혼인동맹을 통해 예전 만큼의 세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61] 최우가 등용한 사대부들은 신진사대부들이 아니며 이들은 최충헌 사후 잠시동안의 권력 공백기간 동안 최우에게 반기를 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최우가 등용한 세력이었다.[62] 최우 본인부터가 상당한 유학적 지식을 쌓은 사람이자 실력이 뛰어난 문장가였기에, 웬만한 문신들은 그를 뒤에서 업씬여기지조차 못했던 점도 한몫 했다. 이들 최씨 정권의 문신들은 어디까지나 최씨 무신정권의 옹호하에 형성된 집단이었으므로 김준의 쿠데타로 인해 최씨정권이 붕괴하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무신정권의 붕괴와 함께 원 간섭기가 시작되어 대부분 몰락하고 일부는 권문세족으로 변모했다.

그후 충선왕이 원나라로 나포되었을 때, 베이징에서 만권당을 개설한 후 안향에게 파견 명령을 내린다. 이 안향에 의해 성리학이 수입되어 최씨 정권때와는 다른 사대부 계층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공민왕의 사회 재건 시책에 따라 이색, 정몽주 등이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각지에서 향교를 재건했지만[63][64] 정작 이들은 공민왕의 타락 이후 완전히 멘붕해버려 그야말로 몰락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도 공민왕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 시국을 조롱하였을 뿐이다.[65]

공민왕이 시해당한 후,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등에 의해 잠시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나 우왕의 밀명을 받은 최영, 이성계등에 의해 이들이 싸그리 제거되었고 최영에 의한 신군부 정권이 들어선다.[66] 하지만 당시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정국을 두고볼 수가 없었던게 아무리 최영이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일단은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 군인이 되어버린데다가 불과 백년도 안 된 시점에 무신정권이라는 악몽을 경험한 그들로서는 최영의 집권을 절대로 묵과할 수가 없었고 결국 그들이 찾아낸 것은 또 다른 신군부의 한 축인 이성계였다.

마침내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 정권이 붕괴되고 이성계의 신군부가 들어서게 되었으나 여기서 또 이들의 분열이 이루어지는데 고려라는 체제를 유지하면서 성리학의 국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성계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정몽주를 위시한 온건 개혁파와 고려 대신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여 성리학 국가를 만들어 나가자고 주장한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의 급진 개혁파로 분열되어 버렸고 결국 승리한 쪽은 급진 개혁파 쪽이다.

4.2. 조선 전기

이성계조준, 정도전, 남은 등의 신진사대부는 고려를 멸망시킨 뒤 조선을 건설하면서 국가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했다. 이에 전국의 부, 목, 군, 현마다 1개의 향교를 건설하여 유교 이념의 전국적인 보급을 꾀했다. 독자적인 철학의 발전은 여전히 미미했으나, 전국에 양반 계층이 자리 잡은 것은 후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강고히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 천 년 동안 한국사의 주요한 국가적 이념이었던 불교는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으로, 국가적 이념으로서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67]

다만 조선 초기의 성리학은 그야말로 정치의 수단에 불과했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전도되지는 않았다. 유교적 제도를 기록한 '주례'를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다[68]. 성리학의 생활화(소학, 주자가례)는 초기에는 양반 가문에서만 한정되었다. 그 외에는 자주적 성향을 띠어 단군을 숭배하고 부국강병을 꾀하는 등, 이때 관학파들은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정도전이 불교를 혐오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위층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멀리하지 않으려 한 인물들도 있는데 이성계의 최측근 중 무학대사가 있었고 세종[69]이나 세조도 그들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을 정도로 불교를 완전히 뿌리뽑을 기세로 탄압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융통성 있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의 부족한 면을 메꾸기도 했다. 물리적 통치술은 유교, 정신적 수양은 불교라는 식으로.

여기서 길재 등의 온건 사대부들은 정계 주류에서 쫓겨나가, 사림파를 형성하게[70] 되었다. 다만 이때 사림파들은 성종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했었고, 그 이전엔 아주 소수만 등용되었다.

4.3. 조선 중기

사대부 계층이 세운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이 지배하게 되었고, 관학파(세조 이후로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쟁 끝에 선조 시기때 훈구파 잔여세력이 사림파에 흡수되면서[71], 사림파의 세상이 되었다.

이는 간단히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로서의 우열보다는 쪽수에서 밀린 것이다. 관학파는 원래 기존 양반가문이나 양인계급에서 과거→성균관, 집현전 테크를 탔기 때문에 그 수가 한정되어 있지만, 사림파는 서원에서 능력있는 재목이다 싶으면 무한대로 뽑아올 수 있기 때문. 게다가 훈구파의 부정부패, 방납과 대농장의 폐단 탓도 있다.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등용되기 시작하고, 중종때에 들어 반정공신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가 등용되었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도학정치(道學政治)[72]를 펼쳤는데, 그 정도가 너무나 강경했으며, 독선적이고 부패하였다. 뇌물 비리는 없었지만 현량과의 공정성은 0에 수렴했으며, 유능하고 청렴해도 훈구파였으면 조광조 일파가 삼사를 동원해 파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조광조는 이러한 부정부패를 군자-소인론으로 어물쩡 합리화해버렸다. 결국 훈구파는 물론이고, 중종에게마저 미움을 사 조광조 일파는 기묘사화로 제거되고 말았다. 이러한 조광조의 죽음은 모든 사림파들에게 화두를 던져주었고, 그것이 이기론의 발달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결국 이기론의 학문적 해석 차이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로 나뉘게 된다.

퇴계학파는 흔히 주리론적 경향으로 알려진 것으로, 이황조식을 한 데 묶기도 하지만, 이 둘은 차이가 있다. 조식은 좀 더 불교적 성향이 강하며, 노장사상까지 포용했기 때문에 딱히 성리학자도 아니었다. 이황은 주자대전을 최초로 읽은 인물. 사실상 성리학이 제대로 자리잡은 것은 이황 때부터다. 영남지방을 중심이 되며, 동인→남인 테크를 탄다.

퇴계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제시했는데, 사실 성리학적으로도 매우 이상한 주장이다. 원래 성리학에서 리(理)는 발동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 그러나 퇴계는 인간의 순선한 도덕성이 곧바로 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기 때문에 주위의 논란을 무릅쓰고 이 주장을 밀어붙였다.

퇴계의 말에 따르자면 리는 정신과 관념을 의미하여, 사단[73]으로 표현된 절대 선이며, 기는 환경과 기질을 의미하여, 칠정[74]으로 이루어진 가선가악(可善可惡)한 것이기도 하다. (사단칠정논변)여기서 적절한 학문 수행으로 리로써 기를 누르고 도덕적인 생활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말. 예를 들어 퇴계는 조광조의 죽음을, 아직 조광조가 학문이 미숙하고 성정을 제대로 닦지 못했기 때문에, 말인 즉슨 리로써 기를 못눌러 자주 어그로를 끌다 죽었다고 까기도 했다.

이러한 강렬한 도덕주의는 남인으로 하여금 근왕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해주었다. 신분이 높을수록 리가 더 높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예송논쟁에서 보여주었고, 후에는 의병운동이나 위정척사 운동의 주축이 되었으며, 이 계열에서 그리스도교가 수용되기도 한다. 리의 주체가 왕 대신에 하느님으로 대체된 것.

그리고 이 계열에서 일본 성리학에 영향을 미쳤는데. 임진왜란의 관료이자 의병장이었던 강항이 그 주인공이다. 강항은 이황의 제자 강준의 동생으로, 자기 형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므로 엄연히 퇴계학파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의병장으로 왜군과 싸우다 포로로 잡혀, 쿄토로 끌려가서 승려와 학자들에게 이황학파 계열 성리학을 전파하였다. 강항의 대표적인 제자가 일본 유학의 시조인 후지와라 세이카[75].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76] 이후로 퇴계학파가 도쿠가와 막부의 주류 학문이 되었는데, 퇴계학파 특유의 근왕주의가 쇼군의 통치에 도움이 되었기에 통신사로 율곡학파의 학문이 전달되어도 주류 자리에서 놓치지 않았다. 다만 결국 퇴계학파의 근왕주의는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천황 중심의 통일국가 체제로 변하게 하였다. 근왕주의의 주체가 천황을 받드는 쇼군이 아닌 천황 그 자체가 된 것.

율곡학파는 주기론으로 알려져 있는 학파로, 기대승을 거쳐 이이로 대표되는 기호지방(경기도와 충청도를 가리키는 말) 중심으로 전개된 학파. 기대승은 퇴계의 학설에 반대하여 퇴계와 논쟁을 벌인 학자다. 이후 율곡 이이가 퇴계를 비판하면서 기발리승(氣發理乘)을 주장한다. 기만 발동하고 리는 기에 올라타기만 한다는 것. 따라서 순선한 마음이 따로 발동되는 게 아니라, 잘 발동된 감정이 순선한 마음이라는 주장이 된다. 그리고 주자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을 계승하여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하는데, 이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보편적 근원이며, 기는 국한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율곡학파는 서인 → 노론으로 테크를 탄다.

기의 중요성을 인정한 율곡학파는 환경과 제도의 개선을 중요시 여겨, 민생안정에 중요성을 설파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이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과 십만양병설. 다만 이러한 민생안정론은 북벌론에서 제대로 악용하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군사력 갖추고 북벌을 하려 한다면 민생이 파탄난다고 반대한 것이라든가. 실상은 서인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기에 괜히 처들어가다 군사가 박살나고, 왕권에 밀려 권력을 잃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청나라가 건재하긴 건재했었고. 그리고 율곡학파의 입장에선 리는 보편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퇴계학파가 말하는 것처럼 신분이 차이가 리의 차이가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학풍은 예송논쟁에서 보여주었고, 여기서 사회계약설과 흡사한 성향을 보였다.

우계학파는 율곡학파와 같이 성혼으로 대표되는 서인의 한 축으로, 성혼학파라고도 한다. 성혼은 율곡과 퇴계의 학문을 일부 비판하면서도 절충하였다. 이 우계학파가 서인 → 소론으로 테크를 타면서 소론이 성리학을 탄력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한편 조선 중기부터 양명학의 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성리학의 교조화가 진행되면서 그 세력이 더욱 약해졌다(그렇다고 대놓고 탄압한 것은 아니다). 사실 성리학이 교조화되기 한참 전에 양명학의 도입이 시도된 바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황이 저서 '전습록변론'(왕양명의 저서인 <전습록>을 연구, 비판한 저서)에서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유교에 맞지 않다며 맹렬한 비판을 가해 뿌리를 내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양명학이 평등을 주장하고 신분제를 부정하는 면이 있기에 조선사회가 무너지는 꼴을 볼수 없었기도 하다.

4.4. 조선 후기

17세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중국보다 더 유교적으로 교조화된 사회로 평가받는 성리학 천하를 달성하게 된다. 그 여파로 주자가례의 보급과 강요로 여권이 하락하거나 장자 상속이 이루어지는 등의 모습이 나타난 것도 이 때였으며, 통치의 차원에서는 유교 학파에 따른 논쟁이 활발히 벌어져 예송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전국에서는 향약이 시행되어 유교적인 사회 통제를 강화함과 동시에 전국 각지에는 서원이 설립되어 자신들의 학파를 고수하였다. 흔히 '18세기 서민 문화의 성숙'을 이전의 양반 성리학 문화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가례의 보급과 제사의 수행 등 개인 혹은 향촌 사회에서 성리학의 보급은 조선 후기에 오히려 큰 진전을 보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남인은 경기도 남인인 근기학파와, 경상도 남인인 영남학파로 갈라지게 된다. 근기학파는 경세치용을 기치로 내세운 중농학파로 토지재분배를 위한 자영농 육성을 주장했고, 영남학파는 서원과 향약을 강화하여[77] 위정척사파의 뿌리가 되었다.

노론 사이에서는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같느냐 다르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간을 중심으로 인물성동론(경기도 중심 낙론)이, 한원진을 중심으로 인물성이론(충청도 중심 호론)이 펼쳐졌다. 이를 호락논쟁이라 한다. 근데 이 논쟁의 본질은 리가 기에 제약되냐 안 되냐를 논쟁한 것이다. 말하자면 물(物)에도 리가 있느냐 없느냐 이런 논쟁이다. 인과 물의 성(리)이 다르다는 건, 인간과 사물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내재된 리도 다르다는 논리. 이것이 율곡학파의 주기론적 정통이다. 근데 인간과 사물의 성이 같다고 하면 뭐가 되었던 리는 제약되지 않고 보편적 성질을 띤다는 뜻이 된다. 인물성동론은 퇴계의 주리론적 경향을 많이 받은 사상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호락논쟁은 오랑캐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것이다. 당시엔 오랑캐는 사람 취급을 안하기에 물(物)에 들어가는데, 인물성이론과 인물성동론 자체는 오랑캐와 거리가 먼 이론이지만, 낙론의 논리는 인간이나 짐승이나 똑같이 리가 있으니 오랑캐도 리가 있으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것이고, 호론의 논리는 오랑캐는 짐승과 같아 리가 없으니 그들의 문화를 받으면 짐승처럼 된다는 것이다. 결국 호론이 대세가 되어서 낙론은 정계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됐고, 이용후생을 기치로 내세운 북학파와 김창집의 손자 김원행이 살아남아 이어진 노론 시파의 뿌리가 되었고 [78] 호론은 영남학파와 같이 위정척사파의 뿌리가 되었다. 19세기 제국주의계를 강타한 사회진화론의 대선배[79]

다만 이때 남인은 대체적으로 호론에 동의하였다. 퇴계학파의 이기호발설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인물성이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원론적인 차원에 가깝고. 남인의 인물성이론은 '인간에게만 오로지 리가 있고, 오랑캐에게도 사람이니 리가 있다.'는 것 정도다. 한마디로 인물성이론에서 호론과 남인의 차이는 오랑캐를 사람으로 보나 안보냐의 차이. 예를 들어 남인계 실학자 정약용의 「기예론」에서는 인물성이론이 얼마나 잘 나타나 있는지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 우계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갑술환국 이후로 남인의 처리문제에 대해 온건한 주장을 하면서 송시열과 키배를 벌였던 윤증이 있다.[80] 그리고 양명학을 집대성한 강화학파의 거두 정제두가 있으며, 이것이 한말 때「유교구신론」으로 성리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을 주장한 박은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우계학파가 양명학을 신봉하는 학파는 아니고 애초부터 성혼은 양명학과 거리가 있던 선비였지만, 양명학이 주자학과는 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이념적 기반으로서 우계학파의 전통으로 이어졌었다.

한편 정제두를 비롯한 소론학자들을 중심으로 양명학이 명맥을 이어갔으며, 개화기 박은식은 유교 구신론을 펼치면서 그 근거를 양명학에 두기도 했다.

조선 말기 안동 김씨 세도가문은 고증학을 밀어주었는데, 당시 고증학은 고전 연구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현실 개혁에는 정작 도움이 되지 않았다.[81][82] 또한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부정한 게 아니라 고증학을 통해 성리학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한 선비들이었다. 그러니까 고증학 = 실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증학이라는 것이 사실 사상이기보단 학문적인 연구 방법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어쨌든 이 고증학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한반도에서 유행하면서 백과사전류 저서나 문헌 고증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예를 들어 한백겸의「동서지리지」는 고대 지명을 새롭게 밝히어 고구려의 발상지가 평안도가 아닌 만주라고 고증했으며, 한치윤의「해동역사」는 중국부터 일본까지 540여의 서적을 참고하여 한민족과 중국 및 일본, 여진에 대한 문화 교류를 상세히 기록했고, 추사 김정희는「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를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히어 당시 신라의 강역을 고증하였다.

4.5. 근현대사

19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대내외적으로 격심하게 동요하게 되어 이에 따라 유교도 중대한 변화를 맞이 하게 된다. 형식적으로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나 실제 세도정치로 권력이 일부 집단에 종속됨에 따라 많은 유학자들의 정치적 진출이 좌절되었다. 또한 외세의 압박과 더불어 천주교의 확산으로 유교의 전통적 지위가 위협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도학의 의리정신에 입각하여 주자학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노력과 함께 현실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자는 움직임도 대두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학파분열은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리고 학파에 따라서 성리설이나 의리론에서 다양한 입장들이 제기 되었다. 이 시기에는 사단칠정론, 인물성동이론 등 성리설에 대한 관심을 여전히 중요한 관심사였으나 무엇보다도 시대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인한 의리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즉, 역사적 위기에 대흥하여 유교의 근본이념을 재인식하고 도학정신을 재천명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유교질서를 재정립하려는 학문적 추구와 실천적 의지가 이뤄졌다.

이러한 입장은 위정척사파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이들은 화의론적 의리론에 입각하여 서양세력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강상(綱常)의 윤리를 밝혀 서양의 침략에 대비할 것과 외세의 압력에 저항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며,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등 도학의 의리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이들은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는 점과 서양의 물질문명에 대하여 도덕적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적 전통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보여준다는 점의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 될 수 있다. 다른 일부 유학자들은 전통적 생활양식과 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외국 문물을 받아야 들어야 한다는 개화론을 전개하거나, 전통적인 정신문화와 외국의 물질문명을 적절히 조화시켜야 한다는 동도서기론의 입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교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갑오개혁을 계기로 과거제도와 신분제가 철폐되는 등 사회제도가 근대적으로 개혁되고 서양식 교육제도가 일반화 하면서 통치이념으로서의 위치에서 급격한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1910년 일제의 의한 국권박탈로 많은 유학자들이 자결하거나 국외로 망명했고 일부는 국내에서 심산유곡에 들어가 도학의 명맥을 유지하기도 하며 대동교(大同敎), 공교회(孔敎會)[83] 등을 중심으로 한 유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유교국가로서의 조선의 소멸로 인한 정치적 기반이 완전히 사라짐과 함께 망국의 책임을 유교에 돌림으로 유교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적 인식으로 인하여 유교는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84]

이러한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가톨릭(천주교), 개신교 등 구미~중동 종교의 적극적 수용으로 인하여 종교학적[85]으로는 그 세력을 거의 잃었다. 이는 과거에 사상으로서 경쟁 관계였던 불교그리스도교가 여전히 상당수 한국인들에게 현재진행형인 것과 대비된다. 그러나 유교의 영향력은 한국인들의 문화양식에 스며들어 2020년대 현재까지 의례와 윤리적인 규범으로 남아 있기에 그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가족과 관련된 법률과 제도들은 아직도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어도 아예 헌법재판소에서 유교적 전통이므로 지켜야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거부하는 실정이다.

또한 현대 대한민국의 일상생활에서 윤리적 규범 및 양식은 대부분 유교적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영향 탓에 그 이념은 현대 한국인의 가치관에 상당수 녹아있다. 연장자와 손윗사람에게 대하는 예의가 확실해야하고, 연장자는 아랫 사람에게 베풀줄 알아야 한다는 개념은 아직도 유효하다. 무례한 아랫사람이나 이기적인 윗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또 공동체의 구성원을 개개인의 연합으로 보고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최소한으로 두려는 서구권 문화와는 다르게, 공동체를 개개인보다 중시하고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개인행동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걸 보면 향촌 공동체를 유교적 세상을 지탱하는 기본으로 본 성리학의 현대화된 버전으로 볼 수 있다.

한류가 열풍인 지금,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이만열 교수)는 한국이 제대로 된 문화 산업을 이끄려면 유교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비록 소수여도 우리 사회의 대안을 해외로부터 본받는 것보단 우리 안에서 그걸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유교를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앞으로 유교는 전면에 나서서 조선시대처럼 사회의 중심적 구성원리로서 기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 한국의 유교 문화는 뚜렷한 구심점이 없고 그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지켜나가는 잔존 문화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에도 한국인은 여전히 유교적 가치관과 판단양식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윤리적 아이러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 유교가 전면에서 끼치는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약화되겠지만,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과 윤리규범에 대한 영향력이 어떻게 될지는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 물론 변질된 사상으로 인한 문제점들은 유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빠르게 개선되어야 한다.

4.6. 21세기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이 현대의 유교철학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2020년 10월 1일에 있던 이황을 추모하는 추계 향사에서 처음으로 여성을 초헌관으로 삼았다. 2002년에는 여성이 상덕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바뀐 바 있다.#

5. 일본에서

일본에서 유교는 6세기에 들어왔다. 백제의 오경박사(五経博士)가 513년에 전파했다. 왕인논어를 들고 왔다는 얘기도 있어 5세기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에선 종교적 색채가 엷었고 지배층을 위한 제왕학에 가까웠다.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율령제가 쓰이자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유교 교육이 도입되었으나 일단 일본에는 과거 시험이 없었고 불교신토가 융성하면서 존재감을 상실했다.

가마쿠라 막부에는 주자학이 전파되었다. 15세기에 이르면 오닌의 난이 일어나고 수도인 교토가 황폐화되면서 유학자들은 각 지방으로 들어갔으며 승려가 유교를 연구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에도 막부가 들어서자 불교와 유교를 분리하여 유교를 제왕학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에도 막부의 쇼군들 중엔 도쿠가와 츠나요시 같이 유교를 장려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는 통일 이후 전쟁이 사라지자 칼을 들 일이 없어진 무사층을 관료로 만들기 위해서, 무사의 관심을 무에서 문으로 돌리고 다이묘가 무력을 길러 막부를 향한 반란을 막기 위해서, 이를 바탕으로 에도 막부를 조금 더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양명학이나 성리학이 기본이 되었으나 자기들 자체적으로 고전을 해석하는 식으로 일본 유학은 독자발전하였고 무사 계층에서 발전하였다. 에도시대에 유교가 발전하고 막부 차원에서도 유교를 나라를 통치하는 중심 사상이자 학문으로 장려하여 다이묘들이나 사무라이들이 유교를 공부하였고 일본의 많은 관학에서는 다이묘와 사무라이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유교를 가르쳤다. 이런 분위기 속에 유교의 사농공상의 마인드는 일본에서도 나타났고 유교의 존왕양이 사상 같은 경우 메이지 유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메이지 같은 경우엔 상당히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교육칙어 등에서 유교적인 배경이 잘 나타난다. 다만 무사층을 제외한 일반 상민이나 평민들 사이에서 유교는 듣보잡이었다. 그 때문에 현대 일본에서도 연구자를 빼면 유교를 아는 사람은 잘 없다.

다만 유교라고 직접적으로 강조하지 않았을 뿐이지, 에도 시대부터 장유유서 등의 종법질서 법칙을 무가제법도 등에 적용하면서[86] 실제 일본 문화에서 유교의 영향은 매우 크게 나타났다. 유교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사상으로서 사회, 문화, 제도, 양식 전반에 뿌리를 내려 현대 일본인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유교 도덕을 '수신' 등의 교과서 과목에 집어넣어 교육하면서 극단적인 충(忠)을 강조하는 등의 영향이 생겨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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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의 공자묘.

6. 류큐 왕국에서

오키나와 일대를 다스렸던 류큐 왕국명나라조선, 청나라와 직접적으로 교류하였다. 이 당시 구메36성(久米三十六姓)이라고 하는 복건성계 도래인들이 활약했으며, 이들을 통해 류큐 왕국은 유학을 받아들였다. 또한 상류층 자제들 대부분은 중국에 유학을 다녀왔다. 1676년에는 나하에 지성묘(至聖廟)가 세워져 공자, 자사, 증자, 맹자, 안연을 배향했다.

류큐 왕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데이 준소쿠(程順則, 1663~1735)[87]가 있다. 1714년에는 그의 건의에 따라 지성묘에 유학 교육 기관인 명륜당(明倫堂)이 설치되어 중국어(관화)와 유교 경서를 교육하였다. 또한 중국의 유학서적인 육유연의(六諭衍義)[88]를 일본 본토에 소개하였는데, 일본 각지의 데라코야[89]에서 교재로 널리 쓰였다.

7. 베트남에서

베트남어로 유교는 뇨자오(Nho giáo)라고 부른다. 한나라 때 중국의 지배를 받을 때 유교가 베트남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다. 유교를 처음으로 부흥하려 했던 시기는 리 왕조(1009년 – 1225년) 때로 하노이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가 건설되고 과거 제도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불교의 세가 강했고 후 레 왕조 이전 왕실들은 유교보다는 불교를 선호했기에[90] 불교와의 갈등이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에 유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3세기였으나 불교를 선호하던 베트남인들에게는 15세기 이전까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베트남에서 본격적으로 유교를 국정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은 호 왕조(1400년 ~ 1407년) 시기로, 쩐 왕조의 황위를 찬탈한 호꾸이리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장려했다. 그러나 호꾸이리가 자기 취향대로 유교 사상을 곡해[91]하는 문제가 있었고 호 왕조가 어용 세력화 하려 했던 호꾸이리식 유교 진흥 정책은 명나라의 침공으로 호 왕조가 멸망하면서 유야무야 됐다. 명을 격퇴하고 세워진 후 레 왕조(1428년 - 1788년)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국가의 주요 이념으로 격상되어 베트남의 유교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92]. 불교를 숭상하던 무신 세력과 유교를 숭상한 문신 세력의 권력 다툼 때문에 초반에는 유교적 이념 확립이 더뎠지만 유학에 심취했던 성종은 유교적 가치와 규범을 장려해 과거 제도를 확대, 유교 지식인들을 육성함으로서 유교적 정치를 실현하게 됐다.

베트남의 유교 수용은 중국의 영향을 받던 북부지역에서 이루어졌고 베트남과 민족과 문화가 다른 참파[93]는 유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불교와 더불어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종교가 바로 유교.

베트남의 유교는 여성의 재산권과 이혼권을 인정하고, 학파의 구분이 옅었으며, 개방성과 현실주의적 측면이 강하다는 특성이 있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유교는 정복 세력인 중국의 학문이다 보니, 유교를 전부 받아들이기보다는 베트남화하여 통치에 유용한 도구로써만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천명이나 천벌 등의 개념과 명분론 등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것도 특징이다. 다만 이 때문에 유교적 명분론 또한 약하기 때문에 왕조교체가 자주 벌어졌다는 단점 또한 있었다. 베트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938년이고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1862년인데 그 사이에 한반도는 딱 한번 역성혁명이 벌어진 반면에 베트남은 십이사군시대와 명나라 통치기, 남부를 통치한 제후들을 빼고도 왕조가 12개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베트남을 두고 '글을 안다고는 하나 인의(仁義)가 없다'며 폄하하기도 했으나[94], 베트남 사대부의 유교 경전 이해도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베트남 역시 유교국가라는 정체성은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자 베트남 유생들은 '인간적인 유교 문명이 포악하고 야만적인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충격과 분노에 빠졌고, 이들 중 일부는 베트남 독립 운동의 한 축인 복벽주의 세력으로 뭉쳐서 활동하게 된다.

8. 북한에서

1983년판 북한 《철학사전》에서는 유교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1992년에 나온 《조선말대사전》에서는 유교에 대한 서술 또한 중립적으로 변경되었다.
“유교는 초자연적인 하늘신을 우주의 최고지배자로 숭배하는 종교적 사상에 기초하여 지배계급의 특권을 절대화한 정치적 견해와 삼강오륜의 반동적 륜리관으로 구성된 반동적인 사상체계이다. 유교는 착취자들을 반대하는 근로인민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계급적 압박의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민족적 의식을 좀먹고 썩어빠진 봉건윤리도덕을 퍼뜨려 놓음으로써 우리 인민의 고유한 미풍량속과 고상한 도덕품성의 발전을 백방으로 저해하였다. 특히 유교의 종교적 관념론적 세계관은 조선에서의 유물론적인 철학사상의 발전을 방해하였으며 과학문화 발전에 막대한 해독을 끼치였다.”

이처럼 북한에서 유교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기류가 강하고 실제로 호칭문화 등 여러부문에 있어서 유교적인 관습이 사장되거나 철폐되었지만 생활속에서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있는 등 유교적인 관례가 어느정도 남아있기는 하다.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하고,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할 정도면, 북한은 유교사회의 뿌리를 아예 뽑았다. 북한은 조선왕조와 유교를 타도대상으로 보아, 갓 쓰는 어르신들도 보이지 않는다.

북한외교관들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충성의 대상을 이성계의 일족으로 잘못 삼았을 뿐, 지도자에 대한 충성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북한 고위인사들이 많다고 한다. 북한식 총검술에서 외치는 구호에도 '충효일심'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등, 유교 개념은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9. 종교? 철학?

"유교를 종교로 보아야 하는가? 철학으로 보아야 하는가?"하는 논란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종교철학의 정의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종교'와 '철학'이라는 틀은 구미~중동인들 특유의 헤브라이즘(그리스도교)과 헬레니즘(그리스 철학)의 분리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러한 분리는 구미~중동 이외의 문화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서양의 철학도 그 기원은 종교이기 때문에 알고 보면 서양에서도 종교와 철학은 분리가 안 된다. 예를 들어 서양 철학의 근원에 해당하는 플라톤고대 그리스 종교의 명백한 영향 하에서 사유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예 제1원인(순수형상)을 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종교적 요소는 고전 서양 철학에서 결코 주변부에 머물지 않았으며, 사유의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은 특유의 사랑론을 명백히 신화적 언어로 말하고 있으며, 그 누구도 『파이돈』을 비종교적인 텍스트라 말할 수 없다. 『변명』에선 소크라테스는 스스로가 다이몬(신령)의 예언을 받았다고 말하며, 플라톤은 신성모독 혐의로 처형된 소크라테스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려고 했다.

불교는 워낙 다양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윤회라고 하는 사후세계를 중시하고 아미타불이나 미륵불처럼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언급이 된다.

도교도 사원과 성직자가 있고 헌금도 받는다. 부적 만들어서 파는 것의 원조가 도교다.

힌두교의 경우도 '인도철학사를 보면 인도에서는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지 않는다'라고 서론에서부터 언급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인도철학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하나의 본체적 원리(브라흐만)를 말하는데, 이 원리는 동아시아-특히 도가사상의 도(道)와 같은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는 본체/현상의 이원론 자체가 없다. 특히 유교에서 언급되는 도는 그냥 상식적인 삶의 원리 같은 것이지 우주를 아우르는 대단한 원리 같은 게 아니다.

종교를 시공간을 초월하는 생각이라고 정의내린다면 유교는 당연히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이데아나 물자체 같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개념들을 자주 운운하는 서양철학마저 종교로 분류할 수 있다.

유교의 이념은 인의예지를 기준에 두며, 이 기본 이념으로 사람답게 만든다. 즉, 종교의 의미와 목적은 사람이 사랍답게 살기위한 방법을 가르치고 그 목적은 신으로 내가 믿는 대상의 말씀대로 살기 위함이다.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를 따지려면 종교를 어떻게 정의할 건지부터 명확히 해야 되는데 그것부터가 애매하다. 서양철학자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많았고 과학자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많은데 그렇다고 철학과 과학을 그리스도교와 섞어서 생각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철학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려는 문제가 애초에 성립이 안 된다는 견해도 있다. 철학사는 신앙에서 시작했으며, 종교학은 철학적 방법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철학을 분리한다는 것은 "철학은 종교적이지 않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는 말인데, 막상 유교의 경전들을 보면 종교적 성향을 근대서양사상처럼 거부하려고 애쓰지 않고 있으며,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와 근대사상이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고 보아서, 유교를 종교로 판단할 수도 있다. 더구나 불교를 통해 신비철학을 흠뻑 받아들여 본래의 유교에서 일신한 것이 성리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유학을 종교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무시할 수 없는 사항들이 다시 제기된다. 서양 근대 사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 종교였고 이에 대한 거부반응이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려는 시도들이었을 텐데, 이렇게 보면, 유학도 불교에 대한 일련의 거부 반응이 있었다. 조선 유학을 노정한 자인 정도전의 불씨잡변과 같은 책을 비롯하여, 조선조 내내 이루어진 숭유억불 정책도 어찌보면, 종교적 성향과 거리를 두려는 유학의 거부반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리학이 불교를 흡수하여 이루어진 전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흐름의 핵심에 있었던 성리학자들도 불교에 대해서는 내내 적극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피타고리안 종단, 오르페우스 밀교단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여 그를 종교인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유학, 특히 성리학에 대해서도 핵심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동국통감을 비롯해 삼국사기는 유학자의 시각에서 쓰여진 역사서다. 정작 삼국사기에선 "또한 당나라 군사의 신령한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성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는데, 당나라 군사가 신령한 힘인지도 의문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되면 철학이 아니라 종교에 가깝게 된다. 견훤의 평에서는 "천도(天道)는 되돌려주기를 좋아합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철학적인지 종교적인지는 논란적이다.[95] 신령한 힘을 빌었다는 말도 이후 동국통감에서는 당나라의 위엄을 빌렸다는 말로 바꾸게 된다. 저 천도의 이야기는 노자의 이야기에서도 나오는데 그래서 유학자들이 틈만나면 저런 소리를 할 때마다 "도교에서 할 법한 소리를 왜 하냐"라고 했고 이것이 곧 이기이원론이라는 당쟁으로 번지게 된다. 몰라서 그렇지 김부식도 본시 고승들과 꽤 가깝게 지내고 불교와 관련된 시도 적었다. 그리고 조선왕조 유학자들 중에서도 유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도교를 은근히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도교의 경우도 도가와 도교 분리론을 주장하는 쪽은 교종이나 초기불교 쪽이고 반면 도가와 도교의 일체론을 주장하는 것은 도교를 좋아하거나 불교의 선종을 좋아하는 쪽이다. 이는 고구려가 본시 불교를 받아들일 때 도교를 받아들이고 불교를 핍박했을 때 영향이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정통 유교의 경우는 도가와 도교 분리론을 택한다.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경우는 유교에 대해서 종교인지 철학인지에 완전히 확답을 못 내리고 있지만 종교보단 철학으로 본다. 사후세계에 대해서 뚜렷한 답을 내리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하다. 대체적으로 철학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인본주의를 종교로 보지 않는 성향이 크다. 반면에 종교로 보는 쪽도 있는데, 유교 역시 하늘론에 근거하기 때문에 종교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전반적으론 인본주의에 근거했다는 점과 공자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종교로 보지 않는다.

불교의 경우도 유교를 철학으로 대체적으로 규정하나 불교 역시 완전히 확답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다. 이유는 유학자들이 불교와 가깝게 지낸 적이 생각보다 오래되었고, 유불선의 일치를 근거로 확답을 내리기 미묘하다. 대체로 불교의 경우도 팔정도육바라밀이 유학의 삼강오륜 등과 비슷한 게 많기 때문이다.

철학의 반종교적인 특성을 강조해온 것의 역사도 복잡미묘하다. 이것은 근대철학의 탄생의 주문이다. 중세의 신학의 하위처럼 취급되던 철학이, 근대에 와서야 전세를 역전시켜서, 철학의 하위로 신학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것은 종교적 인간관과는 다른 실존적 인간관을 묘사하려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학자들의 분투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근대 철학자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학문을 비롯하여, 철학으로서 연구하는 어떤 분야를 종교와는 다른 것으로 내세우려는 성향이 생긴 것이다.

명칭에 대한 이러한 문제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단어를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른 말도 있고, 같은 현상을 나타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어가 달라져서 뉘앙스가 달라지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분류할 때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분류하고자 할 때는 그 사람의 강조점이 드러난다. 유학이냐 유교냐, 철학이냐 종교냐 문제는 고찰자가 유학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지를 알 수 있는 주요한 지표다.

유발 하라리는 종교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누었다. 신이나 인물을 숭배하는 종교, 또는 우주의 법칙을 숭배하는 종교가 있는데, 구미~중동의 종교(그리스-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아브라함 계통 종교)들은 신이나 인물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했고, 동아시아에서는 우주의 법칙을 숭배하는 종교(불교, 도교, 유교)가 성행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는 유교 역시 천명, 과 같은 법칙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종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다.

유교는 다른 종교들에 비하면 훨씬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띈다. 유교적인 구습을 떠올리며 무슨 소리냐 할 수 있는데, 유교에서는 괴력난신과 내세 등의 개념을 가정하지 않는다. 그 영향인지 유교 문화가 자리잡았던 동아시아 지역은 다른 지역들에 비하면 극단적인 종교적 색채는 자리잡지 못하고 전세계에서 가장 세속적인 권역에 속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당장 오랜시간 유교 사상에 지배적인 영향을 받았던 한국은 무종교 비율이 웬만하게 세속화된 서양 국가들보다도 훨씬 높다.[96]

9.1. 천명(天命)

천(天)은 사람 위에 있는 공간을 기호화한 것으로, 처음에는 순수하게 천공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는데, 주나라가 패권을 장악할 때부터 하늘처럼 인간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힘의 기호로서 부각된 말이다. 초기에는 뚜렷한 인격신 개념은 없었고, 또한 주나라의 지역신은 아니다. 그러다가 천이라는 표현은 상나라에 와서 상제(上帝)와 거의 겹쳐지는데, 갑골문에서 보이는 종교성은 춘추전국시대가 되면 점차 사라진다.[97]

춘추좌씨전 같은 것만 봐도 춘추시대에 중국에서 종교색이 약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나라가 잘 될 때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라가 망해가면 신의 말에 귀를 이울인다"는 표현까지 나온다. 공자가 등장할 때 쯤에는 천명을 인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세계관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시대에도 여전히 종교적 색채는 함께 보인다.

천명(天命)론은 천이 인간에게 물리적인 힘을 넘어 또 다른 힘을 가할 수 있는 주체임을 분명히 한 게 아니다. 천은 주체가 없다. 맹자도 천은 백성들의 귀로 듣고 백성들의 입으로 말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민심이 천이라는 뜻이다.

맹자는 천명을 혁명과 결부시켜서 이전까지 위정자의 덕만이 천명과 결부되던 것을 사상적으로 전환시켜 '민심'과 '천심'이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일반민(民)과 신적인 힘(天)은 '민심 = 천심'이라는 소통로를 통해 연결되는 것이고, 이 시점에서 천은 일종의 '세계 원리'로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천의 종교성은 상당히 사라졌고, 실제로 맹자의 사상도 현실성이 매우 강하다.

천이라는 말 자체가 고대의 신성 개념부터 후대의 천지자연적 개념까지 모두 축적된 표현이다. 공자나 맹자나 천을 신처럼 묘사하는 말을 한다. '민심이 천심이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왕조가 교체되어야 한다'라는 것은 요즘 철학용어로 말하자면 당위에 해당되는 것이다. 사실 맹자의 성선론이라는 것도 본성을 논했다기보다는 당위를 논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맹자의 주장을 '맹자가 제시한 신적 권위를 따르는 종교'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이 선하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칸트는 빼도박도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유교는 은나라의 종교를 완전히 타파하겠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유교경전을 봐도 항상 하은주 3대를 함께 말한다. 따라서 유교가 종교성을 띠고 있었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사후세계나 하느님이 결정한 운명이라든가 우주를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 같은 현상에 대비되는 본체적 개념은 없다. 물론 종교가 꼭 본체적 개념을 포함해야 되는 건 아니다.

유교의 천은 인격적인 절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서구 근대철학의 자연법, 자연권에 가까운 개념이다.

불교가톨릭개신교의 예정론과 싸잡아 묶어[98] 천명론을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와 비슷하게 보기에 종교행위로 본다. 불교는 수행과 선행을 중시해 진인사대천명을 민다.

9.2. 제사(祭祀)

제사에서 다뤄지는 혼백은 본래 한 단어가 아니다. 유교를 창시한 공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괴력난신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강조했으나, 유교와 별개로 도교를 비롯한 애니미즘적인 동아시아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대충 구미~중동식으로 말하자면 기의 영혼적 부분을 혼(魂)이라 하고, 육체적 부분을 백(魄)이라고 한다. 혼과 백은 각각 천(하늘)과 지(땅)에서 온 것이고,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각각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 후대 유교(혹은 성리학)은 다분히 초기 유교와 불교, 그리고 애니미즘을 일정량 섞어 결합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천과 지는 그냥 공기와 흙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동아시아인들이 생각하는 천지라는 유기체의 두 측면을 가리키는 특수한 표현이다. 대충 세상도 천과 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만물도 모두 천과 지를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혼과 백은 '초자연적 신'이 아니다. 동아시아인에게는 신적 힘이나 영혼도 만물과 마찬가지로 기(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의 모든 현상은 기의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나 산천이나 죽은 자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초자연적 신을 숭배하는 모습과 외관상 똑같아 보이지만, 그 내부의 근거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기가 애니미즘 같은 순수 그 자체의 자연력은 아니고, 특히 한국에서는 풍수지리까지 끼얹으면서 다분히 기복신앙적인 면과 조상 숭배의 형태를 띄게 되었지만 말이다[99].

물론 혼과 백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현실의 인간 사회에 힘을 못 미친다는 소리는 아니다. 세계적으로 봐도 초자연적 신보다는 자연신이 많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본다면 혼과 백은 자연현상과 달리 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사라는 것이 실체도 확인되지 않는 것을 섬기는 종교적 모습으로 보이기 충분하다. 사실 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한데, 반드시 인격신만을 신으로 여기지 않는 종교도 드물지 않으며, 불교도 기복적 성격으로 변질되었을 뿐 본래 신을 숭배하는 종교는 결코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17세기부터 청나라의 제사를 바라본 타자인 가톨릭 교회 내에서까지 논란이 되었다. 이는 예수회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가 아시아 선교 전략의 차이로 정면충돌하는 전례논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18세기 교황청이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손을 들어주어 중국식 조상 제사를 금지하자 이 영향이 조선의 천주교 박해로까지 이어지는 나비효과를 낳았다. 현재에도 유가 밖에 있는 타자가 보기에는 충분히 논란거리로 삼을 대상이 된다. 이것이 단순한 '조상을 공경하는 사회적 관습'인지 '종교적 행사'인지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평가가 다를 수 있으며, 사실 둘 다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사실 조선 이후 제사법은 주자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신분에 따른 차등을 강조했던 주자는 3품 이상이 되는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고조까지의 조상을 기릴 자격이 있다고 보았으며, 그 아래 사람들은 부모의 제사만을 치르도록 가르쳤다. 즉 주자에게 조부 윗대의 조상들은 그렇게 예를 차릴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애초에 몇 세대나 차이나는 윗세대에게 효성을 느낄 여지 자체가 적기도 하거니와 일반인들이 감당하기에 그 부담 또한 막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와전된 조선에서는 벼슬이 없는 사람까지도 '효'를 4대 이전의 알지도 못하는 조상에게까지 소급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어쩌면 주자 본인은 정말 공경하는 마음도 없이 맹목적으로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행위가 자칫 허례허식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9.3. 인문화의 역사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라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인격신, 영원불멸한 사후세계를 가리키는 것인데, 물론 이는 종교를 정의하는데 있어 하나의 단선적인 기준일 뿐이고 실제 종교라는 것이 갖는 스펙트럼은 생각 이상으로 넓다. 긴말할 것 없이 사이언톨로지 같은 것도 종교 취급되는 현실을 상기해보자. 어쨌든 중기 이후의 유교는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천(天)이나 혼 따위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언급하는 편인데 이는 유교의 제사 예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지 죽은 자에 대한 예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천주교의 관점에서 제사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논어의 신종추원(愼終追遠)이라는 표현에서도 이미 언급되는 말이다. 죽은 자의 영혼에게 기(氣)를 북돋아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원래 유교의 제사는 4대만 하게 되어있다. 즉 4대가 지나면 혼이 흩어져 없어진다는 것이라 그럴 이유도 없다. 조선말기에 천주교가 전파됐을 때 유학자들이 천주교를 반대한 대표적 이유 중 하나가 불교처럼 천당과 지옥(괴력난신)을 말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일정량 길흉에 관계된다는 신앙적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자기 조상을 잘 모시냐 안 모시냐의 문제였다. 제사를 제대로 안 지낸다는 건 부모님을 내팽겨치는 불효막심한 놈이 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유교는 길흉화복을 비는 종교와는 비교적 거리가 있다. 그보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불효자로 낙인 찍는 사회적 규약을 지탱하던 이론이었고, 이러한 면에서 윤리 수칙을 강제하는 종교적 측면이 있었다.

논어에 역(易)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물론 기본적으로는 점술(占術)을 의미하지만, 사실 오늘날 주역을 살펴봐도 알 수 있지만, 주역의 핵심은 점술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易)에 대한 논리다. 역이라는 문헌 자체가 점술로 출발해서 철학적 내용이 점점 증보된 책이다. 하지만 역(易)의 경우도 본질은 은나라 이전의 점복(占卜)에 두고 있으며, 이후 시대에서도 진지하게 믿는 건 아니었지만 역경의 사용 목적 중 하나가 점복술인 것은 분명하다.

조선에서 성리학이 불교를 배척했던 것은 불교가 나중에 전파된 그리스도교처럼 외래 종교였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100] 즉 성리학은 외래 종교를 타파하고 중국 고유의 종교를 되살리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성리학 이후에도 양명학이 등장했기 때문에 성리학이 곧 유교라고 할 수는 없다.

10. 경전

유교 십삼경
삼경 삼례 삼전 기타
시경서경역경주례의례예기춘추좌씨전춘추곡량전춘추공양전논어맹자이아효경



사서삼경
사서 삼경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상서 주역


원래 진나라 때까지 유교의 경전이라고 하면 육경이였다. 그러나 분서갱유진한교체기를 겪으면서 악경이 실전되어 복구되지 못하게 되었고 한무제 때 오경박사가 설치되어 관학화가 이루어졌다. 후한대에 논어와 효경이 중요시여겨지면서 오경에 더해 칠경이라고 불렀다. 당나라에 이르러서 시,서,역의 삼경, 의례, 주례, 예기의 삼례, 춘추삼전의 9경체계가 이루어졌고 당문종에 의해 논어, 효경, 이아가 더해져 12경이 되었다. 남송 때 맹자가 중요시되면서 경으로 높임을 받았고 13경이 완성되었다. 또한 송나라의 유학자들은 예기의 대학편과 중용편을 중시하였고 논어, 맹자에 독립된 경전으로써 대학과 중용을 포함해 사서라고 불렀다. 주자(주희)는 대학편과 중용편에 장구라는 주석을 달고 논어, 맹자에 집주라는 주석을 달아 사서장구집주를 편찬하였다. 사서에 삼경을 더한 것이 사서삼경이고 오경을 더한 것이 사서오경이다. 명나라 면력제 때 십삼경주소가 정식 간행되었고 청나라 때의 완원에 의해 십삼경주소가 다시 편찬되면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 시(詩) - 시경이라고도 한다. 황하유역에 유행한 노래들의 가사를 모은 것.
  • 서(書) - 상서, 서경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문서를 모은 것.
  • 역(易) - 주역, 역경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세상의 변화의 이치를 논하고 있다.
  • 춘추좌씨전 - 역사서 춘추에 좌구명이 전을 더한 것.
  • 춘추공양전 - 춘추에 공양자가 전을 더한 것.
  • 춘추곡량전 - 춘추에 곡량숙이 전을 더한 것.
  • 예기 - 예에 대한 논문집. 여기에 사서에 속하는 대학과 중용이 들어있다.
  • 의례 - 국가의 각종 의례규범을 제시한 책.
  • 주례 - 주나라의 명의를 빌려 이상적 국가체제에 대하여 논한 책.
  • 논어 -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어록. 사서 중 하나.
  • 맹자 - 맹자의 논변을 기록한 책. 송나라 때 재발굴. 사서 중 하나.
  • 이아 - 일종의 경전 어휘사전.
  • 효경 - 효에 대해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것.

10.1. 한국

11. 교육

한국에서 배울 수 있는 곳은 많다. 전국의 향교, 서원에서 배울 수 있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동네 일부 어르신들도 대학, 논어 등의 경전을 읽고 서로 학습하는 스터디(?)가 있다. 하지만 과거와 같이 체계화된 학습이라기 보다는 사설 교습의 형태이고, 향교에서의 교육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다.

성균관대학교에는 유학대학이 설치되어있어 학부과정부터 학습이 가능하다.[101] 휴학생을 제외한 총 학부생 수가 200명이 채 되지 않아 경영학과 한 학년 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규모 단일학과 단과대이다. 과거 조선을 지배하던 사상인 것 치고는 현재의 모습이 초라하다. 전공명도 '유학과', '유교과'가 아니다. 유학동양학과[102]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어 있는데, 학과명으로 볼 때에는 '유교'만 배운다기 보다는 동아시아의 역사, 철학, 정치, 미학, 문화, 사회 등을 배우는 사실상 '지역학'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103] 물론 대학&중용[104], 맹자, 논어와 같이 패기있어 보이는 과목도 있지만 중요성과 인기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105][106] 또한 유학동양학과에 입학하면 '양현재'에 들어갈 수 있는데, 사서와 중국어 과목을 각각 최소 하나씩 들어야 하며 이를 이수할 경우 학점에 따라 전액 또는 반액 장학금이 지급된다.[107] 또한 임간수업[108], 분향례, 해외연수, 사서대회 등에도 참여할 수 있다.

한자 자격증이 있으면 눈감고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는 그런 별도 전형은 없다. 과거에 한자 자격증, 한국사 자격증 또는 몇몇 내신 성적[109] 평균 2등급 이상일 경우 지원할 수 있는 별도의 수시 전형이 있었지만, 2011년도 입시를 마지막으로 학생부전형에 통합되어 사라졌다.[110] 독립 전형이 존속하던 당시에도 지원자격은 정통성을 위해 내거는 것이고, 사실은 내신으로 선발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다. 예를 들면 국사 전학년 평균이 2등급이면 지원할 수 있었는데,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전국에 차고 넘친다. 게다가 당시에는 수시 전형을 100개를 지원하던 1000개를 지원하던 제약이 없었다. 이렇다보니 적성을 살린 인재 선발이라는 명제는 허울에 지나지 않고, 실체는 내신 자르기라는 것. 이후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한자 자격증,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 이상의 제한을 두기도 하였으나,[111]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의 난이도를 고려해볼 때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지금은 학생부전형에 통합되어 사라진 지 오래인 수시 전형이다. 물론 현재에도 별도의 전형이 아닐 뿐 수시 전형 중 과별 전공예약생을 뽑는, 통합된 학생부 전형을 통해서 입학할 수 있다. 정시로 입학할경우, '인문과학계열'로 입학한 다음에 2학년 진입할 때 유학동양학과로 전공 진입을 하면 된다.[112]

점차 축소되는 한국의 인문학 현실 속에서 그나마 대학교에서 밀어주는 몇 안 되는 학과이다. 유학동양학과는 조선왕조의 성균관부터 이어지는 성균관대의 역사와 정통성을 보증하는 학과이기 때문이다. 또한 교육부 등 국가에서 진행하는 인문과학 관련 프로젝트에서도 자주 참여를 하고있고, 그외에도 대기업 임원이나 국회의원, 군 장성 등이 유학대학원에 많이 있어서 어중간한 최고경영자과정보다 들어오는 돈이 많은 것 같다.

이렇다보니, 대학에서 '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계열'에 입학을 하거나, 유학동양학부에 편입을 하거나,[113] 그마저도 안 되면 성균관대학교에 일단 입학을 해서 복수 전공을 택해야 한다. 사실상 개방되어있는복수 전공을 제외하면 둘 다 쉽지만은 않은 방법.인문과학계열 입학만 성공하면 전공진입은 간단한 건 함정 따라서 대학에서 유학을 배우고 싶다면 대학원 진학을 하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인 방법이다.[114]

유교를 체험해보고픈 어린이들을 위해 테마파크 형태로 만든 유교랜드가 있다.[115]

12. 비판과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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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변질된 유교적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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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다른 종교, 사상과의 관계

흔히 사람들에게 유교는 포용적이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유교 문화권에서도 타 종교에 대한 탄압은 상당히 잦았다.

조선왕조 때부터 불교를 억제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때문에 불교계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애초에 조선시대에는 사상적으로 근친관계인 양명학을 비롯해 그 어떤 학문/사상/종교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른 사상은 싹이 틀 때부터 철저하게 짓밟은 반면 이미 성리학보다 앞서 존재했기에 일정 세력이 갖춰져 있던 불교는 확실히 척결하지 못했다. 조선의 유교계에서는 이미 망해버린 옛 고려의 흔적을 지우고 유림에 대한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이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고려왕조 때까지만 해도 국교에 준하는 위치를 가지던[116] 불교를 자신들의 유교로 바꾸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지위강화의 목적만 있던 것이 아니라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을 유교를 통해 통제하려는 목적과 불교계가 가지고 있던 막대한 재산을 국고로 흡수하기 위한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높은 신분과 지위를 받았던 승려들도 아예 신분제도상에서 천민으로 격하편입시킴에 따라 조선왕조 때는 승려들도 천민 신분이기 때문에 일반 천민들과 함께 막노동에 동원되거나 투입되기도 하였다.[117]. 유생들이 심심하면 절에 찾아가 승려들을 폭행하거나 살해했고, 이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도교도가 사상에 대한 탄압도 상당했다. 애초에 공자가 살아있던 시절부터 유교를 가장 앞장서서 비판해왔던게 도가 지식인들이었으니, 유학자들 입장에서 도가 사상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조선의 경우 도가 관련 서적을 읽는 것 까지는 허용했으나, 도가에 관해 연구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했다. 실제로 조선시대 문신 박세당도덕경에 관한 주석서를 썼다는 이유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김용옥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왕조가 무너진 지 한참이 지난 1970~80년대의 한국에도 도덕경을 금서 취급하는 분위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동아시아철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7-80년대 이전부터 이미 도덕경과 도가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다는 걸 생각해보면 설득력은 그다지 높진 않다.

근대 때부터 전래되어 온 가톨릭 등 그리스도교 종파들과도 갈등 관계. 특히 서양에서 건너온 이교(異敎)라고 규정하여 '서학(西學)'으로 불렸던 시절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박해와 병인양요신미양요까지 발발하면서 조선 유림계의 반양(反洋)과 반(反) 천주교 성향이 더욱 짙어지기도 하였다. 사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었다. 일단 부인부터가 천주교 신자였으니까. 대체로 유교를 믿다가 천주교를 믿은 사람 중에선 정약용도 있다.[118] 하지만 어른의 사정과 유림들의 거센 반발 앞에 흥선대원군도 머리를 숙였고, 그렇게 해서 병인박해 등이 일어나 많은 외국인 성직자들과 국내의 가톨릭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반대로 개신교는 상대적으로 덜 비판을 가하는데, 앞전에 천주교가 "조상에게 바치는 유교의 제사는 우상숭배적 미신"이란 교황청의 신앙선언을 ~빠꾸없이~ 밀어붙이며 유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줄줄이 순교한 덕택에 결국 개신교는 포교를 위해 유교의 문화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천주교와는 종교 개혁 문제로 앙숙이기도 한 만큼 천주교를 경계하기도 할 요량으로 천주교와 달리 조선 말엽에 중립을 지켰다. 그로 인해서 개신교는 유교의 문화를 상당부분 많이 수용을 했고, 실제로 유교를 따르다가 개신교로 전환한 사람들을 보게되면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있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흔히 우리나라 3대 종교인 불교, 천주교, 개신교 중에 유교 문화가 가장 깊게 뿌리잡은 곳은 개신교고 그 다음이 불교다. 유교 문화의 흡수는 주로 개신교, 불교가 흡수했고,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의 경우도 정약용 등 기존 유학자의 영향으로 유교 사상과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가톨릭 교회는 근본적으로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여 전세계에서 사도전승을 보존하고 교리의 통일성을 지니는 만큼, 한국 개신교불교에 비하면 서로간의 교집합을 찾는 연구 수준에 그치는 정도였다. 가톨릭과 개신교도 인본주의나 사후세계에 대한 관점을 제외하면 (특히나, 윤리적 강령에 대한 부분에선) 유교와 유사점을 찾기 어렵지 않고, 불교의 경우도 위진남북조 시절 유불일치가 이미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윤회론을 제외하곤 비슷한 구석이 꽤 있다.

15. 유명한 유학자

15.1. 중국

15.2. 한국

15.2.1. 신라

15.2.2. 고려

15.2.3. 조선

15.2.4. 대한민국

15.3. 일본

  • 후지와라 세이카
  • 하야시 라잔
  • 마츠나가 세키고
  • 호리 교안
  • 이토 진사이 - 주자학을 비판하고 고학古學을 일으켰다. 즉 주희를 극복하고 공맹의 원시유가로 돌아가자는 주의. 주자학을 극복하는 그의 대표적인 이론이 사단맹아설이다. 주자는, 맹자가 말한 사람의 사단(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은 우리 본성에 내재한 일종의 '이데아'로서의 완전한 사덕(인, 의, 예, 지)의 부분적 발현이라고 본 반면, 진사이는, 우리 본성에는 애초에 그런 완전한 사덕이 내재하지 않으며, 다만 사단이 사덕으로의 '가능태'로서 갖추어져 있다고(즉 사단을 노력해 키워나가 적정 수준의 결실이 되면 그것이 사덕이다.) 보았다. 이런 견해는 나중에 정약용이 오규 소라이의 견해와 함께 논어고금주에서 언급하며 비판적으로 논하기도 하였다.
  • 이토 도가이 - 진사이의 장남. <<고금학변>>이라는 책을 써서 학문의 변천사를 정리했다.
  • 호리 게이잔
  • 우에다 아키나리
  • 기노시타 준안
  • 아라이 하쿠세키
  • 미나미무라 바이켄
  • 야마자키 안사이
  • 노나카 켄잔
  • 나카에 토주 - 위의 인물들과 달리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유학자다.
  • 구마자와 반잔
  • 야마가 소코
  • 오규 소라이 - 진사이보다 한술 더 떠서 주희도 비판, 진사이도 비판, 맹자, 순자까지도 싸그리 비판하고 심지어 공자도 슬쩍 건드리더니, 사서보다는 육경(시, 서, 예, 악, 역, 춘추)이야말로 유학의 근본 축이라 여기기에 이른다. 즉 사서에서 설파되는 내용조차도 결국은 공맹 등이 처한 당대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개별적인 임기응변식의 대응 사례집일 뿐이니(예컨대, 소라이는, 맹자가 성선설을 설파한 것은 남들이 성악설을 들고 나와서 설치기 시작하니 그것에 대항하기 위해서 꺼내든 하나의 임기응변일 뿐이고 반드시 진리는 아니라는 둥 주장했다. 참고로 소라이는 맹자의 이런 식의 대응이 오히려 부분적으로 공자를 왜곡하는 데에 일조했다고 본다. 후대에 맹자한테 악플을 달면서 싸운 순자한테도 대충 비슷한 평을 내린다.), 그것들은 곧 일개 참고서이고, 공자도 배운 시 서 예 악 역, 공자가 엄정한 춘추필법으로 쓴 춘추야말로 보다 엄밀한 보편 규준이라 여긴 것이다. 소라이는 이로써 공자를 넘어 그 위의 선왕(성왕)들을 축으로 삼은 것이다.
  • 다자이 슌다이 - 소라이의 제자이다.

15.4. 류큐

  • 테이 쥰소쿠

15.5. 베트남

  • 쭈반안(朱文安)
  • 막딘찌(莫挺之) - 베트남 최초로 베트남과 중국 양국의 과거에 동시에 합격했다. 덕분에 원나라에서 양국장원(兩國壯元)으로 불렸고 고려 사신들과 친분이 있었기에 고려를 방문하기도 했다.
  • 응우옌짜이(阮廌) - 유학자인 동시에 중국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결국 명나라를 몰아내고 후 레 왕조(1428년 - 1788년)를 만든 개국공신이 되었다. 난후도곤산감작이라는 한시로 유명하다.

16. 시설, 의식

17. 관련 개념

18. 관련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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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관련 기관

2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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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종교인평화회의
*군종장교가 존재하는 종단



[1] 공자(Confucius)의 사상이라는 의미이다. 철학으로서의 유교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한다[2] 儒(rú)+ism의 합성어로, 공자와 분리된, 중립적인 의미로 주로 종교로서의 유교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3] 절대적인 인격신의 존재가 확고했던 구미~중동과 달리 절대적인 인격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은 동아시아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한 논의가 딱히 필요치 않았다. 제사나 하늘, 혼백과 같은 종교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제사는 본래 효와 공경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하늘이니 혼백이니 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존재라기보단 물리법칙과 같은 이치에 가까웠다. 애초에 그 근원인 유가는 귀신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고 인품론을 보다 중시하였다. 따라서 유교 역시 기본적으로는 신에 대한 논의를 아예 다루지 않은 비신론이다. 현대에는 유교가 구미~중동의 다른 종교들과 접촉하면서, 주로 아래의 두 가지 견해를 내비추거나, 그런 것으로 해석되었다.[4] 정확히는 무의미하다고 보았다.[5] 절대적인 신적 존재와 사후세계, 신비주의를 강력하게 부정하고 신앙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적 성격이 있다.[6] 유교의 핵심 경제정책인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개념을 가진 것은 농가를 흡수했기 때문이다.[7] 훗날 유학자들이 받아들인 풍수지리설은 도가도교에서 넘어온 개념이다.[8] 동아시아 역사에서 나라의 흥망성쇠를 설명할 때, 나라가 오행 중 하나의 성질을 띄고 있어서 그 기운이 쇠하였다라고 하는 사상의 근원이 음양가에서 넘어왔다.[9] 성리학이 비타협적이고 이기적인 학문이 된 원인 중 하나로 도교적 가치관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이라는 설이 있다.[10] 참고로 제사는 절대로 유교적 가치가 아니다. 유교가 생기기 전부터 동아시아권에서는 제사를 지내왔다. 적어도 한민족에서는 원삼국시대 이전부터 제사를 지내온 것으로 추정된다.[11] 군주에게 도덕적인 통치를 요구하는 왕도정치라는 개념과 신분에 걸맞은 책임을 요구하는 유교의 핵심이론인 정명론이 그 근거다.[12]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스승은 스승답게 제자는 제자답게가 정명론의 내용이다. 즉 자신의 신분과 위치에 걸맞게 행동하란 의미이며 이것은 지배층에게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이론이다.[13] 왕이 왕답게 통치하지 않으면 왕이 아니니, 신하와 백성들은 왕답게 행동하지 않는 가왕을 폐위하고 정당한 새 왕을 추대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14] 역성혁명론은 정명론을 견재하기 위한 이론으로 성찰적인 성격을 가치고 있다. 안타깝게도 역성혁명론은 훈고학이 보편화 될 때부터 퇴색되었고 훗날 성리학이 보편화되었을 때는 이미 사실상 죽은 이론이 되었다.[15] '군자' 역시 인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휴머니즘의 색채가 별로 없던 용어였다. 시(詩) 등에서 쓰인 군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에 가까웠는데, 공자는 '멋진 남자', '지배 계급', '어엿한 사회인' 됨의 필수조건이 바로 '인문 정신'과 '도덕성'을 갖춤, 즉 '인'함이라고 보았다. 공자가 이 같은 인 사상을 가진 채로 '군자'라는 용어를 쓰고, 공자가 유명해지며, 공자의 말이 확산되고, 공자의 말에 배어 있는 그의 사상이 알게 모르게 전파되면서, 공자의 '군자'가 종래의 '군자'를 압도함으로써 오늘날의 군자는 '도덕적 지성인'의 의미가 강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의 현상이 맹자의 '대장부(大丈夫)'에서도 보이는데, 다만 백가쟁명(百家爭明) 시대의 맹자의 말의 파급력, 장악력은 공자보다 덜했으며, 그 자신부터가 자신의 대장부보다는 공자의 군자를 쓰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맹자의 대장부는 종래의 대장부를 압도하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16] 유가는 춘추전국시대 당시의 원시 유교에서부터 묵가, 도가, 법가, 종횡가, 농가, 음양가, 명가 등 수많은 타 학파와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며(물론 꽤나 비우호적인 교류였지만) '생존'했다. 당연히 타 학파의 사상에서 온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그것을 자기 학파의 논리로 내재화해 오면서 명맥을 유지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맹자는 공자의 최고 가치 '인(仁)'에 대항하기 위하여 묵자가 내세운 최고 가치 '의(義)'를 오히려 공자식으로 강조해 '인의(仁義)'의 병칭어(竝稱語)를 유가적 개념어로 보편화시켰고, 순자는 이에 더해 도가적 수양론(修養論)과 법가적 정체론(政體論), 명가적 명실론(名實論)을 비판적 수용하고 그것을 유가적 예치주의로 귀결시켰다. 중세 유교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 주자학, 정주학(程朱學), 양명학도 그 당시의 경쟁 사상계(思想界)인 도교, 불교의 논리를 내재화하여 성립한 것이었다. 산 속에 박혀서 자기네들끼리 1대 2대 3대 하면서, 순수하게 후계자 머리에서 불현듯 새롭게 튀어나온 사상만 새로 추가되면서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다. 또한 이는 공자 사상이 역시 주축이 되되, 공자 이외의 옛 성현의 사상도 유가 사상이 적극적으로 수용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요(堯), 순(舜), 우(禹), 탕(湯), 이윤(伊尹),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태공망(太公望), 백이(伯夷) 등은 물론이요, 관중(管仲), 자산(子産), 유하혜(柳下惠), 안영(晏嬰), 섭공자고(葉公子高) 등도(물론 후자의 양반들은 공자보다 격이 떨어진다 여겨졌고, (비판할 땐 또 제대로 비판하긴 했지만) 후대 유가 사상가들이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가란 공자만 일종의 유일신마냥 받드는 종교가 아니었다. 맹자만 해도, 평소에 관중에 대해 심심하면 비판하더니, '하늘이 큰 일을 맡긴 사람'의 예를 꼽을 때 관중을 거론하고, 안영도 관중과 세트로 한 번 비판해놓고 제선왕을 계도할 때는 안영의 말을 인용하는 등 닫히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유하혜도 '조신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지만, '유하혜는 성인 가운데 온화한 사람이었다.' 하며 이윤, 백이와 같은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또 백이도 '결벽 떠는 게 심했다'며 비판해놓고서, '백이는 성인 가운데 청렴한 사람이었다.'면서 칭찬도 했다.[17] 은나라는 점복, 식인, 순장, 인신공양 등 이른바 '괴력난신'이 보편적인 문화였는데 이를 교화한 것이 주공 단을 필두로 한 주나라였으므로 하극상이 난무하였고 이로 인해 사회 질서가 엉망진창이었던 춘추 전국시대를 정상화할 모델로 주공 단의 주나라를 모델로 삼았던 것.[18] 솔직히 역사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도 유학자들보다 귀족들이 능력은 더 있었다.[19] 중국의 유학자들은 귀족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많고 귀족주의 국가들과 다른 주장들이 많았다. 중국 역시 그 영향인지 유목민 귀족들이나 그 영향으로 탄생한 귀족이 아닌 순수 한족 귀족 계층은 금방 사라지고 관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나라 역시 유교가 대세가 되자 형식적으로는 귀족이 사라졌다. 조선에서 양반은 법적인 계급이 아니라 주로 과거 귀족이었던 사람들이 스스로 차별화한 것이다.[20] 이렇게 생겨난 유가는 전국시대 말기에 정치 경영 이념으로 법가에 밀리게 되었으나, 법가를 택해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2대만에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반면교사가 되어 이후에는 유교와 법가가 뒤섞이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최초의 장기 통일왕조인 한나라의 국정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다른 그 어떤 동아시아 사상보다 굳건히 중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유교가 일시적으로 쇠락해 불교도교에게 자리를 많이 내주었고, 당나라 때까지도 사회의 중심적 지위는 불교와 도교에 비해 미약한 편이었으나, 이들 종교들도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유교적 통치질서를 뒤바꿔놓지는 못했다. 중국에서 귀족 시대의 유교는 귀족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으나 귀족들이 전멸하면서 민중적 유교로 변하게 된다.[119] 이후 당나라 후기부터 송나라 때까지 유교와 불교적 신비주의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성리학이라는 유교의 재해석이 일어나 나중에 명나라, 청나라, 조선 등에서 과거시험의 과목이 됨으로써 국가 이념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물론 중국에서는 계속 성리학만 고집하진 않고 시대에 따라 양명학, 고증학 등이 대두되었으나, 과거시험 과목은 변함없이 성리학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본베트남에도 유입되어 주요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흐름을 통틀어 현대에는 '신유학'으로 부르기도 한다.[21] 물론 이쪽은 도가와의 관계 문제도 있긴 하지만.[22] 공자 스스로는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고 여러 별들이 이를 받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爲政以德、譬如北辰居其所而衆星共之). 즉 왕은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하고, 제후들은 이를 잘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다.[23] 정명론을 서양이나 이슬람의 운명론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동아시아에는 서구에서 말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운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24] 이와 관련된 말이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이다.[25] 비유긴 하지만 실제로 공자는 제자인 증자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을 때 그냥 가만히 두들겨 맞는걸 비판하기도 했다.[26] 애초에 천도라는 개념 자체가 제자백가가 형성되기 이전인 주나라 시대부터 전해져온 개념이다. 주나라의 신은 천(天)이었고, 이 천이 주는 운명이자 사명을 천명(天命), 그리고 이를 실행해 나가는 바람직한 '길'을 천도(天道)라고 한다. 이 개념은 제자백가 거의 모두가 공유했다. 문제는 천이 정해준 바람직한 길이 무엇이냐는 것이고, 법가 수준에 이르면 천의 역할을 거의 부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27] 가끔 이렇게 공자가 유가의 모범을 과거에서 찾았다고 하여 유가의 연원이 과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식의 이해라면 르네상스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당연히 르네상스는 그 시대의 사회상에 맞게 고대의 사상을 취합한 것이므로 이러한 설명은 부당하다. 유가 사상도 과거의 '모범적인' 기틀을 춘추시대 당시의 기준에 맞게 이용한 것이므로 유가 사상이 확립된 것은 춘추시대, 특히 공자에 의해서라고 말하는 것이 맞다.[28] 르네상스는 애초에 특정 시대의 특정 경향을 규정하는 용어이므로, 이로써 예를 들면서 유가의 경우와 동일시하고 유가 사상의 과거 연원성을 부정하려는 것이야말로 부당하다. 그런 식의 이해라면 성리학은 그 시대의 사회상에 맞게 고대의 유가 사상을 취합한 것뿐이므로 유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유가는 어찌됐건 공자가 초지자(初知者), 작자(作者)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고 '창립'한 사상계가 아니고, 공자가 종래의 시, 서, 예의 기록 및 여러 현인들과의 사상 교류에서 착안한 바로써 '확립'된 것이니, 유가의 연원이 공자 이전의 과거에 있다고 말한다 해서 그것이 틀렸다 볼 수는 없다. 또한, 유가의 연원이 과거에 있다고 말한다 해서 그것이 유가를 확립한 이가 공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모순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그런 식의 주장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가가 공자에 의해 확립되었다는 것을 부정한 자는 적어도 유가 내부에서는 아무도 없다. 공자 이후의 유가의 기본 인식이 바로 '유가는 공자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것을 확립한 이가 바로 공자이다.'이며, 이는 맹자가 공자를 평한 말인 ' 공자지위집대성(孔子之謂集大成) : "공자와 같은 경우를 가리켜, '모아서 크게 이루었다.' 한다." '를 통해 잘 드러난다.[29] '공자는 공자교가 아니고 유교이므로 공자 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유가만의 주장에 가깝다. 이슬람교가 '무함마드교'가 아니라고 해서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되었음을 부정할 수 있는가? 공자와 무함마드는 당대에 인간의 이상적인 상이 되는 '유(儒)'와 '이슬람'의 개념을 창조한 것이므로 타자에게서는 무리 없이 유교/이슬람교를 '창시했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30] 이슬람교가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되었음을 부정할 자로는 당장에 세계 인구 20% 이상의 '이슬람교도'들이 있다. '타자'에게는 무리 없이 무함마드가 '창시자'로 보여지겠지만, 그런 '우리가 보기에 무함마드가 창시한 것 같으니 정설로 삼자.' 식의 결론은 다분히 억압적이고 비타협적이지 않은가? '정립자', '확립자'라는 중립적인 표현도 있는데, 굳이 '창시자'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상적 상이 되는 '유(儒: 선비, 유자儒者)'와 '이슬람(신에의 복종)'의 개념을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슬람교의 경우는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아 참된 이슬람의 도를 내려받은 것으로 보므로, 유가의 경우는 공자가 옛 문헌을 연구하고 당대의 유들과 교류하면서 유의 참뜻을 드러낸 것으로 보므로, 그러한 견해는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들 잘 알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창시자'라는 표현이 아주 틀려 먹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사려 있지 못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려와는 별개로, 공자가 '유'를 새로이 정의했으므로 이는 '유'에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한 것이며, 그렇기에 유가의 시발점이며 창시자는 공자이다는 식의 견해에는 또다른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다. 레오 스트라우스가 정치철학을 정의하기 전까지 정치철학자는 없었는가? 플라톤은 정치철학자가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한가? 법가는 어떠한가? 한비자가 자신의 '법' 사상을 제시하기 전에 법가는 없었는가? 법가는 한비자가 창시했는가? 상앙, 신불해, 신도는 법가가 아니고 잡가인가?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공자가 '유'를 정의했다고 해서 그 바로 앞과는 싹둑 단절되고 그 이후만이 '유교'이다 보는 것은 '유교'의 범위를 좀 협소하게 본 것일 수 있다. 백이도 '유'이고 주공도 '유'이고 정자산도 '유'이고 유하혜도 '유'이고 심지어 안영도 '유'일 수 있다. 실제로 <<한서>> <예문지>에서는 안영이 유가로 분류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언행은 후세 유가에게, 공자 만큼은 아니지만 '유'의 모범이 되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유가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사실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으며, 주요한 논쟁거리이다. 물론 앞의 견해처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유가이다.' 자신있게 답하고 그 '여기'를 공자로 지목하는 견해는 오늘날 일반 다수의 견해인 것 같지만, 그것은 '객관'이 아닌 '공동주관'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으며, 타자의 학론을 열린 자세로 경청할 필요가 있다.[31] 물론 노자의 판본 같은 경우에도 곽점묘 죽간본과 마왕퇴묘 백서본의 출토로 후대의 첨가 및 윤색이 뚜렷함이 확인되었으나, 위에서 인용한 노자의 문구는 현재 통용되는 왕필본 - 죽간본 - 백서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문구다.[32] 상당히 아스트랄하다고 현대에 기준으로 그렇겠지만, 근친상간은 별 문제가 없는 거였다. 한민족 역사중에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왕족들도 했었고. 제양공이 당대에도 크게 비판 받은 이유는 자신의 이복 여동생(그것도 노환공과 결혼한)과 근친상간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사촌끼리의 결혼은 역사적으로나 지금이나 어느정도는 퍼져있지만, 삼촌 이내의 근친상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욕을 아주 푸짐하게 먹는 행위이다. 왕족 간의 근친상간이 빈번하게 발생한 중세 유럽도 헤라클리우스처럼 조카와 결혼한 군주는 욕을 엄청 먹었다. 결정적으로 제양공을 비롯한 춘추전국시대의 군주들이 벌인 들은 근친상간 말고도 아주 많다. 괜히 춘추전국시대의 유학자들이 한탄한게 아니다.[33] 사실 공자나 맹자 관련된 책들을 보면, 현대사회에서 절대 이해 못하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개념을 죄다 빼놨다.[34] 본래 天이라는 문자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영락없이 사람 형상이다.[35] 순자보다는 오히려 상앙, 오기 등이 더 법가의 시조에 가깝다.[36] 법가 통치는 철저히 중앙의 일원적 질서(이는 법으로 나타난다)에 의거한 전국의 직할 통치가 이루어져야 실행할 수 있는 체계다. 이를 위해 진시황이 전국에 도로를 깔고 수레의 바퀴 규격까지 하나로 통일했던 것이다. 하지만 광대해진 제국의 영토는 자연히 지방과 중앙의 연결을 약화시키면서 법가의 통치 효율을 떨어뜨렸다.[37] 왜냐하면 한나라를 건국한 공신들 대부분이 한고조 본인을 포함해 개백정이나 도적 출신이어서 예절이라는걸 전혀 모르기 때문에 1년이나 자기가 공을 많이 세웠다며 연회석 상에서 서로 공을 다투거나 몸싸움을 벌이거나 심지어는 술에 취해 망동하며 검을 뽑아들고 기둥을 내려치는 자들도 있었던 판국이라, 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예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한고조도 "한번 해보시오, 대신 짐이 이해할 수 있게 쉽게 만들어야 하오."라고 걱정했었고, 이후 예법이 실행되면서 공신들이 얌전해지자 "아, 이제야 황제가 귀한 줄 알겠다!" 며 좋아했었다고 할 정도였다.)[38] 어디까지나 국가를 경영하는 수단의 일부로서만 중용받았다고 할 수 있다.[39] 역사학계에서는 한이 진의 후계자로써 진의 통치 체계를 계승했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40] 재밌게도 유학자들을 중용했던 한무제야말로 유학적으로 좋은 통치자라고 빈말로도 하기 어려운 인물이고, 오히려 법가에 더 가깝다.[41] 글자체를 기준으로 한대와 진대의 경전을 구분했다.[42] 덕분에 고대에 사용되던 언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 이때부터 원시적인 자전도 나왔다.[43] 진의 과실을 논하는 담론[44] 어쨌거나 이래서 당나라 유학은 별볼일 없다는 식으로 후대 유학자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한국의 성균관의 경우엔 홈페이지에서 '그러나, 당은 육조(六朝)의 천박하고 겉만 화려한 기풍을 이어받아 경서로써 인재를 선발하였지만 사실은 시(詩)와 문(文)으로 등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학자들이 시문에 열중하였으나 유학에는 소홀하여 사상적인 깊이는 볼만한 것이 없었다.'라고 노골적으로 당나라 유학을 비난한다.#[45] 정이의 스승. 주자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46] 태산학파의 시조로 불교와 도교 배척을 주장[47] 理, 본래 불법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이나 많은 중국식 불교 용어가 그러하듯 본래 중국에 존재하는 단어나 개념 등을 차용한 사례이기 때문에 오히려 유교 측에서 역수입이 가능했다.[48] 뒤의 주자는 주희, 즉 흔히 알려져 있는 주자를 가리키고, 앞의 정자는 이정(二程), 즉 주희보다 선대의 성리학자인 정호, 정이 형제를 가리킨다.[49] 흥미롭게도 '과학'이란 말이 일제강점기에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 science의 다른 번역어로 '격물학'이라는 말과 경쟁했다. 승리한 말이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50] 원나라는 신분제를 인종따라, 직업따라 나뉘었는데 남송인이 가장 천대받았으며, 그 중에 성리학자는 완전히 천 취급이었다. 허나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 중심으로만 이 정책이 유지되었을 뿐이지 중국 전역에 이 정책이 시행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몽골 제국은 정복은 해도 다스리지는 못하는 제국이었다.[51] 그러나 서로간의 다름을 변별하려는 이 노력 또한 조금은 뜬구름처럼 보이는 게, 결국 구체적 행동이나 수양원리에 있어 둘의 동일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심즉리라 하여 마음이 곧 이치라면,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가는 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한다면 삼척동자라도 비웃을 터이다. 결국 왕양명도 심즉리라 하나 우리의 마음이 진정 원하는 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등등을 운운하는데 이 부분에 이르러선 주자의 리와 기를 둘로 나눈 주자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고 아주 같은 건 아니지만...[52] 현대의 분석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중국어 방과 굉장히 비슷한 주장.[53] 성리학보다 양명학이 과학에 가까운 점이 실제로 행동하라고 촉구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양명학처럼 그냥 행동이나 하라 수준에서 끝나면 그건 그냥 기술이지 과학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이컨까지 갈 것도 없이 양명학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훨씬 더 과학에 가깝다.[54] 심영 말고 전국 시대의 사상가 고자. 즉 심학 계열은 공자의 정통이 아니고 고자와 일맥상통하는 이단적 학파란 얘기다.[55] 실사구시, 경세치용이라는 측면은 조선 후기 실학에 영향을 주었다.[56] 프로빈티아 요새, 질란디아 요새[57] 이후 네덜란드군이 질란디아 요새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는 질란디아 요새 성벽이 네덜란드 공격군에게 핸디캡이 되면서 공격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58] 정성공 자신도 전직 네덜란드 관료였던 선교사 Antonius Hambroek를 참수하고 그의 딸인 백인 소녀를 첩으로 삼기도 했다.[59] 그럼에도 유학자들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백성들에게도 서서히 유교 사상의 비중이 높아지며 나중에 조선이 건국될 무렵에는 백성들도 유교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60] 다만 불교식 화장을 명한 부분이 있지만, 이 역시 헛되이 재물을 쓰고 사람을 수고롭게 하지 말고 검소하게 하자는 이유임을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신라에서 작은 산처럼 거대하던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던 것이 문무왕 다음대부터 고려-조선왕릉 정도 규모로 간소화된 왕릉이 조성된다.[61] 심지어 무신정권 전반기 최고의 풍운아인 이의민조차도 이들과의 연대가 매우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62]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사대부와는 달리 훈고학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 최우가 등용한 사대부들이다.[63] 원 간섭기부터 고려 후기대에 이르기까지 사대부들이 중앙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적은 거의 없다. 유일한 시기가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이성계의 신군부가 들어서고 난 다음부터의 시기[64]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정책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다름아닌 그들과 그들의 후손격인 조선의 사대부들까지 무한대로 씹어댄 신돈이었다. 결국 신돈이 숙청 당한 후 원상복귀되었다.[65] 이는 당시 신진사대부들의 상황과 연계해야 하는데 이들은 신돈의 옹호하에 성장한 세력이지만 결국 신돈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마침내 신돈이 숙청 당하고 다시 등장한 권문세족들에 의해 밀려나고 만다. 옹호 세력이라고는 일절 없는 상황에서 공민왕만을 바라보던 신진사대부 입장에선 아내 노국공주의 승하 이후 난행만 일삼던 그에 대한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듯.[66] 물론 최영은 이전의 무신정권 집정자들과는 달리 도평의사사를 비롯한 정부 기관을 깔아뭉개며 권력을 유지하지는 않았기에 무신정권 집정자들과는 다른 평가를 받는다.[67] 물론 조선 초기에는 부분적인 불교진흥정책이 있기도 했지만, 신라나 고려 때에 비하면 불교에 대한 대우가 하늘과 땅 차이로 떨어진 것은 분명하다. 가령 신라나 고려 때는 도성 내에 황룡사흥왕사 같은 수천의 승려가 거주하는 국가사찰이 존재했지만 반대로 조선시대에는 사찰의 도성 내 건립 자체가 구한말까지 사실상 금지됐다. 자세한 사항은 숭유억불 문서 참조.[68] 정도전이 주례를 참고하여 조선경국전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경국대전의 근간이 되었다.[69] 정책적으로는 여러 억불정책을 펼쳤으나, 세종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신봉했다.[70] 다만 학계에선 온건사대부=사림이라는 등식은 지양하는 편이다.[71] 대표적으로 서인의 창시자인 심의겸. 그는 명종의 처남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외척세력이자 '훈구파'라 불리게 되는 집단 소속이다. 다만 원래부터 친사림적 성향으로, 명종의 명령으로 율곡학파를 끌어모았기 때문에 사림파로 취급받은 것.[72] 여기서 道는 도교의 의미가 아니라 사림파 스타일의 성리학이다.[73]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74] 희, 노, 애, 락, 애, 오, 욕.[75] 원래는 승려로, 강항의 가르침을 받고 성리학자로 전직을 했다. 이 사람의 초상화를 보면 완전히 이황 코스프레다.[76] 정작 세이카는 관직 진출을 아예 하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에게 관직에 나설 것을 종용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자기 제자인 라잔을 보낸 것. 말하자면 조선 후기의 산림과 비슷한 행보라 할 수 있다.[77] 이는 이유가 간단한데, 조광조 일파가 향약을 널리 보급하여 서원과 함께 사림파의 기반을 단단히 하여 결국 사림파의 세상으로 만들었듯, 자신들도 조광조 시절의 사림들을 따라해 향약과 서원을 강화하여 훗날 남인의 세상이 되는걸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향쟁(鄕爭)이 벌어지는 것과, 사원을 남설하는데 원인이 되었다. 물론 조선 후기부터 향청을 수령이 지배하게 되어 수탈자문기구로 변하면서 구향(舊鄕)의 향촌지배력이 약화된 탓도 있다.[78] 김조순을 비롯한 新 안동김씨가 노론이지만 시파인 이유이다.[79] 다만 사회진화론과의 차이점은 사회진화론은 자신들이 '우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나온 주장이라면 위정척사파로 이어지는 집단은 그렇지 않다.[80] 원래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송시열과 학문적 대립이 있었던 윤선거였으며. 윤선거의 아버지가 성혼의 제자 윤황이었기에 윤증은 율곡학파의 가르침을 받은 우계학파인 셈이다. 물론 윤증은 송시열과 키배도 있지만 그가 윤선거의 묘갈(墓碣)을 대충대충 쓴 것 때문에 제대로 어그로를 끌어 사제관계가 완전히 끊겼다. 여기서는 술이부작 참조바람. 참고로 윤증의 본가인 파평 윤씨는 고려시대때 지체 높은 문벌귀족이었다.[81] 과거 국정 국사 교과서에선 세도가문이 고증학에 치우쳐 현실 개혁 의지를 잃어버렸다는 구절이 나온다.[82] 청의 고증학 자체가 서슬 퍼런 만주족 지배하의 학문 검열 풍토에 말려들지 않고 회피하기 위해 한족 학자들이 택한 학문적 방법론의 성격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83] 진암 이병헌은 공교회운동의 사상적 근거로 금문경학(공양학)을 채택하였다.[84] 다만 도산서원 같은 경우는 총독부가 유교의 기득권을 이용해 지방 통치를 원활하게 하고 사회주의를 막기 위해 총독부와 협력하기도 했다.식민지권력에의 ‘협력’과 좌절 ― 經學院과 향교 및 문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85] 근현대사에 대해서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연구를 바탕으로 했기에 종교학적이라고 언급했다.[86] 실제로 이 때문에 에도막부의 쇼군 계승은 꽤나 안정적이었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에 적극적이었는데 예시를 들어 이에야스는 좀 미덥긴 해도 남은 아들들 중 장남인 히데타다에게(히데타다는 삼남이었으나 장남은 할복했고 차남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다.) 후계자 자리를 주었으며 또 그 히데타다의 두 아들 히데미츠와 쿠니미츠 중 누가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지 논란이 벌어지자 장자인 히데미츠를 선택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장남상속이 일반화된거라 아들이 없으면 친척을 양자 삼아 계승시켰는데 종법제처럼 딱딱 정해진 것도 아닌지라 누굴 양자 삼는지는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다.[87] 류큐 왕국 사람들은 중국식 이름인 가라나(唐名)와 일본/류큐식 이름인 야마토나(大和名)를 함께 사용했다. 데이 준소쿠는 가라나며, 그의 야마토나는 나구웨카타 조분(名護親方寵文)이었다.[88] 육유(六諭)란 명 태조 홍무제가 유교적 덕목을 바탕으로 발표한 여섯 가지 교훈들인데, 여기에 해설을 붙인 것이 육유연의다.[89] 寺子屋, 조선의 서당과 비슷한 초등 교육기관[90] 리 왕조의 수립을 지원한 공신 중 한명이 승려 리반하인(Lý Vạn Hạnh, 萬行法師)였다.[91] 주공공자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성인이라고 주장하며 쩐 왕조의 섭정을 하고 있던 자신을 합법화했고, 황위 찬탈 이후에는 호꾸이리 자신을 순 임금(...)과 동일시 했다.[92] 개국공신인 응우옌짜이가 저명한 유학자였다.[93] 한자문화권인 베트남과 달리 참파는 인도 문화권.[94] 물론 이는 위에서 언급한 약한 명분론에 의한 잦은 하극상을 두고 말한 것이기도 하다.[95]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는 우리가 아는 것대로 저 구절을 붙일 필요가 없이 부자유친이 깨져 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말이 종교적인 면도 강하지만 어쨌건 현실적인 면이 아예 없다고 보기도 좀 그렇다. 천도라는 관념적인 존재를 끌어다 댔지만 어쨌건 인심 잃을 짓을 하면 지금은 좋아도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다는 얘기이기 때문에 서양 정치철학에서도 저런 얘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저 정도가 종교적인 발언이라고 한다면 서양철학자들도 저 정도 얘기는 했던 사람들 많다. 현대 철학자들은 아니지만.[96] 그와 더불어 교육열이 높은 것이나 집단주의로 집단의 단기 효율성은 극대화시키는 특징 등등, 동아시아의 경제적 성공에는 지역에 자리잡은 유교 문화적 요소들이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도 있다.[97] 따라서, 인간세상(지상세계)과 우주 사이의 빈 공간을 일컫는 한자는 空으로 대체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98] 정확히는 한국 개신교의 주류인 장로교장 칼뱅이중예정설을 주장하는데, 이는 가톨릭 교회에서 칼뱅이 태어나기도 이전 비슷하게 나타난 주장과 칼뱅 당시 두 차례에 걸쳐 기존 그리스도교의 정통 예정 교리에 어긋나는 이단 교설로 단죄되었다.[99] 실제로 제사 지내는 과정에서 읊는 발주문은 혼백을 마치 인격체처럼 대하면서 후손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성격이 강하다. 이쯤 되면 순수한 기라기보다는 독자적인 의지와 행사력을 갖는 혼령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 49제 같은 풍습도 불교의 영향으로 내세관을 도입한 결과라 할 수 있다.[100] 따지고 보면 유교도 외국인 중국이 기원이나, 중국은 정치적으로는 외국이지만 사상적으로는 중국을 외국이라고 보지 않았다.[101] 그러나 유학동양학과 학생이 아닌 대부분의 성균관대학교 학부생들 사이에서 유교에 대한 취급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2학점 짜리 인성 영역 졸업 필수 교양과목(성균논어, 인성고전) 내지는 인간/문화의 이해 영역에 속하는 3학점 짜리 핵심균형교양 과목(동양사상입문)이다. 다만 성균논어, 인성고전 모두 PF 과목이 아니라 학점이 부여되는 과목이며 동양사상입문 과목은 유학동양학과 전공핵심 과목이기도 하다.[102] 다만 과거에는 유학과가 있었다. 하지만 2002년 학과 통폐합 과정에서 한국철학과, 중국철학과, 유교철학과가 합쳐져서 현재의 유학동양학과로 편제되었다.[103] 그러나 현재 교수진의 전공을 보면 일부 윤리학 전공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교를 전공으로 하고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유교을 가르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불교 및 도교 관련 강의는 다 합해도 한 학기에 3개 이상 개설되는 경우가 없다.[104] 분량이 짧기에 책도 같이 출판되고, 수업도 한 학기에 끝낸다.[105] 2013년에는 맹자 강의가 수강인원 미달로 폐지된 적도 있었다.교수님들의 분노가 장난 아니었다 카더라다만 그 이후 14년 부터 18년까지 개설된 모든 맹자 강의는 중국어 원어수업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중국 유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듣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106] 이들 사서 모두 전공핵심(전공기초) 과목으로 애초에 심화과목으로 개설되지도 않았으며, 경전 수업을 하나도 수강하지 않고 졸업이 가능할 뿐더러 이를 선호하는 학생도 상당수이다.[107] 문행 장학금이 확대되기 이전인 2012년 이전에는 입학 이후에 학부생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전액 장학금 제도였다.[108]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방학 때 서원에 가서 놀고먹고집중적으로 공부하며 시험도 본다.[109] 주로 국어, 국사, 한문, 윤리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다.[110] 마지막으로 존속했던 2011년도 입시에는 '동양학 인재 전형'으로 있었다.[111] 이 때 부터 한자 자격증이 있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112]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인문과학계열에서 가장 인기 많은 영문, 중문, 국문, 문정과와는 다르게 항상 자리가 남기 때문에 인문과학계열에 입학만 하면 전공진입은 쉽다.괜히 전공예약생을 뽑는게 아니다. 단과대 유지는 해야지[113] 편입생들이 꽤 많이 오지만 편입생들은 타 과 복수전공이 불가능하다.[114] 유학대학의 경우 일반대학원에는 옛 편제가 남아 있어서 유교철학과, 한국철학과, 동양철학과로 나뉘어져 있고, 특수대학원으로서 유학대학원도 있다. 다만 진짜 학문을 하려면 일반대학원을 가야 한다. 특수대학원은 학문을 한다기 보다는 교양과정의 업그레이드 수준에 머무는지라...[115] 다만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가 칼럼에서도 지적했듯이, 유교랜드에서 유교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는 말자.[116] 오해와는 달리 학계에서는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교’가 아니었음을 밝혀낸 바 있다. 이른바 불교국교론은 이미 폐기된 학설이다.[117] 일단 승려들의 공식적 신분은 정해지지 않았다. 천민취급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팔반사천(八般私賤)중 하나로서 동급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허나 승려들에 대한 강제 부역이나 도첩제 등 여러가지 심각한 불이익 때문에 사실상 천민 취급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조선 당시에도 부역의 노동환경은 극악에 가까워 사망확률이 꽤 높았다.[118] 먼훗날의 이야기지만 손주들의 경우도 줄줄이 사탕으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였다. 직계 6대손인 정해인 또한 가톨릭 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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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귀족이 망하지 않은 일본의 유교는 상대적으로 귀족적인 면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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