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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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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장.png중국 전인대의 원내 구성
(괄호 안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의석 수)
여당
중국 공산당
(2119석)
민주당파
구삼 학사
(64석)
중국 민주 동맹
(58석)
중국 민주 건국회
(57석)
중국 민주 촉진회
(55석)
중국 농공 민주당
(54석)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

(50석)
중국 치공당
(38석)
타이완
민주자치동맹

(13석)
무소속
무소속
(459석)
홍콩의 정당1
홍콩공회연합회
(2석)
신세기논단
(1석)
실정원탁
(1석)
민주건항협진연맹
(5석)
마카오의 정당1
개발을 위한 연합
(2석)
진보촉진회
(1석)
1. 홍콩, 마카오의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는 무소속으로 활동한다.

중국 공산당
中国共产党 / 中國共産黨
Communist Party of China
파일:중국 공산당기.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Danghui.svg.png
당기 로고
약칭 中共党, CPC, 중공
창당일 1921년 7월 1일
창당자 천두슈, 리다자오
총서기 시진핑
정치국 상무위원 시진핑, 리커창, 리잔수, 왕양,
왕후닝, 자오러지, 한정
중앙 당사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 중난하이
당보 인민일보
청년조직 중국 공산주의청년단, 중국 소년 선봉대
군사조직 중국 인민해방군
국제조직 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
당원 약 90,000,000명
슬로건 为人民服务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전국인민대표대회 총 2,987석 중 2,157석 차지 (72%)
이념 & 정치노선 시진핑 사상
중국식 사회주의[1]
권위주의
중국 국수주의
중화사상
정치적 스펙트럼 혼합정치[2][3]
중국 공산당 뉴스포럼

1. 소개2. 역사
2.1. 창당2.2.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과 대장정2.3. 국공내전의 승리2.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3. 구조
3.1. 전국대표대회
3.1.1. 중앙위원회3.1.2. 역대 최고지도자
3.1.2.1. 중앙정치국
3.1.2.1.1.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3.1.2.1.2. 현 19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3.1.3. 중앙기율검사위원회3.1.4. 중앙군사위원회
4. 당원5. 비판
5.1. 인권 탄압5.2. 분리주의 탄압 및 독립운동 방해5.3. 종교 탄압5.4. 정경유착 및 부정부패
6. 관영언론7. 파벌8. 기타 등등9. 관련 문서
9.1. 민국시기9.2. 건국 이후

1. 소개

중화인민공화국의 집권당. 1921년 7월 23일[4] 상하이에서 천두슈[5], 리다자오의 주도하에 창당됐다.

1949년부터 집권했으며, 현재 중국 내에서 사실상 유일한 정당이다. 정확히 말하면 중화인민공화국에는 공산당 말고도 공화국 설립에 참여한 8개의 민주당파 정당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정치활동만 하고 있으며, 정권 교체는 실질적으로 할 수도 없고 하려 하지도 않는다. 약칭은 중공(中共)[6]. 중국 현지에서는 더 줄여서 그냥 "당"(党)이라고도 부른다. 일당제인 중국에서는 중국 정부가 곧 중국 공산당이기 때문에[7], 다른 나라에서 자국 정부를 단순히 "정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중국 국내에서 중국인들이 "당"이라고 하면 높은 확률로 중공을 가리킨다. 당원은 약 9,000만 명[8]이다.

'전국대표대회'라는 5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가 있다. 공산당 주요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는데 여기서의 결정이 다음 회의때까지의 중국 정책방향을 결정한다.[9]

현 당수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인 시진핑.

2. 역사

2.1. 창당

중국의 프로파간다 영화 '건당위업'의 한 장면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소련볼셰비키당에 영향을 받고 5.4 운동의 시류를 탄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창립자는 천두슈) 제1차 당대회는 1921년 7월에 있었는데, 이때 50여명의 당원을 대표해 13명의 중국인과 2명의 외국인(코민테른에서 파견)이 참가하였다.[10] 초기에는 1921년 노동조합서기처를 설립,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을 지원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노동쟁의를 조직, 후원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처음에는 광동군벌 천중밍, 직예군벌 우페이푸 등과의 합작을 도모했으나 천중밍과는 영풍함 사건으로, 우페이푸와는 2.7 사건으로 결렬했으며 쑨원과 연합한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국민당에 개별 입당하는 식으로 1차 국공합작에 나서게 된다. 이어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혁명군의 건설을 도왔으며 국민당의 1차 동정, 1925년 객군 반란 진압, 국민당의 2차 동정과 남정에 적극 참여하여 대중운동을 선동하여 군사작전을 도왔고 공산당을 선전했다.

하지만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며 국민당을 잠식하려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국공간의 갈등이 끓어올랐고 이런 갈등은 쑨원이 사망한 후에 폭발했다. 1925년 8월 20일 재정부장 랴오중카이암살되자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와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은 이를 구실로 후한민, 쉬충즈, 린썬, 쩌우루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을 대거 숙청했다. 장제스는 이 숙청에 가담하면서 국민당의 2인자로 자리잡았지만 북벌 문제를 놓고 공산당과 갈등을 빚었고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중산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고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군벌이 장악한 북양정부를 토벌하기 위한 국민당의 1차 북벌을 감행한다. 하지만 국공 갈등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영왕운동, 천도논쟁, 난징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보로딘은 장제스의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 자리를 폐지하고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급기야 4월에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서 면직시켰다. 결국 우파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장제스는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1927년 5월, 하두인을 비롯한 우파 장령들이 마일사변을 일으키며 분공을 요구했고 펑위샹도 분공을 요구, 거기에 코민테른의 5월 지시가 내려오게 되면서 1927년 7월에는 우한 국민정부와 공산당도 결별하게 되었고 공산당은 난창 폭동을 시작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이 때문에 8.7 긴급회의를 통해 천두슈가 실각하고 취추바이가 집권하여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을 주도했으나 역시나 실패했다. 12월 광저우 폭동의 실패의 결과로 6만에 달하던 당원이 1만명으로 급감하는 등 공산당의 피해는 심각했다.

2.2.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립과 대장정

하지만 마오쩌둥주더를 비롯한 유격대 지휘관들이 정강산 투쟁을 시작으로 중국 곳곳에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했으며 특히 강서성에 건설된 강서 소비에트는 계속 확장, 중앙 소비에트로 지칭되었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상하이의 임시 당중앙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마오쩌둥은 실각했고 오토 브라운과 28인의 볼셰비키라 불리는 소련 유학파들이 군사 노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결국 1933년 제5차 초공작전에서 중앙 소비에트를 비롯한 여러 소비에트 지구들이 분쇄되었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멸망했다.

1934년 공산당은 대장정에 올랐으며 1935년 쭌이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복귀했다. 이후 장궈타오와 마오쩌둥의 분쟁이 있었으나 사천성에서 해방구를 건설할 것을 주장한 장궈타오의 4방면군이 국민혁명군에게 토벌당하면서 마오쩌둥의 우위가 확실해졌고 마오쩌둥은 섬서성 연안에 정착하였다. 2차 양광사변을 즈음해서 반장항일에서 핍장항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장제스에게 항일을 위해 화해하자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어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장쉐량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체포하고 국공합작을 강요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여 중일전쟁 당시에는 어쨌든 느슨하게나마 연합해 있었다.

2.3. 국공내전의 승리

중일전쟁 말기인 1945년초에 일본군이 대륙타통작전태평양전선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자, 공산당의 중심지였던 산시 및 화북일대가 무주공산이 되었고 더욱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동남부해안에 집결해있는 일본군과 고전을 면치 못하자 이틈을 노려 화북지역을 공산당이 재빠르게 장악하였다. 이후 공산당군의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무려 120만명의 군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일본의 실수가 중국공산당에게 하늘의 기회를 준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소련은 8월 폭풍작전으로 만주지역을 발빠르게 장악하여 만주지역에 주둔한 관동군을 조선반도로 몰아내었다. 소련이 전후 만주를 중국공산당에게 양도한다는 약속을 하며 세를 불려나가고있었다. 어쨋든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며 중일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마무리 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중국대륙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세력경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미국의 중재로 두 당간에 새로운 정부수립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얼마 안가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공산당 토벌을 목표로 선공을 가하면서 2차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중국공산당은 내전 초기 연전연패하면서 본거지인 옌안까지 함락당할 정도로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지만, 1947년 겨울에 만주에서 국민당의 50만 대군에게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이후 공산당은 기세를 몰아서 국민당을 몰아붙여서 1949년 중국 국민당대만으로 밀어내고 대륙본토를 대부분 장악한다.[11] 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다.

공산당 창립 초창기에 있었던 코민테른 제1차 대회의 중국 공산당 소속 참가자 13명 중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2명이었고, 4명은 혁명활동중 전사하고, 나머지 7명은 중국 국민당이나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향하였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중국 국민당과 더불어 최대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본토와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지원을 보내주었고, 좌우합작을 모색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부분적으로 협력관계를 맺기도 했다. 조선의용대처럼 이념과 상관없이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은 경우도 많이 있었다.

2.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집권 중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파괴문화대혁명 등의 병크를 저지르기도 했으나, 대륙 시절의 중화민국보다는 대륙을 그럭저럭 운영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덩샤오핑 이래 보여주고 있는 중국의 고속성장은 공산당의 집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공산당이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12][13]그 와중에 생기는 빈부격차나 부정부패, 오염문제도 상당히 크고, 정치에 관한 불만도 크지만 조금씩 통치의 경직을 풀어주는 방법으로 그 불만을 교묘히 컨트롤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낮추고 있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 시기에는 정부 비판이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언론의 웬만한 비판은 눈감아주는 추세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어떠한 경우의 정부 비판도 금지되었지만, 현재는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먼 하급공무원 비리, 환경오염, 행정 부조리 등은 보도가 가능하다. 말하자면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배합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시진핑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사실상의 종신 독재자가 되기는 했으나 이는 공산당 내의 권력 다툼에서 반대파를 억누르고 혼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이지 딱히 중국 인민들을 못살게 구는 것은 아니다. 시진핑 때나 전임 후진타오 때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마오쩌둥(심지어는 국부천대 이전 장제스 정권 시절에도 중국국민당의 독재 시기로, 국민(인민)이 참정권을 가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절까지 인민들은 현실 정치에서는 참정권이 제한되어 있었다.

사실 중국 공산당의 당내 역학만 보면 조선로동당보다는 일본 자민당과 더 비슷하다. 최고지도자의 결정보다는 계파들 간의 합의나 원로 영향력이 더 큰 편.

3. 구조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전국인민대표대회1
국가주석, 중앙군사위 주석, 국무원 총리 선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1
중앙위원회
중앙위원회 총서기
국무원
국무원 총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중앙정치국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지방위원회
1.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합쳐 양회라고 한다.


중국은 일당제 국가이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조직은 중국의 행정 조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국가행정조직/중국 문서도 참고하면 좋다.

3.1. 전국대표대회

중국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통치기관이자 중국공산당의 전당대회이다. 전 공산당원 중 3000명 정도를 대표로 뽑아 5년에 한 번 개최하고 중앙위원회의 요청이나 전국 성급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3분의 1 이상의 요청이 있을 때는 임시로 개최할 수 있다. 아래 위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차관급으로 예우한다.

3.1.1. 중앙위원회

전국대표대회에서 370명 가량을 뽑아 중앙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중앙위원회의 총서기(주석)가 중국 공산당의 대표다.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2가지로 구분된다.

2017년 10월 열린 제19대 전국대표회의 기준으로 현재 중앙위원은 205인이고 후보위원은 171인이 선출되었다. 장관급으로 예우한다.
  • 중앙위원회 서기처(중앙서기처): 정확히는 중앙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두 기구의 하급 기관이다. 두 기구의 사무 처리가 주된 업무이다. - 서기(7인)
    우리나라로 치면 이곳 서기는 당의 부당수이면서 원내대표겸 당 사무총장이나 다름없다. 국가 부주석이 겸임하는게 관례이다.
  • 중앙군사위원회: 중앙위원회의 하부 조직으로 군령권을 행사하는 조직이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인민해방군은 당의 군대인 만큼 그 수뇌부인 중앙군사위도 당 조직이다.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인민해방군의 최고명령권자이다. 명실상부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중앙군사위 주석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안전보장회의겸 국회 국방위와 비슷하다.
  • 중앙직속기관: 중앙판공청, 중앙조직부, 중앙선전부, 중앙통일전선부[14], 중앙대외연락부, 중앙당교 및 인민일보, 광명일보 등

3.1.2. 역대 최고지도자

중국에서는 중공중앙주요부책인(中共中央主要负责人)[15]이라고 한다.
  • 중앙위원회 총서기(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1대 : 천두슈 (1921 ~1927)(1차 중앙국서기, 2~4차 중앙집행위원회위원장, 5차 중앙위원회총서기)
    2대 : 샹중파 (1928 ~1931)(6차 중앙위원회총서기)

    • 대리 : 왕밍 (1931)(6차 중앙위원회총서기 대리)

    3대 : 보구 (1934 ~ 1935)(6차 임시중앙정치국부책인)
    4대 : 장원톈 (1935 ~ 1943)(6차 중앙위원회 총서기[16])
  • 중앙정치국 주석(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
    1대 : 마오쩌둥 (1943 ~ 1945)(6차 전국대표대회)
  • 중앙위원회 주석
    1대 : 마오쩌둥 (1945 ~ 1976)(7차~10차 전국대표대회)
    2대 : 화궈펑 (1976 ~1981)(10차~11차 전국대표대회)
  • 중앙위원회 총서기
    1대 : 후야오방 (1981 ~ 1987)(11차~12차 전국대표대회)[17]

  • 2대 : 자오쯔양 (1987 ~ 1989)(13차 전국대표대회)[19]
    3대: 장쩌민 (1989 ~ 2002)(13차~15차 전국대표대회)
    4대 : 후진타오 (2002 ~ 2012)(16차~17차 전국대표대회)
    5대 : 시진핑(2012 ~)(18차~19차 전국대표대회)
3.1.2.1. 중앙정치국
중국 공산당을 지도하며 정책을 토의·결정하는 기관으로써 중앙위원회 위원 중 25명을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뽑는다. 부총리급으로 예우되는데 예외적으로 당 서열 8위인 국가 부주석은 부통령급이고 9위인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서기는 총리급으로 본다.(단 정치국원이나 정치국상무위원 겸직일 경우해당)

또한 이들 25명도 당서열이 앞서나 그중 7명은 사실상 권력 서열 최고 정점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 된다.
3.1.2.1.1.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당과 국가의 사실상의 최고 권력 기구이자 최고 의사결정기관으로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선거로 선출된다. 선출된 7명의 위원은 정치국 상무위원로 불린다.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는 당연직이며, 주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국무원 상무부총리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등이 상무위원으로 선출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로 대입하면 대통령 겸 당대표와 부통령 겸 원내대표, 5부 요인(국회의장, 국무총리, 대법원장, 헌재소장, 선관위장)과 감사원장과 경제부총리와 방통위장이 서로 만나 국가 중대한 사항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최고기구나 마찬가지이다. 국가주석과 총서기 군사위원회 주석은 대통령급이고 나머지 6인은 총리급으로 예우받는다.

'68세 이상은 상무위원을 맡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七上八下)이 있다. 시진핑이 68세를 넘은 자신의 오른팔 왕치산을 상무위원으로 유임하여 이걸 깨려 한다는 관측이 있었는데 일단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대신 국가 부주석으로 삼았다.
3.1.2.1.2. 현 19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 다음 인물들이 상무위원(당직)이며 별도의 직책을 겸임한다.
  • 시진핑 : 중앙위원회 총서기(당직), 국가주석(국가직),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당직)
  • 리커창 : 국무원 당조서기(당직), 국무원 총리(국가직)
  • 리잔수 : 전국인민대표대회 당조서기(당직),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국가직)
  • 왕양 : 정치협상회의 당조서기(당직),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국가직)
  • 왕후닝 : 중앙서기처 제1서기(당직)
  • 자오러지 :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당직)
  • 한정 : 국무원 당조부서기(당직), 국무원 부총리(국가직)

3.1.3.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공무원의 부정부패, 비위행위를 감찰하는 기구로써 서기 (1인), 부서기(8인, 이중 1인은 서기장을 겸함), 상무위원 19인(서기와 부서기를 포함) 구성원이 이루어진다.

3.1.4.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시진핑

중국 공산당의 중국군 통제기관으로 군 통수권을 지닌 실세 권력기관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4. 당원

중국 공산당의 당원 선발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워서 우선 중국 공산주의청년단(약칭 공청단)이라는 예비 조직에 들어간 뒤에 약 3년이 걸리는 능력 검증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거꾸로 실력있는 사람들을 당원으로 받아서 체제를 유지하고 당 내의 세대 교체를 하려고 하는 기능도 있다고. 실제 사례로 중국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등 점점 증가 추세다. 심지어 처음엔 차단되었던 자본가들도 많이 입당했다. 그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는 '꽌시', 즉 인맥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며, 정경유착도 상당히 심각하다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정부가 기업을 통제한다.

공산당 최상층부에는 태자당이라 불리는 개국공신의 2세, 3세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공청단에서 제도적으로 고급 당료가 끊임없이 수혈되고 있기 때문에 태자당이 고위직을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자당과 공청단이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상호견제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현 시진핑 국가주석은 정통 태자당이고, 후진타오 전 주석은 공청단 출신.[20]

여기에 지방조직[21]에서 실력을 검증받지 못하면, 최고위직까지 오르기가 힘들다. 아무리 부모 덕을 보더라도 20대 중반부터 시작하는 당조직 말단에서 30년 안에 4-5 단계의 직위를 한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고속승진해야 상무위원(정원7명)의 후보자로 들 수 있는 당 중앙위원회(정원 205명)에 진입할 수 있다. 개인 비리에 연루되거나 혹은 실적이 나쁘거나 후견인이 대단하[22]면 낙마. 2013년에 출범한 중국 최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7인 상무위원회의 멤버를 봐도 시진핑만이 개국공신 아버지의 덕을 볼 수 있었던 정통 태자당이며, 나머지 6명(리커창, 장더장, 위정성, 류윈산, 왕치산, 장가오리)은 공청단 출신이거나 태자당이라고 해도 부모의 배경과는 거의 무관하다. 태자당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의 부모는 대장정 이후와 공산화된 1949년 사이에 당 고위직에 진입한 자들로서 대략 800여명-1000명이나 되므로 이들의 자녀 수천 명이 모두 고위직에 들어갈 수는 없다. 결국 본인의 능력도 있어야 한다는 말. 덩샤오핑의 9자녀들 가운데서도 장관급까지 오른 자는 전국 정협 부주석 덩푸팡 뿐이며, 이 자리도 거의 장애인 할당으로 얻은 자리다.[23]

5. 비판

5.1. 인권 탄압

일당 독재에 대한 반대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경직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인권 운동가들을 "국가 전복 혐의" 또는 "허위사실 유포"로 몇 년간 가두는 건 예사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는 서명이나 항의와 같은 평화적인 민주화 운동을 했음에도 국가전복선동혐의로 체포되어 11년형을 받다가 옥사했으며, 여러 인권운동가들이 체포되어 "국가전복선동", "허위사실유포"와 같은 어거지 혐의로 수년이상의 중형을 받고 있다.
심지어 공산당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탄압한다. 일단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독립된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결성하는 것 자체가 중국에서는 불법이다. #

5.2. 분리주의 탄압 및 독립운동 방해

특히 티베트인들과 위구르인들과 같은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에는 "분리운동"이라며 강경대응을 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중국측 표현으로는 분리주의 운동가)들을 몇 년씩 옥에 가두는 것은 예사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다민족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중국의 탄압은 매우 선제적이고 철저하다. 다만 이렇게 선제적이고 철저히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내전이나 유혈사태로 비화하지 않는다는 역설도 가능하다. 싹이 보이면 무조건 잡아 가두기 때문. 딱히 독립운동이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독립이나 분리주의를 조장할 수 있는 발언을 한 사람은 수년씩 코렁탕을 먹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방 언론과 당국 허가없이 인터뷰를 한 티벳어 언어 보전 운동가는 징역 수년을 살기도 한다. #

중국은 특유의 강제적 행정력으로 분리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소수민족이라고 쓰고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이라고 읽는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웬만한 소수민족 지식인들은 대부분 사찰을 받고 있으며, 분리주의 경향이 심한 소수민족의 집회는 비정치적이더라도(즉, 종교의식이나 친목회 같은 집회도) 꼭 감시원들이 따라붙는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소요사태가 나면 유혈진압도 불사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다민족 국가에서 특정 민족의 독립이나 분리주의 운동은 내전 및 국가 분열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에, 어쨌든 터키, 인도네시아, 러시아, 인도, 에스파냐 등 다수의 다민족국가들은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다양한 형태로 탄압하고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이것을 딱히 중국 공산당 자체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있기는 하다.

5.3. 종교 탄압

종교에 대해서는 헌법상으로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국가가 통제하고 있고, 특히 국가적으로 사교로 지정된 파룬궁은 엄청난 탄압을 받고 있다.[24] 중국은 역사적으로 체제가 뒤집힐 뻔한 엄청난 종교민란을 겪었기 때문에(황건적, 홍건적, 태평천국), 교주를 신격화하는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는 엄격한 면이 있는데다, 서방과 이어진 외래종교인 가톨릭개신교, 소수민족 독립운동과 연결된 이슬람교는 불교에 비하면 더더욱 경계하는 편이다.[25]

그 원인을 말하자면, 근대 서양 열강들의 침략을 받았고 현대에도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과의 대립 때문에 기독교를 서방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중국에서도 수백년 역사를 가지는 것이며, 중국의 국부로 존경받는 쑨원[26] 또한 기독교인이었음을 생각하면 잘못된 주장이다. 각 왕조나 공산정권 수립 이후 상당한 탄압을 받았음에도 중국에 뿌리를 내렸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어느 정도 제한이 풀어졌기 때문에 신자 수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으며, 현재 개신교 신자는 4천만명 내외, 가톨릭 신자는 500만에서 1200만 내외로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기원되었지만 이미 중국 현지에서 오랜 시간의 로컬라이징을 거쳤기 때문에 단순한 종교가 아닌 문화와도 연결시켜 홍보하는 분위기고 다른 종교들보다 은근히 밀어주는 편이다. 티베트 불교는 달라이 라마라는 뜨거운 감자가 있지만, 달라이 라마와 직접적인 연계활동을 하거나 티베트의 독립을 주장하는 등의 활동만 하지 않으면 그다지 탄압받지는 않는다.

이슬람교위구르족 독립운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슬람교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 라마단 행사를 금지시키고 금식 기간인 라마단 기간에 음식을 먹도록 강요한다. 부르카는 인권 탄압 논란이 있기에 그렇다손 치더라도 턱수염, 터번히잡까지 금지시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르카같이 극단주의자들과 연관이 깊은 풍습들만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문서 참고. 중국의 이슬람 탄압은 위구르인에게 집중되어 있는 편인데 신장위구르의 이슬람 탄압은 독립운동 탄압의 일환이라고 치더라도 중국 공산당에 협조적인 회족들 역시 자유로울수는 없다. 그동안 회족에 대해서는 심하게 터치하지 않았으나 시진핑 집권 이후로는 회족에 대한 종교 규제도 강화되어 스피커를 이용한 아잔 낭송 금지, 모스크 지붕 모양 규제[27], 아동 대상 이슬람교 교육 금지등의 규제 명령이 하달되어 시행중이다. 중국의 이슬람교에 대한 규제와 탄압때문에 중동 지역 무슬림들은 중국 공산당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편이다. 탄압받는 중국 무슬림 신자들의 추가 증언[28]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다독일 필요도 있기 때문에 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다른 혜택도 받는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쇠고기/양고기 보조금도 지급받고, 계획생육정책이 잘 집행되지 않으며[29], 일상생활에서 한족들과 분쟁이 생기면 독립운동 같은 것으로 불거져서 모가지의 염려가 있는 지방정부 등은 위구르인들에 유리하게 편파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허나 이 소수민족들에 대한 일부 혜택과 편의는 소수민족에 대한 혜택이지 무슬림에 대한 혜택이 아니라는 점에서 중국 공산당이 이슬람에 호의적이라는 근거로 들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

원칙적으로 중국 공산당원이 되려면 무신론자여야 한다. 즉, 당내에 종교를 가진 사람은 없고, 종교를 믿는다면 가입할 수 없다. 그런데 건국 초기에는 위구르족, 티베트인을 회유하기 위해서 해당소수민족은 이슬람교인들과 티베트 불교 신자들도 민족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은 받아준 모양이다. 한족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당초기부터 받아주지 않았다. 에드거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별"이라는 1930년대 옌안 해방구 르포를 보면, 공산당에 동조적이고, 같이 일하는 기독교 목사가 있었으나 당에 가입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5.4. 정경유착 및 부정부패

많은 개도국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정경유착과 부패문제가 심각하다. 사실 중국의 대부분 재벌은 공산당 실세와의 유착으로 성장했다.[30] 정치적 후견인이 권력 투쟁에서 패해 몰락하면 그룹이 해체되는 경우도 많은데, 그 대표적인 예가 보시라이와 유착되어 있던 다롄 스더 그룹. 중국 당국도 이에 대한 문제점을 알고 있고 시진핑 주도로 반부패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다.[31] 다만 일각에서는 이 운동으로 시진핑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들어 시진핑의 1인 독재로 발전할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어쨌든간에 시진핑 자신의 계파에는 이런 사정의 칼이 무뎌지는지는 몰라도 실제로 부정축재를 한 정적들이 지속적으로 사법처리되고[32], 사정의 칼날 때문에 일선 공무원들의 기강이 바로잡히고 뒷돈을 받는 일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라, 중국인들은 이런 부패청산 드라이브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다 카더라. 자세한 것은 중국/문화 검열, 중국/인권, 중국/정치 문서로.

6. 관영언론

  • 인민일보 (런민르바오)
  • 환구시보 (환추스바오) - 인민일보에서 출자해서 만들었지만, 반관영이다. 꼭 인민일보나 중국 공산당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적는 인민일보가 점잖은 논조를 표방한다면 환구시보는 그와 정반대로 상당히 국수적인 논조를 나타낸다. 공산당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신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산당 내 강경파들의 속내가 어떠한지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유용한 편. 환구시보는 영어로 치면 글로벌타임스 정도 된다.환구시보에 대한 중앙일보 기사[33]

7. 파벌

8. 기타 등등

2016년 기준으로 창당된 지 95주년을 맞이하였다. 관련 기사 백 년을 바라보고 있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관련 기사

모택동 시절 이후 다시 재조명받고 있는 공자 #

도올 김용옥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일당독재 개념과는 좀 다르고 워낙 크고 체계, 토론 제도가 잘 되어 있고 각 계파별로 서로 견제를 해서 오히려 다당제보다 더 민주적일 수도 있다했다. 하지만 후진타오의 퇴임시 부정부패가 문제라는 발언이나, 중국에서 원로한테 훈수 받는 제도나 보시라이, 저우융캉, 링지화 등 호랑이 4인방 같은 사례를 들면서 비리가 많다는 걸 말하기는 한다. 그리고 이것은 김용옥이 민주주의와 자유가 구조적으로 어떻게 발생하는지 최소한의 이해조차없는 행태이다. 공산당이 내부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할만하다는 구조를 띠고 있다고 해도 결국 어찌되었든 공산당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정치적결사 집합체인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어찌되었든간에 그 정치적결사의 대표가 소수로 존재할수 밖에 없다는걸 의미한다. 이건 결국 정당의 행보는 그러한 소수의 시점, 소수가 이해하는 세계, 소수의 세상에 대한 관점에 의해 정당 자체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건 한 정당의 내부에 속해있으므로 이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당제, 적어도 다른 정당을 취하고 있는 존재들간에 이러한 영향력의 구속은 구조적 본질 차원에서 개입될수 없다. 애초에 정당 자체가 다르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을 받지않고 그렇기에 상대적 견제를 통해서 이러한 구조적인 견제를 통해서 서로간에 개입할수 없고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자유'가 발현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용옥의 공산당의 구조적 옹호는 참으로 무지한, 또는 애초에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 라고 느낄정도로 비극적인 행태가 아닐수 없다.

캐나다 출신으로 칭화대 교수에 임명된 대니얼 A. 벨 같은 친중공 정치학자는 심지어 중국공산당의 독재가 공자의 사상에 입각한 동아시아판 철인정치라며 서구 민주주의의 대안이 될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사람은 여러차례 한국에 초청되어 출판기념강연이나 심포지엄등을 하기도 했다#.

9. 관련 문서

9.1. 민국시기

9.2. 건국 이후



[1] socialism with Chinese characteristics[2] 사회혁명을 통해 사적 소유가 철폐되고 국유 경제체제가 수립된 중국 사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중국 공산당은 "권위주의적 국가 관료에 의해 운영되는, 경제가 국유화된 체제"의 현상유지를 추구한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정책 방향은 권위주의, 국가주의를 내세우면서 현상유지를 전제로 경제개발과 국력 강화에 주력하는 전형적인 1국 사회주의, 사회주의 개발독재로 사회혁명을 해외로 수출하거나 현 상태에서 더 혁명을 진전시키고자 하지는 않는다.[3] 다만 공식적으로는 '좌파'정당이라고 주장하지만 21세기 현재의 중국 공산당이 타국의 공산당과 비슷한 '좌파 정당'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이안 부루마는 중국 공산당은 좌파정당이 아니라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국가자본주의 정당이라고 평하였다. 실제로 친중파(홍콩) 문서에도 적혀있지만 홍콩과 마카오에선 기업들을 대변하는 우파들이 친-중국공산당 성향이고 오히려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좌파(=민주파)들이 중국공산당과 마찰을 빚고 있다.[4] 중국 공산당은 7월 1일이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7월 23일이다.[5] 총서기로 취임하였다.[6] 1988년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공'이라고 불렀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일개 국가가 아닌, 그냥 중국 공산당 당국 혹은 정권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당시 수교 중이던 중화민국 때문이었다. 한국-대만 관계 참고.[7] 이에 따라 나무위키에서 중국 정부 문서는 중국 공산당 문서의 리다이렉트 문서로 존재한다.[8] 중국 인구의 약 6.4%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정당이다. 1위는 인도의 인도 인민당으로 약 1억 1000만 명의 당원을 가진다.[9] 서성, <한 권으로 읽는 중국 문화>, 넥서스, 2005, p38-40[10] 이중 저우포하이, 천궁보 등은 탈당하여 국민당에 합류했다.[11] 윈난성 등 일부 지역의 국민당군은 계속 저항했지만, 외부에서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1950년대 초반에 대부분 공산당군에 토벌된다.[12] 실제로 바이두에 "왜 중국이 일당제여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공산당이 모든 걸 다 해주는데 다당제가 왜 필요하냐"는 답변이 올라온 사례가 있다.[13] 사실 그 점때문에 장제스(정확히는 대만통치 시절)-장징권 시절의 중국 국민당이나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과도 비슷한면이 많으며 많이 비교되기도 한다.[14] 민주당파(위성정당)와의 연계를 담당하는 기구[15] 부책인은 중국어로 책임자이다[16] 실권은 마오쩌둥이 쥐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대장정 문서의 쭌이회의 참조[17] 실권은 덩샤오핑이 가지고 있었다.[18] 실권은 덩샤오핑이 가지고 있었다.[19] 실권은 덩샤오핑이 가지고 있었다. 천안문 사태로 내려온다.[20] 후진타오는 공청단 후배인 리커창을 차기 대권후보로 밀었으나,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견제 때문에 결국 시진핑 국가주석, 리커창 국무원 총리 체제로 결론이 났다.[21] 중국에서 최고위직에 오르려면 지방 행정 실무 경험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시진핑만 하더라도 허베이, 푸젠, 저장성 등을 거쳤다. 이렇기 때문에 베이징에서 주재하는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오를 수 있는 직위가 장관급이 한계이다.[22] 장쩌민도 80년대 상하이에서 부정부패 문제로 날아갈 뻔 했다가 보이보의 구원으로 살아남은 바 있다.[23]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급의 아버지를 둔 보시라이(개국공신 보이보의 아들)는 7인에 뽑히는 것이 유력했으나, 2012년에 비리로 몰락했다. 보시라이의 몰락은 역설적으로 시진핑의 집권을 도왔는데, 태자당 내 유력 주자 한명이 날라가면서 당 중앙위의 태자당의 표가 분산되지 않고 시진핑으로 집결된 것이다. 보시라이 몰락 이전의 시진핑은 당내 예상 서열이 높아봐야 4-5위 정도로 상무위원 선출도 턱걸이였다.[24] 현재 홍콩/마카오, 대만을 제외한 중국 본토에서 파룬궁은 자살 신호나 마찬가지다. 중국 본토에서 파룬궁에 소속되어 있거나, 파룬궁과 어떤 식으로든지 연관되어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혹시라도 중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체류 중에 파룬궁의 ㅍ도 꺼내면 안 된다. 그것과 비슷한 발음도 무조건 기피해야만 한다. 파룬궁의 ㅍ이라도 입에 올리는 순간 살해되는 수가 있다.[25] 다만 파룬궁은 사이비 종교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오히려 본격적인 탄압 이전엔 인민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었다 하여 중국 정부로부터 여러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장쩌민이 파룬궁 수련자의 숫자가 공산당원 숫자를 넘어가자 뜬금없이 이들을 권력의 위협이 되는 반체제 집단으로 지명하여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쩌민 본인을 제외한 상무위원 6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이를 실행한 것으로 아래 나오는 시진핑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중국공산당 본인들의 언급과는 달리 시스템에 굉장한 허점이 있다고 밖엔 볼 수 없는 사례이다.[26] 실제로 쑨원은 자신의 정치활동이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7] 이 규제에 따라 향후 중국 내 모스크는 중국식 기와 지붕으로 지어져야 한다.[28]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가정 재교육 운운하는것,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아가면서 이슬람을 믿지 말라고 명령 받았으면 그 말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 압권이다.[29] 1가구 1자녀이던 시절, 소수민족은 2자녀까지도 허용되었지만 위구르족들은 그 이상으로 낳아도 별 문제 없다.[30] 알리바바 그룹의 마윈이나 텐센트의 마화텅과 같은 이커머스나 IT그룹들은 좀 덜하지만, 건설-부동산기업은 이런 실세를 끼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사실 이런 종류의 기업들이 정경유착의 원흉이 되는건 경제성장기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한보그룹이 대표적인 예.[31] 허나 이후 시진핑도 탈세와 친인척 비리가 발생함에 따라 보여주기식 쇼였다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32] 괴작 노래 <시집 가려면 시다다 같은 남자를 만나라>에는 호랑이건 파리건 다 때려 잡는다고 한다(...). 파리는 소규모 부패 사범, 호랑이는 거물급 부패 사범을 의미한다.[33] 쉽게 말하자면, 인민일보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그대로 말해준다면, 환구시보는 공산당이 대외적인 국가 이미지나 국내, 국제적인 반발을 의식해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비교적 자극적인 논조로 말해준다고 보면 된다.[34] 사실상 중국 공산당 산하기업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창립자도 인민해방군 장교 출신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