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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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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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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 구호를 쓰는 조선의용대원.[1]
파일:조선의용대 군기.svg
조선의용대 군기
1. 개요2. 창설3. 분리
3.1. 화북 이동과 조선의용군3.2. 본대 잔류와 한국광복군
4. 결말5. 관련 기사6. 출신 인물7. 관련 문서

1. 개요

1940년 중국국민당 산하 중국신문(中國新聞)이 제작한 조선의용대 홍보 영상. 원본
김원봉조선민족혁명당과 좌익단체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과 만든 연합성격의 항일민족연합전선인 조선민족전선연맹장제스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8년 10월 10일 중화민국 후베이성 한커우[2]에서 창설한 관내 지역 무장 독립 운동 단체. 장제스가 이끌던 중국국민당으로부터 최초로 공인받은 조선인 독립 무장 부대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부터 40년대까지 관내지역 국민당 관할지역과 적구 지역에서 국민혁명군과 함께 군사활동을 벌인다.

조선의용대의 항일활동은 대체로 무한시기, 계림시기, 중경시기로 나누어 보고 있다. 중일전쟁이 격화되던 시기 중경으로 본부를 옮긴 조선의용대는 1941년 3월부터 6월까지 낙양에 결집했던 제1,3 혼성부대와 전위동맹 계열 제2지대가 무장항일전선 활동을 위해 화북지역으로 넘어간다.[3]

무장활동을 위한 주력부대는 국민당 정부 관할 지역을 벗어나 화북지방의 연안으로 가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활동하고 있는 태항산 일대로 넘어갔다. 이들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 부르며 1942년 7월 이후 조선독립동맹 산하 당군이 되기 전까지 주체적 성격을 띠며 조선의용대의 분대 역할을 수행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독립동맹'이 결성에 모체가 되며, 북한 연안파의 뿌리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2년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해방이후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에 일익을 담당하여 그 공으로 조선족 자치구를 하사받았고 이후 김일성의 요청으로 북한에 보내져 '조선인민군'의 주력으로서 남침의 선봉이 되기도 했다.[4][5]

조선의용대의 화북진출 이후 김원봉 휘하 조선의용대 대본부와 각 지대 잔존 병력 50여명의 병력은 국민당의 지원 문제와 관내지역 독립운동 단체 일원화 움직임에 따른 입지의 불리함 그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중일전쟁 상황과 함께 세계정세의 급변화로 인해 불관용 원칙을 고수하던 기존의 입장을 벗어던지고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관내지역에 존재하는 조선의용대 병력은 한국광복군에 재편성된다.

2. 창설

일본인 반전 운동가이자 공산당원인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6]가 조선 의용대 조직 계획 방안을 작성해서 국제 문제 연구소장 왕봉생, 정치 부장 진성, 부부장 저우언라이와 장여생, 정치부 제2청장 강택,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 및 군사 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의 동의를 얻어냈다.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 부대를 창설하여 조직 중인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의 중앙 집행 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조선 의용대는 국제 의용군이라고도 불렸다.

김원봉은 1926년에 황포 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교해 졸업하고 국민당군 장교 신분으로 장제스의 북벌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지휘관 김원봉의 이러한 경력으로 조선 의용대는 장제스의 국민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국민당의 방첩 정보 기관 남의사의 지원을 받게 된다.[7]

국민당군과 연합 활동을 하던 조선의용대는 전 대원이 장교급 교육을 받은 고급 병력인 점을 활용하여 국민혁명군과 함께 연합활동을 했으며 주로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 포로 심문, 전장교란, 문서번역, 격문살포, 전투보조 역할 등을 담당했다.

3. 분리

여러 복합적 원인이 존재하지만 1차적 원인은 조선의용대가 관내지역 최초 군사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주된 활동이 전쟁 상황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무장활동을 할 수 없던 당시 조선의용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데 있다. 대륙 본토에는 조선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규모를 확대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화북지역 더 나아가 동북지역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해당 지역에서 싸우고 있는 조선인들에 대한 소식을 통해 이들과 연합하여 활동하거나 그들처럼 해당 지역을 발판삼아 전진기지를 건설, 최종에는 국내로 진공하고자 하는 조선의용대 본부의 정세판단이 있었다. 또한 중진간부들이 육성한 젊은 대원들의 상당수는 국민당군의 소극적인 조선의용대원의 활용 행태와 전방공작활동만으로 얻을 수 없는 주체적 부대운용의 한계를 지적하며 무장활동을 통한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원하였다. 마지막으로 국공합작이 삐걱거리던 40년대에 좌파적 성향을 띄고 있던 조선의용대 내 전위동맹 계열 대원들과 한빈을 비롯한 공산주의 성향 대원들의 신변의 위협 또한 화북으로의 이동에 영향을 준다.

정리하자면 이미 철 지난 연구 내용이 반영된 개설서 내용과 다르게 조선의용대는 39년도부터 김원봉과 군 중진간부들 사이에서 이미 동북 지역까지의 진출을 염두에 둔 화북진출을 논하고 있었고, 조선의용대의 관내지역 활동의 한계 봉착, 대원들의 무장투쟁활동에 대한 염원, 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어나는 국공합작의 와해분위기로 인한 좌익계열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화북진출 희망 등 복합적 원인에 의해 주체적으로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진출한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조선 의용대 화북지대는 김원봉과 조선민족전선연맹 차원에서 오래전부터 논의된 조선의용대 내 항일활동의 단계적 수순으로 보고 있으며 화북의 팔로군에 합류한 이유에 대해선 여러 복합적 원인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낙양에서 집결했을 때 향후 활동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결정한 임시 목적지일 것으로 보고 있다. 태항산으로 들어간 이후 조선의용군으로 중경에 있는 조선의용대 본대와의 분리과정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인 것으로 보고 있다.

3.1. 화북 이동과 조선의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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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본대 잔류와 한국광복군

한편 대다수가 화북으로 이동하면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본대에는 대략 100여 명 정도가 잔류하였다. 이들은 중국 국민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1942년 김구가 이끌던 중경의 임시정부에 합류,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되었다. 이 과정은 조선민족혁명당 항목에 자세히 기술되어있다.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이끌었던 김원봉은 임시정부 소속으로 활동하게 되었지만, 우익 진영이 대다수인 임시정부 요인들과 갈등을 일으키며 독자적인 활동을 고집했고, 임시의정원 내에서 의석 수를 두고 갈등을 빛기도 했다. 물론 항일과 광복의 대의가 있는만큼, 광복군 합류과정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1지대 편입 이후 각각 노하구의 1구대, 강소성의 2구대, 후난의 3구대 등으로 편제되어 초모와 공작업무를 담당했으며, 김원봉과 인도주둔 영국군총사령과 매켄지(Colin Mackenzie) 사이에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朝鮮民族軍宣傳聯絡隊) 파견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이후 "인면전구공작대"라 부르는 인도방면 광복군 파견부대의 초석이되었다.

해방 후에 귀국하여 활발한 좌익 활동을 펼쳤으나, 미군정과 우파 세력이 강한 남한에서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48년 남북협상회의 참석차 북한을 방문한 이후 그대로 잔류하였다. 조선 의용대 대장 김원봉 역시 8월 종파사건 이후, 1950년대 후반 임정 출신 납북자들과 같이 중립화 통일안을 주장하다 숙청당했다.

4. 결말

일제 강점기 말기 독립 운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단체이지만, 해방이후 분열 속에서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이 남북으로 흩어졌고, 그나마도 모두 버림받은 비운의 단체이다.[8] 북으로 간 사람들은 초반에 연안파로서 중요한 정치세력을 형성했으나, 김일성이 권력을 강화하며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숙청당했고, 살아남은 일부가 중국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마쳤다. 한편 남한에서는 남북분단6.25 전쟁으로 인해 조선의용군이 '침략자 빨갱이 단체'로 매장당하면서 조선의용대 경력을 꺼내는 것 자체가 한동안 금기시되었다.[9]

조선의용대가 주둔하던 유적들이 남북한의 외면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 입장에서는 6.25 전쟁 당시 동족상잔의 비극에 앞장선 침략자들이고 북한 입장에서도 이미 숙청시킨 연안파나 김원봉 일파의 세력이다보니 쉬쉬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위 사진에 나온 한글 구호도 마을 사람들의 선의로 간신히 보존되고 있는 상황이다.

5. 관련 기사

6. 출신 인물

7. 관련 문서



[1] '한국과 중국 두 민족이 연합하여 일어나 일본 강도를 타도하자!'라는 내용이다.[2] 현재의 우한(武漢)이다.[3]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달리 학계에선 조선의용대는 분열한 것이 아닌 의도를 가지고 이르면 39년부터 조선의용대 중추세력부터 화북지역 진출을 계획적으로 준비하고 있음에 동의하고 있다.[4] 대표적 주력부대는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이 있으며 조선의용대의 구대장을 역임했던 박효삼이 인민군 9사단장으로 남침의 선봉을 선다. 이후에도 조선족은 중공군의 참전 및 한반도 점령 시도의 길잡이로서 많이 투입되어 중공군의 서울 재점령에 많은 기여를 했다. 휴전 이후에는 조선족 자치구는 조선족 자치주로 격하되었으며 조선족 마을에서는 매년 이를 항미원조로 보고 기념행사를 열기도 한다.[5] 씁쓸하게도 바로 이 남침에서 주력으로 활약한 사실 때문에 이들의 독립운동은 남한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남한 입장에서는 6.25 전쟁 당시 선봉에 섰던 대표 전범들이니 만큼 섣불리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김원봉 역시 6.25 전쟁에서 전범 지위에 오를 만큼 나름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 탓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북한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냐면 훗날 연안파를 구성했다가 김일성에게 죄다 숙청당했다.[6] 1933년 5월에는 일본 전투적 무신론자 동맹에 참가하였다. 1934년에 검거되었으나, 전향을 강요하는 문서에 서명하여 출옥하였다. 그러나, 1937년 3월에 중화민국상하이시로 망명하였으며, 상하이 함락 후에는 홍콩베트남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무한에서 활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을 폭로하는데 참여했다.[7] 훗날 김원봉은 북한 정권에 참여했을 때 이 전력 때문에 입지가 매우 좁아졌다.[8] 앞서 말한 김두봉, 최창익, 김무정, 허정숙 등은 북을 택했지만 김학철, 정철수처럼 중국에 잔류한 사람도 있었고, 박시창, 차일혁, 이진영처럼 남쪽을 선택해 국군이나 경찰에 복무한 자들도 있었다.[9] 물론 모든 이들이 묻힌 건 아닌데 박시창과 이진영은 사후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으며 차일혁은 독립유공자 서훈도 못되고 살아생전 경찰 한직만 도는 등 대우를 못 받긴 했지만 사후에 6.25 전쟁에서의 활약상들이 알려지며 전쟁 영웅으로서 나름 대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