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의용군은 조선의용대에서 갈라져 나온 군대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개편된 것이다.2. 창설
화북으로 이동한 다수 대원들은 김원봉이 임명한 제1,3 혼성지대 지대장 박효삼과 민족혁명당 계열 간부들의 인솔하에 북상했다.이들은 최창익의 지도하에 이미 연안에 자리하고 있던 화북조선독립동맹원 인도 하에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 관할 구역 태항산으로 향하게 된다.[1]
이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 의용군의 주력부대가 모여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되었다. 지대장은 박효삼이었고 그 뒤 화북지대는 타이항 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하였다.
1942년 7월 10일에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팔로군 산하에서 활동할 당시 이들의 병력은 최대 8,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2][3] 일제 강점기 동안 존재했던 수많은 조선인 무장 부대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4]
3. 활동
조선 의용군은 화베이 지역 각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팔로군과 협력해 일본군 점령 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해 선전⋅첩보활동을 했다.또 중국인의 항전 의식을 일깨우는 전람회를 개최하고 민중의 팔로군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1942년 11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열어 군사⋅정치 교육을 실시하여 간부를 양성했고, 척박한 토지에 밭을 일궈 농산물을 자급자족하는 생산 활동도 전개했다.
1943년 6월에는 팔로군과 함께 타이항 산 곳곳에서 일본군 침공에 대한 반격을 전개해 용맹을 떨쳤다.
중국 산시성(山西省) 윈터우디춘(운두저촌, 雲頭低村)에 남아있는 조선 의용대의 한글 구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데, 첫번째는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 의용군을 찾아 오시오'라는 내용이고, 두번째는 '강제병 끌려나온 동포들 팔로군이 있는 곳마다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늘로 향하여 쏘시오' 라는 내용이다.[5]
조선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옌안 근교 뤄자핑에 머물렀다.
이후 1944년부터 화베이 지역의 도시와 농촌, 그리고 만주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조직 결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그 결과 여러 도시에 독립 동맹의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의용군과 독립 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의용군에 입대했다.
또 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1944년 9월 화북조선청년군사정치간부학교, 10월 조선군정학교 산동분교, 1945년 2월 연안 조선군사정치학교[6] 등을 개교하여 독립운동의 간부를 양성하였는데, 1945년 5월에는 그 수가 총 850여 명에 달했다.
4. 해방 이후
1945년 8월 중국공산당은 소련군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무주공산이 된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팔로군을 만주로 진격시켰고 팔로군과 협력하던 조선의용군 역시 조선 해방을 위해 압록강으로 향했다.그러나 조선의용군이 압록강을 넘기 전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고,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정은 압록강을 넘어온 조선의용군을 인정하지 않고 무장해제한 후 만주로 돌려보냈다.
김두봉, 최창익, 김무정 등 조선의용군 고위직은 1945년 12월 개인 자격으로 북한으로 귀국, 연안파라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만주에 남은 조선의용군은 아예 중국공산당 휘하로 편입되어 현지 조선인 청년들을 충원, 중국 인민해방군 제164사단, 제166사단, 독립15사단으로 확대·개편되었다.
이후 이들은 제2차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국민혁명군과 교전하였다.
5. 6.25 전쟁에 참여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을 창설한 김일성은 남침을 위한 전력 증강을 위해 인민해방군 산하 조선인 부대의 귀국을 마오쩌둥에게 지속적으로 요청하였고, 국공내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9년 5월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 산하 조선인 부대의 귀국을 허용한다.그리하여 1949년 10월부터 1950년 4월까지 위의 제164사단, 제166사단, 독립15사단의 3개 사단을 비롯해 선양 혼성단, 철도병단 조선족 부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생 등 약 50,000여 명의 조선인 병력이 북한에 입국,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주력으로 남침에 앞장섰으며 개전 당시 조선인민군 보병 21개 연대 중 10개 연대가 인민해방군 출신 조선인 부대였을 정도였다.
6. 6.25 전쟁 이후
그러나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연안파 세력은 모두 몰락하였으며, 남한에서도 당연히 동족상잔에 앞장선 빨갱이들로 버림받으면서 남북 모두에게 잊힌 존재가 되었다.[1] 참고로 이때는 2차 국공합작 시기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협력 관계였다.[2] 1938년 3월 15일 기준. 제1연대 1,301명 제2연대 1,709명 제3연대 1,608명 등을 포함하여 총 인원 8,274명. (출처: 특별연구 조선의용군, 염인호,1994)[3] 일제 패망할 당시에는 1,000명 정도 (출처: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비교 연구, 김광재, 2006)[4] 1920년대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끌었던 만주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에서 창설했던 대한독립군단, 1929년 양세봉, 김학규 장군의 조선혁명군, 1930년대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이 이끌었던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공산주의 계열 유격대, 1940년대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 이끌었던 임시 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 그 외 재미 교포들이 조직했던 박용만(1881)의 국민 군단 등등,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던 수많은 무장 부대들 중에서 이만한 규모의 조선인 군사 단체는 없었다. 참고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연이은 승전 이후 만주 지역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들이 일제의 토벌을 피해서 러시아 연해주에 집결했을때 병력이 3,500여명이었다.[5] 1940년대 초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에 징집된 조선인 병사를 상대로 선전전을 펼치며 곳곳에 한글 구호를 남겼다.[6] 교장은 김두봉, 부교장은 박일우, 학도대장은 박효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