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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전지공작대 韓僑戰地工作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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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전지공작대 전신 한족동맹 본부 | |
<colbgcolor=#306><colcolor=#fff> 설립 | 1943년 ([age(1943-06-30)]주년) |
중화민국 안후이성 남부 (現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남부 마오린(茂林)) | |
해체 | 1946년 3월 4일 |
정부 |
|
지휘체계 | 유기석 (대장) 정봉주 (부대장/정치지도원) |
병력 | 50여 명 (1944년) 150여 명 (1945년) |
참전 | 중일전쟁 |
지원 국가 |
|
적대 국가 |
|
전신 |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강남분대) |
1. 개요
한교전지공작대(韓僑戰地工作隊, The 3rd District Korean Operation Unit.)는 유기석이 안후이성 남부(晥南) 마오린(茂林)[1]에서 일본 점령지 한인 청년들과 합작을 거쳐 조직한 단체로 책반공작(策反工作)을 중심 임무로 하였다.광복 이전, 한교(韓僑)는 중국 내 거주하는 조선(朝鮮)교민을 말한다.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조선(朝鮮)은 한동안 '한국(韓國)'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韓國)을 멸망시킨 후에 조선(朝鮮)을 통치하는 시기에 다시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을 회복했다. 일제강점기때 조선(朝鮮)은 큐슈, 혼슈처럼 단지 일본의 한 지명일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인은 일본인이 부르던 '조센진(朝鮮人)'이라는 호칭을 듣기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는 '한국인'이라고 불렀다. 한교(韓僑)라는 칭호의 기원이다.[2]
2. 성립 배경
1940년 4월 2일 쉐옌증, 왕잉셩 등이 국민당 중앙조사통계국에서 한국독립당(1940년)의 김구, 유동열, 엄항섭, 민족혁명당의 이소민, 주세민 등과 함께 「조선혁명운동 원조방안 담화회」를 개최하고 광복진선과 민족혁명당은 병존하며, 황허 이남 장강 이북은 광복진선의 공작지구, 장강 이남은 민족혁명당 공작지구로 구분한다는 조선혁명운동 판법을 결정했다.[3] 즉, 1940년 4월에 이르러 중국국민당은 광복진선(한국독립당(1940년))과 민족혁명당의 병존,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조선의용대의 병립을 결정한 것이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한 직후인 1941년 5~6월 한국광복군 측은 조선의용대의 공산주의적 색채와 북상 과정에 대한 보고를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에 전달했으며, 이 직후에 한국광복군에 대한 중국 측의 우호적 평가가 고조되었다. 1941년 조선의용대가 화북지방으로 이탈하여 팔로군 지역으로 가면서 충칭 중국국민당이 유일하게 인정했던 한인 무장부대였던 조선의용대의 위상이 하락하고, 김구를 지원을 받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대한 후대가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중국국민당이 제 1차 반공고조기(1939.12~1940.3)에 접어들면서, 국공합작 대신 중국공산당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중국국민당의 반공활동은 환남사변(1941.1)으로 폭발했으며,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이 적지 않던 조선의용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고조된 반면 반공적 입장이 확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우대한 결과 한국광복군 창설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또한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른 일련의 사태가 위기 의식을 고조시켜,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으로 북상하게 된 것이다. 중국국민당의 지원과 지지를 둘러싼 김구, 김원봉의 대립과 대결은 중일전쟁과 환남사변의 시대 상황에 따라 출렁거렸던 것이다.
1943년 7월,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 이소민 구대장과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 김문호 분대장의 파벌투쟁으로 인하여 서로 마찰을 벌여 초모공작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되자 정화암의 주선에 의하여 유기석이 중재에 나서게 되면서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로 통합이 되어 유기석 대장이 된다.
내가 젠양(建陽)에 도착하기 전부터 파견되어 있었던 김문호는 중국 관청이나 중국군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소민과 알력도 알력이려니와 그 성과도 별로 없었다.[4]
1943년 나는 쑤베이(蘇北)[5]으로부터 완난(晥南) 툰시(屯溪)를 거쳐 장시셩 상라오(上饒)에 도착했다. 당시 상라오(上饒)에 있던 한국 동포는 십 몇 명이 있었으며, 푸젠 젠양(建陽)의 조선인은 7~8명이 있었다. 상라오(上饒) 한국동포는 한국광복군 제 1지대 2구대로 편성되었다. 젠양(建陽)의 한국 동포는 광복군 제 2지대 제 3분대로 편성되었다. 이렇게 되었는데, 충칭(重慶)방면의 이 군대 제 1, 2지대가 파벌투쟁으로 말미암아 합작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지방의 구대와 분대가 각각 배경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 마찰을 일으키고 모든 사업은 다 멈추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소위 마찰이나 투쟁은 역시 이소민 구대장과 김문호 분대장 두 사람 사이에 반목에 불과하며, 그들의 지도 아래 일반 한국 동포 대원들은 이유없이 두 적대적인 조합으로 분열되었다. 나는 상라오(上饒)로 간 이후에 그들과 함께 있었고, 두 곳의 한국 동포의 연합을 위하여 몇 개월 동안 작업을 벌였으며, 후에 또 젠양(建陽)에 가서 상당히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1944년 젠양(建陽)과 상라오(上饒) 두 지역의 한국 동포는 옌샨(鉛山)으로 집중되었는데 사업상으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하나의 공작대를 조직했으며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라고 명명했다. 원래의 광복군의 한 구대와 한 분대는 잠시 활동을 멈추기로 결정하고, 모든 성원을 다시 공작대에 편입하여 내가 부대장의 직무를 맡았다. [6]
1944년 젠양(建陽)과 상라오(上饒) 두 지역의 한국 동포는 옌샨(鉛山)으로 집중되었는데 사업상으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하나의 공작대를 조직했으며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라고 명명했다. 원래의 광복군의 한 구대와 한 분대는 잠시 활동을 멈추기로 결정하고, 모든 성원을 다시 공작대에 편입하여 내가 부대장의 직무를 맡았다. [6]
3. 아나키즘
아나키스트들은 원칙적으로 군대를 부정한다. 군대는 구성원의 자주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대표적인 상명하달식 조직이므로 아나키즘 조직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들이 군대를 인정하는 경우는 자위를 위한 군대에 한정될 뿐이다. 이들 군대는 일본제국주의에 전면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다.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무장력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대표적이다. 정화암의 한·중 합동유격대(韓·中合洞遊擊隊)→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와 유기석의 한교전지공작대(韓僑戰地工作隊)가 조직되어 군사활동을 전개했다. [7]4. 출신
이소민과 김문호간 갈등을 정화암, 유기석의 중재로 서로 화해시키고 부대원들을 유동적으로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정화암의 전시공작대와 유기석의 한교전지공작대도 중국 제 3전구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중국 국민혁명군, 충의구국군과 제 1정진유격종대사령부 그리고 미 제 5공군 파견대, 미해군 소속의 중미특종기술연구소(SACO)는 충의구국군과 연계점이 있다.
주로 일본군 점령지(남경, 상해, 개봉, 서주 등)에 있었던 한적사병, 군속[8], 의사[9], 상인[10], 노동자[11], 유학생[* 송지영(宋志英)·이일범(李一凡)·조일문(趙一文)·박철원(朴哲遠)·이정선(李正善)[·신영묵(申榮默)·박익득(朴益得)], 기독교 전도사, 부녀[12], 아동[13]으로 구성되어있었다고 한다. [14]
5. 주요 활동 지역
주요 활동지역은 안후이성남부(晥南) 징현(涇縣)과 마오린(茂林)을 본부를 두고 주변지역을 중점적으로 활동했다.주로 함락지구의 한국 동포와 일본군 안의 한국인 사병을 대상으로 침략전쟁에 반대할 것을 선전하고, 이들의 탈출을 도모하는 것을 중심임무로 하였다. [15][16]
6. 한족동맹(韓族同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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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7. 난징중앙대학 사건(일명 : 송지영 사건)
난징중앙대학은 각지의 우수 학생 모집하고 입학생들의 경제적 부담 면제를 위한 조치로서 한인 유학생들의 학비를 비롯한 기본적 비용들이 면제하고 장학금을 지불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입학지원자가 몰려 한 때 입학생 수가 천여 명에 달하였다.[17]1940년대 국립중앙대학 출판물 중, 한인 입학생/재학생 기록[18]
성명 | 적관 | 전공학과 | 입/재학기록 | 졸업시기 | 본명 |
리게카이(李圭海) | 조선 | 문학원 중국문학계 | 1940.9. | 이규해 | |
리게타이(李敬泰) | 일본 | 법상학원 정경, 경제계 | 1940.9. | 이일범 | |
야마모토 테츠(山本哲) | 조선 | 농학원 농학계 | 1941.2. | 박철원 | |
야마모토 시에이(山本志泳) | 조선 | 문학원 중국문학계 | 1941.9. | 송지영 | |
나카하라 스스무 (中原進) | 일본 | 법상학원 | 1942.2. | 조일문 | |
미하라 세이이치(三原誠一) | 조선 | 보습반 | 1942.2. | ||
야나기 교로쿠(柳享祿) | 조선 | 보습반 | 1942.2. | 유향록 | |
키야마 후쿠로쿠(木山福祿) | 조선 | 법상학원 정경, 경제계 | 1944.5. | 이복록 | |
다나카 준이치(中田順一) | 조선 선천 | 의학원 | 1944.5. | 1945.6. | 정영호 |
츠키에 토오루(月江徹) | 조선 | 의학원 | 1944.5. |
그러나 전쟁 국면에 타지로 전학하거나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또 학생들 중에는 민족의식과 반일의식에 고무되어 충칭(重慶)이나 옌안(延安)으로 향하는 학생들도 점차 증가했다. 여기에 중국공산당 지하당원의 학생단체 침투와 세력 장악을 위한 활동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의 집단적 행동은 총장 퇴출 운동(1943.5)과 아편 반대 소각 시위(1943.12) 등을 통해 표출되었다.
1943년 5월, 난징중앙대학 학생운동은 교장 판중윈(樊仲雲)의 퇴출을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가 학생들의 식비를 착복하고 허술한 식사를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31일 새벽, 천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식당에 집합하여 대오를 만들고 이허로(頤和路) 왕징웨이(汪精衛) 공관에 이르러 부패 교장의 파면을 청원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국 학생들은 불행한 사태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미리 어떤 한 한국학생과 연락을 취하여 일본군 헌병대 쪽과 소통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왕징웨이(汪精衛) 정부는 학생들과의 담판을 거쳐 교장을 파면하고 동시에 학생 간부들을 체포하고 학생운동을 진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19]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고 적관을 일본으로 기록하기도 했던 한인 유학생들은 불안과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임시정부에서 김병호 특파원을 난징으로 파견
고중민[20]은 고등계 형사로 있을 때 이른 바, 사상범으로 글려 들어온 학생을 감싸주었다가 일본 경찰에게 몰려 쫒겨났는데, 그 후 국내를 빠져나와 광복진영에 합류한 것이었다. 고중민은 자신의 과거 행적을 숨김없이 밝혀 우리 사이에 오해가 풀리고 난 후 충칭에서 1년 남짓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을 도와주며 지내다가 국내로 들어가 지하활동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국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국내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서도 국내의 사정을 잘 알고 활동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으므로 그의 자원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임정에서는 여러 해만에 국내에 사람을 밀파하게 되었다.
고중민은 임정의 밀령을 받고 충칭을 떠나 중국국민당의 지하 연락망을 통해 난징으로 갔다. 그 무렵 난징에는 일본 괴뢰정부가 들어서 있던 때였고, 흔히들 그 정부를 가르켜 "난징 정부"라고 불렀다. 그 곳 난징에는 괴뢰정부와의 교섭으로 교환학생들이 여러 명 유학하고 있었는데, 그 중 진링대학(金陵大學)(진링은 난징의 옛 이름)에 한인 학생들이 여럿 유학을 와 있던 참이었다.
그가 난징으로 간 것은 이들 유학생을 포섭하여 광복군에 입대시키기 위해서였다. 김병호(金炳豪)라는 자기 본명을 숨기고 고중민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그는 여러 유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고중민의 유학생 포섭 공작은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진행되는 것이었으므로 위험하기로 따진다면 거의 목숨을 걸고 활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포섭공작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즈음 예상되었던 위험이 현실로 나타났다. 완벽하게 포섭되었으리라고 믿었던 한 학생이 동료들을 등지고 일본 헌병에 밀고해버린 것이다. 고중민의 포섭 공작은 샅샅이 탄로났고, 그 공작에 포섭되었던 유학생 다수도 전원 일본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극비로 추진되는 포섭활동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외부 보안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채 내부 동태관리에 소흘하였던 것이 큰 불찰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인 교수 한 명이 학생들을 옹호하고 나섰고 수감되었던 학생들의 신분을 참작한다는 일본 헌병대의 배려(?)로 학생들만은 전원 석방되었다.
다만, 고중민과 유학생 송지영은 유죄 판결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 근처 한 형무소에 투옥되고 말았다. 송지영은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다가 진링대학으로 유학을 와 있을 때였는데,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고, 포섭공작에 깊게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중민과 함께 주동자로 판결이 났던 것이다.
그 후, 고중민과 송지영은 일본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고중민은 귀국 후, 김중민이라고 개명했으며,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행동했는데,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암살 계획에 관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그 곳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어서 일단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일본 고등계 형사로 있다가 광복진영으로 뛰어든 일, 자신의 아름답지 않은 과거를 과감하게 밝히고 자청해서 위험천만한 포섭공작을 맡았던 일, 출옥 후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투쟁한 일 등 그의 행적이 그의 성품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그와 함께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사람들을 4.19혁명 후 모두 출옥했는데, 고중민은 단명한 탓인지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는 것도 못보고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21]
국내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국내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서도 국내의 사정을 잘 알고 활동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으므로 그의 자원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임정에서는 여러 해만에 국내에 사람을 밀파하게 되었다.
고중민은 임정의 밀령을 받고 충칭을 떠나 중국국민당의 지하 연락망을 통해 난징으로 갔다. 그 무렵 난징에는 일본 괴뢰정부가 들어서 있던 때였고, 흔히들 그 정부를 가르켜 "난징 정부"라고 불렀다. 그 곳 난징에는 괴뢰정부와의 교섭으로 교환학생들이 여러 명 유학하고 있었는데, 그 중 진링대학(金陵大學)(진링은 난징의 옛 이름)에 한인 학생들이 여럿 유학을 와 있던 참이었다.
그가 난징으로 간 것은 이들 유학생을 포섭하여 광복군에 입대시키기 위해서였다. 김병호(金炳豪)라는 자기 본명을 숨기고 고중민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그는 여러 유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고중민의 유학생 포섭 공작은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진행되는 것이었으므로 위험하기로 따진다면 거의 목숨을 걸고 활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포섭공작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즈음 예상되었던 위험이 현실로 나타났다. 완벽하게 포섭되었으리라고 믿었던 한 학생이 동료들을 등지고 일본 헌병에 밀고해버린 것이다. 고중민의 포섭 공작은 샅샅이 탄로났고, 그 공작에 포섭되었던 유학생 다수도 전원 일본 헌병대에 수감되었다.
극비로 추진되는 포섭활동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외부 보안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채 내부 동태관리에 소흘하였던 것이 큰 불찰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일본인 교수 한 명이 학생들을 옹호하고 나섰고 수감되었던 학생들의 신분을 참작한다는 일본 헌병대의 배려(?)로 학생들만은 전원 석방되었다.
다만, 고중민과 유학생 송지영은 유죄 판결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 근처 한 형무소에 투옥되고 말았다. 송지영은 「동아일보」의 기자로 있다가 진링대학으로 유학을 와 있을 때였는데,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고, 포섭공작에 깊게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중민과 함께 주동자로 판결이 났던 것이다.
그 후, 고중민과 송지영은 일본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 고중민은 귀국 후, 김중민이라고 개명했으며,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여 행동했는데,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암살 계획에 관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그 곳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그는 성품이 활달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어서 일단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었다. 일본 고등계 형사로 있다가 광복진영으로 뛰어든 일, 자신의 아름답지 않은 과거를 과감하게 밝히고 자청해서 위험천만한 포섭공작을 맡았던 일, 출옥 후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투쟁한 일 등 그의 행적이 그의 성품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그와 함께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사람들을 4.19혁명 후 모두 출옥했는데, 고중민은 단명한 탓인지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는 것도 못보고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21]
김병호, 김구, 박찬익 |
나를 찾아 온 그는 경기도 용인 태생으로 이름은 김중민(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옥사) 내가 그 외진 절간에 기숙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처음 그가 자기의 내력을 밝혔을 때 나는 적지 않아 놀랐으나 한 편 반갑기 한량 없었다.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고 나왔노라는 한 마디에 나는 놀라면서도 가슴은 몹시 설레었다. 방학이 끝나면 결행하기로 한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 이보다 쉽게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 기뻣다. 그러나 김중민 형은 나의 고백을 귀담아 듣고 나더니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우리들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일제의 야수적인 전쟁이 마지막 고비에 이른 때에 쓰촨성으로 가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나 더 급한 일을 상하이 난징 지구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 자신은 중요한 임무를 맡아 국내로 들어가는 길이니 나더러 상하이, 난징지구의 공작임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안팎의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데는 벅찬 감격과 아울러 피가 용솟음 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결히 승낙하였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말을 되뇌이면서 속 한국독립당(1940년)의 강령이며 규약등을 외워 주고 나는 그대로 받아 썼다. 그래서 나는 한국독립당(1940년)의 비밀당원으로 가입을 한 셈이고 상하이와 난징 지구에서 지하공작의 책임을 맡게 되었던 것이었다.[22]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고 나왔노라는 한 마디에 나는 놀라면서도 가슴은 몹시 설레었다. 방학이 끝나면 결행하기로 한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 이보다 쉽게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 기뻣다. 그러나 김중민 형은 나의 고백을 귀담아 듣고 나더니 머리를 가볍게 저으며 우리들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일제의 야수적인 전쟁이 마지막 고비에 이른 때에 쓰촨성으로 가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나 더 급한 일을 상하이 난징 지구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 자신은 중요한 임무를 맡아 국내로 들어가는 길이니 나더러 상하이, 난징지구의 공작임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안팎의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데는 벅찬 감격과 아울러 피가 용솟음 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결히 승낙하였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는 말을 되뇌이면서 속 한국독립당(1940년)의 강령이며 규약등을 외워 주고 나는 그대로 받아 썼다. 그래서 나는 한국독립당(1940년)의 비밀당원으로 가입을 한 셈이고 상하이와 난징 지구에서 지하공작의 책임을 맡게 되었던 것이었다.[22]
1943년 우리가 대학 3학년 때였다. 일단의 일본군경이 송지영 형의 숙소를 덮쳤다. 그를 붙잡아가고 방안의 모든 것을 압수해 갔다. 나는 금시 짚이는 데가 있었다. 송형이 잡혀가기 한 달 전 충칭(重慶)의 한국독립당(1940년)에서 밀파된 김중민(金仲民)씨가 난징(南京)에 잠입하여 그를 만났다. 며칠 뒤 송형은 나에게 그 사실을 일러 주면서, 그를 한 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내주의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에 보자고 했다. 송형이 끌려간 지 닷새만에 일본 영사관 경찰이 내 하숙방에 들이닥쳤다. 나는 갖은 고문과 협박 끝에 열흘만에 풀려났다. 김중민 씨를 만나지도 못한 내가 단지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그토록 심한 곤욕을 당하였는데, 김중민 씨나 송형은 얼마나 모진 고통을 당했겠는가?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 후 우리는 멀리 떨어졌다. 송형은 일본 나가사키(長崎)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나는 중국 장쑤성(江蘇), 장시성(江西) 일대에서 한국광복군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나는 푸젠성(福建省) 장팅(長汀) 비행장에서 충칭행 비행기를 기다렸다가 적의 항복 소식을 들었고 송형은 나가사키 감옥에서 원자탄 세례를 받고 해방을 맞이했다.[23]
그 후 우리는 멀리 떨어졌다. 송형은 일본 나가사키(長崎)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나는 중국 장쑤성(江蘇), 장시성(江西) 일대에서 한국광복군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나는 푸젠성(福建省) 장팅(長汀) 비행장에서 충칭행 비행기를 기다렸다가 적의 항복 소식을 들었고 송형은 나가사키 감옥에서 원자탄 세례를 받고 해방을 맞이했다.[23]
그때가 1943년 8월 중순이었다.(중략)내가 상하이에 온 것을 알고 찾아와서 박철원, 송지영 두 형이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밀파된 김중민(金仲民)을 1943년 6월 중순 난징(南京)에서 만나 반일지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동지를 규합하기로 모의한 일이 탄로가 나서 송지영 형은 상하이에서, 김중민은 난징에서 체포되어 영사관에 구금되어 있다고 전했다.
사건의 발단은 송지영 형이 상하이에 와서 황포군관학교 출신 전향자 최상교를 찾아가서 충칭임시정부에서 밀파된 김중민과 모의한 내용 일체를 털어놓고 말한 다음 이제부터 조국광복운동에 가담하면 전과(前科) 일체를 불문에 부치고 용서해 준다고 하니 자기와 같이 일을 하자고 종용했다고 한다. 최상교는 송지영의 말을 듣고 나서 일언반구 대꾸도 않고 있었다고 한다. 송지영이 간다고 일어나자 지금 어디 갈거냐고 묻더란다. 유인섭(柳仁燮)형을 만나러 가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냐고 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난 후 최상교는 일본영사관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송지영 형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유인섭 댁을 찾아가 문전에서 부저를 누르고 있다가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송지영형이 끌려가는걸 유인섭은 때마침 현관문을 열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24]
사건의 발단은 송지영 형이 상하이에 와서 황포군관학교 출신 전향자 최상교를 찾아가서 충칭임시정부에서 밀파된 김중민과 모의한 내용 일체를 털어놓고 말한 다음 이제부터 조국광복운동에 가담하면 전과(前科) 일체를 불문에 부치고 용서해 준다고 하니 자기와 같이 일을 하자고 종용했다고 한다. 최상교는 송지영의 말을 듣고 나서 일언반구 대꾸도 않고 있었다고 한다. 송지영이 간다고 일어나자 지금 어디 갈거냐고 묻더란다. 유인섭(柳仁燮)형을 만나러 가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냐고 하고 작별인사를 하고 난 후 최상교는 일본영사관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송지영 형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유인섭 댁을 찾아가 문전에서 부저를 누르고 있다가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송지영형이 끌려가는걸 유인섭은 때마침 현관문을 열다가 그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24]
김병호(金柄豪)가 상하이(上海)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므로써 송지영도 임시정부의 비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송지영도 상하이에서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난징(南京)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영사관 경찰에서는 이같은 사태를 중대시하고 난징중앙대학에 재학중이던 모든 한국인 학생의 숙소를 수색하고 이들의 신변을 압축하였다.[25] 만약 일제 헌병과 경찰의 행동 앞에서 결연한 행동의 선택이 없는 한, 모든 한국 학생은 송지영(宋志英)의 뒤를 이어 구속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한국 유학생들은 일제의 쇠사슬보다 죽음을 무릅쓴 탈출과 항일투쟁에의 길을 선택하였다.[26]
박철원(朴哲遠)으로부터 난징 김병호(金柄豪)/송지영(宋志英) 사건 발생의 소식을 상세하게 전해들은 유기석은 왕진 의사로 위장하고 난징(南京)에 잠입한다.[27] 지하조직망의 재정비, 혁명 동지와의 연락 및 초모 공작을 위하여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난징(南京)으로 잠입, 이일범·조일문· 유익배(柳益培)·김해일(金海一) 등과 비밀히 접선하여 안후이성남부(晥南) 징현(逕縣)으로 탈출로를 알려주었다.
1944년 4월 초부터 일본군 점령지에 산재투쟁하던 새로운 동지의 포섭과 지하 조직망 재건, 그리고 초모 공작등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944년 3월 가족동반으로 무기를 휴대하고 화중일대에서 지하공작중이던 정봉주, 정영, 정영호, 왕하이칭(王海靑), 피안창주(片昌柱), 정희섭, 안병성, 유익배, 아동 이근[28]과 같이 중앙군 유기석 소교의 안내로 조국 독립쟁취를 절규하면서 일본군점령지구를 대거 탈출하여 제3전구 광복군 징모 제3분처와 합류하고 대적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29]
중앙 태극기 한족동맹 대장 유기석을 기점으로 우측으로 부대장 정봉주, 정영호, 정영, 좌측에 앉아있는 이일범 |
1944년 10월경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서 광복군 제 3지대 장호강(張虎崗) 등과 함께 지하 공작을 벌여오던 유익배(柳益培)·정희섭(鄭熙燮)·안병성(安秉星), 그리고 화중(華中) 각 지구에서 공작하던 정영호(鄭英昊)·중국인 피안창주(片昌柱)·왕하이칭(王海靑) 등 10여 명이 왜군 점령 지역을 탈출하여 제 3전구 지역인 마오린(茂林)으로 집결 합류하였다.
유기석 대장이 알려준 이일범, 조일문 탈출경로 |
특히 이들 중 조일문(趙一文)은 탈출할 때 남경 주둔 일본군 특무기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기밀문서를 대량 탈취 휴대하고 왔는데 이 기밀문서 중에는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기밀문서는 곧 제 3 전구 사령장관 구주퉁(顧祝同) 상장[31]에게 보내지고, 이어 중국 군사위원회에 전보(轉報)됨으로써 대일 작전 수행에 크게 이바지 했던 것이다. 중국측과의 교섭으로 대원들의 보급 문제 등이 해결됨에 따라 전지공작대의 공작 활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32]
8. 난징 탈출 이후
그 후 공작대는 전방 공작을 적극 추진하기 위하여 절서(浙西)공작 파견대를 편성, 항저우(抗州)부근에 파견하여 항저우, 상하이, 난징 등지에 대한 제반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공작대 기관지로 <<피>>라는 잡지를 발간하게 된다.탈출 후, 이일범, 조일문의 난징중앙대학교 후배들로 한국광복군으로 입대한 난징중앙대학 한인 유학생 인원은 다음과 같다.
제 2지대(西安 豆曲) | 박익득(朴益得), 신영묵(申榮默) |
제 3지대(阜陽) | 김택주(金澤周), 박호림(朴虎林) |
제 3전구 | 박일화(朴一華), 박재성(朴在成) |
제 10전구 | 이복록(李福錄) |
제 1전구 | 김우경(金祐卿) |
김해일(金海一), 전호인, 피문성 등은 쑤저우(蘇州), 전장(鎭江), 우후(蕪湖) 등 지역에 침투하여 정적 수립, 초모, 선전공작 결과 10여명의 청년을 포섭 제 3전구 공작대(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로 호송하였다.
1945년, 중국 충의구국군(忠義求國軍)에서 활동하던 박승학(朴承鶴), 장동식, 임계원, 박재엽은 우후(蕪湖) 일본군 부대 내에 한적사병 200여명에 대한 반정(反正)공작 도중 임계원, 박재엽은 일본 경찰에 체포가 되었고 그 후, 대전형무소와 부산형무소에서 각각 2년 형을 받던 중 광복을 맞았다.
중국 충의구국군(忠義求國軍)에서 활동하던 김해일(金海一)은 우후(蕪湖) 주장(九江) 난창(南昌) 등지를 여러차례 왕래하면서 청년 10여 명을 초모 후송, 일본군 정보 수집, 귀순 공작을 함.
피문성(皮文成) 후이저우(徽州) 소재 미군 제5공군 제 3전구 파견대 주환(駐晥)[33]분대에 배속되어 군사정보를 제공, 미 공군이 난징, 상하이 등지의 일본군 군사 시설물들을 폭격에 필요한 연락업무를 수행하여 미 공군 작전에 적극 협조하였다.
정영호(鄭英昊) 1942년 9월, 난징중앙대학교 의학원(醫學院) 생물계에 입학하여 재학 중, 1943년 여름, 송지영 사건으로 이후 항일지하운동에 종사하다가 1944년 4월초, 이일범, 조일문과 함께 난징에서 제 3전구로 탈출하여 광복군 징모 제 3분처 한교전지공작대 그리고 중화민국 제 3전구 제 1정진유격종대사령부 대일책반(中華民國 第三戰區 第一珽進遊擊從隊 對日策班)공작대원으로 활약하였다.
① 일본군 동향 파악
② 미군부대[34]에 정보를 보고, 미 제 5공군[35]에 타전하여 일본군 부대폭격
③ 중국인을 매수해서 폭약을 주고 일본군 부대 폭파
④ 초모공작, 일본군 탈영병 회수
등을 수행했다고 한다.[36]② 미군부대[34]에 정보를 보고, 미 제 5공군[35]에 타전하여 일본군 부대폭격
③ 중국인을 매수해서 폭약을 주고 일본군 부대 폭파
④ 초모공작, 일본군 탈영병 회수
이일범(李一凡) 1945년 3월 이후 중화민국 제 3전구 정치부 소속, 대일(對日) 광파(廣播)선전대에서 대일선전공작을 담당하고 있다가 조국광복을 맞았다. 국민혁명군 소교(少校)[37] 대적 전단 작성, 방송 실시, 포로 심문 업무를 수행하여 일본군에게 염전 / 반전 사상을 고취했다.
이정선(李正善) 난징에 있던 남방대학(南方大學)에서 난징중앙대학으로 전학하여 재학 중이었는데, 송지영 사건 이후 잠시 체포되었다가 풀려 나왔다. 그러나 학업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을 하고 충칭(重慶)으로 탈출을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부 및 한국광복군 국내정진지휘부에서 활동한다.
박철원(朴哲原) 경기도 용인 출생으로 송지영 선생과 함께 만선일보, 동아일보 근무하다가 난징중앙대학 농학원(農學院) 3학년을 다니던 중, 송지영 사건으로 사태가 험악해진 것을 계기로 항저우(抗州)로 도주하였다. 거기서 동창생인 김용(金龍)의 협조를 얻어 제 3전구로 탈출한 뒤, 충의구국군(忠義求國軍)에 입대하고 한교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5년 6월, 일본군 최후 발악으로 제 3전구 유격지구에 대한 소탕작전을 전개한다. 작전 지구에서 공작 중이던 박승학(朴承鶴)을 방문한 김해일(金海一), 유익배(柳益培)는 안후이성(安徽省) 지에시현(結溪縣)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당했으나 유격부대와 함께 화력으로 대항하면서 포위망을 탈출, 전원 제5공군 파견대가 있는 후이저우(徽州)로 도착했다.
한교전지공작대는 간부 20여명을 중심으로 적 점령 지구에 대한 초모 확대반 5개 조로 편성하여 파견 계획을 추진하였고, 조일문(趙一文)은 기밀문서를 접수한 바 있는 제 3전구 중국 군사 위원회 요청에 의하여 지청천 총사령관 소환 명령으로 충칭 총사령부로 가던 도중 광둥(廣東)에서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조일문은 제 3전구 공작대를 제 5지대로 편성을 요청하기 위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1943년말 나는 난징(南京), 벙부(蚌埠), 카이펑(開封) 일대에서 활동하던 동지 20여 명을 모아 적군 점령지역을 뚫고 중국군 제 3전구로 들어갔다. 거기서 이강(李剛), 정화암(鄭華岩), 박철원(朴哲原), 김문호(金文鎬), 신정숙(申貞淑) 등과 합류하였다. 그 때 일본군으로부터 탈취한 군사 기밀문서는 중국군 제 3전구 사령장관 구주퉁(顧祝同)을 통하여 장제스(蔣介石)에게 전달되고, 그 사실은 김구, 지청천에게 통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이범석은 나에게 함께 온 동지들을 모두 데리고 시안 지대 본부로 오라는 연락을 보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장제스의 전보를 받고 충칭(重慶)으로 떠날 차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먼저 충칭에 갔다가 나중에 시안에 가서 보고를 드리겠다고 회답하였다. 창팅(長汀)비행장에서 수 개월 동안 군용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타지 못하고 광저우에 내려갔다.
한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지청천 총사령관 귀하.
카이펑 · 쉬저우 · 상하이 · 난징 · 안후이성남부(晥南) 등지 동포들이 마오린(茂林)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라는 민중단체를 조직하기 위하여 대회를 연 바 있습니다. 그 취지는 조국광복에 진력하고 있는 임시정부를 적극 옹호하고 지지할 것을 다짐하기 위한 것으로, 회의는 조일문 대표를 충칭(重慶)에 파견하여 임시정부 당국에 우리의 뜻을 전하고, 나아가 우리들의 의견을 진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최근 이곳 우리 한인 교포들의 공작 대원수는 급증하여, 이제 150여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광복군의 1개 지대를 편성할 수 있는 인원인 바, 이러한 저희 뜻을 받아 주셔서 즉시 회전(回電)하여 주시옵기 바라는 바입니다.
《독립신문》 충칭판 제7호 (대한민국 27년 7월 20일)
카이펑 · 쉬저우 · 상하이 · 난징 · 안후이성남부(晥南) 등지 동포들이 마오린(茂林)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라는 민중단체를 조직하기 위하여 대회를 연 바 있습니다. 그 취지는 조국광복에 진력하고 있는 임시정부를 적극 옹호하고 지지할 것을 다짐하기 위한 것으로, 회의는 조일문 대표를 충칭(重慶)에 파견하여 임시정부 당국에 우리의 뜻을 전하고, 나아가 우리들의 의견을 진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최근 이곳 우리 한인 교포들의 공작 대원수는 급증하여, 이제 150여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광복군의 1개 지대를 편성할 수 있는 인원인 바, 이러한 저희 뜻을 받아 주셔서 즉시 회전(回電)하여 주시옵기 바라는 바입니다.
《독립신문》 충칭판 제7호 (대한민국 27년 7월 20일)
9. 절감(浙贛)지역상황
태평양 전쟁의 격화와 함께, 1942년 여름부터는 미국 공군기가 일본의 요코하마(橫濱)·오사카(大板)·고베(神戶) 등 공업 지대를 폭격하는 등 공중전이 치열해졌는데, 중국대륙 방면의 일본군은 제 3전구(第三戰區)내에 있는 미국 공군 기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일본군 5만 여명과 왕징웨이(汪精衛) 군 10여만 명을 동원, 기동 부대를 앞세우고 진화(金華)·상라오(上饒) 지구로 진격을 개시하였다.[38]이 때 진화(金華)·상라오(上饒)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제 3전구(第三戰區)내에는 구주 총참(衢州總站), 옥산 28참(玉山 28站), 여수 27참(麗水 27站), 공주 비기참(贛州 飛機站 ), 강신 비기참(康信 飛機站), 광풍 비기참(廣豊 飛機站 ), 건구 비기총참(建甌 飛機總站)등 많은 비행 기지가 있었으며, 그 중에도 저장성(浙江省)과 장시성(江西省) 경계이며 상라오(上饒) 북동방 약 50km 지점에 위치한 옥산 28참(玉山 28站)은 산악 지대로 화강 암산을 뚫노라 막대한 인력 동원과 물자를 투입하여 건설하였던 미 제5공군의 최전방 동굴 기지이며, 많은 군용기와 폭탄·탄약 등 군수 물자가 비치되기도 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요새지를 중심으로 하는 저장성(浙江省)과 장시성(江西省) 일대에 걸친 전투는 미·중·일이 공중 전력까지 동원하는 대규모의 격전이었으며, 광복군 제3 징모분처(한교전지공작대)에서도 제 3전구(第三戰區) 장관 사령부의 정치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진화(金華)에 있는 중국 제 10집단군 총사령부와 협조하여 이 작전에 협력하게 되었다.
10. 관련 부대
10.1. 미 제5공군사령부
5th Air Force1942년 4월 18일, 항공모함에서 출발한 미국 B-25 중폭격기 50대가 일본 수도 도쿄(東京)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고, 중국의 강서성(江西省) 모 비행장에 착륙하려 하다가 항공기 연료가 바닥나 대다수의 폭격기가 일본군 점령 지역인 상하이(上海) 장완(江灣) 비행장 등에 불시착하게 된다. 대부분의 조종사, 공군이 상해에 있는 적 포로수용소에 감금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1944년 11월, 미 공군에서는 미군들이 수용되어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포로 수용소와의 긴급 연락을 위한 임무 수행 등을 중국군 당국에 요청하여 왔는데, 중국 제3전구 정치부에서는 그 실행 책임자로 한국광복군의 김문호(金文鎬)를 추천하였다.
김문호는 제3전구 사령부의 정치부 부주임 마슈리(馬樹禮)의 주선으로 당시 제3전구에 있는 미국공군 파견 대장 공군 소령 소오요를 만나 구체적인 토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상하이 장완(江灣)에 있는 포로 수용소와 비밀 연락을 취하고, 수용소에 있는 미군포로들의 구출 공작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강만 수용소 및 부근 일대에 있는 영·미군 포로 수용소의 위치를 확인하여 그 소재지를 연합군의 폭격 대상에서 제외하게 하는 사항도 있지만, 우선 미 공군 포로 중 어느 한 사람에게나 비밀 통신문을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김문호는 미 공군에서 제공하는 비밀 통신문과 공작금을 가지고 분처로 돌아와 이강(李剛)·정화암(鄭華岩)·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비밀 간부 회의를 열고, 공작 업무 수행에 관한 방안을 신중히 토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비밀 통신 연락 공작은 다년간 상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여 온 정화암(鄭華岩)이 현지 임무를 책임지고, 김문호를 일반적인 정보 수집 등을 담당하기로 하여, 주중 미 공군 사령부에 미·영 포로 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함으로써 수용소 소재지에 대한 폭격을 중지하게 하는 등 한·미 합작의 성과를 거두었다.
뒤 이어 1945년 3월에 김문호는 전복근(全福根)·최일영(崔日英)·강치명(姜治明)·조동걸(趙東傑) 등의 대원들과 함께, 전선 각지에 파견 공작 중인 대원들을 순방 격려하며, 특히 절서(浙西)지구에 중점을 두고 중국측의 제1유격 정진군(挺進軍) 종대(縱隊) 및 미 공군 파견대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한·중, 한·미 합동 공작을 전개하였다.
10.2. 중미특종기술합작소
中美特種技術合作所 | Sino-American Special Technical Cooperative Organization1942년 중국 과 미국이 체결한 SACO 조약에 따라 창설된 조직이다.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양국 간 상호정보수집기구를 중국에 설립했다. 이는 미국 최초의 정보기관이자 CIA 의 전신 전략첩보국(OSS) 과 함께 중국에서 공동으로 운영 되는 동시에 양국 간 합동 훈련 프로그램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미 제 5공군(장강 이남), 미 제14 공군(장강 이북) 에 대한 조언 및 훈련, 기상 예측 및 착륙 지역 정찰, 추락한 사람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0.3.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은 다이리(戴笠)가 창설한 전투 부대로서 , 여러 차례의 개편과 개편을 거쳐 첩보팀에서부터 미국산 장비를 갖춘 정규군으로 변모했으며, 중국의 항일전쟁과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2차 국공내전에 참전하였다. 또한 국민당과 2차 국공내전 당시 동북(東北)에서 하이난도(海南島)까지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이라는 지방군이 있었다.
국민혁명군 국방부 정보국 에 따르면 항일전쟁 당시 적과 괴뢰에 대한 제재를 가한 암살 사건은 248건에 이른다.
본부는 처음에는 저장성(浙江) 샤오펑(孝豐)에 위치했으나 나중에 안후이성(安徽) 광더현(廣德縣) 왕링(王嶺)으로 이전한 다음 저장성(浙江) 장화허교(昌化河橋)로 이전했습니다. 다이리(戴笠)는 처음에 총사령관을 맡았고 나중에 유조우바이(俞作柏), 조우웨이롱(周偉龍) 및 뤈칭위안(阮清源)이 지휘부를 맡았다.
1944년 9월, 다이리(戴笠)는 장제스에게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 축소를 면제해 달라고 청원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에는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 공헌이 자세히 명시되어 있었다.
중미특종기술합작소(中美特種技術合作所 | SACO)는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 훈련을 담당했고, 미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했다.
1945년 6월 14일,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 제 10대대는 6월 18일 저장성(浙江省) 루이안현(瑞安縣), 용자현(永嘉縣 | 현 원저우시 청구 溫州市 城區)을 점령했고 , 11대대는 18일 웨칭현(樂清縣) 현 사오싱시(紹興市) 웨청구(越城區) 을 점령했다.
7월 중순까지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은 일본군을 북쪽으로 저장성(浙江省) 하이먼 지역(海門地區) 현재의 타이저우시(台州市) 자오장구(椒江區)까지 추격했다.
한 달이 넘는 이 기간 동안 두 대대는 일본군 539명을 사살했고,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은 48명을 잃었다.
광복군과의 관계
박철원(朴哲原)은 김용(金龍)의 도움을 받아 난징중앙대 탈출 후,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에 입대를 했으며 광복군 징모 제3분처 절서(절강성 서부)분실에 배속되어 전호인와 연락망을 구축하는 활동을 전개했었다.
미군의 훈련과 지원을 받은 게릴라들은 200개 이상의 교량, 84대의 기관차, 141척의 선박과 하천 선박을 파괴했다. 그들의 활동으로 인해 약 71,000명의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게릴라 자체는 약 30,000명의 희생이 있었다.
10.4. 제1정진유격종대
第一珽進遊擊從隊제28군 제62사단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제192사단, 16사단, 63사단을 항일 제3전구 저장(浙江)성 동중국해 전선에 항일전선 배치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은 진산웨이에 상륙했고 도광(陶廣)의 군대는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천마산, 봉황상 지역에서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62사단 367연대장, 장콩이(張空逸)와 제1대대 사령관 사강취안(謝康泉)과 장병 800명 전원이 영웅적으로 전사했다. 반면, 타오광(陶廣)은 국민혁명군 제10집단군 부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제3전구 제1유격정진종대 사령관이자 제28군 사령관으로 취임한다.
제62사단을 이끌고 저장성 서부 항저우, 자싱, 무호지역으로 진출하고, 적진 뒤에서 게릴라전 수행한다. 타오광(陶廣)은 항일 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지지하는 쪽이다. 신쓰준(新四軍)[39]과 함께 싸워서 일본군을 게릴라 전투로 여러차례 격파하게 된다.
하지만, 1941년 1월 7일 ~ 1941년 1월 13일 구주통(顧祝同) 상장이 일으킨 환남사변(皖南事變)과는 타오광은 아무 관련없었기에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타오광(陶廣)을 더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16사단과 63사단으로 타오광(陶廣)을 전출하여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그를 감시하기 위해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요원을 보내게 된다. 국민혁명군 제 3집단군 부사령관이 저장-쑤저우-안후이 국경지역 선발군 부사령관으로 변경됐다.
1945년 8월 15일, 항일전쟁 승리 이후,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정진사령부를 해산시키고 타오광(陶廣) 부대에게 항저우-상하이 지역으로 진격하지 못하게 대기를 명령했다. 타오광(陶廣)의 부대에 중·하급 간부를 모두 장교 양성단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타오광(陶廣)은 전역하여 항저우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1951년 8월 25일 지과사(智果寺)라는 절에서 병사했다.
10.5. 신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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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0.6. 환남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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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1. 부대원 명부
부대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제 2지대 제 3구대 제 3(강남)분대 (제 3전구) 남경지하공작 특파원
조일문, 이일범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강남)분대원
대장 유기석
제 3징모분처 주임 김문호
대원
한도명, 이일범, 이경도, 이지일, 김운경, 신정숙, 김형석, 조일문, 정봉주, 정영호, 한진원, 이명식, 피문성, 박승유, 전복근, 오학선, 김만득, 김영관, 성동준,김용,이준수, 박재봉, 한응규[40], 박병두, 박종선, 정영, 박철원, 안병성, 강치명, 신의철, 신재섭, 김권, 이희화, 윤우현, 한말다, 유재영, 박열부, 유증영, 유상공, 이장용, 김영남, 김여제[41], 유상언[42]
김승학의 독립운동사에서 명부는 다음과 같다.
김문호, 이지일, 안병무, 신정숙, 김형석, 이일범, 한도명, 조일문, 박철원, 정봉주, 김운경, 박승유, 김해일, 한진원, 전호인, 피문성, 박재봉, 신재섭, 김영관, 한말다, 이희화, 한응규, 이장용, 김영남, 박병두, 박종선, 윤우현, 유재영, 태대균, 정윤관, 정영호, 유증영, 유상언, 유상공, 모숙인, 김유난, 김윤국, 장동식, 김해동, 김응전, 김덕원 이복록, 정희섭, 이당백, 박흥선, 임계원, 계지풍 박재화, 김대준, 안병성, 김호, 피안창주(중국인), 김용, 김여재[43], 정일영, 박시준, 마일신, 심용철, 김성원, 정영, 허동무, 홍순택, 김성원, 김현태, 김상태, 박재성, 최창일, 문현모, 쑤징허, 왕하이칭(중국인), 링단루(중국인), 린시위안(중국인), 유익배, 송지영, 박재화, 이일도 이찬원 석길주 봉검청 신원, 김영종, 민종석 당기수 최성걸, 정천, 김광석, 박열부
12. 한교전지공작대의 확군(擴軍)
1945년 8월, 징모 제 3분처에서는 간부 20명을 중심으로 적군지역에 대한 초모 확대반 5개조를 조편성하여 파견계획을 완비하던 중 적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여 총사령부 지시에 의한 적 점령지구 내의 교포 생명/재산 보전 및 한적 장병 수용 임무를 완축(完逐:완전히 구축)코저 각지구에 선발대를 파견하였으며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우후지구(蕪湖地區) | 박승학 |
난징지구(南京地區) | 이일범, 박철원, 피문성 |
상하이지구(上海地區) | 김용, 박시준[44] |
항저우지구(抗州地區) | 전호인, 정영호[45], 유익배 |
등이 파견되어 소임직무를 완축하였다.[46]
13. 광복 이후
독립운동투사 유수인(柳樹人|유기석)씨 귀국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삼십여년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오던 유수인씨는 지난 4일부 공로 귀국하였다. 유씨는 혁명가인 부친(유찬희)을 따라 7세에 조국을 떠나 만주와 쏘련 등지로 다니며 부친의 독립운동을 도와 안창호 선생의 비서로써 활약하였으며 제 2차대전시에서는 중국 3전구사령부 정무주임등을 역임하여 혁혁한 투쟁을 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삼십여년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오던 유수인씨는 지난 4일부 공로 귀국하였다. 유씨는 혁명가인 부친(유찬희)을 따라 7세에 조국을 떠나 만주와 쏘련 등지로 다니며 부친의 독립운동을 도와 안창호 선생의 비서로써 활약하였으며 제 2차대전시에서는 중국 3전구사령부 정무주임등을 역임하여 혁혁한 투쟁을 하였다.
유기석은 1949년 5월 4일 잠시 귀국하여 모친과 누이를 만났으나, 얼마 뒤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해방 이후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실망하고 중국에 그대로 머물기로 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남한이나 공산당 치하의 북한을 모두 인정하기 어려웠던 그는 1950년 8월 이후 광저우에서 류자명을 만나 중국 공산당의 영도 아래 중화인민공화국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분투할 결심을 밝히기도 했다.
[1] 기록에 따라 징현(涇顯)으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징시안 안에 마오린(茂林)이 있다.[2] 유기석, 30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304[3] 「부조조선혁명운동담회회기록(扶助朝鮮革命運動談話會記錄)」(1940.4.2.)(汪榮生→朱家驊) 국사편찬위원회, 1994, 위의 책 23~25쪽 ;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1988, 위의 책, 81쪽 ; 염인호, 2021, 위의 논문, 30~31쪽[4]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pp.221[5] 장쑤성 북부[6]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p. 305[7] 이호룡,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 운동의 실천적 지도자 류기석, 역사공간, pp.144~145.[8] 김만득, 정윤관[9] 정희섭[10] 김용[11] 류향[12] 정영[13] 이근[14] 유기석, 30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국가보훈처, 2010, p.305[15] 유기석, 30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국가보훈처, 2010, pp.307~311[16]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인물편, 지식산업사, 2020, pp.220~221[17] 王德兹 主篇, 南京大學百年史, 南京大學出版社, 2002, pp. 242~254[18] ➀ 국립중앙대학 30년도(1941년)각 학과 학생 명단, 국립중앙대학일람, 난징, 1942(國立中央大學三十年度各院系學生一覽, 國立中央大學一覽, 南京, 1942) ② 국립중앙대학사무국 편, 민국 32년도(1943년)복교 제1기 졸업생 연락처, 국립중앙대학교 제 1회 졸업 기념 간행물, 난징, 1944년 6월(國立中央大學秘書處 편, 民國三十二年度復校第一屆畢業生通訊錄, 國立中央大學復校第一届畢業紀念刊, 南京, 1944年 6月.) ③ 국립중앙대학사무국 편, 민국 33년도(1944년)복교 제2기 졸업생 연락처, 국립중앙대학교 제 2회 졸업 기념 간행물, 난징, 1945년 6월.(國立中央大學秘書處 편,民國三十三年度復校第二屆畢業生通訊錄, 國立中央大學復校第二届畢業紀念刊, 南京, 1945年 6月.)[19] 邱從强, 鐵蹄下的抗争-記抗戰中的南京中央大學學生 , 江蘇地方志, 2003년 2기 ; 朱守雲, 南京中央大學的驅樊運動 , 鍾山風雨, 2008년, p56, 王德兹 主篇, 南京大學百年史, 南京大學出版社, 2002,p.250[20] 본명 김병호, 변성명으로 고중민, 김중민이라는 이름 사용[21]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pp. 220~222[22] 송지영, 나의 유수기(옥중기)[23] 조일문의 추도문에서 발췌 송지영, 우인일기, 융성출판사, 1991, pp.611~612[24]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0, pp.89~90[25] 이때 체포된 인원은 김병호, 송지영, 김덕원, 이일범, 조일문, 이정선이다.[26]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pp.853~857[27] 당시 상황에 대해 유기석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오래지 않아 우리들은 난징(南京)방면으로부터 전해온 희소식을 들었다. 일부 적군 속에 일하는 조선 청년들이 기의를 준비하는데, 후방으로 가서 항일운동에 참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정선은 적의 공군에 이일범은 헌병대에 조일문은 특무기관에 있었다. 그들은 아직 후방으로 가는 길과 연락 지점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 기의를 일으킬 수 없었으며 후방에서 동지를 파견하여 기의작업을 지도하는 것을 책임지었으면 하고 희망했다. 이것은 나를 흥분하게 하는 소식이었다."(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p.331, 난징에서 유기석과 중앙대학 학생들과 접선 과장에 대한 내용은 p. 313~316)[28] 이일범과 정영사이에서 낳은 아들[29] 고정훈, 軍, 동방서원, 1967[30] "나카하라 스스무(中原進)는 적군 연락부에서 1주일 동안 몰래 탐지하다가 결국 한 무더기 중요한 기밀 자료를 훔쳤는데, 칭따오(靑島)에서 샤먼(廈門)연해에 이르는 정국 방어지도나 광호(光號)작전계획(미군의 상륙에 대처하는 작전계획), 현재의 적 정황도, 중국에 있는 조선인 반일분자 활동정황조사 등이 포함되어있었다.적에게는 이것은 심각한 타격이다. 왜냐면 그들의 전략부서, 방어계획 그리고 군사사업이 모두 누설되었기 때문이다. 적이 다년간 계획한 해상과 지면의 배치는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태평양 전쟁과 중국대륙에서 항일 전쟁이 무기한으로 연장되면 작전계획의 발각으로 말미암아 적의 세력은 더욱 피동적인 위치해 쳐해 있을 것이다."라고 회상한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319[31] 중장에 해당한다.[32] 한교전지공작대 정보주임 김해일(金海一) 증언[33] 안후이성에 주둔[34] 중미특종기술합작소(中美特種技術合作所|Sino-American Special Technical Cooperative Organization)로 추정된다. 공식 홈페이지(https://saconavy.net/)에 따르면 "SACO는 1943년 4월 15일에 창설되어 원저우시(温州市)에서 120마일 서쪽에 있는 푸청현(浦城县)에서 시작했다."고 기술했고 제3징모분처 본부인 상요도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한중미 공작도 있었다.[35] 미 제5공군 (Fifth Air Force) 제5공군은 태평양 공군 본부 전진 부대로, 현재는 일본 요코타 공군기지에 있다.[36] 한국경제신문, 1989년 9월 17일자 11면[37] 국민혁명군 소령[38] 절감회전(浙贛會戰)(1942년 5월 15일~ 9월 4일)[39] 중국 노동자, 농민으로 이뤄진 홍군과 중국 남부 8개 성에 주둔한 유격대 사이에서 합동 유격전 부대이다 . 제 2차 국공합작 기간 1937년 10월 군대 창설에 관한 협정이 채택됐다. 신쓰준(新四軍)은 주로 항영(项英)이 창설 하고 중국공산당 중앙혁명군사위원회가 지도하며 4개 분견대로 구성되어 국민혁명군 제 3 전구로 편성되었으나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40] 한말다와 남매[41] 김룡의 형으로 김룡의 원래 이름은 김순제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사망했다.[42]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p.615 부록에 대원들 명부가 있다.[43] 김용의 둘째 형[44] 김용 지사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시준은 중국 상하이에 남길 희망했다고 한다.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출판사, 2012, p. 247.[45] 저장성 외교조원[46] 김승학, 한국독립사 제 2편 제 3장 제 6절 p. 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