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2 22:49:20

신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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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정숙과 김구.jpg
신정숙 선생이 김구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

1. 개요2. 독립운동에 투신하다3. 광복군 1호 여성대원

1. 개요

신정숙(申貞淑)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한국광복군 1호 여성 대원이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소개된 신정숙 선생의 약력

2.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본명은 신봉빈(申鳳彬)으로, 1910년 5월 12일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인 신조준[1]으로, 남편도 독립운동가인 장현근(張鉉瑾)이다. 이러한 출생 및 집안배경 때문에 그녀의 독립운동 투신은 예정된 것과도 같았다.

충북 음성이 고향인 장현근은 신정숙이 19살 때 혼례를 치루었는데, 장현근은 결혼 후에도 애국청년단 소속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식민지 조선과 중국을 오고갔다. 그러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에 연루되어 체포된 후 조선으로 송환되어 투옥되었다. 아직 신혼이던 신정숙은 체포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였고, 장현근은 출옥 후에는 중국으로 다시 망명한 후 소식이 끊어졌다. 신정숙은 남편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마음먹었다.

3. 광복군 1호 여성대원

신정숙은 한국광복군의 1호 여성 대원이다. 그녀는 남편을 만주로 건너가면서 독립운동에도 투신했다. 전투공작대원으로서 유격활동을 수행하면서 중국군의 특별간부훈련단에 자원 입대해 1년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았다.[2] 1941년 충칭에 있는 김구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그 해 3월 1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제3분처 징모위원 임명식에 참여해 제3분처위원 겸 회계조장에 임명되었다. 4월 29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로부터 김문호, 이지일, 한도명과 함께 중국 중앙군 제3전구 사령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받아 이를 수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와 별개로 한국독립당 제8구당 집행위원으로써 정보수집, 대적방송공작, 선전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이후 1942년 10월 광복군 제2지대 3구대 3분대에 편성된 이후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1호 여성대원으로서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헌신하였다.

광복 후 1946년 3월에 부산항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녀의 아들 장영원씨가[3] 어머니가 계신다는 여관에 찾아와 방문을 두드렸다. 장영원의 회고에 따르면, 모친이 "누구세요?"라고 물었을 때 이미 그때부터 어머니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리고 "저 영원이에요"라고 말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둘이서 부둥켜안고 그동안 얼마나 서러웠는지 2시간여 동안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고 한다.#

이후 서울 경교장에서 아들과 함께 머물던 그녀는 김구가 서거한 후 생계를 꾸리기 힘겨워 궁핍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1963년 독립유공자 연금제도가 생겼을 때, 그녀는 연금 수령을 거부했다. 당시 독립유공자 선정을 국사편찬위원회의 특별심사위에서 했는데, 독립운동과 무관한 자들을 유공자로 둔갑시키는 그들의 역사왜곡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다 김구의 아들 김신이 진정서를 제출한 덕분에 1977년이 되어서야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1997년 7월 8일 대전에서 노환으로 사망했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014년 8월 국립대전현충원 "이 달의 현충인물"로 소개되었다.
[1] 이는 가명으로, 본명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이 시기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일제의 추적, 체포를 우려하여 가명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2] 한겨례 고경석 기자의 '이야기 여성사'에 따르면, 당시 중국군 장교가 '나라를 망쳐먹은 망국노'라고 놀린 데 격분한 그녀는 이 장교를 두들겨 패 3일간 영창 신세를 져야 했다고 한다.[3] 신정숙은 남편을 찾아 만주와 중국 등지를 떠돌았을 때 아들을 조선에 남겨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