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3 23:46:04

부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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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부춘화.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제주 부씨[1]
출생 1908년 4월 6일[2]
전라남도 제주군 구좌면 하도리 굴동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3] 1256번지)
사망 1995년 2월 24일[4]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53호
상훈 건국포장 추서
가족 아버지 부원돈 어머니 경주 김씨
오빠 부승림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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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 사진.jpg
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 사진. 맨 뒷 줄 가운데가 부춘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해녀.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08년 4월 6일 전라남도 제주군 구좌면 하도리 굴동(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1256번지)에서 아버지 부원돈(夫元敦, 1883. 12. 5 ~ 1956. 1. 8)과 어머니 경주 김씨(1881. 10. 19 ~ 1961. 1. 28) 김천욱(金天頊)의 딸 사이의 1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15살 때이던 1922년 처음 물질을 배웠고, 밤에는 사립하도보통학교 야간부 강습소에서 한글을 공부했다. 21살 때이던 1928년 하도리 해녀회장에 선출되었고, 1931년 하도강습소를 1회로 졸업했다. 그러던 1931년 제주해녀조합에서 하도리 해녀들이 채집한 감태전복의 가격을 강제로 무리하게 싸게 매기려 하자, 이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거센 항의에 부딪힌 해녀조합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정상적인 매입을 약속했으나 몇 달이 지나도록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결국 1931년 6월부터 하도리 해녀회에서는 직접 투쟁에 들어가기로 결의하고, 이웃 구좌면 종달리·연평리[5]·세화리 등의 해녀들에게 진상을 호소했다. 그리고 구좌면민들에게 해녀조합의 실체를 알리고 규탄하는 활동에 들어갔다.

1932년 12월 20일 하도리 해녀회에서는 해녀조합에 대한 요구조건 및 투쟁방침을 확정하고, 일본 경찰의 제지를 염려해 발동기선을 타고 제주읍으로 향했으나, 폭풍으로 도중에 중단되었다. 이후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장날에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은 인근 마을에서 모여든 해녀들과 함께 집회를 열어 해녀조합을 규탄하고, 제주읍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시위대가 평대리에 있던 구좌면사무소에 이르자, 당시 구좌면장 강공칠(康共七)이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노라 약속하여 그날 오후 5시 일단 해산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해녀조합에서는 해산물에 대한 지정판매를 계속 강행했다. 지정판매일로 정해진 1월 12일에 마침 제주해녀조합장을 겸임하고 있던 제주도경찰서장 겸 제주도사(濟州島司) 다구치 테이키(田口禎憙, 1889 ~ ?)[6]가 새로 부임한 뒤 순시하러 구좌면을 통과한다는 말을 듣자, 하도리 해녀회에서는 인근 세화리, 종달리, 연평리, 정의면 오조리, 시흥리 등의 해녀들과 함께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 제주도사와 담판을 짓기로 했다.

1월 12일 당일, 부춘화는 제주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를 주도했고, 마침 제주도사가 차를 타고 세화리 장터로 오던 중 이에 놀라 돌아서려 했다. 이에 부춘화가 이끄는 시위대는 집회를 중단하고 도사를 에워쌌고, 도사는 험악한 분위기를 직감하고 해녀들과의 담판에 응했다. 그리고 해녀회에서 내건 '지정판매 반대', '해녀조합비 면제', '제주도사의 제주해녀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의 요구조건을 5일 내로 해결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러나 제주도사는 이후 무장한 경찰들을 출동시켜 1월 23일부터 1월 27일까지 34명의 해녀회원들과 수십 명의 청년들을 체포했다. 부춘화는 1월 26일 해녀들과 청년들에 대한 검거를 저지하려다가 체포되었고, 이후 미결수 신분으로 3개월간 제주도경찰서 유치장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7월 석방된 그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미행에 시달리다가 1933년 일본 오사카시에 살고 있던 사촌 언니 집으로 피신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7년간 가내공업에 종사하며 지냈고 구좌면 세화리 출신의 고한일과 결혼하여 고창호(高昌豪) 등 3남 1녀를 낳았다.

8.15 광복 후 1946년 7월에 제주도로 귀환하여 고향 세화리에서 부인회장을 하며 해녀들의 권익 옹호에 힘썼으며, 이후 부산광역시, 서울특별시 등지로 거쳐를 옮겨 살다가 1995년 3월 24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했다. 향년 88세.

2003년 8월 15일 광복절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2011년 4월 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3. 참고문헌


[1] 협공계(恊公系) 21세.[2] 제주부씨족보 권1 231쪽에는 11월 14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상도리·세화리·평대리와 함께 제주 부씨 집성촌이며, 부좌현 전 국회의원과 독립유공자 부덕량·부승림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양력 3월 24일.[5] 1986년 4월 1일 우도면으로 승격되면서 현재는 우도면 연평리가 되었다.[6] 1914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서무과 회계계에서 판임관 견습을 시작했고, 1915년에는 경무총감부 위생과 보건계에서 견습을 했다. 1916년 고양경찰서 경부를 거쳐 1917년부터 1918년까지 경성부 종로경찰서 경부로 근무했다. 1919년 경무총감부 재간도 경부 겸 외무성 경부를 지냈고, 1921년 함경남도경찰부 도경부로 전보되어 1922년부터는 함경남도경찰부 고등경찰과장으로서 1924년까지 재임했다. 1925년 경시로 승진해 1926년까지 혜산경찰서장을 지냈고, 1927년부터 1928년까지 만포경찰서장, 1929년부터 1931년까지 경성부 용산경찰서장을 지내다가 1932년 제주도경찰서장 겸 제주도사로 전보되어 1935년까지 역임했다. 1933년부터 1934년까지는 전라남도 마약류중독자치료소 추자도지소장까지 겸임했다. 1936년 함경북도 경흥군 나진읍장에 임명되었다가 1937년 나진부윤으로 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