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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2년 2월 8일 상하이 북쪽 외곽의 중국인 밀집 지구인 자베이 구역 바오퉁루에서 독립운동가 김립이 피살된 사건.2. 배경
2.1. 이동휘와 김립 일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복 시도
당시 이동휘와 김립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복을 위해 공작을 꾸렸다는 사실은 인터넷이 알려져있지 않는데 그 실상은 아래와 같다.상해임정을 전복하고 공산국가 건설하려 한 이동휘...상해임정 전복에 실패하자 국민의회와 연합해 ‘한족공산당’ 창당...이동휘 정부개혁안 설명서에 의하면 그 개혁안은 정부 개혁이 아니라 사실상 정부 전복안이었다....또한 국가체제의 경우, 기왕의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새로이 ‘고려혁명위원회’로 바꾸자고 제안했다...이 같은 고려혁명위원회는 사실상 김립이 제창했던 ‘집행위원회’ 제도를 국내와 미국·중국·소비에트러시아 등으로 확장한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혁명위원회는 집행위원회 제도와 마찬가지로 기왕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인 상해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이 소비에트 국가체제를 수립하려는 제안과 같았다...당시 이동휘의 상해임정 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이 김립이었다는 사실에서, 상해임시정부를 혁명위원회로 바꾸자는 결론 역시 김립의 주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립이 주장한 집행위원회는 물론 이동휘 명의로 제출된 정부개혁안과 설명서 역시 김립이 주동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이동휘 명의로 제출된 정부개혁안과 설명서는 한인사회당이 상해임정에 참여한 최종 목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최후 카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만반의 준비 끝에 던진 최후의 카드, 즉 정부 개혁안과 설명서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동휘와 김립은 다른 대안을 모색했다. 그것은 기왕의 국민의회 세력과 연합해 상해임정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는 대안이었다. 물론 그 공작 역시 김립이 주도했다.
...당시 김립이 국민의회와 조화책을 강구한 배경은 1921년 2월 중순경 발표된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이었다. 이 격문은 임정 반대세력을 대표하던 국민의회와 북경파(北京派)의 연합 작품이었다. 1921년 2월 8일 자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외무차관에게 통보한 ‘재상해 한인독립운동자의 내홍(內訌) 및 국민대표회의의 발단’이라는 정보보고에 의하면, 당시 상해임정 반대세력에는 경파(硬派)와 연파(軟派)가 있었다.
경파는 상해임정을 전면 전복해 노국(魯國) 과격파, 즉 소비에트러시아 볼셰비키와 결탁해 무력(武力) 급진을 주장하는 자들로 김립·원세훈·이한영·장건상·김만겸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김립과 이한영은 한인사회당 계열이고, 원세훈·장건상·김만겸은 국민의회 계열이다.
신명호. "[신명호의 상해임정 27 년사| 20] 상해임정을 전복하고 공산국가 건설하려 한 이동휘 _ 안창호 위시한 기호계열, 이동휘의 정부개혁안을 부결하다." 월간중앙 (2023)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8627[1]
...한편 만반의 준비 끝에 던진 최후의 카드, 즉 정부 개혁안과 설명서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동휘와 김립은 다른 대안을 모색했다. 그것은 기왕의 국민의회 세력과 연합해 상해임정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는 대안이었다. 물론 그 공작 역시 김립이 주도했다.
...당시 김립이 국민의회와 조화책을 강구한 배경은 1921년 2월 중순경 발표된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이었다. 이 격문은 임정 반대세력을 대표하던 국민의회와 북경파(北京派)의 연합 작품이었다. 1921년 2월 8일 자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외무차관에게 통보한 ‘재상해 한인독립운동자의 내홍(內訌) 및 국민대표회의의 발단’이라는 정보보고에 의하면, 당시 상해임정 반대세력에는 경파(硬派)와 연파(軟派)가 있었다.
경파는 상해임정을 전면 전복해 노국(魯國) 과격파, 즉 소비에트러시아 볼셰비키와 결탁해 무력(武力) 급진을 주장하는 자들로 김립·원세훈·이한영·장건상·김만겸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김립과 이한영은 한인사회당 계열이고, 원세훈·장건상·김만겸은 국민의회 계열이다.
신명호. "[신명호의 상해임정 27 년사| 20] 상해임정을 전복하고 공산국가 건설하려 한 이동휘 _ 안창호 위시한 기호계열, 이동휘의 정부개혁안을 부결하다." 월간중앙 (2023)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8627[1]
3. 이동휘와 김립 일파의 횡령 여부 논란
3.1. 김립 횡령설
김립 일파의 행동이 횡령이라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한형권의 임시정부의 대아외교(對俄外交)와 국민대표회의의 전말에 의하면,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한형권이 김립을 만났을 때 김립은 “임시정부에는 내홍(內訌)이 생기어 중요 인물 4~5명이 탈퇴해서 현상유지도 불능(不能)이며, 그대가 모스크바로 떠나온 후 금일까지 아무런 연락도 취할 수 없으므로 너무도 궁금해 모스크바로 갈 예정으로 이곳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립의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임시정부를 탈퇴했다는 중요 인물 4~5명은 이동휘·안창호 등을 지칭하는데 당시 그런 일은 없었다. 게다가 김립의 공식적인 임무는 한국공산당을 코민테른에 보고해 승인받고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과의 통합을 협의하는 것이었지, 모스크바 차관의 귀추를 확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립의 말에 한형권은 낙심천만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차관은 임시정부를 위한 것인데, 그 임시정부 주역들이 탈퇴해 현상유지도 불가능하다면 아직 수령하지 못한 모스크바 차관 160만원이 수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형권은 “내가 모스크바 당국과 교섭한 것은 성공이다. 계속적으로 무장(武裝), 금전 등 원조를 받을 터인데 이제 우리 정부 자체의 분열이 이처럼 됐으니 이를 장차 어찌할까? 지금이라도 무슨 방법으로든지 임시정부의 원상을 회복하는 것이 최선 급무이니 군(君)은 나의 정부에 대한 보고서와 제1기 차관의 일부인 40만원을 가지고 곧 길을 돌리어 상해로 가서 원상회복의 공작에 주력해 우리의 뜻대로 그것을 완성하면서 내가 다시 모스크바에 가서 160만원 잔액을 휴대하고 상해로 돌아갈 시기를 고대해달라”고 했다.
이 같은 한형권의 대답을 생각해보면 김립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립은 한형권이 수령해온 모스크바 차관 40만원을 중간에서 횡령하려 거짓말했던 것이다. 다만 그 거짓말은 김립 혼자 지어낸 것이 아니라 이동휘와 밀약한 결과로 이해된다. 한형권이 상해로 온다면 모스크바 차관이 임시정부로 들어갈 것이기에 김립과 이동휘는 중간에서 횡령하자고 밀약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형권을 파견한 주체는 자신들이기에 자신들이 모스크바 차관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모스크바 차관이 코민테른 공작금이 아니라 소비에트러시아 차관이라는 사실은 김립 자신부터 잘 알고 있었다. 김립은 웨이하이(威海)에 있던 이동휘에게 1920년 7월 19일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만일 차관만 되면 이승만, 안창호 상관할 것 없이 하여볼 수도 유(有) 하오다. 여하간 차관 일절(一節)은 즉금(卽今) 운동 중이오다”라고 했다. 위에서 보듯 김립과 이동휘가 모스크바 차관을 받으려던 목적은 무엇보다도 이승만·안창호를 축출하고 상해임정을 장악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려면 모스크바 차관이 이승만·안창호에게 들어가면 절대 안 됐다. 그래서 모스크바 차관을 중간에서 횡령하면서 그 차관은 차관이 아니라 코민테른 공작금이라는 거짓 논리를 선전했던 것이다.
...한형권 역시 모스크바 차관은 상해임정을 원조하는 차관이라고 했다. 그 외에 같은 한국공산당에 있던 여운형 역시 차관이라고 했다. 1929년 8월 6일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여운형은 “그 돈은 러시아 정부가 임시정부를 원조하기 위한 돈이었는데, 이것을 김립 등이 속이고 횡령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여운형은 1929년 8월 1일 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국제공산당은 이전에 이동휘 일파가 40만원을 사취(詐取)했던 것에 대해 체포할 수 있었지만, 노농정부(勞農政府-소비에트러시아)는 가정부(假政府-상해임시정부)의 유력자를 체포하는 데 있어 조선민중의 감정을 해칠 것을 두려워해 이것을 그만두고 이동휘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추방했다”고 증언했다. 모스크바 차관을 코민테른 공작금이라 거짓 선동하는 이동휘를 코민테른에서 체포하려 했지만 소비에트러시아 정부가 막았다는 증언인데, 이는 코민테른이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도 차관으로 생각했다는 의미와 같다. 당연히 상해임정도 차관이라 생각했다. 요컨대 모스크바 차관을 코민테른 공작금이라 주장한 측은 모스크바 차관을 횡령한 김립과 이동휘 일파뿐이었던 것이다.
...김철수의 회고록인 지운(遲耘) 김철수에 의하면, 김립은 모스크바 차관을 운반하다가 중간에서 “사람을 보내라. 여그 시방 백당(白黨-러시아 백군 세력)들이 있은게. 서로 만나서 주고받고 해야 되겠다”는 소식을 보냈다고 한다. 그 소식이란 김립이 이동휘에게 보낸 것이었다. 이동휘가 그 소식을 접수한 시점은 1920년 11월 중순경이었다. 따라서 이동휘는 모스크바 차관 문제는 물론 동아총국 문제도 1920년 11월 중순경 인식했다고 이해된다. 그때부터 이동휘는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을 제압하고 상해임정을 장악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김립이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결정한 일들은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했다. 우선 치타에 설치하려던 동아총국은 러시아공산당 원동국의 거부로 무산됐다. 원동국은 ‘권한 이상의 범위를 포함했다’는 이유로 동아총국 설치를 거절했다. 동북아 공산혁명을 주도할 동아총국은 당연히 코민테른 소관이기 때문이었다.
신명호. "신명호의 상해임정 27 년사(18) 모스크바 차관을 횡령해 상해임정 장악하려 한 이동휘" 월간중앙 (2023)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8281
...김립의 말에 한형권은 낙심천만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차관은 임시정부를 위한 것인데, 그 임시정부 주역들이 탈퇴해 현상유지도 불가능하다면 아직 수령하지 못한 모스크바 차관 160만원이 수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형권은 “내가 모스크바 당국과 교섭한 것은 성공이다. 계속적으로 무장(武裝), 금전 등 원조를 받을 터인데 이제 우리 정부 자체의 분열이 이처럼 됐으니 이를 장차 어찌할까? 지금이라도 무슨 방법으로든지 임시정부의 원상을 회복하는 것이 최선 급무이니 군(君)은 나의 정부에 대한 보고서와 제1기 차관의 일부인 40만원을 가지고 곧 길을 돌리어 상해로 가서 원상회복의 공작에 주력해 우리의 뜻대로 그것을 완성하면서 내가 다시 모스크바에 가서 160만원 잔액을 휴대하고 상해로 돌아갈 시기를 고대해달라”고 했다.
이 같은 한형권의 대답을 생각해보면 김립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립은 한형권이 수령해온 모스크바 차관 40만원을 중간에서 횡령하려 거짓말했던 것이다. 다만 그 거짓말은 김립 혼자 지어낸 것이 아니라 이동휘와 밀약한 결과로 이해된다. 한형권이 상해로 온다면 모스크바 차관이 임시정부로 들어갈 것이기에 김립과 이동휘는 중간에서 횡령하자고 밀약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형권을 파견한 주체는 자신들이기에 자신들이 모스크바 차관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모스크바 차관이 코민테른 공작금이 아니라 소비에트러시아 차관이라는 사실은 김립 자신부터 잘 알고 있었다. 김립은 웨이하이(威海)에 있던 이동휘에게 1920년 7월 19일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만일 차관만 되면 이승만, 안창호 상관할 것 없이 하여볼 수도 유(有) 하오다. 여하간 차관 일절(一節)은 즉금(卽今) 운동 중이오다”라고 했다. 위에서 보듯 김립과 이동휘가 모스크바 차관을 받으려던 목적은 무엇보다도 이승만·안창호를 축출하고 상해임정을 장악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려면 모스크바 차관이 이승만·안창호에게 들어가면 절대 안 됐다. 그래서 모스크바 차관을 중간에서 횡령하면서 그 차관은 차관이 아니라 코민테른 공작금이라는 거짓 논리를 선전했던 것이다.
...한형권 역시 모스크바 차관은 상해임정을 원조하는 차관이라고 했다. 그 외에 같은 한국공산당에 있던 여운형 역시 차관이라고 했다. 1929년 8월 6일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여운형은 “그 돈은 러시아 정부가 임시정부를 원조하기 위한 돈이었는데, 이것을 김립 등이 속이고 횡령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여운형은 1929년 8월 1일 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국제공산당은 이전에 이동휘 일파가 40만원을 사취(詐取)했던 것에 대해 체포할 수 있었지만, 노농정부(勞農政府-소비에트러시아)는 가정부(假政府-상해임시정부)의 유력자를 체포하는 데 있어 조선민중의 감정을 해칠 것을 두려워해 이것을 그만두고 이동휘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추방했다”고 증언했다. 모스크바 차관을 코민테른 공작금이라 거짓 선동하는 이동휘를 코민테른에서 체포하려 했지만 소비에트러시아 정부가 막았다는 증언인데, 이는 코민테른이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도 차관으로 생각했다는 의미와 같다. 당연히 상해임정도 차관이라 생각했다. 요컨대 모스크바 차관을 코민테른 공작금이라 주장한 측은 모스크바 차관을 횡령한 김립과 이동휘 일파뿐이었던 것이다.
...김철수의 회고록인 지운(遲耘) 김철수에 의하면, 김립은 모스크바 차관을 운반하다가 중간에서 “사람을 보내라. 여그 시방 백당(白黨-러시아 백군 세력)들이 있은게. 서로 만나서 주고받고 해야 되겠다”는 소식을 보냈다고 한다. 그 소식이란 김립이 이동휘에게 보낸 것이었다. 이동휘가 그 소식을 접수한 시점은 1920년 11월 중순경이었다. 따라서 이동휘는 모스크바 차관 문제는 물론 동아총국 문제도 1920년 11월 중순경 인식했다고 이해된다. 그때부터 이동휘는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을 제압하고 상해임정을 장악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김립이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결정한 일들은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했다. 우선 치타에 설치하려던 동아총국은 러시아공산당 원동국의 거부로 무산됐다. 원동국은 ‘권한 이상의 범위를 포함했다’는 이유로 동아총국 설치를 거절했다. 동북아 공산혁명을 주도할 동아총국은 당연히 코민테른 소관이기 때문이었다.
신명호. "신명호의 상해임정 27 년사(18) 모스크바 차관을 횡령해 상해임정 장악하려 한 이동휘" 월간중앙 (2023)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8281
지운 김철수에서는 이동휘를 “그는 돈을 모른다. 돈이라고는 만지지 않으려 한다. 알려고도 아니한다”고 평가했다. 이는 모스크바 차관을 비롯한 모든 자금에 대해 이동휘는 간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곧 모스크바 차관을 김립이 독단적으로 운영했다는 의미와 같다. “이제 40만원 받아 왔는디(중략) 김립이 마음대로 해. 고것이 좀 잘못됐어”라는 지운 김철수의 언급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한편 지운 김철수에는 “날마다 상해에 그 큰 선수공사, 요녕공사 그런데 가서 요리 집에 가서 회의를 허는디, 김립이가 돈을 가지고 씨인게 냄새가 벌써 난단 말이여. 그러게 다름 사람들은 다 말을 듣는디, 신익희하고 이시영이, 이동녕은 한 번도 출석을 안했다. 이시영이허고가 틀어. 애초에 도둑놈의 돈 쓰지 않겠다 헌 사람. 안창호는 그냥 그 자리에 와 희의허러. 안창호는 좀 더 너그럽거든. 그렇게 ‘돈이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이상시러운 돈이다’ 허도, 회의하는디 안창호는 와. 꼭 그래서 회의를 허는디 그게 임시정부 개조론”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에 의하면, 김립은 횡령자금으로 임정 요인들을 대접·포섭했다. 이동휘 역시 그랬다. 훗날 이동휘는 당시 임정 요인들을 대접하기 위해 100원 정도 썼다고 회상했는데 김립 역시 그 정도 썼을 것이다. 출장비로 사용된 횡령자금만도 1만1500원이나 됐다. 당시 서울에서 상해까지 10원이면 충분했으니 이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신명호. "[신명호의 상해임정 27 년사 ⑲] 반공친미 노선 천명해 임정 지킨 이승만 _ 대통령 축출 공작 실패하자 이동휘, 총리직 사퇴하다." 월간중앙 (2023)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8430
한편 지운 김철수에는 “날마다 상해에 그 큰 선수공사, 요녕공사 그런데 가서 요리 집에 가서 회의를 허는디, 김립이가 돈을 가지고 씨인게 냄새가 벌써 난단 말이여. 그러게 다름 사람들은 다 말을 듣는디, 신익희하고 이시영이, 이동녕은 한 번도 출석을 안했다. 이시영이허고가 틀어. 애초에 도둑놈의 돈 쓰지 않겠다 헌 사람. 안창호는 그냥 그 자리에 와 희의허러. 안창호는 좀 더 너그럽거든. 그렇게 ‘돈이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이상시러운 돈이다’ 허도, 회의하는디 안창호는 와. 꼭 그래서 회의를 허는디 그게 임시정부 개조론”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에 의하면, 김립은 횡령자금으로 임정 요인들을 대접·포섭했다. 이동휘 역시 그랬다. 훗날 이동휘는 당시 임정 요인들을 대접하기 위해 100원 정도 썼다고 회상했는데 김립 역시 그 정도 썼을 것이다. 출장비로 사용된 횡령자금만도 1만1500원이나 됐다. 당시 서울에서 상해까지 10원이면 충분했으니 이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신명호. "[신명호의 상해임정 27 년사 ⑲] 반공친미 노선 천명해 임정 지킨 이승만 _ 대통령 축출 공작 실패하자 이동휘, 총리직 사퇴하다." 월간중앙 (2023)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8430
3.2. 김립 횡령 무고설
좌익 정치인을 백색테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공금 횡령자'로 낙인찍어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게 했다. 사건의 진상은 모스크바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상하이파 공산당에 지급한 독립운동 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가 탐내다 일으킨 백색테러였다.김립이 다른 동료들과 길을 걷던 중에 잠복해 있던 네 명이 튀어나왔는데 둘은 앞을 가로막고 다른 둘은 퇴로를 차단하려고 뒤를 가로막았으며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이 김립을 쏘았다. 김립의 시신에선 무려 12발의 총상이 발견됐다.
일본 육군 헌병대에 ‘배일흥한(排日興韓)을 기도하는 유력자’라고 평가됐을 정도의 거물 독립운동가가 이렇게 맥없이 죽고 말았다. 당시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일간지 선바오는 사건 직후 한국인 '양춘산'의 피살을 보도했는데 양춘산은 김립이 중국인으로 위장하려고 만든 가명이다. 이후 김구는 김립을 공금 횡령범이라고 주장했고 그 내용을 《백범일지》에도 기재했다. 김립은 최근까지도 독립운동 자금을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누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립이 살해당한 현장에는 동료 세 명이 있었는데 김철수, 유진희, 김하구다. 여기서 김철수는 '모스크바 자금이 임시정부 공금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김철수는 모스크바 자금을 직접 관리했다.
그리고 소련 붕괴 후 그 사건과 관련된 문서가 구 코민테른 문서 보관소에서 발굴되었다. 국제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 오토 빌레 쿠시넨이 1922년 5월 11일자로 작성한 문서다. 이 문서에서는 문제의 400,000 루블과 200,000 루블이 모두 상하이파 공산당에 지급된 것이라 한다. 결산 보고 의무도 상하이 임시정부가 아닌 상하이파 공산당에 부과되어 있다. 즉, 이게 사실이라면 김립은 공산당 자금으로 쓰라고 소련이 준 돈을 임시정부에 안 바쳤다는 이유 하나로 횡령죄를 뒤집어쓰고 사살당한 것이다.
다만 1920년 6월 블라디미르 레닌은 코민테른 제2차 대표대회에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제시하여 "코민테른은 식민지 및 낙후한 나라들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와임시적 동맹을 맺되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되며 가장 맹아적인 형태에 있어서까지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독자성을 무조건적으로 보전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여 통일전선을 통한 동아시아에서의 혁명을 추진한다''고 하였고 1921년 6~7월 코민테른의 제3차 당대회는 후퇴기 전술을 제시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 방침을 채택하였으며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은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1차 국공합작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국제공산당은 모스크바 자금의 정산 실무를 극동 공화국 외무장관 얀손에게 위임했다. 안손이 주도한 자금결산규명위원회가 결과 보고서를 제출한 시점은 1922년 8월 18일인데 이 보고서에도 모스크바 자금의 수령자가 상하이파 공산당이라고 나왔다. 결국 모스크바 자금의 처분권자가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인 상하이파 공산당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사건은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에서 좌파 성향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단체인 상하이파 공산당에게 지급한 400,000 루블의 자금을 우파 성향 상하이 임시정부가 가로채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의 과정에서 임시정부 공금 횡령자라는 낙인 때문인지 김립의 서훈 상신이 기각된 바 있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김구에게 잘못 찍혀 사후에도 공금횡렴범으로 부당하게 취급당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근거다.
3.2.1. 횡령 무고설 측의 평가
독립운동의 거두로 추앙받는 김구가 저지른 테러 중 하나. 애초에 이걸 부정하면 같은 독립운동가인 김립도 부정하게 된다. 우파 민족주의와 좌파 공산주의로 분열된 독립운동가 세력의 대립 속에 한 독립운동가가 잔혹하게 암살당한 안타까운 사건이다. 동시에 자금 관리나 미주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도 하찮게 보는 측면도 포함된 심각한 요소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지도는 매우 적으며 정확한 사실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문 편이다.한국민족문화 대백과의 김립 부분은 다음과 같다.
4. 김구 변호론
사할린부대 문서에서 보듯 상대진영의 폭력성이 압도적임에도 김구의 폭력성의 편향적으로 강조된다는 변호가 있다. 피장파장의 오류를 적용시키기엔 상해파의 범죄가 압도적이다.또한, 김립 변호론자들이 고의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사실도 있는데, 이동휘와 김립 일파는 자신들의 독립자금을 위해 다른 조선인을 습격하고 강탈하는 만행을 마다하지 않은 과격한 단체였다.이동휘와 김립의 독립운동 방법론 중 하나는 조선인이 대한 테러와 강탈이었다. 그들의 활동자금을 위해선 조선인들을 습격해서 강탈하는 강도짓도 서슴치 않았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동휘는 강직한 무사였다...1905년에 있었던 또 다른 사건은 그의 성격에 변함이 없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는 김립, 장기영과 함께 북간도 라지구에서 이종호가 낸 1,000원을 가지고 대순학교를 설립했는데 학교 운영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가로 출자를 요구했는데 이종호가 이를 거절하자 이동휘는 휘하 20명을 동원하여 이종호의 집을 습격했고 이종호는 국권회복운동에서 손을 떼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이정식(2008),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199쪽
이정식(2008),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199쪽
상호 문제가 있었음에도 김구만 일방적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또한 김립 피살 시기에서 이미 김구와 김립은 상호적대적인 세력이지 동료가 아니다.
김립 피살을 비판하는 진영은 윤봉길 의거도 동일한 맥락으로 비판하는데 상해파의 범죄는 언급하지 않는다.박노자, "이완용 테러를 막다가 죽은 인력거꾼 박원문과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에서 무고하게 죽은 일본인들"
김립 피살사건과 윤봉길 의거를 같은 맥락으로 물타기를 시작한 건 김구 변호측이 아니라 김구 비판 측인데 이들은 윤봉길 의거는 비판하면서 상해파 부대의 범죄에서 침묵하는 이중잣대를 사용한다.
5. 참고 문헌
- 임경석, [선택! 역사를 갈랐다] (35)독립운동가 ‘김립’ vs 그를 비난한 ‘김구’
- 반병률, 金立과 항일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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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명호는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