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79년 2월 15일 부산직할시 서구 암남동 송도유원지 인근에서 40대로 추정되는 신원미상 여성의 토막시신이 발견된 사건. 이후 7년여만에 범인을 검거하는데 성공했다.2. 경과
2.1. 시신 발견
이후 김씨가 최씨를 따라 부대자루가 있는 곳으로 가 부대자루를 만져보자, 김씨는 마치 고깃덩어리같이 뭉클한 촉감이 든다고 말했고 이에 이상함을 느낀 최씨가 경찰에 신고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당시 서부경찰서 송도파출소에 근무하던 전성배 순경이 가위를 사용해 부대자루를 봉합하고있던 끈을 풀고 자루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자 토막난 사람의 한쪽 팔이 보였다.
문제의 부대자루 안에는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사체가 여섯 토막이 난 채 담겨있었다. 발견된 사체는 알몸 상태로 누군가 몸통에서 머리와 양손 양팔을 분리해내었고 옷과 같은 유류품이나 따로 유기된 부위는 없어보였으나 심각한 것은 토막을 낸 것 말고도 더 있었다.
우선 시체의 얼굴 상태였다. 누군가 여성을 살해하고 망치와 같은 둔기로 여성의 얼굴을 수차례 내리쳐 여인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터지고 짓물러져 있었다. 또한 시신을 여섯 토막 낸거 외에도 토막낸 양손 부위에서 손가락 열 마디는 따로 또 토막내 다른 어딘가에 유기했다는 것이다. 열 손가락의 끝 마디, 그러니까 손톱이 있는 부위만 잘려나간 것을 봐서는 범인이 작정하고 시신의 신원 파악을 어렵게 하기 위해 이렇게 했다는 걸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여인은 40대로 추정됐으며 사인은 머리를 둔기에 강하게 맞아 사망한 두부외상으로 의심된다는 부검의의 소견을 받았다. 키는 153cm 정도이고, 머리는 19cm길이의 검은 파마머리에, 왼쪽 허벅지에 반달형 흉터가 있으며 사망 추정시간은 발견일로부터 약 3~4일 전이라는 것도 알아낼 수 있었다.
2.2. 미제사건으로
경찰은 또 사체를 담았던 부대자루 또한 유력한 증거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1] 몸통을 싼 부대는 일본에서 수입한 화공 약품을 넣었던 녹두색 PVC부대로서 겉면에는 'SEED SYLOID NICRON SEED FUGI DAVISON CHEMICAL NAGOYA JAPAN 8K'라고 쓰여 있고, 길이 79cm, 폭 58cm의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봉합부는 길이 15m 두께 1mm의 화물포장용 비닐끈으로 윗부분과 중간 끝 부분 등 3곳을 짐을 싸듯 꽁꽁 묶어 결합했다. 또 다른 부대 한개는 일반 농가에서 사용하는 국산 베이지색의 PVC부대로 곁면에 아무런 표시가 없고, 길이 80cm, 폭 54cm였다.그렇게 부대자루를 단서로 수입 화공 약품 취급업소, 약국 등을 수사했지만, 일본에서 들여온 플라스틱 원료 부대이고 가내 공업 공장에 공급되던 원료라 사용처 파악에 실패해 부대자루는 더 이상의 증거는 남기지 않았다.
경찰은 시신이 토막난 형태가 해부학적으로 시신을 해체할 때의 해체법과 유사하고, 부대자루에 혈흔으로 추정되는 것은 전혀 검출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범인이 시체를 물 또는 어떤 화학약품을 이용해 씻겨낸 후 방부제까지 뿌려 정밀하게 토막내 유기한 것으로 보고 해부학적 지식을 가진 의료계 종사자나 화공약품을 다루는 기업에서 근무하는 인물이 범인일 것으로 추정, 탐문수사했으나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몽타주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하는 등 공개수사에도 노력을 기울였지만 진전은 없었다. 시신 유기 지점에서 고작 100m떨어진 곳에 송도파출소가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부산 경찰들에게는 부끄러운 사건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 사건은 격동의 시기를 거치며 경찰력이 치안유지와 대공방첩에 집중되자 조용히 묻혀졌고, 이후 5공화국 시대에도 진전이 없어 끝내 영구미제로 남는 듯 하였다.
2.3. 범인 검거
그로부터 약 6년이 지난 1985년 6월 29일 새벽, 대구직할시 서구 비산3동에 위치한 오뚜기 통닭이라는 식당에서 식당 여주인인 이순환(당시 49세)씨가 숨진채 발견된다. 경찰은 용의자를 심문하던 도중 석창순(당시 50세)이란 자가 자신과 술을 마시던 도중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고 털어놨었다는 뜻밖의 진술을 얻어내 석창순의 주민등록을 확인해 보니 이미 말소되고 없었다. 경찰은 절도전과가 5개 있는 석창순이 아내가 행불 처리된 이후 주민등록이 말소되기까지 주소를 7번이나 옮긴 기록이 있는 등 행적이 수상한 것을 보고 그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9월 26일 붙잡아 연행했다. 석창순은 서로 가자마자 자신이 아내를 죽인 사실을 털어놨으며 그렇게 밝힌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우선 송도에서 발견된 신원미상 40대 여인의 사체는 석창순의 아내 최계화[2]가 맞았다. 1979년 2월 10일, 정월대보름날이었던 이날 석창순은 외지에 일을 나갔다 오랜만에 대구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에 아이들은 없고 아내도 보이지 않아 아내와 아이들을 찾아다니다가 아이들을 결혼한 본인의 동생 집에서 찾았고, 추가로 아내를 수소문 하다가 며칠이 지난 13일 오후에 동구 방촌동 시장통에서 술에 취해있던[3] 아내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왔다.
비록 석창순 가족은 단칸방에 세를 들어 살고 있는 처지였지만,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내가 어째서 아이들을 동생 집에 맡기고 집을 나가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알수 없던 석창순은 일단 몸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더러운 아내에게 빨리 씻고 오라고 지시했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남편이 시키는 대로 차가운 물로 씻고 들어온 아내를 향해 석창순은 "그동안 무엇을 했길래 집에 들어오지 않았느냐"며 소리를 치며 버럭 화를 냈다. 이때 젖은 몸을 닦지도 않고 서있는 아내의 이마를 우측 손등으로 내려쳤더니, 마침 아내가 서있던 비닐 장판에 물기가 있어 미끄러운 상태에서 아내는 뒤로 넘어졌다.
이때 아내는 뇌진탕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 아내를 흔들어 깨운 석창순은 도무지 아내가 일어나지 않자 무서워져[4] 밖으로 뛰쳐나가 동네 술집에서 혼자 막걸리를 먹으며 두 시간 뒤 취하여 돌아왔는데도 아내는 그대로 누워있었다.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 시점에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석창순도 아내가 죽었다고 판단해 파출소에 신고를 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집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비산 파출소 앞에까지 비틀거리며 갔지만 이 현장을 신고하면 자신이 전과 5범인 걸 감안해 무거운 형량을 선고받을 것이 두려웠던 나머지 신고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석창순이 생각한 것이 바로 시신을 토막내 유기하자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범행이 일어난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유기하면 알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하여 대구 본인의 집에서 사체를 여섯토막 낸 뒤 여섯토막난 몸체는 위에서 설명한 두 부대자루들에 나눠서 담고, 따로 떼어낸 손가락 10개는 비닐봉지에 넣어 집 앞 쓰레기 더미에 던져 놓고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그 부대자루를 싣고 동대구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5][6]
제일 빠른 시간에 움직이는 고속버스를 찾다 보니 천일고속이어서 발권실에서 탁송할 짐이 있다고 한 후 화물칸에 실으려고 하니 화물 담당자가 뭔가 물어 고기라고 답했다. 생물은 탁송이 안된다고 하니 본인이 직접 가지고 간다고 하며 고속버스에 실어 부산으로 갔다. 범일동 부산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린 뒤, 주변에 있는 리어카 짐꾼을 불러 싣고는 사람들이 없는 곳을 물색, 부산해양고등학교 인근에 짐을 내려 달라고 해 짐꾼을 보내고 나서는 하수구에 밀어 넣고 그대로 되돌아와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로 왔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석창순이 진술한 살인 및 유기의 과정이었다.
현장검증 이후 재판을 받기 전에 석창순은 본인이 희망하여 당감동에 위치해 있는 부산지방경찰청 시체 부검실에 찾아갔다.[7] 그곳에서 자신이 토막내 유기한 아내 최씨의 사체[8]를 앞에 두고 제사상을 차린 뒤에 절을 하며 사죄를 했다. 이후 그의 아들이 사체를 인수해 화장했다.
2.4. 판결
이 사건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범인 검거까지 꼬박 6년 7개월이나 걸린 사건이었다. 그때문에 여러 죄목의 공소시효가 지나 사체 오욕, 사체 유기의 죄는 공소권 없음으로 처벌하지 않고 상해 치사로[9] 징역 10년형을 선고했으며,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88년경 석창순은 간 질환으로 가석방되었다. 이후 석창순은 몇 년이 안가 여관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다.[10]3. 여담
이전까지는 토막 살인의 실행법이 시신을 두토막이나 세토막 내는것에 그쳤다면, 이 사건은 나날히 발전하는 과학수사에 맞춰 범인들의 은폐를 위한 훼손방법도 더욱 교묘해지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최초의 토막살인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당시 특진이나 시험, 심사 승진이 없던 시기임에도 1985년 12월 17일 조장인 임 모 경장은 경사로 특진을 하게 되고, 사건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형사들은 장관,경찰청장,지방청장,서장 표창 등 온갖 표창장을 받아 한동안 미제사건 수사의 우수 사례로 꼽히기도 했다.
3.1. 이양길 토막 살인사건
사건이 있고 4개월 후인 1979년 6월 19일 부산직할시 동래구 칠산동에서 또 여성의 토막사체가 발견되었는데 시신의 훼손 상태가 이 사건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아 동일범일 가능성을 의심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며칠 안가 바로 범인이 검거되었는데 처음에는 한 목욕탕의 20대 보일러공이 자백을 해 검거되었으나 이 사람은 자백을 횡설수설 하는데다가 경계선 지능장애가 의심되는 사람이어서 자백의 신빙성이 강하게 의심되었다. 그 후 시신의 지문을 어렵게 채취, 감식을 의뢰해 유력 용의자가 자백을 한 남성이 아닌 다른 26세의 철강회사 직원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려 6월 27일 진범인 26세 이양길을 검거하였다. 자세한 것은 이양길 토막 살인 사건 참조.3.2. 부산 송도 해안 토막 살인사건
2년 후인 1981년 8월 23일 오후 4시 30분경에도 부산직할시 영도구 영선동4가 송도 해안에서 수영을 하던 이모군(당시 14세) 등 중학생들이 해안에서 여섯토막난 채 떠밀려온 남성추정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으나, 단지 발견당시 부산 해안의 풍향조류 등을 분석해 시체가 외항[11]쪽에서 떠밀려 왔을거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끝내 영구미제로 남았다.[12]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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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체를 비닐로 먼저 싸고 다시 부대자루에 넣었다.[2] 사건 발생 당시 42세[3] 처음에는 비산동 북부정류장 부근 모 여인숙에서 투숙하는 걸 찾아냈다고 증언했다.[4]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않는 괴이한 행동이지만 이 당시만 해도 이런 상식적인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 사람이 다치면 즉각 119에 신고하거나 병원에 데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건 기본이고, 뇌진탕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했다. 경찰은 살인 및 사체유기로 석창순을 입건했지만 재판부는 이런 석창순의 증언을 인용해 석창순에게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고 상해치사죄를 적용했다. 석창순이 처음에 경찰에서는 아내를 주먹으로 마구 때려 숨지게했다고 했으나 이후 재판에 가서는 아내를 내려치자 뇌진탕으로 사망한 것 같다고 진술을 번복한 탓도 있다.[5] 어떻게 택시에 큰 부대자루를 들고 타는 손님을 택시기사가 의심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당시에는 보따리상이 워낙 많아서 그냥 보따리상이 장사 구역을 옮기기 위해 이동하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석창순은 당시 사체가 굳고 난 뒤 사체를 잘랐기 때문에 피가 굳어 많이 흘러내리지 않았고 날씨도 겨울이라 피 냄새도 그리 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6] 다만 토막 시신 발견 이후 부산 전체가 이 사건으로 떠들썩해지자 대구가 아닌 부산에서 자신이 토막시신 유기범을 태운 것 같다는 택시기사(당시 32세)가 등장했는데, 그 증언에 의하면 14일 오전 9시경 자신이 부산시 중구 보수동 주택가에서 부대자루 2개를 들고있는 40대로 보이는 남성을 시신이 발견된 콩나물 공장 앞까지 태워줬다는 것이었다. 다만 사건의 전말이 다 드러난 지금의 시선에서 관찰하자면 석창순이 버스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또다른 이동수단을 물색했을 것으로 보이는 부산고속버스터미널은 1979년 당시에 중구 보수동과는 꽤 거리가 있는 동구의 최북단 범일동의 부산시민회관 인근에 있었고 이후 1984년에 동래구 온천동으로 이전하기 때문에 좀 엉뚱한 진술 같아 보이는건 사실이다. 물론 지금은 종합버스터미널로 합쳐져 금정구 노포동에 있지만 결국 중구 보수동과는 별 상관 없는건 마찬가지. 또한 석창순의 증언에 따르면 석창순은 부산에서는 택시를 포함한 다른 교통은 이용하지 않고 오직 리어카 기사와 함께 동행해 동구 범일동에서 유기장소인 서구 암남동까지 이동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부산에서부터의 행적은 택시와는 상관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부대자루를 유기한 뒤 다시 버스터미널로 돌아가는 과정에서는 택시를 탔을 수 있지만 그건 애초에 진술과는 다른 얘기. 그나마 한 가지 가정해볼 수 있는건 석창순이 리어카를 불러 무작정 유기장소를 물색했다는 것은 잘못된 증언이었고, 처음에는 유기장소를 부산 어디라고 딱 짚어 정해놓지 않았던 석창순이 범일동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무작정 도보로 걷거나 택시를 탔고, 보수동 주택가 골목에 유기할 장소가 있는지 물색하다가 보수동은 아니다 싶어 탑승한 택시가 바로 이것이며 그때 즉흥적으로 정한 유기 장소가 바로 암남동의 콩나물 공장 인근이었다는 것이다.[7] 그 당시 당감동에는 화장장이 있어 시체 부검실도 화장장 옆에 있었다. 현재는 화장장은 금정구 부산영락공원으로 이전했고 화장장 부지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가 부전동(현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부지)에서 이전해와 지금까지 개성고등학교로 이어져 오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교로도 유명한데, 노 대통령은 부전동 교사(校舍) 시절에 졸업했다.[8] 포르말린 안에 담궈져 있었다고 한다. 방부 처리를 한듯 한데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었던지 당시로썬 드물게도 사건발생 7년이 지난 시점에까지 경찰청은 시신을 무연고 화장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다.[9] 이 또한 당시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7년이었기 때문에 고작 3~4개월 남아있었다. 즉 몇개월만 늦게 잡았다면 이 사건에 대해 죄목 전체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을 것이다.[10] 이 사건의 모방범죄를 저지른 이양길이 석창순이 검거되던 그해 교도소에서 사형된 것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운명은 참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석창순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가석방 사유로 인정되었던 간 질환은 범행 후 7년 가까이동안 맨날 죄책감에 술을 마시며 생긴 질병이라고 하는데, 살인죄가 인정이 되지않아 상해치사죄로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받았다고는 하나 결국 참혹한 범행을 저질러 연인의 생명을 해하고는 본인의 인생 또한 파국을 맞게 된 종국의 결말은 비슷한 것이었다.[11] 영도에 살아본적이 없거나 선박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수도 있는데, 지금 영도의 외항이라 하면 해양대학교와 부산해양경찰서가 있는 곳 부근이다. 그러나 부산해양경찰서는 1999년에 북항 제8부두에서 외항으로 이전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없었고, 무엇보다 그 곳 부지는 80년대 전후 개발한 간척지로 70년대 말 기준 영도의 외항은 지금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당시는 동삼초등학교부터 동삼동 패총 전시관을 따라 해안선이 형성되어 있으며 조도는 배를 타고 오갈수있는 유인도였다. 경찰은 당시 외항쪽에 정박한 선박들을 탐문수사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12] 사실 외항에서 떠밀려왔다는 추정이 사실이라면 물론 외항 인근에서 조업하는 선박에서 사건이 벌어지거나 유기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영도에서 벗어난 곳(수영구 인근이나 해운대 등)에서 유기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는 없다. 또한 아예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에서 시체가 떠밀려 왔을 가능성도 약간이나마 있는데, 실제로 영도 자체가 일본 대마도와 가까운 곳인건 물론이거니와 다른 일본의 도도부현과도 밀접한 위치에 있기때문이다. 당시에도 태종대 해안가에서는 일본에서 과자 봉지나 페트병같은 생활 쓰레기는 물론 라디오나 냉장고같은 대형 폐기물이 통째로 밀려와 주민들이 골머리를 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