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
이름 | 온보현(溫保鉉) |
출생 | 1957년 4월 6일 |
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 선암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 선암리) | |
사망 | 1995년 11월 2일 (향년 38세) |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서울구치소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봉성 온씨 |
학력 | 초졸 |
가족 | 6남매 중 차남 |
피해자 | 사망자 2명 부상자 4명 |
범죄유형 | 연쇄살인 |
형벌 | 사형(교수형) |
[clearfix]
1. 개요
"내 나이만큼 사람들을 죽이겠다."[1]
대한민국의 연쇄살인범.2. 생애
연쇄택시강도사건 온보현의 성장배경전라북도 김제군 금구면 선암리(現 김제시 금구면 선암리) 봉성 온씨[2] 집성촌에서 5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했다. 이 때문에 학력미달로 군대도 면제되었다. 어릴 때 온순하고 착했던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예쁨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의 삶에서 항상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목격한 폭력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심하게 때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란 그는 아버지에 대해 분노를 품고 자랐다. 그의 분노는 24살이었던 1981년에 결국 폭발해 아버지와 심하게 싸운 뒤 '다시는 집에 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혈서를 써 놓고 집을 나가 당시 빈민가였던 서울의 수유리로 올라왔다고 한다.
1984년,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가 독약을 마시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키웠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공사판에서 노동을 하는 등 막일을 하다 택시 회사에 들어갔다. 퇴직을 한 그는 채소 사업을 하였는데 사업이 잘 되지 않아 결국 경제적, 심리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평소에도 그는 가족, 친구, 친척들과 연락을 끊은 채 고립된 삶을 살았기에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온보현은 사건 당시 나이 37세였고 거주지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1동이었다.[3]
2.1. 연쇄살인범으로서의 성향
온보현의 범행 동기는 크게 두 가지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 해소와 영국의 콜린 아일랜드처럼 유명세를 얻는 것이었다.그는 붙잡힌 뒤 "79년부터 1년동안 여자를 사귀며 택시운전을 해 왔는데, 이때 상계동 부근에서 교통사고를 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재판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이로 인해 사귀던 여자와 헤어졌다. 양심적으로 살아오려 했으나 사회를 보는 눈이 바뀌고 특히 여자가 미워졌다."고 주장하며 여성에 대한 증오를 드러냈다. 온보현이 1980년 교통사고를 내 6살 어린이에게 부상을 입힌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는 사건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붙잡힐 때를 대비해 범행 일지를 작성하는 등 일종의 극장형 범죄를 저질렀으며 지존파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지존파는 6명이서 5명을 죽였지만 자신은 혼자 2명을 살해했으니 계산해보면 자신이 지존파보다 더 세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4] 또한 그는 "아들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아버지가 다시는 고향에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십시오"라고 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심했다#. 그의 바람대로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 연쇄살인 역사에 똑똑히 남긴 했다.
2008년 방영된 tvN의 범죄 재연 다큐드라마 범죄의 재구성 온보현 에피소드에 삽입된 인터뷰에서 한 범죄 심리학자는 그의 불안정한 성장 과정을 언급하면서 그가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면서도 온보현이 기본적으로 도덕이나 법률을 무시하는, 즉 상대방에 대해 분노와 공격성을 표출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불행한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을 겪었다고 해서 근본이 선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게다가 살인의 대상이 여성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감안하면 성장 배경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유영철의 범행 심리에서도 드러나듯 연쇄살인마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그들 역시 범행을 저지르다 자신보다 육체적으로 강한 이들을 만나 도리어 제압당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이는 범행이 미수에 그치게 되면 몹시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면서 연쇄 살인의 휴식기에 돌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온보현 또한 희생자의 거센 저항으로 부상을 입으면서 연쇄살인을 중단하게 되었고 이후 자수하기에 이르렀다. 즉 온보현의 사례는 '여성에 대한 깊은 분노가 원인으로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연쇄살인마의 보편적인 사례가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보편적인 상식으로 내면화해 온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자신보다 약한 상대만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러야 하기 때문에 여자를 타겟으로 하게 되는' 연쇄살인마의 보편적인 사례인 것.
3. 사건 일지
- 1994년 8월 13일경
그는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약 20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를 만났는데 서울에 사는 아버지가 이날 다시 고향에 내려온 것을 보고 화가 났다. 이때부터 살인 계획을 세웠고 숙부 집에서 4일 동안 얹혀 살며 이웃으로부터 삽과 낫을 빌려 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구덩이를 팠다. 그의 고향이 곧 그의 본관이어서 조상들의 묘소가 뒷산에 있었는데 숙부는 그가 벌초를 한다고 생각하고 기특하게 여겼다.
- 1994년 8월 5일 ~ 15일
그는 곧 구체적인 살인 계획을 세우고 살인 수첩까지 장만하였다. 구체적인 살인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중 그는 그가 전에 했던 택시 기사 일을 연상하고는, 차고에 세워져 있던 강북 수유리의 국제운수 소속의 서울 1 바 1287 스텔라 차량을 절도하였고 곧이어 미사리 쪽에서 대진운수 경기 1 바 1237로 번호판을 위조하였다. 1994년 당시는 택시 범죄가 기승을 부린 동시에 차량 번호판 위조가 성행하던 시기였다. 가공하기 쉬운 납의 특성을 이용해 기존 번호판 위에 납판을 대고 문지르기만 해도 간단히 가짜 번호판을 찍어낼 수 있었고, 더 간단하게는 기존 번호판에서 숫자를 조작해서 가짜 번호판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 경우는 주로 숫자 3을 8로 바꾸는 수법을 많이 썼다고 한다.
- 1994년 8월 28일경
그는 강동구 암사동 사거리에서 한 명의 여성을 태웠다. 그는 흉기로 여성을 겁박해서 학생증을 뺏은 후 그녀를 야산으로 끌고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차문을 여는 순간 피해자는 살려 달라고 크게 외치며 영동고속도로 이천 부근에서 도망쳤다. 그는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를 뒤쫓지 않은 채 그대로 도주하였다.
- 1994년 9월 1일
이후 그는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곤지암 주차장에서 에스페로 택시와 택시 회사 사명과 번호판을 바꾸고 다음 날 새벽에 다시 거리로 나갔다. 다음날 새벽 1시~3시경 그는 43세 권모 씨를 차에 태워 구리~안산고속도로 입구에서 성폭행을 한 차례 한 후 그의 고향 쪽인 김제 영천마을 야산으로 피해자를 끌고 가서 앞서 파 놓았던 구덩이 옆에서 한 차례 더 성폭행을 하였다. 그 후 그는 피해자의 입과 팔 그리고 다리를 포박한 뒤 구덩이 안으로 밀어넣었다. 피해자는 그가 숲 근처에서 잠깐 잠을 자는 사이에 도주하여 인근에 위치하였던 공사장의 인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한편 잠에서 깨고 난 뒤 피해자가 도주한 사실을 깨달은 온보현은 그날 아침까지 숨어 있었는데 경찰이 그가 운전하던 택시를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본 뒤 그날로 대전으로 택시를 타고 도주하였다. 이후 경찰은 지난 5년 간 수유리 근처에서 일했던 모든 택시 기사들의 이력서들을 수집한 뒤 피해자와 대조 심문을 통하여 범인을 확정짓고 범인의 신상을 파악하였다.
- 1994년 9월 11일
온보현은 저녁 8시 30분경에 서울 독산동 부근에서 21세 호텔 종업원 엄모 씨를 태웠다. 그는 올림픽대로에서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강원도 횡성군에 위치한 한 야산으로 끌고 가서 성폭행을 두 번에 걸쳐서 한 뒤 피해자를 나무에 포박하였다. 그는 피해자를 죽이지 않은 채 친구를 데려오겠다고 말한 뒤 2차 범행을 하러 야산을 내려갔다. 이 틈을 탄 피해자는 포박을 풀고 도주하였다.
- 1994년 9월 12일(1차 살인)
그는 저녁 8시 30분경에 양재동 부근에서 26세 회사원 허모 씨[5]를 태웠다. 그는 서초 톨게이트 부근에서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전날 피해자를 포박해 놓았던 강원도 횡성의 야산으로 끌고 갔으나 포박당한 채 남겨졌던 피해자가 도망간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분노에 가득 차 피해자를 나무에 묶고 피해자의 얼굴, 무릎, 다리 등을 삽으로 끔찍하게 폭행한 뒤 도주하였다. 상처가 심했던 피해자 허 씨는 숨을 거두었다. 한편 범행 현장에서 벗어난 뒤 신한은행 풍납동 지점에서 피해자 허 씨의 외환은행 카드를 이용하여 61만 원을 인출하여 사용하였다. 이것이 CCTV에 찍히면서 9월 27일 전국에 지명수배되는 계기가 되었다.
- 1994년 9월 13일
그 후 그는 강동구 천호동 사거리 부근에서 19세 회사원 노모 씨를 태웠다.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한 뒤 그는 피해자를 칼로 위협하여 김천시에 위치한 여관으로 끌고 가 강제로 범하였다. 피해자는 다른 피해자들과는 달리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고 차분했기에 그는 피해자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온씨는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가장이 되어 홀로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피해자의 말에 묘한 감정을 느껴 14일 새벽에 피해자를 고덕동에 위치한 피해자의 집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
- 1994년 9월 14일(2차 살인)
온씨는 가락동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H 모 특수학교에 근무하던 교사 박모 씨(당시 24세)를 태운 뒤 가락동 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 앞 사거리 부근에서 칼로 피해자를 위협했으나 피해자가 심하게 반항한 나머지 흉기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이에 극도로 흥분한 온 씨는 피해자의 허벅지와 배 등을 수차례 칼로 난자하여 확인사살한 뒤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외곽)에 위치한 도로변에 시신을 유기하였다.[6] 이후 상처를 치료하고 은신하기 위해 서울 천호동에 위치한 모 여관 3층의 구석진 방에서 13일 동안 은신하였다. 손을 베인 온 씨는 범행을 중단하였는데 부상과 더불어 이전까지 겪을 수 없었던 피해자의 심한 반항으로 인하여 본디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했던 온보현은 범행을 저지르고자 하는 의욕을 잃었다. 이에 대하여 범죄 프로파일러 표창원 교수는 '마지막 희생자였던 박모 씨의 거룩한 희생이 추가적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았다'고 저서 <한국의 연쇄살인>에서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여전히 온보현의 행방을 확인하지 못했다.
- 1994년 9월 20일
지존파가 검거되었다. 이와 함께 온보현과 관련된 강력 범죄 사건 공개 수사가 시작되었다. 대대적인 공개 수배와 더불어 그가 택시 기사이자 범행에 택시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어 불심검문 탐문 수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 1994년 9월 27일
그는 당시 지존파를 검거하여 유명해졌던 서울 서초경찰서 입구에서 의경에게 "자수하러 왔다" 고 말하며 자수하였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범행 동기를 밝히기를, "세상이 각박해 자포자기 심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또 "지존파와 나를 비교해보고 싶다. 지존파와 같은 감방에 넣어달라" 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의도를 갖고 자수했으니 선처가 될 리 없었다. 그가 바랐던 것과 같이 온보현은 지존파 못지않게 매스컴에 대서특필되었던 것은 물론 다음 해인 1995년 11월에 신속하게 집행된 사형으로 생을 마감했다.[7]
- 1994년 10월 31일
서울지검 강력부 박충근 검사는 온씨가 훔친 택시를 이용하여 부녀자 여섯 명을 납치하고 이 가운데 두 명을 살해한 혐의를 들어 그를 구속 및 기소한지 18일 만에 사형을 구형하였다. "피고인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과 사회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범행을 저지른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과대망상과 자기과시욕에 빠진 살인마의 범죄일 뿐", "2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고 정조를 유린한 피고인을 극형에 처해 법이 살아 있음을 보여야 한다"고 논고했다.
- 1994년 11월 14일
서울형사지법 합의 25부(재판장 김주형 부장 판사)는 피고인 온보현(37)에게 강도 살인 및 시체유기죄 등을 적용하였고 앞서 구형된 대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 1995년 2월 24일
2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되었고 온보현이 상고를 포기해 사형이 확정됐다.
- 1995년 11월 2일
지존파 등 19명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다. <범죄의 재구성>에 따르면 그는 자신과 같은 흉악범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강력 범죄자들에게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 줄 것이며 형을 신속하게 집행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집행 현장을 직접 참관한 문장식 목사의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에 따르면 오전 9시 54분 그날의 사형수 15인 중 6번째로[8] 사형장에 들어왔고 인정심문 때 "제 몸이 실험용으로 필요한 데 사용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후 문 목사가 마지막 예배를 인도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 뒤 찬송가 488장 '이 몸에 소망 무엔가'를 부른 후 온보현이 요한계시록 14장 13절[9]을 읽게 하고 문 목사가 다시 간략하게 설교하고 간절히 기도한 뒤 축도로 마쳤다. 종교의식이 끝나자 오전 10시 5분에 집행되어 10시 17분에 절명했다. 문장식 목사가 말하길, 신앙으로 변화된 상태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생각보다 너무나 선한 모습이었다고... 사형제 폐지론자이자 종교인의 의견이라는 사실을 감안하고 듣자.
4. 경찰의 무능에 대한 의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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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내용처럼 온보현은 대놓고 은행 CCTV에 얼굴을 남길 정도였다.
사건 당시에나 지금이나 경찰이 많이 무능해 보인다는 평가가 많다.
1994년이었던 시대상을 감안한다고 해도 부실 수사가 맞으며 경찰이 무능했던 것도 맞다. 팟캐스트 방송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크라임>, <김복준 김윤희의 사건의뢰> 등에서는 당시 경찰의 부실 수사를 지적했다. 당시 프로파일러였던 표창원은 이하와 같이 강도 높게 비판했다.
'공개 수배, 공조 수사의 중요성과 비공개 수사, 수사 정보 독점의 폐해를 여지없이 드러낸 사건이었다. 낮은 지적 능력을 가진 사회 낙오자 온보현의 서툰 범행이 여러 차례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었던 데는 경찰 수사 시스템의 후진성도 일조했다고 봐야 한다'
프로파일러 배상훈은 전국 경찰서가 공조 수사만 했어도 사건이 이렇게 길어지지 않았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특히 세번째 피해자인 엄 양이 횡성 야산에서 도망쳤을 때 경찰은 수사의 기본인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돌아온다."를 간과한 데다 특히나 온보현은 엄 양에게 친구를 데리고 돌아온다는 말까지 했었는데 그 장소에서의 잠복 수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또 당시 실종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다루던 경찰의 태도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2차 살해 피해자이자 마지막 피해자인 박모 씨(당시 24세)[10][11]의 부모에 따르면 실종된 다음날 바로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으나 단순 치정 문제로 인한 가출로 여기며 무시했다고 한다. 2009년 부녀자 연쇄 납치 살인마 강호순의 검거 이전엔 성인 여성 실종을 단순 가출로 단정하고 수사를 부실하게 하여 장기 실종, 미제사건이 된 경우가 많았다.
5. 여담
- 이 사건 이후 상술했듯이 번호판 위조가 쉽다는 점 때문에 번호판 양식이 개정되었다.
- 8년 뒤에 유사 사건인 용인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불행히도 이 때 살해당한 사람은 6명이나 되었다.
- 온보현은 교도소내에서 모든 종교를 거부하다가 사형 집행 당일날 본인 순서 직전에 사형장에 종교위원으로 나와있던 목사의 설득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 이 사건은 2013년 티케스트 계열인 E채널의 "대한민국 사건파일 No.5 - 교통수단에서의 잔혹 범죄" 에피소드에서 1위에 올랐다.
- 팟캐스트 방송 <프로파일러 권일용의 검은 방 시즌1> 사회적 분노 : 서울에 나타난 살인택시
- 팟캐스트 방송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온보현1: 내 나이만큼 죽이겠다, 살인 택시가 출발했다 온보현2: 왜 누구는 죽이고, 누군 살려줬나? 자존감과 살인
- 표리부동 8회 - "내 나이만큼 사람을 죽이겠다" 택시 살인마 '온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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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그가 자수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2] 온씨는 전국에 5,500여명 밖에 안 되는 희성이다.[3] 1994년 당시 수유동은 도봉구 관할이었다. 강북구는 이듬해인 1995년 3월에 도봉구에서 분구되어 신설되었다.[4] 온보현이 자수 후 경찰에게 가장 먼저 했다는 말이 "지존파보다 더한 놈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니 조서를 쓰기 전에 기자를 먼저 불러 달라"였는가 하면 현장검증 당시에도 "오늘 신문에 내 기사가 톱이냐, 지존파가 톱이냐"라고 물었다고 할 정도로 지존파에 대해 집요하리만치 경쟁 심리를 표출했다. 한마디로 멋있지도 않은 추태를 부리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인간 이하의 자였다.[5] "대한민국 사건파일 No.5"이라는 프로그램의 내용에 의하면 피해자는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였다고 한다.[6] 이때 현장검증을 주도한 검사가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 홍준표 검사다.[7] 참고로 온보현의 사형 집행은 지존파와 함께 문민정부 당시에 일어났던 살인사건의 범인이 사형이 집행된 단 두 개의 사례 중 하나이다.[8] 7번째였던 강동은이 들어온 시각은 온보현의 사망이 확인된 지 5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9]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0] 귀가 도중에 가락동에서 납치되었으며 실종 13일 만에 사체로 발견되었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살해 1년 전인 1993년부터 E 모 여자대학교 특수교육학과를 졸업 한 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H 모 특수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으며 장애인 특수 교육에 종사하던 여성이었다. 여담으로 온보현의 살인 희생자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사회 봉사에 관심을 가지고 힘쓰던 바르게 자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봉사가 끝나고 오던 길에 희생된 피해자도 있었다.[11] 당시 프로파일러였던 표창원은 박 씨의 용감한 저항이 다른 많은 여성들을 구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박 씨의 맹렬한 저항이 원래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온보현의 살인 의욕과 자신감을 꺾었다는 것. 실제로 박 씨 강간 살인 사건 이후 온보현은 보름 정도 범행 과정에서 다친 손을 치료하며 은둔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