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79년 6월 2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의 골동품상 "금당"의 주인 부부와 운전기사가 일면식도 없던 박철웅(당시 38세)에게 순차적으로 납치, 살해된 사건이다. 기사
2. 상세
사건 피해자인 정해석, 김정태 부부
1979년, 당시 38세의 남성 박철웅은 의류 생산업체를 운영하던 중 사업이 여의치 않아 사채 빚까지 지게 되면서 진공청소기 총판으로 업종을 변경하고 사채도 갚기 위해 필요한 자금 5천만 원[1]을 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사업자금을 구하기 위해서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가장 빠르겠다고 판단[2]해 납치 및 몸값 요구로 가닥을 잡고 대검 같은 흉기를 사 놓는 등 치밀히 준비했다.
어느 날 박철웅은 인사동 골동품거리를 배회하다가 '금당'이라는 상호를 보고는 '저 정도 규모의 골동품상이면 큰 돈을 조달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였고,[3]전화번호부를 통해 전화번호를 알아내 금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박철웅은 곧장 사장을 바꾸라고 한 후 '희귀한 이조백자와 족자 등 희귀한 골동품이 있는데 이를 팔고 싶다'고 하며 골동품상의 주인 정해석을 유인했다. 정해석은 매우 흥미로워하며 '물건을 직접 보고 구매하고 싶다.'고 했고, 박철웅은 세종문화회관 근처에 있는 문화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다방에서 만난 정해석에게 박철웅은 희귀한 골동품을 살 수 있는 현금이 있냐고 물었고, 정해석은 최소 2억원을 가지고 있으며 추가로 1억원을 조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4] 그리고 두사람은 박철웅의 차를 타고 성산동에 있는 박철웅의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한 박철웅은 아내에게 돈을 주며 지하방에서 세들어 사는 75세 할머니와 함께 영화나 보러 오라며 내보내고, 정해석에게 다시 한번 얼마나 돈을 준비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이에 정해석이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 모으면 1억원을 조달할 수 있다고 말하자 박철웅은 생각보다 적은 금액에 실망했다. 이에 정해석이 백자만 사겠다며 물건을 보여주라고 하자, 박철웅은 수원의 모처에 물건을 숨겨두었다고 말했다. 이쯤되자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낀 정해석이 '다음에 물건을 가지고 오면 보고 결정하자'는 말을 남기고 나가려 하자, 박철웅은 갑자기 돌변해 TV거치대에 숨겨두었던 군용 대검으로 정해석을 위협한 후, 나일론과 철사로 그를 의자에 결박했다.
이 과정에서 정해석은 박철웅에게 '살다보면 사업이 어려워 이런 일도 할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부인을 시켜 조금이라도 돈을 준비시키겠다. 걱정 말라. 신고하지 않겠다.' 등의 말을 수없이 하면서 박철웅을 안심시켰다.[5] 정해석은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진귀한 물건을 사야 하니 돈 5백만 원을 준비해 약속장소로 오면 사람을 보내겠다'는 연락을 한 후 자신을 풀어 달라고 했지만 박철웅은 결국 목을 졸라 정해석을 살해했다.
박철웅은 곧장 약속장소로 가 정해석의 부인 김정태(사건 당시 32세)와 운전기사를 데리고 본인의 집으로 갔다. 부인 김 씨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의자에 묶여 죽어 있는 남편을 보았고 '아이가 넷이다.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박철웅은 부인 김정태도 목을 졸라 살해했다. 또한 집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 이동환(사건 당시 28세)에게 '들어와 차라도 한 잔 하라'며 유인해 그마저 같은 방식으로 살해했다.[6] 그리고 정해석의 차는 망원동에 버렸다.
집 안에 시신이 유기된 것을 박철웅의 부인[7]이었던 김효직이 알게 되었고 이 날 밤 서둘러 집 마당을 파고 세 구의 시신을 묻었다. 며칠 후에는 유기장소 위에 조경수를 심어 철저히 위장했다.
3. 수사 및 자백
금당의 직원들은 3일 동안 사장이 출근하지 않자 6월 23일 종로경찰서에 신고했다. 당시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던 피해자 부부의 네 딸은 TV에 나와 울먹이며 '제발 우리 아빠 엄마를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국민들의 여론이 비등해졌고, 경찰은 연인원 2만 명의 수사인력을 투입했다.그러나 21세기처럼 CCTV가 곳곳에 깔려 있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해석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하기도 어려웠으며, 행적을 알 만한 부인과 운전기사가 함께 실종되었기에 수사는 난항에 빠지게 되었다.
경찰은 금당이 골동품상이었음에 주목해 불법/탈법적인 골동품 매매 또는 유통 과정에서 원한을 샀을 것으로 보고 인사동 골목을 그야말로 들쑤셔 버렸다. '금당사건'을 수사하면서 밝혀진 별건의 죄목으로 기소와 처벌이 난무했고[8] 심지어 자살한 골동품 업자도 있었다.
경찰 수사가 이리 난항을 겪던 중 인천에서 이상한 첩보가 접수되었다. 내용은 '자기가 아는 사람의 사위가 기관원을 사칭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수사팀 입장에선 그냥 무시할 수도 있는 내용이었겠으나 워낙 사건이 미궁이다보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 첩보도 수사하게 되었다. 놀라운 건 이 말을 내뱉은 이가 박철웅과 사실혼 관계였던 김효직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이다.[9]
경찰은 고급식당에서 함께 식사하고 나오던 박철웅과 김효직을 체포하고 수사본부가 차려진 종로경찰서로 연행해왔다. 그리고 두 사람을 분리해서 심문했는데, 경찰은 박철웅이 자신의 집에 잔디와 조경수를 심은 것에 의심을 하여 김효직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경찰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지레짐작한 김효직은 겁을 먹고 이 사건의 모든 것을 자백하기에 이르렀다.
범행 일체를 자백받은 경찰은 시신 발굴에 착수했다. 박철웅은 본인의 집[10] 마당에 시신을 묻고 조경수를 심은 뒤 개집까지 사서 놓은 상태였다. 암매장 장소 옆의 방들은 세를 내 준 상태였고 그 중 한 곳은 사건 이후에 세를 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세를 들어온 남성은 경찰이 들이닥쳐 집안을 조사하고 자신에게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는지 묻자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지 바로 짐을 싸서 집을 나가 버렸다고 한다.
경찰은 시신을 암매장한 곳과 좀 떨어진 곳에서 피해자들의 유류품(목걸이, 옷가지, 통장 등등)도 발굴해냈다. 박철웅은 조사 과정에서 3명 모두 죽일 이유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완전범죄를 위해선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답했다. 애초 범행의 목적은 오로지 돈이었다고도 했다. 또 동거녀인 김효직이 친정에 가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한 내용이 단서가 되어 잡혔다는 것을 알았는지 '동거녀도 거동이 수상해 죽이려 했는데 못 죽였다'는 엽기적인 발언까지 내뱉았다. 박철웅은 동생과 동거녀가 수없이 자수를 권유했음에도 거절했고, 그런 말 하지 말라며 동생을 폭행하기도 했다. 거절 이유는 '부모님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자수를 안 하려고 했단다.
박철웅은 처음에는 납치부터 살해까지는 혼자 한 일이고 시신 처리만 공범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또 같이 죽였다고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서너 차례 진술을 번복하여 경찰을 당혹하게 했다.
4. 범인들
왼쪽부터 김효직, 박철웅, 박천웅
- 주범 박철웅(사건 당시 38세)
박철웅은 1942년 부산에서 3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식육업에 종사하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이며, 형은 선원이었고 본인은 모 대학 연극영화과 2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했다.
21세기에도 자녀를 예체능으로 진학시키려면 돈이 많이 드는 것이 현실인 만큼 박철웅의 가정은 경제적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본인의 수기에서도 유복한 가정임을 인정했다.
박철웅은 대학 재학 시절 친구가 소지한 셰익스피어 전집을 훔쳐 퇴학당했고, 절도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살았다. 이후 군에 입대했다가 제대한 후 화장품 회사에 취업했으나 급여가 밀리자 회사 물품을 훔치는 절도죄를 저질러 또 1년 복역했다.
출소 후 박철웅은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서 꽤나 돈을 모은 적도 있었으나,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카지노나 나이트클럽에서 유흥비로 탕진했다. 박철웅은 부인과 아들도 있었지만 다른 여성들과 꾸준히 불륜 관계를 맺어 왔으며, 본처와 이혼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사업도 파탄나 있었지만, 헤픈 씀씀이는 어쩔 수 없었던지 동거녀와 함께 본인의 집에서 비밀요정을 운영하는 등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갔다.
이후에도 클럽이나 술집의 종업원과 주로 동거하던 박철웅은 현직 고교 교사였던 여성 H씨[11]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이혼 후 홀로 딸을 키우던 여성이었다.
이 여성과 동거하게 된 박철웅은 사업을 정리하고 보험회사의 외판원으로 취업했다. 이전과는 180도 다른 극강의 성실함을 보여주며 단숨에 외판실적 1위에 올랐고, 외판 방법에 대한 강사로 초빙되기까지 했다. 수기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H씨와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H씨는 박철웅과 함께한 지 1년만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철웅은 이때 너무 충격을 받고 폐인이 되기 직전에 이르렀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렀지만 마음은 예전의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모습으로 회귀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시신이 암매장된 집 마당을 보며 심각한 공포와 고통을 겪었다. 이사를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마당을 파헤쳐서 시신을 발견하면 끝장이기에 포기했다. 여기에 사업 실패로 빚쟁이들에게도 시달리자 공범들과 매일 포르노 비디오를 시청하고 동거녀 김효직과 성관계를 하며 공포를 잊으려 했다.
- 공범 박천웅(사건 당시 33세)
박철웅의 친동생. 부산 모 대학 미술학과 출신이며 고교 미술교사로 일하다가 예술에 전념하여 성공하기 위해 교편을 놓고 서울로 올라왔다.
본인은 실제 살해에는 가담하지 않고 사체 암매장에만 관여했가고 주장했다. 처음 시신들이 유기된 벽장을 열고 시신을 발견했을 때 박철웅에게 자수를 권유하며 울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박철웅에게 차라리 자살하라고까지도 했지만 그래도 친형인지라 이도저도 못한 듯. 조사에서는 살해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현장검증 시에는 또 이를 부인하고 사체 암매장에만 관여했다고 주장하였다.
- 공범 김효직(사건 당시 29세)
박철웅의 동거녀. 나이트클럽 종업원으로 있다가 박철웅과 만나 동거하기 시작했다. 친정에서도 박철웅을 사위로 인정할 정도로 식만 올리지 않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사체 암매장과 기타 증거인멸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5. 재판
당시 사건의 충격이나 여파만 봐도 능히 짐작이 가능하지만 박철웅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사건 발생 약 16개월만인 1980년 10월 14일 대법원이 사형 선고를 최종 판결하였으며 1982년 7월 22일을 기하여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
동생 박천웅은 살해에도 일부 가담했지만 형의 강요가 있었음을 감안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동거녀 김효직은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1983년 만기출소했다. 동생 박천웅은 살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항고했지만 대법원이 끝내 기각하면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12] 1991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는 수감 중에도 작품 창작을 계속하여 교정작품전시회에 자주 참가해서 1~2회에서 금상까지 땄다고 한다. 현재 박천웅은 가석방됐거나 교도소 내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6. 기타
- 이 사건에서도 검찰과 경찰은 ‘반인권 수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박철웅과 공범들에게 고문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긴 하지만 골동품 중개상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고강도 조사를 했고 당시는 피의자 인권 개념 같은 건 없던 시절이었으며 못잡으면 여러 사람 옷 벗는 극악 살인사건인지라 잡혀온 사람들이 경찰서에 끌려가서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는 뻔한 이야기다. 석 달 동안 골동품 중개상 등 3400여 명이 검찰 조사를 받았으며 서울 인사동 일대의 골동품 거래가 모두 멈추게 되었다. 조사를 받던 골동품 중개상 중 115명이 다른 범죄가 드러나 기소됐고 그 중 76명은 구속됐다. 이들은 박철웅이 잡힌 뒤에도 어쨌건 법을 어겼으므로 감옥에 가야 했으며 한 중개상은 조사 도중 투신자살을 기도했다. 그래도 진범이 검거되어 사건이 종료된 뒤 서울시경국장은 용의자로 몰렸던 골동품상과 중개상, 골동품 수집자 등 2천 명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다.
- 그는 처형되기 전 2년 6개월 동안 볼펜 심지만으로 휴지에 써내려간 옥중 참회록인 <내 목에 밧줄이 걸리기 전에>를 냈다. 이후 이 책을 재판하면서 책 제목을 나는 사형수로 바꾸었다. 박철웅은 수감 중 기독교에 열렬히 귀의하였고 교도소 내 전도사를 자처할 정도였다고 한다.[13] 이 참회록(전술에서는 수기)의 내용은 거의 신앙 간증문에 가깝고 살인 당시의 심리상태에 대한 묘사도 잘 되어 있다고 한다. 출간 당시 논란도 많았던 모양이다. 워낙 극악무도한 범죄라서 그런지 책을 본 사람들은 '박철웅같이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신에게 귀의하면 천국을 가고, 박철웅 손에 죽은 3명은 신에 귀의하지 않아서 지옥에 갔다는 거냐?' 고 비난했다고 한다.
- 이 사건은 오직 돈을 노려 납치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결국 일면식도 없었던 3명의 목숨을 모기 죽이듯 한 사건으로 1979년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충공깽을 안겨주었다. 다만 한 달도 안 되어 전무후무한 충공깽이 터져서 빨리 잊힌 감이 있다.
-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흉악범에 대해서는 신상공개가 당연하게 여겨졌으므로 검거 후 범인들의 얼굴이 그대로 신문에 실렸다. 지존파, 박한상, 온보현 사건처럼 일반 가정에서 TV를 쉽게 접할 만큼 소득수준이 높았다면 아마 이들은 방송 인터뷰에서도 얼굴이 그대로 나왔을 것이다. 지금도 신문지면 서비스를 통해 검색해 보면 범인들의 얼굴도 나오고 이 문서에서 익명 처리된 공범들의 이름도 다 알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용의자 인권 개념이 없었던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기는 한데 피해자와 유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피해자의 실명 및 사진, 심지어 피해자 부부의 어린 네 딸의 사진까지 게재되어 있어 21세기에 보면 이것이 더 충공깽하다는 점이다. 다만 당시에는 국민의 알 권리와 범죄자에 대한 분노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범죄 피해자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편이긴 했다.
- 1979년 9월 30일에 TBC(현재의 JTBC)에서 방영된 김세윤 주연의 드라마 형사에서 이 사건을 다룬 적이 있다.
- 1991년 2월 19일 <경향신문>에서 후일담이 실렸는데 연재 당시 기준으로 이미 잊혀진 사건임에도 피해자 유족들에겐 평생의 악몽이 되었다고 한다. 피해자의 4녀들은 형이 맡아서 몇년 간 키워왔으며 학교에 다닐 때마다 일부 아이들이 이 사건을 갖고 거론하는 바람에 친지들이 전학시켜 주었으며 담임교사 외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함구시켰다. 이들은 외가 식구들과 함께 옛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피해자가 운영했던 '금당'은 사건 후 '사동화랑'이 되었으나 이마저도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고 다른 사람이 임대하기도 했으며 범인이 세들어 살던 성산동 집은 사건 후 집주인이 시가보다 낮은 헐값으로 넘겨 소유권이 몇 차례 이전되었으나 이웃에 살던 주민들은 사건의 여파로 인해 많이 떠나버렸다. 2020년경 이후 철거되어 현재 빌라가 들어선 상태.
- 채널A에서 방영했던 재연 드라마 《실화극장 그날》에서도 이 사건을 다룬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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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소장이나 당시 언론 인터뷰에선 5천만 원이라고 했지만 박철웅이 남긴 수기에는 억 단위로 나오며 2~3억을 피해자에게 요구하려 했다고 한다.[2] 이미 박철웅은 사기 등으로 전과 5범이었다.[3] 공범인 김 모 여인이 호스티스로 일할 때 피해자를 알게 되어 납치 대상으로 적극 추천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없고 김 모 여인의 형량을 봐서도 전혀 감안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4] 21세기에도 3억은 상당히 큰 돈이지만 1979년 당시 3억은 정말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1980년대에는 은마아파트 한 채 값이 2천만 원이었다.[5] 박철웅 수기 중 내용[6] 운전기사 이동환의 최후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박철웅이 바로 살해했다는 설과 박철웅의 동생 박천웅이 운전기사는 살려주자고 해서 나중에 살해했다는 설이 있다.[7]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8] 그간 골동품 업계의 치부들이 드러난 것으로도 볼 수 있다.[9] 김효직의 아버지가 사위가 기관원을 사칭한다고 험담하고 다닌 이유가 가관인게, 사람 셋이나 죽이고도 석 달이 가깝도록 잡히지 않자 박철웅이 돈을 뜯어내기 위해 홍 모라는 여자를 새로 만났고, 이로 인해 김효직과 사이가 틀어져 그녀가 친정으로 돌아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박철웅이 기관원을 사칭하고 다닌다고 말한다. 김효직은 박철웅이 공무원 사칭 혐의로 체포되면 홍 모 여인과 헤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10] 현 마포구 성미산로13길85 자리[11] 박철웅의 수기에 H라고 나온다. 신문기사 등에선 전처라고도 하지만 수기를 보면 혼인신고까지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체포 당시 쓴 자술서에는 이혼한 전처는 등장하지만 이 여성에 대해선 일절 언급이 없다.[12] 다만 당시 경찰 수사기법이 고문에 기반한지라 박천웅 역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배제하기 어렵다. 취조실에선 인정했다가 현장검증이나 법정 같이 제3자가 입회한 곳에서는 본인 진술을 뒤집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13] 박철웅은 유언을 길게 남긴 것으로도 유명한데 유언이 거의 예배 수준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