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8 00:06:16

동양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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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양방송_LOGO.png[1]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07102606241920002010-002.jpg
언론통폐합으로 인한 폐국 직전 쓸모없어진 깃발을 내리는 모습. JTBC가 개국할 때 깃발을 게양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둔 게 이것 때문이다.


고별방송 당시 TBC 여의도 사옥

언론통폐합 다음날의 모습[2]
"온 국민에게 보다 잘 살 수 있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주고 그를 위해서 스스로 땀흘려 일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일깨우며, 이 나라에 모든 개인과 가정과 촌락 그리고 국가사회 구석구석에 맑게 샘솟는 도의심이 충만하도록 하자"
- 1964년 개국 당시 슬로건
"우리는 전진합니다. 우리는 창조합니다. 우리는 듣고, 우리는 보고, 우리는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증언할 것입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괴로움을 넘어서는 즐거움을, 역경을 극복하는 맑은 웃음의 원천을 마련하고, 우리는 자유의 화신, 우리는 평화의 역군임을 선언합니다."
- 1964년 개국방송 당시 멘션 중
"이제 비록 저희들은 TBC 브라운관을 떠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과 항상 영원히 같이 있겠습니다."
- 1980년 11월 30일 고별 프로그램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중 강부자의 작별인사
"끝으로 동양방송의 호출부호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는 639 KHz… HLKC… (울먹이며) 동양방송입니다…"
- 1980년 11월 30일 '밤을 잊은 그대에게' 중 황인용 아나운서의 멘션듣기
TBC는 永遠하리
- 1980년 11월 30일 마지막 TBC 석간 방송과 그 날 정파 직전 나온 문구. 이 문구는 'TBC 복원추진위원회' 슬로건으로도 사용했다.

1. 개요2. 상세3. 역사4. 역대 사옥5. 진정한 후신은?6. 사가7. 역대 임원8. 출신 스타들9. 역대 공채 사원10. 방송망11. 프로그램
11.1. TV 프로그램11.2. 라디오 프로그램
12. 여담

1. 개요

과거 삼성그룹 계열 (주)중앙일보·동양방송 산하 방송부문의 통칭. 약칭은 TBC(Tongyang Broadcast Company).

2. 상세

1964년 개국부터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에 따른 신문-방송 겸영금지를 이유로 KBS에 넘어갈 때까지 국내 방송계를 주름잡았던 대형 방송사였다. 텔레비전 방송은 서울과 수도권, 부산 및 일부 동남권이 주 시청권역이었으며, 라디오 방송은 제휴를 맺은 지역 민방들을 통해 호남[3] 및 대구·경북 지역[4]에 일부 방송을 송출했었다.

의외로 전국구가 아닌 방송국이었다. 이는 당시 TBC의 논조가 당대의 명 앵커 봉두완이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방송을 내보냈을 정도로 방송 3사중에서 상대적으로 정부 비판적인 논조를 띠었고, 이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게 수시로 밉보였기 때문인 것하고 연관이 있다.[5] 덕택에 전국단위로 방송을 송출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퇴짜만 맞았고, 언론통폐합 이후가 되어서야 KBS 2TV의 전국방송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당시 (주)문화방송·경향신문5.16 장학회가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친정부 논조를 강하게 띄어서 정권차원에서 열심히 밀어주었기 때문에 전국방송화가 신속하게 진행 되었던데 반해서, 동양방송은 방송사가 KBS로 흡수될때까지 TV방송 권역을 수도권 및 동남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1970년대 중후반에는 전국구로 방송을 송출하게 된 MBC에게 제2의 TV방송사 자리를 내주었다. TBC가 삼성그룹이 소유했기 때문에 간과하기 쉬웠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자본력에 있어서 MBC도 밀리지는 않았다.[6] 마찬가지로 당시 DBS 동아방송에서도 서울 이외 지역에서의 송출 및 TV방송을 하려고 했지만 당대에는 동아일보가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의 일명 야당지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퇴짜만 맞았다는 후문도 있다.

중앙일보와 같이 삼성그룹 계열사였으며 1974년 합병 시부터 1980년 폐국 시까지 중앙일보와 같은 법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라디오 시보 협찬사가 다 삼성그룹 계열사의 광고였다.

광고(여자):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이 미 국무성[7] 문화 사절단으로 5월 11일, 13일 국립극장에서 역사적인 내한 공연을 갖습니다. 모던 발레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세기의 안무가 알윈 니콜라이가 이끄는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은 빛과 율동의 환상적인 종합 예술로 벌써부터 국내 무용계에 큰 화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의 관람권은 본사 문화사업부, 시내 각 예매처에서 절찬 예매중입니다.[8]
시보멘션(여자): 89.1MHz, 즐거움과 안식의 샘, 동양FM 방송입니다. HLKC FM.
시보광고: 이코노 이코노 이코노~ 텔레비전은 이코노![9]
시보멘션: 삼성전자 제공시보, 다섯 시를 알려드립니다.(시보음~♪)
방송멘션: (오프닝 음악) 학생들의 노래 경연 학생 콩쿨...
1976년 방송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FM 라디오 시보. 삼성전자 또는 삼성시계[10]가 주로 시보 스폰서를 맡는 형식이었다.

3. 역사

문서 참고.

4. 역대 사옥

파일:attachment/a0102488_49701884ee1fe.jpg
RSB 라디오서울(TBC 라디오의 전신)사옥. 태평로 1가에 있던 옛 동양화재 건물[11]에서 개국했다.

파일:attachment/동양방송/dtvtbc.jpg
DTV 동양텔레비전이 있던 신세계 백화점. TBC의 사옥은 개국 초기에는 종각과 신세계백화점 4, 5층에 있었다.

파일:attachment/a0102488_49700d7349d75.jpg
1966년 중앙일보와 함께 서소문동으로 이사하게 된다. 앞쪽의 조금 낮은 빌딩. 당시 중앙 매스컴 센터라 불렸다. 현재 중앙일보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다.(일명 J빌딩) 많은 사람들의 뇌리속에 있는 갈색빛깔의 중앙일보/JTBC 구 사옥에서 시청역쪽으로 조금만 오면 볼 수 있다. 사진과 달리 지금은 리모델링이 되어 외관이 많이 다르다. 여의도사옥 이전 후에도, 일부는 계속 사용한듯하다. 그러나 중앙일보와 동거생활을 하는 관계로, 점점 늘어나고 대형화되는 프로그램을 감당하기는 어려웠고,[12] 이후 타 스튜디오에 샛방살이를 하다가 지은것이 바로 아래의 운현궁 스튜디오였다.

파일:ReS8GAe.jpg
이 외에도 위 사진의 운현궁 근처에 있었던 제3스튜디오[13] 등 크게 이 두 곳으로(서소문 방송센터, 운현궁 제3스튜디오) 흩어져 있던 방송시설들을 모아 만든 건물이 아래의 여의도 신사옥이었다.[14] 제3스튜디오 주위에도 스튜디오를 추가로 몇개더 지었다고 하며, 쇼프로그램용 공개홀과 드라마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었다.

http://m1.daumcdn.net/cfile234/R400x0/177758164C000BA41E25E1

부산동양방송 사옥의 모습이다.

파일:external/i64.tinypic.com/k12tz.jpg
동양방송은 매년 TV방송이 개국한 12월 7일 전후로 '프로그램 대행진'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송했었다. 매년 방송된 내용 중에서 재미있었던 방송장면을 편집해서 보여주거나 동양방송 소속 안무팀의 공연 및 코미디언들의 꽁트를 하는 프로그램인데 신사옥이 완공된 1979년 12월엔 'TBC 여의도대행진'이라는 방송을 신사옥에서 촬영했었다.# # [15]

이 외에도 '동양 최대의 방송시설'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방송을 편성해 방송하는 등 앞날이 창창한 방송으로 거듭 성장하는 듯 했으나...망했어요.

1980년 7월 여의도에 완공된 신사옥으로 완전히 이전[16]했는데, 5개월이 지나서 언론통폐합으로 사옥까지 통째로 KBS에 넘어가버리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 결과 현재 KBS 별관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인터넷에서 지도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17] KBS 본관, 신관이랑 별관의 거리가 먼 이유 중 하나다. KBS 본관 뒤에 붙어있는 IBC라고 써있는 신관[18]과는 다르다. KBS에서 운영하는 방송국 중에서 제2TV, 제2FM(쿨FM), 제3방송[19]이 언론통폐합 이전 동양방송의 채널이었다.이 안에 있던 스튜디오와 공개홀은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방송 시설이었지만 KBS에 홀라당 넘어갔다

5. 진정한 후신은?

2009년 미디어법 개정에 의한 신문·방송겸영 허용 덕에, 중앙미디어네트워크는 2011년 12월 1일 31년 만에 방송국을 재개국했다. 그런데 명칭이 TBC가 아니고 JTBC다. 동양방송의 후신임에도 TBC라 부르지 못하는 이유는 중간에 개국한 대구방송 때문.

JTBC는 개국하자마자 TBC시절 방송자료를 쏟아내고 전두환KBS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20] 전두환의 측근 이원홍 전 KBS 사장이 TBC의 문을 닫은 전두환의 축하 메세지를 전해주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계속 씹히는 중. 언론통폐합의 노염을 제대로 토해낸 듯 이렇게 봤을 때 TBC를 소유했던 중앙일보가 JTBC로 종편방송국을 재개국했기 때문에 TBC의 직계 후신을 JTBC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룬다.

한편으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져가버린 KBS 2TV를 후신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TBC에서 간판만 바꿔 단게 KBS2니까 말이다. 거기에다가 KBS는 TBC의 방송자료를 갖고 있고 저작권까지 갖고 있다. 다만 강압적으로 얻어온 것이니만큼 껄끄러운 것은 사실. 게다가 TBC의 마지막 사장이자 현 JTBC 상임회장인 홍두표가 문민정부 때 KBS 사장으로 재임하기도 했었다. 다만 KBS는 자사 예능프로그램인 불후의명곡에서 쇼쇼쇼나 해변가요제 관련 특집을 하는 것과 가끔 TBC관련 자료를 사용하는것 외에는 외에는 자신들이 TBC의 후신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2019년 5월 KBS 아카이브 유튜브 계정 '옛날티비'에서 TBC 시절 방송 자료를 시청자에게 기증 받아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한편 중앙일보와는 상관없지만 옛 삼성 계열사인 CJ도 1997년 미디어 산업에 진출했고, 2011년 3월 CJ미디어가 온미디어를 먹고 CJ E&M을 만들어 대박쳤다. 사실 CJ의 설립주체를 봐서는 동양방송이라고 볼 수 있긴 하다. 중앙일보가 멀쩡히 살아있어서 그렇지. 이렇게 된다면 CJ E&M 계열의 방송국들은 TBC의 방계혈족 쯤으로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도 CJ E&M에서 데뷔한 가수들이 공중파방송국보다는 JTBC에 자주 출연하는 것도 한 예로 볼 수 있다.

그러나 CJ는 범삼성계열이라는 점과 오락 중심의 방송전략 노선이 비슷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동양방송과의 이렇다할 연관이 없다. 애초에 이맹희등 CJ쪽 인물들은 언론쪽 경영에 관여한 적도 없다.[21]

이렇게 결론지어보면 사옥과 저작권, 직원 등 물리적인 부분은 KBS가 이어받았으나, 정신적인 부분은 JTBC가 이어받았다고 볼수있다.

결론적으론 삼성제약 에프킬라의 후신이 한국존슨의 에프킬라삼성킬라냐와 같은 문제.[22]

6. 사가


작사는 박두진, 작곡은 장일남이 맡았으며 1975년 9월 22일에 제정되었다.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 일부 가사만 바꾼 채 중앙일보의 사가로 쓰고 있다.
(1절)겨레를 하나의 마음에 묶어 / 뜨겁게 타오르는 우리의 정성
인류의 고동 가슴에 품고 / 자유언론 대도를 우리는 간다

(2절)참되고 슬기롭게 오늘을 살며 / 드높이 펼쳐가는 우리의 이상
내일의 번영 다지고 다져 / 사회정의 대로를 우리는 간다

(후렴)아아 푸른깃발 우리의 기상 / 무궁한 내일의 보람을 안고
나가자 약진하자 / 중앙일보 동양방송

하지만, 시청자들의 기억에 더 남은 것은 사가보다도 로고송이다.


TBC 동양방송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FM도 동양방송 동양방송

뉴스도 교양도 오락도
하늘을 전파로 수놓아

해가 지고 달이 떠도 아~ 아~ 아~
사랑해 TBC 동양방송

7. 역대 임원

라디오서울 동양텔리비전방송 동양방송(통합) (주)중앙일보·동양방송 방송부문
* 회장
이재형 (1963)
구인회 (1963~1964)

*사장
김규환 (1963~1964)
홍진기 (1964~1966)
* 회장
이재형 (1963)
구인회 (1963~1966)

*대표이사 사장
김용우 (1963~1964)
이흥배 (1964~1965)
*회장
홍진기 (1971~1975)

*대표이사 사장
홍진기 (1966/1969~1971)
김종규 (1966~1967)
김동극 (1967~1969)
김덕보 (1971~1975)

*대표이사 전무
김덕보 (1969~1971)

* 대표이사
홍진기 (1969)
김한기 (1973~1975)
* 방송부문 대표이사 사장
김덕보 (1975~1980)
홍두표 (1980)

* 부산TV국 대표이사
김한기 (1975~1980)

* 대표이사 전무
이현우 (1978~1979)
이종기 (1980)

8. 출신 스타들

대표적인 TBC 출신 탤런트로는 이순재, 강부자[23], 선우용녀[24], 김세윤, 김인문, 여운계, 사미자, 이낙훈[25], 김성원[26], 박용식, 홍성우[27], 김성환, 현석[28], 김종결, 정동남[29], 연규진,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서승현, 서미경, 노주현, 한진희, 김영철[30], 최란, 허참[31], 정소녀[32], 김민희[33], 강수연[34], 김영남, 원미경, 이미숙, 차화연, 이은하, 이승현[35], 혜은이[36] 등이 있다.

또한 TBC 성우극회 역시 인수 후 합쳐졌기에 KBS 성우극회 일부 인물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배한성이나 양지운, 유강진, 김종성, 장정진이나 박영남, 나수란, 최수민, 차재완[37][38] 같은 성우분들이 대표적. 또한 배우 김주혁의 부친 김무생도 이곳에서 성우로 처음 방송 활동을 시작했었다.[39]

배일집[40], 배연정[41], 김병조, 고영수[42], 김영하[43], 최용순, 방일수[44], 임희춘, 이주일[45] 등의 코미디언들도 동양방송에서 활동했으며, 고전유모어극장을 위해 영입된 송해[46], 서영춘 또한 적을 둔 적이 있다.[47] 1980년 5월에 진행되었던 'TBC 개그콘테스트' 출신으로는 주병진, 장두석, 김형곤, 이성미, 서세원, 이하원[48] 등이 있다.

또한, 5.16 군사정변 당시 '혁명정부'의 공약을 읽어내려갔던 박종세 아나운서[49]와 '가로수를 누비며'[50] 등 굵직굵직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고려진 아나운서[51], 국내에서 처음으로 '앵커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봉두완 기자,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진행자로 명DJ였던 황인용 아나운서와 콤비 박초아 아나운서[52] 그리고 맹관영, 원종배 아나운서 등 60~70년대를 대표하는 아나운서 대부분이 TBC 출신이었다.[53] 훗날 지상파에서 앵커나 시사프로 MC로 이름을 날릴 길종섭, 김홍, 송도균, 신완수, 유연채, 조순용, 차만순[54] 등도 TBC에서 배출되었고, 강용식 전 보도국 부국장과 이남기 PD, 오홍근, 류현순 기자 등도 훗날 언론계와 정관계에서 중진으로 자리매김한다.

스포츠중계의 레전드로 꼽히는 유수호 아나운서, 야구해설위원 하일성, 바둑해설의 레전드 노영하 9단과 김수영 7단도 이곳 출신.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리랜서 방송인인 왕종근씨도 방송인 커리어는 여기에서 시작했다. [55]

또한, 용의 눈물, 여인천하등을 연출했던 김재형 PD[56], MBC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집필했던 신봉승 작가, 훗날 SBS 사장을 지낸 윤혁기 전 편성국장도 TBC에서 활약한 방송인이다. 그러나 김재형 PD는 JTBC 개국을 몇 개월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80년대 MBC 뉴스데스크의 일기예보를 담당했던 김동완 위원도 TBC에서 일기예보를 담당했다가[57] 언론통폐합 이후 MBC에서 일기예보를 담당하게 되었다.[58][59]

전 KBS 사장인 홍두표TV조선 회장은 1964년 12월부터 TBC 창립요원으로 활동해왔던 동양방송의 산증인이다. 단, 홍두표 회장은 처음에 KBS의 창립위원으로 시작했었다. 그리고 같은 창립요원인 김덕보도 본사에서 전무, 사장, 대표이사 등을 거쳐 1980년 9월에 TBC를 떠나 1986년까지 제일기획 회장, 한국광고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위와 같이 서술된 동양방송 출신 방송인들의 결속력이 대단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는 동양방송이 전속가수 및 탤런트, 성우들에게 타 방송국 대비 아낌없는 지원을 해줬다는 것이 꼽힌다. 대표적인 예로 1979년 말 완공된 동양방송 여의도 사옥(현 KBS 별관) 안에는 동양방송 전속 배우들의 대기실이 각각 1인실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개인 대기실이 기본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한 대기실을 여러 명의 배우들이 공유했던 게 일반적이었다고 하니 파격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사미자의 증언에 따르면, '전속배우들을 위한 식당을 따로 배치해 무려 등가구를 배치했고, 물감들인 단무지같은 요리는 일절 제공금지' 했다고 하니, 전속배우들에 대한 지원이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31년만의 귀환 TBC' 다큐멘터리에서 이순재는 동양방송 방송인들이 대부분 전속 멤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감히 누군가라도 흔들지 못했던 구조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조연 배우들에 대한 지원이 많았는데, 이는 당시 경영진및 창업주들이 주연배우는 얼굴만 되면 그만이지만, 드라마를 빛내주는것은 결국 조연배우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또 당시 미스롯데 대회 중계를 맡았기때문에 미스롯데 입상자는 무조건 TBC 특채로 채용되는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이때문에 70년대 미스롯데 출신 연예인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방송활동및 연예활동을 시작했다.

9. 역대 공채 사원

1965년 이후 중앙일보와 공동으로 뽑아왔다.
  • 기자
    • 1964년 RSB 개국요원: 전응덕, 고일환, 윤명중, 한정준, 문찬홍, 이대식, 박상문, 정종진, 박광춘, 이창열, 조광식, 고석주
    • 1964년 DTV 개국요원: 고일환, 김충기, 남정걸, 윤천영, 이창열, 오일룡, 장준우, 김재길
    • 1964년 RSB 1기: 강용식, 김성호, 김우철, 노계원, 박영서, 석종현, 이돈형, 이희준, 임응식
    • 1965년 2기: 김경용, 김옥조, 정성진
    • 1968년 5기: 고성광, 길종섭, 오홍근, 우석호, 이민희, 장영국
    • 1969년 6기: 장종덕
    • 1970년 7기: 김장년, 노기환, 노신영, 송도균
    • 1972년 9기: 김영수, 백낙천, 엄광석
    • 1973년 10기: 류균, 차만순
    • 1974년 11기: 남성우
    • 1975년 12기: 박원훈, 이동근, 이재희
    • 1976년 13기: 진홍순, 황호형
    • 1977년 14기: 김벽수, 김봉규, 김청원, 김충환, 김홍, 민충기, 류현순, 이정봉, 이종학, 정희보, 조봉환, 조순용, 최춘애
    • 1978년 15기: 김관상, 유연채, 주동원
    • 1979년 16기: 강갑출
  • 지방기자
    • 1974년 11기: 이성백
  • 촬영기자
    • 1976년 13기: 이우승
    • 1977년 14기: 민상기, 박종철, 한경렬
    • 1979년 16기: 홍성철
  • 프로듀서
    • 1964년 RSB 1기: 공종원, 박세록, 손일석, 윤형대, 임채욱, 임형두, 조승환, 최주호
    • 1965년 2기: 안승효, 정종운, 최창한, 황주자
    • 1966년 3기: 김주철, 정형기, 한명희, 황동성
    • 1968년 4기: 김광옥, 유수광, 이해근, 임강호, 채경숙
    • 1968년 5기: 김인환, 목철수, 박정서, 박준영, 윤효석, 이기재, 이상옥, 최정웅, 홍황규, 황인태
    • 1969년 6기: 강석기, 김창동, 옥충언, 이정웅, 장정행
    • 1970년 7기: 고학찬, 김원택, 김일영, 손태익, 신광철, 정의성
    • 1972년 8기: 곽순범, 김군남, 김도홍, 김종원, 김홍소, 변동현, 송우천, 심현우, 이수담, 임재걸, 정우환
    • 1972년 9기: 고석기, 김상혁, 김영철, 김한승, 정춘수
    • 1973년 10기: 강석흥, 강영수, 김덕배, 김선옥, 김세웅, 김영룡, 김웅래, 남정헌, 윤재걸, 이동현, 이지언, 임재량, 임정훈, 장윤택, 전덕현
    • 1974년 11기: 김인경, 신완수, 이남기, 이명룡, 이수철
    • 1975년 12기: 김성묵, 김영택, 오흥진, 윤영호, 윤흥식, 이문태, 임진택
    • 1976년 13기: 김기욱, 김재순, 김종건, 김창욱, 김태기, 서현숙, 이근용, 이종수, 장동욱, 정훈, 차성모, 최홍철, 홍순창, 홍지일, 허주
    • 1977년 14기: 강관선, 권오규, 김성수, 김우광, 박문영, 송명구, 이상흡, 정동천, 정원조, 한정희, 홍성주
    • 1978년 15기: 김종찬, 박태경, 백용철, 윤인섭, 이성연, 이웅모, 홍순호
    • 1979년 16기: 강남준, 김광호, 김종현, 문영진, 배철호, 이병효
  • 아나운서
    • 1964년 RSB 1기: 권귀순, 김동만, 구박, 남정우, 박병학, 서기원, 장세덕, 조문자, 최귀정
    • 1964년 DTV 1기: 성대석
    • 1965년 2기: 노행자, 신화철, 이부미자, 이시일
    • 1966년 3기: 윤도영, 이정혜, 황인용
    • 1968년 5기: 고은숙, 김경옥, 김성덕, 김동숙, 박지호, 원창묵, 조천영, 최석희, 허경회
    • 1969년 6기: 백순명, 백윤숙, 유수호, 유영순, 이혜자, 최운기, 홍아영
    • 1970년 7기: 김동숙, 박계옥, 유선준, 윤정근, 이봉희, 최동철, 최봉현
    • 1972년 8기: 곽순범, 김군남, 김도홍, 김종원, 김홍소, 변동현, 송우천, 심현우, 이수담, 임재걸, 정우환
    • 1973년 10기: 고수웅, 김기혜, 안계상, 양원자, 이재명, 함영미
    • 1974년 11기: 남선현, 류인순, 이영희, 주성혜, 최간
    • 1975년 12기: 공영주, 백상철, 윤여복, 정미호, 채관숙
    • 1976년 13기: 김창매, 안희진
    • 1977년 14기: 강미정, 김경태, 박성희, 박초아, 안영희, 이영재, 이영혜, 이정애, 이희옥, 하재숙
    • 1978년 15기: 박성명, 원종배, 안현정, 이경숙, 이미령
    • 1979년 16기: 박광호, 이정옥, 지영서, 최희선, 홍인화
  • 미술
    • 1978년 15기: 김득영, 김문경, 서동화, 양회조

10. 방송망

  • 동양텔레비전 (HLKC-TV, CH 7 / 10kW)

    • 현재 KBS 2TV. 서울 남산 송출.
    • 부산동양방송 (HLSX, CH 9 / 5kW)
      현재 KBS 부산2TV. 전국 유일의 동양방송 텔레비전 지역국이었으며, 당시 부산은 물론이고 경상남도 진해시, 마산시(현. 창원시), 밀양시, 울산시(현.울산광역시), 삼천포(현.사천시)가 양시청지역에 해당되었고, 경상남도 진주시, 경상북도 경주시청도군 남부지역, 전라남도 여수시까지 가시청지역에 해당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봤을때 봉래산(부산), 무룡산(울산), 불모산(창원), 망진산(진주) 등지에 중계소를 여럿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서울에 비해 1주일 정도 늦게 방송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KBS나 MBC와 달리 마이크로웨이브나 광통신을 이용한 중계를 하지않고 서울에서 방송한 녹화 테이프를 가지고 와서 방송했기 때문. 때문에 스포츠 경기도 부산경남 지역은 일주일 늦게 보아야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항의도 엄청났고, 부산국도 마이크로웨이브 송출 허가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좌절되었다. 고별 뉴스에서 마이크로웨이브 허가를 받지 못한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었을 정도이다. 1970년대 초 아침방송을 AFKN의 마이크로웨이브를 이용해 서울과 동시방송 한 적이 있긴하지만, 몇개월 만에 아침방송 자체가 중단되는 바람에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뉴스의 경우 일주일 후에 방영할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자체제작해 지역뉴스를 중심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당시 시정과 도정의 문제점을 따끔히 비판하고 지역민들의 목소리를 뉴스에 많이 반영해 나름대로 인기가 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서울소식이나 해외소식은 서울본국에서 필름을 비행기로 수송해와서 방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아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날에는 화면을 어떻게 매울지 고민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 로스앤젤레스 동양방송 (KBSC, CH 5)
      1974년 9월 중앙일보 미국지사가 재미동포들에게도 송출하기 위해 세운 방송국. 매주 일요일마다 2시간 씩 미국에서 자체 제작한 프로를 방영한다. 1983년경부터 KBS미주현지법인[60]합병.(참조.)
  • 동양라디오 (HLKC, 639kHz / 20kW)

    • KBS 제3방송으로 바뀌었다가 1981년 9월 7일 폐국하였다.
    • 전일방송 (VOC, HLAA, 1224kHz / 20kW)
      전남일보 계열로 동양라디오 광주지역국. 현재 KBS광주방송총국 제2라디오. 비아송신소 송출
    • 서해방송 (SBC, HLAS, 675kHz / 10kW)
      동양라디오 군산지역국. 언론통폐합 이후 KBS군산방송국이 되었다가 2004년에 KBS전주방송총국에 흡수되어 KBS 전주방송총국 제2라디오로 바뀌었고 예전 사옥은 현재 군산문화원 건물로 사용중이다. 대야송신소 송출
  • 동양FM (HLKC-FM, 89.1MHz / 1kW)
    현재 KBS 2FM. 남산 송출
    • 대구 한국FM (BBC-FM, HLCB, 89.7MHz / 1kW)
      전국 유일의 동양FM 지역국이자 국내 최초로 지방에서 설립된 FM방송국이었으며, 언론통폐합 이후 KBS 대구 FM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61] 대구지역 다른 FM방송사들이 거의 대부분 다 그렇듯 팔공산에 송신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2]

11. 프로그램

11.1. TV 프로그램


자세히 보면 후지필름의 로고가 뒤집혀져 있다.[63][64]
  • 쇼쇼쇼 - TBC 개국때 부터 TBC 폐국때까지 방송된, 그야말로 TBC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기 쇼프로그램. 언론통폐합 이후 KBS2에서 방영하다 잦은 시간대 변경과 이듬해 방영된 MBC의 쇼2000에 밀리면서 시청률이 하락하여 1983년 7월에 종영. 1980년 당시에는 토요일 9시대에 방송되었다.
  • TBC 석간 (영상은 1980년 11월 30일의 마지막 방송 화면) - 1972년부터 방송되어 1980년 11월 30일에 종영되었다. JTBC가 동양방송의 사실상 후신이라면 이 뉴스 프로그램은 JTBC 뉴스룸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으며 KBS2로 친다면 KBS 뉴스비전-8시 뉴스파노라마-뉴스투데이-KBS 뉴스8-KBS 8 뉴스타임의 전신이기도 한다. 시간대가 메인 뉴스라는 점도 그렇고...[65] 여담으로 이 프로그램은 이건희 당시 이사의 제안으로 탄생했는데, 앵커진행 - 리포트 라는 기본형식에 짧은 코멘트나 인물인터뷰, 일기예보, 그리고 기획물형식의 장편리포트[66], 그외 단신을 정리해 전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에는 시청자 만화나 팬터마임도 뉴스시간에 보여준 모양.
  • 매일연속극 달동네 - 1980년 10월 1일부터 방송된 동양방송의 마지막 일일연속극. 언론통폐합 이후 KBS1로 이동.[67][68] 1980년 당시에는 월~금 8시 30분대와 토~일 10시대에 방영되었다.
  • 일일연속극 아씨
1970년에 인기리에 방송된 연속극.
  • 야, 곰례야
1979년부터 1980년 초까지 방송된 일일연속극이다. 시골 소녀 곰례가 서울 도심에 시집오면서 일어나는 각종 에피소드와 역경,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정윤희가 곰례역을 맡았다. 이 작품역시 인기리에 방송되었으며, 5개월 후 달동네를 집필한 나연숙 작가의 작품이다.[69]

  • 제1회 전국대학축제경연대회 : 1979년 6월 16일 토요일 오후에 한양대 노천극장에서 열렸던 대회. 후에 허문도가 기획한 국풍81의 모티브가 된 행사. 한양대 재학생이던 이정희씨가 '그대 생각'이라는 노래로 대상을 차지했으며[70], MBC 기자 출신의 국회의원 박영선도 이 대회에 출전했다.[71] 또한 이 대회에서 밴드 '김수철과 작은거인', 극우가수로 알려진 송만기 양평군의원도 배출되었다.
  • TBC 세계가요제 : '음악을 위한 국제 교류'라는 취지로 동양방송이 기획한 행사로서, 제 1회 대회(본선 대회)는 1979년 12월 9일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제 2회 대회(본선 대회)는 1980년 11월 22일(토)에 역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제 1회 대회 대상은 일본 가수 '오하시 준코'가 부른 'beautiful me'[72]가 차지했고, 제 2회 대회 대상은 아프리카 모잠비크의 가수 '슈디'가 부른 'Ecstacy'[73]가 차지했다. 참고로 마지막 대회인 2회 대회는 TBC가 폐국 전 마지막으로 개최한 행사이기도 하다.
  • 홈런이다 홈런 : 1980년 6월 2일~1980년 10월 7일까지 평일 저녁 6시 30분에 방영되었던 어린이 야구 드라마. 강수연, 안정훈 주연.
  • 날으는 원더우먼 : 동양방송에서 방영했던 외화. 이 영상은 오리지널 원더우먼 영상에 당시 진미령 씨가 부른 주제가를 합성한 것이다.

  • TBC 권투 : 무앙수린VS김상현 1978년 12월 30일[74],김성준VS양홍준 1980년 6월 20일
  • 쇼는 즐거워 :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영된 쇼프로그램. 매일 포맷과 주제를 달리해 진행한것이 특징이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었으며, 스튜디오녹화를 벗어나 야외 생방송을 진행하기도 하고, 인기 드라마의 결말에 대해 시청자들에게 의견을 묻는[75] 방송을 진행하는등 참신하고 색다르게 진행했다. 보통 10시에서 11시 언저리에 방송했으며 80년 개편 때 폐지
  • 동서남북 : 봉두완이 진행했던 토론 프로그램. 당시에 김영삼, 백기완 등 야당인사들이 이 프로그램에 나왔었다. 백기완이 TV출연을 해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76] 했다가 눈밖에 났다는 곳도 바로 여기였다. 또 최규하 전 대통령도 외무장관시절에 이 방송에 나오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의 오프닝과 클로징멘트에서의 봉두완 앵커의 날카로운 한마디 한마디도 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정권 비판적인 내용들이 계속해서 일부 나오자 이를 불편해 했던 박정희 정권의 압박으로 인해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은 방송계를 떠났고, 일부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80년 개편때 교양강화차원에서 부활해 폐국직전까지 다시 방영했다. 다만 정치관련 주제는 다루지 못했다.
  • 봉두완입니다. : 봉두완[77]이 진행한 일요일 아침 시사프로그램. 토론프로그램은 아니었고 인터뷰 성격의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호돌이와 토순이 : 어린이 프로그램. #
  • 인간만세 : 대담 프로그램[78] 평범한 대담프로그램처럼 보이지만, 사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 국정홍보방송[79]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정홍보방송치곤 의외로 잘만들어서 꽤 인기를 얻었다.

  • 부부 : 70년대 말부터 방송된 주간단막극이다. 매주 다양한 주제로 부부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방영 당시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당시 신문사들의 TV주평 코너에서 호평을 쏟아냈을 정도였다. 주로 평일 심야 시간에 방송되었으며, 폐국 당시에는 목요일 밤에 편성되었다.
  • 추적 : 토요일 저녁시간대에 방송한 반공극이다. 당시 MBC의 113수사본부의 맞불 성격이 강했었다. 심지어 방영시간도 비슷했다. 폐국 후에도 80년대 초까지 KBS에서 계속 방영되었다.
  • 형사 : 일요일 저녁 시간대에 방송한 수사극이다. 당시 MBC의 수사반장의 맞불 성격이 강했었다. 이 작품 역시 수사반장과 방영시간이 비슷했고, 폐국 후 KBS에서 계속 방영했다.
  • 대춘향전 : TBC에서 방영된 특집사극이다. 1979년 개국15주년 특집으로 방송되었고, 이때 춘향 역은 장미희가, 이몽룡 역은 한진희가 맡았다. 그리고 1980년에는 추석특집으로 방송되어 춘향 역에 이경표, 이몽령 역은 노주현이 맡았다. TBC에서는 이 작품을 매년 작가와, 연출, 배역을 달리해 다른 각도로 해석된 면을 보여주려 했으며, 10년 이상 장기방영 할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폐국으로 인해 실현 할 수는 없었다.
  • 주말극장 : 당시 KBS의 명화극장, MBC의 주말의 명화와 경쟁하던 토요일 심야시간대에 방송된 TBC 대표 외화프로그램이다. 당시 TBC가 외화에 신경을 상당히 많이 썼던지라[80] 수입해오는 작품들의 수준이나 성우들의 더빙 수준이 타사를 압도했다고 한다. 폐국 후에는 종영되었으며, 이후 KBS 2TV에 토요명화가 신설되었다.
  • 명화초대석 : 주말극장에 이어서 또 다시 론칭한 외화프로그램. 원래는 일요일 심야시간대에 방영하다가 일주일에 외화는 한 편만 방송하라는 정부 지침으로 인해 폐지되었다가, 80년에 부활해 화요일 심야시간대에 폐국직전까지 방송되었다. 당시 평일 심야에 외화를 편성하는 곳이 TBC밖에 없어서 이 전략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후 타 방송사들이 평일에 외화시간대를 론칭하는 것을 검토했을 정도였다.
  • TBC 향연 : 국악 전문 프로그램.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민방에서 국악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이 드물었는데, 이는 당시 이병철 회장이 국악 매니아였던 영향이 크다.[81] 실제로 이병철 회장이 이 프로그램에 상당한 애정과 관심을 보였고, 프로그램 평가를 직접하거나 출연자 섭외 요청, 심지어는 듣고싶은 노래가 있으면 담당PD에게 전달해 반영시켰다고 한다. 이 덕인지 방송시간도 처음 일요일 심야에서 화요일 저녁시간대로 옮긴 이후 한번도 바뀌지 않았었다.

11.2. 라디오 프로그램


주로 FM은 음악과 오락을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을 편성했고, AM은 뉴스와 정보를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들을 편성했었다.

  • (FM) FM대행진 (1980년 6월 30일자 방송분) : 아침 7시~9시까지 방송된 아침 프로그램. 언론통폐합 이후에도 폐지되지 않고 현재도 KBS 2FM에서 계속 같은 시간에 방송되는 장수 프로그램. 동양방송 시절에 쓰인 시그널은 Bert Kaempfert 악단이 연주하는 Zambesi 다. #

  • (FM) 안녕하세요 한순옥입니다. (1980년 5월 1일자 방송분) : 한순옥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 오전 9시~11시까지 방송. 시그널 음악은 Roger Whittaker가 연주한 The Rising Of The Lark (whistling)이다. #

  • (FM) 정오의 팝송 (1979년 10월 11일자 방송분) : 이희옥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팝 음악 프로그램.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방송. 시그널 음악은 Ray Conniff의 Popsy.# 1980년 11월 30일 마지막 방송을 마무리하면서 진행자인 이희옥 아나운서가 시그널 음악 연주자와 제목을 알려주었던 일화가 있다.

  • (FM) 가요앨범 (1977년 12월 21일자 방송분) : 이미숙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최신 가요 프로그램. 오후 1시부터 2시까지 방송. 시그널 음악은 Will Glahé 악단이 연주한 Wenzel-Polka다.#

  • (FM) 탑튠쇼 (1980년 4월 29일자 방송분) : 김광한씨가 진행했었던 최신 팝 프로그램.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방송.

  • (FM) 7시의 데이트 : 한때 김창완, 장미선의 듀엣으로 진행했다. 저녁 7시~8시까지 방송. 링크된 음원은 1979년 12월 31일 저녁 7시에 연말 특집 프로그램으로 편성한 '사량의 듀엣 쇼' 실황 녹음. 생방송은 아니고 사전 녹음된 방송이다. 이 '사랑의 듀엣 쇼'의 입상곡들은 이듬해인 1980년에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 1970년대 FM 스테레오 방송, 그것도 실황을 녹음한 것이니 헤드폰이나 이어폰으로 들어보자.

  • 7시의 데이트 마지막 고별 방송 (1980년 11월 30일자 방송분) : 프로그램 하이라이트를 소개해 주는 고별 특집 방송. 마지막에 장미선씨가 울먹이는 부분에서 가슴이 짠~해진다. (...) 전두환 개객끼

  • (FM) 밤의 다이얼 (1980년 5월 1일자 방송분) : 고영수 씨가 진행했던 최신 팝 음악 프로그램. 저녁 8시부터 9시까지 방송.

  • (FM) 영화음악실 (1979년 10월 12일자 방송분) : 심야 영화음악 프로그램. 같은 시간대에 MBC-FM에서는 임국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임국희의 한밤의 데이트 1부'가 이 프로그램과 경쟁했다. 1979년에는 김세원 씨가 진행했고 1980년에는 홍승혜 아나운서로 진행자가 바뀌었다. 통폐합 후 KBS 2FM으로 이어졌고, 80년대 중반 김세원 씨가 DJ로 복귀한 적이 있었다. 밤 10시부터 11시까지 방송. 시그널 음악은 Caravelli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Jeux Interdits (영화 '금지된 장난' 중 로망스)이다. #

  • (FM) 밤하늘의 멜로디 : 배한성이 진행했던 심야 프로그램.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2시간동안 방송. 링크된 음원은 TBC-FM 최후의 날인 1980년 11월 30일 밤 11시에 방송된 동양FM의 마지막 방송이다.[82] 그래서 이 날은 배한성 뿐만이 아니라 이수만과 최희선 아나운서도 출연했다. 시그널 음악은 Franck Pourcel 악단이 연주한 Mr. Lonely다. #

  • 밤하늘의 멜로디 (1980년 4월 30일자 방송분)

  • (AM) 뉴스 기상도[83] - 저녁 7시 라디오 종합뉴스프로그램. 인터뷰와 대담, 해설 중심의 뉴스 전망대와는 달리 아나운서의 뉴스 기사 낭독과 기자의 리포트를 중심으로 한 스트레이트 뉴스 프로그램이었다. 당시에는 저녁TV뉴스 수중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뉴스가 라디오 메인뉴스역할을 했다.[84]
  • (AM) 가로수를 누비며[85] - 교통정보방송. 특이하게도 아침에 한번, 점심때 한번, 저녁에 또 한번 이렇게 3번씩 나누어 진행했다. 송해가 DJ를 맡았다.[86]
  • (AM) 아차부인 재치부인 - 라디오 코미디 드라마.

  • (AM) 황인용 강부자입니다 - 1978년 봄 개편으로 탄생한 프로그램으로, 언론통폐합 이후 KBS 제2라디오에서 계속 방송되었다. 2006년까지도 방송되었던 것으로 추정. 프로그램 시그널은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ping pong sous les arbres 이었다. #
  • (AM) 뉴스전망대 - 당시 전국에서 사실은 수도권과 영호남일부지역이다.인기를 달리던 아침시간대 뉴스쇼 프로그램이다. 출근길이라면 거의 모든 대중교통에서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시선집중같은 라디오뉴스쇼의 원조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12. 여담

1977년 동양방송에서 권투선수 홍수환의 타이틀전을 중계하던 당시, 대구 앞산 기슭의 동네와 김천 산간지역에서 동양방송이 잡혀 시청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이 때 대구 앞산 기슭 마을 주민들이 당시 500원씩 거두어 모아서 산꼭대기에 안테나와 부스터 동축 케이블 1km를 가설하고 사설중계소를 몇 달간 운용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이 현상은 스포라딕 E층 반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87] 또 당시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TBC를 시청했다는 증언도 있다.(대구에서 보내는 전파였다고 한다.아마 대구에도 송신소가 존재한듯 하다.)[88]

2000년대 초반, TBC 직원 출신 네티즌이 '동양방송 사우회(당시 도메인은 www.tbci.co.kr, 이전에는 www.tbcradio.net)'란 이름의 개인 홈피를 만들어 TBC 방송과 관련 자료를 모아 인터넷 박물관을 꾸몄다. 처음에는 희귀 자료들이 올라오는 개념찬 홈페이지로 방송덕후들이 한두번은 다녀갔을 정도였지만, 2007년 대통령 선거나 2009년 미디어법 정국 등을 전후로 한나라당(現 자유한국당) 등 보수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게시판에 올리면 ID가 삭제되거나 활동중지를 먹여버리는 등 홈피가 극도로 흑화가 되어버렸다(…). 이후 열람제한까지 걸 정도로 폐쇄적으로 운영되었다가 JTBC가 개국된 직후 JTBC에 바라는 격려와 희망을 담은 인사말을 남긴 채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한편 이장춘 전 KBS PD가 운영하는 다음 블로그 춘하추동방송에도 잔존하는 TBC 방송 영상과 TBC 관련 비하인드 스토리가 나오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찾아보는게 좋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와 중앙일보 사이트를 통해 당시 프로그램들이 어떠했고, 편성표는 어떠하였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영화 쎄시봉에서 민자영이 오근태에게 동양방송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말했는데, 당시 고향에 내려가 있었던 오근태는 "우리 동네에 TBC 안 나오는데" 라고 전국구 채널이 아닌 동양방송을 디스했다. 그런데 통영이면 부산동양방송 나올텐데...

시청자와 청취자를 부르는 호칭이 TBC 가족이었는데, 방송국 수뇌부부터 전속 탤런트, 코미디언,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가족 같았던 당시 TBC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호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1980년 11월 30일 마지막 고별방송 타이틀도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였다.

동양 라디오 AM, FM의 시보음이 괘종시계가 올리는 시보음인데 시보음 치곤 좀 무섭다. 이 시보음은 1974년부터 1980년 폐국할 때까지 쓰였다.
[1] 로고의 공식 컬러를 알고 계신분은 헥스 코드를 수정 바랍니다.[2] 아이러니하게도 고별방송 다음날 KBS 2TV출범 기념방송인 "KBS새가족"에는 송해,정소녀,허참,이은하,이순재,강부자 등 고별방송 출연진들이 대부분 다 나왔다.[3] 중파방송 한정.[4] FM방송 한정.[5] 물론 정부 비판적이라 해도 대놓고 비판적인 논조를 취한거냐면 그건 또 아니다. 검열을 상대적으로 덜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안 받은건 아니기 때문이다.[6] MBC도 서울MBC만 본다면 TBC에게 밀리는것 처럼보이지만, 대구MBC를 쌍용그룹, 부산MBC를 럭키그룹(LG그룹)이 소유하는 등 삼성에게 뒤졌어도 만만치 않은 기업들이 소유한곳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력에 있어서 TBC에게 그리 뒤진것은 아니었다.[7] 당시에는 해외 뉴스를 일본을 통해서 받았기 때문에 저렇게 불렀다. 이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현재는 국무부로 쓰고 읽는다.[8] 이 공연에 대해서는 중앙일보 웹페이지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해당 자료가 1976년 것임을 알 수 있다.[9] 삼성전자 최초의 순간수상방식 텔레비전 상표명. 삼성전자 문서에 해당 제품에 대한 내용이 있다.[10] 이름처럼 시계를 제조하는 삼성그룹의 과거 계열사. 1988년 2월부터 1997년 8월까지 MBC 뉴스데스크의 시보 스폰서로 맡았으며, 현재는 SWC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였다.[11] 동양화재는 1963~1967년까지 삼성 계열사였는데, 1967년 매각 후 한진에게 인수된다. 그 뒤 1983년부터 여의도로 이전했다. 현재의 메리츠화재. 해당 부지에는 세종로 파이낸스센터가 들어섰다.[12] 스튜디오도 뉴스전용스튜디오 1개와 쇼오락용 스튜디오 1개가 전부였다고 한다.[13] 정확히는 운현궁 앞, 현재의 래미안 주택 전시관(운니동 래미안갤러리) 자리이다. 언론통폐합 이후 중앙일보 문화센터를 거쳐 SBS가 개국하면서 임대, 1993년 12월까지 스튜디오로 사용했다.[14] 참고로 이 스튜디오 바로 건너편이 손석희 JTBC 사장의 모교인 휘문고등학교 자리였다고 한다. 스튜디오에서 쉬는 시간에 탁구를 치던 배우들이 인원수가 부족하자 옆 학교에 있던 남학생을 데려와서 같이 탁구를 첬는데, 그 남학생이 바로 손석희라고 한다. 휘문고등학교 교사는 1978년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전했고 현대그룹이 이 땅을 사들여 1980년대 초 현재의 계동 사옥을 지었다.[15] 해당 방송의 대본을 현재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열람할 수 있다.#[16] 본디 1979년 완공을 본 건물이지만, 서소문에서 여의도로 완전히 이전하는 데 시간이 소요되었다. 완전히 이전하기 전까지는 특집프로그램 및 일부 드라마 또는 예능프로그램을 여의도 신사옥에서 녹화했다고 한다.[17] http://me2.do/xZq1Ej 참고. 붉은 벽돌의 건물이 지금은 흰색 대리석으로 뒤덮여버렸고, 그나마 그 크기도 KBS 본관보다 훨씬 작다(…). 참고로 사진에 보이는 화단이나 보도블럭 등의 앞길은 전부 차도로 변했다. 또한 그 땅 밑에는 서울 지하철 9호선이 지나고 샛강역이 개업하였다.[18] 1988 서울 올림픽 국제방송센터(IBC)로서 건설됨.[19] 1981년 9월 7일 폐국[20] 공식적으로는 KBS에 이관되었고, 개중에는 소실된 자료도 꽤 있다. 하지만 TBC 관계자가 복사본을 중앙일보 사옥에 숨겨두었다고 한다.[21] 당시 이맹희는 제일제당 등 그룹 핵심사업에 주로 관여했다. 왜냐하면 장남인 이맹희가 삼성그룹을 물려받고 이건희가 언론과 금융사업등을 물려받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언론사업은 이맹희의 것이 아니라고 해도 무방했다.[22] 여기서 말하는 에프킬라는 현재 한국존슨에서 생산중인 에프킬라가 아닌 1997년까지 삼성제약에서 생산했던 에프킬라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영난으로 1998년에 에프킬라 브랜드를 한국존슨에 매각하였다. 삼성제약은 이후 2005년부터 삼성킬라라는 제품을 판매중인데, 판매율이 그리 영 좋지 않다. 참고로 동양방송-KBS2-JTBC 관계와 구.에프킬라-현.에프킬라-삼성킬라 관계는 너무나도 오버랩된다.결국 모두 삼성 관련 이야기 모두 삼성에 관련되어 있다. 삼성이야기~~~[23] TBC탤런트 시절에는 한달동안 방송을 30개나 했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당시 모든 연속극에는 거의 등장하다시피했고, 거기에다가 라디오까지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다 언론통폐합이후에는 <달동네>와 라디오 진행을 제외하고는 일거리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KBS사옥에 가면 대놓고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본인이 지금 생각하면 고별방송때 우는 장면이 방송에 나간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한다.[24] 동양방송 1기 무용단 출신이다.[25] 1962년 KBS에서 데뷔하지만, 동양방송 개국 당시 전속배우로 활약한다.[26] 1957년 CBS 성우로 데뷔, 이후 동양방송 개국 당시 전속배우로 활약하게 된다.[27]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 1호라는 타이틀이 있는 배우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28] 1970년 동양방송 성우 6기 출신. 이후 1972년 MBC에서 탤런트 공채에 합격해 배우로 데뷔한다.[29] 1972년 무술사범 특채[30]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궁예', '김두한'을 연기한 배우 맞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31] 본디 MBC에서 라디오 DJ로 데뷔했지만, 쇼쇼쇼를 비롯한 수많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32] 결혼전에 쇼쇼쇼의 진행자로 활동했고, 결혼후에도 언론통폐합전까지 쇼쇼쇼와 가요베스트10의 진행을 맡았다고 한다. 폐국마지막방송의 진행자도 정소녀였다.[33] 1980년에 방영된 '달동네'에 그 유명한 '똑순이'로 나온다.[34] 1971년 '똘똘이의 모험'이라는 제목의 어린이드라마에 출연한 뒤 통폐합 때까지 아역배우로써 활동한다.[35] 1968년에 아역 탤런트로 특채되어 하이틴 배우 시절 <결혼행진곡>, <도토리 7남매>, <언약>, <소년 홍길동> 등지에 출연했다.[36] 2011년 다큐멘터리 '31년만의 귀환 TBC' 인터뷰에선 뮤지컬 활동 사정상 수녀복을 입은 상태로 인터뷰에 응했다.[37] 차재완과 최수민은 배우 차태현의 부모님이다.[38] 차재완은 언론통폐합 이후 KBS에서 음향감독으로 전업한다.[39] 다만 연기활동은 주로 MBC에서 했다.[40] 1971년 MBC에서 배연정과 함께 공채 코미디언으로 데뷔하지만,누가 콤비 아니랄까봐동양방송으로 소속을 바꾸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41] 원래 MBC 출신이지만 배일집과 콤비 연기를 펼치며 동양방송에서 인기를 얻게된다.[42] 라디오 DJ로도 유명했다.[43] 1969년 MBC웃으면 복이와요로 데뷔했으나, 1976년 고전유모어극장이 생긴 이후 동양방송에 스카우트되어 적을 두게 된다.[44]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방수현의 아버지.[45] 1979년 MBC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브라운관에 데뷔했으나, 출연 단 1회만에 시청자의 항의못생겨서 죄송합니다.로 쫒겨난 뒤, 동양방송의 토요일이다 전원출발(당시 일본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던 8시라고, 전원집합!과 포맷이 유사한 프로그램이었다. 원래 여러개로 코미디프로그램이 나누어져있었는데, 당시 정부의 교양강화 및 오락프로제한 정책으로 인해 하나로 통합되었다.)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자세한 사항은 이주일 항목 참조.[46] 가로수를 누비며 DJ와 교양프로그램(이래서야되겠읍니까? 라는 프로그램이라고 전해진다) 진행자로도 활동했다.이때부터 진행자 기질이 있으셨다.[47] 동양방송 소속 코미디언들도 정부의 방침에 따라 KBS로 활동무대를 옮기지만, 서영춘, 배일집, 배연정, 김병조, 김영하 등 일부 코미디언은 언론통폐합 이후 MBC로 활동무대를 옮긴다.[48] MBC에서 활동했던 개그맨. 유행어로는 '이 하하하하원입니다.'라는 자기소개가 있다. 2016년 11월 25일 간암으로 별세.[49] 본디 1956년 KBS에 입사했으나, 1962년 DBS로 이적 후 1964년 동양방송 개국과 함께 이적해 언론통폐합때 다시 KBS로 소속을 옮겨 방송주간으로 활동하게 된다. 1983년 은퇴한 뒤 해태그룹으로 이직, 해태 타이거즈 단장과 코래드[89] 사장, 아시아컴 회장을 역임한다. 해태 퇴사 이후 간간히 방송에 출연하기도 하였다.[50] 사실 이 프로그램은 송해가 진행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다만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도중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충격을 받아 진행자에서 하차하게 된다.[51] 그 당시 생경했던 미인대회(미스탐라) 출신 아나운서로, 70년대 인기 아나운서였다. 언론통폐합 이후 KBS에서 1987년까지 아나운서로 활동하다가 1995년부터 2002년까지 CJ홈쇼핑의 쇼호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한 이력이 있다.[52] 언론통폐합 이후 KBS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이어갔으며, KBS1 아침간판프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진행하기도 했다.[53] 언론통폐합 이후 TBC 재직중이던 사원 상당수가 KBS로 적을 옮겨 활동하였다. 그래서 KBS 출신으로 알려진 인물들이 많다.[54] 언론통폐합 후 KBS로 넘어가 특파원 등으로 주로 활동하다 2000년에 KBS1 <일요진단>을 진행했다.[55] 정확히 말하면 TBC 부산방송국 소속이었다. 언론통폐합으로 KBS 부산방송총국 아나운서로 옮겼다가 1994년 본사로 올라가게 된다.[56] 1955년도에 CBS 성우 1기로 입사하여 성우로 활동하다가 1961년 KBS에 입사했으나, 동양방송 개국 이후 이직하여 '이조여인 500년사'등의 사극을 연출했다.[57] 당시에는 TBC석간 뒤에 방송되는 5분짜리 '일기해설'이라는 독립프로그램을 통해 일기예보를 했다.[58] 80년대 이후에는 방송자막과 CG 등을 통해 일기도를 보여주었지만 70년대엔 그러한 연출 기술이 없어서 직접 지도에 매직으로 일기도를 쓱쓱 그렸다(...).[59] 당시에는 관상대 직원자격이었다. 타 방송사에서 김동완위원을 영입하려 애를 썼지만, 이병철 회장이 백지수표에 10년 종신이사직까지 제안하면서 끝까지 붙잡았다고 한다. 이 인기에 힘입어 청와대에 일주일에 한번씩 가서 날씨 브리핑을 하기도 한다.어째 뭐만하면 다들 남산이나 청와대에 다녀오신다.[60] 2004년부터 사명을 'KBS LA'로 바꾸었다가 2008년부터 KBS 아메리카에 합병됨.[61] 현재는 KBS 1FM 중계 및 로컬방송만 하고 있지만, 2001년 2FM에서 광고방송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2FM도 중계하기도 했었다.[62] 참고로 대구지역 FM방송들 중 팔공산이 아닌곳에 송신소가 세워진 것은 대구극동방송이 최초다.[63] 해당 프로그램은 1980년 11월 29일 방송된, 동양방송에서 방송된 마지막 쇼쇼쇼로써, 오프닝 일부와 조용필 출연분, 그리고 프로그램의 엔딩만 따로 편집한 영상이다. 출연진은 윤수일, 조용필 이외에도 제 2회 TBC 세계가요제 게스트로 출연했던 살바토르 아다모와 그랑프리를 차지했던 '슈디'가 출연했다.[64] 이 방송 중 살바토르 아다모가 '눈이 내리네'를 부른 영상은 다음날(11월 30일) 방송된 고별방송 'TBC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에 다시 방송된다.[65] TBC 석간도 MBC의 뉴스데스크와 마찬가지로 아나운서가 제공자막을 설명한다.[66] 이때는 1분 30초 포맷이 자리잡기 이전이어서 리포트호흡이 지금보다 긴 편이었다.[67] TBC 방영시절에는 흑백으로 방영되다가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KBS1로 이동하면서 컬러로 방영되었다.[68] 언론통폐합 그 다음날인 1980년 12월 1일부터 컬러방송을 전격적으로 시행한 덕이다.멀쩡한 방송국을 흑백의 과거로 가두려는 술수[69] 어느 팬이 음원으로 남아 있는 한국어판 오프닝을 가지고 재현한 영상이다.[70] 영상 맨 마지막에 나온다[71] 영상 중간에 '퐁퐁사중창단'이라고 여자 둘 남자 둘이 나오는 혼성 4중창단이 노래하는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72] 이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일본 가수가 일본어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73] 이 노래는 이듬해인 1981년에 가수 민해경이 '사랑의 절정'이라는 이름으로 번안해서 부른다[74] 여기서 캐스터는 박지호 아나운서, 해설은 지금은 고인이 된 노진호 기자였다. 당시에 중앙일보 요새 말하는 스포츠부 기자 출신이었다. 향후 빙그레 이글스 단장을 통해 장명부를 영입했으며 단장 이후엔 1995년 이후부터 한국스포츠TV 해설을 맡았었다. 지금도 1990년대 해태타이거즈등을 검색하면 프로야구 중흥이라는 영상이 존재한다. 공교롭게도 동양방송 출신이었던 이장우 캐스터랑 한국스포츠때 호흡을 맞추었다. 아무튼 노진호 기자랑 해설을 비슷하게 한 당시엔 1980~1990년대는 한보영 기자도 MBC에서 복싱해설을 맡았었다. 한보영 기자도 초반에는 연예부 기자였다[75] 실제로 엽서등으로 시청자들의 의견을 모은 뒤 결론을 지어서 드라마에 반영하기도 했었다. 예를 들어 여주인공을 누구와 엮어줄지 의견을 물은뒤 결말에 반영하는 식.[76]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대망의 70년대'라고 했는데, 백기완이 ''아파트가 무너지고 노동자가 죽어나가는데 무엇이 대망의 70년대냐"고 말했다.[77] 당시 뉴스전망대, 2시취재현장, TBC석간, 동서남북, 봉두완입니다 까지 거의 모든 시사프로그램은 다 진행한 스타 앵커였다. 이 인기에 힘입어 청와대에 초청되기도 하고 육영수 여사에게서 넥타이도 선물받았다고 한다.[78] 유튜브 'KBS Archive 옛날티비'에 몇몇 화가 올라왔다. 찾아보면 다른 화의 일부 영상도 볼 수 있다.[79] 당시에는 이러한 사회개몽성 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 편성하도록 되어있었다.[80] 이는 당시 이사였던 이건희가 상당한 영화광이었기 때문인듯 하다.[81] TBC는 당시 라디오에도 국악프로그램과 클래식 프로그램을 방송한 것으로 유명하다.[82] 동양방송 전체로도 최후의 방송이다.[83] 방송 날짜가 1980년 5월 22일이다. 듣다보면 광주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들리는데, 그렇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신군부의 날조된 발표를 그대로 보도한 것이다! 물론 당시 상황상 외부 언론이 정확한 상황을 취재도, 보도도 할수 없었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대략 짐작은 했었고, KBS와 MBC는 지역 방송국을 두고 있었고 TBC도 전일방송이라는 협력 회사가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잠입 취재 자체는 가능한 상황이기는 했다.[90] 그러나 이 때 취재한 영상물의 경우에는 그나마 광주의 상황이 상세히 전해졌던 5월 21일 오후를 제외하면 철저하게 일부만 왜곡 편집되어 보도되었으며, 6월 항쟁이 끝나고 나서야 KBS를 통해[91] 5.18에 대한 진상이 제대로 보도될 수 있었다. 그나마 외신에서 필사의 각오로 광주에 잠입해 취재를 하여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다.[84] TV뉴스 수중계는 90년대에 MBC가 뉴스데스크를 수중계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85] 동양방송 시절에는 공개방송을 했었고 당시 진행자는 송해 선생님이었다. 가로수를 누비며 300회 특집 공개방송 당시 모습이다. # 참고로 1980년 11월 30일 이후 모습은 이렇다. # 언론통폐합 후에 KBS 라디오서울로 넘어가서 방송이 이어졌으며, 라디오서울 폐국 후 KBS 제2라디오로 이전했다.[86] 아들이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로 충격을 크게 받아 그만둔 방송이 바로 이 프로그램이다.[87] 비슷한 예로 1991년 일본에서 KBS청주방송총국의 화면조정 영상을 잡은 사례가 있다. 그런데 그 영상의 KBS 로고가 1984년 이전 버전이었다는게 함정.[88] 다만 안테나를 설치해야 깨끗하게 나와서 관심있는 사람들이나그 시절의 방송덕후들부자들이나 시청할수 있었다고 한다.때문에 TBC애니메이션 얘기를 아무리해도 동네사람들은 몰랐다고. 그러나 이마저도 80년대들어서는 전파가 약해졌는지 자주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