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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D0000><colcolor=#FFFFFF> 원미경 元美京|Won Mi-kyung | |
출생 | 1960년 4월 24일 ([age(1960-04-24)]세) |
강원도 춘천시 조양동 (現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조양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원주 원씨 |
신체 | 162cm, 50kg, 240mm, O형 |
가족 | 1남 3녀 중 넷째 |
배우자 이창순, 슬하 1남 2녀 | |
학력 | 춘천초등학교 (전학) 성정여자중학교[2] (졸업) 서울여자고등학교 (졸업) |
종교 | 개신교[3] |
소속사 | 메르엔터테인먼트 |
데뷔 | 1978년 미스 롯데 선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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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로 1980년대와 90년대에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했으며 대한민국 3대 영화상인 청룡영화상, 대종상, 백상예술대상의 여우주연상 수상은 물론 MBC 연기대상에 백상 TV부문 최우수연기상과 한국방송대상 탤런트상[4]까지 가지고 있는 레전드급 중년 배우이다.2. 상세
2.1. 어린 시절
1960년 4월 24일, 강원도 춘천시 조양동에서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부친 원형관(1982년 작고)과 강원도 춘천 출신인 모친 박용순(2001년 작고) 사이에서 태어났다.함흥 출신인 아버지는 단신 월남, 12살 연하의 어머니와 열애 끝에 가정을 꾸려 춘천의 요지 조양동에서 대지 280여평의 큰집에서 아무 부러움없는 단란한 집을 꾸렸다. 특히 아버지는 상당한 미남이셨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원미경은 부모의 귀여움 속에 어리광이 극심해 아침마다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학교 빼먹기가 일쑤였다. 아버지는 특히 그녀를 예뻐해 춘천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무용을 시켰지만, 무용 외에도 미술에도 취미가 있어 사생대회에서 곧잘 입상하곤 했다.
그러다가 5학년 때 아버지가 친구의 빚 보증을 잘못 선 게 화근이 돼 집, 땅, 산 다 넘어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서울 종로구 안국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뒤 성정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여자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고3 중반까지 대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2.2. 데뷔와 전성기
고3 중반에 미스 롯데 선발대회가 있다길래 장난삼아 친구들과 함께 응모하게 되는데 그 수많은 쟁쟁한 경쟁자들을[5] 뚫고 1978년 제3회 미스 롯데 선발대회에서 1위에 입상하였고[6] TBC 공채 20기 탤런트로 데뷔[7]하였으며 그 후 드라마에서는 비슷한 또래 이미숙, 이보희와 함께 19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렸다.이미숙은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그때를 회상하며, 자신이 미스 롯데 1등을 할 것이라 자부하고 있었으나 세련된 외모의 원미경을 보고 기가 눌렸다고 얘기했다.
1980년, 리즈시절이었던 모습 |
[kakaotv(D8mYVopXJHI$@my, width=400, height=200)] | |
<rowcolor=#FFFFFF>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전영록과 함께 출연한 롯데껌 광고 | 전영록과 같이 출연한 가나초콜릿 광고[8] |
데뷔하자마자 화려한 연기경력을 쌓았다. 1979년 첫 주연작이었던 영화 <청춘의 덫>으로 원미경은 대종상에서 신인여우상을 받고 <제3 한강교>에서 이계인과 열연을 펼쳤다. 1980년에는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분 신인상을 수상하여 당시 주요 상들의 신인상을 올킬했다. 또 1980년 너는 내 운명에서 자신을 버린 남자에게 복수하는 여주인공으로, 1981년에는 빙점 '81, 초대받은 사람들에 주연으로 나와 크게 흥행하며 당시 TBC의 폐국으로 TBC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2세대 트로이카가 주춤하던 시절에 이경진 등과 KBS[9]의 차세대 꽃[10]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11]
1980년대 초반 기준으로는 19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12]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으로 잘나갔다. 전성기 시절에는 1980년대 트로이카인 이미숙, 정애리와 비교되기보다는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2세대 트로이카 여배우들과 자주 비교되었다. 즉 최전성기 때에 원미경의 경쟁 대상은 동시대의 여배우인 이미숙, 정애리가 아니라 정윤희 등이 포진한 197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였던 셈이었다.[13] 197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들은 1980년대에도 활동을 했지만 일단은 1970년대에 데뷔했기 때문에 1970년대 배우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전성기 시절에 갓 데뷔한 신인임에도 이들 못지 않은 인기를 가졌던 원미경이 1980년대 최고 인기 여배우로 알려진 것이다.
여담으로 원미경의 젊은 시절 모습이 이민정과 닮았다.
2.3. 스캔들 이후의 침체기
그러나 1982년 꽃길만 걷던 원미경에게 스캔들이 터지며 방송생활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원미경이 방송생활을 하던 시절 빚에 쪼들린 가정생활 때문에 본의 아니게 소녀가장이 되었으며, 이런 사정 때문에 한 기자와 연애를 하게 된다. 원미경의 아버지는 이 사정을 알자 기자와 헤어지라고 종용하였으며, 이에 원미경과 헤어진 기자가 1982년 4월 원미경의 사생활을 까발리며 자기와 연인 사이었다고 폭로한다. 그리하여 KBS 주말극 <순애>에서 도중하차[14]했다.이후 동년 11월 MBC 드라마 <황진이>에 출연하며 재기의 불씨를 살리려 했지만, 당시 KBS 전속 배우였던 원미경이었기에 KBS에만 출연하기를 바랐던 KBS의 입장 때문에 MBC와 마찰이 있었으며 다시 1개월 만에 도중하차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15]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4년 연예기자[16]와의 동거설이 터지면서 피어리스 전속 광고 모델 계약마저도 파기되었다.[17] 이런 일이 줄줄이 터지면서 출연금지 연예인 목록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는 영화 출연이 상당히 많았다.
이런 침체기 속에서도 꾸준히 영화에서는 흥행을 하였는데, 1982년에는 <반노>, 1983년에는 <인간시장-작은 악마 스물두살의 자서전>, 1984년에는 <뜸부기 새벽에 날다>로 건재함을 과시하였다.[18] 작품성에서는 칸 수상제까지 올라간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유명하다.
2.4. 복귀와 중흥기
1984년에 출연금지가 해지되며, 이후로는 완전히 MBC로 옮겨 본격적으로 드라마 중심으로 활동했다. 복귀하자마자 간난이로 드라마 재기에 가볍게 성공했고, 정애리와 공동주연한 사랑과 진실[19]로 인기회복은 물론 그 해 MBC연기대상에서 TV 최우수상을 받는 등[20]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드라마에 비해 복귀한 이후에 영화에서는 상대적으로 흥행에 지지부진했는데, 변강쇠[21] 시리즈의 성공으로 영화에서의 성적 부진도 만회하게 되었다.1986년에 원미경은 미대 입시를 준비하지만, 준수한 실기 실력에 비해 당시 학력고사 성적이 대학에 갈 정도가 아니었던지라 성신여대 입시에 실패한다. 이때 원미경에게 3천만 원만 주면 대학 입학을 시켜주겠다고 사기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기 행각으로 실형을 받았다고 한다.
결혼 이후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로 1990년 청룡영화상, 1991년 대종상에서 각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외에 흥행한 드라마로는 <내일이 오면>, <행복한 여자>, <산다는 것은>, <은실이>, <아줌마>, 영화로는 <자녀목>[22][23][24], <사노> 등이 있다.
위와 같이 그녀는 30대 주부가 된 1990년대에도 역시 영화와 TV에서 주연급으로 활동했고, 광고에서도 억척스러운 주부 이미지로 등장했다. TV 드라마에서는 아파트[25]나 은실이 등에선 조연으로 나오기도 했으나 주연급 비중으로 나오며 계속 대중에 얼굴을 비친다. 그러다가 40대가 된 2000년에 MBC 드라마 아줌마의 오삼숙 역으로 제3의 전성기라고 불릴 만한 신드롬급 인기를 얻는다. 제목처럼 아줌마, 주부층에서 열렬한 지지를 얻어 다시 화제가 되었고 연기력도 인정받아 그해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과 이듬해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2.5. 결혼 이후
이창순 PD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고 2002년 드라마 <고백>을 끝으로 2003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원미경은 한 지인을 통해 '지금도 국내 방송계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지만 당분간 아이들의 교육에 전념하는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는 데 행복을 느낀다'라고 근황을 알려왔다. 워싱턴 D.C. 인근에서 살고 있으며, 바로 옆집에 친언니가 살고 있어 외로움을 적게 겪고 있다고 한다.원미경은 후배들의 ‘따라하기’ 대상으로도 언제나 0순위였다. 최진실이 살아생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원미경 선배는 내 인생의 롤모델이다. 결혼 후에도 가정주부와 배우로서의 일을 모두 완벽히 해내는 프로의식을 보고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경외감을 보였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2016년, 복귀작을 조율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후 드라마 가화만사성에 출연하면서 복귀를 확정지었고 변하지 않은 연기로 많은 극찬을 받았다.
가화만사성 이후 해마다 작품에 출연하고 있는데 2017년 tvN에서 방송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죽음을 앞둔 '인희' 역할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연기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아냈다. 워낙 원작에서 나문희가 연기했던 인희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부담감도 상당했을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연을 펼쳐 원미경을 모르는 10-20대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게 되었다.
3년 후인 2020년 tvN에서 방송된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에서 '진숙' 역으로 또 한 번의 호연을 펼쳤다.
3. 사건 사고
3.1. 음주운전
2001년 5월 30일, 오후 11시40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입체 교차로서 음주운전으로 불구속 입건되어, 운전면허가 취소되었다. 기사4. 출연 작품
4.1. 드라마
- 1978년 TBC 8·15 특집극 《파도여 말하라》
- 1980년 TBC 8·15 특집극 《그 땅의 사람들》
- 1980년 KBS1 일일연속극 《달동네》
- 1981년 KBS1 TV 문학관 《청춘극장》
- 1981년 KBS1 주간드라마 《은하수》
- 1981년 KBS2 농촌드라마 《바윗골 사람들》
- 1981년 KBS1 대하드라마 《대명》 ... 인선왕후
- 1981년 KBS1 미니시리즈 《야행열차》
- 1982년 KBS2 일일연속극 《꽃바람》
- 1982년 KBS2 주말연속극 《순애》- 도중하차
- 1982년 MBC 《여인열전 - 황진이》- 도중하차
- 1984년 MBC 일일연속극 《간난이》 ... 성년 간난이
- 1984년 MBC 주말연속극 《사랑과 진실》 ... 이미선 [26]
- 1985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임진왜란》... 김개시
- 1986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회천문》 ... 김개시
- 1987년 MBC 수목드라마 《도시의 얼굴》 ... 은혜
- 1988년 MBC 미니시리즈 《내일이 오면》 ... 두라미 [27]
- 1989년 MBC 주말연속극 《행복한 여자》 ... 순임 [28]
- 1990년 MBC 수목드라마 《사랑의 종말》 ... 정지수 [29]
- 1991년 SBS 아침연속극《고독의 문》 ... 김혜진
- 1992년 SBS 창사특집극 《어디로 가나》 ... 막내 며느리
- 1993년 KBS1 일일연속극 《들국화》 ... 은선
- 1993년 SBS 주말극장 《산다는 것은》 ... 원표
- 1995년 MBC 주말연속극 《아파트》 ... 이지경
- 1996년 MBC 주말연속극 《가슴을 열어라》 ... 최혜주
- 1998년 KBS 토요시트콤 《행복을 만들어 드립니다》
- 1998년 MBC월화드라마 《피아노》... 진희
- 1998년 SBS 월화드라마 《은실이》 ... 임청옥
- 2000년 MBC 월화드라마 《아줌마》 ... 오삼숙
- 2002년 MBC 미니시리즈 《고백》 ... 정윤미
- 2016년 MBC 주말연속극 《가화만사성》 ... 배숙녀
- 2017년 SBS 월화드라마 《귓속말》 ... 안명선
- 2017년 tvN 토일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 인희 [30]
- 2018년 tvN 드라마 스테이지 《낫 플레이드》 ... 나인숙
- 2020년 tvN 월화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 이진숙
- 2024년 MBC 금토드라마 《원더풀 월드》 ... 오고은
4.2. 영화
- 1979년 《청춘의 덫》
- 1979년 《제3 한강교》 ... 미숙
- 1980년 《밤의 찬가》
- 1980년 《너는 내 운명》 ... 신자
- 1980년 《머저리들의 긴 겨울》 ... 영자
- 1980년 《야성의 처녀》 ... 요나
- 1981년 《빙점 '81》 ... 양자
- 1981년 《색깔있는 여자》 ... 정순녀
- 1981년 《김두한형 시라소니형》
- 1981년 《초대받은 사람들》
- 1982년 《F학점의 천재들》
- 1982년 《친구여 조용히 가다오》
- 1982년 《갈채》 ... 나영
- 1982년 《종로 부르스》
- 1982년 《반노》 ... 흥아
- 1982년 《푸른 연기》 ... 균정
- 1982년 《사랑의 노예》
- 1983년 《춤추는 달팽이》
- 1983년 《당신은 나쁜 사람》
- 1983년 《인생 극장》
- 1983년 《작은 악마 스물두 살의 자서전》
- 1983년 《철인들》
- 1983년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 1984년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 1984년 《이름없는 여자》
- 1984년 《불새의 늪》 ... 봉은
- 1984년 《뜸부기 새벽에 날다》 ... 춘희
- 1984년 《남과 북》[31]
- 1984년 《정염의 갈매기》
- 1984년 《아가씨와 사관》
- 1984년 《심장이 뛰네》 ... 영희
- 1985년 《자녀목》
- 1985년 《미스 김》 ... 민애
- 1985년 《불타는 욕망》
- 1985년 《고추밭에 양배추》
- 1986년 《변강쇠》 ... 옹녀
- 1987년 《사노》 ... 오월
- 1987년 《변강쇠 2》 ... 옹녀
- 1988년 《회장님, 우리 회장님》[32] ... 양 이사
- 1989년 《신사동 제비》 ... 미영
- 1990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 임정희
- 1993년 《화엄경》 ... 연꽃 여인
4.3. CF
5. 수상 내역
<rowcolor=#FFFFFF> 수상 연도 | 시상식 | 수상 부문 | 작품 |
1978년 | 미스 롯데 1위 | ||
1979년 | 제16회 대종상 | 신인여우상 | 청춘의 덫 |
1980년 | 제16회 백상예술대상[33] | 영화부문 여자 신인연기상 | 너는 내 운명 |
1984년 | 제20회 백상예술대상[34] |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
제4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여우주연상 | ||
MBC 연기대상 | 최우수연기상[35] | 사랑과 진실 | |
1989년 | MBC 연기대상 | 대상 | 행복한 여자 |
1990년 | 제11회 청룡영화상 | 여우주연상 |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
1991년 | 제29회 대종상 | ||
1993년 | 제20회 한국방송대상 | 여자 탤런트상 | 어디로 가나 |
1999년 | SBS 연기대상 | 10대 스타상 | 은실이 |
2000년 | MBC 연기대상 | 여자 최우수 연기상 | 아줌마 |
2001년 | 제37회 백상예술대상 | TV 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
[1] 1973년까지 개최되었다가 중단, 1990년에 재개[2] 現 선정중학교. 선문학원 소속이다.[3] PD였던 남편은 지금 미국에서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다고 한다.[4] 1년간의 지상파 방송국들의 프로그램을 한데 모아 각 부문별로 시상하는데 탤런트상 등 개인상은 오직 1명에게만 주어진다. 하지만, 원미경이 수상할 적에는 남녀 1명씩 시상하긴 했다.[5] 이미숙과 차화연, 경인선, 이문희 (궁예로 유명한 배우 김영철의 부인) 등이 참가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미숙은 자신의 1위를 확신하고 있다가 원미경에게 1위 자리를 뺏기고 인기상에 그치자 원미경을 평생의 라이벌로 생각하며 열폭했다고 한다.[6] 여담이지만 1972년 제1회 미스 롯데 1위는 서미경인데 공교롭게도 두 대회 1위 수상자가 이름이 같다는 게 공통점이다.[7] 미스 롯데 선발대회는 TBC에서 방영하였고, 미스 롯데 수상자는 TBC에서 데뷔하는 것이 코스였다.[8] 원미경이 단순히 미스 롯데라서 이 광고를 찍은 게 아니다. 과거 가나초콜릿 광고는 유명 인기스타들만 할 수 있었던 광고로, 영향력 있는 가수나 배우, 떠오르는 하이틴 스타 등이 출연했다. 원미경 이후에 이 광고를 찍은 사람이 채시라고 그 뒤로 이상아, 김혜수 등이 명맥을 잇는다. 이것만 봐도 원미경의 파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9] 1980년까지만 해도 KBS 대표 미녀배우는 토지의 한혜숙이었다.[10] 당시엔 미녀배우들을 꽃이었다.[11] 81년 KBS 첫 대하드라마인 대명에서 주인공 봉림대군의 부인 역을 맡는 등 영화뿐 아니라 TV에서도 바로 주연급으로 활동했다.[12] 원미경, 이미숙, 정애리를 뜻하는 용어였으며 정애리의 은퇴 후에는 이보희가 들어갔다.[13] 그리하여 당시 원미경에게 붙은 별명이 리틀 정윤희였다.[14] 다른 역도 아니고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인기드라마를 끝낼 수 없던 방송사의 결단으로 주인공은 그대로 두고 배우만 바꾸는 전대미문의 조치가 취해진다. 이때 대타로 나온 배우가 당시로서는 신인인 박준금이었다. 참고로 박준금도 원미경과 같은 춘천시 출신이지만 2살차이이다.[15] 출연마저도 실상은 조연이었는데, 당시 출연했던 드라마의 주연은 2인자였던 이미숙이었다. 배역부터 상당히 굴욕적이었던 셈. 결국 이 드라마를 계기로 이미숙은 2인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원미경의 라이벌이 된다.[16] 당시에 이상벽이 많이 지목되었다. 이상벽 본인은 당연히 부정.[17] 그 뒤 강문영으로 교체되었다.[18] 아주 초대박까지는 아니었고 원미경이 죽지 않았다 수준의 중박 정도로 흥했다. 그녀의 라이벌인 이미숙이 동시대에 고래사냥,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로 대박을 터뜨린 것과 비교된다.[19] 20세기 최고 인기 드라마 작가 김수현의 대표작으로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표절의혹이 있다.[20] 현재의 대상급이다.[21] 요즘의 드라마로 원미경을 접한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원미경의 영화 쪽 이미지는 의외로 글래머러스하고 당시로는 비율도 좋았던 몸매에 기반한 토속 에로물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대표적인 배역이 <변강쇠>의 옹녀. 참고로 그 이전에 토속 에로물 이미지가 강한 배우는 이영옥이 대표적이었다. 여튼 이런 섹시한 이미지 때문에 원미경이 수영복 입고 있는 사진을 대북전단에 쓰기도 했다. 원미경 사진을 자를 수 있도록 절취선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제가 필요하시면 절선따라 잘라 간직하세요"라는 문구를 쓴 것이 압권이었다.[22] 당시 영화치고는 굉장히 수위가 강했기 때문에 일명 <원미경 포르노>라고 비짜 시장에서 돌기도 했다. 다만 영화는 조선 말엽의 여인 잔혹사적인 내용 등, 야해서가 아니라 페미니즘적 주제 때문에 일본에서 추천하는 한국 영화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이 있다. 사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원미경의 몸매는 지금 관점에서 보아도 어마어마하다.[23] 이런 호평과는 별개로 흥행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자녀목이 상영되던 시절 장미희 주연의 깊고 푸른 밤이 이전 겨울여자의 기록을 깰 만큼 큰 흥행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24] 사실 이 당시 3S 정책 시대 쏟아져 나온 1980년대 에로 영화들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수위가 낮고, 예전엔 이런 거로 충격을 받았네 노출이 심하네 코웃음이 나올 정도이다. 한때 세기 말의 충격적 노출이라고 했던 1999년작 영화 거짓말도 2020년 현재 기준으로 보면 인터넷을 뒤지면 나오는 포르노랑 수위가 별 차이 없다면서 시시해 보일 정도다. 그런데 이 자녀목은, 상반신 노출, 그것도 가슴에서 젖꼭지를 제외한 가슴 언저리 부분이 최대였던 여느 에로 영화들과는 달리 상당히 파격적인 노출이 있는 영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나왔던 무릎과 무릎사이에 비하면 노출 수위는 엇비슷한데, 흥행 가도는 큰 차이가 있었다는게 아이러니하다.[25] 1990년대의 톱스타 채시라•최진실이 주연을 맡고 김민종•김지호•변우민 등이 출연한 1995~1996년 MBC 주말연속극으로 원미경은 푼수엄마 역을 맡았다. 톱배우였음에도 코믹연기를 선보여서 많은 눈길을 끌어 95년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채시라나 신인상의 김지호를 제외한 아파트 출연진 중 유일하게 후보에 올랐는데 김혜수와 최우수상 후보였다.[26] 유리의 성의 표절이라고 당시부터 말 많았다[27] 시드니 셀던의 동명 소설의 번안판이며, 작가는 다름 아닌 이홍구다.[28] 실제로 원미경은 이 작품으로 영예의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하였다.[29] 시드니 셀던의 천사의 분노의 번안판이며 작가는 다름 아닌 정하연이다.[30] 지상파 외 드라마로는 첫 출연이다.[31] 리메이크판으로 60년대판의 엄앵란이 맡은 역을 했다[32] KBS의 인기 유머 프로그램이었던 유머 1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을 영화화한 것이다.[33] 당시에는 한국 연극 영화 예술상[34] 당시에는 한국 연극 영화 TV 예술상[35] 당시에는 최우수상이 실질적인 연기대상 이었다. 연기대상 부문이 본격 신설된 건 1985년 시상식 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