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4:07:14

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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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연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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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22년
이름 강수연
분야 배우
은관문화훈장(2등급)
파일:문화옥관.jpg
연도 1987년
이름 강수연
분야 배우
옥관문화훈장(4등급)

역대 베니스 국제 영화제
파일:베니스 국제 영화제 로고.svg
볼피 컵 - 여우주연상
제43회
(1986년)
제44회
(1987년)
제45회
(1988년)
발레리아 골리노
(사랑 이야기)
강수연
(씨받이)
이자벨 위페르
(여자 이야기)
셜리 맥클레인
(마담 소사츠카)

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파일:daejongawards.png
여우주연상
제25회
(1986년)
제26회
(1987년)
제27회
(1989년)
최명길
(안개기둥)
강수연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강수연
(아제 아제 바라아제)
제26회
(1987년)
제27회
(1989년)
제28회
(1990년)
강수연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강수연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강수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제27회
(1989년)
제28회
(1990년)
제29회
(1991년)
강수연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강수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원미경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역대 파일:bluedragonfilmawards_logo.png
파일:bluedragonawards3.png
여우주연상
제12회
(1991년)
제13회
(1992년)
제14회
(1993년)
장미희
(사의 찬미)
강수연
(경마장 가는 길)
김혜수
(첫사랑)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파일:baeksangartsawards4.png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
제27회
(1991년)
제28회
(1992년)
제29회
(1993년)
이혜숙
(은마는 오지 않는다)
강수연
(경마장 가는 길)
배종옥
(걸어서 하늘까지)
제35회
(1999년)
제36회
(2000년)
제37회
(2001년)
전도연
(약속)
강수연
(송어)
전도연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파일:SBS 로고.svg 연기대상 대상
고두심
(2000년)
전인화
강수연
(2001년)
안재모
(2002년)

}}} ||
<colbgcolor=#D5D1C6><colcolor=#2D2B28> 강수연
姜受延|Kang Soo-youn
[1]
파일:강수연12.jpg
출생 1966년 8월 18일[조기입학]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망 2022년 5월 7일 (향년 55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강남세브란스병원
본관 진주 강씨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62cm, 45kg, 230mm, AB형
가족 오빠 2명, 여동생, 6촌 동생 김석훈
학력 서울교동초등학교 (졸업)
풍문여자중학교 (졸업)
동명여자고등학교 (졸업)
종교 불교[3]
소속사 에이플래닛엔터테인먼트
데뷔 1969년 영화 출연(영화배우)
1976년 동양방송 전속 아역 탤런트(TV 탤런트)

1. 개요2. 활동3. 사망4. 출연 작품
4.1. 영화4.2. 드라마4.3. 연극
5. 수상 내역
5.1. 시상식
6. 여담

[clearfix]

1. 개요

네 살 때부터 아역 배우로 연기를 시작한 대한민국 최초의 '월드스타'.

독보적인 아름다움과 타고난 연기 재능, 여기에 완벽주의에 가까운 프로근성까지. 강수연은 배우의 3요소를 모두 갖춘 완전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 갓 스무 살이 넘은 나이에 베니스 국제 영화제(《씨받이》)와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부장제에 희생된 아낙부터 독립적인 현대 여성까지 강수연은 한국 여성상의 극단적 스펙트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CGV 피카디리 1958 - 2010년대 명예의 전당 배우 선정

대한민국의 前 배우.

대종상,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베니스 국제 영화제 등에서 여우주연상 총 10관왕을 달성했다. 드라마 '여인천하'의 정난정 역으로도 유명하다.

추모 홈페이지 http://kangsooyoun.com/

2. 활동



1966년 8월 18일에 태어나 3세 때인 1969년에 한 영화 관계자의 눈에 띄어 영화에 처음 출연했고, 1976년 TBC 아역 탤런트 1기로 뽑혀 연기에 본격 입문했다.

1980년의 언론통폐합 이후로는 KBS로 활동 무대를 옮겨 1981년 KBS1 <모이자 노래하자>에서 이상용과 사회를 본 바 있고, 1983년엔 청소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가 큰 인기를 얻으며 당시 손창민과 더불어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985년 영화 '고래사냥 2'로 성인 배우로서 첫 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부터 강수연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1987년에 개봉된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는 그 해 한국 영화 흥행 순위 1위를 기록하며 대흥행,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는 관객 수 124,259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에 대종상에서 여자 인기상과 첫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기세를 이어받아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영화 '씨받이'가 국내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해외에서 뜻밖의 주목을 받아 베니스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동아시아 배우 중 최초.[4] 이때부터 강수연에게 월드 스타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1989년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개봉했다. 강수연의 삭발[5] 투혼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으며, 이후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영화제 심사위원장은 폴란드의 세계적 거장 안제이 바이다 감독이었다.

'씨받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국내외에서 이례적인 성과를 거두며 화려한 전성기의 시작을 알렸고, 이어 개봉한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경마장 가는 길', '그대안의 블루' 등이 연이어 대박을 터뜨리며 영화계의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994년에 개봉한 스릴러 영화 '장미의 나날'[6]이 평단에게 혹평을 받고 상업적으로도 첫 실패를 하게 되었다.[7] 더불어 조금씩 치고 올라오는 후배 여배우들[8]과 브라운관에서 활동하던 여배우들이 대거 영화판으로 이동, 자연스레 세대교체가 진행되었다. 이후 '그 여자 그 남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어느 정도 흥행하기도 했으나, 이후 지나치게 호불호가 갈리는 내용들의 영화로 대중들의 혹평을 받았다.[9]

1999년, 영화 '송어'가 개봉되었다. 흥행은 좋지 못했으나 작품성은 호평을 받아 도쿄 국제 영화제 특별상, 백상예술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다가 2001년, 드라마 '여인천하'에 주인공 정난정 역할로 출연해 오랜만에 브라운관 복귀를 알렸다. '여인천하'는 최고 시청률 35.4%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로 인해 본인의 연기 경력 최초로 전인화와 함께 S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에는 영화에 간간이 출연했으며, 특히 영화 관련 행사에 자주 등장했다.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의 공동 집행위원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행정 경험이 전무한 것에 비해 열정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호평을 받기도 했으나,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직원들이 "소통의 단절 및 독단적 행보가 지나치다"는 성명서를 발표해 논란이 되었다.# 결국 2017년을 마지막으로 자진 사퇴했다.#

2013년 단편 영화 '주리' 이후로 연기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2021년에는 연상호의 영화 '정이'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알리며 장편 상업 영화로는 약 10년 만에 복귀하였다. 2022년 1월 촬영을 마치고 연내에 개봉할 예정이었으나...

3. 사망

2022년 들어서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서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상태였다고 한다. # 그러던 중 5월 5일 오전부터 두통을 느낀 강수연은 본인이 119에 신고해 구급대원들이 출동하기도 했으나 당시에는 병원 후송을 원치 않아 철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후 5시 48분에 강수연의 가족들이 넣은 신고를 받고 119가 다시 출동하였으나 그때는 안타깝게도 이미 심정지를 일으킨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10]

이후 심폐소생술(CPR)을 받으면서 강남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어 뇌출혈 진단을 받았고 혼수상태에서 병원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1 #2 #3 5월 6일에는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보고 있는 상태라고 알려졌는데, 수술을 통한 치료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병원에서 수술을 해도 경과가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가족들도 수술을 포기한 것이 이유로 전해졌다. #
일련의 소식들이 언론 보도로 알려지자 부산국제영화제 초대 집행위원장 김동호[11], 임권택[12], 류승완, 설경구 등 영화계 인사들이 그의 쾌차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줄지어 발표하며 희소식을 기다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일도 채 지나지 않은 5월 7일 오후 3시, 결국 의식불명 상태에서 치료를 받던 중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하고 향년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3] 사인은 뇌동맥류 파열로 인한 뇌출혈로 알려졌다.

부고가 전해지자 영화계는 김동호를 위원장으로 영화인장 장례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 영화 감독 이우석, 임권택, 정지영, 배우 김지미, 박정자, 박중훈[14], 손숙, 안성기 등이 고문을 맡았다. #

또한 강수연의 복귀작으로 알려진 넷플릭스 영화 정이는 그녀의 유작이 되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층 17호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11일이었다. # 영화배우 강수연 씨 빈소 '영화계 인사들 조문 행렬 이어져'

4. 출연 작품

4.1. 영화

<rowcolor=#2D2B28> 연도 제목 배역 비고
1975년 핏줄
1976년 나는 고백한다
1977년 별 3형제
1978년 어딘가에 엄마가
슬픔은 이제 그만 박미나
비둘기의 합창
1979년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
1980년 마지막 밀애
1982년 깨소금과 옥떨메 깨소금
1983년 약속한 여자
1985년 W의 비극
고래사냥 2
1987년 씨받이 옥녀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미미
연산군 장녹수
감자 복녀
됴화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순나
1988년 미리 마리 우리 두리 우리
낙산풍음간향마
1989년 그 후로도 오랫동안 선우수미
아제 아제 바라아제 순녀 [15]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윤주
1991년 경마장 가는 길 J
낙산풍
베를린 리포트 마리엘렌(영희)
1992년 그대 안의 블루 유림
1993년 그 여자, 그 남자
웨스턴 애비뉴 지수
1994년 장미의 나날 재희
1995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혜완
1996년 지독한 사랑 영희
1997년 블랙잭 장은영
깊은 슬픔 오은서
1998년 처녀들의 저녁식사 호정
1999년 송어 정화
2003년 써클 오현주
2006년 한반도 명성황후
2007년 검은 땅의 소녀와 특별출연
달빛 길어올리기 지원
2013년 주리 수연 주연
2023년 정이 서현 주연 및 유작[16]

4.2. 드라마

<rowcolor=#2D2B28> 연도 방송사 방송명 배역
1976년 파일:동양방송 로고.svg 똘똘이의 모험 이쁜이
1979년 오성과 한음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17]
1980년 바람돌이 장영실
파일:MBC 로고(1969-1974).svg 고운님 여의옵고 정순왕후
1981년 파일:KBS 1TV 로고(1980-1984).svg 대명 장렬왕후
파일:KBS 2TV 로고(1980-1984).svg 눈동자 혜미
달무리 경아
1982년 파일:KBS 1TV 로고(1980-1984).svg 풍운 명성황후 아역
1983년 고교생 일기 유현수
하늘은 알고 있다
1984년 사랑하는 사람들
청소년문학관 - 비바리
청소년문학관 - 누나의 자전거
청소년문학관 - 전원교향악
1985년 파일:MBC 로고(1981-1985).svg 엄마의 방
1986년 파일:KBS 2TV 로고(1984-2018).svg 이화에 월백하고 - 달빛엔 님의향기 계월향
파일:KBS 1TV 로고(1984-2018).svg TV 문학관 - 들뻐꾸기
1987년 TV 문학관 - 순금촛대
2001년 파일:SBS 로고.svg 여인천하 정난정
2007년 파일:MBC 로고(2005-2011).svg 문희 하문희

4.3. 연극

<rowcolor=#2D2B28> 연도 제목 배역 비고
1995년 메디아 메디아 [18]

5. 수상 내역

5.1. 시상식

<rowcolor=#2D2B28> 연도 시상식명 수상 부문 작품명
1984년 제20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여자 신인 연기상 고교생 일기
1987년 제44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19] 씨받이
제26회 대종상영화제 여자 인기상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여우주연상
제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상
문화훈장 옥관문화훈장
1988년 낭트 3대륙 영화제 여우주연상 씨받이
1989년 제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아제 아제 바라아제
제27회 대종상영화제
제16회 모스크바 영화제
1990년 제1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제28회 대종상영화제
1992년 제2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 경마장 가는 길
제3회 춘사영화제 여우주연상
제13회 청룡영화상
1993년 제17회 황금촬영상 여우인기상 그대만의 블루
제31회 대종상영화제 여자 인기상
제14회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1994년 제3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인기상 그 여자, 그 남자
1995년 제33회 대종상 영화제 여자 인기상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000년 제3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 송어
2001년 한국방송촬영인협회 그리메상 여인천하
SBS 연기대상 10대 스타상
대상[20]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시포워드상 심사위원회 위원상
2010년 한국영화인총연합회 자랑스러운 영화인상
2015년 제16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2022년 제13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제9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특별공로상
제42회 황금촬영상영화제 공로상 배우부문

6. 여담

  • 한국 연예계에서 최초로 억대 개런티를 받은 여성 연예인이다. # 1992년, 영화 '그대안의 블루'를 통해 개런티 2억을 받았다고 한다. 1992년 시점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수준. 광고 출연료는 편당 4억에 달했다.
    • 2005년, 영화 '한반도'에서는 카메오 출연만으로 억대 개런티를 받았다고 한다. #
    • 2001년 드라마 '여인천하'를 통해 배우 최초로 회당 출연료 500만 원 시대를 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고가의 개런티를 요구하는 탑 배우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현재는 '여인천하'의 정난정 이미지가 대외적으로 잘 알려졌으나, 전성기부터 영화에 전념해 영화 관련 활동에 집중했다. 특히 대한민국 최초로 세계적인 국제 영화제에서 본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당시 언론과 국민들에게 영화계의 상징적인 배우로 각인되게 되었다.
  • '아역 배우 출신은 성인이 된 후 성공하기 힘들다'는 편견을 최초로 깬 주인공이다.[21] 강수연은 뒤에도 나오듯이 초등학교 입학 훨씬 이전부터 계속 인지도 높은 드라마에 출연해 대중들에게 굉장히 인지도가 높은 아역 배우 출신이다. 이미 대중들에게 일정한 이미지가 각인이 되었음에도, 성공적으로 성인 배우 이미지 전환에 성공한 케이스다.
  • 상당한 동안이다. 전성기였던 1980년대 후반에도 미인으로 평가 받았으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역 배우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성형 논란도 없다. 이목구비가 새침하고 오밀조밀해서 귀엽고 독특한 느낌을 준다.
  • 광고와 행사 등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으며, 사적으로도 스캔들 같은 잡음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 이성민이 강수연을 우상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다고 했고, 강수연이 세상을 떠나면서 끝내 만나지 못 했다.
  • 경수진이 배우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된 사람이 강수연이라고 한다.
  • 최진실이 동명여중을 다니던 시절 같은 재단 고등학교를 다녔다. 참고로 최진실 역시 선배[22]인 강수연을 동경하여 배우의 꿈을 키웠으며 아역배우로 활동하던 강수연의 드라마를 전부 챙겨 보며 어릴 때부터 강수연을 좋아했다고 한다. 최진실 데뷔 후 서로 친해져 전화 통화를 자주 했다고 한다.
  • 김하늘이 '이홍렬쇼'에서 연예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로 강수연을 꼽았다. '동감' 시사회 때 참석한 강수연의 실물을 보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감탄했다고 한다.
  • 전성기에 무명 단역 배우나 스태프들을 잘 챙겨주기로 유명했다. 촬영하던 영화가 끝나면 항상 본인의 돈으로 뒷풀이를 하면서 저임금으로 고생하는 스태프들과 무명의 단역들에게 한턱을 내곤 했다. 그때 자주 하던 말이 "우리 영화인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였다고 한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맡을 때에도 했다고 한다. 류승완은 무명 시절 이 말이 너무 멋있게 들려서 자신의 영화 베테랑에서 주인공 서도철의 대사로 인용하게 되었다.
  • 남한테 술 사주기를 좋아하는 만큼 자신도 술을 잘 마셨다. 사실 잘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당대 대적할 자가 없는 전설적인 주당이었다. 영화계에 즐비한 애주가들 중 아무도 강수연을 술로 이겨본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무서운 점은 술을 마셔도 취한 티가 안 난다는 것인데, 일설에는 강수연이 취기가 돌면 탁자 밑에서 신발을 벗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 "왜 아직 결혼을 안 했냐"는 질문에 "못 했다"고 답한 적이 있다. 본인도 하고는 싶은데 좀처럼 기회도 연도 닿지 않을 뿐이라고 한다. 미혼인 채로 사망하는 바람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 '여인천하'로 대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이후 사극 촬영이 전무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강수연이 '여인천하'에 출연할 당시에 작품이 추가 연장되면서 정난정 캐릭터가 본인이 생각하던 점에서 많이 멀어지면서 배역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주인공이 드라마에서 혼자 빠질 수 없어서 계속 찍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사극 연기에 지쳐서 다른 사극 섭외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여인천하' 이후 사극 연기는 '한반도'에서 명성황후로 짧게 등장한 것이 전부다.
  • 2022년 4월 17일,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한 심권호와의 전화통화로 음성 출연했다.#
  • 1989년 월간지 <샘이깊은물> 7월 호 기사에 따르면, 독립적인 성품이라 당시 매니저 없이 혼자 스케줄을 잡고 여러 가지 일을 직접 처리해 왔다고 한다.# 당시로서도 매우 독특하게 비쳤다고 한다. 성공한 배우임에도 집에 가정부조차 두지 않았다고.


[1] #[조기입학]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데뷔해서 그런지 원래 나이보다 1년 일찍 입학해 1965년생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 1965년생인 가수 박미경과 국민학교 동창이며, 1968년생인 연기자 후배 최진실이 동명여중 1학년일 때, 강수연이 같은 재단의 동명여고 1학년이었다고 한다(3개년 차이).[3] 49재를 절에서 치뤘다[4] 이후로는 배우 공리가 수상했다.[5] 비구니 역을 완벽하게 연기하기 위해 잘랐으며, 촬영지 선암사 인근에서 몇 달 동안 숙식했다고 한다.[6] 곽지균이 연출을 맡았고, 강제규가 시나리오를 담당했다.[7] 이 작품으로 인해 처음으로 강수연이 활동 기간 중 여우주연상 후보에 제외되었다.[8] 최진실, 심혜진 등은 이미 차세대 스타가 되어 있었고, 거기에 이승연, 김혜수, 전도연 등이 가세하는 중이었다. 실제로는 최진실, 심혜진 등과는 불과 각각 두살 차이 내지는 동갑 정도의 또래 여배우인데다 외모도 동안인 연기자였지만, 빠른 데뷔로 인한 긴 연기 경력과 어린 나이의 성공으로 대중들에게는 윗 세대 배우의 느낌이 났다.[9] 현재 기준으로는 나름 재평가를 받는다. 특히 1997년 영화 '블랙잭'은 할리우드 형식의 세련된 스릴러 영화라는 평을 받는다.[10] 이미 심정지까지 온 상태면 뇌가 심장에 제대로 신호를 못 내릴 만큼 많이 손상된 상태이므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 쓰러졌다는 보도가 나왔을 당시에는 자세한 병명이 알려지지 않고 그냥 심정지로 쓰러졌다는 소식만 나와서 자살을 시도했다가 쓰러진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다.[11] 강수연은 부산국제영화제 3대 집행위원장으로 인연이 있다.[12] 주연작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감독.[13] 공교롭게도 이 날은 전주국제영화제 마지막 날이었고, 몇 시간 뒤 열린 폐회식은 강수연의 부고 소식과 명복을 비는 시간으로 시작했다.[14]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에서 강수연과 같이 주연으로 출연해 연기 호흡을 맞춘 사이다.[15] 삭발.[16] 강수연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며,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2023년 1월 20일 공개.#[17] 어린이날 특집 드라마.[18] 처음이자 마지막 연극 출연. 연출가 김아라의 작품으로 연기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으며, 그 때문인지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참고로 1995년 연극 활동을 기점으로 영화 출연을 한 해에 한 편씩만 출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19] 동아시아 배우 중 최초 수상이다.[20] 전인화와 공동수상이다.[21] 남자 배우로는 안성기가 있다. 다만 강수연보다도 한 세대 전 일이고, 어릴 때만 하였기 때문에 아역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가 적기는 하다.[22] 실제 나이차는 불과 두살 차이지만, 강수연이 일찍 데뷔하였으므로 대선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