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82642><colcolor=#fff> 조선 정경부인 정난정 鄭蘭貞 | |
이름 | 정난정(鄭蘭貞) |
출생 | 미상 |
사망 | 1565년(명종 20) 11월 13일 (향년 불명) |
본관 | 초계 정씨 |
종교 | 불교 |
사인 | 자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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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중기의 인물로 당대 권신이었던 윤원형의 계실[1]. 본관은 초계(草溪).2. 생애
부총관 정윤겸의 딸로 어머니가 관비인 탓에 서출로 태어났다. 미천한 신분에서 그녀가 택한 것은 기생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기생이었던 것은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며 정난정은 얼녀[2]로 태어났다. 서얼이 양반은 아니지만 중인 계층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기생이 될 필요는 없었다.이후 중종의 3번째 정실(왕비)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을 후려잡아 그의 첩실이 되는데 성공한다. 덕분에 정난정도 윤원형의 권세에 비례한 인생을 살게 된다.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 그 뒤를 이어 12살의 명종이 즉위하고 그의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이에 윤원형은 인종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여 천하의 권세는 윤원형의 것으로 돌아왔다.
정난정도 이에 발맞추어 45세(1550년)에 윤원형의 정실부인 김씨[3]를 몰아내고 자신이 정실부인의 자리를 차지했다. 심지어 1551년에 김씨를 며칠동안 굶긴 뒤에 독극물이 든 밥을 먹여 독살하면서 완벽하게 후환을 없앴다. 이후 천하를 손에 쥔 윤원형을 장악한 최고 실권자 정난정은 온갖 부정부패의 중심에서 돈에 걸신이라도 들렸는지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었다. 조선 전국의 상권을 장악하는가 하면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가지고 싶은 땅이나 집을 뺏기도 했다.
정난정의 끝없는 탐욕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적혀져있다. 기우제를 지낸다면서 굶주린 백성들 앞에 쌀밥을 지어놓고 공덕이랍시고 물고기들에게 던져주는 만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워낙 귀해서 왕실에서밖에 먹지 못하는 타락을 집에서 종들까지 실컷 먹게 하는 등[4], 실록에 기록된 정난정의 행각들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다. 그리고 정난정이 물고기들에게 쌀밥을 투척한 장소인 한강 두모포[5]에서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큰 물고기가 낚여 올라오면서 윤원형과 정난정의 몰락을 예언했다고 전해진다.[6][7]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뒤가 켕기기 때문에 자신들을 받아줄만한 종교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난정 역시 온갖 악행과 탐욕으로 성리학보다는 불교 쪽에 기울어서 문정왕후와 함께 불교 진흥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 보우를 중심으로 불교가 살아나는 듯했지만, 문정왕후와 정난정의 권세에만 의존하는 부흥은 절대 오래 갈 수 없었다.[8]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은 8년 뿐이지만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는 12년을 더한 20년(1545년~1565년)이나 됐는데, 이 기간동안 정난정과 윤원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1565년에 문정왕후가 목욕재계를 하다가 오한이 들어 사망했다. 자신들의 권력의 원천이였던 문정왕후의 죽음은 윤원형과 정난정의 끝없는 악행에 종지부를 찍는 지옥의 종소리였다. 먼저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던 보우가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 변급에 의해 왕의 윤허도 없이 처형당했고[9] 윤원형은 보우의 탄핵을 옆에서 거들어야 할 정도로 몰락한 형국이었다. 이후 쿨타임이 된 걸 눈치챈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치단결하여 윤원형 탄핵에 들어갔다. 이에 명종이 윤원형을 벼슬에서 물러나게 한 것 이외에 처벌을 가하지 않자 대신들은 외숙부라서 저러는가 싶었는지, 윤원형 대신에 그의 전처 김씨를 독살한 혐의 등을 물어 정난정을 탄핵했다. 명종은 이 또한 윤허하지 않았지만 윤원형, 정난정 부부는 이미 가시방석 위에 앉은 형국이었다. 그러던 중 금부도사가 집 앞에 나타났다는 종의 보고에 정난정은 끌려가서 고문당할 것을 걱정했는지 깨끗하게 죽자며 11월 13일 결국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윤원형도 정난정의 시신을 붙잡고 통곡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5일만인 11월 18일 강음현에서 뒤를 따라갔다.[10]
3. 기타
- 야사 등에서도 정난정이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권력 암투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문정왕후의 메신저 역할을 한 것은 내시들이었고 정난정은 그저 윤원형의 권력에 편승한 것일 뿐인 듯하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사망한 후 천첩 주제에 정실부인이 된 건 옳지 않다는 등 신하들이 정난정을 처벌하라고 했을 때 명종이 약간 미적지근한 반응을 했다는 것, 문정왕후가 정난정을 윤원형의 정실부인으로 인정해 신분 상승을 시켜준 것을 보면 문정왕후와 정난정의 사이가 실제로도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정난정은 궁궐을 자주 출입하며 어의들을 호령하여 문정왕후에게 들일 약의 제조를 지휘할 정도로 권세가 높았고[11] 불교와 보우를 매개로 문정왕후와도 자주 접촉하며 각별한 사이를 자랑했다.[12]
- 이후로도 악녀의 이미지가 강한지 인현왕후가 만든 규문수지여행지도(閨門須知女行之圖)라는 놀이에서 3번째로 안 좋은 칸으로 등장한다.[13] 정실부인 김씨를 살해하고 정실 자리를 꿰찬 행태가 마치 자신을 내몬 희빈 장씨를 떠올리게 한 것도 있을테지만 해당 칸에 '윤원형의 처로써 언제나 사납더라' 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괄괄한 성질머리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 정난정이 서얼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정경부인의 자리에까지 올라 기록에 남은 여성이고 윤원형과 문정왕후를 움직여 서얼들이 과거를 볼 수 있게 해줬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녀를 신여성이자 개혁가로 봐야 한다는 이덕일 등 몇몇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사대부들의 시각이 개입돼 지나치게 악녀로 만들었다는 것. 정난정이 서얼허통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나 그녀의 악행에 관한 기록을 뒤집을 만한 근거가 없어 설득력은 떨어진다.
4. 대중매체에서
- <조선왕조 오백년> 소설판에서는 정난정의 각종 악행들인 윤원형의 정실부인 김씨 독살 사건,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온갖 사치와 권세를 누리는 모습들, 몰락 후 백성들에게 쫓겨다니다가 최후에 독약으로 자살하는 장면까지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신분제 사회에서 낮은 신분 출신으로 정실부인의 자리에까지 오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라며 의외로 동정 어린 해석도 내리고 있다.[14]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강수연이 연기했다. 정난정과 문정왕후를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으로 문정왕후의 권력 쟁취에 정난정은 모사 역할을 하면서 크게 공헌하는 것으로 나온다. 일종의 피카레스크물이지만 당시만 해도 악인이 주인공인 작품이 익숙지 않았던 탓인지[18] 정난정이 양아버지인 정윤겸 밑에서 서녀로서 겪는 설움과 이 때문에 신분 상승을 위해 눈물겹게 노력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그녀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각했다.[19] 동시에 정난정을 시기해 위해하려 드는 오리지널 악역들 또한 다수 투입하였으며 작 중 등장하는 정적들의 악행 역시 부각했다.[20] 문정왕후의 남매인 (역사에선 남동생이지만 드라마상에선 오라비인) 윤원형에게 시집 가[21] 모사로서의 재능을 한껏 발휘해 숙적인 경빈 박씨, 김안로를 차례로 보내버리고 마지막 화에서 사실은 친아버지인지 몰랐던 파릉군마저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렇게 권력을 얻고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흑화한 것에 대해 스승 갖바치[22]에게도 파문당하고 문정왕후가 죽자 빽이 없어져서 너무나도 손쉽게 몰락한다. 정난정과 윤원형이 도성을 떠나 도망가다가 정난정이 도성 상황을 파악하려 도성으로 돌아왔다가 백성들의 뭇매를 맞게 되지만 당추 스님에 의해 구조된다. 정난정의 봉변 소식을 들은 윤원형은 정난정의 소식이 없자 세상을 떠난 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정난정도 바다에 스스로 들어가 자결했다.
- 2004년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전반부에서 짧게 등장했다.
- 2016년 채널A <천일야사>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에서는 마치 그녀가 비운의 개혁가인 것처럼 왜곡된 내용을 내보냈는데 기우제 핑계로 굶주린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쌀밥을 물고기들 먹으라고 버리며 백성들의 원망을 들은데다가 윤원형과 문정왕후의 비호를 믿고 횡포를 일삼았는데 개혁가 이야기가 나오는건 정말이지 황당한 일이다.
[1] 재혼하여 얻은 정실부인. 측실이었지만 문정왕후의 전교로 적처가 되면서 계실이 되었다.[2] 노비 같은 천민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일컫는 말이며, 평민인 어머니를 둔 서자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3] 김안로의 조카다.[4] 당시에는 품종이 개량된 젖소가 없어서 우유를 얻으려면 암소의 젖을 짜는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당연히 송아지가 먹을게 없어지고 농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소를 키우기 어려워진다. 유교 윤리에서 봐도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새끼가 먹을 것을 사람이 뺏어 먹는 것은 인(仁)에 어긋난 것으로 보았다.[5] 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 일대.[6] 물고기가 올라온 것으로 누군가가 파자점을 쳤는데 윤원형(尹元衡)의 형(衡)을 파자하면 양 쪽에 다닐 행(行)이, 가운데 아래 큰 대(大)가 나오며 나머지 부분은 물고기 어(魚)에서 연화발(火 → 灬)이 빠진 글자가 되는데 지금 크고(大) 이상한 물고기(魚)가 잡혀 올라온(行)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 이는 곧 윤원형의 운명이 이 물고기처럼 잡혀서 몰락할 징조라 예언한 것이다.[7] 이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에도 나오는데 정난정이 물고기들에게 쌀밥을 투척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백성들은 굶어 죽는 판에 어찌 저럴 수가 있는 것이냐? 부처님이 노해서 도리어 액운을 내리겠다"면서 욕을 퍼부으며 저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저주가 통했는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정난정이 쌀밥을 투척한 그곳에서 윤원형과 정난정의 몰락을 예언하는 큰 물고기가 낚여 올라왔다. 이 물고기는 길이가 10여 척(5m 가량)이고 너비가 3척(1.4m) 정도 크기에 머리 위에 구멍이 있어 물을 빗물처럼 내뿜었다는 것으로 보아 벨루가나 상괭이 등 고래 종류가 한강을 거슬러 온 것으로 보인다.[8] 하지만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승장들 중 휴정과 유정처럼 당시 승과에 합격한 승려들이 많다는 것만 봐도 1회성 부흥에 그치지는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9] 당시 일화가 하나 있는데 보우의 기골이 장대하기로 천하에 이름이 났기에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을 고민한 제주목사는 제주의 소문난 장사들을 모아서 일종의 대회를 열었다. 제주목사가 고용한 장사들끼리는 힘을 아끼고 싸우는 척만 하였으나 보우와 맞붙게 되자 온 힘을 다해 보우를 두들겨 팼다. 천하장사라도 버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결국 보우는 자리에 누운 뒤 얼마 가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10] 근데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기사에서 사관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그 금부도사는 '평안도 진장(鎭將)을 잡으러 갔다가 윤원형 귀양지 근처에 있던 금교역(金郊驛)에서 말을 갈아타려고 들렀던 것'이라 한다. 이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에서도 소개되었다.[11] 본래 조선 왕실의 의약 처방에 내의원 의원만 관여하지는 않는다. 의학에 조예가 일정 정도 있는 조정 중신들이 도제조의 직함으로 구체적인 처방을 내리기도 하고 후대의 명성왕후 김씨의 경우에는 김석주를 위시한 친정 식구들이 궁중에서 숙직을 하며 병을 돌보는 사례도 있었다.[12] 따지고 보면 두 설이 상충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정난정의 힘이 윤원형에서 나왔다면 윤원형의 권력은 누나인 문정왕후에게서 직접 나왔다. 실제 역사에서 보듯 아무리 윤원형이 위세를 부려봤자 문정왕후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난정은 당연히 권력의 근원인 문정왕후를 극진히 모셨을 것이고 그런 정난정을 총애했기에 정실로 승격시켜줬을 것이다. 굳이 정실부인이 있는데 첩이었던 정난정을 승격시켜주었다면 문정왕후 입장에서 뭔가 큰 공을 세워서일 가능성이 높다.[13] 가장 최악은 게임오버에 해당하는 즘생(금수)이고 그 다음이 부모를 꾸짖었다고 알려진 김아(金娥), 그리고 정난정이다.[14] 물론 조선 시대 얼자들의 취급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진짜 천민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일단 양반의 자녀이기는 했기 때문에 대외적인 신분은 어머니를 따른 천민이였으나, 아버지의 총애에 따라 양인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윤원형급의 최고 권력자의 정실이 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단순히 최하층 신분의 인생 역전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15] <교동 마님>의 대본 역시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의 작가 신봉승이 썼었으며 드라마 방영 당시 김영란이 얼마나 악독한 정난정 연기를 잘했던지 이게 실제인지 드라마인지 구분도 못하는 일부 극성스러운 시청자들은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몰라도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빨리 죽으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동 마님>의 종영 후 MBC에서는 악역으로 이미지가 고정되어 버린 김영란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김영란의 오늘의 요리>라는 주부들 대상 프로그램을 만들었다.[16]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정난정의 양어머니 장흥댁 역.[17]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정난정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18] 이는 2020년대인 현재도 별반 다르지 않고 오히려 이때보다 인물묘사의 입체성은 더 떨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19] 첩년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며 임신한 아이를 낙태시키려고까지 했다. 이에 정난정 한정 무한 애처가였던 윤원형이 난정이 낳은 아이를 적서 차별 없이 대하겠으니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만 낳아달라고 달래주자 감동해서 눈물을 터트리는 모습을 보면 가엽기까지 하다.[20] 대표적인 인물이 경빈 박씨. 실제 역사에서는 억울하게 누명쓰고 죽은 인물이지만 여기서는 반동인물이다보니 악인처럼 묘사하기 위해 표독스러운 면모를 부각했다.[21] 첫화에서 마음 속의 정인은 길상이라고 했고 윤원형과는 다르게 온전하게 사랑 때문에 결혼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부부로써 애정은 있었고 전체적으로 금슬이 좋은 것으로 묘사된다. 남편이 오랜만에 집에 오면 난정이 매우 반가워하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22] 중종, 인종, 명종 대의 야사에 나오는 백정 출신 현인으로 조광조의 친구였다느니, 인종이 영의정으로 내정했었다느니, 임꺽정의 스승이었다느니 하는 야사가 전해진다.[23]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정난정의 친구로 설정되었던 실존한 기생 옥매향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