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4:31:00

초계 정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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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초계정씨_수정.png
草溪 鄭氏
초계 정씨
}}}
관향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시조 정배걸(鄭倍傑)
집성촌 경상남도 합천군, 거제시, 창녕군
경상북도 포항시, 경산시
충청북도 음성군
충청남도 천안시
전라남도 곡성군
강원도 양양군
경기도 이천시, 화성시,용인시
평안남도 룡강군
황해도 벽성군
인구 104,155명(2015년)
1. 초계정씨 유래2. 상세3. 분파4. 집성촌5.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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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계정씨 유래

초계(草溪)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 : 합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때는 초계(草溪)로 하였고 1018년(현종 9) 합주(陜州)에 속했다. 명종 때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6년(충숙왕 3)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913년 합천군(陜川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합천군(陜川郡)에 속한 초계면(草溪面)으로 남아있다.

초계정씨(草溪鄭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초(高麗初)에 학자(學者)로 이름난 정배걸(鄭倍傑)이다. 배걸은 초계 성산(草溪城山) 출신으로 1017년(현종 8) 장원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종 때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으며, 사숙(私塾)을 열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쳐「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하나인「홍문공도(弘文公徒)」를 이루어 유가(儒家)의 대가(大家)요, 백세(百世)의 존사(尊師)라 일컬어졌다.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으로 개부의동삼사수태위문하시중상주국광유후(開府儀同三司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光儒侯)에 이르고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초계(草溪)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2. 상세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배걸(倍傑)의 아들 문(文)고려 예종(睿宗) 때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좌복야(左僕射)에 추증되었다.

특히 그는 형조(刑曹)에 있는 동안 명판관(名判官)으로 이름이 높았고, 문장(文章)에 능하여 문명(文名)을 날렸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진사(進士) 유명(惟明)의 아들인 온(蘊)이 성품이 곧고 절개가 높기로 이름났다. 그는 일찍이 정인홍(鄭仁弘)과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광해군(光海君)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설서(說書)․사서(司書)․정언(正言) 등을 거쳐 부사직(副司直)에 올랐으나, 광해군(光海君)의 비위에 거슬려 제주도(濟州島)에 10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며「망북두시(望北斗詩)」․「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지어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吐露)했으며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이 밖에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부총관(副摠管)에 이른 윤겸(允謙)이 뛰어났고, 일찍이 김안국(金安國)에게 글을 배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검열(檢閱)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던 윤겸의 손자이자 숙(淑)의 아들인 종영(宗榮)이 가문을 빛냈다.

한편 선조(宣祖)와 인조대(仁祖代)의 명신 (曄)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대사성(大司成)에 올랐으며, 여직(汝稷)은 사도(四道)의 절도사(節度使)와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역임하여 명문(名門)인 초계정씨(草溪鄭氏)의 대(代)를 이었다.

명종 대의 비선실세 정난정과 현대 인기 미남 배우 정우성[1]도 이 집안 출신이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초계정씨(草溪鄭氏)는 남한(南韓)에 104,15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분파


정배걸의 3세손 정복공(鄭復公)의 장자 정영(鄭榮)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지냈고 후손을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라 하며, 차자 정행부(鄭幸夫)의 후손을 천호장공파라고 한다. 정배걸의 3세손 정복경(鄭復卿)의 독자 정윤기(鄭允耆)의 후손은 대제학공파라고 한다. 정배걸의 3세손 정복유(鄭復儒)의 후손 중 국자박사를 지낸 7세손 정승(鄭丞)의 후손을 박사공파라고 하고 6세손 정태화(鄭太華)의 후손을 대사성공파라고 한다.

*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 : 종파(宗派)
*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 : 정행부(鄭幸夫) - 4세
소분파 - 호희공파/전서공파
*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 정복경(鄭復卿) - 3세
소분파 - 경산파/초계진주파/관동파
* 박사공파(博士公派) : 정승(鄭丞) - 7세
소분파- 진정종파/장양공파/상시공파/용인파
*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 정태화(鄭太華) - 6세

4. 집성촌

5. 인물


* 정엽(鄭 燁) - 1563(명종 18)~1625(인조 3) 자(字)는 시회(時晦), 호(號)는 수몽(守夢)․설촌(雪村), 시호(諡號) 는 문숙(文肅), 진사(進士) 유성(惟誠)의 아들. 영의정(領議政) 이산보(李山甫)의 사위, 이 이(李 珥)․성 혼(成 渾)․송익필(宋翼弼)의 문인. 1583년(선조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1587년에 감찰(監察)․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내고, 1593년 황주 판관(黃州判官)으로 왜군(倭軍)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 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수찬(修撰)․장령(掌令)․서천 군수(舒川郡守)를 역임, 1597년 정유재란 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급고사(急告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사성(司成)이 되고,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거쳐 이듬해 응교(應敎)로 필선(弼善)을 겸임, 이어 승지(承旨)․형조 참의(刑曹參議)․나주 목사(羅州牧使)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1602년(선조 35) 성 혼(成 渾)의 문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되었다.

1606년 성주(星州)․홍주(洪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광해군(光海君) 즉위 초 예조 참의(禮曹參議)․대사성(大司成)․승지(承旨)․판결사(判決事)․대사간(大司諫)․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1612년(광해군 4) 도승지(都承旨)로 왕을 경연(經筵)에 자주 나가도록 했고1614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다가 1년만에 사퇴,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대사성(大司成) 겸 동지경연(同知經筵)․원자 사부(元子師傅)가 되어 학제(學制)를 상정(詳定)했고, 여러 번 타직에 전임되었으나 언제나 대사성(大司成)을 겸함으로써 이 때부터 대사성을 겸직하게 하는 선례(先例)를 만들었다. 그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좌부빈객(左部賓客) 등을 지냈다.

* 정문익(鄭文翼) 1571(선조 4)~1639(인조 17) 자(字)는 위도(衛道), 호(號)는 송죽당(松竹堂), 첨정(僉正) 응탁(應 鐸)의 아들. 1606년(선조 29) 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 과(別試文科)에 장원, 여러 벼슬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이조 참의 (吏曹參議)가 되었다.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의 심복이라 하여 이이첨(李爾瞻)의 미움을 받던 중, 1616년(광해군 8) 한찬남(韓纘男)의 상변사건(上變事件 : 해주옥사)에 그 이름이 들어있어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 나와 1631년(인조 9) 사신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 정윤겸(鄭允謙) 1463(세조 9)~1536(중종 31) 자(字)는 익부(益夫), 시호(諡號)는 장양(莊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온(溫)의 아들. 1492년(성종 23)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訓鍊院)에 보직되고,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특진되었다.

1519년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되어 청계군(淸溪君)에 봉해지고, 1522년 전라도 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로 부임, 병선(兵船)을 수리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왕으로부터 은(銀)을 하사받았다.

1526년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상호군(上護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역임했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그의 서녀가 명종 대의 비선실세 정난정이다.

* 정준(鄭 浚)- 자(字)는 대원(大源), 첨중추(僉中樞) 초계군(草溪君) 온(溫)의 손자, 병사(兵使) 윤성(允誠)의 아들, 윤원형(尹元衡)의 첩 난정(蘭貞)의 사촌오빠. 1533년(중종 28) 음보(陰補)로 검열(檢閱)이 되고, 154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44년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46년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중종실록(中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지평(持平)․정언(正言)․검상(檢詳)․장령(掌令) 등을 역임, 1552년(명종 7)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부제학(副題學)을 지내고 1554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듬해 호조 참의(戶曹參議), 1556년 병조 참지(兵曹參知)를 거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부임했다. 1559년 충무위 상호군(忠武衛上護軍)이 되었다.

* 정종영(鄭宗榮) 1513(중종8)~1589(선조22) 자(字)는 인길(仁吉), 호(號)는 항재(恒齋), 시호(諡號)는 정헌(鄭憲), 부총관(副摠管) 윤겸(允謙)의 손자, 현감(縣監) 숙(淑)의 아들. 감안국(金安國)의 문인. 1530년(중종 2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고 1547년(명종 2) 호조 정랑(戶曹正郞)․헌납(獻納) 등을 거쳐 뒤에 부수찬(副修撰)․지평(持平)․교리(校理) 등을 역임했다.

1552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공조 참판(工曹參判)․강원도(江原道)와 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팔계군(八溪君)을 습봉(襲封)했다. 1562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윤원형(尹元衡)에 아부하여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수령(守令)을 응징하고 요승(沃僧)을 제거했으며,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전임, 평양(平壤)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학문발전에 공을 세웠다.

1567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6조(曹)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러 사직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원주(原州)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

* 정온(鄭 蘊) 1569(선조2)~1641(인조19) 자(字)는 휘원(輝遠), 호(號)는 동계(棟溪)․고고자(鼓鼓子),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진사(進士) 유명(惟明)의 아들, 정인홍(鄭仁弘)․정구(鄭 逑)의 문인.

1610년(광해군 2) 진사(進士)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설서(說書)․사서(司書)․정언(正言) 등을 역임, 1614년(광해군 6) 부사직(副司直)으로 영창대군의 처형이 인륜(人倫)에 어긋났음을 상소하고 그 가해자인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 항(鄭 沆)을 참수하라고 주장, 이로 인해 10년간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귀양살이 했다.

유배생활 중에 「덕변록(德辨錄)」「망북두시(望北斗詩)」「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지어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석방되어 헌납(獻納)으로 등용, 뒤에 사간(司諫)․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간(大司諫)․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 이듬해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숭명주의자(崇明主義者)로서 벼슬을 단념하고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가 5년 만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 광주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 정기광(鄭基廣) 자(字)는 자거(子居), 호(號)는 추재(追齋). 찬성(贊成) 종영(宗榮)의 손자, 목사(牧使) 약(爚)의 아들. 1608년(선조 4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예조․병조 정랑(禮曺․兵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집권하여 정치가 어수선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1623(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군기시정(軍器寺正)을 거쳐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해서(海西)에 나가 민정(民情)을 살폈다.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功)을 세웠고, 1630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형조 참의(刑曹參議) 등을 지내고 양전어사(量田御史)로 호남지방(湖南地方)에 나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팔천군(八川君)에 봉해졌다.

그 후 한성좌윤(漢城左尹)으로 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였고 1642년(인조 20) 철원 부사(鐵原府使)에 이르렀다.

[1] 내급사공파의 중파 오효파의 소파 감곡파의 34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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