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6 15:29:31

명성황후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 대한 내용은 명성황후(드라마) 문서를, 뮤지컬에 대한 내용은 명성황후(뮤지컬)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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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6대 왕비
明成太皇后
명성태황후
파일:명성황후.jpg
호칭 왕후 민씨(王后 閔氏) → 명성황후(明成皇后)[1]
시호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
(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
출생 1851년 11월 17일
조선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2]
사망 1895년 10월 8일(43세 / 16,031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능묘 홍릉(洪陵)
재위 1866년 ~ 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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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여흥(驪興)
아명 아영[3]혹은 자영(玆暎)
부모 여성부원군 민치록, 한산부부인 이씨
부군 조선 고종
자녀 4남 2녀
차남 순종효황제 이외 조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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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왕비가 되기까지3.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관계4. 민씨 일파
4.1. 명성황후와 수구당4.2.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의 수구당
5. 을미사변에 대해
5.1. 조선인 협력자들5.2. 무시당한 을미사변?5.3. 2009년 TV 아사히의 보도5.4. 명성황후는 죽지 않았다?
6. 평가
6.1. 사치6.2. 질투6.3. 미화6.4. 다른 시각
6.4.1. 옹호론6.4.2. 비판론
7. 민씨 척족의 친일과 독립 운동
7.1. 친일7.2. 독립 운동
8. 호칭 문제
8.1.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다8.2.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 아니다8.3. 고종과의 형평성?
9. 사진과 초상화 논란
9.1. 사진
9.1.1. 떠구지 머리쌍비녀의 사진9.1.2. 이승만의 책 "독립정신"에 실려있던 사진9.1.3. 흥선대원군과 함께 찍은 사진 9.1.4. 기타
9.2. 초상화
9.2.1. 명성황후 영정9.2.2. 민씨부인(閔氏夫人) 초상화9.2.3. Le petit Parisien의 삽화9.2.4. Novoe Vremy의 삽화
10. 창작물에서 나오는 묘사11. 명성황후를 연기한 배우12. 기타

1. 개요

조선, 대한제국 고종의 정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모친. 숙종의 모친인 '명성후' 김씨와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하자.[4] 사실 을미사변으로 사망한 후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추존황후가 되어 명성황후라 불리게 되었고, 그 전까지는 중전 민씨, 왕후 민씨로 불렸다. 흔히, 민비라고도 알려져있다.

1895년, 일본인들에게 살해[5]된 사실로 유명하며, 현대 한국 대중에게 인지도가 가장 높은 왕비다. 여흥 민씨들의 부정부패를 뒷받침했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를, 갑오개혁의 실시로 인해 자신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하자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등, 조선의 개혁을 좌초시켰다. 각종 국가적 이권을 명성황후 개인의 재산인양 열강들에게 헐값에 팔아넘기고 그 수익을 편취했다. 이처럼 명성황후는 나라가 일본에게 먹히는 참상이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치 항일 운동을 하다가 살해된 듯 미화되어, 생전에 저질렀던 엄청난 잘못들이 덮이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일부 여론과 미디어에 의해 일제에 맞선 철의 여인으로 미화되기도 했다.[6] 흥선 대원군마냥 긍정적인 면모와 부정적인 면모를 모두 극명히 드러낸 왕비로도 잘못 알려지기도 했었다.

반일 감정 때문인지 해당 인물을 옹호하려는 경향은 꽤 대중적인 것으로, 특히 많은 여흥 민씨들은 21세기인 현재에도 민비를 위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명성황후를 옹호하는 이들은 민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일제의 식민사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명성황후를 옹호하는 주장에 따르면, 을미사변을 주도한 미우라 고로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후 일본의 20년 화근을 제거했다고 기뻐한 것을 들며, 명성황후가 조선이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다 의로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평하고 있다(...). 또 프랑스 르땅지의 극동 특파원 빌따르 드 라게리는 오직 명성황후만이 조선을 이끌 수 있었던 정치가였다고 기술하면서 명성황후가 죽음을 당하자 조선은 맥없이 무너졌다는 평가를 한 것, 미국 외교관 출신인 윌리엄 플랭클린 샌즈가 명성황후를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조선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라고 평가한 것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는 당대에도 민중들에게 엄청난 욕을 들어 먹었고 당시 각종 기록에도 이러한 내용들이 서술되어 있다. 또한 오늘날 수많은 한국사 학자, 강사, 교사들이 명성황후를 가열차게 비판하고 있다. 당장 공무원 한국사나 수능 한국사 인강을 봐도 상당수의 강사들이 명성황후를 비판하고 있다.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들은 매관매직을 비롯한 온갖 부정부패와 부정축재, 국고유용 등을 조장하거나 일삼았으며, 백성을 가혹한 징세로 착취했다. 임오군란에 군인들뿐만 아니라 민중들도 대거 참여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외국군대가 조선땅으로 들어오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 여흥민씨 일족의 부패와 본인 때문이고[7] 당시 결국 이후로도 정신을 못차리고 일본군이 파병하도록 만들어 결국 자기 목숨까지 잃게 만든 것을 생각해보면 호평하는 부분도 높게 평가할 이유가 부족하다. 여러모로 비난받을 요소가 다분했는데 고작 일본과 대립한 것 하나 때문에 위인으로 오해받은 악녀요녀다.

2. 왕비가 되기까지

훗날 왕비가 되는 민자영은 1851년 음력 9월 25일[8] 자시[9]에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조선시대 주소)[10]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민치록, 어머니는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이다. 원래 민자영을 포함 남매가 1남 3녀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죽고 외동딸로 컸다. 이름은 아영이라고도 하고 자영이라고도 한다.[11]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세상을 뜨기 전까진 유복한 생활을 했다. 왕비 간택 당시 고아였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모친 감고당 이씨는 생전에 딸이 간택되는 걸 봤다.[12]

민자영의 가계는 인현왕후의 큰오빠 민진후의 직계로 할아버지 민기현은 예조참판을, 아버지 민치록은 음보로 군수를 지냈고 사도시 종 4품 첨정까지 올랐다. 대과를 안본 사람으로서는 꽤 높은 관직이다.

파일:external/t1.daumcdn.net/zq1rTCJU1Ag4KX6odMuternHRf0.jpg

1866년 민자영이 14세이던 해에 고종의 양어머니[13] 대비 조씨는 고종의 왕비를 정할 간택령을 내린다. 조 대비는 간택령에 따라 금혼령을 내리고 처녀 단자[14] 음력 2월 25일 창덕궁 중희당에서 초간택을 하는데, 민자영이 5명의 후보에 든다. 재간택을 거쳐 음력 3월 8일 삼간택 때 마침내 고종의 왕비로 최종선정된다. 그리고 음력 3월 21일 13세의 고종과 혼례를 올린다.

당시 풍양 조씨 세력을 대표하는 조대비와 실세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깊은 뿌리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민자영의 여흥 민씨는 남연군 - 흥선대원군 2대에 걸친 혼맥으로서 충분히 강력한 아군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아내 부대부부인 민씨의 먼 친척이기도 했고, 집안 격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부친은 물론 친형제가 없어 외척 걱정도 덜었다. 나중에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는 민승호도 대원군의 처남이었다.[15]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어머니, 부인, 며느리, 손자며느리가 모두 일가 친척이었다. 민씨 시어머니 민씨, 민씨 며느리 민씨

3.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관계

파일:external/www.daily-liberty.com/139_407_3546.jpg

앞서 말했지만 고종의 법적 아버지는 죽은 효명세자이지 흥선대원군이 아니다. 따라서 중전 민씨의 시아버지가 법적으로 흥선대원군인 것은 아니다. 그럼 무시를 하면 될텐데 문제는 흥선대원군이 정권의 실세였다는 점이었다.

중전 민씨와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성인이 된 시점부터 사이가 점점 틀어졌다. 그 원인을 두고 여러 설이 있지만, 첫아이와 관련된 설이 유명하다. 1871년 11월 4일 중전 민씨가 출산했지만 아기가 항문 없이 태어나 4일 뒤 죽는다.[16] 곧바로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궁인 이씨(영보당 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완화군(완친왕)을 원자로 책봉하려 했고 이때부터 사이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야사에는 흥선대원군이 아기에게 산삼을 달여 먹였는데 죽고, 중전 민씨는 이를 완화군을 책봉하기 위한 고의라고 의심해 흥선대원군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게 됐다고도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근거가 부족하다.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입장에선 고종의 첫 아이인 완화군을 유난히 귀여워한 건 사실인데, 이는 당시 조선 왕실은 수십년간 서자 출신 왕자조차 태어나지 않을 정도로 자손이 귀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왕권 강화를 하려던 대원군의 입장에서 후대 왕의 권위에 문제를 줄 수 있는 서자를 성급하게 왕세자로 만들어야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당시 고종이 아직 20도 안된 나이인 것을 생각해보면, 장차 왕세자가 될 고종의 첫 적자가 태어났는데 이 적자를 제치고 서자를 급히 원자로 만든다는 것은 명분은 물론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다.

실제로는 남편이 친정에 나서자, 남편을 돕기 위해 민씨는 여흥 민씨 친척들을 모아 정치 세력화했다. 믿는 구석이 생긴 두 부부는 흥선대원군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일리가 있었다. 원래 왕실에서 왕이 될 아이를 입양할 때는 아버지가 없는 먼 친척 아이를 데려오지만 고종은 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에겐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사에는 흔히 베갯송사, 즉 중전 민씨의 배후 조종설을 주장한다. 반대로 일본인들의 인식으로는 사사건건 개입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해 부담을 느낀 고종이 스스로 민씨 파벌을 키웠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1873년 대원군 실각 이후의 대립은 부자 갈등의 양상이 커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1882년 임오군란 때 궁으로 컴백한 흥선대원군은 중전부터 죽이려 했고, 탈출 사실을 알고도 죽었다고 거짓 반포할 정도로 구부갈등(舅婦)은 골이 깊었다.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끌려갔을 때(1882년) 명성황후에게 보낸 한글편지가 2012년 6월 공개되었다. #. 편지의 어투가 매우 정중하고도 은근해서 둘 사이 갈등이 거짓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흥선군은 '을'이고 청나라를 등에 업은 왕비는 '갑'이다. 왕실의 안녕과 본인의 귀국에 대해 대원군이 패배자로서 보낸 메시지일 뿐이다. 남편의 친아버지이니 명성황후에게 먼저 반말을 할 리는 없겠지만, 대원군은 왕비보다 격이 낮기 때문에 당연히 며느리가 아니라 국모로서 대해야 한다.

4. 민씨 일파

원래 19세기 중반까지 조선은 장동 김씨[17]가 세도 정치를 하면서 중앙 요직은 물론 지방직도 싹쓸이를 하는 시점이었다. 몇 대에 걸쳐 왕가와 혼맥을 맺고 왕권을 약화시키고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흥 민씨는 경주 이씨, 반남 박씨나 양주 조씨, 풍양 조씨, 안동 권씨, 달성 서씨 등과 함께 조정 내에 일정한 세력을 이루었다.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의 풍양 조씨, 그리고 근본주의적 유학자들인 척화파들을 데리고 안동 김씨를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딱 10년 동안 화폐도 주조하고 경복궁을 중건하고, 두 차례 양요를 막아내는 동시에 서원을 철폐하는 개혁을 이뤘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을 일으키려는 노력일 뿐으로, 근대화의 문제를 계속 외면했다.

중전 민씨는 남편 고종을 뒷받침할 세력으로 여흥 민씨들을 요직에 추천했다. 고종은 이들을 중용해 흥선대원군의 개혁을 지속시키는 한편, 근대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계속 엿봤다. 여흥 민씨들은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온 혈연 학연을 동원해 각 요직과 지방직을 휩쓴다. 안동 김씨의 세도를 그대로 가져가려 했다. 매관매직을 통해 파벌의 덩치를 순식간에 불렸다.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기화로 흥선대원군을 축출한 이후 여흥 민씨의 세도 정치는 움직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그러다 1876년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의 국서 문제로 개항을 하느냐 마느냐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박규수 등 개화파들이 개항을 주장한 데 반해 여흥 민씨들은 아직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축출된 대원군이 '척화'라는 기치를 들고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고종 부부는 개화파의 손을 들었다. 곧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개항된다.

삼정의 문란은 민씨들이 집권해도 변한 것이 없었는데 외국 문물까지 밀려들면서 글읽는 선비나 백성들의 불만은 고조되기 시작했다. 고종은 왕권의 강화와 국방을 위해 서구식 군대를 창설할 필요를 느꼈다. 원래 있던 오군영에서 80명을 차출해 별기군을 새로 창설하고 기관포를 수입해 배치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국방비를 증액한 게 아니기 때문에 오군영 운영비를 충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1882년 견디다 못한 오군영이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역적이 되지 않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추대했고, 그는 장남 이재면과 부인을 대동해 입궁했다. 이들은 제일 먼저 별기군을 창설한 민겸호와 김보현을 주살하고 왕비를 죽이려 했다. 왕비는 궁녀로 변장해 무예별감 홍재희의 등에 업혀 충주(장호원)까지 도망간다.

중전이 충주로 피난을 간 당시, 임오군란을 일으킨 병사들은 중전과 책임자들을 도륙하기 전엔 해산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흥선대원군은 빨리 국정을 안정시키려면 일단 이들을 해산시켜야 했다. 중전이 난리 중에 죽었다고 선언하고 국모로서 국장을 선포하고 병사들을 해산시킨다.[18]

한편 구사일생으로 살은 중전과 측근들은 밀사 윤태준을 고종에게 보내 자신들의 생존을 알린다.[19] 이들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당장에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 군대는 왕십리 근처에 모여있던 오군영 병사들을 순식간에 도륙하고 서울을 장악했다. 민씨들은 조정으로 바로 복귀하고 대원군은 만주로 끌려간다. 위기는 곧 기회. 민씨들은 완전히 조정을 장악하고 개화파들에게도 약간 자리를 허락한다. 이들은 청나라 식의 근대화인 양무운동 모델을 따라 국정을 개조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근대화를 책임지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된 것이다.

4.1. 명성황후와 수구당

이 시점부터 여흥 민씨가 중심이 되어 구성된 수구당과 중전 민씨는 똑같이 봐야 한다. 중전 민씨는 이들의 철저한 뒷배가 돼주었다. 이제 조정에는 민씨들을 위시한 구 신하들과 아주 약간의 개화당들이 있을 뿐으로, 둘 다 근대화를 해야한다고는 봤다. 그러나 청나라 모델이냐 일본 모델이냐를 두고 길이 갈렸다. 일본 모델을 주장한 개화당에 대해 청나라 모델을 주장한 민씨들은 수구당이라고 이름이 붙었다. 수구당을 흥선대원군의 척화파와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수구당 역시 개항과 동도서기라는 패러다임으로써 서구화를 주장했다. 물론 박정양 등 온건개화파라고 따로 이름하는 부류도 있긴 하다. 민영익박규수의 제자이자 김옥균의 동문으로 개화당이었으나, 결국 수구당으로 전향해 친척들 틈에 끼었다.

민씨들의 매관매직과 부정부패는 날이 갈수록 심화됐다. 근대화를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이들은 양반 과세나 국가 전매 제도 등에 대해 반대하고 마음대로 했다. 서구 각국에 귀족이 없어서 신분제를 없앤 게 아니라, 국가 총력전의 양상으로 가는 산업 혁명 이후의 전쟁 때문에 신분제를 없앤건데 수구당은 신분제를 철폐할 의지도 견식도 없었다.

청나라도 가만있지 않았다. 한반도의 이권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조선 조정에 대해 영향력을 높이려는 방안으로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파견했다. 이 때 내한한 묄렌도르프가 새로운 화폐 주조 안건을 고종에게 올렸다. 일본에서 공부한 개화당은 반대를 하고 길길이 뛰었다. 이미 흥선대원군 때 당백전으로 물가가 급등하는 등 부작용을 이미 경험했음은 물론, 안그래도 외채가 많은데 돈 가치가 떨어지면 큰일난다는 거였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지만 세금을 더 걷지 못하는 조정으로서는 새 화폐 주조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수구당은 저질렀다. 그리고 결과는 망(亡).

개화파는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청나라 식이 아니라 아예 일본식으로 한 번에 서구화를 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일본의 근대화는 30년이 지나고 있었다. 서재필 등을 일본 군사학교에 보내 군제 개혁의 밑그림을 그렸다. 개화당이자 고종의 매형인 박영효는 사비를 탈탈 털어 군자금을 댈 정도였다.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의 제도를 연구하고 조선에 도입하기 위해 고종을 닥달했다. 그 때마다 여흥 민씨 정권은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개화파가 고종을 설득해 뭔가 해볼려고 하면 어디서 듣고 와서 반대만 했다. 심지어 화폐 개혁이 실패하고 난리가 난 것을 개화당 탓으로 돌렸다. 한 번은 일본에서 무상 차관을 준다고 그래서 김옥균이 일본에 갔는데 수구당은 뒤에서 고종을 협박하고, 일본 영사관에 사람을 보내 '차관 줘봤자 김옥균이 비자금을 만들 뿐이다'라면서 재를 뿌렸다. 결국 김옥균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개화당은 안되겠다 싶었다. 김옥균은 관직을 모두 사퇴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칼을 갈았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김옥균과 급진개화파들은 고종과 중전을 납치하고 수구당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주살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청나라 군이었다. 이들을 막기 위해 이미 일본군의 힘을 빌리기로 일본 영사관과 얘기가 끝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은 종특인 뒷통수를 쳤다. 청나라 군이 압록강을 건넜는데 일본군은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개화당은 대부분 인천에 정박했던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 호에 올라 도망가고 조선에 남은 잔당과 가족들은 몰살됐다. 이제 일본식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그래도 수구당 세상이었는데 이제 조정은 수구당 일색이 됐다. 청나라와 일본은 양국 군대의 한반도로부터 철수에 합의하고 한반도에는 힘의 균형이 불안하게나마 이뤄지고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수구당 치하의 조선은 기존 체제를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서구 문물을 본격적으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재외 공사관도 설치했다. 주미 공사관, 주일 공사관을 시작으로 주요 10개 국에 외교 사절을 보냈다. 민씨 등을 비롯한 수구당은 전신 설치, 발전기 도입, 경인선 부설 및 지하 자원 조사 등에 나섰고 나름 성과도 있었다. 교육도 개혁했다. 성균관 개설 과목에 초보적인 경제학, 영어, 과학 등의 과목을 개설하고 젊은 관료들을 서구식으로 재교육하는 육영공원도 만들어 가르쳤다. 남녀 가리지 않고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중전에겐 여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20], 고종 부부에게 커피를 처음 소개한 마리 손탁[21] 등 외국인 친구들까지 생겼다.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 사바틴 등은 덕수궁인천 제물포 등에 서구식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서울 정동에 손탁 호텔이 문을 연 것도 이 때다.

그러나 신분제, 양반 면세 제도 등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조선의 서구 근대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고, 아울러 갑신정변 껀도 있어, 과감한 정책 제안이나 시도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수구당은 한반도에 돈 될만한 건 죄다 외국에 헐값으로 넘기면서 중간에서 착복했다. 근대화에 써야될 돈을 수구당이 사유화함으로써 분의 분배도 악화되고 자원이 마구 반출돼 나라 경제는 휘청이고 있었다. 그동안 '영약삼단' 등 청나라의 간섭은 날로 심해졌고, 일본도 앞에서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었지만 뒤에서는 딴 짓을 했다. 일본이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숨겨주고 있는 것도 끊임없이 외교 마찰을 일으켰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중전 민씨와 수구당은 조선의 내부 모순을 하나도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진압하든지 달래든지 책임져야 할 수구당들은 청나라 군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 이에 응한 청나라 군은 아산만으로 상륙하고 텐진 조약에따라 일본도 인천으로 상륙한다. 일본군까지 상륙하는걸 보고 놀란 정부는 급히 동학군과 화약을 맺어서 해산을 유도해 주둔 명분을 없애고 양군에게 철수하라 권고하지만 일본군은 오히려 경복궁을 장악하고는 청군을 공격해 청일 전쟁이 발발한다. 단 며칠사이 청나라 군은 일본군에 쫓겨 한반도에서 축출되고, 심지어 일본보다 더 큰 배와 함대를 갖고도 황해 재해권을 뺏겼다.(황해 해전) 한반도가 전화에 휩싸이는 데도 중전과 민씨 정권은 아무 대응도 못하고 납작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1895년 일본이 이겼다.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타이완 섬을 일본에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중국 북양함대의 제독 정원은 음독자살했다. 일본은 보호 중이던 개화파들을 조선에 복귀시킨다. 중전과 수구당은 말한마디 못하고 '역적'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미국에 있다가 귀국한 서재필은 아예 고종 앞에 뻣뻣하게 서서 자기를 미국 시민 제이손이라 소개하곤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고. 이들은 일본을 등에 업고 개혁 조항등을 준비해 돌아왔다. 그리고 조선의 복식과 문화를 서구식으로 변모시키기 위한 개혁, 갑오개혁을 시작한다. 고려 시대부터 존속돼 온 과거제도도 이 때 사라진다. 중전과 수구당이 축출된 것은 아니었다. 주요 요직에도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삼국간섭이 일어난다. 러시아프랑스, 독일과 합세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도로 토해내도록 압력을 넣었고 통했다. 고종 부부는 러시아를 매우 주목하게 됐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수시로 접촉을 가졌다. 수구당 주요 인사들을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서울 정동으로 하도 보내다 보니 아예 정동파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였다. 러시아 역시 수구당 인물들은 물론 중전에게도 갖가지 선물을 보내며 환심을 샀다. 명성황후의 사치에 대해 말이 많은데, 이때 받은 선물들도 상당히 있어 사치벽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4.2.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의 수구당

중전 민씨가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하자 일본은 큰 위기를 느꼈다. 안그래도 러시아를 두고 엄청난 적개심과 공포감을 가고 있었는데 일례로 청일전쟁 몇 년 전인 1891년에는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황태자[22]일본을 방문했을 때 교토에서 일본 순사인 츠다 산조(津田三蔵,1855~1891)의 암살 시도로 중상을 입는 일이 있었고[23][24] 이것을 사과하기 위해 전국 휴교와 할복쇼을 벌일 정도로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에 적개심과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이에 당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고종과 중전 민씨가 일본과 거리를 두려하자, 자신의 후임 공사로 온 전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하면서 음모를 꾸민다.

그 해 음력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 조선의 국모 민씨는 사망했다. 이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갑오개혁에 실패하고 밀려나있던 개화파들을 앞세워 다시금 정국을 장악하려 한다. 이에 고종과 수구당은 춘생문 사건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제국에 몸을 의탁한다. 러시아는 즉각적이고 매우 강경하게 일본을 겁박했다. 위세에 눌린 일본은 물러서고 결국 잠깐 들어섰던 친일 내각은 일소된다. 고종의 매제인 박영효 역시 다시 역적 처지로 일본으로 간다.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직전까지 한반도는 힘의 진공 상태가 된다. 수구당은 긴급히 프랑스 공사관, 러시아 제국 공사관의 협조를 구해 독립을 선포하고 대한제국을 만든다. 수구당은 명성황후를 잃었지만 어떻게든 황실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독립협회를 창건해 백성들에게 독립의 당위성과 황제가 된 고종에게 충성하라고 계몽했다. 조선의 계몽 군주를 꿈꾸던 고종은 중추원을 설치해 서구의 귀족원 내지 상원 의회를 만들 준비를 한다. 그리고 수구당은 대한국 국제라고 해서 헌법을 만든다. 서구 헌법을 만든다는 것은 독립을 선언하고 해외 열강들에게 독립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일본조차 메이지 유신 이후 40년이 다 돼가는 1890년에야 제국 헌법을 반포하고 다른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등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한국 국제는 황제에 대한 절대성과 전통적 충성만을 강조한 내용으로 서구의 인권 사상이나 나라의 조직 내지 국민의 의무, 기본권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곧 그나마도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한반도 이권을 싹쓸이하고 내정 간섭을 시작하자 대한제국의 앞날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외채는 갚을 수 없는 수준으로 늘어만 갔다.

1905년 러일전쟁으로 승전국 일본이 대한제국을 완전히 장악한다. 영국미국은 오히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한다.[25] 재밌는 게 그 전까지만 해도 반일이던 수구당이 친일로 돌아선다. 벼슬을 버린 양심 인사들을 제외하고, 벼슬길에 남아있던 모든 인간들과 그 후손들은 이제 친일파가 된다. 원래 친일이었던 개화파들보다 더 심한 추태와 아부를 보인다. 헤이그 밀사를 보낸 고종에게 양위하라며 윽박을 지르고, 을사조약, 정미조약 등등 차례차례 국권을 일본에 넘기는 데 앞다퉈 충성을 바친다. 단, 민씨 전부가 친일파가 된 건 아니다. 대한제국 육군 부장(중장)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13촌 조카뻘로 을사조약과 동시에 목을 찔러 자결했다.

5. 을미사변에 대해

고종과 명성황후가 노골적으로 러시아의 개입을 허락하고 고종이 일본 교관들이 양성한 훈련대의 해산방침[26]을 통보하자 일본은 그 결정의 배후로 지목된 명성황후를 암살하기 위해 1895년 10월 8일, 일본 군대와 경찰 및 조선군 훈련대 등을 동원해 경복궁을 공격한다. 일본군과 경찰이 시위대를 몰아내고[27] 같이 온 일본 낭인들이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시체를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을미사변', '을미의 변'이란 이름으로 기록된다.

이틀 뒤인 1895년 음력 8월 22일,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민씨를 폐서인했다. 이 시기의 고종은 김홍집 내각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로, 이 당시 고종이 한 일은 사실 김홍집 내각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8월 23일 왕태자(순종)가 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상소를 올리자, 그날 고종은 민씨에게 당시 조선의 후궁의 직첩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빈(嬪)의 칭호를 주었다. 10월 10일엔 왕후로 복위시켰다.[28]

원래 시호는 금방 결정되는 게 아니긴 하지만, 녀는 현 조선의 군주의 아내였음에도 장례 일정이 2번이나 중단되는 바람에 죽은지 2년 뒤에야 시호를 . 1895년 10월 22일 김홍집 내각은 민씨의 시호 후보로 순경(純敬)을 올렸는데, 이후 아관파천이 발생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고종은 장례 일정을 중단했다. 1897년 1월, 조정에서 김홍집 내각이 올린 칭호는 시호로 쓸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자 고종은 시호 후보를 새로 올리라고 했고, 시호 후보 3개 중 문성(文成)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3월 2일에 문성이 정조의 정식 시호에 쓰였다는 이유로 취소하고, 또다른 후보였던 명성(明成)을 쓰기로 결정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명성왕후'로 시호가 정해졌을 것이나, 문제는 민씨의 장례를 준비하는 도중에 장지(葬地) 근처에서 유해가 발견되는 등의 일 때문에 장례 일정이 또 중단되었다는 것이다.[29] 그 해 10월 12일,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면서 민씨를 황후로 추숭했고 며칠 뒤에 장례 일정이 재개된다. 그리고 11월 6일에 시호로 '명성황후'를 쓰겠다고 했고 22일에 공표했다. 그래서 이후로는 '명성황후 민씨'라고 불린다. 이후 존호 등이 추가되어 정식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가 되었다.

12년 전 임오군란 때 민비를 업고 서울 탈출을 도왔던 홍계훈은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장(연대장급)이었는데 이 때 광화문에서 전사했고[30], 시위대는 연대장 현흥택과 미국인 군사 고문 다이의 지휘 하에 일본측과 맞서 싸웠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일본을 비난하는 국제 여론이 비등하자 일본은 처음엔 조선인들의 내부 소행이라 개소리를 시전했지만, 러시아 기술자 사바틴, 미국 교관 다이를 비롯해 외국인 목격자도 많았다. 그들은 곧 미우라 공사와 낭인들을 체포해서 법정에 세웠다가 증거불충분+춘생문 사건을 빌미로 방면했다.[31] 물론 일본은 이 사건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발생 당시 세간의 관심도 그리 받지 못했다. 또한 2009년 전까진 일본의 모든 언론기관이 을미사변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았다.

2011년 유인촌 당시 청와대 문화특보는 경복궁의 담이 낮아 민비가 살해되었다는 독특한(…)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간의 병크 언동으로 시선이 곱지 않던 안티들은 역사 스페셜 진행하던 인간이 저딴 소릴 한다면서 엄청나게 깠다.

사족으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중에 김진명의 '황태자비 납치사건'이 있는데 작가의 주장에 의하면 명성황후 민씨의 죽음은 (시간을 포함한) 매우 치욕적인 죽음이었다고 하며 이를 증명하는 문서는 소설 속에서는 이시즈카 에조가 작성한 '한성공사관발 제 435호 전문'으로 묘사된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 있다. 고영근 문서 참조.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는 청량리 밖 홍릉에 매장되었는데, 미국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가 방한했을 때 수행원들과 함께 이 능을 방문했었다. 그런데 앨리스와 그 수행원들이 이 능의 석물에 올라타서 인증샷을 찍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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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뒷날 1919년에 남편 고종이 사망하자 천장하여 남편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의 홍릉에 합장되었다. 그리고 청량리 홍릉 자리에 들어선 것이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묘로 이를 '영휘원'이라고 부르는데 '구 홍릉'이라는 지명 역시 있으며, 이 주변에는 수목원이 있고 근처에 세종대왕기념관도 있다.

5.1. 조선인 협력자들

명성황후 살해 사건 당시 조선인 고위직 협력자는 흥선대원군[32], 유길준[33], 영선군, 이두황, 이진호, 이주회, 우범선, 구연수 등과 도성수비대 3개 대대의 병사들.

이중 우범선은 우장춘의 아버지이고, 구연수는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하다.

한국 땅을 처음 밟는 일본 낭인들이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자마자, 이주회, 우범선, 이두황 등 3대대장과 전 군부차관 이진호 등이 협력하고 개화파 거물 유길준까지 가세하면서 일본낭인들은 반나절도 안 돼 한성에 들어왔다.

민족문제 연구소의 윤덕한이 쓴 《이완용 평전》에 의하면, 사실 대원군이 여기에 많이 개입되어 있다. 그는 출발 전에 고유문을 붙였는데, 간단하게 쓰자면 다음과 같다.

"왕비와 그 무리들이 (원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민씨일족을 가리키는 것이 많음) 나라를 망치니 두고 볼 수 없구나. 피를 봐서라도 나라를 지킬테니, 너희들은 나서지 말고 할일이나 계속 하라. 방해하면 보복하겠다." 대충 이런 뜻이었다. 그 날 대원군은 실패에 대비해, 손자인 이준용에게 일본으로 도망가라고 했다.[34]

5.2. 무시당한 을미사변?

명성황후의 살해소식에 유생들이 을미의병을 일으켰으며 이것이 전국적인 의병봉기로 이어졌다는 설이 가장 잘 알려진 시각이지만,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비판하는 측에서는 이는 KBS 사극 <찬란한 여명>에서 방영한 내용을 맹신하는 것으로, 을미사변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의 주요 구성원은 유생들이었으며, 직접적인 실력행사보단 일본세력의 국외 추방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주를 이루었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의병은 단발령 시행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으로 번진 것이다. 즉, 명성황후는 당시로선 효를 상징하는 머리카락보다 중요도가 떨어졌다는 것.

그런데 이는 을미의병의 성격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는 반박도 있다. 을미의병은 처음부터 근왕운동적 성격과 성리학적 질서 보호라는 명분이 작용했다. 즉,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을미사변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왕실은 물론 성리학적 세계관을 위협한다고 위정척사파 유생들이 생각했던 것이다. 이 경우, 당연히 을미사변은 을미의병의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를 폐위시키려 하자 유생들이 토역소를 올렸고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운운하며 각지에서 창의소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을미의병은 단발령뿐 아니라 을미사변에 대해서도 분노하며 일어난 운동이 맞다는 것이다.

5.3. 2009년 TV 아사히의 보도

2009년 TV 아사히에서 일본에서는 최초로 을미사변에 대한 보도를 했다. 이 보도에 자극을 받은 일본의 모든 혐한파들은 "모든 것은 조선인의 조작"이라든가 "모든 게 조선을 위해서였다."는 개드립을 인터넷상에서 뿌렸는데, 되려 혐한의 입지들을 축소시키는 일이 되고 말았다.

5.4. 명성황후는 죽지 않았다?

2013년 7월 1일,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명성황후가 을미사변 때 죽지 않고 탈출했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기사

정교수가 발견한 문서는 1896년 2월 6일, 러시아주재 독일공사 후고 라돌린이 총리 앞으로 보낸 암호문서 해독문인데 이 문서에 의하면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의 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매우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보낸 문서도 발견했는데 이 문서에는 "왕과 왕세자(순종)은 피살을 모면한 것 같다. 그리고 왕은 왕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라고 했다는 것. 힐리어는 을미사변 직후 작성한 문서에서도 "일본인들이 궁녀 서너 명을 죽였으며 왕비는 사라졌는데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작성했으며 이후 힐리어는 베베르의 방문을 받았는데 베베르가 왕비의 생존 가능성이 있음을 말했다는 보고서도 작성했다고 한다.

과연 정교수가 발견한 문서가 실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는 의문이 생기긴 한다. 만약 명성황후가 탈출했다면 왜 이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쉽게 납득하기는 힘들다. 명성황후가 살아있었다면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이후에라도 드러내서 일본을 궁지로 몰 수도 있었는데 왜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그런 카드를 활용하지 않았을까? 명성황후는 이전 임오군란 때도 큰 난리통에 궁녀 옷으로 변장하고 궁을 탈출해 숨었고, 조정에서는 왕후 실종을 '사망'으로 공식 선포하여 왕후의 국상(國喪)을 선포한 적이 있다. 만일 왕후가 살았다면 임오군란의 해프닝이 그대로 재연된 셈인데, 그 때는 사태가 진정된 후 왕후가 직접 돌아왔지만 이 때는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일각에서는 일본이 외교가에 역선전을 살포한 걸 독일과 영국이 착각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정교수와 일부에서는 당대 최강대국인 독일과 영국이 일본의 역선전을 아무 확인도 않고 덜컥 믿고 본국에 보고했겠느냐, 명성황후는 일본의 재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숨어 살다가 곧 사망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결국 구체적인 사료가 더 발굴되지 않는 한은 쉽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듯하다.

6. 평가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인물로, 동시대 인물이었던 유길준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여인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다만 유길준의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유길준이 갑신정변 이후 조선정부에 의해 7년간 유폐된 적도 있었고, 일본을 적극적으로 의지해 친일 내각에 앞장서서 단발령까지 주장한 인물인 동시에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살해를 주도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즉 명성황후와 유길준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당시 친일과 반일의 정점 극과 극의 인물들이었다.

명성황후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명성황후 자신과 민씨 일가에게 이익이 되는 길이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을 뿐이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에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특히 개혁 세력들의 주장을 묵살하며 제국을 운운[35]하는 시대 착오적인 주장을 내세운 고종을 부추겼다.

명성황후의 추천으로 수 많은 인척이 등용되었다. 이들이 민씨 일파다. 명성황후의 파벌인 민씨 일파 역시, 명성황후의 이름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며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지만, 명성황후는 이를 만류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권장하고 장려하며, 이러한 전횡과 부정부패를 조장하며 민씨 일파의 세력을 급격하게 키워나갔다. 당시 민씨 일파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극심했고, 민영준은 백성들이 하도 씹어대는 통에 이름까지 민영휘로 바꿀 지경이었다. 그가 평안감사로 일하면서 평안도 백성들을 끔찍하게 뜯어 먹은 탓에 후일 그가 휘문의숙을 세웠을 때 이들의 주요 수탈 대상이었던 평안도 출신들은 발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민씨 일파의 패악질은 놀랍게도 일제강점기까지 계속되었는데, 가장 적극적인 친일파 중에 상당 지분을 민씨 일파가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자행한 친일 행위의 비중이나 악영향 역시 가늠할 수 없이 막대하였다.

명성황후가 나라에 끼친 가장 큰 패악 가운데 하나는, 나라의 각종 이권을 열강에 헐값으로 팔아 버린 것이었다. 일례로, 알렌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미국에 단돈 2,700원에 팔아넘긴 운산금광의 채산성이 4천만 원 정도였다. 국채보상운동이 갚고자 했던 국가의 빚이 1,300만 원 정도였으니, 저 금광만 잘 관리했다면 국채보상운동은 애초에 없어도 됐을 것이며, 미국인 호러스 뉴턴 알렌에게만 좋은 일 시킨 셈이 되었다.[36][37]

그러나 운산금광 채굴권을 넘겨준 사람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고종이다. 조선왕조실록 #과 알렌의 기록에 보면 운산 금광 채굴권은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기 석 달 전인 1895년 7월 15일에 허가를 했다가 바로 취소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명성황후는 운산금광 채굴권을 허락한 후 바로 취소를 하고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 당했으므로 명성황후는 결국 금광 채굴권을 넘겨 주진 않았다. 명성황후 사후 운산금광 채굴권은 조선이 가지고 있다가 명성황후 사후 다음해인 1896년 4월 17일에 미국인 모스에게 채굴권을 허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운산 금광 채굴권을 넘겨준 사람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고종인 것이다.

다만 운산 금광은 2700원에 팔린 것이 아니라 일시금 25만원에 년간 25,000원을 받는 조건으로 25년간 특허권을 준 것이 확인되었다.# 그래도 25년 총액 65만 원이다. 이득은 4000만원인것에 비하면...

역사학자들의 해석 중에는 명성황후의 역할은 고종의 대리역이라는 해석도 있다. 철저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아버지와 대립한다는 건 고종 입장에서 부담이 큰 일이다.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입장에서도 임금에게 직접 맞서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고종과 흥선 대원군은 직접 맞서는 대신 명성황후를 통해 싸우게 된다. 마치 강대국들이 직접 싸우기 부담스러우니까 대리전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최근에는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명성황후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는 일본의 금전 제공과 그에 따른 일본의 영향력 확대, 또 일본에 빚지는 것을 사전 차단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덧붙이자면 당시 일국의 왕비로서 일본의 차관을 받기로 하는 결정은 딱히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일이 아니므로, 아마도 명성황후 자신이 러시아 등 외세의 힘을 끌어들이는 와중에도 일본만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받지 않은 것으로 보거나, 혹은 대여금(차관)은 나중에 갚아야 할 돈이므로 굳이 받지 않은 것이라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6.1. 사치

굿판을 전국 명산마다 벌여서 전국을 무당판으로 만들었다.

사치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 접견실의 크고 아름다운 표범가죽 양탄자가 있다. 이것은 한국전쟁 때 미국으로 반출된 후 실종되어 그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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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니고 바로 요기잉네? 수장 유물 목록에서 누락된 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것이 발견되었다. 표범 가죽 107조각을 붙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확실히 웬만한 강대국의 군주들도 혀를 내두르고 급 버로우를 탈 것만 같은 표범가죽 양탄자의 위엄.

다만 국립박물관 측에서는 명성황후의 것이 아닌, 대한제국 시기의 물건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오얏꽃무늬가 나중에 추가 될 수 있는 점, 표피 일부분만 추출하여 검사한 점에서 비판이 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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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질투

남편인 고종과 초반에만 데면데면 했을 뿐 금슬이 좋았으나 정작 후손은 순종 말고 없었다. 실제로는 4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릴 때 죽고 순종만 살아남았다.[38] 이 때문인지 후궁들에 대한 질투가 심했다고 한다.

사실 어떤 왕비든 그럴 수 있기는 하나[39]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 조선시대의 왕실법도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고종보다 더 권력을 가진 여인으로서 고종의 다른 아들들인 완친왕, 의친왕의 생모들을 궁궐에서 내쫓았다.[40] 본래 왕이 죽기 전에 후궁이 그것도 왕의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 나가 사는 일은 조선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명성황후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41]

6.3. 미화

1990년 중반, 찬란한 여명에서 열강들의 이권다툼에 정면으로 도전한 여걸로 묘사되며 빠가 확 늘어난 뒤에 1990년대 말, 명성황후를 애국자에 가깝게 미화한 뮤지컬 명성황후와 KBS2 드라마 명성황후가 대박을 쳐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한 국모'라든가 '열강의 이권다툼에 맞서 싸운 여걸'이란 식으로 마치 잔 다르크[42]처럼 묘사된 게 이미지로 굳어져서 들이 대책 없이 미화한다. 사실 영화, 드라마계에서 명성황후 미화는 60년대부터 내려온 나름의 전통이다. 1965년에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라는 영화가 나왔고, 근래에는 미화하는 웹툰 해서도 나왔다.

2000년대 초 드라마 명성황후 방영 후는 대중에게 미화된 이미지가 가장 강하던 시절이었다. 조수미의 명곡 '나 가거든'은 길거리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었고 이미연과 정준호가 출연한 그 나 가거든 뮤직비디오 또한 상당히 유명하며 2004년 당시 게임 이터널시티에 느닷없이 명성황후를 지키라는 전용 미션이 생겼을 정도. 일반 대중도 드라마를 통해 명성황후에 대한 이미지가 정립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명성황후 때문에 말싸움이 붙곤 했다.

하지만 역사에 대해, 특히 한국사에 대해 어느정도(평균 이상) 지식만 있더라도 명성황후를 미화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드라마를 통해 유명세를 떨치면서 명성황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났고 진실에 대해서도 서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역사 공부를 안하는 저학력 층에서나 미화된 이미지가 그대로 통해 속아넘어갔을 뿐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현재 명성황후에 대한 대중의 호의적 이미지는 상당수 사라진 편.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의 명성황후 항목의 댓글을 보면 그동안의 언플에 가까운 미화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인식은 정말 곱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미디어를 통한 미화가 많은 건, 어쨌거나 '일국의 왕후라는 사람이 외국에서 온 습격자들에게 피살당했다는 것은 분명히 그 자체로 비극'이기 때문이란 점도 있다. 명성황후의 긍정적인 점을 찾을 수 있다면 자신이 살해당함으로써 일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일제의 야욕을 드러낼 재료로 보면 명성황후가 선하면 선할수록 일제의 악행과 대비되서 시청자가 느끼는 일제에 대한 분노를 손쉽게 키울 수 있다. 이후 습격자들을 처단도 못하기에 망국 직전의 나라의 애처로움은 한껏 배가된다. 바꿔 말하자면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기막힌 시점에 죽은 사람.' 물론 일제의 조선 침략 야욕이 밝혀졌음에도 딱히 달라진것도 막아내지도 못했으니 크게 의미는 없다.

어쩌면 명성황후의 역할은 크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해둘 필요는 있다. 여하간에 대다수의 최종 결정은 명성황후보다는 고종이 주도하여 내려졌다. 이런점에서 명성황후 오오 거리는 빠나, 명성황후를 까내리는 까나 모두 명성황후가 마치 고종을 대신해 국정을 한것처럼 이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결국 1차로 까여야할 것은 고종이요, 그 다음으로 까여야할 것이 명성황후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다.그리고 위의 지적과 더불어 조선왕조 내내(특히 말기로 갈수록) 대비나 왕비를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은 만만치 않았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균형있게 판단하도록 노력해야겠다. 명성황후 본인이 실제 정치적 최종결정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궁중의 정치적 암투에서 차지한 역할과 남성 외척들의 역할을 균형있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명성황후와 고종(즉 조선)이 서구 시민혁명의 형태로 무너지고 민주적 국가가 탄생하여 조선에 대한 철저한 가치판단이 민중에 의해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이 사건과 을사조약을 통해 망국의 군주와 살해당한 황후로 미화되어 조선에 대한 가치 판단에 감정이 끼어들 요소를 남겼다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6.4. 다른 시각

6.4.1. 옹호론

명성황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통 미디어에서나 사람들의 인식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에 초점을 맞춘다. 이 과정에서 명성황후는 권력에 눈이 먼 왕비로 묘사되고, 고종은 아무 힘이 없는 무능한 왕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를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권력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우선 흥선대원군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이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고종에게 권력을 물려줘야 할 위치였다. 하지만, 대원군은 왕의 나이가 찼음에도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고종과 대원군의 갈등이 시작된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아무리 왕이라고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대원군의 입장에서도 왕이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말하는 것과 왕후가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명분에 맞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는 고종의 입장과 왕에게 직접 대항하지 못하는 대원군의 입장은 곧 명성황후를 통한 대리전으로 변하게 된다. 실제 조선의 권력은 고종에게 있었다. 가령 민씨 일가가 조정의 요직을 장악하기 시작할때 고종이 이를 묵인한 것은 고종이 허수아비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종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기반이 없었던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충신들로 채워진 신하들보다 황후의 친인척들을 더 신뢰했던 것이다.

명성황후는 살해당하기 전 일본이 제시한 거액의 뇌물을 거부했다.[43] 살해당했다는 것이 오히려 일제의 조선침략에 명성황후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는 근거가 된다. 그렇지 않고 명성황후가 일제에 긍정적이고 협조적이었다면 일본이 살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이유는 명성황후가 자꾸 일본이 아닌 청이나 러시아 같은 다른 국가들을 조선에 끌고와서 일본이 조선을 독점하는 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지 명성황후는 일본과 맞써 싸운 시대의 영웅이 절대 아니다. 당시 상황만 해도 삼국간섭 이후 조선은 러시아의 힘을 의식해 친일내각을 숙청하고 김홍집의 3차 친러내각을 수립한 시기였고, 러시아 역시 일본과 한반도 분할논의를 하다가 결렬되어 용암포사건을 계기로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은 조선이 일본을 견제하는 것 이외에 이득될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러시아도 식민지를 만들던 제국주의 강대국들 중 하나였고 러일전쟁 전까지만 해도 각종 이권을 침탈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 비판론자들이 명성황후의 사치를 비판하는 주된 근거는 매천야록에 있다. 문제는 매천야록은 신빙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매천야록이 야사로 보기도 어렵다는 건 둘째치더라도 저자인 황현 선생은 생전에 명성황후를 굉장히 싫어했는데, 명성황후의 인사등용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명성황후의 가장 큰 실정이라 지적되는 사치, 부패, 향락, 매관매직보다 더 중하게 여긴 단점이 고작 여자가 정사에 관여한다는 거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정치적 입장이 달랐을 것이라는 주장이 신빙성을 얻기도 한다. 물론 현대적 관점으로 과거의 시대적 가치관을 단정짓는 것은 삼가야 하겠지만서도, 역사성 있는 인물을 고작 그런 이유로 단정지었던 인물의 의견을 어디까지 수용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심히 의문스럽다.

그렇기에 같은 저자의 같은 책 속에서 어느 것은 믿을 수 있고 어느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인지, 어느 게 사실 이고 어느 게 허구인지 무조건 수용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검증해야한다.

또한 역사학자들도 매천야록을 고증을 위한 사료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사실성과는 거리가 먼 당시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구나 쯤으로 또는 당시 모습을 이해하는 여러가지 방법중에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어설프게 아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한다 했던가. 매천야록을 근거로 의견을 타진해나갈 때는 그 자체로 논리 오류의 덫에 빠질 것을 염두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는 매관매직에 대한 기록은 있어도 사치에 대한 기록은 없다. 조선에서 쓴 것도 아니고, 일제에 의해 쓰여진 책인데도 전혀 없다. 심지어 왜곡이 심해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는 역사서인데도 말이다.
명성황후가 매일같이 연회를 베푼 기록에 대해서도 실제로 그 호화찬란한 연회에 참석했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게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은 표범가죽 카펫은 명성황후의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해당 카펫이 명성황후가 쓰던 것이라는 것은 미국의 <라이프>라는 신문에서 나온 내용이며 명성황후가 썼다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증거로 표범가죽 카펫에 새겨져있는 오얏꽃 문양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꿀때 사용한 대한제국의 상징인데, 대한제국의 건립은 을미사변 2년 뒤에 일이다.[44]

당대 인물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
뛰어난 침착성과 무엇인가를 탐색해내려는 듯한 눈빛을 지닌 총명한 여인.
* 윤치호
왕후는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왕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이 하나같이 감탄하곤 했다.
* 영국 왕립 지리 학회 회원이기도 한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저서《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에서 명성황후와 흥선 대원군과의 정치적 대립에 대해서 언급하면서도, 명성황후를 '대화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였다.
왕후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머리장식으로는 왕관을 쓰지 않았고 모피로 가장자리를 단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당시)
그녀는 머리 위에 진주와 산호로 만든 장식을 단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기 전 만났을 때)
*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는 《명성황후와 대한제국》에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라고 썼다.

결정적으로 명성황후의 사치설을 부정하는 가장 큰 근거는 고종의 비자금이다. 고종의 비자금은 신무기 구입, 전기 및 전화 설치, 은행 설립, 제중원 건립 등에 쓰였으며 일제강점기시절에는 대한독립군의 주요자금으로 쓰였다. 이 비자금은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마련한 것인데, 황후가 사치가 심했다면 고종에게 이런 거액의 비자금이 존재할 수가 없다.#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돈이라는 것이 논란의 여지는 될 수 있어도 명성황후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쓰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그리고 명성황후는 원래 머리가 좋고 수완이 뛰어난 여자로 처음 궐에 들어왔을 때 고종에게는 이미 궁인 이씨(영보당 귀인 이씨)가 있었고 첫 아들인 완화군을 낳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 후 자연스럽게 철이 든 고종과 부부로서의 금슬은 물론 정치 파트너로서 신뢰를 확실히 얻었기 때문에 시아버지이자 상왕도 아니면서 대리청정 수준으로 권력을 누린 흥선대원군과 맞설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명성황후가 뛰어난 정치가라도 왕비는 왕에 의해서 언제든 폐위될 수도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이기 때문에 2세 생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제로 4남 1녀를 낳았음에도[45] 살아남은 자녀가 순종 하나뿐임은 중전으로서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순종을 낳기도 전에 흥선대원군이 궁인 이씨가 낳은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척을 지며 정치판에 등장하는데, 한 사람으로 봤을 때는 살기 위해 독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이 되기도 한다. 동정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명성황후 개인의 처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이 일본인들이 전략적으로 명성황후의 악행만 남겼다는 설이 지금까지 적용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6.4.2. 비판론

명성황후가 사치를 포함한 악행에 대한 기록은 매천야록 말고도 많이 찾아볼수 있다. 유길준[46]의 증언이라든지 남가록(南柯錄)[47] 등에서 상당수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가장 유명한 것이 매천야록이기 때문에 매천야록을 예로 드는 것이지, 명성황후의 사치를 포함한 악행이 매천야록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인들과 시위대의 주 목표는 고종이 아닌 왕비 민씨와 여흥 민씨 외척들이었다. 왕비는 도주했고 민씨 일파도 도주하거나 시위대에 잡혀서 살해당했다. 민씨 일파가 군인들과 민중한테서 얼마나 증오의 대상이었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매천야록이 현재 사학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믿거나 말거나 식의 당시대 야담, 그리고 이를 당시 기득권층인 사대부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왜곡없이 서술했기 때문이다. 야담이 있다는 것이 매천야록의 가치를 깎아내리거나 신뢰성 없는 허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역사서 혹은 실록들 또는 당시에 조선과 교류했던 여러 외국의 자료 등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독특한 내용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빠트릴 수 없는 소중한 자료이다. 무엇보다 사학에서 무척 중시하는 것이 1차 사료[48]이다. 1차 사료 자체가 진실이라 볼 수는 없지만 귀중한 기록인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매천야록을 '갑오경장 이전 기록은 들은 것을 그대로 수록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자체가 잘못 전달되어 틀린 부분도 약간 있고 다소 과장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리고 갑오경장 이후 사실에 대해서도 편년체로 기록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황현 자신이 직접 보고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 기술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사료들이 망라되어 있어서 한말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반드시 읽어야 정도로 가치가 매우 높다.' 고 서술하고 있다. 매천야록의 사실 자체가 잘못 전달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역사서와 교차 검증해 어느 정도 사실로 밝혀진 부분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잘못된 사실이 실려 있다고 모두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라면 삼국유사삼국사기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49]

특히 무녀인 진령군을 총애하여 국고를 파탄낸 책임이 크다. 민씨 척신정치를 할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동시에 정치를 함에 있어서 무속과 같은 샤머니즘에 의존하는 추태는 왕조차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명성황후의 본질적 문제였다.[50] 민씨 척족들의 부정부패와 사치, 매관매직의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가뜩이나 국력이 열악한 현실로 기울어 가던 조선의 재정을 제대로 파탄냈을뿐만 아니라 부정부패를 더욱 심화시킨다. 결과적으로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민란을 제대로 진압하거나 달래지 못한 사태에서 명성황후와 그 일족 정권이 생각한건 외세인 청나라에게 반란세력 진압을 명분으로 군사력을 빌린다는 말도 안 되는 일들 뿐이었다. 한마디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여 자국민을 진압하게 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다. 개항에서도 조선을 거의 다 내주다시피 했다. 특히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이후 보여주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추태는 그야말로 19세기 조선의 참담한 까막눈 현실로, 조선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51]

청일전쟁 때는 아예 자국 내에서 외국군이 전면전을 수행하는걸 방임했으며 일본군과 청군에 조선 정규군을 파병하여 서로 총질까지 하게 한 원흉이다. 게다가 조선의 현실은 보지 않고 이이제이랍시고 나중에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청일전쟁과 같은 추태의 연속은 명성황후 스스로 명을 재촉한 결과를 낳았다. 특히 자국 영토에서 외국군과의 싸움을 조장하고 방임한 이는 명성황후가 유일하다.

내치도 상당히 부실하다. 임오군란도 별기군과 구식 군인의 차별대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는데, 개선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오히려 방관하여 악화시켰다. 만약 능력이 있다면 구식 군대를 재편하여 새로운 군대로 만들든, 구식 군대를 따로 근대화시키든, 그도 아니면 밀린 월급을 주거나 달래서 해산하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개항으로 지배층과 백성들의 불안과 불만이 쌓이는데도 지배층과 백성들을 설득하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도 세도정치 때문에 생긴 반란이니 자신이 나서서 부패한 외척을 처벌하고 협상을 이끌어 불만을 잠재우고 해산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청나라군을 끌어들이고 일본군까지 개입하게 만드는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장 큰 문제는 외척의 세력으로 세도정치를 부활시키고, 삼정의 문란을 다시 일으킨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명성황후의 정치 입지가 커지자 민씨 일족들이 세력을 잡았고 흥선대원군이 간신히 막은 매관매직이 다시 성행했다. 백성들 입장에는 이런 민폐가 따로 없다. 민심은 민씨 일족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권력을 잡았으면 민심을 다잡아 권력을 단단히 해야 했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기된 외국인의 평가로 그를 옹호하기엔 객관성이 부족하다. 민영익을 치료해준 알렌은 사례로 10만 냥을 받았으며, 명성황후를 호평한 릴리아스 언더우드도 자신의 책 '조선견문록'에 명성황후가 결혼 축의금을 100만 냥을 주었다고 말한다. 1895년에 조선 정부의 세입이 480만 냥 수준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과연 이를 보고도 사치가 없었다는 말의 근거가 되는가.[52] 그리고 비숍의 여행기록의 내용도, 당시 일본에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여 백성들은 빈곤에 시달리고 구식군대에 지급할 급여가 없어 쌀과 모래를 섞어 지급하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머리 위에 진주와 산호로 만든 장식을 단 것이 사치가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명성황후가 총명하다며 부정적 평가를 반박하는 이도 있지만 당대에도 여우같다는 악평을 들었지언정 멍청하다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명성황후는 대체로 서양인들에게 친절했기 때문에 나쁜 평가를 받을 이유가 없고, 멍청하지 않았다는건 이미 당대의 반대자들조차도 대부분 인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총명하다면서 반박하는 것도 허수아비치기에 불과하다.

또한 명석한 머리는 나쁘게 볼 여지가 더 많다. 그냥 멍청해서 이용당했다면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그렇게 현명하다고 알려진 사람이[53] 자신의 개인적인 사치와 향락을 위해 척족을 양산하고 재정을 파탄냈으며, 타국에 마지막 남은 권리들을 퍼줬다면 더 평가가 나빠질 수 밖에 없다. 고종이 개인적 자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매관매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이 크다.[54] 고종이 비자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사치를 안 했다고 보는건 별개의 문제다.

7. 민씨 척족의 친일과 독립 운동

7.1. 친일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후손들로 가깝든, 멀든 모두 명성황후의 친족들을 말한다. 물론 모든 민씨 척족들이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민영익, 민영환을 들 수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 조사하여 공식 발표한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1,006명중에 민씨 반민족 행위자는 총 23명으로 성씨중에 11번째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자신들의 황후이자 친족을 살해한 자들한테!
  • 민건식 (1879~1944)
    대한제국 탁지부 대신 출신의 민영기[55]의 아들이다. 1910년 이후 남작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고 그 아버지 민영기도 중추원 고문이 되어 부자가 쌍으로 친일을 했다. 또 친일 유림 단체 조선유교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 閔原健植라는 명의로 창씨개명했다.
  • 민대식 (1882~?)
    민영휘의 장남으로 아버지 민영휘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은행업에 뛰어든 후 조선 실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1935년 발간한 책자를 보면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으며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조선신탁회사 등에서 감사역과 경기도 도평의회 평의회원을 거쳤다. 또 사회 여러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아버지 민영휘의 재산을 많이 받았으면서 정작 아버지의 장례를 초라하게 치러 손가락질을 받았다. 광복 후에도 살아있어 반민특위에 조사받았으나, 이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 민병석 (1858~1940)
    민영위의 손자이자 민경식의 아들이다. 이완용의 사돈이자 절친한 친구로 경술국적의 한 사람이다. 친러파였던 이완용과 함께 활동하다가 친일파로 갈아탔고 명성황후가 죽은 후에도 요직을 맡았다. 그렇게 친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조문을 갔으며 결국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 공로로 자작이 되었고 막판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자리까지 올랐고 아내 심경섭과 함께 친일 단체 애국금체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활동하다가 1940년 죽는다. 그의 아들은 대법원장을 역임하다가 2007년 사망한 민복기다. 그의 후손들은 재산이 국가에 몰수당하자 다른 친일파 후손들처럼 당당하게 국가에 소송을 낸 상태다.
  • 민상호 (1870~1933)
    민치억의 친자이자 민치덕의 양자로 원래 궁내부에서 근무하다가 외교관이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남작 자리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그의 후손은 일제에게서 받은 토지를 2007년 국가에 반환하라는 조치를 받았지만 오히려 소송을 제기했다.
  • 민영규 (1846~1922)
    민경호의 아들로 태어나 판서와 궁내부 대신을 지냈다.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그의 작위는 1924년에 그의 손자 민병삼이 습작했다. 1960년 보도에 따르면 민병삼과 그 일가는 일제 강점기 동안 서울 종로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손자 중 하나는 군 복무 중 사망했다고 한다.
  • 민영기 (1858~1927)
    민준호의 아들로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서재필독립협회에 대항하는 황국협회를 결성하여 독립협회의 해산에 기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 당시 탁지부 대신으로 한규설[56]과 함께 대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조약 체결에 반대했지만 1908년에 변절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총재와 이왕직 장관에 임명되고 남작이 되었다. 또 1916년 세워진 대정실업친목회가 1921년 친일 단체로 변모될 때 회장을 맡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또 1923년에는 다시 이왕직 장관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민건식이다.
  • 민영린 (1873~1932)
    민술호의 친자이지만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 그래서 순명효황후 민씨와 남매지간이다. 1910년 10월 16일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아편을 빨다가 걸려서 박탈당했다.
  • 민영소 (1852~1917)
    민철호의 아들이지만 민규호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민씨 일족이라 빠른 승진을 거듭했는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쳤다. 그러나 임오군란 때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불탔고 1894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홍종우로 하여금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했다. 1904년 농상공부 대신에 오를때까지 요직을 거쳤지만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 민영욱 (1900~1963)
    민상호의 아들로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했다.
  • 민영휘 (1852~1935)
    명성황후의 친척 조카로 민두호의 아들이다. 1877년 병과 급제 이후로 계속 승진과 요직을 거쳤다. 민씨 일족의 대표 거두라서 임오군란 때 집이 완전히 불타기도 했다. 민씨 일족의 중심인물이자 수구파의 거두로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친일 개화 세력을 몰아내고 위안스카이와 결탁해서 사대당에 들어가 전권을 휘둘렀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하고 갑오경장 때 민씨 일족과 실각하여 유배되었지만 평양으로 도망가 청나라로 돌아갔다. 1895년에 이준용과 교환되어 귀국하고, 1905년에는 휘문학교를 세웠는데 이게 이미지 세탁에 한몫하고 있다. 1910년에는 자작 작위와 은사금,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민영휘는 경제에 밝아 쉽게 갑부가 됐는데 탐관오리로 있을 때 수탈한 재물을 잘 불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 최고 갑부 중의 한 명이 되었는데 권력형 부정축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이섬 소유자들도 현재 그의 후손들.# 2007년 그의 재산을 환수하기로 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반발했고, 결국 환수 불가로 결정됐다.#
  • 민형식 (1875~1947)
    민영휘의 양자로 한 때는 을사오적 암살 거사에 거액의 자금을 대기도 했지만 변절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아버지 민영휘에 1936년 사망하자 자작을 물려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어려운 사람 돕기를 좋아하고 의리를 숭상했으며 신민회 회원으로 민족 운동에 기부금을 내는 양면적인 모습도 있었다.
  • 민형식 (1859~1931)
    민영휘의 아들 민형식과 동명이인이다. 명성황후의 친족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호종한 공으로 병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내고 병조의 요직과 삼도수군통제사 등 국방 분야의 요직을 모두 거친 거족이었다. 하지만 일제에게 협조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 민형식에게는 아들 6명이 있었지만 모두 아편 중독자가 아니면 전과범이라 습작하지 못했다.
  • 민종묵 (1835~1916)
    대제학 민승세의 아들이지만 민명세의 양자가 되었다. 1874년부터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이조참판, 대사헌 등으로 중용되고 갑신정변 이후에는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 때는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벌한 것을 상주했지만 정작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았고 2만 5천원의 은사 공채를 받았다. 1911년에는 매일신보에 한일 병합 1주년 축하문을 싣기도 하고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 민철훈 (1856~1925)
    민종묵의 장남으로 궁내부에서 일했고 아버지 민종묵이 죽자 1916년 남작 작위를 세습했다. 1920년에는 친일파 윤덕영 등이 세운 해동운행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7.2. 독립 운동

민씨들이 친일한 사람도 있었지만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도 있었다. 특히 을사늑약 체결 후 2천만 동포에 고하는 글을 남기고 자결한 민영환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의병대장 민종식, 의병대장 민긍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아래는 민씨 독립유공자 주요 명단이다.
  • 민영환 (1861-1905) : 을사늑약 후 2천만 동포에 고하는 글을 남기고 자결.
  • 민종식 (1861-1917) : 의병 (일본헌병이 주둔하고 있는 홍주를 습격 점령하였다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사형언도)
  • 민긍호 (1865-1908) : 의병 (원주 주재 일본경찰분관소를 습격하는등 활약하다. 원주에서 전투 중 순국)
  • 민강 (1883-1931) : 독립운동 (서울에서 약국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 등을 하였고 체포되어 옥중에서 옥사)
  • 민양기 (1899-1933) : 독립운동 (은율경찰서를 습격 친일군수 최병혁을 죽였고 체포 되어 사형 당함)
  • 민영구 (1909-?) : 광복군 (대한민국임시정부독립운동요원으로 항일 선전 광복군)
  • 민용호 (1869-1922) : 의병 (강릉 관동동구군도창의소 의병 대장)
  • 민필호 (1901-1963) : 임시정부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부단장등 독립 운동)
  • 민효식 (1854-1910) : 의병 (황해도 지역 의병장)
  • 민가현 (?-1908) : 의병 (황해도 의병을 이끌고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전사순국)
  • 민동식 (?-1896) : 의병 (강원도 의병으로 삼보전투 인제전투 등에서 활약 했으며 교전 중 순국)
  • 민백형 (?-1907) : 의병 (황해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펼치다 평산군에서 토벌대와 교전 중 순국)
  • 민병길 (1884-1942) : 임시정부 활동
  • 민병숙 (1873-1919) : 의병 (강원도 홍천군에서 일본 헌병과 격투가 벌어지던 중 일본 헌병 총에 순국)
  • 민병태 (1870-1919) : 의병 (홍천에서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순국)
  • 민수현 (?-1910) : 의병 (황해도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일본군에게 피살 순국)
  • 민영수 (1921-2011) : 광복군 (총사령부에 입대 후 광복군 대위로 항일운동)
  • 민영완 (1911-1976) : 임시정부 활동
  • 민영학 (1916-1945) : 독립 운동 (일본군인 5명 일본군속 등 12명 사살)
  • 민용운 (1876-1929) : 독립 운동 (징역 7년 받음)
  • 민제호 (1890-1932) : 임시정부 활동
  • 민찬호 (1877-1954) : 독립 운동
  • 민찬호 (1903-1950) : 독립 운동 (투옥)
  • 민태규 (1882-1968) :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철훈 (?-1896) : 의병 (순국)
  • 민충기 (1888-1932) : 임시 정부 활동 (징역 5년 받음)
  • 민창식 (1899-1938) : 독립 운동 (징역 3년 받음)
  • 민치도 (1868-1921) : 의병 합방 후에도 독립 운동 (징역 7년 선고 받았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후 출옥 다음날 국민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
  • 민치영 (1892-미상) : 독립 운동 (징역 10년 받음)
  • 민한식 (1876-1915) : 의병 (징역 10년 받음)
  • 민기수 (1884-미상) :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 받음)
  • 민순철 (1895-1954) : 독립 운동 (징역 3년형 받음)
  • 민창식 (1888-1948) : 독립 운동 (징역 6월 받음)
  • 민순호 (1880-1966) : 의병 (1896년 이강년을 따라 의병 활동하였고, 1905 1907년 의병활동. 특히 1907년에는 적 500여명을 도륙)
  • 민시식 (1878-1947) : 의병
  • 민주호 (1887-1942) :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영갑 (1888-1965) :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영달 (1859-1924) : 독립 운동
  • 민영면 (1886-미상) :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후 또 징역 2년 받음)
  • 민영팔 (1874-1926) : 의병
  • 민영흥 (1911-1983) : 독립 운동 (금고 6월형 받음)
  • 민옥금 (1905-1988) : 독립 운동 (징역 1년 받음)
  • 민원명 (1876-?) : 독립 운동 (징역 2년 받음)
  • 민재봉 (1890-1940) :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 받음)
  • 민주혁 (1870-?) : 독립 운동 (징역 1년 6월 받음)
  • 민춘기 (1922-2018) : 독립 운동 (징역 3년 받음)
  • 민치방 (1873-1925) : 독립 운동 (일본군인이 총검으로 찔러 평생 팔을 쓰지 못하고 여생을 보냄)
  • 민홍식 (1881-1951) : 독립 운동 (징역 3년 받음)
  • 민동호 (1874-1938) : 의병
  • 민병두 (1885-1960) : 독립 운동
  • 민영식 (1899-1980) : 독립 운동
  • 민성호 (1836-1908) : 의병
  • 민영명 (1909-1960) : 독립 운동
  • 민인호 (1854-1925) : 의병
  • 민영로 (1919-1950) : 독립 운동
  • 민록식 (1897-1962) : 독립 운동
  • 민영숙 (1920-1989) : 광복군
  • 민재학 (1896-1922) : 독립 운동
  • 민충식 (1890-1978) : 임시정부 활동
  • 민제식 (1868-1924) : 독립 운동

8. 호칭 문제

보통 명성황후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명칭으로는 '명성왕후', '명성황후', '민비' 3가지가 있다.[57] 이 중에서 문제가 되는 명칭이 '성+비'로 된 '민비'인데, 1983년부터 국사교과서에서 '민비'를 '명성황후'로 표기하기로 하면서 '성+비'로 된 명칭은 공식명칭이 아니라고 결론이 났다.

사실 공식명칭이 꼭 통칭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대중들이 '민비'라는 호칭을 사용함이 잘못은 아니다. '성+비'로 된 명칭은 한반도에 있던 나라의 왕비의 공식명칭으로 사용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58] 다시 말하자면 정부가 국민들에게 가급적 사용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 것이지, 아예 사용하면 안 된다고 강제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사적인 자리에서 명성황후를 가리킬 때 공식명칭을 사용할지 공식명칭이 아닌 '민비'를 사용할지는 순전히 개인의 호불호 문제이다.#

그런데 명성황후 민씨는 보기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이라, '민비'란 호칭을 사용해야 할지 아닐지 하는 문제가 명성황후를 어떻게 보느냐는 감정적인 부분이 작용해서 계속 논란이 된다.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 대부분은 '민비'라고 호칭함을 보면, 이 논란은 어떤 명칭으로 부를지보다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하는 부분과 더 관련이 깊다.[59] 이것은 명성황후와 마찬가지로 성+비로 된 명칭으로 흔히 불렸던 순정효황후 윤씨는 정식 시호를 받은 명성황후와 달리 '순정효황후'라는 호칭이 아무 공적 권위가 없는 사시(私諡)인데도 1983년 이후로 이런 논란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논란을 크게 보면 둘로 나눌 수 있다.
  • 민비는 대한민국 공식명칭이 아니니 사용해선 안된다 vs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며 개인이 어떤 명칭을 사용하든 표현의 자유이다
  • 민비는 일제가 만든 명칭이니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사용을 금해야 한다 vs '성+비'로 된 명칭을 조선에서도 썼으니 일제가 만든 게 아니다

전자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이 있고, 후자는 문제의 명칭을 누가 만들었느냐와 관련이 있다. 역사적으로 후자는 꽤 중요한 문제인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의 황족들의 칭호를 격하했고 이 당시 일제가 만들어 그들의 호칭으로 쓰인 명칭들은 법적인 처벌을 받는지와 관계없이 대한민국에선 일반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선 대부분 일제가 만든 조선의 황족들의 명칭들을 호칭으로 사용해야 할지 말지는 논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후자의 논쟁에서 어떤 결론이 나느냐가 전자의 논쟁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위키에선 후자의 논쟁에 대한 양측의 주장을 간단히 서술함으로써 '민비'라는 명칭이 사적인 경우에서도 호칭으로 사용하는데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8.1.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다

생전에 사용된 공식 호칭은 결코 '민비'인 적이 없었다. 당대 기록에선 대부분 중전, 중전마마, 왕비, 중궁전하 민씨 정도로 적혀 있다. 조선의 왕비 중에서 '성+비'로 만들어진 명칭이 유명한 경우로는 명성황후와 순정효황후가 있는데, 그것도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후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매천야록과 윤희순의 격문 '왜놈 대장 보거라'에 '민비'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이 두 기록은 당대에 '민비'라는 호칭이 쓰였다는 걸 증명한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 전해지는 매천야록은 황현의 후손의 필사본으로 1920~30년대에 쓰인 것이고 현재 전해지는 윤희순의 격문은 윤희순 의사 말년(1935년 사망 직전의 회고록)에 재 작성한 해평 윤씨 일성록의 기록이다. 원본은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현재 전해지는 기록은 이보다 10년 이상 지난 뒤에 작성된 것이므로 단어 몇 개가 바뀌는 식으로 원본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조선에서 '성+비'로 된 호칭으로 왕비를 부르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성+비'로 된 명칭이 왕비를 부르는 통칭의 하나가 되었을 거라는 주장인 것이다.

민비 부정론자들은 조선일본의 호칭 체계를 비교해서 이런 명칭이 생겨난 원인을 이렇게 추정하고 있다. 조선의 여성들은 통칭으로 통상적인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다. 왕실 여성들도 존호나 지위명이 통칭으로 쓰였고, 후궁은 대부분 직첩명+성씨(또는 성+직첩명)이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호칭 체계는 조선과 다르다. 일본에선 여성에게도 통상적인 '이름'이 있지만, 일본 황실은 성씨가 없다. 그 때문에 황족과 결혼한 여성을 통칭할 때 주로 '이름+비', '이름+황후'가 쓰인다. 호칭 체계에서 두 나라가 같았던 건 군주의 정실 부인에게만 시호를 올렸고 이를 통칭으로 사용했다는 것 정도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에 왕공족이라는 신분을 만들어 조선의 황족들을 집어넣었다. 조선 초기 이후로 왕비는 대비가 되지 않는 한은 존호를 받지 않았으므로, 일본 입장에선 명성황후와 순정효황후에겐 성씨 외에는 마땅히 '이름'으로 쓸 명칭이 없었다. 당시 명성황후에겐 고종이 준 시호가 있었지만, 조선을 병합하고 그 나라의 황족들의 신분을 격하시킨 상황에서 그 시호를 '이름'으로 쓴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통칭으로 사용될 호칭으로 '성+비'로 만든 명칭이 생겼고, 그 후로 이 호칭이 일본인들이나 조선인들 사이에서 통칭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조 링크 또한 1910년 이전에 쓰이는 사례들은 모두 일본 측의 기록인데 1868년에 일어난 서계거부사건(혹은 국서거부사건) 이후 일본에선 조선 왕실을 가리킬 때 '이왕'과 '민비'라는 단어가 등장했다고 한다.[60]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일본의 방식에 맞게 바뀐 것으로 봐야 하는데 이는 일제의 잔재의 하나이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8.2. '민비'는 일제가 만든 통칭이 아니다

왕비후궁을 호칭할 때 지위명, 시호(의 약칭), 직첩명+성씨(또는 성+직첩명) 등을 사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경우다. 폐서인이 된 왕비를 지칭할 때 '성+비'로 된 명칭이, 폐서인이 된 왕세자빈을 지칭할 때 '성+빈(嬪)'으로 된 명칭이 사용된 경우가 기록에서 종종 발견되고[61], 왕실의 어른인 대비를 '성+대비'로 된 명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걸 보면, 왕비의 호칭으로 '성+비'로 된 명칭이 백성들 사이에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이런 명칭이 있었다 해도, 공식적인 게 아니니 사료에는 이런 명칭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게 정상이다.[62] 그러니까 폐서인이 된 왕비가 아닌 이를 '성+비'로 된 명칭으로 호칭한 경우가 사료 중에 하나라도 발견이 된다면, 당대에 백성들 사이에서 그런 명칭이 통칭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이 지은 격문 <왜놈 대장 보거라>에서 보면 '더욱이 우리의 민비를 살해하고도 너희 놈들이 살아서 가기를 바랄쏘냐.'라는 부분이 있다. '민비'라는 부분을 '국모'로 쓴 경우도 있는데, 독립기념관의 기록국가보훈처 대표블로그에서는 '민비'라고 쓴다. 그리고 매천야록에서 명성황후를 가리키며 사용하는 호칭에 '민비'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매천야록 공식 국역 자료) 2013년에 발생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논란 등을 들어 번역에 문제가 있다[63]고 지적할 사람은 원문을 찾아보기 바란다. 분명히 '민비(閔妃)'라고 되어 있다. 매천야록은 그 특성상 거기에 실려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는 맹신할 수는 없는 자료지만, 그건 책에 실린 일화의 신빙성 유무 때문이니 호칭에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윤희순 의사와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둘 다 양반으로, 명성황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당대에 아예 없는 명칭을 새로 만들어서 호칭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낮다고 민비 긍정론자들은 주장한다. 특히 윤희순의 <왜놈 대장 보거라>는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해 일본에게 분노해, 조선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테니 좋은 말로 할 때 너희 나라로 가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둘 다 현재 전해지는 기록이 원본이 아니며 이 기록들은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작성된 거라 원본 내용 일부가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또 다른 필사본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왜곡된 게 맞는지, 왜곡된 부분이 어디인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민비라는 단어가 원본에 없다는 주장에 근거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8.3. 고종과의 형평성?

본래 명성황후 민씨의 호칭 문제는 민비 부정론자든 민비 긍정론자든, 명성황후 민씨 한 명을 대상으로 하여, 민비라는 호칭을 사석에서 사용함이 적절한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2017년 일부 민비 긍정론자들 사이에서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부른다면 고종도 광무제라고 불러야 한다는 논리가 나왔다. 이들의 주장은 명성황후 호칭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아내인 민비는 황후 취급하는 주제에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은 황제가 아닌 조선 왕 취급하여 고종이라 비하해서 부르며 남녀 차별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고종은 왕의 호칭이니 그렇게 부른다면 고종의 정비인 민씨도 황후가 아니라 왕비로 취급하여 민비로 불러야만 부부 간 호칭의 형평성이 성립한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고종' 같이 '~조', '~종'으로 붙이는 묘호는 본래 황제의 나라에서 황제 사후 종묘에 오를 때 붙여지는 명칭이라며 조선 왕의 호칭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는 비판이 있다.[64] 또한 '고종'을 조선 왕의 묘호로 보고 민씨를 황제가 아닌 왕의 정비로 취급한다 해도 조선 왕의 정비의 시호(의 약칭)은 '성+비'가 아니라 'XX왕후'이므로, 민씨를 민비로 부르면서 고종을 고종으로 부른다면 '부부 간 호칭의 형평성'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고종 황제는 칭제를 했고, 그 이전의 조선의 왕은 묘호가 본래 중국 황제의 호칭이든 뭐든 간에 황제가 아닌 왕이었음이 분명하므로 양자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명성황후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면 '광무제'는 부적절하다 할 지라도 '고종'이 아닌 '고종 황제'라고 표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고려한 건지, 1983년부터 국사교과서에서는 '고종'을 '고종 황제'로 고쳐 표기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고종을 굳이 '고종 황제'라고 부르는 경우는 대한제국에 대한 걸 이야기할 때가 아니면 드문 편이다. '고종 황제'라는 호칭조차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고 별로 이를 문제 삼는 사람도 없는 것이 일반적인 걸 보면, 논란이 있는 '민비'는 몰라도 '명성황후'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이중잣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9. 사진과 초상화 논란

9.1. 사진

9.1.1. 떠구지 머리쌍비녀의 사진

파일:kr-Korean_palace-woman_in_full_regalia.jpg
Korean palace-woman in full regalia(대한제국멸망사, 1906)
파일:545507103_m.jpg
명성황후 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진. 떠구지머리(거두미머리, 큰머리)와 쌍비녀차림의 사진이다. 프랑스 잡지 <르 뚜르 뒤 몽>(1904)에 나왔으며 자료제공자인 아장 박사는 설명에 “일본의 과격분자에 의해 살해된 한국황후”라고 달았다. 원본사진인 테리 버네트의 <코리아:시간의 굴레에 갇힌…(Korea : Caught in Time)>(1900)에서도 명성황후라 나왔다.사학자 장도빈(張道斌)의 저서 <대원군과 명성황후>(1927)에도 명성황후라 서술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궁녀로 나와있는 기록도 역시 존재한다. 호머 헐버트의 <대한제국 멸망사>(1906-‘정장한 궁녀’)와 언더우드 여사의 <조선생활기>(1905-‘정장한 귀부인’), 샤를 알레베크의 사진엽서가 그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이고 원로 사학자들에 의하여 1977년부터 국사교과서에도 실린 명성황후 추정사진으로는 가장 유서깊은 사진이지만 비교적 근래에 부정론이 되두되어 논란중이라 교과서에서 빠졌다.

이미 1900년대 초엽부터 알레베크 사진엽서[65]등 서구를 중심으로 궁녀의 사진으로 유통되던 사진이라 명성황후의 사진일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하며[66] 일각에서는 신발도 신지 않은 버선발 차림으로 사진을 찍는 등 왕비로서 지킬 체통과 의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부정론이 있다. 또한 조선 시대 여성 복식의 중심은 가체(加髢)다. 가체를 보면 왕비가 아닐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비녀를 두개 꽂은 모양은 내명부의 신분이 높은 사람만 할 수 있으며, 떠구지머리 역시 상궁들이 하는 머리지만 왕비와 왕세자빈 역시 예장할 때 하는 내명부 공통의 머리다. 더구나 가체의 크기도 엄청나게 크다. 남아있는 구한말의 떠구지머리를 한 사진들 중에서도 매우 큰편에 속한다. 가체의 크기는 지위를 상징한다. 중국에서도 모양은 조금 달라도 떠구지머리는 황후나 왕비가 하는 머리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조선의 복식은 중국에서 왔다. 버선발 차림도 좌식생활을 하는 한국의 문화를 생각해보면 사진을 찍으러 출궁해서 사진관으로 가는식으로 밖으로 나가지 않고 궁내의 실내로 사진사가 들어와서 찍었기 때문에 신발을 신지 않았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중전이라고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돌아다닌것은 아니다. 발 역시도 단정하게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놓여있다.

배경이 꼭 사진관같아 보이지만 연대가 더 올라가는 1900년의 원본사진을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의자도 합성이고 바닥도 원래 돗자리 내지는 카페트였다. 뒷배경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서재로 보인다. 서울대학교 이태진 명예교수는 “아장 박사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현장을 답사하는 등 사건 규명에 열의를 보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 설명이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살해 후 궁녀로 둔갑시키기 위해 고종의 서재인 경복궁 집옥재로 추정되는 사진의 배경을 없애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해석했다.[67](일본의 훼손은 아래문단의 기타 참조) 또한 버선발이나 원본의 정돈되지 않은 배경 때문에 왕비로서의 체통이 안보여서 궁녀의 사진이라는 주장도 이 사진의 주인공은 가채나 쌍비녀로 보았을때 신분이 높은 내명부의 사람인데 구한말 상궁들의 사진을 보면 대게가 몸가짐을 엄숙하게 정좌하는등 각을 잡고 배경은 깔끔한 건물앞이나 정돈된 실내에서 찍은 매우 체통있는 사진들이다.

조선은 유교적 예법의 나라고 궁녀들도 예법으로 속박받는 자유가 없는 존재들이다. 대충대충 몸가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체통이 없어서 평민의 사진일순 있어도 상궁의 사진일순 없다. 이게 상궁의 사진이라면 그것으로도 이례적인 사진이다. 이제껏 버선발을 노출한 궁녀의 사진은 없다. 다른 궁녀들의 사진들과 비교할때 이질감이 크다. 오히려 왕실의 권력자들의 사진들 중에 여유가 느껴지는 사진도 있다. 명성황후는 순종적인 성품이 아니라서 집권세력인 민씨척족의 정치적 수반으로 왕까지 품으며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당대의 집권자였다. 거기다 시아버지하고도 싸우는 호방한 여장부형의 성격으로 유교전통적 여인상과는 매우 달랐다. 물론 반대였다면 역사가 달라졌을것이다. 오히려 권력에 짓눌리는 궁중법도속의 상궁이라면 남이 볼까 두려워서라도 감히 버선발로 여러 물건들이 올려놔진 서재에서 여러사람이 볼 수있는 사진을 찍을 수는 없어도 권력위에 올라탄 명성황후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또한 복장이 왕후치고는 수수한 편인데 윗 문단의 명성황후를 만났던 외국인들의 묘사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장식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는 것 같았으며, 또 거의 달지도 않았다고 하고 있으며 목걸이, 팔찌, 브로치등의 꾸미개장식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하는 기록과 오히려 일치한다. 직접 만난사람들의 기록이며 당대의 1차사료다. 만약 복장이 화려하다면 이러한 기록들과 배치되는 것이다.

북한 같은 경우는 이 사진을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어쨋든 과거 정설로 여겨져서 교과서에까지 실렸던 이 사진의 위상은 많이 떨어진게 사실이다. 복장도 순정효황후사진과 비교하면 수수하고 궁녀사진이나 삽화와 유사점이 많으며 원본사진의 배경도 단정치 못한 점 때문이다. 다른 왕실사진은 단정한 배경들이 대부분이다. 배경의 삭제수정도 일반 백성이 나온 풍속사진에서도 사례가 있다. 또한 기생의 사진에 책들이 있는 서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역시 있다.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점점 부정론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사진의 영향력은 강력하여 드라마영화, 뮤지컬, 각종행사등에서는 여전히 떠구지머리와 쌍비녀의 명성황후가 자주 보인다. 아무래도 오랜기간 국사교과서에 명성황후 사진으로 실려있어서 명성황후 하면 바로 떠오로는 사진이고 목재로 된 나비모양의 커다란 가채와 쌍비녀가 독특해서 일 것이다. 이는 역시 사진논란이 있었던 흥선대원군과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역시 필생의 라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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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 약1년전에 일본에서 석판화 양식으로 그렸다는 명성황후-고종-흥선대원군의 3자 합동 초상화인데 명성황후의 모습이 이 사진과 일치한다. 이 그림은 명성황후 관련 그림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이다.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이나 초상화는 모두 사후에 발행된 것이나 이것은 유일하게 생전에 나온 것이고 연대, 주소, 출판사, 발행일자, 편집자명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있으며 발행인이 일본에서 당대 최고의 석판화가이자 덴노의 초상화를 최초로 보급할 수 있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매우 권위있는 사람인 출판사 신양당(信陽堂)의 '오카무라 마사코(岡村政子)'이다. 더구나 이 그림이 그려지기 6개월 전에 메이지 덴노 부처의 초상화를 역시 석판화 양식으로 그렸는데 실물과 같다. 만약 여기서 그려진 왕비 민씨가 실은 궁녀를 그린 초상화라 가정하면 고종, 흥선대원군 거기에 더해 메이지 덴노와 쇼켄 황후의 초상은 각각 본인의 얼굴을 그렸는데 명성황후만은 본인이 아닌 다른 궁녀의 모습을 그려넣었다는 얘기가 된다. 다른 사람의 초상화는 모두 본인의 실물과 같다. 이 그림은 일본에서 그린 것이라 서구에 비하면 훨씬 가까운 국가이고 일본 역시도 군주국으로 그 국민들 역시 군주국의 신민들이다. 왕후를 궁녀로 대충 그려넣는다는 것은 군주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결례라는것을 모를리가 없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위 사진이 명성황후라는 것에 무게를 실어주는 증거가 되는 그림이다. 조선국귀현초상(朝鮮国貴顕肖像) (발굴특종②) 캐나다 거주 중국인에게서 입수한 민비 초상화

9.1.2. 이승만의 책 "독립정신"에 실려있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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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명성황후 사진으로 알려졌던 사진. 그리고 이 사진의 원본 사진이 있는데,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링크 1990년에 명성황후 사진으로 국사 교과서에 실렸지만 논란 끝에 1997년 삭제 되었다.

9.1.3. 흥선대원군과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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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미국에서 발간된 박물관 보고서엔 "궁궐에서 시중을 드는 여인", 1893년 독일의 에른스트 폰 헤센-바르테크가 쓴 '코레아' 궁녀, 1894년 발간된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등의 책자에는 '조선 왕의 시종 왕아버지의 시종이 아니고?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2006년 사진의 원본이 공개됐고 앨범에 함께 실린 4장의 사진중 왼편에는 고종과 순종의 사진이, 오른편에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 있으며 아랫쪽에는 흥선 대원군의 사진 2장이 배치됐다.

특히 명성황후 추정 사진 설명문에는 필기체로 'Die ermordete Königin'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시해된 왕비'라는 뜻이다. 대원군과 사진의 배경이 정확히 일치하며 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점, 유순한 눈빛과 다르게 날카로운 인상이 기록과 일치함으로 명성황후의 실물 사진이라는 의견이 있다. 서울대학교 이태진 명예교수는 여성 사진의 뒷배경이 같은 사진첩의 대원군 사진 속 배경과 똑같아 명성황후가 함께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명성황후를 직접 접견한 드 게르빌이라는 프랑스 여행작가가 1차로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10월호에 사진과 함께 명성황후라 소개했고, 1895년 12월 14일자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아메리칸>에 쓴 ‘명성황후는 왜 시해됐나(Why Queen Min Was Murdered)에도 나왔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첩인 초선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명지대학교 김차규 교수는 사진 속 여인이 평복을 입었으며 뒷배경이 같은 대원군 사진이 임오군란 뒤 중국 억류 때 즐겨 입은 중국풍 복식 차림이란 점을 들어 대원군을 수행한 시종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또한 동(同)대학교의 조효순 명예교수는 황후는 평상시 소례복차림이어야 하는데 머리 위에 올린 가채에 떨잠 장식이 없고, 저고리 위에 황후가 입는 당의가 없으며 홑치마가 아닌 두벌의 치마를 입어야해서 궁중 복식의 예법에 맞지 않아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것도 그냥 홑치마가 아니고 속이 비칠정도로 얇은 시스루 치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치마속으로 발과 다리가 보인다...

의친왕의 딸 이해원 여사는 대원군의 첩인 초선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확실히 오른쪽 이래의 대원군사진의 카페트와 뒷배경이 같아 같이 찍은것으로 보이며[68] 대원군사진은 복장을 보면 임오군란이후 청나라에 억류된뒤 귀향하여 운현궁에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명성황후가 출궁해서 운현궁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는 말이 되는데 조선시대에 왕비가 무려 시스루치마를 입고 출궁해서 시아버지를 만나고 사진을 찍었다는 얘기가 된다. 시스루차림을 하지 않았더라도 왕후가 궁밖으로 출궁하는것은 드문일이고 만날려면 왕이나 왕비의 가족이라해도 그 가족이 입궁해서 알현하는것이 일반적이므로 대원군이 입궁해서 같이 찍는게 자연스럽다.

궁안이라도 다른사람들 눈이 있는데 실외를 시스루치마차림으로 돌아다니긴 어려웠을것이다. 대원군의 중국식 복장으로 보아 청나라 억류 이후로 추정되는데 그후 권력에서 배제되어 입궁한적이 거의 없다. 입궁해서 찍었더라도 관복을 입지 저런옷을 입고 입궁하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는 철천지 원수지간이지 한가롭게 가족사진이나 같이 찍고있을 사이는 더더욱 아니다. 대원군이 암살시도를 할 수도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명성황후가 암살위험을 느낄것인데 그것을 감수했을리가 없다. 시아버님하고 한바탕한다음에 찍어서 표정이 저 모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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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월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기사로 호머 헐버트가 썼다. The Corean Empress Who Was Murdered라는 설명으로 시해당한 한국의 왕비란 뜻이다. 호머 헐버트는 지한파 미국인으로 고종황제의 측근역할을 했던사람이다. 이 사진이 명성황후라는데 힘을 실어주는 증거중 하나다.

9.1.4. 기타

  • 사진을 찍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에, 사진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명성황후는 자신의 특집기사를 쓰러 외국 특파원이 방문했을 때, 사진이 찍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유는 첫번째로 암살위협이다. 당시 명성황후는 암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벽 5시까지 잠들지 않았으며,[69] 침실이 여러 개 있었고, 침실에도 비밀문이 있어 비상상황시 빨리 피신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소용이 없었지만... 어쨌든 이런상황이니 당연히 외모를 밝히는 것을 꺼렸다. 그런데 세자가 사진을 찍자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사진자체를 혐오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반대의 이야기도 있는데 이사벨라 비숍여사에 따르면 사진찍기를 좋아했다는 언급이 있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명성황후가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당대에는 상당히 미인이었으나 어릴적 앓았던 곰보 때문에 얼굴에 자국이 남아있었다고 종친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또 당시 명성황후는 서양 부인들이 사용하던 화장품을 공수해 사용했는데, 너무 진하게 발라서 납중독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그만큼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어느정도 있었던듯 하다.
  • 일본측의 훼손설이 있다. 고종은 명성황후 사후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사진을 찾기도 했으며 끝내 찾지 못하였다. 고종이 없는사진을 찾으려고 거액을 현상금을 걸을리도 없으니,[70] 을미사변 직후 일본측에서 사진을 없앴을수도 있다. 일제의 사후대응은 발뺌이었고 흥선대원군이 사주한 국내권력다툼으로 인한 정변으로 꾸미려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낭인일본군 장교에게 주살되었다. 자기들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데 한밤중에 목격자도 없는 후미진 곳에서 조용히 암살한 것도 아니고 일본식 복장을 입은 인원 다수가 전투를 벌이며 일국의 궁전에 쳐들어가 낭인들에게 둘러싸인 왕후를 살해했고, 그때는 해가 솟아오른 아침이었다. 수많은 궁인들과 구한국 군인들 심지어 서양인까지도 목격하는 데서 일을 크게 벌였으니 일본은 초조하게 제발 저리면서 할 수 있는 한 최대 은폐를 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하며 그 중 한 방법으로 그날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명성황후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없애거나 훼손시키고 궁녀로 둔갑시키는 한편, 일본인은 조선의 왕비를 죽인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증거인멸을 목적으로 살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에 주한일본공사의 명령으로 궁궐 안에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워버리기까지 했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9.2. 초상화

9.2.1. 명성황후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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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영정. 독립정신에 실려있던 사진과 외모가 흡사하다.

9.2.2. 민씨부인(閔氏夫人)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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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공개되었다. 역시 진위 여부는 불명. 단순히 족자에 민씨부인(閔氏夫人)이라고 써진 것에 대하여 명성황후로 추측하는 것인데, 그냥 민씨 성을 가진 일반 부녀자일 수 있는 것이다. 또, 왕비가 일반 부녀자 같이 머릿수건을 쓰고 있을리가 없다. 그림의 스타일 또한 전통적인 한국화 초상화와는 젼혀 다르고, 서양화 화풍이 많이 가미되어 있어 20세기에 들어선 후에 그려진 그림으로 보인다.

9.2.3. Le petit Parisien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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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Le petit Parisien 1895년 부록의 인물화로 중국풍의 삽화다. 설명이 LA REINE DE COREE로 한국의 왕비란 뜻이다. 실제모습하고는 차이가 있는 상상화로 여겨진다.

9.2.4. Novoe Vremy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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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Novoe Vremy 1895년 10월 21일자 별지 8쪽의 인물화이다. 시해당한 조선의 황녀라는 설명이 기사에 나와있다. 역시 중국풍이다.

10. 창작물에서 나오는 묘사

명성황후 민씨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미 1965년작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를 비롯해 2001년작 동명의 드라마는 명성황후 민씨를 미화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다만 드라마 자체는 수작인 명작드라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문제다.

앞서 말한 드라마 이후 명성황후(뮤지컬)에서 미화의 정점을 찍는다.

조선총잡이에서도 나온다. 조선총잡이에선 이전의 명성황후 드라마와 달리 미화없이 사실에 맞게 표현했다. 조선총잡이를 맡은 감독은 공주의 남자를 감독했던 사람인데, 여기서도 수양대군한명회를 사실에 맞게 묘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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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가와 타츠야 작가의 만화 러·일전쟁 이야기에서는 저렇게 프리저같은 표독한 눈매를 한 악녀로 등장한다(…). 요새 밝혀진 진상을 생각해보면 저 표정도 의외로 어울린다...? 오른쪽에서 사자후를 내지르는 사람은 흥선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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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좌익(말 그대로 업계 최좌익)성향인 야스히코 요시카즈 작가의 왕도의 개에서는 기품있지만 무시무시한 인물로 등장. 청나라 측 고문으로서 조선을 제 안마당처럼 여기는 위안스카이조차 그 면전에서는 쩔쩔 맬 정도로 만만치 않은 위엄을 지녔지만, 정작 백성은 굶주리는데 불꽃놀이 같은 대규모 행사를 벌여 국고를 탕진하는 것은 물론이요, 나름대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하던 김옥균을 암살하고, 조선으로 실려온 김옥균의 시체를 토막내어 대원군이 보라고 양화진에 걸어놓는 등 명성황후 실체 이상가는 잔혹한 왕비로 묘사된다. 어느 쪽이든 일본에서는 좋게 보지 않는 듯. 지금은 조국의 후신인 나라에서도 부정적인 재평가를 받으니 일본에서 안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문제될 거 없다. 같은 만화에 함께 등장하는 고종은 명성황후와 위안스카이에게 눌려 지내는 완전 쪼다에 무능력자로 나온다.

카카오페이지에서 김영오작가가 연재한 요괴난전에서 등장하며 오라버니의 죽음과 힘들게 얻은 아이의 죽음을 흥선대원군의 짓이라 생각해 그를 증오하고, 자신과 척족을 지키기 위해 흥선대원군과 싸우며 모든 권력을 취하려 한다.
최은희 주연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일본 자객들에게 맞서 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이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몬스터넷의 온라인 게임 이터널시티의 캠페인에서 중요한 인물로 나온다. 캠페인 자체가 과거로 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것을 막는 내용이며, 게임이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다보니 당시의 대중적 인식에 따라 명성황후를 마치 위인처럼 다루고 있다.

녹두꽃에서 김지현이 연기하였다. 여기서 정치 권력에 집착하며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의 승리를 믿거나 동학운동을 왕권에 방해되는 요소로 생각하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11. 명성황후를 연기한 배우

12. 기타

비숍여사의 기록에 의하면 특이하게도 미국식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궁녀들이 골초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딱히 이상하지는 않다.

2018년 9월 구한말 왕실 의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에게 하사됐던 명성황후의 부채가 134년 만에 알렌 후손의 기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고 한다. [단독] 명성황후 부채 134년 만에 귀환…알렌 후손 기증


[1] 광무(光武)의 칭제 이후 황후로 추존 되어 시호를 받았다. 죽은 후 황후로 추존 되기 전까진 '왕후 민씨'라고 불렸다.[2]경기도 여주시 능현동[3] 이게 사실이 맞는지는 논란이 있다. "자영"은 줄리에트 모리오의 운현궁, 정비석이 쓴 "소설 민비" 등에서 나온 작명이라는 것이다. 다만 정비석은 창작이 아니고 어느 연구자의 이야기를 듣고 적었다고. 다른 이름으로 유력한 것은 아영으로 학술자료의 기본이 되는 열성왕비세보 열성황후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列聖皇后王妃世譜)에는 아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보니 변경된 것으로 본다고 '자영'을 미는 중. 그 외에 아명은 당시 항렬을 따라서 정호였다는 말도 있으나,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다른 항렬자를 사용한 예도 있어서 확실한 증거가 없다. 본명이 자영이라고 사전에 등록된 경우는 많지만, 정식사료가 아영인 것으로 봐서는 별도의 학술적 근거보다는 여흥 민씨 쪽 족보에 따른 것으로 추정 중. 사실 조선시대엔 기생과 같은 특수한 경우(그것도 명목상이다.)를 제외하면 여성은 이름을 갖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족보에도 이름이 적히지 않았기에 추정이 어렵다. 그나마 소설이 출처인 자영이라는 이름도 아명으로 전해진다.[4] 사실 명성왕후의 '명성'은 明, 명성황후의 '명성'은 明으로 '성'의 한자가 다른데, 이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5] 시해가 아니다. 시해는 부모나 임금을 죽였음을 말하는데 명성황후는 일본인의 국모에 해당하지 않는다. 주체가 일본인인 것을 의도적으로 감추는 단어로 살해가 올바른 표현이다.[6] 심지어 오페라로 제작되는 웃지 못할 사태까지 벌어졌었다.[7] 단 청나라 군대 파견 요청이 중전 민씨가 아니라 고종이라는 주장도 있다.[8] 양력 11월 17일[9] 자시: 밤 11시~ 새벽 1시[10] 현 도로명 지명은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 71이고 구 지번 주소로는 여주시 능현동이다.[11] 명성황후의 본명을 두고 논란이 있다. 조선시대엔 기생의 기명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서에 기록되지 않고, 여성은 당연히 이름을 갖고 있으나 다른 명칭으로 불릴 경우가 많고, 남성보다는 평소에 이름을 사용하는 빈도가 낮아 보이며, 족보에도 결혼을 하면 이름이 적히지 않고, 남편의 이름만 기록되어 추정이 어렵다. 그나마 소설이 출처인 자영이라는 이름도 아명으로 전해진다. 우선 "자영"은 줄리에트 모리오의 운현궁, 정비석이 쓴 "소설 민비" 등에서 나온 작명이라는 것이다. 다만 정비석은 창작이 아니고 어느 연구자의 이야기를 듣고 적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 유력한 것은 아영으로 학술자료의 기본이 되는 열성왕비세보 열성황후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列聖皇后王妃世譜)에는 아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보니 변경된 것으로 본다고 '자영'을 미는 중. 그 외에 아명은 당시 항렬을 따라서 정호였다는 말도 있으나,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다른 항렬자를 사용한 예도 있어서 확실한 증거가 없다. 본명이 자영이라고 사전에 등록된 경우는 많지만, 정식사료가 아영인 것으로 봐서는 별도의 학술적 근거보다는 여흥 민씨 쪽 족보에 따른 것으로 추정 중.[12] 감고당 이씨는 명성황후가 간택된지 한참 뒤인 1874년에 민승호 암살 사건에 휘말려서 같이 암살된다.[13] 고종은 효명세자의 양자로 입적(입승대통)이 됐기 때문에 흥선대원군은 법적인 아버지가 더 이상 아니었다. 즉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이 혼인관계였던 것이 아니다.[14] 신부 후보들의 신상정보와 사주, 조상들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문서[15] 그러니까 명성황후는 시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같은 항렬이다. 고종이 즉위 전 어릴 때 이미 명성황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안국동 이모'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고종은 이모뻘과 결혼한 것이다.[16] 승정원일기 11월 8일 기사에는 大便不通之症이라고 쓰여 있다. 추정컨데 묘안증후군으로 추정된다. 세계적으로 1년에 항문이 없는 신생아가 5천 명 정도인데 병원에서 항문을 만들어 준다고. 아이의 증상이 묘안증후군으로 인한 항문폐쇄증인지 단순한 소화불량인지는 추가바람[17] 신 안동 김씨들이 서울 장동에서 세도정치를 해서 장동 김씨라고도 부른다. 오타 아니다.[18] 궁녀들이 떼로 죽은 일이 있어, 이 때 죽은 줄만 알았다는 설이 있다. 또는 살아있어도 돌아오지 말라고 국장을 선포했다는 설도 있다.[19] 청의 원군을 요청한 것은 윤태준과 접촉을 마친 고종이란 설이 있다. 2007년에 발견된 문헌에선 당시 명성황후는 도피하는데 바빠서 청나라와 접촉할 여유와 능력이 안 되었다. 그리고 시기상으로 본다면 청에 원군을 요청한 것은 영선사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20]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 영국의 여류 여행가로 많은 사진집과 기행문을 남겼다. 중국에 갔다가 1894년 조선에 왔는데 3년 체류하는 동안 청일전쟁, 동학농민전쟁, 연해주 이주 조선인 등 궁중 문화부터 서민문화까지 다양한 체험을 책으로 남겼다. 책 제목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었다. 조선에 올 당시 벌써 나이가 60대 중반이었다.[21]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1854~1925): 프랑스 국적이지만 독일인이다. 알자스-로렌 출신으로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고용돼 조선으로 건너왔다. 서양 귀빈들이 늘어나 궁중에 서양 요리사로서 궁에서 일했다. 고종 부부에게 점차 신임을 얻으면서 1895년에는 덕수궁 근처에 황실 소유지까지 하사받게 된다. 그 자리에 손탁 호텔을 지어 운영하나 을사조약 이후 조선이 망하자 고국으로 돌아갔다.[22] 훗날 차르가 되고, 러시아 혁명 때 처자식과 함께 죽는 그 니콜라이 2세가 맞다.[23] 산조는 순사로 테러 이후 잡혀 무기징역을 받은뒤 테러 4달만에 홋카이도 감옥에서 병사한다. 러시아와 일전을 각오하게 만들 정도로 일본에 큰 위기를 안겨줬던 인물. 놀란 당시 일본인들은 산조란 이름을 쓰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날 정도로 공포감에 떨었으나, 러일전쟁에 일본이 승전한 후 재평가됐다.[24] 여담으로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때 니콜라이 2세의 피가 묻은 옷이 증거품으로 남았는데, 이게 훗날 살해당하고 암매장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시신을 찾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다.[25]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고종이 사방에 구원을 요청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 중 한명으로 독일 제국빌헬름 2세가 있었다.빌헬름 2세는 고종의 간절한 구원 요청에 한국 사정에 좀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절엔 해외 진출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빌헬름 2세 시절도 동북아시아에서 집적거릴 여건은 안 돼서 소득은 없었다.[26] 훈련대 병사들과 순검들간에 싸움이 붙었다는 말도 있지만 결정적인 사건은 훈련대의 후원자인 박영효가 반역죄로 몰려서 일본으로 망명하면서였다.[27] 시위대는 편성기 겨우 3개월째인데다가 무기와 탄약도 빈약했다.[28] 갑오개혁 때 '왕세자'를 '왕태자'로, '왕비'를 '왕후'로 격상했다.[29] 이 당시 민씨는 대행왕후라고도 불렸는데, 여기서 대행(大行)은 시호가 확정되기 전까지 임시로 쓰는 칭호다.[30] 일본 경찰관이 사살했다고 함.[31] 호레이스 앨런을 비롯한 구미의 인사들이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고 한 사건인데 일본은 구미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데 우리가 간섭하는게 뭐가 문제냐?란 논리로 미우라와 낭인들을 석방시켰다.(...)[32]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흥선대원군이 일본대사관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왕비 암살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폭로했다.[33] 유길준은 40년지기 친구 윤치호가 일기에서 유길준이 낭인들에게 협조했다고 기록했다. 친구 덕에 강남 아니 지옥간 셈.[34] 참고로 이준용은 명성황후 때문에 죽을 뻔 했는데, 왜냐하면 이준용과 흥선대원군의 쿠데타 시도가 들통났기 때문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형인 흥친왕은 반란에 연루되어도 처벌 받지 않았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은 반란이 발각되었을 때 가차없이 죽었다. 흥친왕의 아들인 영선군 이준용이 반란에 연루되자 죽일까 말까가 논란이 된 것이다.[35] 러시아 제국차르 체제나 독일 제국의 카이저 체제와 같은 전제왕권을 추구했다고 한다. 민씨 일가가 친러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종 자체가 왕권 강화에 관심이 많았다.[36]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도 알렌의 소개로 미국 전기회사 (에디슨의 회사)에 전차와 전기에 대한 권리를 팔아먹기도 했다. 민영화의 시초라 할 수 있을 것이다.[37] 운산금광의 개발비가 당시 한해 예산을 훨씬 능가하는 금액이어서 직접 채굴이 불가능한 상황이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팔린 건 맞다.[38] 이에 살아생전 순종을 위한 제사 등에 아낌 없이 재물을 써서 사치했다는 말이 있다.[39] 조선 시대엔 여자의 질투를 칠거지악 중 하나로 여길 만큼 금기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해도 문제삼는 것도 있다. 혜경궁 홍씨효정옹주도 남편들의 후궁이나 첩 문제 때문에 시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질투를 안 하냐고 질책받기도 했다. 즉 적당히 해라[40] 고종이 후궁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승은을 입은 궁녀가 있으면 그 다음날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야사도 있다. 참고로 순헌황귀비는 쫓겨났다가 을미사변 이후에야 다시 들어왔다.[41] 근데 사실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서 사는 경우가 아예 없지도 않았다. 헌종의 후궁 숙의 범씨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그 예시. 그렇지만 명성황후는 단지 질투 때문에 무작정 후궁들을 추방했다는 게 문제.[42] 잔 다르크에 대한 모욕이다. 실제로 조선의 잔 다르크라며 명성황후에 대한 전시회를 열었던 사실이 몇몇 커뮤니티에서 알려지자 댓글들 대부분이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1, 2.[43] 이는 황족인 명성황후가 차관형식의 뇌물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거절했다는 의견도 있다. 정 돈이 필요하면 왕실 내탕금 등 필요한 돈을 조달할 방법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44] 또 카펫에 쓰인 표범가죽은 조선표범이 아닌 중국 표범이었다.[45] 심지어 기형아 출산도 했었다.[46] 추후 명성황후의 시해에 가담하였다.[47] 저자인 정환덕은 과거에 급제 못하다가 역술로 점 봐준다고 하여 출세한 자이다.[48] 당대인이 그 시대를 겪고 서술한 자료.[49] 매천야록의 신빙성을 말하는 것과 별개로 이 항목에선 다양한 정황들을 근거로 명성황후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천야록의 신빙성에 대한 논쟁이 무의미하다곤 할 수 없다. 하지만 매천야록이 신빙성 없다면 옹호론에 서술된 명성황후에 대한 인물들의 평가도 역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매천야록의 신빙성을 의심한다는 것은 모순이다.[50] 다만 이것은 납득한만 한게 있는게 후사를 낳은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실제로 명성황후는 여러 번 후사를 낳으려 했으나 갓 태어난 아기들은 얼마 못가 사망하였는데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왕조 국가에서 왕비가 가장 중요한 일은 후사를 낳은 일인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후사를 낳으려고 애를 쓸 것이다.[51] 사실 조선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국제 정세를 잘 몰랐다. 대표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인 일본조차도 맨처음에는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예가 있다. 특히 중국과 일본에 비해 폐쇄적인 외교정책을 고집해 서양과의 교류가 없었던 조선은 국제 정세를 더욱 모르는 상황이었다.[52] KBS 역사저널 '그날의 명성황후' 편[53] 실제로 중전에 간택된 것도 현명하다는 이유였다. 무엇보다 똑똑하지 않았다면 그때까지 의회정치를 멀쩡히 하던 일본이 굳이 여러 리스크를 감수하고 주권이 아직 존재하는 나라의 왕비를 궁궐까지 침투해서 죽일 이유가 없다.[54] 조선시대 매관매직 문서 발견 한때는 매천야록을 쓴 황현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도 있었지만 사료가 발견됨으로서 고종 시기에 매관매직이 이뤄진 것은 확실하다.[55] 아래 항목에 있는 민영기[56] 그는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남작 자리도 거절했다. 1930년 죽을 때까지 민족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죽었다.[57] 사실 2000년 이후로 대한제국기에 황후로 추존된 조선의 왕비들의 황후로서의 명칭은 네 글자보다는 다섯 글자로 된 경우가 주로 쓰이는데, 명성황후만은 '명성황후'로 부르는 경우가 적다.[58] 한국의 왕비 중에 '성+비'로 된 명칭이 공식명칭 비슷한 위치에 있는 예외적인 사례는 궁예의 아내 강비뿐이다. 정사에 나온 '부인 강씨'는 명칭만 봐선 왕비임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편이다.[59] 세조선조, 인조 등 평가가 엇갈리는 일부 군주들 또한 그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서는 정식 명칭이라 볼 수 있는 묘호가 아닌 본명이나 왕자 시절의 칭호가 폄칭으로 사용되는 일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사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사이에선 아예 언급하기 곤란한 멸칭으로 명성황후를 부르기도 한다.[60] 일본과 조선은 대마도를 거쳐 거래했었는데 일본이 대마도로 보낼 때는 일본갑 조선을로 보냈는데 대마도가 자체 필터링을 거쳐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보낼 때는 조선갑 일본을로 바뀌었고 반대로 조선에서 대마도 대마도에서 일본으로 보낼 때는 마찬가지로 필터를 거쳐 조선갑 일본을이 -> 일본갑 조선을로 바뀌어 일본 조정에 보내진다. 이는 조선 일본 양국의 암묵적 용인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대마도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되기 위해 위조한 것도 있지만 대마도 입장에서는 조선일본의 사이가 좋아야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에 껄그러운 내용들을 순화해서 좋게좋게 넘어가게끔 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로는 상황이 바뀌어 일본이 직접 조선으로 외교문서를 보내자 서계거부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 이후 운요호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여러 차례 외교적 시비가 있었고 이때 일본에선 정한론이 대두되는 등 조선에 대한 악감정이 커졌다. 이 외교적 시비와 '일본은 상국, 조선은 하국'이란 인식에 나온 명칭인 것.[61] 민회빈 강씨의 경우는 현재 '강빈'이라는 통칭이 '민회빈'이라는 시호보다 더 많이 불린다.[62] 현대의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대통령들을 비하하는 호칭은 차고 넘치지만, 이러한 호칭들은 공식명칭이 아니니 공식 자료에선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해당 명칭들이 해당 대통령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63] 국역본에선 원문에 없는 '성+비'로 된 명칭을 사용해 표기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이 때문에 '성+비'로 된 명칭이 자주 쓰인 줄 잘못 아는 경우도 있다.[64] '연호+제' 형태의 황제호칭은 명, 청대에 황제 한 명 당 한 가지 연호만 쓰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되면서 정착된 호칭이지 직전 원나라 까지만 하더라도 (죽은) 황제의 호칭으로 묘호를 압도적으로 많이 썼다. 그래서 명목상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이었던 한반도 왕조들에서는 원칙적으로는 쓸 수 없었고 심지어는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을 친다고 무고했는데 그 근거 중 하나로 바로 제후국 주제에 묘호를 쓴다는 것을 들 정도였다. 일단 정응태가 무고한 것은 밝혀졌으나 묘호 사용만은 사실이었기에 이것만은 중국에 고려 때부터 이어온 실수였다고 싹싹 빌어야할 정도였다.[65] 파일:명성황후 추정사진의 알레베크 사진엽서.jpg 사진아래에 설명이 불어로 Dame du Palais. Costume de ceremonie로 써있다. 이는 정장차림의 궁중여인이라는 뜻으로 궁녀로 해석된다. 왕비였으면 여인을 뜻하는 Dame란 단어 대신 왕비를 뜻하는 reine을 썻을 것이다. 더구나 샤를 알레베크는 자신이 만든 총 48장의 알레베크 사진엽서에 명성황후 장례식 사진을 다수 실을 정도로 명성황후 장례식을 중시했는데 명성황후를 궁녀로 설명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1900 파리 엑스포에 기념품으로 사진을 팔았는데 왕후를 궁녀로 설명한 사진을 팔았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그는 1897년 한국에 처음 왔는데 그 때는 이미 을미사변 이후이다. 다만 연대상으로 더 빠른 조선국귀현초상에 이미 같은 그림이 있다는 점을 볼 때 알레베크 사진엽서의 사진들이 다 그가 찍은것인지는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사진에는 고종황제, 순종황제의 사진도 있기 때문에 명성황후가 있는것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탁지부 대신 이용익이나 친러파 권력자 김홍륙 같은 정부 고관부터 농민, 아녀자, 아이, 기생같은 다양한 다양한 사람들의 사진도 있어 역시 추론을 더 어렵게 한다. https://fr.wikisource.org/wiki/Souvenir_de_S%C3%A9oul,_Cor%C3%A9e_:_1900[66] 파일:궁녀로 소개된 일제시대 명성황후 추정사진.png 다른 명성황후 추정사진 엽서로 한일통신합동기인 1909년의 엽서로 An Old Woman in the Corean Court, 韓國宮中の老女(한국궁중의 늙은 여자)라 쓰여있다.[67] 사실 사진 뽀샵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스탈린예조프의 사진이나 쑨원장제스의 사진등 옛날의 흑백사진에도 뽀샵은 있었다. 궁녀의 사진에 배경을 편집까지 했으며 궁궐아녀자의 사진이 보통 궁안 건물을 배경으로 하거나 복도나 마루같은 곳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궁궐내의 서재내지 서고로 추정되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것도 독특한 일이다.[68] 심지어 뒷배경의 주름까지 같다.[69] 조선 궁궐의 아침일과가 보통 새벽 5시~6시쯤 시작되는것을 감안하면, 거의 밤을 샜다는 이야기가 된다.[70] 그러나 꺼꾸로 생각해보면 그 만큼 사진이 없으니까 현상금까지 걸었어야 할 정도 일 수도 있다. 물론 남편인 고종황제가 전혀 그런거 없다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면 아예 찾으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니 있긴 있었다고 볼수도 있다.[71] 이로써 김영애는 명성황후만 3번 맡게 된다.[72] 최명길의 경우 연장 출연에 반대한 이미연의 대타로 캐스팅 된 것이고, MBC 한미백년에 이어 두 번째로 명성황후 역을 맡게 된다.[73] 드라마에서는 최명길이 을미사변을 당하지만, 뮤직비디오에서는 이미연이 중년의 명성황후 역까지 맡아 을미사변을 당한다.[74] 아역 시절이던 1982년 풍운에 출연하여 명성황후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