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러시아 공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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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 1차 시도 (춘생문 사건) · 2차 시도 (아관파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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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 韋貝 | Карл Вебер | |
<colbgcolor=#FFCC33><colcolor=#800080>본명 |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 |
카를 프리드리히 테오도어 폰 베버 (Carl Friedrich Theodor von Waeber) | |
한국어명 | 위패(韋貝) |
출생 | 1841년 6월 17일 |
러시아 제국 쿠를랸디야현 그로빈군 리바바[1] | |
사망 | 1910년 1월 8일 (향년 68세) |
작센 왕국 마이센군 라데보일시 니덜뢰스니츠[2] | |
국적 | 러시아 제국 |
학력 |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동양어학부 (학사) |
직업 | 외교관 |
주요 경력 | 청국 천진주재 러시아 영사 주조선 러시아 총영사 주조선 러시아 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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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에 활동한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한 러시아 총영사로 활동하면서 고종과 친분을 쌓았다. 을미사변이 일본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폭로하고 이후 춘생문 사건에 관여했으며 1896년에는 고종의 아관파천을 도왔다.2. 생애
1841년 6월 17일 리에파야에서 독일계 러시아인의 후손으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 동양학부 시절 청나라 유학을 경험한 뒤 1865년 외교관으로 임용된다. 개인적으로 동양의 문화나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탓에 청나라로 파견되어서 베이징 주재 공사관 서기와 톈진 영사를 거쳐서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알렉산드르 3세의 전권대사로 활동하였고 1885년 조선 공사로 한양에 부임한다.1894년 잠시 청나라로 파견됐다가 동학농민운동 이후 조선의 정세가 급변하자 다시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예전부터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베베르는 러시아 총영사로 재임하면서 고종과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고 총애를 얻었는데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베베르가 조선에 머물던 시기 고종이 그의 친조선 성향을 높이 평가하며 그에게 고액의 선물을 제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외무성은 베베르가 편향된 시각을 갖고 멋대로 행동한다고 판단해 책임자 교체를 결정한다. 결국 1895년 7월 베베르를 멕시코 공사로 발령하고 대신 알렉세이 시페이예르(Алексей Шпейер, 1854–1916)[3]를 후임 공사로 파견했는데 지나치게 조선에 친화적이었던 베베르를 대신해서 비교적 중립적인 아시아파 외교관 시페이예르를 파견하려고 한 것. 이것을 고종과 베베르가 한 뜻으로 반대했으며 베베르는 고종의 친서까지 전하면서 반대하고[4] 시페이예르가 한양에 도착했을 때에도 한양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베베르의 친조선 성향을 불만스럽게 여기던 주일 공사 미하일 히트로보(Михаил Хитрово, 1837–1896)가 사망하면서 시페이예르는 대리공사 직무대행이 되고 베베르는 2년 동안 더 한양에 남아있을 수 있게 된다.[5]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력하고 갑오개혁을 실시하면서 조선에서 세력을 확대하자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삼국간섭으로 일본에게 압력을 행사하면서 일본을 견제하는데 힘을 쏟는다. 삼국간섭 이후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 관료들이 추방되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러[6]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이라는 무리수적인 만행까지 저지르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잃지 않기 위해 발악한다.
을미사변 이후 공포에 사로잡힌 고종과 논의해 베베르는 첫 번째 시도로 미국공사관으로 고종의 신병을 옮기려 하다가 밀고자에 의해서 발각되어 실패하는데 이것이 춘생문 사건이다. 이후 고종을 호위할 러시아 해군 병력이 인천항에 도착하자 마침내 1896년 2월 고종의 거처를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는데 성공하니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 이후인 1896년 5월 14일 베베르는 일본 영사 코무라 주타로와의 합의를 통하여 러시아의 한반도 내 우위를 인정받았다. 일본은 러시아가 4개 중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승인하였으며 아관파천을 통해 김홍집 내각을 대체한 새로운 친러 내각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것이 베베르-고무라 각서 혹은 고무라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베베르-소촌 각서라고 한다.
1897년 러시아 제국 외무부 장관에 임명된 미하일 무라비요프(Михаил Муравьёв, 1845–1900)는 베베르가 너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는데 불만을 품고 알렉세이 시페이예르를 다시 한양에 부임시킨다. 이후 베베르의 행적은 다소 불투명하지만 러시아로 돌아간 이후에도 베베르는 대한국 외교에 여러모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니시-로젠 협정에도 적게나마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902년 니콜라이 2세의 명령으로 고종에게 성 안드레이 훈장을 수여할 때에도 한양에 방문해 1903년 5월까지 한양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학계에서는 러일전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때 베베르가 러일전쟁과 관련해서 고종 측에 충고를 했을거라 추정된다. 이후에는 저술 활동으로 여생을 보내다[7] 1910년 1월 8일 독일에서 사망했다.
3. 여담
- 아관파천에서도 보이듯이 고종과 친분이 정말로 깊었는데, 1903년에도 대한제국을 방문하여 고종과 대담한 적이 있다. 둘 사이에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야 미궁이지만, 러일전쟁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던 시기였던만큼 아마 두 강대국 사이의 충돌에서 한국이 어떤 외교적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종이 베베르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하고 있다.
- 아시아 문화에 대한 애정이 꽤 깊었다고 하며, 특히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지 한국어 이름이 있었다. 음차 표기 위패(韋貝)가 바로 그의 한국어 이름이다.
- 독일계 러시아인임에도, 막상 한국에 머무를 당시에는 한국에 거주했던 독일인들과 사이가 별로였다고 전해진다.[8] 사이가 안 좋았던 정확한 이유는 미지수이지만 베베르의 아내가 '독일 외교관들이 음란하게 논다'라는 소문을 내고 다녀서 그렇다는 썰도 있다.[9]
- 베베르와 따라온 인물이 바로 후일 한국 초기의 서구식 호텔[10] 중 하나인 손탁호텔을 세운 마리 안토아네트 존타크(Marie Antoinette Sontag)이다. 존타크의 정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있는데,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베베르의 처남의 처형이다. 존타크는 수시로 고종을 방문하면서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 등의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이 때 핑곗거리로 활용한 것이 바로 커피이다. 고종이 커피를 좋아한다고 소문난 것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1] 현 라트비아 리에파야(Liepāja) 직할시.[2] 출처. 현 독일 작센 자유주 마이센군 라데보일시 니덜뢰스니츠(Niederlößnitz).[3] 문헌에 따라서는 쉬뻬이에르·슈페이예르·스페에르로 표기.[4] 베베르가 다른 지역으로 부임하게 되자 고종과 명성황후가 '현직 공사(베베르)의 유임을 원한다'는 편지를 니콜라이 2세에게 써서 어떻게든 베베르의 임기를 연장시키려 했다.[5] 관련 기사.[6] 말년의 매국노 포스가 커서 그렇지, 18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완용은 친러와 친미 세력을 오가면서 일본을 견제하는데 힘을 쏟는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을 몰래 러시아공사관으로 빼돌리는 임무를 수행한 당사자도 바로 이완용.[7] 본인이 한국과 중국에 체류했던 경험을 살려서 1908년 한국어와 한자 관련 책을 출간하였다고 한다.[8] 이게 당연한 게 독일계 러시아인이라 해도 이미 조상 대에 독일에서 러시아로 이주한지 오래 됐으므로 본인을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한다. 독일계 러시아인이 독일에 대해서 특별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었다. 1차 대전 당시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과 대치했던 러시아군 사령관 파벨 렌넨캄프(Павел Ренненкампф)도 독일계 러시아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노프 황가의 1대조는 독일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표트르 대제 이래 독일 제후국 왕가와 여러 대에 걸쳐 혼인을 맺었기 때문에 혈통으로만 보면 로마노프 황가는 독일계이다.[9] 주한 외국인 사교 모임에서 독일인 외교관들이 계속 배제 당하자 수소문한 결과 러시아 공사관에서 자신들이 영사관에서 난교 파티를 벌인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후 사람들이 자신들을 왜 꺼리는지 알게 되어 꼭지가 돈 독일 영사가 중재를 위해 영국 공사를 데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쳐들어가 러시아 공사 측에서 수습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여담으로 이 독일 영사는 그해 서양인들이 모이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산타 복장을 했다고 한다.[10]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은 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