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3 14:52:25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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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 조선의 5대 궁궐
경복궁
景福宮
창덕궁
昌德宮
창경궁
昌慶宮
덕수궁
德壽宮
경희궁
慶熙宮
파일:external/pbs.twimg.com/Gn371bnO.jpg 경복궁
景福宮 | Gyeongbokgung

분류번호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면적 432,703㎡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1395년
공식 홈페이지
파일:external/chulsa.kr/1ce2d1dc327f2490183f3837dc6c2f83.jpg
경복궁 전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yeongbokgung_map.jpg
북궐도, 혜촌 김학수, 1975년

1. 개요2. 역사
2.1. 조선 전기2.2. 임진왜란과 조선 후기2.3. 일제강점기 시절2.4. 광복 이후 복원
2.4.1. 1차 복원 사업2.4.2. 2차 복원 사업
3. 복원 논란
3.1. 시멘트 사용
4. 크기에 대한 논란
4.1. 삼문삼조4.2. 황성4.3. 한양성과 북경성4.4. 건축물의 차이4.5. 결론
5. 주요 건축
5.1. 궁성5.2. 외조
5.2.1. 정전 권역5.2.2. 편전 권역5.2.3. 궐내각사 권역
5.3. 내조
5.3.1. 침전 권역5.3.2. 연침 권역5.3.3. 동궁 권역5.3.4. 내전 권역5.3.5. 빈전 권역5.3.6. 건청궁 권역
5.4. 박물관
6. 야간 개장
6.1. 경복궁 별빛야행
7. 기타
7.1. 개량한복 무료입장 금지 논란
8. 관련 문서


1. 개요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 대를 전하리이다.
(戒安佚而存敬畏, 以享皇極之福, 聖子神孫, 繼繼承承, 傳于千萬世矣.)
- 정도전,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 10월 7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이자 조선의 정궁, 법궁이다.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1]소재.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2]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이름을 지은 이는 정도전인데, <시경>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어라. 임이시여, 만 년 동안 큰 복을 누리소서."(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끝의 景福을 딴 것으로 큰 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잔치 끝에 천자에게 바치는 노래였는데, 정도전은 연회 중 대취한 태조가 "경은 이번에 새로 지은 궁궐의 이름을 지어서 우리 왕조가 만 대까지 빛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자마자 즉석에서 일어나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으로 지었다고 한다.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의 이름을 붙인 것도 모두 정도전이 붙인 이름이다.[3]

다만, 정도전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면서 정도전이 경복궁 건축의 실질적 책임자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정도전이 경복궁에 개입한 것은 위치 잡는데 왈가왈부한 것과 건물에 이름 붙인 것 뿐이다. 경복궁 건설을 위해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 설립되었고, 그 책임자로는 조선건국공신이었던 심덕부가 임명된다. 심덕부는 고려시대에 문무 모두에 이름이 있고, 최무선의 화포도 운용해 봤고, 이성계의 9 공신에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아버지라고 하는게 더 알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경복궁 건축을 한 인물은 따로 있다. 바로 환관 김사행(金師幸)이다. 김사행은 원래 고려인이었지만 원나라 환관으로 차출된다. 그런데 김사행이 원나라 환관으로 있으면 있었던 곳이 원의 궁궐 수리를 담당했던 관청 전연사(典涓司)였다. 이후 김사행은 노국대장공주가 고려로 오면서 같이 고려 땅을 밟게 되는데, 이후 최고의 건축전문가로 이름을 알렸으며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환관을 총감독하는 판내시부사까지 올랐다. 이후 김사행은 공민왕릉과 노국대장공주릉의 건설을 주도했고, 이는 이후 조선왕릉의 기본이 된다. 경복궁 건설에 김사행이 차출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진사대부가 지은 궁궐이기 때문에 유교 이념을 반영하여 이전 왕조들의 궁궐에 비해 화려한 장식 없이 수수하고 검소한 형태로 지어졌다. 다만, 현재의 경복궁은 과거의 경복궁과 차이가 있고 이전 국가들의 궁궐도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으며, 실질적 건축 책임자인 김사행이 원나라 황실 건축에서 배웠고 고려에서는 사원 건축 전문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당시 경복궁이 유교 이념을 반영해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의 서원 건축도 불교 사찰건축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 조선 건축이기 때문이다. 건축물의 규모가 작았던 것은 목재의 부족 때문으로 추정될 정도라서 그렇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선왕조의 원찰이었던 회암사의 경우 구조가 경복궁과 상당히 유사하고, 초기에 경복궁에서 사용했다는 청기와도 회암사 터에서 발견된다.

임진왜란 전 조선 전기 동안 조선 왕조의 법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경복궁은 법궁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엄정한 기하학적 공간 분할, 반듯한 축선상의 건물 배치, 정연한 대칭 구조로 설계되었다.[출처] 이궁인 창덕궁(+창경궁)과 양궐 체제를 갖췄는데, 임금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두 궁궐을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그 자리만 출입금지로 묶인 채 200여 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참고로 흥선 대원군이 지은 경복궁과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경복궁의 모습은 당연히 차이가 있다. 세종이 왕자 시절 2층에서 자다가 병이 났다는 등 다층 건물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또한, 근정전에 청기와를 얹었다는 언급 등 차이점이 보인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 왕실에서 제작했다는 석가탄생도 등에서 묘사된 건축 양식을 통해 그 당시의 경복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아래 각주에서도 언급되지만, 최대 규모 5,000칸까지 서서히 확장되었던 이전 건물과 달리 흥선대원군은 단숨에 7,400칸짜리로 중건했다. 단숨에 1.5배 크기가 된 것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해 있다. 가장 가까운 전철역은 경복궁역이며,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안국역이나 광화문역에서도 걸어갈 수 있다. 경복궁 앞길에는 각종 관청이 있어 육조 거리라 불렸으며, 이 길이 오늘날의 세종대로다.[5] 당대에도 국가의 중심 거리였기 때문에 육조 거리는 지금의 세종대로의 폭과 거의 같은 폭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현재 세종대로 중앙에는 광화문광장이 설치되어 있다. 주변에는 청와대, 헌법재판소, 정부서울청사, 주한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있으며 그 유명한 인사동 거리도 경복궁에서 꽤 가깝다.

2. 역사

2.1. 조선 전기

경복궁 입지 결정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진다. 무학대사가 한양에서 궁궐의 터를 잡을 때, 처음에는 청계천왕십리가 합류하는 지점[6]에 터를 잡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지나가던 노인이 "이러, 이 무학 같은 소야."라고 하는 바람에 충격 받은. 놀란 무학이 좋은 터를 묻자 여기서 십 를 더 가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처음 터가 왕십리[7]가 되었고, 노인이 말한 곳이 현재 경복궁 터였다고 한다.[8]

경복궁은 풍수를 고려해서 지어졌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모두 수도로 한양을 지목했지만 무학 대사는 동향을, 정도전은 남향을 주장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무학 대사가 2가지 예언을 했는데, 첫 번째 예언두 번째 예언은...[9] 소 몰던 노인에게 물어볼 정도의 신통력으로 어찌 예언을... 아니면 그 노인의 신통력이 무학대사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했을 수도... 당연히 위의 두 이야기는 야사일 뿐이며 첫 번째 야사는 사실 무학대사가 한양을 지을 때나 경복궁을 지을 때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했다고 해봤자 한양에 대하여 태조가 묻자 좋은 곳이긴 한데 대신들과 백성의 의견을 들어 결정하십시오"라 한 게 전부이다.또한 두 번째 이야기는 정도전이 풍수지리를 괴력난신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두번째 내용은 역시 야사일 뿐이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여가 지난 1394년 12월에 착공되어 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되었다. 흔히 언급되는 명나라의 자금성보다 먼저 지어진 궁전이다. 자금성은 1406년에 착공되어 1420년에 완공되었다. 즉, 경복궁이 자금성을 본따 지었다거나하는 설명은 틀린 설명이다. 완공 후 정도전이 궁궐의 주요 전각인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등의 이름을 정했다.[10] 처음 완공 당시 경복궁의 규모는 390여 칸이었는데, 흥선 대원군 중건 당시 규모가 7225칸이었다는 점을 보면 상당히 작고 조촐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완공 당시 궁궐 중심부의 핵심 시절 위주로 건설되었으며, 궁궐 주위를 구분하는 담장도 없었다.[11] 이후 지속적으로 증설 공사가 이어졌는데, 특히 세종 대에 대대적인 확장 공사가 이루어져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축을 북한산관악산을 연결하는 축선과 일치하도록 서쪽으로 틀어지게 지었는데, 무학대사가 관악산은 '불의 산(火山)'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길 130m 구간만 경복궁과 같은 축선으로 배치하고, 그 다음부터 종로 입구까지는 도로의 중심이 동쪽으로 최대 39m가량 틀어진 구조로 조성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후 1405년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단행했는데, 태종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건설하여 이곳으로 들어왔다. 태종은 경복궁을 매우 꺼려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이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를 명하고 개성을 떠나 한양에 도착했을 때 아직 창덕궁이 완공되지 않아 입궐이 불가능한 상태였는데, 이때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민가에서 일주일 정도 숙박한 후에 창덕궁에 입궐했다. 태종이 경복궁을 얼마나 꺼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사실 그럴만한것이, 경복궁이라는 이름부터 시작해서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의 전각이름을 지은 당사자가 바로 태종이 죽인 정도전이다. 태종 입장에서 경복궁에서 산다면, 매일 잠 자러 들어가야 하는 강녕전이나 출근해야 하는 사정전의 현판만 봐도 누가 떠오르겠는가?

이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태종 11년에 사간원에서 "태조께서 지으신 경복궁을 비워두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는요지의 상소를 올려 태종에게 경복궁에 다시 거처하라고 주청한 일이 있다. 그러나 태종은 꽤 솔직하게 "내가 무인년에 말하기 부끄러운 일을 했는데, 어찌 차마 경복궁에 거처할수 있겠느냐?"며 거절하였다.

태종은 경복궁을 기피하고 창덕궁에서 주로 거처했지만, 경복궁을 방치하지는 않았는데, 큰 의례나 행사가 있을 때 거의 경복궁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 당시 처음 만들어진 창덕궁은 의례를 위한 외조는 매우 조촐하게 건축되었는데, 정전인 인정전은 3칸 규모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때문에 처음에 창덕궁을 건립할 때, 주요 행사는 경복궁에서 치루고 창덕궁은 거의 주거 용도로 이용했던 것 같다. 다만 태종은 아들에게 양위를 결정한 후 퇴위하면서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의 외조를 대대적으로 크게 고쳐짓는 공사를 명했다. 한편 재위 기간 동안 태종은 경복궁에서 큰 행사를 치루기 위해 박자청을 시켜 경복궁의 추가적인 중수 공사를 계속 진행했다. 1412년에는 연못에다가 어찌 건물을 올릴 수 있냐는 신하들의 우려도 불구하고 경회루 건설을 지시했고, 박자청은 이를 실현시켰다. 세자 양녕대군이 친필로 직접 경회루의 현판을 써서 태종을 기쁘게 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다만 태종 대에 건설된 누각은 흥선대원군 때 지어진 현재의 것보다는 작은 규모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경회루 하단의 석조 기둥들은 태종 대에 만들어진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가 흥선대원군 중건 당시 다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후기 경복궁 터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황폐한 가운데 경회루의 석조 기둥들은 남아있는 것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후 세종 대에 거치면서 경복궁은 더욱 대대적인 확충 공사가 이루어졌다. 세종은 태종과 다르게 협소한 창덕궁보다 넓은 경복궁을 선호했다. 선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주로 창덕궁에 거처했지만, 태종이 승하한 후 세종은 경복궁 공사를 명하였고, 집권 중기 이후부터는 거의 경복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봤다. 특히 비만 및 눈병으로 고생하던 후기에는 거의 경복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경복궁에서 세종의 왕도 정치의 흔적이 녹아 있는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가 집현전 전각인데, 왕이나 왕족이 사용하지 않는 궐내각사에 불과한 건물임에도 불과하고 집현전은 경복궁에서도 근정전과 경회루 다음 가는 규모의 크고 아름다운 건물로 건설되었다. 세종 대에 여러 전각이 새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 다소 작게 건설된 사정전(편전) 등의 기존 건물들을 중수하기도 했다. 1431년에는 광화문이 세워졌다.

이처럼 경복궁은 세종 대를 거치면서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 전기 경복궁의 기본적인 형태는 세종 때 완성되었다. 이후 경복궁은 조선 전기 내내 조선의 정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세종대 이후에도 경복궁은 여러 왕을 거치면서 지속적인 증개축을 거쳤다.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기와가 올라가기도 했다.

이후 중종 때 화재로 동궁전이 불탔다. 임진왜란 전 경복궁에 일어난 가장 큰 화재는 명종 때 발생했다. 1553년(명종 8년) 대화재가 발생해 근정전을 제외한 편전 및 침전 구역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이때 조선 왕조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보물과 유산들도 화재로 함께 소실되었다고 한다. 윤원형 등의 지지하에 왕이 독촉한 결과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어 이듬해에 매우 신속하게 중건이 완료되었다.

2.2. 임진왜란과 조선 후기

명종 때 중건된 지 38년 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선조가 파천을 떠나자 도성이 텅텅비게 되면서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은 일본군이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에 의해 약탈과 방화가 일어났고, 명종 때 화재와는 달리 이번에는 전부 소실되고 말았다.
거가가 떠나려 할 즈음 도성 안의 간악한 백성이 먼저 내탕고(內帑庫)에 들어가 보물(寶物)을 다투어 가졌는데, 이윽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으니 이는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公私奴婢)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궁성의 창고를 크게 노략하고 인하여 불을 질러 흔적을 없앴다.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의 세 궁궐이 일시에 모두 타버렸는데, 창경궁은 바로 순회 세자빈(順懷世子嬪)의 찬궁(欑宮)이 있는 곳이었다.
- 선조수정실록 26권 28번째 기사

왜란기의 경복궁은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대로 선조가 파천하자마자 성난 군중들이 궁성과 형조, 장례원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기록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여 경복궁 방화의 주체가 조선 백성들이 아닌 일본군이라는 설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근거는 희박하다. 일단 인조 시대 쓰여진 선조수정실록은 <징비록>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었는데, 당시 파천에 함께했던 류성룡도 직접 보고 쓴 기록이 아니라는 한계를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12] 무엇보다 파천 당일 폭우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궁궐에 화재가 날 수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그러나 파천 출발 당일은 아니더라도 일본군 입성 전인 음력 5월 초 어느 시점에 이미 경복궁이 불탄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성 함락 당시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일본 측의 기록이 나오면서 일본군이 태운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지만, <조선정벌기>의 저자 오제키는 임진왜란 때 참전도 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후대에 상상력을 가미해 쓴 군담 소설에 가깝기 때문에 경복궁을 보았다는 진술은 신뢰하기 어렵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본 것은 4대문과 종묘 정도였다. # 참고: 임진왜란 때 경복궁은 누가 불태웠을까?

한양으로 환도한 선조는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사저를 개수하여 임시 궁궐로 사용했고 이를 정릉행궁(경운궁)[13]이라 불렀다. 선조는 경복궁 대신 창덕궁부터 우선 중건하도록 결정하여 1605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선조는 경복궁 먼저 중건할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착공에 들어갔지만, 경복궁 터가 너무나 황폐화되어 복구하는 데 엄청난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되자 결국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중건된 창덕궁에 입궁하고 창경궁을 재건하였으며, 새로 경희궁[14]인경궁[15]을 짓는 등 궁궐병이라 불릴 정도로 여러 궁궐을 동시 다발적으로 지었지만, 경복궁은 끝내 중건하지 않았다.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경복궁 중건을 일부러 피한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은 조선 후기 내내 중건되지 못했고 궁궐 터는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어 270여 년간 벌판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파일:gPOGWb3.jpg
고종 당시의 경복궁 조감도

1864년 고종의 섭정 자격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집권 이듬해인 1865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 중건에 착수했다. 2년 후인 1867년에 마침내 경복궁이 중건이 완료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은 7225칸 규모였다.[16] 경복궁 중건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결국 그의 실각의 원인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국력을 크게 소모해 가면서까지 중건한 경복궁이지만, 정작 실사용자 당사자인 소년 고종은 새로 건설된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 경복궁에 입주한 지 5년 만인 1873년에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 몰래 경복궁 북쪽 구석에다가 민가 형태의 건청궁을 지은 후 아관파천 때까지 거의 이곳에서 줄곧 거주했다. 일본 자객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벌어진 장소도 건청궁 안 곤녕합이다. 개항 후에는 전등을 설치하고, 러시아인 건축가인 사바틴을 초빙해 건청궁 내에 있던 관문각을 2층 크기의 양관으로 바꾸는 등의 현대화 작업도 진행되기도 했다.[17]

결국 을미사변 후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했다. 아관파천 후 1897년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했고, 그해 대한 제국을 선포했다. 환궁 당시 경운궁은 민가를 개조한 전각 두 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고종은 1896년부터 1902년에 걸쳐 6년간 대대적으로 경운궁을 황궁화하는 공사를 벌였다. 확장 공사라기보다 그냥 궁궐을 새로 짓는 수준이었다. 공사 당시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가 경운궁 전각을 세웠다(...).

경복궁과 다르게 창덕궁 전각은 전혀 헐리지 않았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 전체가 홀라당 타버렸을 때 고종과 조정은 창덕궁으로 이어할지, 경운궁을 재건할지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지만, 경복궁을 사용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경복궁에 대한 고종의 태도는 거의 혐오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보인다.

경술국치 직후 일장기가 근정전에 걸린 것으로 알려진 바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경술국치 문서 참조.

2.3. 일제강점기 시절

파일:attachment/1915japanesedcp.jpg
조선물산공진회 당시의 그림
파일:external/upload.inven.co.kr/i1238774061.jpg
일제가 충격과 공포의 모습으로 훼손한 경복궁


한일 강제 병합 후에는 식민지의 사기를 꺾고 실용성도 따질 겸 일본 총독부의 만행으로 인해 가장 훼손된 정도가 큰 궁궐 가운데 하나[18]이기도 하다.[19] 일제는 우선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동쪽 담장을 안으로 밀어넣으면서[20] 약 4,000여 동의 건물을 없애 버렸고, 이후 경복궁 내부 중앙 축선에 근정전과 광화문을 가로막는 형태로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지은 뒤[21] 광화문을 다른 자리로 옮겨버리기까지 했다.[22] 이 외에도 여러 전각들을 훼손하거나 통째로 일본으로 밀반출하는 등 일제강점기 내내 온갖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일제가 훼손한 공간들은 상술한 조선 물산 공진회나 다른 박람회들 여럿을 개최하는 등, 일종의 컨벤션 센터 개념에 가깝게 활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는 흥례문 터에 지어진 조선총독부 청사 및 집옥재 일대에 총독 관저의 경비를 맡은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집옥재 일대의 경우 8.15 광복 이후에도 이 잔재가 남아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경비단 병력[23]이 경복궁 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1996년 30경비단이 33경비단과 통폐합해 제1경비단을 창설하고 부대를 이전하면서 해결하였다.

2.4. 광복 이후 복원

광복 이후 경복궁을 다시 복원하려는 노력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무산되거나 체계적이지 않게 복원되었다. 1955년부터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이 경복궁사무소를 설치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엄연히 따진다면 지금의 청와대 자리 또한 경복궁의 뒤뜰에 해당되기 때문에[24] 완전 복원을 위해서는 청와대를 없애야 한다. 참여정부 때 청와대를 당시 '행정 수도'로 불린 세종시로 옮기기로 계획했으나, 그건 수도 이전에 해당하고 국민 투표를 거치지 않은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좌절되었다. 이때 대통령 관저를 세종시로 이전했다면 청와대 건물을 함께 옮겼거나 다른 장소에 청와대를 옮겨서 현대사를 기릴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경복궁을 복원하려고 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실제로 복원된 것은 광화문을 제 위치로 돌려놓은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예산 부족과 정확한 고증과 철저한 준비 없이 의욕만 앞서서 시도하여 광화문을 콘크리트 구조물로 복원하여 정확한 복원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현판도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이었다. 전해지는 일화로는 서예 대가이자 국회의원이었던 윤제술이 콘크리트 광화문에 걸린 현판을 보고 "아니 어느 놈이 저걸 글씨라고 썼냐!"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는데 옆에 있던 동료 정치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통령을 가리키자 얼른 큰 소리로 "아, 그래도 뼈대 하나는 살아 있는 글이구먼!"이라고 했다고.. 윤제술이 지적했듯이 박정희의 글씨가 문화재에 걸 만한 명필은 아니었다. 게다가 고증대로면 한자로 적어야 할 현판을 한글로 적었으니 거기서부터 문제점이 있었던 것. 광화문이 후에 다시 제대로 복원될 때 그 현판의 보존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결국 고증을 지켜서 박정희 현판은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었다. 현판은 당대 것을 복원하기로 하고 복원은 광화문 유리원판 사진을 바탕으로 고종 당시 영건도감 제조로 광화문 현판 서사관이 된 임태영이 쓴 현판을 디지털 복원하기로 하였다. 일제가 시멘트를 바르면서 습기가 차 제습기를 돌리면서 그 진동으로 현재 균열이 진행 중인 석굴암을 그대로 보수하고 방치했듯이 전반적인 문화적 교양 없이 탁상행정으로 결정해 버린 폐해가 드러난 예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나마 광화문이 겉모습이라도 멀쩡하게 복원되고 담장도 궁궐 양식을 복원되면서 최소한 이곳이 경복궁 부지임을 일반인들도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모두가 좋아하지 않았던 중앙청 청사도 가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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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경복궁 복원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데에는 비용 문제도 있었거니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었기도 했는데, 경회루 앞에 골프장을 만들겠다고 하거나(1963년), 박물관을 짓겠다면서 기존에 남아 있던 경안당, 대향당, 정훈당(동당) 등 9동 106칸의 전각을 철거(1966년)하는 등 그나마 남아있던 경복궁을 훼손하기도 했다. 철거한 경안당의 부재 일부는 1978년에 향원정 앞 향원교를 보수하며 사용한 기록이 있다. 1972년에는 앞서 서술한 고종 때 건축된 선원전 자리에 땅을 파고 불교 양식을 듬뿍 바른 국립중앙박물관 신청사 같은 건물을 지어올리는 몰상식한 정책을 반복했다.[25] 이렇게 정부와 공무원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현저하게 낮았기에[26], 경복궁 외에도 전국적으로 문화재에 대한 보존이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때문에 광복 이후에도 존속한 유적이 파괴되거나 유물이 분실되는 경우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또 1979년에는 마방 터에 후생관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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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앞을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가로막고, 그 건물을 또 콘크리트 광화문이 가로막고 있는 괴랄한 광경. 문민정부에서 총독부 건물을 없애기 전까지는 이런 모습이었다.

김영삼 정부 이후 본격적인 경복궁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복원 공사 중이다. 때문에 경복궁 권역 어딘가는 항상 공사 중. 하지만 이 공사에도 문제가 있는데, 동궁 근처 자리에 주차장을 짓질 않나, 앞서 국립민속박물관처럼 1979년에는 중앙청 후생관(현 국립고궁박물관)을 궐내에 짓더니 그것도 모자라 경복궁역과 연결 통로까지 짓는 등 어떻게 보면 궁궐 복원과 역행하는 짓을 저질렀다.

1990년 당시 경복궁 내의 전각은 36동만 남았다. 고종 당시 전각의 7% 수준으로 말 그대로 거의 대부분이 사라진 공터가 되어버렸다. 궁내 잔디 밭은 대부분 건물 터다. (사라진 문화 유산에 대한 관점으로 보자면 잔디밭은 건물들의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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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경복궁 고종 당시의 경복궁

2.4.1. 1차 복원 사업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이루어진 경복궁 복원 사업이다. 1차 복원 사업에서 총 89동의 전각을 복원하였다.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 완비를 목표로 작업하여 복원에는 목재800톤, 석재 5,000톤이 사용되었다고 하며 총 사업비는 1,571억 원이다. 1차 사업 결과, 경복궁 내의 전각은 모두 125동으로 고종 중건 당시 전각 500여 동의 25% 수준이다.
1단계 1990년~1995년 강녕전 및 침전 권역 복원석조 문화재를 이전하고 강녕전 등을 복원하였다.
2단계 1995년~1999년 자선당 및 동궁 권역 복원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동궁 권역을 복원하였다.
3단계 1996년~2001년 흥례문 권역 복원국립 문화재 연구소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영제교 등을 복원하였다.
4단계 1997년~2005년 태원전 권역 복원30경비단을 이전하고 태원전과 주변 행각을 복원하였다.
5단계 2001년~2010년 광화문 및 건청궁 권역 복원기존 광화문을 철거하고 복원하였다.

2.4.2. 2차 복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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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명칭은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이다. 2011년 10월 3일부터 2020년대 후반까지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계획이었으나, 2015년 12월 15일 문화재청은 경복궁 2차 복원 사업의 규모를 줄이고 총 기간을 연장하는 방향으로 조정키로 했다. 복원 추진 과정에서 문화재에 대한 방제 여건, 복원 후 활용, 관람객 불편 최소화 등을 이유로 254동을 복원하기로 했던 것을 80동으로 줄이며 공사 기간은 기존의 2045년으로 15년 연장하였다. 총 투입 예산도 5,400억에서 3,000억으로 감소하였다.

2011년 12월 8일 문화재청은 경복궁의 사정전, 수정전, 향원정을 창덕궁의 금천교, 부용정, 낙선재와 함께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
1단계 2011년~
2021년
궁중 생활 권역 복원소주방 및 흥복전 영역의 건물 28동을 복원한다. 약 584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2단계 2019년~
2026년
제왕 교육 및 궁중 군사 권역 복원동궁 및 오위도총부 영역의 건물 14동을 복원한다. 약 502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3단계 2026년~
2034년
궁중 통치 권역 복원궐내각사 영역의 건물 14동을 복원한다. 약 529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4단계 2031년~
2042년
궁중 의례 권역 복원선원전 및 혼전 영역의 건물 23동을 복원하고, 국립민속박물관을 철거한다. 약 1,304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5단계 2040년~
2045년
궁중 방어 권역 복원동·서십자각 및 내사복 영역의 건물 1동과 궁장을 복원한다. 약 81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3. 복원 논란

조선총독부였으며 해방 후 제헌 의회였고 중앙청이었다가 급기야 대한민국 문화의 중추 시설로 바뀐 그 역사를 건축적으로 그 장소에 남기게 되길 소망하였지만, 완공되어 나타난 가짜 경복궁은 우리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말았다.
건축가 승효상

잘못 복원된 경복궁의 전각들#

경복궁은 1995년조선총독부 청사가 해체되면서 본격적으로 복원이 시작됐지만 전각들이 복원될 때마다 항상 논란이 일고 있다. 이유는 당연히 그 전각이 어떤 모습인지는 알고 복원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사실 현재는 이러한 복원에 부정적인 학자들도 대단히 많다. 일단 결정적으로 전각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려면 그 전각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부는 어떤지 하는 내용을 샅샅이 알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경복궁은 그런 거 없다.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은 동궐도형, 서궐 도안이 남아있어 그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지만 경복궁은 다르다. 일반인들이 말하는 북궐도형이라는 것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는 그림이 아니라 배치도이다. 즉 전각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고 몇 칸인지만 보여줄 뿐 내부 모습은 어떤지, 계단은 어떤 모양인지, 공포는 어떻게 생겼는지 같은 것들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북궐도형도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거라 흥선대원군 당시 모습과 차이가 있다. 가령 강녕전과 부속 건물들이 원래 행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건 당시 왕실에서 그린 그림에서는 보이지만 북궐도형에서는 보이지가 않는다.[27]

경복궁을 찍은 유리 건판 사진을 참고하면 되지 않겠냐는 사람들도 있는데 100%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전부터 경복궁은 일본의 손에 전각들이 하나하나 해체되고 있었던 상태여서 경복궁의 모습을 다 찍지 못하고 겨우 20%만의 사진만 찍어냈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 당시 사진은 남아있는데 북궐도형을 기준으로 왼편, 오른편의 전각들의 사진은 선원전, 제수합, 자선당, 그리고 수정궁 빼고는 아무것도 사진으로 남지 못했다. 그나마 유리 건판 사진에 있던 전각들의 대부분도 이미 복원되었고 현재 사진은 남아있지만 복원되지 않은 전각은 선원전, 흥복전, 그리고 만경전밖에 없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건물의 내부나 외부를 추정해서 복원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항상 논란이 있다.

새로 복원된 전각들도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 것들이 꽤 있다. 자선당 계단은 한 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복원 공사 때 세 계단으로 바꿔버리고 영추문도 제대로 복원이 안 됐고 태원전은 반이 잘린 채 복원되었다.

3.1. 시멘트 사용

2018년 10월 8일 KBS의 보도에 따르면 흥복전 복원공사에 시멘트를 20포대정도 사용했으며, 작년인 2018년 4월에 관계자의 양심고백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 이에 재시공에 들어갔으나,# 시멘트가 소량 남아있을 수 있다고 문화재청이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한편 현재 진행 중인 전국의 여러 문화재 복원 현장에서 시멘트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4. 크기에 대한 논란

중국과 한국 사이에 관광객이 오가면서 나온 논란으로, 자금성에 비하면 궁궐이 초라하다는 것이다. 심하게는 경복궁이 자금성의 화장실 정도 크기(?)라는 황당한 말까지 나올 정도다.

아래의 같은 축척의 크기 비교 사진을 보면 경복궁이 그렇게까지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시절 흥선대원군이 복원할 때는 처음 넓이의 20배 정도로 증축했기 때문에 자금성의 절반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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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논의에 앞어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데, 위의 사진에 나온 부분은 자금성이 아니라 자금성 내부의 궁성이다.

황성이라고 부르는 천안문을 정문으로 하는 성벽을 당대 사람들은 자금성이라고 불렀고 오문을 정문으로 하는 영역은 궁성이라고 불렀다.

물론, 건물의 규모나 화려함, 격식을 비교해보면 자금성이 앞선다. 자금성은 면적 내에서도 건물이 빼곡한 데다가 화려한 멋이 있는 반면, 중국과의 대결을 피하고 안정을 우선시했던 조선은 제후국을 자처하였고, 주제(周制)라고 불리는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일반화된 궁궐의 법식에서 제후국의 형식을 채택했기에 천자국 형식을 택한 중국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원형을 대부분 보존한 자금성과는 달리, 경복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각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고 원형을 잃은 부분이 많아서 실제 모습보다 더욱 작고 초라하게 보이는 부분도 작용한다.

4.1. 삼문삼조

주례의 오문삼조(五門三朝), 삼문삼조(三門三朝) 원칙에 따라 자금성은 천자의 궁궐이므로 정전인 태화전까지 5개의 문을, 경복궁은 제후의 궁궐이므로 정전인 근정전까지 3개의 문을 두었다.

오문삼조와 삼문삼조에서 정하는 문의 개수라는 건 궁궐 안을 나누는 문의 개수이며 궁궐의 정전까지 가면서 거치는 문의 개수이다. 오문삼조는 고문(皐門), 고문(庫門), 치문(稚門), 응문(應門), 노문(路門)이라는 5개의 문을 궁궐 경계에서부터 그 안에 두고, 그중 고문(皐門) 안을 외조(外朝)[28], 응문 안을 치조(治朝)[29], 노문 안을 연조(燕朝)[30]로 하여 궁궐 안을 세 구역(조)로 나누는 걸 말한다.

다시 말해, 궁에 5개의 문을 두고 안을 3개의 조로 나누는 것. 그리고 제후국의 삼문삼조라는 건 이 중 고문(庫門), 치문(稚門)을 빼고 3개의 문을 두어 3개의 조로 궁궐 안을 나누는 것이다.

황성이 없는 조선 왕조의 경복궁은 두 문이 없고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으로 삼문을 세웠다.

4.2. 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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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이 연행길 가던 시절에 청나라의 궁궐이라고 부른 영역은 가운데 빨간색의 자금성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분홍색 부분의 황성 전체를 얘기했다.

박지원은 자금성을 이야기할 때 지금 자금성이라고 부르는 영역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박지원은 자금성이라고 부르는 빨간색 부분은 궁성이라고만 불렀고 자금성은 천안문을 정문으로 하는 분홍색 부분, 지금의 황성 영역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했다.

박지원이 설명한 자금성의 4문은 남쪽의 천안문, 동쪽 동안문, 서쪽 서안문, 북쪽 지안문이다. 즉 천안문 양옆으로 뻗어단 성벽에 둘라싸인, 이 문서에서 황성이라고 부르는 영역을 박지원은 청나라의 자금성으로 인식한 것이다.

황성까지가 자금성인데 황성이 헐려나가고 중난하이는 중국 공산당 정부 청사로, 태묘는 공산당의 공연 시설로 사용되어 궁성만 남게 되면서 오늘날에는 궁성만을 자금성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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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역 전체가 청나라 시대의 황성이다. 현재는 황성의 일부인 궁성만을 자금성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 시대의 황성은 지금은 사라진 대청문을 합쳐서 천안문 단문, 오문, 태화문까지 5개의 문이 있다.

이 이미지 하단의 대청문(大淸門)과 천안문(天安門) 사이는 황성에 포함되지 않는다. 천안문이 황성의 정문이다. 이 두 문이 연결된 통로같은 것은 한국의 육조거리[31]에 해당하며, 이 통로 양편에는 정부 주요 부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대에는 이것을 모두 헐어버리고 천안문광장이 들어서 있으며, 대청문 자리에 마오쩌둥 기념당이 세워져 있다.

자금성은 이고 한양의 궁궐들은 이니 궁궐의 크기만 따지면 조선의 궁궐들이 더 크다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 자금성뿐만 아니라 황성 권역 전체가 황제 한 사람의 생활, 업무, 휴식 등을 위해 지어졌으므로, 베이징 성 내부에 위치한 황궁이라고 봐야 한다. 규모로도 단순히 황제의 거주 구역을 넘어서 하나의 '성시(城市)'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거대하고 방대하기도 하다. 역시 위에 서술했듯이 경복궁 하나와 여러 시설을 다 가진 황성을 비교할 수는 없다. 굳이 비교하려면 경복궁과 후원에 사직, 종묘, 왕족들의 잠저까지 다 합쳐서 베이징 황성과 비교해야 한다.

4.3. 한양성과 북경성

북경성과 한성은 아예 도시 구조부터가 다르다. 베이징성은 내성이 있고, 그 내성 안에 황성이 있으며, 내성 밑에 외성이 있는 구조에다가 평지성이다.

그에 반해 한성은 평산성이며, 내외성 개념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구조이며, 추가로 도성 위 지역에 탕춘대성과 북한 산성이 이어져 있는 구조이다.[32]

양국의 문화나 방어 전략에 따른 차이로 도시 구조에서부터 큰 차이가 난다. 따라서 황성의 정문인 천안문을 한국 궁궐 혹은 도시 구조에서 어떤 문에 대응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그 무언가가 생길 수가 없다.

현대 경복궁은 청와대 영역을 빼놓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래 청와대가 있는 곳은 경복궁의 후원으로서, 중난하이나 북해 공원 같은 왕실 정원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극명한 차이로 인해 일대일대응이 어렵다.

억지로 역할을 중심으로 따지자면 한양 도성은 베이징성의 내성에 해당하고, 황성은 도성 내의 5대 궁궐과 청와대 지역 및 종묘, 사직공원에 해당하며[33], 탕춘대성북한산성은 베이징성의 외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4.4. 건축물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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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있는 각 건물들의 크기가 자금성보다 작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경복궁은 면적이 넓을 뿐 경복궁 내부를 구성하는 건축물들은 작은 단층 목조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자금성이 거대하게 느껴지는 건 그 자체만으로 거대한 석축 기반 위에 다시 거대한 목조 건물들을 지어 단순히 면적만 넓은 게 아니라 건물 자체도 위압감을 줄 정도로 거대하기 때문에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경복궁 답도자금성 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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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금천자금성 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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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동십자각자금성 동십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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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궁궐의 기타 요소들을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계단 장식인 답도를 보면 근정전 계단의 답도는 간략하게 형식만 갖춘 반면 자금성의 답도들은 서양의 대리석 조각에 준하는 정도로 음각과 양각이 깊고 크기도 훨씬 거대함을 알 수 있다. 정전의 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의 크기도 다르고 궁궐의 벽을 지키는 망루인 십자각의 크기도 자금성 쪽이 더 거대하고 더 사치스럽다. 단순히 궁궐 면적만 비슷한 수준으로 확보했다고 해서 두 궁궐의 크기가 비슷하다고 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

또한, 대문에 뚫린 구멍, 그러니까 통로의 갯수가 천자의 궁궐은 5개고 제후의 궁궐은 3개이다. 자금성의 정문인 천안문은 구멍이 5개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3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34] 문의 개수가 다른 이유는 제후국인 조선은 신하 - 왕 - 신하의 3문이면 족하지만, 천자국인 명과 청은 양 옆에 제후들을 거느리고 있어 신하 - 제후 - 황제 - 제후 - 신하와 같이 5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4.5. 결론

전 세계 총 생산의 30%를 차지하던 명나라의 궁궐과 조선시대의 궁궐을 비교하기는 어렵다. 자금성보다는 작아도 경복궁은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의 고궁인 일본의 평성궁이나 교토고쇼, 베트남후에 황궁에 비해 더 크다.

면적이 넓거나 크기가 크다고 해서 더 훌륭하고 우월할 수는 없다. 인구가 중국의 5%가 채 되지 않았던 국가의 궁궐이 자금성만큼 호화스럽고 컸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35]

임진왜란 전의 경복궁은 자금성보다 수십 년 먼저 지어졌기에 열화된 모방이 아니며, 조선은 개국 당시부터 검소함을 지향하는 왕도 정치를 표방했기 때문에 궁궐의 장식이나 규모에서도 검소함을 지향했고 균형미와 조화로움도 추구했기 때문에 단순한 면적과 전각의 수로만 비교하기 어렵다.

또한, 경복궁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운 한국 고유의 궁궐 건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만의 개성으로 나타나는 단청의 색과 문양, 창덕궁만큼은 아니지만 경직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 등은 북악산과 이루는 조화를 통해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보여주고 있다. 규모로 따질 수 없는 고유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명확히 드러나며 그 완성도도 수준급이다. 단순히 규모로만 아름다움을 따지기에는 경복궁이 가지고 있는 세세한 아름다움이 매우 많다. 자금성은 자금성이고 경복궁은 경복궁인 것이다.

5. 주요 건축

5.1. 궁성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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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정문. 1395년(태조 4년) 처음 지어질 때는 사정문(四正門)이라 했다가 1425년(세종 7년) 광화문으로 개칭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864년(고종 1년) 중건했으나, 일제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1927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한 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문루가 소실되었다. 이후 복원 공사에 들어가 1968년 12월 11일 준공했지만 원위치에서 조금 벗어나 있고 철근 콘크리트 구조라는 한계 때문에 2006년부터 다시 이전·복원 공사에 착수해 2010년 8월 15일 준공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광화문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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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춘문(建春門)
경복궁의 동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왕족·외척·상궁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년) 12월 25일 상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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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일반 관원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년) 10월 25일 상량했다. 1926년 4월 27일 궁성 주변에 부설된 전차의 진동으로 인해 무너졌다가 1975년 원 위치에서 40m 내려간 남쪽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었다. 2018년 12월 6일에 43년 만에 개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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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문(神武門)
경복궁의 북문. 태조가 창건할 때는 없었으나 1443년(세종 15년) 궁성의 사대문을 맞추기 위해 건설했다. 다만 풍수지리적인 문제 때문에 자주 닫혀 있었다.[36] 조선 시대에는 신무문 바깥으로 경복궁의 후원과 연결되었지만 청와대가 들어선 다음부터는 경호 문제로 비공개되었다가 2007년 9월 29일 건청궁 복원 공사 완료에 맞추어 45년 만에 민간인에게 개방했다.
동십자각(東十字閣)
궁성을 수비하는 망루로서는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전각. 7단으로 이루어진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1867년(고종 4년) 지어졌으나 1924년 도로를 확장할 때 궁장을 헐면서 길 한복판에 섬처럼 놓이게 되었다. 광화문과 남쪽 궁장을 복원하면서 일제 때 헐려나간 궁장을 동십자각과 연결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교통 문제 때문인지 실현되지는 않았다. 참고로 서쪽 맞은편에 있던 서십자각은 일제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철거되었는데, 이쪽은 복원하지 않고 남쪽 궁장을 서쪽 궁장과 맞바로 연결해버렸다.

5.2. 외조

5.2.1. 정전 권역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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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례문(興禮門)
광화문을 지나면 나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이다. 1395년(태조 4년) 지어졌으며 1426년(세종 8년) 홍례문(弘禮門)이라 했다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년) 중건하면서 청나라 건륭제의 이름인 홍력(弘曆)을 피휘하여 흥례문으로 개칭했다. 1916년 일제조선총독부를 건설하면서 철거되었다가 85년 뒤인 2001년 10월 26일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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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문(維和門)
근정문에 들어서기 전 그 서쪽에 있으며, 궐내각사로 통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이다. 유화문도 흥례문과 마찬가지로 1916년에 철거되었다가 2001년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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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문(勤政門)
근정전의 정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1867년(고종 4년) 중건되었으며 일곽의 행각과 함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의 임금들은 여기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다음 근정전의 옥좌에 앉아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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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 대한민국의 국보

근정전(勤政殿)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가적인 대례를 거행하던 장소이다. 다포식 건축으로는 현존하는 것 중 국내 최대 규모이며, 2단의 석축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2층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2마리의 목조 용 조각의 발톱이 7개인 것이 특징이다. 1395년(태조 4년) 건설되었다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년) 중건했다. 일제조선총독부를 지을 때도 철거당하지 않았으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5.2.2. 편전 권역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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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전(思政殿)
왕의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는 편전으로 사용하던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내부의 바닥이 마루였기 때문에 주로 여름에 사용했다. 1395년(태조 4년) 지어진 뒤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모두 전소되었고, 이후 1867년(고종 4년) 중건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전각의 사방이 벽 없이 창과 문으로만 된 점이 특징이며, 내부의 어좌 위에는 운룡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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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춘전(萬春殿)
사정전의 동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부속 전각이다. 온돌이 시설되어 있어서 주로 봄에 사용했다. 그 때문에 궁궐의 온돌 시설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었다. 전각이 세워진 뒤 불탔다 중건되는 과정은 사정전과 동일하나 만춘전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은 적이 있었다. 1988년 원 위치에 건물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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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전(千秋殿)
사정전의 서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부속 전각이다. 만춘전과 마찬가지로 내부에 온돌이 시설되어 있어서 주로 가을과 겨울에 사용했다. 1452년(문종 2년) 5월 14일 문종이 37세를 일기로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5.2.3. 궐내각사 권역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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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전(修政殿)
경복궁 근정전 서쪽에 위치한 전각이다. 월대 위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된 꽤 큰 건물로, 궁궐에 부속된 관청이 밀집한 궐내각사 권역의 중심이었다. 세종대왕 때는 집현전이 있던 곳이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67년(고종 4년) 중건했고, 고종 때는 군국 기무처와 내각이 이곳에 있었다. 주변에 있던 2백여 칸의 다른 궐내각사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수정전만 남아있다. 2차 복원 정비 사업의 2단계가 진행될 2013년~2018년에 주변 건물들을 복원할 예정이다.

5.3. 내조

5.3.1. 침전 권역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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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녕전(康寧殿)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한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건물 앞에는 월대가 시설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강녕전의 소침인 연생전·경성전·연길당·응지당이 있다.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에는 강녕전과 4채의 소침이 회랑을 통해 서로 이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현재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다만 소침의 툇마루 등을 통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395년(태조 4년)에 세워질 때 정도전이 명명한 전각 중 하나이며,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불탔다가 1년 뒤에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흥선대원군이 다시 중건했다. 고종 때 중건된 강녕전은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희정당을 복구하기 위해 1920년 창덕궁으로 이건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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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생전(延生殿)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오른쪽에 동소침으로 지어졌으며, 서쪽에 있는 서소침인 경성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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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전(慶成殿)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왼쪽 서소침으로 지어졌으며, 동쪽에 있는 동소침인 연생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응지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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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당(延吉堂)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오른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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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당(膺祉堂)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왼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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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태전(交泰殿)
정면 9칸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뒤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부속 전각으로 동쪽에는 원길헌(元吉軒), 서쪽에는 함홍각(含弘閣), 동북쪽에는 아미산을 바라볼 수 있는 누마루인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고종 때 중건된 교태전은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대조전을 복구하기 위해 1920년 창덕궁으로 이건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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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峨嵋山)
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교태전의 뒷편에 있다.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을 경복궁까지 이어서 교태전에서 낳는 왕세자와 대군들에게 백두산의 기를 주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원조 백두혈통 3단의 화계(花階)로 된 출입구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양한 길상문으로 아름답게 꾸며 그 예술적 조형미와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선장문 안쪽의 실제 아미산 영역은 출입불가이며 입구 계단인 아미산 굴뚝 주변도 올라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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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경각(欽敬閣)
교태전 서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1438년(세종 20년) 세종대왕장영실에게 명해 지은 일종의 천문 관측소이다. 이곳에는 각종 천문 관측 기구가 있었으나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고종 때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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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원전(咸元殿)
교태전 서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 세종대왕이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해 불사를 거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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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방(燒廚房)
동궁의 북측과 자경전의 남측 사이에 있으며, 궁궐 내 음식물을 보관·조리·제공하는 식생활 공간으로, 수라상을 비롯해 왕실 잔칫상 등을 만드는 궁중 요리원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상궁들이 음식을 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1395년 경복궁 창건 이후 궐내 제반 시설을 정비하면서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재건 시 다시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조선 물산 공진회가 개최되면서 여러 전각들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 2015년 2월 16일 복원했다. 2015년 5월 8일부터 10일까지 개방, 궁중 음식을 시연하는 행사를 열었다. 2018년 현재, 궁중 다과와 전통차를 판매하는 찻집으로 개수되어 운영 중에 있다. 굳이 차를 마시지 않더라도, 경복궁 내에서 별도의 허가 없이 실내에 들어 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전각이라는 점에서도 경복궁을 방문한다면 한 번쯤 들러 볼 만하다.

5.3.2. 연침 권역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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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慈慶殿)
원래 이 자리에는 자미당(紫薇堂)이 있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헌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양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지만 1873년(고종 10년) 화재로 소실되어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다. 동쪽 정면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자경전이고, 여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淸燕樓)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맞닿아 있으며,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실이 연결되어 있다.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부터 남아있는 연침 건물이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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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꽃담
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전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문자와 길상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다. 서울특별시가 '서울 10대 대표색'을 선정하면서 이 꽃담의 색깔을 '꽃담황토색'으로 명명해 포함시켰다. 서울 시내의 택시 중 꽃담황토색으로 도색된 차량이 종종 보이는데, 도입 초기에는 X색 같다며 거부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자주 보니까 익숙해져서 친근해진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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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 내부의 온돌방과 연결된 여러 개의 굴뚝을 하나로 모아 만든 굴뚝이다. 전돌을 쌓아 만든 담장 벽면의 중앙에는 장수를 의미하는 소나무·거북·사슴·불로초 등의 십장생과 그 밖의 각종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들을 배치해 자경전의 주인인 대왕대비 조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과 합쳐서 지정된 게 아니라 굴뚝만 독립적으로 지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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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복전(興福殿)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처음 지어졌으며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한다. 침전 건물이었으나 사신 접견 및 임금이 학문을 연마하는 경연과 양로연 장소로도 사용됐다. 대왕대비 조씨가 1890년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제 기능을 상실했다가 1917년 소실된 창덕궁 침전 권역을 재건할 때 옮겨져 사라지고 해당 자리에는 일본식 정원이 들어섰다. 2015년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시공업체가 복원 기준을 어기고 벽체와 지붕에 시멘트 20포대 분량을 섞은 재료를 쓴 사실이 드러나 2018년 4월부터 석 달 간 재공사를 시행하여# 2019년 복원을 완료하였고 단청은 2020년대 초에 칠할 예정이다. 내부에는 현대식 화장실과 냉난방, 전기 시설 등을 최초로 갖춰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5.3.3. 동궁 권역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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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모습
동정문
경복궁 주차장에서 동궁 영역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본래 한국 최초의 극장인 원각사의 정문이다. 이후 국립 국악원 정문으로 이용되었고, 영추문의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1975년 영추문을 콘크리트로 재건하면서 현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원각사의 정문으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정문이라는 이름도 동쪽에 있는 출입문이라며 임의로 부르던 명칭이며, 건물 내역에 대한 관련 표지판조차 없다. 따라서 원 위치인 원각사 터로 이전 복원하겠다는 얘기는 나오지도 않는 상황. 원각사 터는 종로구 신문로1가 57번지에 위치한 대우 건설 빌딩 일대이다. 과거 모습 사진에 나오는 흰색 근대식 건물은 1939년에 건청궁 터에 건립한 구 총독부 미술관 건물이다. 해방 후에는 경복궁 미술관, 전승공예관 등의 전시시설로 활용하다가 건청궁을 복원하기 위해 1998년 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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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당(資善堂)
1427년(세종 9년) 세자의 생활 공간으로 지어진 정면 7칸, 측면 4칸의 동궁(東宮)으로 세자였던 문종단종을 얻고 아내 현덕왕후 권씨를 잃은 곳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고종 때 중건되어 순종이 세자로서는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지냈다. 아관파천 이후 주인을 잃었으며 1914년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뜯어간 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불타 기단만 남은 채 방치된 유구가 1995년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원래는 반환된 유구를 복원에 사용하려 했지만 훼손이 심각해 건청궁 뒤쪽에 갖다놓았는데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1999년 복원한 자선당도 원래의 모습과 차이가 있다. # 여담으로 이 자선당 건물은 프랭크 로이드 화이트가 현대식 난방용 보일러를 개발하는 데 연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들을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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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각(丕顯閣)
1427년(세종 9년) 세자의 공부방 겸 집무실로 지어진 정면 6칸, 측면 2칸의 전각이다. 자선당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고종 때 중건되었지만 일제강점기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9년 복원했다.

5.3.4. 내전 권역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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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
교태전 아미산의 북쪽에는 흥복전(興福殿), 광원당(廣元堂), 다경각(多慶閣), 함화당, 집경당, 영훈당(永熏堂) 등의 여러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으나 함화당과 집경당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던 것을 2006년 함화당과 집경당을 연결하는 복도각과 주변의 행각만 복원해 2009년 1월 24일 일반에 개방했다. 1890년(고종 27년)에 지은 함화당과 집경당은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던 곳이자 궁중의 서화를 수장하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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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대한민국의 국보

경회루(慶會樓)
1395년(태조 년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에는 누각을 지탱하는 돌기둥에 용 조각을 새겼다고 하지만 1867년(고종 4년) 중건할 때는 무늬 없는 통돌로 바뀌었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으로 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10000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이기도 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경회루 문서 참조.
  • 하향정: 경회루 뒤에 있는 작은 정자인데, 원래는 경복궁에 없던 건물이다. 이승만이 집권 시절 낚시와 휴식을 위해 만든 건물이다. 철거 논란이 있다.

5.3.5. 빈전 권역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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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전(泰元殿)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 지은 전각으로, 태조 이성계어진을 봉안했다. 남쪽에는 건용문(建庸門)과 경안문(景安門)이 있고, 영사재(永思齋)가 태원전 오른쪽에 있으며 그 남쪽에는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공묵재(恭默齋)가 있다. 태원전 서북쪽에는 간의당(簡儀堂)이 있고, 동서 양쪽에는 각각 세답방(洗踏房)이 있으며, 주변에는 행각이 둘러져 있다. 명성황후 민씨의 빈전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모든 건물들이 헐렸다가 2005년 복원되었다.

5.3.6. 건청궁 권역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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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당(長安堂)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흥선대원군 모르게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을미사변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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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 민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 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뒷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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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옥재(集玉齋)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왼쪽은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은 협길당(協吉堂)과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창덕궁에 있었으나 1888년(고종 25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건물을 이건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국풍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 고종은 이곳을 서재, 어진 봉안처, 외국 사절 접견소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이 주둔하는 바람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6년에 수도 경비 사령부 30경비단이 부대 이전을 함으로써 이후 복원 작업을 실시하여 2006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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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정(香遠亭)
건청궁 남쪽 연못의 섬에 있는 2층의 누각. 원래는 건청궁의 후원 역할을 하는 장소였기에 건너가기 편하도록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해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가 바뀌어 향원지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향하게 놓여져 있다. 현재는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국전[37] 출품작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였다. 2017년 5월부터 전면 해체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년간 진행될 예정이며 헐거워진 목재 접합부, 토사가 쓸려내려가 약해진 지반 지지력를 강화하고 다리를 원래 자리인 북쪽으로 옮긴다고 한다.

5.4. 박물관

  • 경복궁에는 두 곳의 박물관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경복궁 서남쪽 부근에 있는 경복궁역과 인접해 있다. 반면, 국립민속박물관은 경복궁 동쪽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어 상대적으로 후자가 전자보다 접근성이 떨어진다.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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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國立故宮博物館,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홈페이지. 전신은 1908년 설립된 제실박물관이다.[38] 1909년 순종이 일반에 공개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왕가 박물관으로 격하되어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겨간 뒤 1945년 광복 후부터는 궁중 유물 전시관으로 운영되었지만 공간이 협소해 전시와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다. 2005년 국립 고궁 박물관으로 개칭하고 경복궁 내의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옮겨 4만여 점에 달하는 왕실 관련 유물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자격루의 실물 크기 복원 모형과 창덕궁에 있던 순종황제순정효황후 부부의 어차가 이곳에 있다. 경복궁 전각들은 근대 이전의 나무 건축이라 전기 배선에 노출될 경우 화재의 위험성이 있고 현대적인 난방, 냉방 기구의 설치와 전시 시설을 갖추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고궁 박물관은 왕실 유물 전시실로 그대로 존속할 가능성이 높다. 건물도 민속 박물관에 비하면 겸손하게 궁궐 건축과 어울리는 모습이라 그렇게 튀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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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國立民俗博物館,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홈페이지. 전신은 1924년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이다. 1945년 광복 이후 '국립 민족 박물관'으로 출범, 남산 구 통감 관저에 있었다가 1950년에 국립 박물관에 통합되며 자취를 감췄다가 1965년에 '한국민속관'으로 재출범하면서 경복궁 수정전에 자리잡았다가 1975년에 경복궁 구 국립현대미술관 건물에 입주하였다가 1993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으며 7,089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정말 괴랄하게도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등 대표적인 불교 사찰을 억지로 섞어서 콘크리트로 만든 기이한 외관 때문에 유교 국가의 정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39] 그냥 무식하게 불교 사찰을 때려 박은 외관 때문에 민속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에도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도 해체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위의 불탑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 또 하나, 대다수가 모르고 넘어가는 사실이 있는데,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터는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어진들을 모신 건물인 선원전이 있었던 곳이다. 즉 복원을 하며 선원전을 연구를 해야 할 것인데 그런 기회마저 갈갈이 찢어놓은 것이다. 선원전은 일제 시기인 1932년에 장충단에 있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모신 절인 박문사로 팔려나갔고, 더욱이 현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지을 당시 무작정 땅을 파버려 유구는 고사하고 현재로써는 선원전의 기본적인 구조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다. 그런 덕분에 오만 욕을 다먹고2030년대에 철거될 예정이다.

6. 야간 개장

2010년 G20 정상 회담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며 615년만에 처음으로 야간의 경복궁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많은 인기를 끌자 문화재청은 매년 상, 하반기로 나누어 5일씩 연 2회(연간 10일)로 정례화했다. 2013년 하반기부터는 12일씩 연 4회(연간 48일)로 야간 개방을 확대할 예정이다. 개장 시간은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며, 입장 마감 시간은 관람 종료 1시간 전인 9시까지다. 개방 범위는 광화문, 홍례문, 근정문, 근정전, 경회루 권역으로 경복궁 전체 면적의 40% 정도며, 관람료는 3,000원이다.
시기 일시 관람 인원
2010년 가을 11월 9일~12일4일 69,753명
2011년 5월 18일~22일5일 - 72,101명
가을 10월 5일~9일5일 -
2012년 5월 16일~20일5일 116,298명 224,581명
가을10월 3일~7일5일 108,283명
2013년 5월 22일~5월 26일5일 182,513명
가을 10월 16일~28일12일 [40] 1,500명 / 일[41]
2014년 겨울 2월 12일~2월 17일 6일
7월 30일 ~ 8월 11일 13일
여름 - -
가을 - -
2015년 겨울 - -
- -
여름 - -
가을 - -
2016년 겨울 3월 2일~4월 4일34일 2,500명/일
4월 30일~6월 2일 33일
여름 7월 16일~8월 19일 32일
가을 9월 24일~10월 28일35일

해를 거듭할수록 관람 인원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많은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경복궁 야간 개장 행사는 문화재청의 안일한 관리·운영과 미성숙한 시민 의식 등 많은 문제로 2013년 5월, 공중파 언론에 보도되며 대차게 까였다.

2013년 상반기의 경복궁 야간 개장 소식이 알려지자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며 많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실시된 온라인 예매 서비스에 몰려들었고, 딱히 인원 제한을 두지 않았던 문화재청 예매 시스템은 개장 첫 주말인 5월 25일에만 4만 명 이상을 받는 등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예매를 긴급 중단하고 인터넷 예매 일 3만 명, 현장 판매 1만 명으로 제한을 걸었지만... 개방 첫 토요일인 5월 25일 야간 개장 3시간 동안. 4만 5천여 명의 관람객이 입장하며 엄청난 혼잡이 발생했다.

엄청난 혼잡뿐만 아니라 낮은 시민의식도 도마에 올랐다. 인터넷 예매가 무색하게 티켓 확인이 허술해 한 명이 예약한 뒤 가족 단위로 우르르 입장하는 행태와 일부 민폐 사진사들은 그 혼잡한 와중에 삼각대까지 설치해가면서까지 사진을 찍으며 관람을 방해하기도 했다.[42] 그 밖에도 뜰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식사를 하고는 궁궐을 돌아다니며 아무데나 오줌을 싸는(...) 모습도 보였다.

사실 모든 문제들은 야간 개장을 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문화재청의 잘못이 크다. 티켓 확인 과정이 허술했으며, 시간별 입장객 수에 대해서 제대로 통제를 하지 않아 엄청난 혼잡을 야기했고, 음주가무와 노상방뇨를 단속할 관리 요원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 문제들은 개장 초부터 언급되다 전년 대비 3배 이상 폭증한 2012년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2013년 상반기에도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는게 문제다. 오히려 관리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무제한 예매 시스템과 보도 자료들만 내놔 혼잡만 늘려 지옥문을 열었다. 이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철밥통들 때문에 경복궁만 몸살을 앓는 중이다. 일부 궁덕들은 차라리 가격을 몇 만원 선으로 인상하거나 인원수를 더 제한하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결국 문화재청은 이와 같은 문제들을 방지하고자 2013년 하반기 야간 개장부터는 관람 지도 요원을 늘리고, 입장 인원을 하루 최대 1,500명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동시에 당초 5일이었던 야간 개장 기간을 7일 연장하여 12일간 개방하고, 2014년부터는 봄(4월)과 가을(10월) 2차례 개방에서 겨울(1월)과 여름(7월)으로 확대하여 2계절 총 10일이었던 야간 개장 기간이 4계절 총 48일로 크게 늘어날 예정이다.

한편 4만여 명이 입장해 엄청나게 혼잡했던 2013년 상반기 야간 개장에서 한 고등학생이 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워놨다가 인파에 밀려 카메라가 경회루 호수에 빠지자 밀친 사람들에게 보상을 요구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이 학생은 SLR클럽에 보상을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가 경복궁은 삼각대 반입이 금지되어 있다는 공지 때문에 역관광 루트를 타기 시작했다. 거기다 보상을 요구하는 글에는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카메라라고 했는데 과거 행적에서 중고 구매를 했다는 것이 들통났고, 2013년에 DSLR을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았다는 것부터 개소리 2007년에 할아버지한테 아이폰 물려받았다는 소리 하고 있네 결과적으로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보상 금액을 제시했다는 것까지 들통나 완벽히 역관광당했다.

6.1. 경복궁 별빛야행

연중 상반기와 하반기 두 달씩 진행하고 있다. 회차당 60명 입장이며, 사전 티켓 예매를 해야지만 입장이 가능하다.

소주방에서 궁중도슭(도시락의 옛말)이 제공되어 저녁 식사도 할 수 있고 경회루 내부 관람까지도 가능하다. 티켓 비용은 5만 원 (2018년 하반기 기준)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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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F 97 한국 스테이지로 등장했다.


2002년부터 수문장 교대식 재현 행사가 광화문에서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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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0일애플 지도에서 청화대로 오기되는 수모를 겪었다.

2013년부터 첩종 행사를 재현하고 있다.

대학생들은 학생증을 제시하면 무료 입장이 가능하며 이는 창경궁 등 다른 고궁도 마찬가지다. 무료 입장은 만 6세 이하의 어린이, 만 7~24세 이하의 청소년, 만 65세 이상의 노인(외국인의 경우 만 6세 이하의 어린이와 만 65세 이상ㅇ디 노인만 해당한다.)과 한복 착의자가 가능하나, 이 경우 남녀의 의복을 정상착의해야 한다. 즉, 성별에 맞는 복식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2017년 기준 홈페이지 그러나 한복 착용 기준에 대해 알 수 없는 원칙으로 적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자세한 것은 후술.

남부 지방 학생들의 [수학여행 단골 코스 중 하나다.

경복궁 재건에 기원을 둔 경기 민요인 경복궁타령이 있다. 합창을 위해 편곡된 것도 있다.

주차비는 2시간에 2,000원 15분에 500원이다.

자금성 내에 경복궁이라는 이름의 전각이 실제로 존재한다. 한자까지 똑같다. 위치는 자금성 내 동북쪽 가장자리. 관련 포스팅

2018년 2월 7일, 서울역사박물관은 2016년 공개구입 후 보존처리를 완료한 '경복궁도'를 최초 공개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 경복궁내 건물(전각)들의 배치 모습을 그린 족자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의 경복궁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는 경복궁도(국립중앙도서관), 경복궁전도(삼성출판박물관), 경복궁지도(장서각), 조선국왕성지도(일본 와카야마 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7.1. 개량한복 무료입장 금지 논란

상술했지만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창덕궁과 같은 4대 궁과 조선 왕릉, 종묘는 2013년 10월 중순부터 한복을 입은 사람에 한해 무료 관람을 허가하고 있다. 그러나 직원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일부 한복이 '한복이 아니다'라는 매우 이상한 기준으로 한복 입장 할인을 받지 못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2015년에는 오유에 올라온 창덕궁 무료 입장을 막은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링크를 보면 알겠지만 창덕궁 직원이 장저고리를 한복이 아니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며 작성자를 매몰차게 내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구한말에 정립된 형태인 어깨치마와 짧은 저고리를 입은 형태만을 '전통 한복'으로 생각한 것 같은데, 저고리가 짧아지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조선 후기이고, 그 이전까지는 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저고리도 현대의 셔츠만큼 길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이없는 조치인 셈.

이런 논란이 종종 일어나던 와중에 종로구청에서는 한복 전문가와의 토의를 거져 2018년 10월 11일, 고궁 한복 입장 할인 가이드라인을 신설하기로 했다. [핫 코너] 개량 한복이냐 아니냐… 고궁 들어갈 때 검사하겠다고? 그러나 개량한복을 전면적으로 금지한다는 조항으로 인해 논란이 거세졌다. 상술한 창덕궁 사건처럼 독단적인 기준을 내세우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다. 한복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고 아는 네티즌들은 하나같이 "현대인들이 전통한복으로 알고 있는 한복들은 조선시대 후기~구한말에 정립된 형태이며, 그것만이 전통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결국 국정감사에서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개량한복을 입고 출석해서 문화의 절대적 보존이 아닌 효율적 보존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8. 관련 문서



[1] 지번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1번지.[2] 천도하기 전에는 개성 수창궁에서 기거하였고, 천도한 뒤 경복궁이 다 지어지기 전까지는 한양부 객사를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3] 고려의 궁궐은 이름이 없었다. 단지 본궐(本闕)로만 불리다가 나중에 그 터가 만월대로 불렸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5] 의 이름도 세종로다.[6] 지금은 한양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7] 往十里, 갈 왕(往)를 써서 십 리 더 가라는 뜻.[8] 이 야사는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작중 에피소드로 다뤄졌다.[9] 한양성을 쌓을 때 어떤 바위를 성 안에 넣느냐 마냐로 정도전무학대사가 싸운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풍수지리상 그 바위가 성 안에 들어가면 유교가 흥하고 바깥에 나오면 불교가 흥한다는 것이었는데, 두 사람의 의견이 워낙 강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중 눈이 바위를 성곽 안에 포함하는 둘레를 그리며 쌓였고 무학대사는 '불교가 이번 왕조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구나!' 하여 체념하였고 눈 울타리, 즉 설울이 훗날 서울의 어원이 되었다는 이야기기도 있다. 이 바위는 인왕산 선바위라고 알려져있다. 서울의 어원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이 변한 것이라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10] 정도전을 혐오했던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창덕궁을 새로 짓도록 하고 그곳에 주로 머물렀다. 또 완공 직후 정도전이 일괄적으로 이름을 붙인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각 전각의 이름을 따로 짓지 않았다.[11] 제1차 왕자의 난 때 사병 군대가 쉽게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12] 사실 파천한 이들이 기록한 것은 광해군 대의 <선조실록>도 마찬가지다.[13] 현재 덕수궁이다.[14] 인조의 생부 정원군의 사저를 뺏어 지었다. 당시에는 경덕궁이었지만 영조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꿨다.[15] 인왕산 자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인조반정 이후 허물고 자재는 다른 궁이나 건물에 사용한다.[16] 애초에 처음 창건된 경복궁은 390칸 정도의 비교적 아담한 규모였으나 이후 실용적 필요로 확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 직전 경복궁의 규모는 아무리 크게 봐도 5,000칸 정도였다.[17] 현재 관문각이 있던 자리는 빈 터로 남아있는 상태며, 을미사변 당시까지 건재했고 설계자였던 사바틴이 관문각에서 사건의 전말들을 목격했다고 한다.[18] 가장 심하게 훼손된 궁궐은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동물원으로 마개조 창경궁이었다.[19] 한국이나 대만 일부에서 주장하는 쇠말뚝 주장처럼 풍수지리적으로 기를 누르려고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로 일본에 풍수지리가 많이 퍼지지는 않았고, 일본은 조선의 풍수지리를 미신이라며 비웃고 폄하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20] 현재 삼청동 길이다.[21] 광복 후에도 대한민국 정부 중앙청으로 오래 쓰였고, 정부서울청사정부과천청사 완공 후 198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다가 문민정부 시절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펼치며 해체되었다.[22] 광복 이후 광화문이 먼저 복원되면서 근정전 - 조선총독부 청사 - 광화문이라는 눈이 썩어나가는 형태가 완성되기도 했다.[23]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에 속한 장세동이 지휘한 그 부대다.[24] 지금의 경복궁은 면적의 일부가 잠식당했지만 부지의 상당 부분은 보존된 편이다. 경복궁의 권역에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까지 포함되는 정말 크고 아름다운 궁궐이었다. 하지만 그 권역 중에서 3분의 2가 날아간 덕수궁이나 권역이 통째로 사라졌다가 10분의 1 정도만이 복원된 경희궁에 비하면 보존이 잘 된 편이다.[25] 1993년부터 국립민속박물관이 사용중. 이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에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연화교·칠보교의 건축 양식을 혼합한 건물이다. 숭유억불을 지향한 조선왕조의 법궁에다가 불교식 건물을 지어서 역사와는 딴판이 되게 한 데다가 복원에 걸림돌이 되게 만들었으니 학계에서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뒤에도 나와 있듯이 이 건물은 철거 예정이다.[26] 이러한 극치를 보여준 예가 무령왕릉 발굴 때의 박정희의 일화와 1994년부터 있었던 경주 경마장 유치 파동이었다.[27] 1875년 화재 때 강녕전을 비롯한 내전 건물들이 다 타버려 다시 지었을 때 행랑을 연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28] 신하들이 바깥에서 집무를 보는 구간이다.[29] 군주가 정치를 펼치는 구간이다.[30] 군주 일가가 쉬는 구간이딘.[31] 지금의 세종대로광화문 광장이다.[32] 조선시대 한양의 안팎을 구분하는 성저십리까지 포함한 기준이다.[33] 중국은 황성의 정문인 천안문자금성의 정문인 오문 사이에 사직단과 태묘가 있다. 즉, 황성 안에 사직단과 태묘까지 있다.[34] 창덕궁 돈화문은 조금 다르다. 문서 참조. 고려의 만월대 승평문이 돈화문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추정한다.[35]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다고 원납전당백전 같은 뻘짓을 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인과 관계로 보면 오히려 흑역사 중 하나다.[36] 중종이 조광조를 숙청하기로 결심한 후, 1519년(중종 14년) 11월에 남곤, 심정 등 훈구 세력들을 신무문을 통해 승정원도 거치지 않고 왕궁에 들여보냈다.[37] 대한민국 미술 대전. 문화 예술 진흥원이 주관하는 종합 미술 전시-관람 행사로 1982년 이전에는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로 불리기도 했다.[38] 국립 중앙 박물관도 제실 박물관을 전신으로 삼고있다.[39] 이 때문에 용의 눈물, 왕과 비, 명성황후, 뿌리깊은 나무(마지막회에 한함) 등 실제 경복궁에서 촬영된 드라마에는 민속박물관 건물이 그대로 노출되어서 조선시대에 20세기 건축물이 목격되는 기괴한 풍경이 연출된다. 사실 세트가 아닌 실제 궁에서 촬영된 사극에서 흔히 찾아볼수 있는 오류다. 찬란한 여명에서는 민속박물관은 물론이고, 심지어 매표소가 노출되기도 했다.[40] 10월 22일 제외, 매주 화요일은 휴궁일[41] 13년 가을부터 일일 입장객 수 제한을 두었으며, 그에 따라 입장객 수 보도 자료를 배포하지 않고 있다.[42] 경복궁 홈페이지 공지에는 삼각대 반입 금지라고 명시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