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7-11-20 02:49:28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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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석굴암불국사해인사 장경판전종묘창덕궁수원 화성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 화순, 강화고인돌 유적조선왕릉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양동남한산성백제역사유적지구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이름 정식명칭 석굴암과 불국사
영어 Seokguram Grotto and Bulguksa Temple
프랑스어 Grotte de Seokguram et temple Bulguksa
국가·위치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5년 지정번호 736
등재기준 (i)[1], (ⅳ)[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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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窟庵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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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명칭 한글 경주 석굴암 석굴
한자 慶州 石窟庵 石窟
영어 Seokguram Grotto
분류번호 국보 24호
소재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873-243, 석굴암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 불전
시설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 774년

1. 개요2. 역사
2.1. 신라 ~ 조선시대2.2. 발견2.3. 일제 강점기2.4. 현대2.5. 견해
3. 예술적 측면4. 논란5. 각종 루머들6. 교통7. 기타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의 토함산 중턱에 있는 암자이다. 석굴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김대성이 만들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불교 문화재의 걸작이자 국보 제 24호. 현대에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산 아래의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입장료는 2016년 성인 기준 5천원. 불국사와는 별도의 요금이다. 5천원을 내고도 실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로만 지나가며 볼 수 있다. 매년 부처님 오신 날에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마저도 내부에선 사진 촬영은 임의로 금지된 상황이다.

2. 역사

백 년 동안의 석굴암 사진

2.1. 신라 ~ 조선시대

신라 경덕왕때 재상인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서 혜공왕 10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설화도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김대성 문서 참조. 그때는 석불사로 불렸으며 석불사로도 이 문서에 들어올 수 있다. 유홍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도 석불사로 언급된다.

조선 시대 숙종 29년(1703년), 영조 34년(1758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고 하나, 1909년 재발견되었을 당시 본존불의 코가 깨져 있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으며 "천장의 1/3이 무너지고 구멍에서 흙이 내려오고 있으니 이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경주도 평범한 지방도시로 위상이 떨어지고[3] 불교도 숭유억불 정책으로 세가 줄어드는 와중에 석굴암도 산 속에 있다는 점까지 겹쳐 차츰 잊혀지고 방치되었다.

2.2. 발견

한일합병 직전인 1909년, 잊혀져 있던 석굴암을 발견한 것은 경주의 한 우체국이었다. 토함산의 동산령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배달 가던 우체부가 범곡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보니 입구에는 문이 있고 천장은 무너져 있었던 석굴암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석굴암의 보존 상태는 최악이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다. 특히 본존불의 코는 깨지고 연화대도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다고 한다.

2.3. 일제 강점기

경술국치 이후 일본에 반출될 뻔하기도 했으나 현지 관리가 이를 거절하였고,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이곳을 시찰한 뒤 석굴암을 제자리에 두되 현지에서 보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한국에 남아있게 되었고 보수가 시작되었다.[4]1913년 10월부터 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였고, 1914년 8월 말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 해체한 후,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차단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유럽이 자국의 문화재를 복원하듯 당시의 최첨단 건축기법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석굴 밖에 외벽이 세워졌고 외벽과 석굴 사이에 콘크리트가 채워졌다. [5] 그 결과는 당시 과학으로는 몰랐던 문제 중 하나로서 시멘트가 화강암을 손상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석굴암의 구조를 전부 파악하지 못한채 공사를 강행하여 내부벽과 불상 표면에 엄청난 양의 결로와 이끼가 나타났다.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드는 문제가 나타나자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한 보수공사를 실시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당시 보수 공사 비용은 당시 돈으로 22,726원. 지금 가치로 대략 38억 원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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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복원하기 전의 석굴암 모습. 돔이 붕괴되어 있다. 완전히 뒤틀리고 붕괴하고 있던 석조 건축물은 구멍만 조금 떼우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고 완전히 해체, 복원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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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해체된 석굴암.

그러나 당시 일본 실무진들은 대형 고대 석조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했다. 당시 현지의 석공 장인들에게 조언[6]을 구하거나 이들을 공사에 참여시키지도 않았다. 현장의 조선인은 잡역 인부를 빼고는 모두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었던 것. 또한 조선인들도 완전히 잊고 있었던 석굴암의 '제대로 된 사진'이나 '기록'은 당연히 없었다. 복원 이전에 남아있는 사진, 자료들은 대체로 일본인이 남긴 것이다. 문제는 그 사진과 자료도 지금의 복원 작업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만약 있었다면 해방 후 보수공사마저 이런 식으로 이루어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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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공사 후 다 조립하지 못하고 방치된 석굴암 석재들.

만약 해체보수를 매뉴얼대로 제대로 했다면 이 석재들은 다시 조립되어 원상태로 끼워져 있던지, 아니면 최소한 어느 지점에 있던 몇 번 석재 같은 메모라도 남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제대로 된 기록의 보존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해체 공사를 추진한 것.

2.4.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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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잘못 복원된 석굴암. 현재까지 이 내부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참고로 팔부신중은 일제가 보수해놓은 굴절된 형태가 올바른 것이었지만 이후 보수공사에서 한국측 학자들이 자료부족으로 인해 다시 펴놓은 것(…)[7]

그뒤에 장면 내각과 박정희 정권 때 다시 재보수를 했지만 콘크리트를 떼어내도 모자랄 판에 그 위에 다시 돔형으로 콘크리트를 다시(!) 타설했다. 당시 유네스코에서 온 석조문화재 전문가까지 초빙해서 추진한 공사였으나, 우습게도 그 문화재 전문가는 결정이 난 뒤에야 국내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이건 안되겠다. 하면 안된다."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복구공사 취소 및 재설계로 입장을 바꿨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 조언을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 그 결과는 더 미칠듯한 내부 습기로 금세 나타났다. 게다가 이 습기로 인해 내부에 이끼까지 끼자 이를 제거한답시고 고압 증기를 이용한 세척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훼손이 더 생긴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서울대 기계공학과 김효경 교수가 투입되어 석굴암 내부를 완전히 밀폐하고 그 안에 에어컨을 가동함으로써[8] 석굴암은 본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완전통제구역이 되어버렸다. 본래 설계도만 봐도 참배객이 들어와서 석굴암 본존불 주위의 10대 제자상과 11면 관음상으로 둘러진 방을 한 바퀴 돌면서 참배하는 구조임을 생각해 본다면 뼈 아픈 결정. 하지만 일단 습기는 제거해야 했기에 김효경 교수 팀은 완전 통제 및 에어컨 설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2013년 11월 현재 대좌의 균열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 결국 긴급 점검에 들어갔다고 한다. 또한 장기적으로 원형 복원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2015년 8월 29일 기준, 보수공사 완료 공지 안내문이 올라왔다.

2.5. 견해

  • 강희정 서강대 교수는 이 복원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없었던 것인 양 발견됐다고 선전한 점, 과거 유물에 대해 찬탄하면서도 조선의 현실이 '쇠락한 문명'이라 강조되었던 점 등을 들어 석굴암이 일제에 의해 변모된 조선 근대의 표상, 제국주의의 성공적 지배의 상징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9]
  •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이런 결로 현상을 해결해 주었던 것은 석굴암 밑을 흐르는 냇물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석굴암의 상황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콘크리트를 완전히 없애고 냇물이 흐르던 처음 그대로 놔두는 것이라고 한다. 좀더 자세히 설명한 프랑스 뻬르삐냥 과학국가박사 이종호의 글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이태녕 박사는 석굴암은 본래 지하에서 용출되는 물이 굴의 바닥에 있는 암석 기초층을 관통하여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의 보수공사 때 이 지하수를 다른 곳으로 방출되도록 구조를 변경한 것도 석굴암 훼손에 한몫 했다고 지적했다. 원래의 배수방법은 굴 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해서 벽면에 결로 현상이 생기는 것을 막았는데 이를 변경하였기 때문에 습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일제가 1910년대 처음으로 석굴을 보수하기 이전에 했던 기초 조사의 평면도를 보면, 원형 주실의 뒤쪽과 2시 방향의 바로 옆면에 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샘물의 양은 10초에 1리터나 되는 많은 양으로 일년 내내 쏟아져 나왔다. 결로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여름, 차가운 샘물이 석굴 밑의 석재 아래로 흐르면 바닥면의 온도가 낮아진다. 벽면이나 석불의 외면에 비해 바닥 면의 온도가 낮으면 이슬은 바닥 면에서만 생긴다. 이러한 원리를 석굴암을 만든 신라의 석공들이 터득했기 때문에 일년 내내 샘물이 콸콸 쏟아지는 샘물 바로 옆에 석굴을 짓고 그 밑바닥으로 샘물을 흘러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석굴암에서 습기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석굴 내부가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마디로 밀폐구조를 강요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원형대로라면 완전히 개방된 구조이기 때문에 대기의 온도가 상승하면 내부의 표면 온도도 통풍에 의하여 함께 상승하므로 결로가 생기지 않는데, 광창과 창구를 모두 막고 전면을 목조 암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 하지만 위 주장에 대해 “신라인의 과학정신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자연 원리에 위배되는 어리석음의 극치”라며 샘물 위 축조설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3. 예술적 측면

석굴암 본존불은 한국 불교미술사의 석불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며, 이때를 기점으로 이후의 석불들은 조형적인 완성도에서 점차 쇠퇴하는 측면이 있다.

남북국시대의 신라는 성덕왕 때부터 전제왕권이 수립되고 효성왕~경덕왕 초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신라의 전제왕권이 극성기를 맞던 때였으며 화엄종과 같은 종파불교가 전제왕권의 이념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주는 국제도시로 변모하고 당, 인도, 페르시아 문화가 직접적으로 수입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예술적 특징은 성당(盛唐)의 사실주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신라화된 모습을 보여줘서 '이상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예술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즉,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조형적으로 완벽한 불상을 만들었다. 중국에 영향을 주었던 인도 간다라 미술의 영향도 고려된다.

석굴암 본존불은 이상적 사실주의에 바탕한 육감적인 관능성을 보여준다. 쇄골 표현이나 허리와 엉덩이는 완전히 일직선이라거나... 불상의 표정은 자비롭다기보다는 왕을 연상케하듯 근엄하고 덩치가 크고 남성적인 느낌이 철철 흐른다. 그 이유는 위에 서술한 전제왕권 강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경덕왕의 얼굴이 모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조각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조각중 하나다. 보통 석조 조각은 비교적 무른 대리석(모스경도 2~3)을 이용하는데 비해 석굴암은 암석중에서 가장 단단한 암석중 하나인 화강암(모스경도 6~7정도)을 깎은 조각 난이도로서는 최상위의 조각이라 할 수 있겠다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 새겨진 11면 관음은 중국 보경사 11면 관음과 상당히 유사하다.

4. 논란

그런데 석굴암 불상에는 논란이 있다. 첫 번째는 조성 연대 문제다.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751년에 중건되었다고 나오지만 문제는 저자인 일연도 정확한 조성 시기를 몰랐다는 것. 그리고 완공된 것은 774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신라 불교미술은 중대와 하대의 양식이 서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은 석굴암이 중대 양식이냐 하대 양식이냐를 결정하는 문제.

어쨌든 오랜 시간을 두고 건축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문제인 모든 조각상들의 양식이 불일치하는 문제가 생겼다. 본존불을 1양식으로 규정하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석가의 10대 제자상을 2양식, 사천왕, 인왕상, 팔부중상은 3양식으로 규정할 때 1양식과 3양식의 조형적 미감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본존불이 최정점이라면 팔부중은 그에 비해서 세밀함이 덜하고 양감이 부족하다.

세번째 문제는 본존불의 명호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 것이다. 명호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 불상의 명호에 따라 주변에 배치된 조각상들의 명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수인(手印)은 별인 중에서도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바닥을 보이게 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데 항마촉지인은 석가불만 취하는 수인이다. 그래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석가여래로 규정되어 왔지만 이게 석가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신라 불교 조각상의 경우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도 아미타불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음에도 석가불이 아닌 아미타불이다. 또한 창건자인 김대성 관련 설화를 보면 아미타불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신라에서 이런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 나온 이유는 당시 신라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삼국 시대에는 미륵이 어느 나라에 강림하느냐에 관심을 쏟느라(...) 미륵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때는 전쟁 때 희생된 전몰자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정토 사상에 기반한 아미타 신앙이 유행했고 그 당시 제작된 불상은 우견편단을 하고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학계에서 석가여래라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본존불 주변에 있는 10대 제자상 때문이다. 10대 제자는 석가불에만 따라붙는 상이며 아미타불은 제자상이 없다. 무엇보다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 새겨진 11면 관음의 유무인데 관음보살은 석가불을 호위하는 보살이다.[10] 어쨌든 이런 이유로 학계에서 석가여래를 주장하는 사람의 비율은 9, 아미타불을 주장하는 사람은 1 정도로 석가여래라는 것이 중론이다.

5. 각종 루머들

대중들에게 대단히 인지도가 높은 문화재이다 보니 각종 루머들이 많이 있다.

본존 이마에 박힌 보석(호박?)을 일본인들이 빼돌렸다거나 그 보석에 햇빛이 닿으면 반사돼서 일본까지 간다는 뭔가 초현실적인 것이 많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이 이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실 마의태자가 2명이고 1명은 금강산에 나머지 1명은 양평 용문사에 들어가 죽었다. 그것에 그의 시신과 함께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일본군이 전쟁 말 일본 본토로 가져가려 한다는 이야기가 주 내용이다.

돔형지붕의 뚜껑이 파손되어 있는데 이건 일제가 훼손한게 아니라 건설 과정에서 부서진 것이다. 실제 삼국유사에도 기록이 있는데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를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대성이 속이 상해 있다가 깜빡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시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창건자가 돌 깨뜨려놓고 천신이 붙여주셨으니 그냥 쓰자고 얼렁뚱땅 넘어간 것(...)[11]
다른 루머로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 방향이며 이는 신라의 호국 불교 사상을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방향이 대충 비슷하긴 하나, 정확히는 동지 때 해가 뜨는 방향에 더 가깝다. 반면 '석굴의 방향이 동짓날 일출 지점’이며 ‘동해의 아침 햇살을 본존불 백호에 맞추려는 거룩한 의도로 석굴이 지어졌다.’는 논지가 일본 신화 아마테라스 신의 태양 숭배에 가깝다는 비판도 있다.

원래는 채색된 불상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역사스페셜에서도 다룬적이 있다.

6. 교통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려면 터미널이나 경주 시내에서 바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불국사까지 와서 환승해야 한다. 어차피 경주 와서 석굴암만 달랑 보고 경주를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불국사를 보는 김에 석굴암도 같이 보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불국사까지는 터미널이나 경주역, 시내에서 10번, 11번, 700번을 타면 된다. 신경주역에서는 35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700번을 이용하면 된다. 10번11번은 같은 노선으로 순환 방향만 다를 뿐이다. 불국사 주차장 맞은편(10, 11번 시내버스 정류장 맞은편)에서 12번을 이용하면 된다. (단, 불국사를 관람한 뒤 바로 석굴암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래쪽 주차장까지 내려올 필요 없이 매표소 광장 앞길을 건너가면 거기에도 정류장이 있다.) 불국사에서 매시 40분 출발이다. 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돌아오는 버스는 매시 정각 출발.

혹은 불국사 부근에 있는 토함산 정상으로 가는 산길을 이용해서 40분 정도 걸어 올라가는 길이 있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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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의 배치를 기하학으로 해석했던 요네다 미요지의 석굴암 분석이다. 옹호론도 많지만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 기하학을 이용하여 건축물을 배치하였다는 뚜렷한 근거는 없으며, 지나친 서구중심적인 해석이고 실측이 좀 달라서 비판이 많이 있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신라시대 수도 →고려시대 3경 중 동경 → 조선시대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좀 큰 도시 정도.[4] #[5] 석굴암 보수에 동원된 인력들이 모두 기차철로를 부설하는 토목기술 인력이었다. 당연하게 그들은 기차 철로의 터널처럼 석굴을 수리하겠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최첨단 건축기법 중에 하나가 콘크리트였다. 미국의 시카고에서 시작한 마천루가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지는 등 당시에 가장 단단한 구조물이자 방수 등에 적격이라는 평가가 있으므로 일본인들이 재빨리 도입한 것이다. 소위 당시로서는 최첨단기술을 석굴암 복원에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과학자들은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암 벽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몰랐다. 최첨단 공법인 콘크리트는 당장에는 가장 단단하고 시공이 편리한 공법으로 각광을 받았으나 화강암과는 상극이었다. 현재는 시멘트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시멘트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건설한 경우 적어도 건물이 준공된 후 2∼3년 동안은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다. #[6] 당시 현지 석공들이 일본에서 온 기술자들에 비해 뭘 알겠냐는 생각을 하겠지만 첨언하자면 이들은 그곳에 온 기술자들보다 더 오랫 동안 돌을 만지며 살아온 숙련된 전문가들이다. 현재의 문화재 관리에도 관련 학자들 사이에 목공, 석공 등 관련 장인들이 끼어 있는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7] # 사실 일제의 석굴암 복원이 본래 배치 형태를 벗어난 것은 생각보다 없었다.[8] 에어컨 항목에도 나와있듯 국내 최초.[9] #[10] 관세음보살 항목을 보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나오며, 11개의 얼굴 중 하나는 아미타불이다. 불교미술 연구자인 문명대 동국대 교수는 관세음보살이 석가여래와 아미타여래 둘 다의 협시보살이었지만, 통일신라 시대에는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 원칙으로 관례화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 따라서 11면 관음상이 석가여래를 증거한다는 것은 다른 방식의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11] 유홍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장기간 공사에 지친 석공들이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뚜껑을 끼우고 완공한 것으로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