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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公州 武寧王陵과 王陵園 Tomb of King Muryeong and Royal Tombs\, Gongju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번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 |
수량/면적 | 541,524.4㎡ |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
시대 | 백제시대 중기 | |
소유단체 | 공주시 등 | |
관리단체 | 공주시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백제역사유적지구 Baekje Historic Areas Aires historiques de Baekje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충청남도 공주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976 | |
등재연도 | 2015년 | |
등재기준 | (ii)[1], (iii)[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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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武寧王陵 / Tomb of King Muryeong무령왕릉의 내부 모습[3] |
충청남도 공주시에 위치한 백제 제25대 임금 무령왕의 무덤이다.
2. 상세
무령왕릉의 도면
무령왕릉은 연화문(연꽃무늬) 벽돌로 아치를 쌓은 아치형 벽돌무덤으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 금은 장신구, 석수(돌짐승), 동자상, 청동거울, 도자기, 지석 등이 있다. 무령왕릉에서 있었던 대규모 발굴 덕분에 백제시대에 장사를 어떻게 지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양나라, 북위, 왜 등 동아시아 각국들과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 국가들의 문화교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문화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고분이다.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자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이다. 무령왕릉 말고도 무왕의 무덤으로 거의 확실시 되는 쌍릉도 있는데, 쌍릉은 주인은 확실시되었지만 역시 백제의 멸망 후 천수백년간 이미 여러 번 도굴당한 상태이고 어찌되었든 무령왕릉처럼 주인을 확실시할 지석이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심증은 충분하지만 물증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공식적인 명칭이 무왕릉이 아닌 쌍릉인 이유이기도 하다.
무령왕릉이 만약 피장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면 송산리 고분군 7호분으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무령왕릉마저 도굴되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예술품이나 국제무역수준은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백제의 장신구들을 비롯해서, 무덤의 주인과 건설 경위가 담긴 묘비석이 발견된 점이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다. 이 석판을 통해 무덤이 무령왕과 왕비의 것이라는 점, 왕과 왕비를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한 후에 정식 왕릉으로 옮기는 백제의 매장 풍습, 땅과 지하의 신들에게서 '토지를 사서' 무덤을 쓰는 개념 등이 알 수 있었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가 무령왕릉이 미발굴 고분으로 백제 시대 그대로 발견되었던 덕분이다. 도굴이 어려운 구조인 신라왕릉과 달리 백제왕릉은 출입구가 따로 존재하고 돌무지에 깔려있지도 않은 굴식 돌방, 벽돌무덤 양식이었기에 백제가 멸망해 꾸준한 관리가 중단된 이후에는 도굴도 매우 쉬웠다. 따라서 무령왕릉처럼 도굴을 피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 한국판 투탕카멘급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무령왕릉은 금제 관장식 등의 호화로운 유물 덕분에 해방 이후 고고학 최대의 발굴로 기록되었다. 또한 중국 양(梁)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 양식의 건축으로 현재까지 고분 연구에도 대대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는 어수룩한 발굴 때문에 후회가 가득한 최악의 졸속발굴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립공주박물관이 기존 '무령왕릉실'을 '웅진백제실'로 개편하면서 무령왕과 왕비의 실제 목관을 2017년에 46년 만에 최초로 공개했다.#
3. 최고이자 최악의 발굴
중앙이 무령왕릉.
1971년 발굴 당시 영상 |
무령왕릉 발굴 초기 상황(왼쪽)과 발굴 전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오른쪽). |
무령왕릉 입구의 단단한 경화토를 제거한 후 입구에 있는 폐쇄석을 제거하는 모습(왼쪽)과 무령왕릉 입구 진입 직후의 상황. 통로 앞에 석수와 지석이 놓여 이곳이 무령왕의 능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
몇 달이 걸렸어도 그 나무 뿌리들을 가위로 하나하나 잘라서 장신구들을 들어냈어야 했다. 고고학 발굴의 ABC가 미처 생각이 안 난 것이다.
- 당시 발굴단장 김원룡(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 회고록 중
그러나 정작 국내 학자들이 한 발굴이었음에도 그 과정이 너무 처참했다. 도굴이 한 번도 되지 않은 귀중한 왕릉을 발굴하였지만, 현장 사진을 온전히 찍어두고, 보통은 몇 년은 걸릴 법한 발굴 조사를 17시간, 겨우 하룻밤 만에 해치워 버린 것이다. - 당시 발굴단장 김원룡(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 회고록 중
이는 1910년대 일본 고고학자들이 실시한 조선고적조사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조선고적조사도 일본인들이 남의 나라 유적이랍시고 대충 했다 해서 엄청나게 까이는 현실인데, 그런 일본인 학자들마저도 최소한 고분당 열흘 이상은 조사했다. 심지어는 유물들을 자루에 마구잡이로 쓸어담았다는 증언도 있다. 이 정도면 전문적인 '발굴'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고, 차라리 도굴보다도 못할 지경이다.[4] 비록 유물은 구색잡기로나마 일단 다 챙겼지만, 유물 못지않게 중요한 유물의 배치를 비롯한 현장 기록이 완전히 박살났다. 남은 자료는 급하게 끝낸 부실한 실측자료와 약간의 사진, 그리고 사진 기자들의 조악한 사진뿐이다. 무령왕릉의 발굴이 한국 고고학계의 최고이자 또한 최악의 발굴로 꼽히는 이유이다.
발굴 전문가들 또한 조악하고 무식한 당시의 발굴 행태를 수치스럽게 여긴다. 심지어 당시 무령왕릉 발굴 책임자이자 한국 고고학계의 거물이었던 서울대학교 김원룡 박사조차 후일 자신의 수기에서 "무령왕릉 발굴은 내 삶의 가장 큰 수치이자 과오"라고 밝힌 바 있다.
3.1. 이러한 일이 벌어진 이유
일제강점기 국내의 모든 유적 발굴은 대부분 일본인 학자들이 독점해 주도하였으며, 더러 서양인이 하기도 하였다. 한국인들은 단순 일꾼이나 낮은 위치의 역할만 맡았다. 광복과 함께 일본인 고고학자들은 한꺼번에 떠나버렸기 때문에 해방 이후 한국 고고학계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성장해야 했다.그나마 독립 직후 일본인들이 한국을 떠날 때 한국 역사학자들이 일본인 발굴 전문가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한 명을 거의 반 강제로 억류해서 속성 과외를 시켰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때 기술 배운 김에 경주에서 무덤 아무 거나 하나 파면서 연습해보자고 팠던 무덤이 호우명 그릇이 나온 호우총이다. 그리고 경주의 신라 왕릉 조사는 호우총 이후 거의 중단됐다가, 바로 이 무령왕릉이 대서특필된 후에야 박정희의 지시로 다시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해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조사하였다. 따라서 무령왕릉이 발견된 무렵의 발굴자들은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희대의 발굴을 취재하던 기자들 역시 지금으로 말하면 기레기 소리를 들어도 무방한 안하무인한 기자들이 많았다. 유물이 발견되자 어떻게든 내부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고 온갖 이기적인 행위를 하였는데, 일부는 책임자를 폭행하고 유물을 파손하기까지 하였다. 현장이 이렇듯 전혀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자들은 유물이 도난될 수도 있다고 조급해져 급한 마음에 기록도 없이 유물을 쓸어 담았다.
석수 유물을 나무 상자에 올려놓고 그대로 꺼내는 장면. 당시엔 취재진과 발굴팀, 구경꾼들이 한데 뒤엉켜 불야성을 이루었다.
위 부러진 석수의 뒷다리 사진도 졸속발굴의 예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석수의 뒷다리는 발굴 당시부터 부러져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무덤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석수를 만들고나서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렸다고 한다.
게다가 유물 이송과 보존 과정에서도 발굴조사단과 지역 주민과의 마찰이 일어났다. 1970년대 당시 공주박물관의 시설이 미흡해서 서울로 이송하여 보존해야 했는데 공주읍의 주민들이 소식을 듣고는 공주의 유물을 영구히 서울에 가져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5] 몰려와서 단 한 점도 서울로 가져가게 할 수 없다고 농성을 벌였다. 이에 발굴단은 "유물이 삭아 없어지면 당신들이 책임 질 거냐." 하고 응수해서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그 뒤 새로운 국립공주박물관이 건립되어 유물 대부분은 공주로 다시 돌아왔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왕릉을 훼손했다고 온갖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며, 심지어 발굴단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전화까지 있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에도 공주시민들은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시민들이 백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공주 고적 보존회를 직접 만들어 공주박물관을 세웠다. 그러나 아무리 유물에 대한 관심이 많아 지역에 보존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랬다고 해도 협박, 그것도 살해 협박은 잘못된 것이다.
철야발굴 상황. 1500년전 왕릉 발굴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발굴팀과 취재진이 어수선하게 뒤엉켜 있다.
고대 왕릉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유물을 보고 싶어서 발굴을 독촉해서 이런 사단이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근거로 박정희의 금팔찌 사건이 있다. 당시 공주박물관 김영배 관장은 유물을 보자기에 싸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는데, 박정희가 발굴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다면 별도의 차량을 보내어 타고 오게 했을 것이다. 발굴 이전까지 박정희는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심지어 유물을 몇 점 가져와보라고 전화해서 가져온 유물 중 팔찌를 보고 "이거 순금인가?" 하고 접었다 폈다 했다고 한다.
금팔찌 사건 또한 낭설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현재는 김영배 관장과 김원룡이 박정희에 대한 충성 경쟁과 공명심 때문에 자발적으로 청와대에 유물을 보여주러 갔고, 이 유물이 중요한 줄 모르는 박정희가 팔찌를 접었다 폈다 했다는 게 정설이다. 김영배 관장과 함께 청와대로 간 김원룡의 수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끝으로 무령왕릉과 함께 잊지 못할 또다른 사건은 왕릉 출토의 금제 장신구들을 들고 장관과 함께 박 대통령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몹시 기분 좋은 표정으로 유물들을 들여다보더니 왕비의 팔찌를 들고 "이게 순금인가." 하면서 두 손으로 쥐고 가운데를 휘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팔찌는 정말 휘어졌다 펴졌다 하는데 아차아차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가슴은 철렁철렁했지만 소년처럼 신기해하는 대통령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박정희는 이때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그는 고고학에 무지했고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대통령일지라도 얼마 전까지 군인이었던 비전문가가 고고학에 해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역사에 관심이 있다 할지라도 고고학에도 관심을 갖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 자체가 드물다 보니 역사학 전공자와 비전공자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역사 유물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로 따질 정도니 말 다한거다.
고고학에 대해 이런 무지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박정희는 무령왕릉의 발견에 꽤나 흥미가 돋았는지 후일 천마총, 황남대총을 발굴할 때에는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발굴과정을 촬영하도록 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단원들에게는 금일봉을 무려 100만 원씩이나 지급하는 등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고 고고학자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당시 인부들 하루 인건비가 600원, 발굴조사원이 1,200원, 소갈비 1대가 500원" 박정희 본인은 관광업 진흥이나 민족주의적 자긍심 고양 등 다른 쪽에만 관심이 더 많았지 고고학 자체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없는데다, 무려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니까 학자들도 어쩔 줄 몰라 유물이 나오면 보존처리는 뒷전이고 대통령에게 보여주기 바빴고 거기서 술을 따라 마시기도 했다. 박정희는 이후 신라 궁터에 호텔을 지으라는 터무니 없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
박정희는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했던 것처럼[6] 황룡사 9층'목'탑도 콘크리트로 복원하라고 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황룡사 9층 목탑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모른다. 여러 학자들의 추정 설계도만 있을 뿐이다. 당연하게도 콘크리트로 황룡사 9층탑을 복원함은 아무 의미도 없는데다 절 터 부지가 훼손됨을 피할 수 없기에, 이 점을 들어 박 전 대통령을 말려서 겨우 무산되었다고. 훗날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조선총독부 건물을 부순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1992년 대선 때 '경주 경마장 유치'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고고학이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야말로 오십보 백보이다.
요약하자면 무개념 기레기들은 밀고 들어오고, 인근 주민들은 고분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주변에 우르르 모여들었다. 심지어 이들을 막는 경찰관들도 조차 발굴현장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발굴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혼돈의 카오스였고, 마음이 급해진 발굴단원 한 사람은 곡괭이질을 하다가 자기 발등을 찍어버리는 웃지 못한 일까지 일어났다고 한다.
한마디로 종합하면, 경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발굴단도, 기자도, 주민들도 무지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이라는 당시 신생국가 자체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성숙한 지식을 얻을 기회가 없었고, 결국 당대 사람들의 인식이 미숙한 탓에 역사에 남을 실수를 한 것이다. 발굴 관계자들은 이 졸속발굴을 후회한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이때 발굴현장에 몰려든 기자나 현지 주민들 때문에 난장판이 되었던 경험에서 배운 덕에 현재는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에는 꼭 현장 지휘부를 설치하고 경비를 세움을 중시한다. 천마총 발굴 때에는 전체 브리핑 외에는 기자들의 보도를 최대한 통제하고, 발굴단원들이 기자들의 취재에 일부러 응하지 않거나 발굴현장에 철조망을 치는 등 현장을 거의 봉쇄한 상태로 발굴을 진행하였다.
황남대총 발굴을 앞두고 이루어진 '시험 발굴'격이었던 천마총 발굴에서는 '대박'이라고 할 만한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나왔다.## 무령왕릉의 실패는 후대 한국 고고학의 반면교사가 된 것이다. 어찌보면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관심을 두어야 이유를 유물 발굴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
4. 발굴 이후
무령왕릉은 발굴 직후 한동안 폐쇄됐다가 유물을 모두 수습한 뒤 빈 고분은 송산리 고분군 5, 6호와 함께 일반 관광객에게 1976년 2월부터 공개되었다. 당시 무덤 입구를 거쳐 무덤방까지 관람객들이 들어가서 무덤방 입구에 설치된 유리창 너머로 안쪽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한다.이 때 문제가, 무령왕릉의 봉분은 이미 허물어져 있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재단장과 공개 과정에서 마치 신라왕릉처럼 봉분을 거대하게 쌓았다. 여기에는 백제 왕릉이 신라 왕릉만큼은 웅장해야 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경쟁심 때문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직설 무령왕릉 177페이지). 아무튼 무덤방 위에 지나치게 거대하게 봉분을 쌓았고 무게중심도 무덤방 중심 부분에서 서북쪽으로 기울어진 곳으로 이상하게 쌓았다보니 봉분 무게 때문에 왕릉 무덤방이 찌그러지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다. 이 때문인지 후일 1998년 5~12월에 공주시의 의뢰를 받아 무령왕릉을 포함한 송산리 고분군의 보수 상태를 점검했는데 무령왕릉은 내부에 금이 가고 봉분 내부로 물이 스며든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왕릉을 이후 크게 보수했다.
게다가 1997년에는 왕릉이 기울고 물이 샌다는 보도가 나왔다. # 이어 2012년에도 무덤방 벽면과 그 앞에 관람객 차단 유리벽에 물기가 맺히고 곰팡이가 피는 현상이 관찰됐다.
결국 발굴 26년째인 1997년 7월 15일 무령왕릉을 포함한 송산리 고분군 5, 6호분의 석실들은 관람목적의 개방이 전면 금지되었다. 당시에는 1년간 한시적 폐쇄였지만 이후 지금까지도 다시 일반 관광객에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그 대신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을 2003년 만들어 관광객들이 대신 내부 구조를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무령왕릉 유물의 출토상태를 두고 도굴이 한 번쯤은 있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있지만,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다만 이도학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김헌창의 난 때 김헌창의 시신을 고총에서 파냈다는 것을 근거로 김헌창의 시신을 무령왕릉에 파묻었다가 신라가 나중에 그걸 파내는 과정에서 훼손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했지만, 무령왕릉이 처음 발굴될 때 전돌로 입구가 봉인된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고 추측을 철회했다. 대신 무령왕의 왕비가 합장될 때 동성왕의 잔당들이 무령왕에게 불만을 품고 무덤에 몰래 잠입해서 무덤을 훼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추정을 내놓았었다.
참고로 앞선 내용처럼 일제강점기 시절의 국내 유적은 일본인들이 전부 발굴과 연구를 독차지했는데, 대부분 조선총독부 박물관 차원에서 담당하였다. 반면에 공주 일대 무덤을 발굴한 가루베 지온은 공주고등학교 교사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로서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박물관 측 일본인 조사자들과 유적, 유물의 발굴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박물관 또는 박물관 소속의 일본인 고고학자들의 발굴은 어쨌거나 박물관으로 유물이 옮겨져 전시되었던 반면 가루베 지온은 결정적으로 발굴된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려서 문제였다. 일제의 도굴성 발굴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제 고분들의 봉분이 낮기에 고분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봉분이 낮은 덕에 불행을 모면한 셈이다. 가루베 지온에 대한 자세한 것은 『가루베 지온의 백제연구』(윤용혁, 서경문화사, 2010년)참고.
5. 번외: 무령왕릉의 저주?
투탕카멘의 저주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령왕릉도 발굴과 관련된 괴담이 있다. 발굴 당일 입구를 파헤치는 순간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내렸고, 이후 발굴과 관련된 사람들이 잦은 사고를 당하던 중 김원룡 단장은 빚에 몰려 전 재산을 처분하고 남의 차를 빌려 무령왕릉으로 가다 아이를 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 김원룡 단장은 아예 유서를 연구실 책상머리에 붙여두었다는 소문도 있다. 또한 고분의 금목걸이를 훔쳤던 연구원이 빚 때문에 파산하며 저주를 더욱 확실시했다물론 믿거나 말거나지만, 당시의 부실 발굴과 겹쳐져 발굴 관련 당사자들에게 마음의 큰 짐이 되었음이 사실이다. 심지어 한국 주류 사학계에서 편찬한 <한국생활사박물관> 4권 백제생활관에서도 이 내용을 책 한쪽에 실어놓았을 정도. 이 책에 따르면, 당시 발굴 관련자들은 "도굴꾼도 이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자책했다고 한다.
원래 발굴현장은 유적의 저주를 갖다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사고가 나기 좋은 환경이다. 전면발굴을 한다면 나무를 모두 제거해서 비 오면 토사가 쓸려나가기 딱 좋다. 또한 지하 저장고나 무덤, 또는 구석기 유적은 수 미터 이상 지하로 파 내려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벽이 쓸려나가지 않도록 하는 안전시설을 설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파내려간 땅의 층위를 관찰해야 하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안전시설을 설치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 지하로 내려가고자 사다리를 타기도 하지만, 흙으로 경사로를 만들어 (흙을 퍼내는 데 쓰는) 외발수레를 사용하거나 흙으로 만든 계단을 이용하는데, 이런 것들은 상당히 잘 무너진다. 이렇게 사고가 나기 쉬운 조건인데, 거기에 발굴자들이 심리적으로 부담이나 죄책감을 가지는 상황이라면 작은 사고가 생겨도 '혹시 저주를 받은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그것이 더욱 크게 받아들여지는 것.
6. 출토 유물
무령왕릉 내부의 유물 출토 상황 사진. 왼쪽 윗부분에 왕의 두침(베개)가 보이고 그 아래로 관을 이루었던 목재들이 있다. 오른쪽에 있는 항아리는 흑색 유약을 바른 병. |
무령왕릉 내부의 유물 배치 상태를 복원한 그림. |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무령왕릉은 도굴에 가까울 정도로 급하게 발굴이 마무리되어 제대로 된 실측도면조차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위의 그림은 사진과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무덤의 입구에서 무덤방을 바라보는 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왕은 오른쪽 왕비는 왼쪽이었던 것을 알 수 있고 무덤의 입구 방향으로 머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나무 관 조각들에서 일본산 금송(金松)과 삼나무 재질이란 것이 밝혀졌다. 금송은 일본의 고유종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지 않는다. 칠지도처럼 백제와 왜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하게 해주는 유물이며, 왜에서 목재를 수입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왕의 다리를 받치는 족좌와 왕비의 머리를 받치는 목침의 경우 왕의 것은 검은 옻칠과 금으로 장식했고, 왕비의 것은 붉은 단청과 금칠을 했다. 고대 사회에서 옻칠 > 단청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물.
2009년 12월 8일에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던 뼛조각 4개가 무려 38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위에 설명했듯 발굴현장이 워낙 개판이었던지라 바닥에 있는 유물들을 자루로 봉투에 쓸어담아 가져가다 보니 정말 뒤늦게 발견된 것. 오죽하면 이 뼛조각을 발견한 국립중앙박물관원들이 비난을 받자 '억울하다.'고 하소연했을까. 무령왕릉 발굴이 당시에 얼마나 혼란스러웠고 답이 없었는지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이 뼛조각은 무덤의 주인인 무령왕의 유골로 추정되지만 안타깝게도 사료 측정 불가 판정을 받은 상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 가운데 1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 국보 제154호 무령왕 금제 관식
- 국보 제155호 무령왕비 금제 관식
- 국보 제156호 무령왕 금귀걸이
- 국보 제157호 무령왕비 금귀걸이
- 국보 제158호 무령왕비 금목걸이
- 국보 제159호 무령왕 금제 뒤꽂이
- 국보 제160호 무령왕비 은팔찌
- 국보 제161호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
- 국보 제163호 무령왕릉 지석
- 국보 제164호 무령왕비 베개
- 국보 제165호 무령왕 발받침
7. 무령왕릉 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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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의 묘지석(위)과 왕비의 묘지석(아래).
대한민국 국보 제163호 | |
무령왕릉 지석 武寧王陵 誌石 | |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웅진동)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지석 |
수량/면적 | 2개 |
지정연도 | 1974년 7월 9일 |
제작시기 | 백제 |
무령왕의 묘지석과 무령왕비의 묘지석은 국보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왕비의 묘지석 뒷편에는 매지권에 대한 내용이 써있다. 무령왕의 묘지석을 보면 왼쪽부터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피장자가 무령왕과 무령왕비라고 논란의 여지 없이 확인할 수 있었음은 함께 묻힌 지석(誌石) 덕분이다. 지석이란 사자의 신원이나 묘의 소재 등을 기록하여 함께 묻는 석판, 또는 도자기 판을 의미한다. 무령왕릉에서는 지석 2매가 출토되었는데, 청회색 섬록암에 해서체로 묘지 등을 기록한 장방형 석판이다. 왕의 것과 왕비의 것이 있는데 크기는 세로 약 35 cm, 가로 약 41 cm, 두께 약 5 cm이다.
지석에 적힌 글은 다음과 같다.[7]
寧東大將軍百濟斯 / 麻王 年六十二歲 癸 / 卯年五月丙戌朔七 / 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 / 癸酉朔十二日甲申 安厝 / 登冠大墓 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 지석 앞면>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 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뫼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 지석 앞면>
未=================亥
丁=================壬
午=================子
丙=================癸
巳=================丑
==戌=============己==
==辰==乙==卯==甲==寅==
<무령왕 지석 뒷면>
후술하겠지만 방위를 표시한 간지도(干支圖)이다.(=표시는 공백 부분. 즉, 일부러 저렇게 쓴것이다. 마법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쉽다.)丁=================壬
午=================子
丙=================癸
巳=================丑
==戌=============己==
==辰==乙==卯==甲==寅==
<무령왕 지석 뒷면>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 / 終 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 未朔十二日甲午 改葬 / 還大墓立 / 志如左
병오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서방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2월 갑오일인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비 지석 앞면>
병오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서방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2월 갑오일인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서 정식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비 지석 앞면>
錢一万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 寧東大將軍 / 百濟斯麻王 以前件錢 詢土王 / 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 買申地爲墓 故立券爲明 / 不從律令
돈 1만 매 이상 1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이천석질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해서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증을 삼으며 모든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무령왕비 지석 뒷면>
무령왕 지석은 앞면에 왕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묘 위치의 방위를 나타내는 간지도로 구성되었는데 간지도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교적 색채는 매지권 말미의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는 구절 등 이외에도 몇몇 부분이 있다. 추측이 분분했으나 중국 남조의 무덤에서 유사례가 발견되어 도교의 주문으로 밝혀졌다.[8] 무령왕비 지석은 앞면에 왕비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토지신에게 묘자리로 정한 땅을 구입했음을 증명하는 매지권이다.돈 1만 매 이상 1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이천석질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해서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명증을 삼으며 모든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무령왕비 지석 뒷면>
왕비가 왕보다 후에 죽었다. 따라서 왕비의 지석이 제작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먼저 왕의 사후 27개월 간 시신을 빈전에 모시는 빈장 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능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고, 후에 왕비를 안치할 때 매지권을 적은 지석을 뒤집어 왕비의 묘지를 새겼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당대 백제에서는 중국식 삼년상의 풍습이 완전히 정착했음을 알수 있다. 비근한 예로 광개토왕릉비에도 24개월간 시신을 빈전에 모시고 3년 후(이 경우에는 만 24개월)에 장례를 치렀다고 서술하였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에서는 삼년상의 풍습이 널리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6세기 초반까지 순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풍습이 고구려와 백제와 비슷했는지 달랐는지는 의문의 영역이다.
왕비의 묘지에는 왕비가 병오년 12월에 사망하자 '유지(酉地)'에서 상을 치르고 3년이 지난 기유년 2월에 개장하여 대묘를 세웠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유(酉)는 십이지에서 동물로는 닭, 방위로는 정서쪽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유지란 '정서쪽에 있는 땅'이란 뜻이다.
고대에는 고위인사가 죽었다고 시신을 곧바로 장지에 매장하지 않았다. 일정기간 다른 곳에 두어 조문을 받거나 망자의 명복을 빌거나 제사를 지내는 등 의례를 거행하였는데, 이 절차를 빈(殯)이라고 부른다. 빈을 하는 동안 임시로 관을 안치하는 곳이 바로 빈전(殯殿)이다.
중국의 예기에 따르면 천자가 빈을 하는 기간은 7개월, 제후는 5개월, 사대부는 3개월이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죽었을 때 예기의 규정을 따라서 다섯 달 동안 빈전에 관을 모시고 빈을 하였다. 그러나 무령왕릉의 지석이나 일본의 기록에는 빈을 2년이나 3년씩 하는 사례들이 있었다. 빈을 하는 기간을 일부러 길게 하여 세력권 내의 여러 유력인사들이 모두 조문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충성서약의 장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마침 공산성 서쪽에서 빙고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된 바, 유지(정서쪽 땅)가 정지산의 빙고 유적을 가리키고, 그곳을 백제가 빈전으로 삼았다고 추정한다.
7.1.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무령왕릉 지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무령왕릉 지석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무령왕릉 지석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대백제이야기): 무령왕릉 지석
- e뮤지엄: 무령왕릉 지석
- e뮤지엄: 무령왕릉 지석
- 두산백과: 지석
- 두산백과: 무령왕릉 매지권
7.2. 국보 제163호
이 지석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이 2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넣은 매지권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표면에 5∼6㎝의 선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새겼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왕비의 지석인데 가로 41.5㎝, 세로 35㎝이며, 2.5∼2.8㎝ 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새겼다. 선을 그은 부분은 13행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뒷면에는 매지문(買地文:땅을 샀다는 문서)을 새겼다. 원래 매지권은 무령왕을 장사지낼 때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 왕비를 합장하였을 때 이 매지권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에 관한 묘지문을 새겼던 것이다.
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풍습이 담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표면에 5∼6㎝의 선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새겼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왕비의 지석인데 가로 41.5㎝, 세로 35㎝이며, 2.5∼2.8㎝ 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새겼다. 선을 그은 부분은 13행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뒷면에는 매지문(買地文:땅을 샀다는 문서)을 새겼다. 원래 매지권은 무령왕을 장사지낼 때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 왕비를 합장하였을 때 이 매지권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에 관한 묘지문을 새겼던 것이다.
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풍습이 담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8.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의 조사 기록
자세한 내용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문서 참고하십시오.9. 진위 논란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처음 발굴 시, 무덤 입구를 해체한 흔적이 있었다. 입구 하단에서는 접착제를 사용하여 벽돌을 정연하게 쌓은데 반해 입구 상단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덕지덕지 메웠다. 입구 상단에 사용된 벽돌은 쓰다 남은 벽돌을 재사용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처음 발굴 시, 무덤 내부의 유물들이 흩어져 있었고 내부 배수로의 벽돌이 유실되어 있었다. 따라서 무령왕릉 발굴 전에 누군가가 무덤 내부에 침입했을 가능성이 있다.무령왕릉의 크기는 420cm X 272cm X 293cm 로 왕릉 치고는 크기가 작다. 또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구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다른 무덤들은 전부 도굴되었는데, 무령왕릉만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왕릉에 있는 지석에는 왕의 생전의 행적과 공적 등이 적혀 있는데, 무령왕릉 지석에는 왕의 행적과 공적이 전혀 없고, 지석 내용이 빈약하다. 또한 다음 문구에서는 글자를 잘 못 쓰고 있다.
寧東大將軍百濟斯 / 麻王 年六十二歲 癸 / 卯年五月丙戌朔七 / 日壬辰崩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셨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셨다.
위 문구에서 붕(崩)이라는 한자가 쓰여 있다. 그런데 붕(崩)은 천자가 죽었을 때 쓰는 용어이다.[9] 무령왕릉 지석에서는 장군의 죽음에 붕(崩)을 사용하고 있다.
지석에는 사마왕(斯麻王)이라고 적혀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사마(斯摩)는 휘이며 시호가 아니다.(단, 위덕왕도 위덕왕의 휘인 창왕으로 불리기도 하니 크게 특이한 점은 아니다). 또한 지석에 있는 마(麻)자와 삼국사기에 있는 마(摩)자가 다르다. 사마왕(斯麻王)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한자와 일치한다. 또한 지석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렇듯 무령왕릉에는 수상한 점이 많다.
10. 매체에서의 등장
한중일 삼국이 나오는 온라인 게임 거상에서 중저렙 사냥터 무령왕릉으로 등장한다.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왕릉의 발굴 당시 이야기를 다뤘는데 역시나 자신들의 실책임을 자책하는 고고학자들의 모습을 그렸다.
대항해시대 4에선 조선 한양에서 발견되는 유적인데 출토품은 황당하게도 신라 금관이다!
11. 여담
- 건업에서 온 남조 양나라 기술자들이 건설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발굴된 벽돌에 새겨진 글자로 밝혀냈다. 건업은 오늘날의 난징이다. 이로서 당시 백제와 양나라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유물이 나오게 되었다. 기사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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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위 사진은 실제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이 아니라 무령왕릉 근처에 내부를 재현한 전시실 안에서 촬영한 것이다.[4] 도굴꾼들조차 본인들이 캐낸 유물의 가치가 손상되지 않도록 외형을 유지하고 역사적 가치를 증명해 줄 주변 환경의 정보는 보전한다.[5] 정상적인 발굴이었다면 몇년씩 걸리므로 이런 우려가 발생할 이유가 없지만, 상술했듯이 하루도 안 걸려서 유물을 쓸어가는 것이었으므로 지역주민들을 자극했을 것이다.[6] 결국 이 콘크리트 광화문은 철거 후 목재로 재복원했다.[7] / 표시는 지석의 원문에서 행갈음을 한 부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해석과는 무관하다.[8] 유사한 사례로는 急急如律令, 有天地敎如律令, 有私約如律令 등 구절이 있는데, 이를 기반으로 해석한다면 천신으로부터 (무덤에 쓸) 땅을 매입하였으므로 속세의 율령(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유사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부종율령'과 똑같은 구절은 아직 없기 때문에, 아직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9] 공자가 쓴 <예기 (禮記)> 에는 “천자가 죽으면 붕(崩)이라 하고, 제후가 죽으면 훙(薨)이라 하고, 대부가 죽으면 졸(卒)이라 하고, 선비가 죽으면 불록(不祿)이라 하고, 서인이 죽으면 사(死)라고 한다” 라고 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