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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82호 | |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龜尾 善山邑 金銅如來立像 | |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 국립대구박물관 (황금동,국립대구박물관)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수량/면적 | 1구 |
지정연도 | 1976년 4월 23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8세기) |
1. 개요
龜尾 善山邑 金銅如來立像.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고아면 봉한2리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시대의 금동 불상.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1)(좌측),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2)(우측)과 나란히 비교한 사진. |
높이 40.3㎝.
1976년 경상북도 선산군(현 구미시 선산읍) 고아면 봉한2리의 뒷산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동 불상으로, 국보 구 제183호, 국보 구 제184호 금동보살입상 2구와 함께 발견되었다. 이때 출토된 3구의 보살은 제작시기가 조금씩 다른데 그중 이 금동여래입상은 셋 중 가장 늦은 시기인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서기 600년대~70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등 뒤에 황금 광배가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진 상태다. 전체적으로 719년에 만들어진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과 비슷한 양식을 하고 있어 이 시기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비록 다른 통일신라시대 불입상 형식(佛立像形式) 불상들에 비해서는 형태가 단순하고 자세가 경직된 상태지만 황금으로 불상의 금형을 도금하고 법의의 주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통일신라 시대 금동불입상 초기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법의 형식(法衣形式) 금동불입상 중에서는 가장 초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이후 통일신라 전성기 양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1976년 4월 23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4. 국보 제182호
1976년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 봉한 2동 뒷산에서 공사를 하던 중 금동관음보살입상 2구(국보 제183, 184호)와 함께 출토되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불상들은 발견되기 70여 년전에 어느 농부에 의하여 부근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가, 몇년 뒤 현재의 장소에 다시 묻었던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왼손과 왼발 일부가 없어지고, 얼굴과 가슴에 약간의 녹이 있으나 도금 상태는 좋은 편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양감 있는 얼굴은 원만하며, 예리한 선으로 눈·코·입을 표현하였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몸에 달라 붙어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옷자락은 배부분에서 평행한 U자형의 주름을 이루고, 다리 부분에서 좌우로 갈라져 대칭을 이루면서 발목까지 드리워졌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이 앞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여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몸의 형태나 세부 표현이 부드럽고 단순하며, 옷주름이 정리되어서 단정한 인상을 주고 있는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생동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다소 경직된 자세와 고졸한 미소가 남아 있는 얼굴, 우전왕식의 착의 법, 뒷면에 작은 틀잡이 구멍이 있는 중공식 주조법 등에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양감 있는 얼굴은 원만하며, 예리한 선으로 눈·코·입을 표현하였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몸에 달라 붙어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옷자락은 배부분에서 평행한 U자형의 주름을 이루고, 다리 부분에서 좌우로 갈라져 대칭을 이루면서 발목까지 드리워졌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이 앞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여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몸의 형태나 세부 표현이 부드럽고 단순하며, 옷주름이 정리되어서 단정한 인상을 주고 있는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생동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다소 경직된 자세와 고졸한 미소가 남아 있는 얼굴, 우전왕식의 착의 법, 뒷면에 작은 틀잡이 구멍이 있는 중공식 주조법 등에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