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20 15:51:02

왕흥사

파일:백제 왕흥사 디지털 복원.jpg
백제 왕흥사 디지털 복원 출처
파일:210620023882405_thumb_1024_w.jpg
왕흥사 터. 앞쪽의 강은 백마강이며, 산은 부소산성이 있는 부소산이다.
파일:문화재청 CI_상하.svg 부여 왕흥사지
扶餘 王興寺址
분류번호 대한민국 사적 제427호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37-2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면적 550,402㎡
지정연도 2001년 2월 5일
제작시기 백제 위덕왕 23년(577년)
1. 개요2. 역사3. 특징4. 발굴조사5.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5.1. 국보 제327호
6. 관련 기록7. 기타8. 사적 제427호9. 외부 링크

1. 개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위치한 삼국시대 백제의 왕실 원찰(願刹).[1]

2001년 사적 제427호로 지정하였다.

2. 역사

왕흥사는 백제 위덕왕이 577년 창건했다. 기존에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법왕이 600년에 창건했다고 추정했지만, 발굴조사에서 연도가 음각된 청동 사리함이 출토되자 그 명문을 따라 577년에 창건한 것으로 정설이 바뀌었다. 《삼국유사》에는 법왕이 이 절을 짓기 시작했지만 무왕이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고 이름을 미륵사라 지었다는 구절이 있어 처음에는 미륵사와 왕흥사가 같은 절이라고 생각했지만, 현대 연구에서는 애초부터 별개의 절이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의자왕 20년(660)에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병사 7백여 명이 여기에 모여 신라에게 저항했다가 태종 무열왕에게 일주일 만에 진압되고 절 역시 폐허가 되었다. 이후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고려시대 사찰 유물이 나왔으므로, 다시 절이 들어섰으나 어느 시점에서 완전히 폐사가 되어 빈 터로 방치된 듯하다. 이후 일대에 민가 10여 채가 들어서 마을이 생기면서 유적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하지만 이는 이 일대가 유적이라는 것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고, 왕흥사 또한 그저 문헌에만 등장하는 절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잊혀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1934년, 왕흥사는 우연히 부여군 규암면 신리 일원에서 기와 조각이 발견된 것으로 인해 세상에 다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 기와에는 ‘王興(왕흥)’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고, 이 유물은 그간 명확하지 않았던 왕흥사의 위치를 특정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후 1946년에는 고려시대의 석조불좌상 1좌가 발견되는 등 왕흥사의 중요성이 점점 부각되면서 1982년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고, 이후 2001년에는 사적 제42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익산 미륵사를 17년간 발굴하고 숨을 돌린 1995년, 미륵사를 조사했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다음 조사대상을 왕흥사로 선정하여 문화재청에 신청하였다. 조사의 목적은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왕흥사가 미륵사로 불렸는지, 아니면 익산의 미륵사가 왕흥사라 불렸는지 등등 왕흥사와 미륵사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 신청에 따라 1998년에 발굴에 필요한 예산이 책정되었다. 하지만 발굴조사가 바로 시행될 수는 없었는데, 상술했듯 그 위에는 이미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주변 토지를 매입하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작업을 선행해야 했다. 이러한 준비작업은 2000년 즈음 마무리되어 그해 9월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3. 특징

  • 왕흥사는 사비시기 백제의 다른 여러 사찰처럼 동서 양측의 부속건물과 중앙의 탑과 강당, 강당 뒷편에 승방을 갖춘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를 하였다. 제석사지, 정림사도 구성이 비슷하다.
  • 특이하게도 절 전방에 거대한 진입로가 있는데, 백제시대에는 강이 절 앞까지 닿았던 듯하다. 현재는 세월이 지나면서 강물의 흐름이 바뀌어 강에서 많이 떨어졌다.
  • 부소산성과는 백마강을 사이로 두고 제법 가까운 곳에 있는데, 백제 시대에는 낙화암 근처 나루에서 배를 타고 이곳으로 건너왔을 것이다.
파일:wangheungsa_.jpg
2007년 문화재청에서 공개한 왕흥사 복원도
파일:wangheungsa_kbs.jpg
2008년 KBS에서 제작한 왕흥사 복원도
파일:백제 왕흥사 디지털 복원.jpg
2021년 문화유산기술연구소에서 제작한 왕흥사 복원도

4. 발굴조사

2000년 9월부터 11월까지 이뤄진 제1차 발굴은 절터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배수로 때문에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고, 2001년 10월부터 12월까지의 제2차 발굴, 2002년 3월부터 7월까지의 제3차 발굴은 몇몇 건물터를 찾아냈으나 큰 성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후 2003년 10월부터 12월까지 실시한 제4차 발굴에서는 고려시대 혹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와 1934년에 발견된 것과 같은 '왕흥' 명 명문기와가 발견되었다. 이 기와는 고려시대 것이었는데, 이는 백제 때 왕흥사가 망한 뒤에도 이곳에 절을 세우고 똑같이 왕흥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증거였다.

이외에도 터 일대에서는 회랑과 부속건물의 터가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정림사지와 같이 기와로 기단을 쌓은, 이른바 '와적기단'이 발견되었다. 또한 터 남쪽에서는 동서로 길게 쌓은 석축 일부가 확인되었는데, 이 구조물의 바깥쪽은 옛날에는 저습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다란 석축이 물과 맞닿았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나오는 왕이 배를 타고 건너와 왕흥사로 들어갔다는 사실과 어느 정도 맞았고, 이 구조물이 절의 입구였다는 추측이 나왔다.

2004년 4월부터 6월까지 이뤄진 제5차 발굴에서는 제1차 발굴 때 발굴단을 좌절케 했던 배수로의 서쪽을 조사하였다. 이 조사에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회랑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예전 2001년에도 회랑으로 보이는 건물터가 확인되었기에 혹시 대칭구조가 아닌가 생각한 이들도 있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사실로 드러났다. 동서회랑이 확인되자 왕흥사의 추정 도면을 그릴 수 있었고, 중심부의 정사각형 건물지는 아마도 목탑이 있었던 자리였으리란 추측이 나왔다. 이처럼 큰 성과를 낸 제5차 발굴 이후에도 2005년과 2006년에는 주변의 가마터를 조사하는 제6차, 제7차 발굴이 이뤄졌다.

2007년 3월에는 그간 쌓인 흙과 주변에서 굴러 들러온 돌들을 굴삭기를 불러 치우고 발굴에 애로사항이 꽃피게 했던 배수로를 제거하는 등 발굴에 방해가 될 것들을 제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조사에서는 저번에 발굴된 동서 석축과 수직으로 만나는 장대한 남북 석축을 발굴했고, 그 뒤에는 목탑 터를 발굴했는데, 개발의 여파인지 목탑 터에는 남은 것이 거의 없었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배수로 아래에 묻혔던 PVC 배관뿐이었다. 이대로 끝났나 싶었지만 터의 중심부에서 심초석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일변되었다. 배수관을 묻을 때 땅을 파던 굴삭기의 삽이 심초석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간 것이었다. 삽이 조금이라도 살짝 옆으로 지나갔다면 심초석은 부숴져서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이후 2007년 6월에 PVC 배관을 제거하고 배관이 있던 자리와 심초석의 주변을 조사하였는데, 그곳에서는 금으로 만든 장식품들, 유리구슬, 탄목금구 등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끝도 없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사리공양품으로 파악되었으며, 그렇게 발굴하고도 남은 유물들이 많이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장마가 왔고, 결국 보존작업을 거친 뒤 철수하면서 발굴작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장마가 끝난 뒤, 비록 보존이 완벽하게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남은 것들을 수습했다. 그해 10월부터는 심초석을 조사했다. 심초석 안에는 사리공이 있음을 증명하는 돌 뚜껑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열자 흙탕물로 가득한 사리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그냥 흙탕물만 있는 줄 알았지만, 사리공 안의 물을 제거하자 청동으로 만든 사리합이 발견되었다. 사리합은 사리공 안에서 물에 잠긴 채 천수백 년간 있었기 때문에 사리공의 바닥에 딱 붙어 있었다. 사실 청동은 단단해 보이지만 내구성이 강하지는 않은 데다가, 천수백 년 전에 제작되어 물에 계속 잠긴 터라 까딱했다간 깨지기 십상이었기에 극도로 세심하게 작업하여 사리함을 사리공 밖으로 꺼내야 했다.

사리합을 닦아내자 겉면에 음각한 글자가 있음을 발견했지만 주변 발굴을 먼저 해야 했기 때문에 명문 분석은 나중으로 미루었다. 그 후에는 사리공 주변을 조사했더니 역시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외에도 목탑터와 동서 석축에서는 기와들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절에서 흔히 보이는 연화문 수막새를 비롯한 서까래기와, 치미, 장식기와, 인각와 등이었다.

모든 작업이 일단락된 뒤에는 이번 발굴의 메인 유물인 사리합을 보존 처리하고 조사하였다. 사리합에 잔뜩 붙은 녹을 제거하자 음각된 명문 총 29자가 드러났는데, 학자들이 분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정유년이월 십오일백제 왕창위망왕 자립찰본사 리이매장시 신화위삼)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왕흥사 사리함 음각문》

명문에서 말하는 정유년이란 서기 577년이다. 577년은 삼국사기 연표에 따르면 위덕왕 24년이지만, 당대 백제에서는 위덕왕 23년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고려시대 삼국사기의 연표는 즉위년칭원법 기준으로 작성했지만, 백제 당시에는 아마도 유년칭원법을 사용한 듯하다. (즉위년칭원법과 유년칭원법의 차이는 연호 항목 참조). 이는 위덕왕이 왕흥사를 600년에 창건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23년 앞서고, 같은 책에 기록된 최초의 사리 봉안 기록보다 100년은 이르다.

그 뒤 사리합 안 내용물을 조사했다. X선 촬영으로 안에 뭔가 들어있음은 확인했지만 사리합을 발굴했을 때처럼 사리호 뚜껑 역시 단단하게 붙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열려면 얼마든지 열겠지만, 유물에 손상이 없이 열려니까 난이도가 급상승한 것이다. 안전하게 열 방법을 찾지 못하여 모두들 발을 구르던 차에 해결책이 등장했는데, 바로 당시 유행하던 만능렌치였다. 렌치를 사용하여 뚜껑에 틈을 만들어 개봉해낸 청동 사리합 안에는 은으로 만든 사리호가, 사리호 안에는 금으로 만든 사리병이 있었다. 사리병이 발견되자 과연 음각문에 기록된 대로 사리 3매가 들었을지 관심이 모였으나 아쉽게도 물밖에 없었고, 물 안에서 사리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리는 사라졌다고 결론 내리고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사리합 발견 뒤로도 발굴은 계속 진행되었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실시한 조사에서는 승방지에서 건물 지붕에 올리는 장식품인 치미를 발굴했다. 이 치미는 왕흥사 창건 당시 만들어진 듯한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치미 중 가장 오래되었고 동시에 일본에도 양식을 전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치미는 복원 후 2016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었다.

5.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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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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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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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포항 냉수리 신라비
  14.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1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75
  16. 초조본 아비달마식신족론 권12
  17. 초조본 아비담비파사론 권11, 17
  18. 초조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 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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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2
  21.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
  2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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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2.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3.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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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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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9.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0. 백자 ‘천’ ‘지’ ‘현’ ‘황’명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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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1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4.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15. 용감수경 권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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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8.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 나주 신촌리 금동관
  20.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2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22. 갑사 삼신불 괘불탱
  23.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24.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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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327호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扶餘 王興寺址 出土 舍利器
소재지 충청남도 부여군 충절로2316번길 34 (규암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분류 유물 / 불교공예 / 사리장치 / 사리장치
수량/면적 1건 3점(청동제사리합 1, 은제사리호 1, 금제사리병 1)
지정연도 2019년 6월 26일
제작시기 577년(백제 위덕왕 24)
파일:20190625513993.jpg

5.1. 국보 제327호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2007년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유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리기이다.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라는 출토지가 분명하고 청동제 사리합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577년(위덕왕 24)에 제작한 사실을 알 수 있어 절대연대가 확실할 뿐 아니라『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문헌기록을 보완할 수 있는 자료이다.

해당 유물은 백제 사비시기 위덕왕(威德王)에 의해 제작된 왕실 공예품으로서 공예사적 가치가 높으며, 죽은 왕자를 위해 발원된 기년명(紀年銘) 사리장엄구로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다.

공예사적인 측면에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전반적인 형태와 세부 구조물을 주조하고 접착한 기법과 표면을 깎고 다듬는 기법 등에서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백제 장인의 숙련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단순하고 단아한 형태와 보주형(寶珠形) 꼭지, 그 주위를 장식한 연꽃문양 등을 통해 525년 조성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銀製托盞) 등의 영향을 받아 7세기 전반 미륵사지 사리기에 조형적으로 영향을 끼친 6세기 후반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사유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절대 연대 및 백제왕실 공예품이라는 역사적․예술적 가치,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 제작 사리기라는 희소성, 우리나라 공예 및 조형예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 국보로 지정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

6. 관련 기록

법왕(法王)이 부여에 왕흥사(王興寺)를 처음 짓기 시작하고, 무왕(武王)이 35년에 걸쳐 왕흥사를 완성하니 이 절이 미륵사다.
삼국유사》 3권 흥법(興法) 법왕금살(法王禁殺)편
《삼국유사》에는 백제 법왕이 부여에 왕흥사를 짓기 시작했고, 이후 무왕이 이를 이어받아 절을 완성하고 이름을 미륵사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에 미륵사와 왕흥사를 같은 절로 보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삼국사기》에는 전혀 다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2년(600)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기를 허가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권27 법왕
이러한 상반된 기록 탓에 뭐가 맞는지에 대한 논쟁이 일기도 했지만 왕흥사지 발굴 중 출토된 사리기의 음각문을 해석하니 전혀 다른 내용이 나왔고, 결국 두 서적 모두 잘못된 기록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7. 기타

  • 엄연히 사적으로 지정된 유적임에도 불구하고 정비가 진행되지 않아 티가 나지 않는다. 여타 절터에서 볼 수 있는 흙으로 조성한 건물 유구도 없고, 울타리도 없이 달랑 진입용 도로만 조성했다.
  • 2010년에 인근에 수상공연장을 개발한다는 등 개발 이슈가 있었지만 환경에 관련된 논란이 제기되어 묻혔고, 결국 흐지부지되어 2020년이 다 된 현재 시점에도 왕흥사지 인근은 아무것도 없이 휑하다.
  • 시내에 몰린 부여군의 다른 유적들과 달리 혼자 백마강을 건너야 갈 수 있고, 자체 볼거리도 없으며 인근에 뭔가 있지도 않기에 방문객은 오면 신기할 수준이다. 그나마 백제문화단지가 근처에 있긴 하지만...
  • 백마강 건너편의 부소산성의 전망대에서 이곳을 조망할 수 있다. 다만 상술했듯이 별 티가 나지 않아 대충 봐서는 보이지 않는다.

8. 사적 제427호

부여 왕흥사지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에 창건(법왕 2년, 600)과 낙성(무왕 35년, 634) 관련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백제시대의 중요한 사찰유적으로서 1934년 왕흥명(王興銘)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1982년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에 사적 제42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00년부터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발굴조사 결과 목탑지, 금당지를 비롯하여 동·서회랑 및 동·서건물지, 강당지 및 서편부속건물지 등 사역 중심부의 건물지들을 확인하였으며 사역의 축대인 동서석축, 진입시설인 남북석축과 사역 동편 외곽에 백제~고려시대 기와가마터가 확인되었다.

2007년 제8차 발굴조사 중 사리공 내부에서 금제사리병, 은제사리호, 청동사리합의 3중구조로 안치된 사리기가 출토되었다. 청동사리합 동체 외면에는 상·하 양단에 2줄의 음각선을 돌리고 그 안으로 5자 6행 29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었으며 그 내용은 “丁酉年(577) 2월 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탑(또는 사찰)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왕흥사의 창건과 관련된 내용으로 문헌기록과 차이를 보여 왕흥사 창건시기를 밝히고 나아가 문헌 속 백제사에 대한 재검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왕흥사지 → 부여 왕흥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9. 외부 링크



[1] 원찰이란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는 절로, 이러한 풍습은 유교사상이 지배적이던 조선시대에서도 이어져서 조선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융건릉 근처에 용주사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