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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면적 | 문화재구역 36필지 11,055㎡, 문화재보호구역 70필지 195,453㎡ | |
지정연도 | 2024년 4월 9일 | |
제작시기 | 조선 숙종 41년~영조 30년 | |
위치 | ||
}}}}}}}}} |
<colbgcolor=#344c3c> 홍지문 및 탕춘대성[1] |
탕춘대성 성곽[2] |
[clearfix]
1. 개요
조선 시대의 성.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해 지은 성이다. 2024년 4월 9일에는 사적으로 지정되었다.2. 이름
인근 세검정에 있는 '탕춘대(蕩春臺)'에서 따왔다. '탕춘(蕩春)' 뜻은 '봄(春)을 질탕(蕩)하게 즐긴다'로, 연산군이 타락했던 시절에 이 일대에 있던 고찰 장의사(藏義寺)를 철거하고 정자 탕춘정(蕩春亭)을 지어 연회를 즐겼던 데에서 비롯했다. 연산군 폐위 후 탕춘정은 사라졌지만 이름은 오랫동안 남았고, 숙종 때 이곳을 지나는 성을 지으면서 탕춘대 이름을 붙인 것이다. 1754년(영조 30년)에 영조는 탕춘대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바꾸었는데, 성 이름은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한양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성(西城)'이란 별칭으로도 불렸다.
3. 역사
1390년대 중후반에 조선 조정에서는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도성을 쌓았다. 그러나 한양도성은 원래 조선의 수도 겸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방어상으로는 약점이 많았다. 소수의 방어군으로는 수비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성이며 숭례문과 흥인지문 주변의 저지대는 방어가 매우 힘들다는 점도 있었으며 해자가 없어서 방어에 지장이 온다는 점 등이었다. 그 중에서 상당히 큰 문제점은 주변에 가까운 산성이 하나도 없어서 유사시에 일단 대피할 곳이 없는 것과 육상에서 침공하는 적들이 주로 이용하는 서북방 방어가 취약하다는 점이었다.문종이 이를 간파하여 북한산에 산성을 쌓으려 했으나 백성들의 고역이 심하다하여 무산되었다. 그러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도성의 체계적인 방위가 절실하다고 느낀 선조가 다시 성을 쌓으려 했으나 전후 재정빈곤으로 무산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효종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도된 것은 숙종 때였는데, 청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30여 년 간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청나라 정세변화를 틈타 1711년(숙종 37년)에야 공사를 시작하여 6개월만에 완공했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북한산성이다.
북한산성 축조 7년 전인 1704년(숙종 30년)부터 1년 전인 1710년(숙종 36년)까지는 한양도성을 수축하는 등 숙종은 전대에 미처 시행하지 못했던 도성 방위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 탕춘대성을 지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탕춘대에 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이미 1702년(숙종 28년)에 나왔다.《숙종실록》, 음력 1702년 10월 5일 자 기사를 보면, 당시 도둑이 많이 생겨 조정에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신완이 창의문 밖 일대 지형도를 숙종에게 보이면서 "여러 군영이 힘을 합친다면 성 쌓기는 어렵지 않다"고 아뢰었다. 이후 1718년(숙종 4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공했다. 처음에 40일 정도 성의 절반을 축조했다가 겨울에 쉬었고, 다음해 봄부터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40여 일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성곽 둘레는 약 4km였으며, 성벽은 인왕산 동북쪽부터 시작하여 북한산 비봉까지 연결되었다. 탕춘대성은 이후 도성 방위를 위한 일종의 관문성(關門城)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사실 탕춘대성을 축조하는 문제가 순탄하게 해결된 것이 아니라서 조정 내에서 싸움이 있었다.
- 축조를 찬성하는 측에서는 북한산이 신라 이래 전략적 요충지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경험으로 생각해보건데 수도 방위를 촘촘하게 하기 위해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방어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축조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북한산성과 한양도성 사이에 방어선을 형성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으며 병력도 모자라고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여기서 축조를 찬성하는 측의 손을 들어준게 숙종이었다. 숙종이 이렇게 탕춘대성에 열정을 보인 이유는 아래와 같이 짐작되고 있다.
- 북한산성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유사시 피난이 쉬워야 한다. 그런데 한양도성의 북측과 북한산성의 남측은 험악해서 최단코스로 가기 곤란하고 평지를 따라서 좀 멀리 돌아서 가야 하는데 병자호란 같이 적의 기병이 급속전진하는 경우 피난을 제대로 가지도 못하고 중도에 잡히게 된다.
- 피난길을 거리상 최소화하려면 결국 등산을 해야 하는데 산길도 정비되어 있지 않고 방어선도 없는 산을 탄다는 거 자체가 엄청난 시간과 힘이 들어가면서 별로 멀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나마 꼭 필요한 짐과 물자도 제대로 못옮긴다. 따라서 북한산성과 한양도성 사이에 방어시설물이 있어야 한다.
- 북한산성, 탕춘대성, 한양도성이 하나로 연결되면 서로간에 안전한 통로가 만들어지며 한양도성의 물자를 탕춘대성을 통해서 북한산성에 이동시킴으로서 장기간의 농성전도 가능하고 한양도성이 함락되더라도 탕춘대성과 연결된 북부 성곽지대를 확보함으로서 적이 한양도성을 제대로 이용못하게 할 수 있다.
탕춘대성을 완공한 후 조정에서는 군사적인 시설들을 성 내에 여럿 설치했다. 우선 옛 탕춘대 터[3]에 연무장을 지었고, 유사시를 생각하여 쌀을 비축할 선혜청 창고와 군량창고인 평창을 두었다.[4] 또한 한성부와 경기도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총융청 기지도 이곳에 설치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비용 및 인력 문제로 인해 숙종이 원래 구상했던 탕춘대성의 동쪽 성벽은 축조되지 못하고 단지 서쪽 성벽만 완공되었으므로 탕춘대성은 독자적인 성으로는 작동하지 못한 채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는 통로같이 사용되게 된다.
그 이후로는 성벽을 실제 쓸 일이 없어서 점점 붕괴되다가 을축년 대홍수로 대타격을 입어서 21세기에 들어오면 탕춘대성 대부분은 헐리거나 무너졌고 일부만 남아있다.
1976년 6월 2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받았다.
2022년 12월 한양도성, 북한산성과 함께《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
2024년 4월 9일에는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4. 시설
4.1. 홍지문
<colbgcolor=#344c3c> 홍지문[5] |
탕춘대성의 정문으로 1719년(숙종 44년)에 건립했다. 숙종이 친히 '홍지문(弘智門)' 현판을 써서 걸어두었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한성(漢城) 북쪽(北)'에 있다 하여 '한북문(漢北門)'으로 부르기도 했다. 다만, 옛 지도에는 한결같이 ‘한북문’으로 적혀있는데, 임금이 내린 이름인 ‘홍지문’으로 표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colbgcolor=#344c3c> 홍지문[6] |
<colbgcolor=#344c3c> 홍지문 복원을 다룬 《대한뉴스》 영상 |
4.1.1. 구조
- 통여장의 바로 밑 부분 석축에 석누조 2개가 달려 있다. 이는 비가 올 때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전부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으며, 추녀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는 이익공이다.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놓았으며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홍예 문 내부의 천장은 반자로 덮어 놓은 모습이다.
4.2. 오간수대문
<colbgcolor=#344c3c> 오간수대문[9] |
홍지문 바로 옆으로 홍제천이 흐른다. 이 물이 탕춘대성을 빠져나갈 수 있게 만든 구조물인 오간수대문이 홍지문과 붙어있다. 역사는 홍지문과 같다.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 5개를 만들어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水口)로 기능하게 했다. 또한 석축 위에 총구 3개를 낸 여장을 8개 올렸다. 수문 전체의 높이는 5.23m, 길이는 26.72m, 폭은 6.8m로, 수구의 폭은 3.76m이고 높이는 2.78m이다. 홍예 가운데에는 서수를 장식해두었다.
5. 여담
-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지나며, 상명대학교와 가깝다. 언덕을 내려온 후 홍제천 산책로로 가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홍지문이다. 단, 비가 많이 올 경우에는 홍제천이 불어나기 때문에 출입이 통제되니 주의하자. 강한 소나기가 지나가도 물이 금세 불어나며 장마철에는 다리 넘치기 직전까지 물이 차기 때문.
[1]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내손안에서울[2] 사진 출처 - 서울역사편찬원.[3] 현재 서울세검정초등학교 자리.[4] 오늘날 종로구 평창동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5] 사진 출처 - 서울역사편찬원.[6] 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7] '인(仁)'은 동쪽을 나타내며, 동대문 이름(흥인지문)에 들어가 있다. '의(義)'는 서쪽을 나타내며, 서대문(돈의문) 이름에 들어가 있다. '예(禮)'는 남쪽을 나타내며 남대문(숭례문) 이름에 들어가 있다. '지(智)'는 북쪽을 나타내는데, 북대문 이름에는 '지'가 들어가 있지 않다. 원래는 '지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미의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으나 이후 중종 때에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뜻의 '정(靖)'자로 바꾸어 '숙정문'이 되었다.[8]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9]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