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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摠戎廳조선의 오군영을 구성하는 군영. 북한산성을 방위했다.
2. 역사
1624년, 전해에 발발했던 이괄의 난 때 반군이 관군의 저지선을 너무도 쉽게 뚫고[1] 한성을 점령하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도성의 북부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국제정세에서 조선과 후금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영 악화일로를 걸었던 만큼 총융군은 처음부터 수도를 직접 방위하고 왕을 호위하는 목적이라기보다, 후금과 조선 사이에 일어날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해 수도 방어를 증강하기 위한 목표로 설립되었다.보유병력이 설립당시에는 겨우 2천에 불과하였으나, 병자호란 직전에는 2만명으로 확정된 총융청은 북한산성 방어를 담당하며 약 200여년간 조선의 도읍이었던 한양의 북부 방어선을 책임졌다. 헌종 연간에 국왕 주도하에 총위영(摠衛營)으로 개편되어 정조 연간의 장용영(壯勇營)처럼 다른 군영들의 병력을 이전받아 세를 확장하기도 하였으나, 헌종이 사망하고 철종이 즉위하자 원상 복구되었다. 1884년 고종의 개혁정책에 따라 폐지되었다. 총융청의 대장은 총융사(摠戎使)였다. 장부 상 병력은 2만여명에 달할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규모를 자랑하였다.[2]
하지만 상당수가 속오군으로 구성되었던 수도 외곽 방어 군영이었던만큼 '실제 전력'이 2만 3,500여명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이는 남한산성을 보위했던 수어청도 비슷하다.), 주력군인 속오군이 후기로 갈수록 유명무실화되가는 것을 감안하면 총융청의 병력은 별무사 750명, 별파진 100명을 포함해 약 2~3,000여명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보는게 옳다. 나머지 병력은 유사시에만 소집되어 북한산성 방위를 맡았으나 정기적인 훈련이 갈수록 줄어들어 결국
3. 복식
총융청의 군사들은 당시 조선군의 표준 복장이였던 전립과 청전복[3]을 착용하였으며 갑옷은 입지 못했던것으로 보인다.(기록에 없음)
4. 여담
'총융청'이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고려 관련 문제의 오답 선지로 출제되었는데, 모르는 수험생들이 많아서 오답자를 양산했다.(...) 정답 선지는 역분전의 지급이었다.[1] 사실 이괄의 난 당시 반군은 조선이 후금에 맞서기 위해 육성했던 북방의 최정예 병력이었던만큼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2] 북한산성 일대는 지금도 군사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더 말할 것도 없이 청와대가 위치해있으며 여기를 넘으면 종로 시가지와 광화문광장이 코앞인데다 남산을 제외하면 방어선이 사실상 없어서 한강까지도 손쉽게 진출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제56 보병사단 및 제1경비단 등 수방사 직할부대 및 대통령경호처 지원부대, 경찰 소속의 101경비단, 202경비단 및 서울기동본부 병력, 종로경찰서 산하 병력 등 수많은 국군 및 경찰병력이 지금 이 시간에도 북한산 일대 방어를 위해 상시 대기하고 있다.[3] 마병의 경우 홍색 소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