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대한민국의 사적 | |
<colbgcolor=#315288> 강화 홍릉 江華 洪陵 Hongneung Royal Tomb, Ganghwa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129-2번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려시대 | |
수량/면적 | 31,415㎡ | |
지정일 | 1971년 12월 29일 | |
시대 | 고려 고종 46년(1259) | |
소유단체 | 산림청 | |
관리단체 | 강화군 | }}} |
<colbgcolor=#fedc89> 홍릉의 현재 모습[1] |
일제강점기 촬영된 홍릉[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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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23대 국왕 고종이 안장된 왕릉이다.고려왕릉의 대부분은 북한의 개성시 인근에 있지만,[3] 고종은 여몽전쟁기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그곳에서 붕어한 군주인 탓에 강화도에 왕릉이 조성되었다.
2. 상세
1259년 음력 6월 30일 고종이 신하인 유경(柳璥)의 집에서 붕어하자 같은 해 음력 9월 18일 당시 태손이던 충렬왕이 고종을 홍릉에 장사지냈다. 당시 고종의 아들인 원종은 원나라에 체류중이던 관계로[4] 고종의 장례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3일간 상복을 입었다.이후 시간이 흐르고 왕조가 바뀌며 두 번의 전란이 온 국토를 휩쓰는 동안 존재가 잊혀졌다가, 현종 5년(1664년) 강화유수로 재직하던 조복양(趙復陽)[5]이 현종의 명을 받아 보수하였다. 이후 관원들이 해마다 순찰을 돌며 능역을 관리하였고, 고종 4년(1867년) 고종이 위치가 확인된 고려왕릉 전체를 일시에 정비하면서 '고려고종홍릉(高麗高宗洪陵)'이라 적힌 표석이 세워졌다.
현재의 모습은 1971년 대한민국의 사적[6]으로 지정된 이래 잔디를 식재하고 꾸준히 봉분 주변과 탐방로를 정비하며 만들어졌다.
홍릉은 남한에 남아있는 6기의 고려왕릉 중 하나이긴 하지만,[7]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의 무덤임을 생각하면 능의 규모도 작고 초라한 편이다. 고종이 붕어한 때가 고려가 가장 어렵고 힘들던 시기인 여몽전쟁기였던 탓에 왕릉 조성 사업을 대규모로 진행할 사정이 되지 못했던 시대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고종이 직접 남긴 유조(遺詔)[8]의 영향도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덕이 부족한데 중한 자리를 맡은데다가 병까지 위중하다. 왕위는 오래 비워둘 수 없으며 하물며 나의 원자는 그 덕(德)이 상국에까지 잘 알려져 있으니 명하여 왕위를 잇게 하노라. 무릇 너희 해당 관사(官司)에서는 각기 일을 집행하는데 있어 새로 즉위한 왕의 명령을 따르라. 새로 즉위한 왕이 사행(使行)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국가의 중요한 일은 태손(太孫)의 명을 따르도록 하라. 능묘[山陵]의 제도는 검약에 힘쓰고,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상복을 입고[易月之服], 3일이 지나면 〈상복을〉 벗도록 하라.
- 《고려사》 <고종 세가> 중. 임금의 마지막 유조(遺詔).
- 《고려사》 <고종 세가> 중. 임금의 마지막 유조(遺詔).
그래도 남한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고려왕릉으로서 학술적·문화적 가치가 크다.
3. 구조
<colbgcolor=#fedc89> 능역 구조도면[9] |
<colbgcolor=#fedc89> 봉분 단면도[10] |
이외에도 봉분 주위를 지키는 석수(石獸) 4마리가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 세워져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colbgcolor=#fedc89> 석인상과 난간석주[14][15][16] |
3단은 별다른 시설물이 없는 평지이지만, 남아있는 유구와 인근에 위치한 능내리 석실분의 사례로 봤을 때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정자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4. 위치
주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129-2번지. 고려산 중턱쯤에 있어서 경사가 심하며 인적도 드물다. 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캠핑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자차를 가지고 방문할 목적이라면 이곳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야 한다.5. 외부 링크
6. 사적 제224호
홍릉은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무덤이다.
이 당시는 정치적으로 최씨 집권시기였으며 밖으로는 거란·몽골의 침입 등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고종 18년(1231)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고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을 한 조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4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고려고종홍릉 → 강화 홍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이 당시는 정치적으로 최씨 집권시기였으며 밖으로는 거란·몽골의 침입 등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고종 18년(1231)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고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을 한 조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4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고려고종홍릉 → 강화 홍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1]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2] 출처: 조선고적도보, #[3] 사실 남북분단으로 인해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지 직선 거리로만 놓고 보면 강화도도 분명 개성 인근이라 할 수 있다.[4] 여몽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강화를 맺기 위해 태자 신분으로 원나라를 방문하던 중이었다.[5] 형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강화도 내에 잔존한 고려왕릉들은 모두 이 사람이 강화유수로 재직하던 시절 보수 및 관리가 시작되었다.[6] 당시에는 사적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7] 남한 지역에 소재한 고려왕릉은 고종의 홍릉을 포함해서 희종의 석릉, 공양왕의 고릉 등 이 존재한다. 이중 고릉을 제외한 5기가 강화군에 있다.[8] 쉽게 말해 유언이다.[9] 출처: 국가기록원[10] 출처: 국가기록원[11]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홍릉은 강화도 소재 고려왕릉들 중 유일하게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능이다.[12] 능묘의 봉분이 파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석물. 호석이라고도 한다.[13] 이 규칙에서 벗어난 사례가 바로 석릉과 가릉이다.[14] 왼쪽 사진 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돌기둥 4개가 홍릉의 난간석주이다. 오른쪽 사진은 일제강점기 촬영된 홍릉의 문인석이다.[15]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16] 출처, 조선고적도보 七, #[17] 고려왕릉은 공민왕의 현정릉 같은 몇몇 왕릉의 사례를 제외하면 문인석만 설치하고 무인석을 설치하지 않았다.[18] 하나는 조선 고종 때, 나머지 하나는 대한민국 정부가 설치한 것이다. 조금 더 깨끗한 비석이 현대에 새로 새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