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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대 | |
면적 | 98,948㎡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제작시기 | 통일신라 | |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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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신라왕릉. 1963년 사적 제28호로 지정됐다.2. 상세
많은 신라왕릉이 비정이 잘못됐다는 의혹을 받는 상황이지만, 성덕왕릉은 실제 성덕왕의 왕릉이 확실하다고 학계에서 대부분 인정받는 편이다. 아래에 설명하듯 이 시기 왕릉의 형식이 비교적 잘 보존돼있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이거사로 추정되는 전이거사지가 성덕왕릉 바로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바로 옆에 전 왕이자 형인 효소왕의 효소왕릉이 있는데, 지금도 섬세한 장식이 남아있는 성덕왕릉에 비해 규모도 작고 초라해서 비교가 된다.[1] 성덕왕릉은 작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있는데 신라 시대의 십이지상, 받침돌과 돌사자, 실제 사람 크기의 무인상 등이 남아있는 등 오래 재위한 명군답게 상당히 화려하고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입체 십이지상은 성덕왕릉의 가장 큰 특징이다. 다른 신라왕릉에는 대체로 십이지를 평평한 돌 위에 부조했다. 부조 문서의 이미지나 경주 김유신묘 십이지상 문서를 보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성덕왕릉의 십이지상은 입체 조각상이다. 다른 왕릉이 2D라면 여기는 3D인 셈이다. 다만 아쉽게도 대부분 머리 부위가 훼손된 상태다. 다른 왕릉보다 좀 더 오래됐기도 하고, 십이지상이 넘어지면서 깨지고 천수백년 동안 전쟁도 겪다보니 대부분 부서졌고, 그나마 가장 보존 상태가 좋았던 원숭이상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100m 거리에는 왕릉비 비석이 꽂혀있던 귀부가 있다. 귀부는 비석을 등 위에 받치고 있는 거북이 석상을 말하는데, 거북이만 남아있다. 거북이 머리는 깨져 있지만 몸은 상당히 온전하게 보존돼 있어 연구 가치가 크다고 하며, 성덕왕의 업적을 잔뜩 써 놨을 가장 중요한 비석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2] 문무왕릉비나 충주 고구려비처럼 어느 시골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있을 수도 있다.
3. 기타
왕릉의 접근성은 7번 국도 바로 옆이고 경주시 시내버스를 이용한다면 한국광고영상박물관 정류장에서 매우 가까워 좋은 편이다. 도로와 왕릉 사이에 동해선 철도 철길이 있는데 2022년 기준으로 이 철길은 폐선되어 열차가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과거에 이 철도에 열차가 다닐 때는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 철길을 가로질러 왕릉으로 가는 길이 닦여있었는데, 철도안전법 위반인 데다 굉장히 위험했고 철길을 건너지 않으려면 북동쪽 마을까지 돌아서 가야 했다.[3]4. 외부 링크
5. 사적 제28호
경주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구릉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이 능은 밑둘레 46m 높이5m이다.
무덤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신라성덕왕릉 → 경주 성덕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이 능은 밑둘레 46m 높이5m이다.
무덤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신라성덕왕릉 → 경주 성덕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