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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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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신라의 역대 임금이 묻힌 왕릉이다.신라가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인 덕분에 고구려, 백제, 가야의 왕릉에 비해 잘 보존되어 있다. 물론 멸망한지 천 년도 더 넘은 왕조의 왕릉이 지금까지도 보존이 비교적 잘 되어온 건 당연히 이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역사적으로는 당대의 승자였다 해도 결국 왕조가 멸망하고 나면 그대로 수없이 도굴에 노출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1] 신라왕릉은 이를 보완해줄 설계상의 이점이 있었고, 그 덕택에 오히려 후대 왕조인 고려왕릉보다도 보존 상태가 나은 면이 있다. 일단 고려왕릉은 신라왕릉의 돌무지나 조선왕릉의 석회 같은 도굴 방지 대책이 없어서 도굴 난이도가 낮았고, 고려왕릉들이 북한의 관리하에 있기 때문에 사진자료나 위성지도로 확인된 고려왕릉의 관리 상태는 간판격인 현릉, 현정릉 외에는 처참하다. 또한 한국사상 거의 서북쪽을 통한 외세의 침략이 잦았다는 지리적인 요인 등으로 개성이 경주에 비해 전란을 더 많이 겪어왔기 때문에 유실된 왕릉도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있다.[2] 하지만 그런 신라왕릉도 역시 신라 멸망 후 천 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서 완전하게 보존되지 못해 많은 왕릉의 주인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다.
왕릉급인 능묘는 수십 곳이 발견되었지만 명확하게 주인이 밝혀진 곳은 총 8기다.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선덕여왕릉, 무열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까지 해서 7기와, 경주 밖의 경순왕릉이 이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었다.
2. 입지
신라의 왕릉들은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을 제외하면 모두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 있었던 경주시 범위 안에 있다. 왕릉 자리를 정하는 기준은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알기는 어렵지만 고려나 조선이 도성 주변 일정 범위 안으로 제한한 것처럼 어떤 규정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제한범위도 고려나 조선에 비해서도 더 좁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도 마립간 시대까지는 아예 수도의 한가운데를 공동묘지로 채우다가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경주 외곽으로 퍼진 것이다.경순왕 이외에도 진성여왕릉이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에서 진성여왕을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고 하는 부분에 근거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황산이란 지명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낙동강변 인근을 가리키는 옛 지명이기 때문에 이에 따라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멸망 이후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신라왕릉이 경주시 지역에 있는데 진성여왕릉이 뜬금없이 양산에 있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과 삼국유사 등 다른 몇몇 문헌근거로 진성여왕릉이 양산에 있다는 것을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황산이란 지명이 여러 곳이었을 수도 있고.
고대 신앙에 기반한 자체적 명당관이 있었고 중국식 풍수지리는 후대 고려, 조선과 달리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왕릉 입지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지하수가 흐르는 땅에 있는 원성왕릉이다.[3] 물론 아무 데나 왕릉을 조성하지는 않아 경주 숭복사비의 내용에 따르면 여러 기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비문에는 왕릉을 만들 때 좋은 땅을 찾아 토지를 구입하고 관청과 고을의 사람에게 명해 가시를 베고 소나무를 심어 꾸미는 과정이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의하면 능색전(陵色典)이라는 왕릉 관리 관청을 따로 설치해 왕릉 입지 선정과 향후 관리가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형식
신라의 왕릉은 초기국가시대의 고인돌→초기의 돌널무덤(석관묘)→마립간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후기(통일신라 즈음)의 굴식 돌방무덤(석실분)으로 변한다. 특히 경주에 남아있는 무덤 중 가장 크고 많은 초중기의 돌무지덧널무덤은 고구려, 백제와 달리 입구를 따로 만들지 않았고, 구조가 견고하여 도굴이 어려운 특징이 있으며,[4] 삼국통일에 성공해 왕조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수백년 더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 후대 고려 왕조 시대에도 박해를 덜 받으면서[5] 신라왕릉들도 좀 더 관리를 받아올 수 있었다.[6][7]덕분에 같은 삼국시대의 고구려 · 백제ᆞ가야의 왕릉이 무령왕릉 같은 극소수 예외 말고는 거의 확인되지 않거나 현존하지 않는 것에 비해 56명의 왕 중 37명의 능묘가 확인되었거나 추정되며 19명의 왕의 능묘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 경주에 남아있는 왕릉들도 적어도 시가지 주변에 분포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 양식 무덤의 경우 대부분 도굴된 적이 없었고 부장품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규모가 작은 고분이나 경주 외곽 산지에 위치한 고분은 일부 도굴 사례가 있으나, 대체로 다른 왕조의 고분에 비하면 매우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8] 고고학계에서는 희망과 동시에 큰 과제로 남아있다. 후기의 굴식 돌방무덤은 신라가 불교국가화되면서 부장품도 줄어들고 무덤 크기도 이전보다 작아지는데, 불교식으로 화장을 해서 유골만 담은 뼈항아리와 간단한 흙인형[9] 정도만 있는 경우가 많다.
원래 신라 왕릉은 초기에는 흙봉분 외에 따로 시설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무열왕릉부터 비석을 세우고 봉토 밑에 자연석으로 호석을 설치, 신문왕릉부터는 문인상, 무인상, 십이지신상 등 수호석으로 장식했다.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쯤 되면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능묘 제도가 거의 완성된다.[10] 100여년 전 흑백사진에 담긴 신라왕릉 모습
다만 고고학과 고증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 시대에 왕릉으로 지정된 것이 많아 실제로는 전해지는 이름과 다른 사람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많다고 한다. 예를 들면 통일신라 후기 굴식 돌방무덤 양식인데 500년 이상의 시차를 뛰어넘어 신라 초기 왕의 무덤으로 비정되어 있다던가. 다만 여러가지 사안이 겹쳐[11]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 중이다. 무덤 주인에 이견이 없는 경우는 무열왕릉이나 흥덕왕릉처럼 무덤 주인을 말하는 유물이 나온 경우다.
4. 신라왕릉 목록
무덤 주인이 확실히 밝혀진 것은 볼드체로 표기.[12]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화장했다고 나온 경우는[A] 혹은[B] 로 표기- 1대 혁거세왕릉: 오릉
- 2대 남해왕릉: 오릉
- 3대 유리왕릉: 오릉
- 4대 탈해왕릉
- 5대 파사왕릉: 오릉
- 6대 지마왕릉
- 7대 일성왕릉
- 8대 아달라왕릉: 배동 삼릉
- 9대 벌휴왕릉 현재 소재 파악 불가
- 10대 내해왕릉 현재 소재 파악 불가
- 11대 조분왕릉 현재 소재 파악 불가
- 12대 첨해왕릉 현재 소재 파악 불가
- 13대 미추왕릉: 대릉원 소재
- 14대 유례왕릉 현재 소재 파악 불가
- 15대 기림왕릉 현재 소재 파악 불가
- 16대 흘해왕릉[15]
- 17대 내물왕릉: 전 내물왕릉, 인교동 119호분, 황남대총(소수설)
- 18대 실성왕릉: 황남대총(소수설)
- 19대 눌지왕릉: 황남대총(다수설)
- 20대 자비왕릉: 황남대총(소수설)
- 21대 소지왕릉 천마총(소수설)
- 22대 지증왕릉: 천마총(통설)
- 23대 법흥왕릉
- 24대 진흥왕릉
- 25대 진지왕릉
- 26대 진평왕릉
- 27대 선덕여왕릉
- 28대 진덕여왕릉
- 29대 무열왕릉
- 30대 문무대왕릉: 대왕암[16]
- 31대 신문왕릉
- 32대 효소왕릉
- 33대 성덕왕릉
- 34대 효성왕릉[17][A][B]
- 35대 경덕왕릉
- 36대 혜공왕릉 현재 소재 파악 불가
- 37대 선덕왕릉 현재 소재 파악 불가[A]
- 38대 원성왕릉: 괘릉[A]
- 39대 소성왕릉 현재 소재 파악 불가
- 40대 애장왕릉 현재 소재 파악 불가
- 41대 헌덕왕릉
- 42대 흥덕왕릉
- 43대 희강왕릉
- 44대 민애왕릉[22]
- 45대 신무왕릉
- 46대 문성왕릉
- 47대 헌안왕릉
- 48대 경문왕릉 현재 소재 파악 불가[23]
- 49대 헌강왕릉
- 50대 정강왕릉
- 51대 진성여왕릉[24][B]
- 52대 효공왕릉[B]
- 53대 신덕왕릉: 배동 삼릉[B]
- 54대 경명왕릉: 배동 삼릉[B]
- 55대 경애왕릉
- 56대 경순왕릉: 신라의 마지막 왕이기에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시가 아닌 경기도 연천군에 있다.[29]
4.1. 추존된 왕의 능
사후에 추존된 왕의 능으로 흥무대왕릉(김유신장군묘)이 있다.[30]5. 신라고고학에서의 왕릉
위의 신라왕릉 목록에서 볼드체로 쓴 8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조선시대의 기록 및 민간 전승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한 것이다. 고고학적 지식이 거의 없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 무덤은 어느 왕의 능이라는 식으로 나름대로 비정을 했지만 조선시대 당시에도 김정희, 유의건 등 몇몇 지식인들이 논리적으로 비판했을 정도였고,[31] 고고학이 발달한 현대의 관점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잘못된 비정들이 드러난다.[32]이 항목에서는 신라고고학이라는 역사고고학적 맥락 속에서 왕릉으로 거론되는 신라의 왕릉을 다룬다.
당연히 혁거세 거서간부터 경순왕에 이르는 계보가 엄연히 있는 만큼 모든 왕들의 무덤이 있거나, 과거에 있었을 것이다.[33] 그러나 역사고고학에서는 모든 왕릉을 비정하지 않으며 역사적이면서도 해당 국가의 정치·사회적인 발전의 정도를 염두에 두고 왕릉을 비정한다. 무릇 대부분 고대의 국가가 그렇듯 초기의 신라는 강력한 전제왕권이 아니므로 지금의 대릉원에서 보이는 양상으로 대형의 무덤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본다.[34] 실제로 대릉원의 초대형 고총인 황남대총과 천마총의 발굴에서 보이듯이 출토된 유물들은 모두 5세기 중반 즈음을 가리키고 있다.
5세기 대의 신라의 왕릉 역사고고학에서의 신라왕릉 | |
월성과 대릉원 | 인교동 119호 · 전 미추왕릉 |
황남대총 | |
봉황대 · 서봉황대 |
통상 신라 고고학에서 대체로 거론하는 4~5세기대의 적석목곽묘로 대표되는 신라의 왕릉 및 왕릉군은 아래와 같다.
- 월성로 고분군 - 경주 대릉원 고분군 일대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왕릉이 구체적으로 무어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부장품의 수량 및 위계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점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경주 시내의 거대한 능원 형성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 인교동 119호(인왕동 119호) - 지금의 인왕동 119호로 첨성대의 남쪽에 있으며 인교동 119호 또는 교동 119호로 부르기도 한다. 신라 고분의 특징으로 표형분(瓢形墳)이라는 말을 쓰는데 바로 이 고분의 형상이 딱 표주박을 엎어놓은 형상이다. 삼국유사에 내물왕의 무덤이 첨성대의 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이 고분이 내물왕릉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 전 미추왕릉 - 이 미추왕릉으로 인해서 대릉원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정작 진짜 미추왕릉으로 추정하지는 않는다. 인교동 119호와 황남대총의 사이에 있으며 인교동 119호분이 내물왕으로 추정된다고 볼 때 황남대총이 눌지왕으로 추정되므로 능원의 형성 과정을 추정할 때 왕릉이 었으리라 추정된다. 물론 규모 상으로 기본적으로 봉황대, 서봉황대, 황남대총 다음으로 큰 고분으로 왕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 황남대총 - 연접분으로 대릉원 고분군에서 가장 큰 무덤이다. 항목에서도 나와있듯이 우려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신라고고학의 질적, 양적인 성장에 기여한 고분으로써 그마만큼 논쟁이 활발했었다. 바로 신라고고학의 연대론의 중심에 있는 왕릉이다. 신라토기의 변천에서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대체로 신라토기라는 양식의 등장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는 시점의 토기라는 것에 대부분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연대가 왕릉인만큼 왕을 특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학계의 견해는 402년에 사망한 내물설과 417년에 사망한 실성설, 458년에 사망한 눌지설로 나뉘게 되었다. 논쟁에 즈음하여 쌓여가는 다른 고고학 자료들이 역사적 해석 및 고고학적 분석이 자연스러워지기 위해서는 황남대총 남분의 연대가 눌지왕의 사망년도인 458년 즉 5세기 중엽으로 보는 것이 아귀가 맞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눌지 마립간설이 인정받게 되었다.[35] 문제는 북분이 여성 묘라는 건데 여성 묘 쪽이 훨씬 화려하다는 것.[36]
- 노동리 125호분(봉황대, 鳳凰臺) - 노동리 고분군에서 가장 큰 고분으로 황남대총 다음으로 경주에서 큰 왕릉급 고총이다. 노동리 고분군의 봉황대 고분 주변의 무덤인 금령총과 식리총의 연대 등으로 추론할 때 인교동 119호로부터 봉황대로 이어지면서 초대형의 왕릉이 축조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노서리 130호분(서봉황대, 西鳳凰臺) - 봉황대 고분의 서쪽에 있어 서봉황대라는 이칭으로도 불린다. 봉황대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왕릉급 고분이다.
6~7세기 대의 신라의 왕릉 역사고고학에서의 신라왕릉 | |
선도산과 낭산 | 서악동 고분군 |
선덕여왕릉 |
이후 대릉원 고분군 및 월성 인근의 고분군의 축조가 끝나면서 6~7세기[37]의 어느 시점부터는 서악동 고분군이나 선덕여왕릉처럼 비교적 독립적인 입지로 이동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악동 고분군은 항목에서 나와있는 것처럼 4기의 고총이 일렬로 늘어져 있다. 서악동 고분군의 입구 쪽 4번 국도의 아래에는 김인문과 김양의 무덤이 배장(配葬)되어 있는데 무열왕릉 뒤로 있는 왕릉들의 배총으로 추정된다. 뿐만아니라 서악동 고분군의 배후 산지에는 서악동 고분군 1~4호분을 중심으로 중소형의 고분군이 병풍처럼 형성되어 있다. 또한 또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사찰의 명칭이 등장하고 선덕여왕릉의 경우처럼 능사의 기능을 했으리라 추정되는 사찰이 생겨나는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점에서 기존의 4~5세기 신라 왕릉들이 전통적인 축조 방식에 의해서 능원이 형성되었다면 6세기 중엽 무렵 이후부터는 체계적인 계획 아래에서 능원을 형성하는 양식으로 변화하게되는 것이다.[38]
8~9세기 대의 신라의 왕릉 역사고고학에서의 신라왕릉 | |
경주 외곽 산지 | 전 00왕릉 |
괘릉 |
신라왕릉들은 6~7세기대를 거치면서 기존의 석실을 채용하던 시절에 남아있던 호석(護石)이 점차 체계화되고 장식적 요소가 추가된다. 주인이 확실한 선덕여왕릉이나 무열왕릉은 가공을 덜 한 자연석을 호석으로 둘렀지만, 신문왕릉부터는 인위적으로 칼 같이 다듬은 다단 형태의 호석과 받침석이 등장하며 복잡해진다.
이렇게 체계화된 호석에 십이지상의 장식이 추가되기도 한다. 이 십이지 장식은 이후 고려왕릉, 조선왕릉으로도 쭉 계승되는 대표적인 한국사 왕조 특유의 왕릉 장식인데 신라식의 경우 고려, 조선과 달리 몸은 사람, 머리는 해당 동물인 수인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십이지상도 처음에는 완전한 입상(立像)으로 만들어지다가 나중엔 아에 호석에 부조(浮彫)되며 구정동 방형분에서 보이는 것처럼 간략화되어 나타난다.[39] 통일신라 후기로 가면 십이지 조각은 사라지지만 전 민애왕릉에서 십이지신상을 부장하는 등 십이지와 왕릉의 관계성은 계속 이어진다. 나중에는 불교 석탑에서 따 온 난간석(欄干石)이라고 하는 돌 울타리가 왕릉 주변으로 둘러쳐지는데 무덤 보호의 의미와 장식적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 그 형태는 경주 김유신묘 십이지상 문서 참조.
한편 8세기 이후의 신라 왕릉의 특징은 불교적, 도교적 영향을 받으면서 기존의 전통과는 달라진다. 불교적 영향으로 과시 위주의 장례문화에서 검소한 양상으로 변화하며 입지 또한 그런 맥락 속에서 경주 시내 한복판이 아니라 이른바 명당과 같은 곳에 왕릉이 형성되었다. 다만 이 명당이라는 게 후대(고려~조선~현대)의 풍수지리적 지식에 입각한 명당과 같은 개념은 아닌 게 예를 들어 괘릉은 주변 땅에 물이 차 있는 대표적인 흉당이다. 아마도 당시 신라인 나름대로의 기준에서 명당으로 여겨지는 곳들마다 무덤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8세기 이후의 특징은 당나라의 영향으로 당나라의 능원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다. 당나라의 능원제도에는 나름대로의 표준화된 규격이 있는데, 화표석(花表石)이 신도(神道)임을 알리는 목적으로 가장 앞에 세워지고 그 뒤로 석사자상이 세워지며 그 뒤로 다시 석인상들이 늘어서있다.[40] 대표적인 사례가 전 성덕왕릉, 원성왕릉(괘릉), 전 헌덕왕릉, 흥덕왕릉이 해당한다. 앞서 백제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 양나라의 벽돌무덤 양식을 받아들였듯이 고대에 선진국으로 받아들여지던 중국의 왕릉 묘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 받아들인 그대로 계속 멈춰있는 건 아니고, 차차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방식으로 발전시켜나가면서 통일신라식 왕릉 묘제가 이후 고려왕릉, 조선왕릉의 형태로 이어진다.
6. 한국사 다른 왕조의 왕릉
7. 같이보기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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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장 근대에 조성된 서태후의 능도 청나라가 멸망한 뒤, 청 황실이 나름 예우를 받고 있었음에도 군벌들에게 무참히 도굴되었던 바가 있다.[2] 따라서 사실 고려왕릉이 황폐해진 것이 북한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의 기록과 흑백 유리건판 사진에 남겨진 모습을 보면 그때도 고려왕릉보다 신라왕릉의 보존 상태가 더 나았다.[3] 풍수지리는 신라 말 고려 초 전국 지방 호족들이 각자 자기 연고지를 신라 왕도에 맞먹는 명당으로 선전할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4] 엄청난 양의 돌이 쌓여있기 때문에 현대 이전에는 주민과 관청에 들키지 않고 도굴을 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이었으며, 현대에는 폭탄이나 중장비를 동원한다고 가정하면 무덤을 억지로 열 수 있겠지만 도굴은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밤중에 은밀하게 하는 것이므로, 결국 불가능하다.[5] 실제로 경주 김씨는 신라 멸망 이후에도 고려의 문벌 귀족으로 멀쩡히 살아남았다. 삼국통일 후의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이나 조선 건국 후에 고려 왕씨들이 어떤 말로를 걸었는지 생각하면...[6] 신라왕릉이 고구려, 백제에 비해 양호한 건 이게 결정적이다. 고려, 조선의 행정력이 작용하면서, 국가와 신라의 후손들이 관리를 해왔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돌무지덧널무덤이라 할지라도 현 중국 집안시(국내성)이나 중국 닝안시(상경용천부) 쪽에 있었다면 지금 수준으로 양호하게 남아있을 가능성은 낮다.[7] 국내성 쪽에 있는 고구려 왕릉들은 고구려 혹은 발해 멸망 이후 사실상 방치되다시피해서 철저히 다 털렸다.[8] 예를 들면 백제는 멀쩡히 현대까지 남았던 왕릉은 무령왕릉 딱 하나뿐이었다. 말 그대로 기적적.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왕릉도 1,600년 세월 동안 도굴꾼에게 털릴 대로 털려 텅 빈 방에 벽화만 달랑 남은 게 많다.[9] 중국의 병마용과 같은 맥락의 부장품이다. 이전 시대의 순장의 상징성을 대체하기 위해 넣는 것.[10] 신라왕릉 중 보존이 잘 된 편인 이 두 왕릉의 배치는 수백년 뒤에 만들어진 서울/경기에 있는 조선왕릉들과 기본 틀이 거의 비슷하다.[11] 벌써 수백년간 조상님 무덤이라고 제사를 지내왔는데 알고 보니 남의 무덤이었다고 하면 후손들 입장도 난감해지고, 주인을 확실히 알려면 발굴조사를 해야 하는데 선조들의 무덤을 여는 것 자체가 유교적으로 불경한 행동이다.(실제로 고분을 발굴하기 전에는 학자와 발굴단이 참여해 제사를 지내는 등 최대한 예를 갖추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열어본다 해도 잘 보존된 지석이 나오거나 하지 않는 이상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12] 선덕여왕릉, 무열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경순왕릉 8기.[A]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화장되었음[B]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화장되었음[15] 천성산 기슭에 있는 대석마을에서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계단 논 가운데 위치한 흘해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이 있는데 문화재청이 인정한 곳은 아니다. 그게 맞다면 경순왕릉과 함께 경주시 밖에 있는 왕릉이다.[16] 대왕암 자체가 문무왕의 무덤(수중릉)이란 해석과, 화장한 유골을 뿌린 장소인 산골처라는 해석이 대립하고 있다. 다만 신라인들이 수로를 인공적으로 가공한 흔적의 존재는 확인되었으므로 후자라고 해도 그저 자연물은 아니며, 일종의 허묘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17] 경주 구황동 황복사터 인근 미완성 왕릉. 유해는 화장 후 동해에 산골하였다.[A] [B] 음[A] [A] [22] 이근직 교수는 주인을 알 수 없는 특이한 모양의 구정동 방형분이 사실 44대 민애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23] 학자들이 구정동 방형분의 역사적 배경 등을 감안하면 구정동 방형분이 경문왕의 왕릉이냐는 의견도 있다.[24] 경상남도 양산시에 진성여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이 있는데 문화재청이 인정한 곳은 아니다. 그게 맞다면 경순왕릉과 함께 경주시 밖에 있는 왕릉이다.[B] [B] [B] [B] [29] 고려에 항복했기 때문에 사망 시 임금이 아니었으나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고, 고려가 신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능의 형태로 조성되었다.[30] 다만 이 고분은 사실 신무왕의 왕릉이고, 진짜 김유신장군묘는 태종무열왕릉 옆의 전(傳) 김인문묘(속칭 각간묘(角干墓))라는 설도 있다.[31] 김정희는 서악동 고분군의 초대형 고분이 김춘추의 직계 조상들의 능이라 주장했는데, 이는 2024년 학계에서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게 보는 시각이 대세이다.[32] 이런 점을 적극적으로 고치지 않는 이유는, 비정이 잘못된 건 대부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그 대신 다른 누구의 무덤인지 백퍼센트 확답을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보니 학자마다 설이 갈리는 식으로 문제가 많기 때문에 일단 예전부터 이어져온 비정으로 현상유지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수백년간 그 왕의 왕릉으로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가 쌓였으니 고고학적 견해와 별개로 존중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33] 불교가 융성했던 통일기에는 효성왕이나 선덕왕 등 몇몇 왕이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산골했다는 기록이 있어, 어쩌면 일부 왕릉은 처음부터 조성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설도 있다. 다만 또 몇몇 왕들은 가묘를 만들었다는 사례도 있고 해서 확언할 순 없다.[34] 아마 비슷비슷한 수준의 고분들 중의 하나가 왕릉이었을 수 있다. 신라뿐만 아니라 삼국 모두 진짜 왕다운 절대적 왕권을 가진 것은 평균적으로 4~5세기가 지나서였다.[35] 그렇다고 내물왕설이 폐기된 것은 아니며 양자의 설은 하나의 역사고고학 자료의 분석적 기준으로써 존재하고 있다. 5세기 중엽의 간극 빼고는 양자의 설 모두 전반적인 부분은 같다. 현재는 실성왕이라는 견해도 있다.[36] 현재는 북분의 피장자는 여성이 아닌 남성의 묘이고 피장자가 자비 마립간이라는 주장도 있다.##[37] 6세기 전반을 거치면서 신라의 고분문화는 전반적으로 변화한다. 불교의 영향으로 부장품의 수량이 줄어들고 화려함이 줄어든다. 또 토기의 형태도 통일성이 진전되며 단각고배라는 거의 규격화된 형태로 변화한다. 또 기존의 적석목곽의 수혈식 장법에서 석실이라는 횡혈식 장법으로 변화한다.[38] 이 역시도 당나라 때 성행한 능원제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하고 있다.[39] 구정동 방형분이 단정해서 왕릉이라는 것은 아니고 십이지상의 변화가 정교한 것에서 둔화되는 뱡향으로 변화함을 의미한다.[40] 물론 풀버전은 아니다. 완전 풀버전으로 된 것이 서안시에 있는 정릉(貞陵)인데 아에 수 킬로미터에 걸쳐 능원을 뜻하는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남쪽의 입구에서부터 화표석이 나타나고 그 뒤로 한참 걸어가면 다시 석인상과 당시엔 신기했던 온갖 동물─타조나 코끼리, 사자 등의 석물이 나타나고 다시 유대(乳臺)라는 입구가 나타나는데 그 앞에 거대한 석사자상이 놓여 있고 그 뒤로는 24번추상이 있으며 그곳을 지나야 무덤이 나타난다. 그리고 무덤은 진짜 산 하나를 무덤으로 삼았으며 쌓아올리진 않았고 산 중턱에 묘실이 있다고 되어있다. 거의 2~3km 정도 걸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