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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 경주 대릉원 일원 慶州 大陵園 一圓 |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261 등 | |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고분군 | |
면적 | 602,314㎡ | |
지정연도 | 2011년 7월 28일 | |
건축시기 | 신라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 경주역사유적지구 Gyeongju Historic Areas Zones historiques de Gyeongju | ||
<colcolor=#fff> 국가·위치 | <colbgcolor=#fff,#1f2023>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경상북도 경주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976 | |
등재연도 | 2000년 | |
등재기준 | (ii)[1], (iii)[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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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大陵苑 / Daereungwon Ancient Tomb Complex (Daereungwon Tomb Complex, Tumuli Park)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황남동)에 위치한 옛 신라의 왕, 왕비, 왕족,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 지역. 사적 제512호로 지정되었다. 약 150여개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추 이사금을 대릉(大陵)에 장사 지냈다.'라는 글귀에서 따 와 대릉원(大陵苑)이라고 지었다. 대릉원이라고 하면 좁게는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는 황남동 고분군 쪽을, 넓게는 바깥쪽의 금관총이나 봉황대와 같은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등을 포함한다. 일단 규모가 큼지막한 데다가 경주시 시가지에 있어 접근하기 좋고, 천마총처럼 신라 왕릉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고분도 있어[3]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거의 필수로 찾는 곳이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내부 관람이 가능한 천마총만 요금을 받는데, 입장료는 2023년 성인 기준 3천 원.[4]
경주역사유적지구의 5개 지구 중 대릉원 지구가 있다. 단, 여기에는 오릉처럼 대릉원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주변 지역이 좀 더 포함되었다.
원래는 지금의 담장 둘러쳐진 구역의 대릉원은 황남리 고분군(40호)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에 문화재청에서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 황오리 고분군(사적 41호), 인왕리 고분군(사적 42호)을 통합하여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하였다.
황남대총 등의 왕릉에서 로만글라스, 사산글라스 등의 유리 유물이 발굴되었다. 링크, 기사. 그러한 로만글라스, 사산글라스들의 주요 생산지, 대량 출토지를 따지면 신라가 중동과 교역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2. 역사
경주 분지 한가운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신라 당시에도 수도 서라벌 시가지 가운데에 있는 국가 묘역공원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추정한다. 대릉원과 바로 옆에 붙은 쪽샘지구에서 발굴 조사해 보니, 신라 당시의 도시 기반 시설과 건물 터가 대릉원 주변 지역에는 빼곡하게 차 있음에도 대릉원 일대에선 거의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시가지로 가득찬 대도시 가운데지만 대릉원부터는 건물을 못 짓게 개발제한구역으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멸망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관리가 부족해지자 조선 시대~일제강점기에는 대릉원 무덤과 무덤 사이까지 사람들의 주거지가 생겼지만 현대에 들어 정비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대릉원의 무덤들은 문자로 표기된 기록이나 비석류가 일절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편년을 알기는 힘들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무덤의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지석도 출토되지 않아서 무덤 주인의 이름이 밝혀진 무덤은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발견된 금관총이 유일하다. 하지만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 때문에 도굴이 어려워서 많은 유물들이 별 손실 없이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이 유물들을 측정하여 대략 4-6세기에 걸쳐 조성했다고 추정한다. 6세기 이후에는 왕릉이나 기타 무덤들을 대릉원처럼 서라벌의 중심부가 아닌 산이나 도시 외곽 쪽에 만들었기 때문에, 대릉원은 아무리 늦어도 7세기 초반 이후로는 더 확장되지 않았던 듯하다.
3.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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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좌측 위의 구역이 노동리, 노서리 고분군, 가장 가운데가 지금의 대릉원(황남리 고분군), 대릉원의 동쪽이 황오동 고분군과 쪽샘지구, 가장 아래 쪽의 구역이 인왕동 고분군이다. 노서리 130호가 서봉황대, 노동리 125호가 봉황대라고 불리는 왕릉이며, 가장 가운데의 황남동 98호가 바로 황남대총이다. 그 아래의 106호는 전 미추왕릉이고 지도 가장 아래의 119호가 삼국유사의 기록[5]에 근거하여 내물왕의 무덤으로 거론되는 인왕동 119호이다.[6]
대릉원 일원은 월성로 고분군(또는 구역)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미 다른 무덤들에 비해서 출토되는 부장품의 위계가 높아서 왕 내지는 왕족, 귀족들의 무덤군으로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월성로 구역 및 황오동 일대에서 비교적 먼저 대형 무덤들이 만들어지다가 5세기 중엽부터 봉분의 규모가 독보적이라 왕이 묻혔음이 명백한 황남대총 또는 인왕동 119호분, 전 미추왕릉이 축조되었고, 가장 마지막으로 5세기 후엽-6세기 무렵 노서리, 노동리 고분군이 있는 쪽으로 전개되었다고 추측한다.
노서리, 노동리의 봉황대 고분과 서봉황대 고분[7]을 끝으로 경주 분지 외곽의 서악동 고분군으로 임금들이 묻히는 곳이 이동했다.
3.1. 황남동 고분군
- 미추왕릉
- 천마총
- 황남대총
- 계림로 고분군 - 지금의 대릉원의 담장 동쪽에 계림로 공사를 하면서 조사된 구역이다. 계림로 고분군이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이 계림로 공사 구간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고분들을 계림로 00호라고 지칭한다. 특히 계림로 14호분에서는 유명한 경주 계림로 보검이 출토되었다. 대릉원 담벼락의 길을 거닐다 보면 계림로 14호분이 있던 자리에 작은 안내판이 자리잡아서 황금 보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3.2. 노동동 고분군
3.3. 노서동 고분군
3.4. 황오동 고분군
옛날 경주군 시절에 지어진 이름 황오리 고분군이라고도 불리며 위의 고분군들에 비하면 별로 유명하지 않다.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덤이 일부 깎여나갔고 무덤 바로 옆에 민가가 있고... 인도 사거리 바로 옆에 고분이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이 고분군의 존재는 모르고 위의 주요 고분군만 둘러보고 가는 경우가 워낙 많아 인적이 별로 없고 한가하다. 시간이 나면 한 번쯤 산책 삼아 들러보는 것도 좋다. 다만 조금 변두리에 있어서 불편하긴 하다. 국립경주박물관으로 가는 길에서 반대로 걷다 보면 나온다.일제강점기 때 이곳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무덤 70여 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봉분이 깎여나가 무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어 10여 기 남짓만이 정확히 확인되었다. 발굴 조사된 무덤은 1호분·4호분·5호분·16호분·33호분 등으로, 신라의 일반적인 무덤 형식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이 근처도 건물을 지으려고 하면 유물이 계속 나오므로, 무덤의 봉분만 없어졌을 뿐 도굴까지는 당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 월성로 고분군 - 전체 대릉원, 지금의 월성 주변의 경주 시내 가운데서 가장 빨리 만들어진 구역이다. 위의 계림로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팔우정 로타리에서 월성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해당한다. 신라토기의 전개 과정 상에서 가장 빠르고, 대형 봉토를 갖춘 왕릉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으로도 추정힐다.
- 쪽샘지구 - 황오동 남쪽에는 '쪽샘지구'로 불리는 고분 밀집 지역이 포함된다. 2002년부터 시작하였으며, 2010년부터는 쪽샘지구 44호분의 발굴을 과정을 함께 보여주는 발굴 전시관을 설치하였다. 참고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1999년 당시에는 이 지역이 발굴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때여서 경주역사지구에 포함되지 않고 고도제한구역으로만 지정되었다.
황오동 고분군은 경주 시내에 있는 다른 무덤들보다는 규모가 작고, 출토 유물도 적은 편이다.[8] 그러나 돌무지덧널무덤의 전 단계인 덧널무덤(토광목곽묘)를 비롯 다양한 무덤 형식들이 조사되어 경주 무덤들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3.5. 인왕동 고분군
지금의 인왕동 일대의 고분군으로 위의 지도에서 가장 대릉원의 밖, 가장 아래에 남쪽에 동떨어져 자리하고 있는 고분군이다. 이전에 인왕동 고분군이라고 말하는 지점과 지금 현재 인왕동 고분군이라고 표현된 지점이 다소 차이가 있으며 특히 대릉원의 남쪽 월성의 서북쪽에 해당하는 지점은 원래는 교동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사적은 아니었다. 사적 512호로 일괄 통합 변경되면서 사적 구역에 해당하지 않았던 범위도 일부 포함되고 혼용되기도 하였고 고분군의 명칭이나 일대의 행정구역 명칭이 복잡하다 보니 개편된 명칭을 떠나서 원래 이름대로 부르는 경향 때문에 "인왕동 몇 호분"이라는 식의 명칭은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인교동 119호 - 인왕동 고분군 군집의 가장 대형분이자 경주 시내 신라 왕릉들 가운데서도 빼박 왕릉으로 손에 꼽히는 고분이다. 대릉원 주차장에 들어가기 전에 대릉원 안쪽은 아닌데 엄청나게 큰 고분이 보이는 데 그것이 바로 이 119호분이다.
학계에서는 황남대총의 묘주가 내물왕인가 눌지왕인가에 대한 논의가 많았었다. "황남대총의 묘주가 눌지라면 내물왕의 무덤은 어디인가"라고 했을 때 거론되는 것이 바로 인교동 119호분이다. 삼국유사에서도 내물왕을 첨성대의 남쪽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실제로 인교동 119호분도 첨성대의 남쪽편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비록 발굴되지는 않은 고분이지만 황남대총의 묘주 문제로 인하여 생각보다 학계에서 자주 거론된 고분이기도 하다.
- 전 내물왕릉 - 위의 인교동 119호와는 별개로 내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비정은 조선시대 전승이나 종친회의 결정, 문화재의 관리 차원 등에서 정해진 것으로 실제로 역사고고학적 맥락에서 보면 인교동 119호분이 내물왕릉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지금의 경주 시내 왕릉들은 대부분 5세기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5세기 신라 왕릉은 매우 크다. 전 내물왕릉의 크기로서는 상대적으로 너무 작은 규모라는 점에서 진짜 내물왕릉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또한 전 내물왕릉의 봉분에는 삐져나온 호석들이 일부 보이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서악동 고분군에서 보이는 것으로 비교적 늦은 시기인 6세기 신라 왕릉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 교동 64번지 고분 - 정확하게 교동 64번지 고분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64번지 고분은 정식 발굴된 고분이 아니라 과거 도굴꾼이 소형 금관[9]과 귀걸이, 환두대도 등을 도굴하였던 경찰이 압수하면서 취조 후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이 도굴품들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 논쟁이 있었으나 지금의 대세론적인 결론은 진품으로 보는 편이며, 진품이라는 전제 아래에 금관의 크기로 보았을 때 왕족 남자아이의 무덤에서 도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입장료
2023년 5월부터 첨성대처럼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다만 내부 관람이 가능한 천마총만 예외적으로 요금을 받는데, 요금은 아래와 같다.성인 | 3,000원 |
청소년/군인 | 2,000원 |
어린이 | 1,000원 |
경주시민(신분증 제시), 장애인복지카드, 국가유공자증 소지자는 입장료가 면제된다.
대릉원은 무료 해설사가 정해진 시간별로 해설을 한다. 단, 코로나19로 임시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 출범을 맞아 15~19일 닷새간 무료 개방이 되었다.
5. 매체
- 덴마 - 대릉원: 한자로는 大陵園이라고 쓴다.
-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 4회: 경주가 고향인 유시민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언급되었다. 당시엔 대릉원이 유적지도 아니었으며, 여기 산치고는 작지 않냐면서 놀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나 관리가 미비해서, 어린 유시민이 고분 위에 올라가서 뒹굴며 논 적이 많았다고 한다. 후반엔 접시 같은 유물들도 사람들이 막 썼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렇게 해도 물건들이 버틸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러 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관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분 위에서 동내 애들 몇 명 노는 거랑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가서 셀카 찍는 거랑 다르기 때문이다.
-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7회에서 다니엘 린데만이 친구들을 데리고 우여곡절 끝에 경주시에 갔을 때 이곳을 방문했다.
6. 기타
- 황남대총의 뒷쪽, 정확하게는 황남대총 동쪽 포인트가 대릉원에서 인기 있는 사진 찍는 장소로 유명해졌다. 원래는 역사 유적 전문 사진작가의 작품으로서 그 구도가 알려졌는데, 이후 신라 고고학과 관련된 연구 저서의 표지에도 같은 앵글에 밤에 찍은 사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고 한참 후에 SNS를 통해서 사진찍는 포인트로 유명해져 줄 서면서까지 찍는 포인트가 되었다. 황남대총이 너무 유명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황남대총을 경주 지역에서 가장 큰 고분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대릉원 지구 내에서도 황남대총보다 큰 봉황대가 있고, 외곽 지역에도 서악동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등 다양한 유적지에 황남대총과 크기가 비슷한 왕릉들이 꽤 있다. 다만 이중에서 현재까지 발굴한 곳이 황남대총 하나뿐이라 다른 곳은 다 듣보잡이 되어서 그렇다. 황남대총도 4공 시절 국가 규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발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돌무지덧널무덤 특성상 컨베이어 벨트까지 동원해서 봉분을 통째로 다 들어내야 하기 때문.
- 봄이나 여름에 가면 꼬꼬마 텔레토비의 동산에 온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대릉원을 보고 텔레토비 동산을 떠올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천마총의 경우에는 그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더더욱 텔레토비를 연상시켰다. 외국인들도 대릉원의 사진들을 보고 텔레토비 동산을 떠올렸다.
- 경주시 홈페이지에서 인근 카페에서 판매하는 '대릉원 타르트'를 소개해 놨다. 이는 무덤을 녹차가루 등으로 재연한 것이다.
숟가락도 삽 모양이다※ 이후 영화 파묘가 뜨자 관련 드립이 간간히 나오고 있다.
7. 관련 문서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천마총 내부는 1970년대에 만든 구성이 계속 이어져 낡은 감이 있었지만 2018년에 리모델링한 후 매우 현대적으로 깔끔하게 바뀌었다.[4] 천마총 리모델링 공사를 했던 2018년 4월 16일까지는 관람객의 볼거리가 줄어든다는 점 때문인지 기간 동안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대신 무료 입장 기간 동안 대릉원 안에 있는 천마총의 내부는 볼 수 없었다. 2018년 7월 27일부터는 다시 천마총을 복원하여 입장료를 걷는다.[5] 다만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추정한 것은 지금의 전 내물왕릉이고 역사고고학적으로는 119호분이 해당한다.[6] 교동 119호라고도 불린다.[7] 겨울에 경주에 사는 어린이들이 눈썰매를 탔다는 그 카더라가 있는 큰 무덤이다.[8] 때문에 주로 왕족이 아닌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한다.[9] 교동 64번지 고분에서 출토된 소형 금관은 교동 금관, 또는 교동 64번지 출토 금관, 전 교동 출토 금관 등으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