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4:30:09

서라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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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서라벌의 상상도[2][3]

1. 개요2. 어원
2.1. 옛 명칭 유래설2.2. 불교 유래설
3. 행정4. 지리5. 규모
5.1. 기타 도시들과의 비교
6. 구조7. 신라 이후8. 기타

1. 개요

천 년 왕국 신라수도. 오늘날의 경상북도 경주시 일원[4]에 위치했다.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기원전 57년 음력 4월 병진일부터 935년 음력 11월까지 약 991년간 신라의 정궁인 월성이 위치한 수도로서 기능했다. 하나의 국가가 하나의 수도에서 천 년을 지속한 경우는 세계사에서도 드문 사례인데[5] 서라벌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

비슷한 시기 발해, 일본의 도시와 다른 특징이 여기서 나오는데 이 나라들은 천도를 하면서 수도가 될 신도시를 중국 스타일인 도시계획 원리를 받아들여[6] 계획적으로 네모반듯하게 건설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발해 상경용천부, 일본 헤이안쿄 & 헤이조쿄, 당나라 장안성 문서를 보면 한중일을 막론하고 형태가 서로 비슷비슷하다. 그러나 신라는 영토가 경주에 국한된 고대 성읍국가부터 한반도를 다스리는 시대까지 쭉 이곳만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고대의 자연 발생적 상태부터 시작해 시대 변천에 따라 꾸준히 부분적으로 개편된 구역이 혼재했으므로 동아시아 주변국들의 수도와 상당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곧, 신라에게 있어서 서라벌은 단순히 '큰 도시'가 아니었다. "신라의 수도가 서라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단순한 서술이며 오히려 "서라벌이 확장한 땅이 곧 신라"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심지어 어원적으로 서라벌과 신라는 동일한 어근의 단어이며 본래의 고유어를 한자로 음차하면서 벌어진 차이일 뿐이다.[7] 다시 말해 신라는 망할 때까지 서라벌 성읍이 확장한 서라벌國이었다. 마찬가지로 장기 존속한 로마 제국과도 유사한 경우.

그 명칭은 서라벌/금성 외에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 경(京), 왕경(王京), 왕도(王都), 경사(京師), 경성(京城), 금경(金京), 대경(大京), 동경(東京), 동도(東都) 등이 있었다. 이 중 동경은 고려 시대 경주의 이름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탑비문이나 처용가와 같이 신라 시기에도 경주를 동경으로 불렀던 기록이 존재한다.[8] 중국 기록 양서에서는 건모라(健牟羅)라고도 불렸다는데 고대 한국어의 '큰 마을'의 음차로 추정되고 있다.[9]

2. 어원

신라의 도읍을 적을 때는 서라벌 이외에도 금성(金城),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야(徐耶), 서야벌(徐耶伐), 서라(徐羅) 등 여러 가지 표기가 있었는데 한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넘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진한고유어(우리말)를 나중에 들어온 한자로 표기(음차)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기록에 남은 것이다. 신라 건국 초기였던 원삼국시대에는 수도 서라벌, 즉 금성이 신라라는 국가 그 자체인 도시국가였고 국가의 기틀을 잡고 난 뒤에도 한동안은 서라벌이라는 이름이 나라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으며[10] 사실 서라벌과 신라 둘 다 사로국, 사라 등 'ㅅㄹ' 계통의 동일 어원이다. 하나의 도시 정도에서 시작해 영역 국가로 성장했고 도시 이름이 곧 나라 이름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지구 반대편의 도시 로마로마 제국의 관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아래 기록 때문에 서라벌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옛 명칭(국호) 및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 명사로서의 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동음이의어) 문서 참조.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경(京)자의 뜻을 우리말로 서벌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더러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제1 기이 신라 시조 혁거세왕 #
지증왕 시기 정식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면서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에서 따왔다고 하지만 이는 이전까지 쓰이던 '서라벌'을 한자로 표기하던 여러 베리에이션들 중에 하나를 고르면서 역 두문자어마냥 의미를 부여한 것에 가깝다. 1천 년간 경주 지역 땅 이름이 서라벌이었고 935년 개경으로 옮기면서 서울은 일반명사로 1천 년간 쓰이다가 1946년 미군정에 의하여 경성이 서울특별자유시가 되고 1948년 대한민국의 수도 땅 이름이 되면서 다시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따라서 서울은 일반명사와 고유명사로 함께 쓰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깜삐돌리오가 영어의 capital(수도)로 된 것과 같다.

2.1. 옛 명칭 유래설

서라벌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있지만 확실한 정설은 없다.

신라 초기 6촌 중 하나인 사량부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사량부에서 초대 왕 박혁거세를 후원하였으니 사로국, 사라 등의 명칭도 모두 여기서 유래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사량부의 양(梁)은 '돌'로 훈독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이 가설은 현대 한자음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동쪽의 들판’이라는 의미로 추정하는 시각도 있다. 예컨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은 소부리(所夫里)라고도 하는데, ‘소’는 샛바람의 ‘새’와 같이 ‘동쪽’이란 뜻이고 ‘부리’는 ‘벌판’이란 뜻이다. ‘부리’와 서라벌의 ‘벌’은 같은 단어로 본다. 그렇다면 소부리(소벌)은 서라벌/셔벌(徐伐)/서울과 같은 어원을 갖는 단어였을 수 있다. 백제어(혹은 마한어)와 신라어 간의 친연성을 전제한다면 설득력이 있다. 통일신라와 고려에서는 서라벌을 동경(東京)으로 적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건국 당시의 어원이 어찌되었든 적어도 후기 신라인이나 고려인은 서라벌의 어원의식이 '동쪽'에 있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금성(金城)이라는 다른 명칭에서 보듯이 쇠+벌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인이 한자 金(금)을 그냥 '금속'과 'gold'로 구별하지 않는 이유는 옛 한국어로 '쇠'도 'gold'를 의미했는데 나중에 구분하기 위해 나중에 한자음 금만을 'gold'로, 쇠는 말 그대로 금속만을 의미하게 바뀌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서라벌은 '금의 땅'이라는 뜻이며 이를 한자로 직역하면 금성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주장은 신라가 금(gold) 문화가 발달한것과 일맥상통하지만 쇠가 gold를 의미한다는 근거가 확실치는 않다.

신라(新羅)로 국호를 확정지은 것에서 보듯이 ‘새롭게 정착한 곳’이라는 의미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여러 고대 국가에서는 민족의 이름이 곧 사람을 뜻했고 이게 다시 지명이 되는 일이 잦았다. 만약 '신라', '서라', '사라', '사로' 등의 'ㅅㄹ' 계통이 현대어로 '인간', 즉 '사람', '삶', 살-(live)'과 같은 'ㅅㄹ' 단어들과 어원이 같다면 저 'ㅅㄹ' 단어 + '벌'은 곧 '사람이 사는 땅'이 된다. 민족을 가리키는 말 뒤에 땅을 뜻하는 접미사를 붙이는 조어법은 실제로 중앙아시아의 '-stan', 유럽의 '-ia'와 LAND등으로 지구상에서 흔한 편이기도 하다.

2.2. 불교 유래설

인도의 도시 슈라바스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11] 현장법사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면서 슈라바스티를 室羅伐悉底(실라벌실저)로 음차하였는데 사위성(舍衛城)으로 표기하기도 한다.[12] 실라벌실저에서 서라벌과 신라가 유래하였다는 것인데, 한반도불교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이유이다. 특히 신라 중기에는 아예 왕족 이름을 석가모니의 가족 이름으로 짓는 등 굉장히 불교에 심취해 있었기에 그렇기도 하다.

다만 서라벌이나 신라와 동일 어원으로 보이는 비슷한 이름은 불교가 전해지기 훨씬 이전부터 쓰였으므로, 신라 초기 연대가 좀 끌어올려졌다고 쳐도 시대가 안 맞는다. 가령 3세기에 쓰여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사로국이라는 이름이 있다. 정사 삼국지가 쓰여진 3세기는 말할 것도 없이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 이차돈 순교로 공인된 시기보다 수백 년 이전이다. 3세기는 어쨌든 중국까진 불교가 확실히 넘어왔던 시대이고, 중국과 교류는 했으므로 어찌어찌 불교적 지식을 입수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직 이차돈 순교 이전으로 신라의 토착 신앙이 건재하기 때문에 신라의 수도 이름을 불교식으로 지어줄 이유가 부족하다.

물론 우연히 음가가 비슷했고 나중에 입수한 불교적 지명에서 찾아 끼워맞췄을 수도 있고,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불교와 관련된 문화가 이미 퍼져 있었을 수도 있다. 인접한 곳에 위치한 가야도 이미 일찍부터 불교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행정

수도 서라벌은 9주 5소경양주 땅에 둘러싸여 있지만 일단 양주 행정구역에 포함되지는 않았는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도 9주를 소개하기 전 맨 앞에 따로 경주를 소개하고 있으며 수도 주변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는 의창군, 임관군, 대성군, 상성군 등은 양주에 속한 행정구역으로 나온다. 사실 양주의 치소(현대의 도청 소재지 격)가 양주(양산시)인데 수도가 양주 소속이면 양산시 관할이란 말이지만 당연히 기록상으로도 양주 도독이 수도를 관할하는 그런 정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면적이 넓지 않아서인지 현대에 나오는 신라 9주 5소경 지도에서는 그냥 양주 북쪽에 도시라는 점 하나 찍어놓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삼국사기 지리지대로라면 왕경은 지금의 경주시 동 지역 인근 정도 범위고 바깥 지역, 예를 들어 지금의 안강읍이나 외동읍 쪽은 별개 행정구역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 흥덕왕릉이나 원성왕릉이 있는데 신라는 모든 신라왕릉을 왕경 범위 안에 조성했으므로[13] 이 지역도 왕경 범위에 속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시대별로 범위가 바뀌었거나, 공식적인 행정 경계와 관념적 경계가 일치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수도 중심지(경주분지 가운데 지역) 동쪽은 대성군(大城郡), 서쪽은 상성군(商城郡)이다. 그런데 전국 다른 군은 밑에 현(행정구역)이 있는 것과 달리 이 대성군과 상성군 두 군은 특이하게 아래에 현 대신 정(停)이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상성군은 남기정(南畿停)/중기정(中畿停)/서기정(西畿停)/북기정(北畿停)/막야정(莫耶停) 등 5개 정으로, 대성군은 약장현(約章縣)과 동기정(東畿停)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기() 자는 '도읍의 주변'이란 뜻으로, 바로 경기도 할 때의 기 자다. 지리적 위치로도 짐작할 수 있지만 대성군과 상성군은 일종의 경기도 내지는 수도권 역할에 해당하는 특수 행정구역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정황상 여기까지는 보편적으로 왕경으로 간주했던 듯하다. 현대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 역시 이 정도 범위까지 포함된 개념을 말한다.

신라의 공식 행정구역명은 위와 같이 '동서남북+기'로 여러 개로 나뉘었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여러 구절에 의하면 이를 통틀어 경기(京畿)라는 단어도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4. 지리

같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가야도 포함)와 통일신라, 남북국시대고구려백제, 발해가 외침과 내부 정책에 따라 수도를 여러 번 옮겼던 것, 연맹 국가였지만 가야도 외침 등으로 금관국에서 반파국으로 가야의 여러 국가들 맹주가 바뀐 것과는 달리 삼국통일 이후 통일 신라 시대까지 1천 년 동안 굳건한 신라의 수도였다. 형산강과 그 지류에 위치하여 식수 확보가 쉬우면서 지형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하여 방어에 용이하고 경상도 지역치고는 꽤 넓은 평지이자 한반도 남부 최대의 단일 선상지인 경주분지에 위치해 있어 식량 생산력도 높아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복속하고 영역 국가 신라가 될 수 있었다.

현대에 경주보다 더 넓은 농토가 된 김해 평야전라도의 평야 등은 고대에는 바다였거나 농사를 짓기 힘든 환경이었던 반면 선상지를 형성한 경주는 고대부터 홍수 위험이 낮으면서도 우물을 얕게 만들어도 용수를 구할 수 있는 상태였다. 또 전술했듯 은근히 당시 기준으로 군사적 입지가 좋았다. 동남쪽으로 치우쳐 있어 주변의 강국인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했으며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덕에 왜구의 소소한 노략질만 뺀다면 대규모 외침을 당한 적이 거의 없다. 물론 바다에 가까워 왜구의 공격에 취약한 단점은 있지만 시가지가 바다에 바로 붙어있는 건 아니고 분지로서 토함산 등 산지로 보호받고 있는 데다 신라인들도 당연히 이를 대비해 수도를 보호하는 산성 네트워크를 깔았기 때문에 일본은 결국 신라가 존재하는 동안 경주 침공을 완전히 성공한 적은 없었다.[14] 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밀고 와서 경애왕을 자살로 몰아넣는 사건은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신라가 껍데기뿐이었고 사실상 서라벌만 남은 상태였던 터라 서라벌의 입지를 원인으로 보긴 어렵다. 다음 왕인 경순왕고려에 항복했을 정도로 신라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다만 서라벌의 이동이 100% 없었던 것은 아니고 지금의 경주시 영역 안에서 산발적으로 조금씩 왔다갔다한 적은 있다. 예를 들면 자비 마립간보문관광단지 근처의 명활성에 궁전을 옮겨 살았다.

그러나 통일 이후에는 한반도 전체에서 동남쪽으로 치우친 위치라는 한계성이 두드러졌다. 이에 31대 임금 신문왕달구벌 쪽으로 천도하려고 시도했던 적이 한 번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도를 이전하면 기득권인 귀족들의 힘은 약해지고 상대적으로 국왕의 힘이 강해진다. 하지만 귀족들도 수도 편재성이 심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순 없었는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작은 수도라는 의미인 5소경을 설치했다. 옛 금관국, 고구려, 백제 땅에 소경(小京) 다섯 곳을 설치하였다. 5소경은 각각 금관경(김해시)·남원경(남원시)·서원경(청주시)·중원경(충주시)·북원경(원주시)에 있었는데 단지 좀 큰 지방 도시 정도가 아니라 통치 거점으로서 상당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방 장악에 실패해 각 지역에서 호족들이 대두되게 되지만 이는 250여년이 지난 먼 미래에, 당나라라는 세계제국의 해체 국면에 따라 발해, 안남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벌어진 질서 재편의 한 사례였다.[15]

신라 입장에서는 서라벌 외에 다른 수도 입지를 찾기가 어렵기도 했다. 비록 물리적으로 통일을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백제 및 고구려 고지의 유민의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통일신라의 수도는 원신라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신라 중앙조정의 재원을 충당해주는 것이 바로 실크로드 해상교역이었으니 울산단층을 통해 울산항과 이어지는 경주를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신문왕이 천도하려 했던 달구의 경우 낙동강 수운이 있다고 하지만 감조구간이라 겨울에도 대체로 항행이 가능했던 개성의 벽란도나 서울의 마포와 달리 대구 일대는 겨울이 되면 주기적으로 결빙되었고, 이는 특히 무역이 중요했던 신라 입장에서는 매우 치명적인 문제점이었다. 만일 이 때 달구로 천도했다면 얼마 못 가 다시 서라벌로 환도하거나 재정 문제로 인한 신라 중앙정부의 통제력 약화가 더 빨리 나타났을 수도 있다. 결국 신문왕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천도 논의가 제기되지 않았다.

서라벌의 인구와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적어도 소도시가 된 지금의 경주시 시가지보다 넓었으리라 추측한다. 지금은 경주분지 안쪽에서도 시가지가 분지를 다 채우지 못해 이 많이 있는데 이런 곳도 당시에는 시가지였던 흔적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서라벌의 중심 지역은 지금의 경주 시가지 중심부 기준으로 약간 남동쪽 월성동 지역에 있었는데 조선 시대경주읍성이 오늘날의 중부동 일원(북부, 서부, 동부동)에 세워지면서 그때 경주시 시가지 중심부가 북서쪽으로 약간 옮겨갔다. 그래서 수백 년 세월을 거쳐 월성동 쪽은 건물이 소실되고 조선 이후 비어버린 월성동 일대는 오랫동안 으로 가려졌다. 경주에 가면 신라의 궁전으로 파악되는 경주 월성이나 첨성대, 안압지, 분황사, 황룡사지 등 주요 유적이 살짝 시가지 외곽의 논두렁 옆에 있는 게 이 때문이다. 이곳은 땅을 파헤치는 육중한 현대식 건축물이 별로 들어서지 않아서 많은 유적들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보존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경주에 놓이면서 이곳을 관통해 사천왕사 등 많은 문화재 터가 훼손되기도 했다. 세계유산 보호를 위한 유네스코의 권고도 있고 해서 동해남부선은 현재 외곽 건천읍(신)경주역으로 이설되었고 구내와 선로는 모두 철거될 예정이다. 단선 철도 하나 까는 것에도 이러한데 본격적으로 현대식 시가지가 개발되었다면 훨씬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심지어 울산시는 현 울산역 계획 이전에 경주역을 울산에서 접근이 편한 내남면 지역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이 경우 역세권 개발로 남산 권역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아래 거부되기도 했다.

5. 규모

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戶)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里)였다. 서른다섯 개의 금입택(金入宅)[16]이 있었다.
삼국유사》 제1 기이 진한
왕이 좌우의 신라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신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6년(880) 9월 9일

당시 수도 서라벌의 인구와 규모에 대한 기록으로는 대표적으로 삼국유사의 위 기록이 존재하는데 당시 신라 정부가 세세한 인구조사를 실시할 체계와 능력이 있었던 것은 민정문서 발견으로 증명된 만큼 저 1단위까지 떨어지는 수치는 일연스님이 지어낸 것은 아니고 고려 중기까지 남아 있었던 어떤 1차 사료를 인용한 수치일 가능성이 높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 호(戶)에 5 명이라고 가정해도 경주 한 곳에만 인구 8~90만 명이 살았다는 뜻이고 이는 고려 수도 개경의 2~3배, 조선 수도 한양의 4배, 현 경주시의 3.5배가 넘는 수준이며 화성시에 맞먹는 수치다.

다만 당시 신라가 이슬람 제국, 당과 같은 인구 수천만 규모의 대국도 아닌 상황에서 90만 명이 몰려 살았다는 것에 의문을 품는 주장도 있다.[17] 이기봉과 같이 서라벌 인구 백만설을 진지하게 검토한 학자도 존재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그정도까진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더 많은 편이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경주 중심부의 경주분지 지형상 90만 명이나 몰려살 수 있을 만큼 이 넓지가 않다.[18] 아파트도 없던 시대라, 1~3층 정도 저층 건물로 좁은 경주분지를 전부 꽉 채워도 90만은 어려워 보인다. 냉정히 말해서 어려워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턱도 없는 수치다. 대륙설을 신봉하는 환빠들이 이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성기 서라벌의 규모를 전하는 얼마 안되는 기록인' 이 부분을 마냥 엉터리 기록으로 단정하고 넘겨 버리기에는 찜찜한 것도 사실이라 여러 해석이 존재하는데, 예를 들면 삼국유사의 17만 8936호는 17만 8936이나 17만 8936(약 35만)로 한 글자를 잘못 쓴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서라벌과 그 일대 수도권을 다 합친 기록이 아니냐는 식으로 17만 호가 말하는 범위를 넓게 보는 설들이 있다. 신라의 수도 범위를 경주분지의 시가지 자체로만 한정하지 않고 넓혀서 본다면 90만 명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다만 경주 분지 주변으로 넓혀서 봐도 주변 지형이 죄다 산이라 그게 가능하냐는 의문도 나오는데, 산과 산 사이의 좁은 계곡에서조차도 시가지 유적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완전 의미가 없는 뻘소린 아니다. 심지어 유네스코의 요구에 따라 저 멀리 이설한 신경주역에서 갈라져 나온 포항 방면 일반철도 삼각선 건설 부지 일대에서도 시가지의 도로, 담장, 우물, 제방, 건물 터 등의 유적과 왕(王)자가 쓰인 청동거울 등 당대 서라벌 주민들의 유품들이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했다.

고대의 다른 인구 기록 사례를 참고하면, 한나라는 수도 장안과 주변 삼보(중국)를 합쳐서 서기 2년에 19만 5702호의 인구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도 장안을 포함하는 경조부 기준으로 인구 기록을 남겼는데 둘 다 오늘날의 경주시 범위보다는 훨씬 넓은 영역이다. 즉 서라벌 인구 기록도 딱 경주분지 부분 인구만 집계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수도권 범위의 인구 총합일 가능성이 있다.

일단 서라벌을 나누는 6부도 대략적으로 이 정도 방향의 이 정도일 것이다 정도만 밝혀졌지 정확한 범위는 학자에 따라 천차만별일 정도라서[19] 나무위키에서 쉽게 결론내릴 부분이 아니다.

고고학적으로는 경주시 외곽인 지금의 건천읍 금척리, 모량리까지 방리도로 유적과 귀족 고분군 등이 드러나 일단 도시의 범위가 경주분지 중심지에 국한된 소규모는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백만까진 아닐지 몰라도 지리적으로 포화상태에 다다를 만큼 한계까지 큰 도시였음은 분명하다.

또 다른 설로는, 신라 각 지방에 이런저런 이유로 나가 살고 있지만[20] 왕경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가문의 호적만 수도에 남겨두는 일종의 위장 전입이 전부 포함된 인구 통계가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21] 다른 사례를 찾아보면 고대 로마에서도 로마 시민은 로마에 실거주하는 사람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속주에 살아도 시민권이 있으면 로마 시민이었고 여러가지 혜택이 있었으며 현대에도 중국이나 북한 같은 나라는 수도에 산다는 신분증 자체가 일종의 귀족 신분증으로 직결되는 사회인 것처럼 고대의 중앙 집권적 귀족제 사회였던 신라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현대로 시선을 돌려봐도 공공기관 이전으로 세종특별자치시를 비롯한 지방에 내려온 수도권 출신 주민들이 주민등록 이전을 거부해 곯머리를 알았던 사례도 있다. 심지어 골품이 왕경인에게만 주어졌다는 주장도 존재할 정도다.

삼국유사의 다른 부분인 권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에서도 전성기 서라벌 시가지의 규모를 설명한 기록이 있는데, 제49대 헌강왕 시기 기준으로 서라벌의 중심지에서 동해 바다에 이르기까지 담장이 연이어져 있었으며, 기와집이 대다수였다고 한다.[22] 이 바다가 지금의 감포읍 주변 앞바다인지 아니면 포항이나 울산 방향쪽인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어느 쪽이든 경주 중심지(월성)에서 직선거리로 약 25km 이상 떨어진 곳이라 지금의 경주시 시가지보다도 훨씬 넓은 게 된다.[23] 물론 이 역시 은유, 과장된 기록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찌됐든 정확한 인구 수와는 별개로 당대 한반도에서 제일가는 대도시였음은 사실로 보이고, 고려 시대에도 여전히 주요 대도시이자 3경에[24] 지정되었을 정도로 주요 도시로 기능했다. 이후 이야기는 동경 문서 참고. 서라벌은 고려시대까지 금입택과 수천 채의 기와집들이 남아 있었으나, 여몽전쟁 당시 고려 무신정권강화도로 넘어간 사이 동경까지 몽골군이 남하해 서라벌 일대를 초토화했는데 이때 랜드마크격인 황룡사까지 소실되었다. 이후 원 간섭기에 재건되어 조선시대에도 부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나름 지방거점 도시 역할을 했지만 신라와 고려 때보다는 도시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5.1. 기타 도시들과의 비교

보수적으로 해석해 17~35만 정도가 산 도시라고 해도 당시 기준으로 보면 국제적인 대도시임은 틀림없다. 한반도의 인구가 12배 이상 늘어난 현재의 경주시보다도 인구가 많았을 확률이 있다는 것.

통일신라 시대인 10세기 전을 기준으로 하면 신라와 비교도 안 되는 영토를 지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50만 정도, 서유럽 최대의 도시인 파리로마가 5만 정도이고 런던은 간신히 만 명을 넘었다는 걸 보면 당시로서는 세계구급 대도시 중 하나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이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 바그다드, 장안세계를 대표하는 3대 도시로 보고 중국에는 수십만 규모 도시들이 몇 개 더 있었으니 못해도 세계 10위 안에는 들었을 듯.[25] 만약 정말 90만이면 인구 백만을 자랑하던 장안에 버금가는 대도시다.

사실 8세기 4대 주요 도시였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논쟁 중이긴 하다. 설령 17만 이하의 인구였다고 해도 작은 도시 수준은 절대 아니었고 비단길에 발달된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일단 영문 위키백과에서도 8~9세기 서라벌이 장안, 콘스탄티노폴리스, 바그다드 다음으로 규모가 큰 4위 도시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당나라 제2의 수도이자 장안 인구(약 100만)의 60% 정도 되던 낙양이 순위에 안 들었는데 사실 낙양 인구(약 60만)가 서라벌 인구보다 많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사실 지역 할당제만 아니면 낙양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바그다드(각각 약 50만 추정)보다도 큰 도시였다. 경주와 비슷한 규모였던 헤이조쿄는 10만 정도로 추정된다.

17만~35만으로 봐도 후대 고려, 조선 왕조의 개경, 한양에 못지 않거나 오히려 더 큰 규모일 가능성도 제기되는데[26], 사실 신라도 천 년이나 되는 기간 동안 경주를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관청도 많았고 살기에는 다른 곳보단 괜찮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수도 집중 현상으로 90만 명이나 되는 인구가 살았을 수도 있다.[27] 그리고 인구가 몇이냐를 떠나 당시 서라벌이 국제도시였던 것은 맞아보이는데, 처용 등으로 대표되는 페르시아나 기타 먼 지역 상인 집단이 거주한 흔적이 보이고, 원성왕릉 석상이나 중동에 지금도 남아있는 신라 관련 기록이나 지도, 쿠시나메 이야기 등에서 당시 신라가 외국과 활발히 교류한 무역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28]

6. 구조

기본적으로 중심 지구는 서쪽으로는 서천, 북쪽으로는 북천, 동쪽으로는 명활산과 낭산 사이, 남쪽으로는 포석정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에는 건천읍 모량리와 북천 건너편까지 주거 지역이 확대됐다고 한다. 물론 이는 중심 지구의 범위이고 왕경으로 인정되는 범위는 더 넓었는데 곳곳에 시가지(부도심) 혹은 위성도시가 지금보다 촘촘히 존재했고 불국사, 이거사지 등의 크고 중요한 시설들이 배치되었다.

아래의 기본적 구조는 통일신라 이후의 모습을 기준으로 한다. 삼국시대의 서라벌은 중국식 도시계획의 영향을 덜 받고 좀 더 자연 발생적 도시 구조 모습을 띠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후 시대의 유적들이 그 위에 중첩되면서 상당 부분은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궁전경주 월성 북쪽으로 넓은 주작대로가 나 있어 정북쪽의 성동동 전랑지까지 이어졌다. 궁전의 남쪽은 남천이 흐르고 있어 정문이 북쪽인데, 옛날 동아시아 웬만한 도시들은 중국장안을 본떠서 비슷비슷한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29] 중국식이라면 남쪽으로 나 있어야 할 궁전의 정문이 북쪽이라[30] 서라벌은 이런 표준에서 다소 벗어난 구조였다.

어쨌든 타고난 지형상 그건 어쩔 수 없고, 중대에 들어서 중국의 장안을 본떠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도시를 네모 모양의 방리로 구획하였다. 기록상 469년 처음 방리명을 정하는데 현재 5세기의 도로나 도시계획은 확인되지 않으며 6세기 1/4분기부터 도시 유적을 찾을 수 있다.

중심 지구는 정사각형 36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1개 방은 16개의 작은 구획으로 나누었다. 경주 왕경 전체는 6부 35리(혹은 55리) 360방(혹은 1,360방)으로 되어 있었다. 6부가 가장 상위 단위고 순서대로 부-리-방(혹은 촌)으로 앞 단위에 포함되었다.

황룡사지 동편에서 완전한 형태의 1방이 조사됐는데(신라 왕경S1E1지구유적) 남북 172.5m, 동서폭 167.5m, 점유면적 28,700㎡이며 방 전체가 방장(坊墻)이라는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방장을 따라 외곽 사방에 도로와 배수로가 있고 담장 내부에는 5~8개 정도 건물로 구성된 가호 18개가 들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은 거주 시설이고 소형 사찰, 창고 등도 들어 있었다.

사각형 방들 사이 구획에는 자갈 등으로 폭 13~15미터 정도의 도로를 깔았다. 도로는 중앙은 굵은 자갈, 양측면은 잔자갈이나 모래를 깔아 포장했고 도로면에서 발견된 경계석 위치를 보아 차도인도의 구분이 존재했다. 도로 중에서는 수레바퀴 자국이 나와 차도를 통해 수레가 활발히 오갔던 것으로 보이며 도로 양편 가장자리에는 빗물과 생활 하수 배수 시설을 깔았다.

서라벌 전체가 네모반듯한 방으로 된 것은 아니고[31] 도시 외곽 지역에는 촌(村)이란 기초 단위도 병용되었다. 방이 도시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나뉜 기초 단위라면 촌은 신라 초창기부터 존재한 자연 발생적 거주 단위였다.

6.1. 6부

파일:경주 사로6촌.png

신라가 처음 건국되기 전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사로 6촌에서 비롯해서, 6촌이 6부로 재편해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천년간 가장 큰 행정구역 역할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6부 문서 참조.

7. 신라 이후

935년 제56대 경순왕이 서라벌을 떠나 개성에서 항복하면서 신라의 천 년 사직이 끝나고 도시 이름도 지금의 경주로 바꾼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려시대에도 서경 평양시와 함께 3경 중 하나인 동경(東京)으로서 중요한 도시로 대접받았고 정지상의 시에서도 '일만호'로 표현할 만큼 큰 시가지에 황금 절이 빛나 지나가는 사람이 구경하기 바쁜 화려한 대도시로 등장하고 있지만[32], 수도였던 시절 전국의 세금이 모이는 거대 소비 도시 구조와 인프라는 이제 지방 도시가 된 경주로서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 예시로 1012년 황룡사 9층 목탑을 수리하기 위해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던 옛 신라 왕성의 일부인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건축 자재를 사용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신라 때의 대형 사찰 중생사는 시주가 들어오지 않아 승려가 김해까지 탁발을 하러 갈 정도로 경영난을 겪었고 고선사와 창림사 석탑은 해체해서 개성 만월대로 가져가버리기도 했다.

고려 현종은 기존 신라 왕경의 중심지였던 현 월성동에서 서북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경주읍성을 새로 만들어 관청 등 시설을 모았고 이후 고려, 조선을 거쳐 21세기까지 약 1천 년간 경주의 중심지는 지금의 중부동 일대 경주읍성 지역이 된다. 이후의 역사는 경주읍성 문서 참조.

그 대신 신라 때 중심지였던 월성동 쪽은 시가지의 축소, 이민족의 침입, 관리 부족, 부실한 치수 등으로 쇠락해 대부분 유구만 남고 논밭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중심지 이동 덕분에 신라시대 유적지 위에는 더 이상 건물이 세워지지 않아 유적은 더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서울 풍납토성이 유적 위에 들어선 시가지로 훼손된 것 같은 위기는 피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신라의 수도였기도 하여 관광 도시로서 유명하다. 경주시 학교들을 제외한 어느 정도 규모 있는 다른 지역 학교들에서 수학여행으로 이곳을 찾아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8. 기타

  • 삼국사기에 의하면 630년지진이 발생해서 대궐의 뜰이 갈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2016년 경주 지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라벌이 위치한 경주 지역은 불국사 단층이 관통하여 예로부터 지진이 자주 일어났던 지역이다.

[1] 한국사 검정 교과서 표기. 금성과 서라벌은 모두 같은 지명으로 하나는 한자음으로(음독), 하나는 순우리말로(훈독) 읽은 것이다. 금성을 순우리말로 읽으면 '쇠벌'로 읽히므로 서라벌과 발음이 비슷해진다.[2] 완전한 상상은 아니고 중심인 월성동 일대를 중심으로 대로의 배치 등 대략적인 구획은 고고학적 조사 결과를 따른 것이다. 랜드마크황룡사 9층 목탑의 정확한 형태에 대해서는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3] 해당 복원도는 2014년 신라 왕경 복원 계획을 세우면서 당시보다 몇 년 전에 제작된 천년왕국의 부활 영상에 사용된 배경을 분위기만 바꿔서 재활용한 것인데, 유네스코에선 복원 계획이 기록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반대하였고 결국 무산되었다. 당장 월성만 봐도 지하레이더 조사로 밝혀진 배치도 및 실제 발굴 조사로 밝혀진 건물 위치와는 완전히 다르고, 월성 북쪽 딱 붙은 곳에 북궁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오류가 있다. 월성은 원시적인 형태라 저렇게 정갈하지 않고 건물들이 자유분방하게 배치됐으며 월성 북쪽은 북궁이 아니라 북궁의 후보들 중 하나인 전랑지까지 이어지는 주작대로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건물에 창호지문이 사용된 오류가 있는데 창호지문은 고려 중후기에 만들어진 거다. 신라는 물론 당대 동북아시아에는 창호지가 없었다. 당장 백제문화단지만 봐도 창호지문이 없는 걸 알 수 있다.[4] 당대의 서라벌은 현재의 경주시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역(구도심뿐만 아니라 남산, 불국사, 북천 너머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지역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장안성을 본떠 정방형의 도시구획을 지녔고 거주인구는 70만 호에 이르렀다.)이었으나 오늘날의 경주시는 토함산을 넘어 감포읍 등의 행정구역을 포함하기 때문에 옆으로는 동해로 통하고 위로는 포항, 아래로는 울산과 접하는 비대한 해양 도시다.[5] 대표적으로 로마(고대 로마, BC 753~286), 콘스탄티노폴리스(동로마 제국, 330~1453, 오스만 제국까지 합치면 1922년까지), 교토(일본, 794~1869), 파리(카페 왕조, 989~현재), 런던(윌리엄 1세의 천도, 1066~현재) 등이 있다. 마찬가지로 서울이나 중국시안시, 뤄양시, 베이징시 등도 드문드문 수도였던 기간을 총합하면 천 년은 넘지만 서라벌과 다른 수도들처럼 연속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6] 정확히는 주례 고공기에 근거하였다.[7] 공식 한자 국호로 '신라'가 등장한 건 지증왕 시대이지만 이전에도 신라라는 국호는 고유어의 한자 표기로써 사용되었다. 가령 414년 건립된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신라를 그냥 '신라'라고 부른다.[8] 수도 서라벌을 '동쪽 수도'란 의미인 동경으로 칭한 것은 '서쪽 수도'로 간주한 곳도 존재했다는 의미인데 이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당시 신라에서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해 설치된 행정 구역이었던 5소경에 대응된 호칭이라는 설이 있다. 이들 5개 소경은 '작은 수도'라는 의미답게 수도의 사람과 기능을 일부 옮겨 조성했고 위치도 모두 경주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다. 소경의 이름들을 봐도 김해를 제외하면 북원, 서원, 중원, 남원으로, 동 자가 붙은 소경만 없으므로 왕도가 그 자리라는 것을 추론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서쪽 당나라의 장안을 서경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대응해 신라를 중국과 대등한 문명 국가로 간주해서 동경으로 칭했다는 설이 있다. 주보돈 교수는 2015년 신라의 동경과 그 의미라는 논문에서 8세기 중엽부터 신라인들이 고양된 문화 의식과 자존 의식 아래 그렇게 부르는 용법이 생겼으리라 추정했다. 이런 신라인의 자존 의식의 예시로 황룡사 9층 목탑의 의미, 태종 무열왕묘호 분쟁, 김헌창의 난장안국을 칭한 것을 예로 들었다. 아무튼 동경이란 이름을 쓴 적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이 시기 경주는 수도였기 때문에 굳이 동쪽 수도라는 의미의 동경보다는 경(京), 왕경(王京) 등 수도 그 자체로 더 많이 불렀다.[9] 그러나 마을의 중세국어형에는 이 들어가 z 발음이 들어갔으므로 마을이 아닌 무리의 음차일 수도 있다. 대중(大衆) 같은 단어만 봐도 도시를 포함한 큰 인간집단을 뜻하는 단어가 ‘무리’로 나타나는 게 언어를 막론하고 흔한 일이니 말이다.[10] 지증왕의 국호 통일 이전.[11] 금강경이 설해진 배경이 되는 도시다.[12] 구마라습의 번역은 슈라바스티를 사위성으로 표기하였다.[13] 멸망 이후 조성된 경순왕릉은 예외.[14] 아이러니하게도 반대로 오히려 수도가 일본에서 훨씬 멀어진 고려, 조선 때는 왜구나 일본군한테 털렸던 적이 있다.[15] 사실 김헌창의 난 당시 수도에서 가장 먼 북부의 지방관들이 신속하게 지원군을 보냈던 걸 보면 통일신라의 지방 장악력이 한국사 다른 나라나 동 시기 중국, 일본에 비해서 특별히 부족했던 건 아니다. 물론 마지막 순간에는 지방 장악에 실패했지만 이게 통일신라 성립부터 계산해도 220여 년 만에 일어난 사건인데 220년 동안 지방의 반란을 차단해 왔던 것은 세계사적으로 길면 길었지 짧은 것은 절대 아니다.[16] 황금을 집에 씌운 부잣집 큰 저택을 말한다. 시기상으론 헌덕왕 전후로 추정된다.[17] 물론 국가의 총인구와 한 도시의 인구 규모는 반드시 비례하는건 아니다.[18] 그래서인지 경주분지 땅에서 비교적 외곽 지역인 구 경주경마장 부지에서도 집단 집터와 숯을 굽던 가마터가 20기나 발견됐다. 이는 당시 경주분지 땅 안에서 인구 집중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다. 물론 서라벌 인구 100만설을 지탱할 만한 근거로는 많이 부족하다. 당장 현대의 성남시 인구가 100만이 채 안되는데 고대 서라벌보다 훨씬 넓음에도 아파트로 완전 도배되어 있음을 생각해보자.[19] 경주분지 안에 6부가 다 있었을 것이란 것부터, 아예 지금의 경상북도 여기저기에 퍼져있었다고 비정한 경우도 있다.[20] 작은 수도라는 의미의 소경(小京)은 아예 중앙 귀족과 부유한 백성을 옮겨서 채웠다는 기록도 있다.[21] 하일식, 「신라 왕경인의 지방 이주와 편적지(編籍地)」, 『신라문화』 38, 2011.[22] 참고로 기와집으로 수도를 도배한 경우가 고려 충선왕 때도 있었는데, 차이라면 서라벌은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기와집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이고, 충선왕 시기 개경은 왕이 직접 명령해서 아예 도시 자체를 재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조선 시대 실학자 박제가의 말에 의하면 18세기 한양에는 기와집이 4만호가 있었다고 한다.[23] 일대가 고루 퍼져서 동해까지 온거면 훗날의 개경이나 한양보다도 훨씬 큰 메트로시티였다는거고, 그나마 현실적으로 축소해서 보면 경주분지 바깥의 단층이 발달한 지형상 현대의 부산이나 홍콩마냥 가늘고 길게 시가지가 쭉 이어졌다고 볼 여지도 있다. 양산단층 문서도 참고. 아무래도 무역도시로 기능하려면 바다쪽까지 시가지가 이어지는게 유리한 점이 있으니 이상할건 아니다.[24] 서경(평양), 개경(개성), 동경(경주). 남경(서울)까지 포함하기도 한다.[25] 당시 통일신라가 현 영국잉글랜드와 엇비슷한 면적의 영토를 가졌음에도 10만 이상의 인구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 중엔 이 있다. 중앙아시아부터 북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을 넘어 유럽까지는 을 주식으로 삼았지만, 동아시아는 을 주식으로 삼았는데 밀보다 인구 부양력도 높으며 농사에 더 많은 인구가 필요한 쌀의 특성상 같은 면적의 토지를 두더라도 서양보다 동양의 인구가 더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고대와 중세 서양사에서 웬만한 전투의 규모가 대개 수천 명이었던 반면 동시기 동양사에서는 최소 수천 명, 보통 만 명 단위를 오갔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예컨대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성채를 각각 침략했던 일본군의 숫자만 만 명이 넘으며 중국사에서는 주로 몇십만 명에서 크게는 100만이 넘는 군대가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실제로 7세기 초 수나라양제가 고구려를 굴복시키기 위해 최소 113만 명이라는 군대를 동원했던 기록은 약 1300년이 지난 제1차 세계 대전 때에 와서 깨지게 될 정도니. 물론 중국사 특성상 수나라 이전의 동원 기록에서는 과장과 왜곡의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럼에도 이를 감안하며 훨씬 낮게 추정하더라도 대개 몇만 단위에서 최대 몇십만의 군사가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26] 사실 이전 국가의 도시 규모가 이후 국가의 도시 규모보다 무조건 작다고 볼 순 없다. 예를 들어 중국 고고학에서도 상나라의 도읍지가 이후 주나라의 그것보다 크다고 보고되고 있다.[27] 여담으로 조선 역시 다산 정약용이 자식에게 한양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로 서울 집중 현상이 심했지만, 그래도 수원 화성 등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관련 기사, 관련 기사 2[28] 장보고청해진을 설치해 활약하던 것도 이시기 쯤이고, 흥덕왕이 외국에서 온 사치품들이 너무 많다고 신분에 따라 금하는 기록도 있다.[29] 발해상경용천부, 일본나라현, 교토 등도 똑같이 장안을 본떠서 정궁과 주작대로를 두고 구획을 지었다. 다만 발해, 일본과 케이스가 다른데 수, 당의 장안 정도 훨씬 이전부터 서라벌은 신라의 수도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의 요소를 완전히 수용해 거의 빈터에 새 도시를 지은 발해, 일본과 달리 신라의 서라벌은 구조적으로 장안성과 차이가 크고 기존에 이미 존재하던 대도시에 당의 요소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30] 정석에 가까운 구조는 경복궁이나 자금성을 떠올려보면 된다. 경복궁의 경우 광화문 광장이 주작대로. 개성 만월대 역시 개경 내부에서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31] 경주분지 중심부 지형 자체가 3개의 큰 강이 흐르고 네모반듯하지 않다.[32]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백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