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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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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헤이안쿄.jpg

1. 개요2. 연혁
2.1. 헤이안쿄 천도 이전2.2. 일본의 천년 수도2.3. 도쿄 천도 이후
3. 기타
3.1. 수도 논란3.2. 폭격을 피해간 도시
4. 도시 변천사5. 여담
5.1. 한국 도시와 비교

1. 개요

간사이 지방에 위치한 교토는 일본의 대표적인 고도(古都)이다. 교토가 도읍으로 정착되기 전 고대 일본에서는 천도가 빈번했다. 교토 이전 가장 오랜 기간 도읍이었던 나라의 헤이조쿄(平城京, 710년~784년)만 해도 쇼무 덴노(재위 724년~749년) 시기에 재앙을 피한다는 이유로 구니쿄(恭仁京, 740년~743년), 시가라키노미야(紫香楽宮, 743년~744년), 나니와쿄(難波京, 744년~745년) 등에 천도했던 기간이 있었으며 아스카 시대 역시 천도는 빈번했다. 즉, 교토는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일본의 도읍이 된 최초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2. 연혁

2.1. 헤이안쿄 천도 이전

헤이안쿄 건설 이전 교토의 역사는 명확하지 않으며 특히 6세기 이전의 역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모미오야 신사, 가모와케이카즈치 신사, 기요미즈데라, 고잔지 등이 헤이안 천도 이전에 지어진 주요 문화재이다.

2.2. 일본의 천년 수도

794년 헤이안 시대간무 덴노가 헤이안쿄(平安京)를 건설하여 이곳으로 천도한 이래, 대정봉환(大政奉還) 이후인 1869년 메이지 덴노도쿄로 천도할 때까지 무려 1075년 동안 일본의 공식 수도였다. 막부 시대에도 실질적인 권력기구인 막부가 가마쿠라에도에 들어선 바가 있지만, 교토는 천황이 근거하는 공식 수도였고, 정치적 입지 역시 결코 약하지 않았다.[1] 이런 연유로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이 교토를 정신적 수도로 여기며 인구에 비해서도 그 위상이 매우 높다.

다만 헤이안 시대 말기였던 1180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에 의해 현재의 고베 일대에 위치한 후쿠하라쿄(福原京)에 약 반년간 천도한 적이 있었고,[2] 요시노 등 남북조시대 당시에는 남조가 수도를 옮긴 적이 있었다. 전자는 고려 말 남경 천도와 같이 극히 짧은 기간에 그쳐 존재감이 적고, 후자의 경우 일본 전체의 수도가 아니었던 데다가 교토에 위치한 북조 정권의 실권을 쥔 아시카가(足利) 가문이 시종일관 남조 정권을 압도했기 때문에 천년 도읍의 위상을 허물 정도는 아니다.

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거치며 교토 역시 많은 파괴와 복구를 거쳤다. 특히 오닌의 난을 비롯한 센고쿠 시대의 잦은 전란으로 무로마치 시대 이전 수많은 고건축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재 교토에 있는 문화재들은 대부분 센고쿠 시대 말기나 에도 시대 초기의 작품이다. 이러한 난리통 속에 교토의 시가지도 다소 바뀌었는데 현재 교토고쇼는 원 헤이안궁의 동북쪽으로 옮겨졌다.

2.3. 도쿄 천도 이후

1869년 메이지 신정부는 도쿄 전도를 본격적으로 감행했다. 좁은 분지에 위치한 교토와 달리 도쿄는 간토 평야 한복판에 위치해 도시권 확장, 수운, 무역 등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에도 시대 내내 발전한 도쿄의 인프라를 포기할 수 없었으며 북방 개척의 과정에서 일본이 홋카이도를 넘어 사할린쿠릴 열도까지 진출하며 도쿄가 지리적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도 지위를 상실한 이후에도 교토는 '서쪽의 수도(사이쿄, 西京)'로 칭해졌고[3] 다이쇼 덴노쇼와 덴노의 즉위식이 거행되는 등 정통성 있는 고도로서 역할을 인정받았다. 또한 교토대학을 비롯한 유수의 연구기관들이 설립되며 '학문의 메카'로 성장했다. 하지만 메이지 초기 오사카와 2위를 놓고 경쟁했던 교토의 인구는 점차 나고야, 요코하마, 고베, 후쿠오카, 삿포로 등 신흥 대도시들에 밀려 나가며 현재 8위까지 추락했고 패전 이후 황실전범의 개정에 따라 헤이세이 시대 이후 천황의 즉위식이 도쿄에서 열리게 되면서 전전에 비해 위상의 실추를 겪었다.

3. 기타

3.1. 수도 논란

일부 학자들이나, 교토에 대한 애향심이 강한 지역 주민들의 경우 천황의 정식 천도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수도가 교토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 수도를 옮길 때는 천황의 천도령이 있어야 했는데, 메이지 시대 초기 도쿄로 이궁할 때는 공식적으로 천도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교토 주민들의 반발이 무서워서 도망치듯 도쿄로 가서 눌러앉았다. 이때 '천도'라고 하면 반발할 것이 뻔하니 말을 조금 바꿔서 '전도'한다고 하였다. 쇼와 덴노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즉위식을 교토고쇼에서 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근대까지 황실의 정신적 본거지는 교토였다.[4]

그래서 여전히 교토가 명목상 수도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실제로 일본의 각 지역의 풍습과 문화를 소개하는 일본 모 예능 프로에서 방영한 내용에서는 도쿄에 사는 교토 출신의 아가씨가 타지역 출신의 혼약자를 고향에 데려와서 부모에게 소개를 시키는 장면에서 그 혼약자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도쿄로 언제 이주했는지를 설명하는데 '언제 언제 상경(上京) 했습니다' 라고 말하자 아가씨의 부모들이 '에?' 하면서 급정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지금 도쿄고쿄(황거)는 행궁에 불과하며, 단지 천황이 교토를 비우고 있을 뿐이라는 게 된다. 실제로 다이쇼 덴노쇼와 덴노의 즉위식은 교토고쇼[5]에서 이루어졌다.[6] 전 천황인 아키히토가 즉위할 때도 교토에서 즉위식을 거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즉위식은 도쿄의 고쿄(황거)에서 이루어졌으며 현 천황 나루히토도 도쿄에서 즉위했다. 다만 즉위식 때 천황이 사용하는 어좌대는 교토 고쇼에서 해체해 도쿄로 가져와 사용했다. 이를 놓고 천황이 공식적으로 도쿄 천도를 인정한 것인지 아닌지를 놓고 또 이견이 많다.

하지만 애향심이 강한 일부 교토 주민들을 제외하면 일본 내에서도 이런 주장이 진지하게 거론되지는 않는다. 세계적인 인식이나 국내적인 인식이나 정치 및 경제적 영향력으로 보나 이미 일본의 수도는 도쿄이다. 간토 대지진 직후 일본에서 천도론이 거론되었을 때 '수도는 계속 도쿄로 한다.'라는 칙령을 내린 바 있고, 현재 일본 정부도 간토를 '수도권'으로 분류한다. 또한 현 천황의 거처, 정부 청사, 대사관 등 역시 도쿄에 있다.

2023년에 중앙정부 부처 중 하나인 문화청이 도쿄에서 교토로 이전되었다. 전체 직원 중 3분의 2가 교토에서 근무하며, 중앙부처의 전면적인 지방 이전은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라고 한다.

3.2. 폭격을 피해간 도시

중요 문화재가 많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군수산업의 거점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폭격을 덜 받았다. 하지만 패전 직전 원폭 투하의 대상 지역으로 원폭의 위력을 일본 정부에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폭격의 피해가 덜한 지역, 그러면서도 가급적 전략적 가치가 큰 지역이 후보지로 검토되었으며, 교토는 고쿠라니가타, 히로시마, 요코하마와 함께 최종 후보지로 선정되었다.[7]

교토가 원폭 목표에서 제외된 이유는 1945년 당시 미국의 전쟁부[8]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정신적 수도를 파괴하면 전후 민심 수습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으며 스팀슨은 개인적으로 1920년대 필리핀 총독 시절 수차례 교토를 방문했다.[9]

그러나 재래식 공습에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소이탄 폭격은 수시로 허가했다. 재래식 공습으로 문화유산을 제외한 일반 시가지와 공장, 이화학연구소 등의 여러 제반 시설은 철저히 파괴했다. 하지만 타 대도시들에 비해 폭격 강도가 약했던 건 사실이고 이러한 이유로 전후 새롭게 태어난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교토는 전근대 시기의 풍경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4. 도시 변천사

파일:Heiankyo_landsat.jpg
헤이안쿄와 현대 교토의 비교. 붉은 선 안쪽이 옛 헤이안쿄 자리이다.
파일:external/www.city.kyoto.lg.jp/heian.gif 파일:HeiankyouMapJapanese.svg
조성 당시의 헤이안쿄

당시 지명
나성문羅城門
내리內裏
안가문安嘉門
위감문偉鍳門
달지문達智門
상서문上西門
상동문上東門
은부문殷富門
양명문陽明門
조벽문藻壁門
대현문待賢門
담천문談天門
욱방문郁芳門
황가문皇嘉門
주작문朱雀門
미복문美福門
신천원神泉苑
동시東市
서시西市
동사東寺
서사西寺

일조대로一條大路
정친정소로正親町小路
토어문대로土御門大路
〇〇대로大路
근위대로近衛大路
감해유소로勘解由小路
중어문대로中御門大路
춘일소로春日小路
대차어문대로大次御門大路
냉천대로冷泉大路
이조대로二條大路
압소로押小路
이조방문소로二條坊門小路
육각소로六角小路
사조방문소로四條坊門小路
금소로錦小路
사조대로四條大路
능소로綾小路
오조방문소로五條坊門小路
고십소로高辻小路
오조대로五條大路
통구소로樋口小路
육조방문소로六條坊門小路
양해소로楊海小路
육조대로六條大路
좌녀우소로左女牛小路
칠조방문소로七條坊門小路
북소로北小路
칠조대로七條大路
염소로塩小路
팔조방문소로八條坊門小路
매소로梅小路
팔조대로八條大路
침소로針小路
구조방문소로九條坊門小路
신농소로信濃小路
구조대로九條大路

서경극대로西京極大路
무차소로無差小路
산소로山小路
창포소로菖蒲小路
목십대로木辻大路
혜지리소로惠止利小路
마대소로馬代小路
우다소로宇多小路
도조대로道祖大路
야사소로野寺小路
서굴천소로西堀川小路
서인부소로西靱負小路
서대궁대로西大宮大路
서즐사소로西擳笥小路
황가문대로皇嘉門大路
서방성소로西坊城小路
주작대로朱雀大路
방성소로坊城小路
임생대로壬生大路
즐사소로擳笥小路
대궁대로大宮大路
저웅소로猪熊小路
굴천소로堀川小路
유소로油小路
서동원대로西洞院大路
정고소로町尻小路
실정소로室町小路
오환소로烏丸小路
동동원대로東洞院大路
고창소로高倉小路
방리소로方里小路
부소로富小路
동경극대로東京極大路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천황의 명칭은 교토의 지명+원院을 사용했는데, 실제로 장지명 또는 주요 거처를 시호로 정하는 사례는 제법 흔하다. 또 섭관시대와 인세이 시대의 특성상 존호=시호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구쿄의 가문 명칭은 이곳 지명에서 따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헤이안쿄는 당나라장안을 본따 동서 4.5km, 남북 5.2km의 외성을 건축한 후[10] 북쪽에 궁성을 만드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대단한 도성을 만든 업적이 자랑스러웠는지 남북으로 뻗은 주작대로[11]를 기준으로 도성 서쪽은 우경(右京 우쿄), 동쪽은 좌경(左京 사쿄)로 나누었는데[12][13] 별칭을 각각 장안(長安 조안), 낙양(洛陽 라쿠요)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쪽의 장안은 가쓰라가와의 습기와 잦은 범람 때문에 주거에 적절하지 않아 일찍이 풀이 무성한 습지대가 되어 버렸다. 교토의 주요 사찰들이 도성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 자리잡은 것도 이런 이유였다. 도성 서쪽이 쇠락하면서 장안이라는 이름은 자연스레 쓰이지 않게 된 반면 수도 동쪽을 일컫는 낙양이라는 말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된다. 교토에 들어가는 것을 상락(上洛) 또는 입락(入洛)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름의 흔적이다.

헤이안쿄 조성 이후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교토는 여러 차례 모습이 바뀌었다. 중대한 계기는 오닌의 난으로 이 난리통에 교토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교토의 고찰들도 이때 화를 면치 못했고 현재 교토에 남은 전각들은 절대다수가 15세기 이후의 건축물이다.[14] 서서히 도시가 재건되긴 했지만 예전같이 복구할 만한 역량은 모이지 않아[15] 도시가 남북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오늘날 카미교와 시모교 구 일대에만 사람이 거주하고 중간의 나카교 구는 논밭으로 전락했다.
파일:Odoi_landsat.jpg
오도이의 위치. 붉은 선이 오도이이다.

이렇게 몰락한 교토를 부흥시킨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어느정도 평화를 되찾은 후 히데요시는 도시를 정비하는 한편 경계에 오도이(御土居)라는 토성을 쌓았다. 이때의 성곽은 정방형의 헤이안쿄와는 달리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이다. 수도를 낙양이라고 부르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이 성곽 안쪽을 낙중(洛中), 바깥을 낙외(洛外)라고 부르기 시작했다.[16] 여기저기 흩어진 절들을 모아 사찰 거리인 데라마치(寺町)를 형성한 것도 그의 지시에 따른 것. 히데요시는 오사카에 거대한 오사카 성을 짓기는 했지만 교토에 저택과 성을 짓는 등 이곳에서 주로 활동했다. 또한 히데요시에 뒤이어 들어선 에도 막부는 전란으로 무너진 고찰들을 복구하였는데 많은 전각들이 에도 시대 초인 17세기의 작품들이다.

에도 시대의 교토는 문화 중심으로서 정치 중심지인 에도, 상업 중심지인 오사카와 함께 일본 3대 도시의 위상을 유지했다.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는 오사카보다도 번화했다는 내용이 있다.
동사(東寺)에서 대덕사(大德寺)까지 20리는 모두 상가 가운데로 지나왔는데, 인가의 조밀함이나 화물의 산적함이나 남녀가 북적이는 것이 대판보다 10배가 되었다. - 강홍중, 『동사록』
경도(京都)로 들어가는 도중에... (중략) 여기서부터는 민가가 즐비하여 꾸불꾸불 돌아서 갔다. 인구가 빽빽한 것과 의복의 찬란함은 대판에 비하여 오히려 나은 듯하였으나, 시가와 전포는 생활이 조금 못한 듯하였다. - 조엄, 『해사일기』

교토가 다시 일본 정치의 무대가 된 것은 막부 말기의 일이다. 미국의 개국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막부의 무능한 행태에 분노한 토막파가, 천황에게 실권을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천황이 머무르는 교토에 다이묘사무라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토막파와 막부파의 갈등은 유혈 사태와 전쟁으로 번졌다. 무려 천황의 거주지 바로 바깥에서 금문의 변이 발발. 오미야 사건, 토바 후시미 전투 등이 잇따랐다. 하지만 1869년 천황과 정부가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새 수도로 채택하면서 정치 중심으로서 교토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오늘날 교토는 150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이다. 곳곳에 오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대적 모습이 주를 이룬다. 천년고도에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시대 신불분리령으로 촉발된 폐불훼석 덕분이다. 이때 신토 이외의 외래 종교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던 교토의 오래된 사찰들은 대부분의 토지를 내주었다. 강제로 폐사되거나 다른 사찰과 합쳐진 사례도 많이 발견된다. 일례로 도시샤대학은 쇼코쿠지와 합사되어 사라진 절터에 건설되었으며, 덴류지는 보유한 산림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기요미즈데라는 심지어 광대한 토지 중 9할을 잃어버리고 현재 남은 게 1할 정도이다.

헤이안쿄 시절부터 거리 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아 시내는 바둑판같이 길이 나 있다. 동서 대로는 이치조, 니조, 산조.. 식으로 숫자 뒤에 조(条)가 붙는다. 헤이안쿄 시절에는 쿠조(九条)까지 있었지만 후대에 10번째 대로인 주조(十条)가 추가되었다.

장소도 주소보다는 교차로 이름으로 찾는다. 길이 대부분 남북/동서로 나 있기 때문. 예를 들면 이마데가와도리(今出川通)와 가라스마도리(烏丸通)의 교차점은 가라스마이마데가와[17] 라고 부르고, 시조도리(四条通)와 가와라마치도리(川原町通)의 교차점은 시조가와라마치(四条河原町)[18] 라고 부른다. 택시를 타도 교차점 이름만 부르면 알아서 간다. 단, 몇몇 특이한 경우가 있는데, 가령 교토대학 근처에 있는 히가시오지(東大路) 도로와 이마데가와 도리(今出川通) 도로의 교차점을 '히가시오지이마데가와'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햐쿠만벤(百万遍)[19]이라고 한다. 이렇게 들쑥날쑥한 이름은 히가시오지 도리[20]에 특히 많은 편이다. 그래도 택시 아저씨들은 저렇게 이야기해도 잘만 데려다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거리 이름을 노래로 부르면서 외우기도 한다. 동서로 이어지는 길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외우는 노래[21]와 남북으로 이어진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외우는 노래 각각 하나씩 총 2개가 있다. 이 중 동서로 이어지는 거리의 노래는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 7기인 미궁의 십자로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5. 여담

5.1. 한국 도시와 비교

한국에 비유할 만한 도시를 찾기 어렵다. 교토는 8세기 말 헤이안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수도였으므로 서라벌(통일신라시대)+개경(고려시대)+한성부(조선시대)을 합친 정도의 위상이기 때문. 보통 비교할 때는 신라 천년 수도 경주나, 고조선고구려의 수도 평양 정도가 비교된다. 한국에서 교토를 번안/현지화하는 경우 주로 경주가 선택된다.[22] 사실 한국사와 일본사는 흐름 자체가 많이 다르므로 교토나 나라, 아스카, 가마쿠라, 도쿄 등에 정확히 부합하는 한국의 역사 도시가 없으며 일본 역시 한국사의 서울, 평양, 경주, 개성, 부여, 전주 등에 정확히 부합하는 역사 도시가 없다.[23]

[1]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쇼군의 거처 역시 교토에 위치해 있었다.[2] 당시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추구한 적극적 대외교역 정책에 후쿠하라가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천도를 감행했다. 현대 고베가 국제 무역항으로 대번성한 걸 생각한다면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안목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무리한 천도는 결국 교토 기득권층의 반발로 곧 돌아왔고 얼마 못가 헤이안쿄로 환도할 수 밖에 없었다.[3] 이 관념은 이로부터 100여년 후인 1980년대말 작품인 드래곤 볼에도 '서쪽 수도'란 이름으로 등장할 정도이다.[4] 이 점은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긴 이후에도 대관식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고수한 프로이센 왕국과 매우 흡사하다.[5] 교토가 수도였던 시절에 역대 천황의 거소였던 곳. 즉, 황궁이다.[6] 지금과 달리, 구황실전범 11조에서는 교토에서 즉위할 것을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었다.[7] 8월 9일의 2차 원폭은 원래 나가사키가 아니라 고쿠라(지금의 기타큐슈)에 떨어질 예정이었으며 고쿠라에는 다행히도, 그리고 나가사키에는 불행히도 그날 북큐슈 지역의 날씨가 흐렸기 때문에 목표가 변경되었다.[8] 미국의 국방부는 2차 대전 이후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총괄하는 성격으로 창설되었다. 이 시절에는 육군을 담당하는 전쟁부(그래서 육군부, 육군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외에 해군과 해병대를 관장하는 해군부가 따로 있었다. 오늘날에는 국방부의 하위 기관으로서만 남아 있다.[9] 오펜하이머(영화)에서는 이것이 살짝 각색되어, 대통령인 FDR이 직접 교토를 폭격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나온다. 젊은 시절 방문했다는 언급도 함께 나온다.[10] 본래 당나라의 도성제(都城制)를 수용하여 외성의 건축을 계획했으나, 막대한 비용 문제와 외침이 거의 없는 일본환경적 특수성으로 인해 필요성이 의문시되어 건축되지 않고 외국 사신이 들어오는 주작대로 남단의 나성문(羅城門, 후에 나생문(羅生門)으로 변천) 좌우에만 이중의 성벽을 쌓는데 그쳤다.[11] 현대에는 아래에 서술되는 도시 변천으로 인해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센본도리로 남아있다.[12] 천자남면사상(天子南面思想-천자는 남쪽을 바라보고 정사를 행함)을 근거로 헤이안쿄 북쪽에 위치한 궁성에 거하던 천황이 주작대로를 바라봤을 때를 기준으로 좌·우를 나누었다.[13] 오늘날 교토시 가미교구(上京区), 나카교구(中京区), 시모교구(下京区) 일대로 현재의 우쿄구, 사쿄구와는 전혀 다른 지역이다. 현행 우쿄구, 사쿄구는 전근대엔 교토 시가지 밖의 지역(洛外)으로 각각 교호쿠(京北), 라쿠토(洛東)라 불리었다.[14] 오히려 나라의 경우 전란을 비껴갔기 때문에 도다이지, 야쿠시지 등 천 년이 넘은 고건축이 많아 남아있다.[15] 교토는 무로마치 막부의 수도 격이고 천황이 있는 만큼 무로마치 막부나 천황가가 나서야 했지만, 문제는 둘 다 처참하게 몰락했다는 것이다. 특히 천황가는 사정이 심각했는데 고나라 덴노의 경우는 돈이 없어서 즉위식도 바로 치르지 못했고 즉위 10년이 지난 후에야 유력 다이묘들이 모은 성금으로 간신히 치를 수 있었다. 막부 역시 오닌의 난 이후로는 쇼군이 천황과 같은 명목상의 지도자로 추락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대형 공사를 감당할 형편이 아니었다.[16] 조선한양을 수도로 삼은 뒤에 한양 도성과 사대문을 만든 후 그 안을 사대문안, 그 밖에 한성부의 범위가 미치는 곳을 성저십리라 부른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17] 도시샤대학교토고쇼가 있는 지역[18] 교토의 최대 번화가.[19] 근처의 사찰 지온지(知恩寺)의 승려가 염불을 백만 번 외워 전염병을 퇴치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20] 도로 이름도 히가시야마 도리라고 읽기도 한다. 특히 버스는 히가시야마 도리로 통일.[21] 노래에서 고조도리(五条通) 이후에는 몇 가지 바리에이션이 있는데 나중에 이 노래를 완성시키면서 멋대로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22] 그런데 나라의 경우에도 현지화할 때 경주가 선택된다.[23] 간혹 한국에 자주 와본 일본인들은 전주가 좀 비슷한 분위기라고 여기기도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분위기가 그런 것 뿐이지 역사적 맥락이 비슷한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