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2:04:08

성저십리

사대문안 사대문 한양도성 성저십리

1. 개요2. 상세3. 이모저모
3.1. 오늘날 부동산과의 연관성(?)3.2. 인서울 대학교3.3. 서울토박이 거주지3.4. 서울시 분할론의 경우(?)3.5. 기타3.6. 자료마다 제각각인 경계
4. 당시 산하 행정구역
4.1. 조선후기4.2. 구한말
5. 한양 성저십리에 해당했던 현 서울특별시 지역6. 한양 성저십리에 포함되지 않았던 현 서울특별시 지역7. 옛 성저십리 지역내 주요 동네8.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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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성저오리 지도1.webp 파일:attachment/성저십리/조선말기한성부-2.jpg 파일:attachment/성저십리/seoul1910_revised.jpg
조선전기 당시 추정 경계 (성저오리) 조선후기 당시 일반적인 추정 경계 1910년 당시 측량한 경성부 경계(빨간색)
성저십리()는 한성부 한양도성 주변 10(약 4km) 이내 지역을 말한다. 둘레로 치면 약 50km.

영문 위키백과에는 성저십리의 영어 의역인 Outer old Seoul이라는 표제어로 올라가 있었다.

2. 상세

성외(城外) 지역이라고도 한다. 사대문 안인 성내 지역과는 다르게 상주 인구가 상당히 적은 편이었으며, 매장과 벌목 등이 금지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왕릉(성북구 정릉[1] 제외)이나 공동묘지가 성저십리 바로 코앞인 구파발이나 태릉 등에 있었거나 강남, 남양주 등 주변 지역에 있었던 이유다. 이와 같은 이유로 6대 이상 서울토박이들의 선산(가족묘지)은 고양시, 양주시, 남양주시, 용인시 등지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성저십리를 조선시대의 그린벨트로 일컫는 사람도 있다. 성저십리와 사대문안을 합치면 그 면적이 현 서울특별시 강북 지역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조선후기를 기준으로 강북에서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광진구 전부와 은평구 일부(수색동, 증산동, 진관동 전역과 신사동 일부 제외), 강북구 일부(우이천 지류인 화계천 이북 수유동 일부 및 우이동 제외), 마포구 일부(상암동 제외)를 제외한 전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부터 1930년대까지)에 농촌 지대로, 사대문안 거주자들에게 식량 제공처와 같은 역할을 했다. 수송 수단이 발전하지 않은 전근대 사회에서 도시에는 항상 거주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경작지가 필요했으며, 도시의 인구 규모는 거의 전적으로 해당 도시 근교의 식량 생산력에 의존했다. 한양은 한반도 최대도시로서 막대한 식량을 요구했기 때문에 근교에 넓은 농지가 필요했던 것이고, 어차피 한양 사람들이 농사지어서 먹고 사는 평야였기 때문에 행정구역상으로도 한성부에 편입시켰다.

뒤에 또 나오지만, 사대문안이 진정한 한양이고, 성저십리 지역을 비롯한 당시 외곽지역(현 서울특별시에 속한)은 한양이 아닌 경기도였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저십리도 조선시대 때부터 엄연히 한양이었다.

비슷하게 오해를 받는 한성부를 살펴보면, 한성부를 조선시대에도 경기도 관할이었단 점을 들어[2], '한양이 아닌 경기도'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한성부는 조선 후기부터가 아니라 조선 초부터 중앙 직할의 행정기관으로 쳤으며,출처 : 태종 때부터 중앙직할이라 기술. 정2품인 한성 판윤은 관찰사(현재의 도지사) 종2품보다 더 높은 직급이었다.

물론 여의도를 제외한 영등포, 강남을 포함한 한강 너머 전 지역은 저 때도 경기도 시흥현(시흥군), 광주부(광주군), 과천현(과천군), 양천현(양천군), 부평부(부평군)에 속했다. 괄호 안은 23부제를 시행할 때 명칭이다.

고려 초기에 양주 일부였다가[3] 현 서울 도심일대가 남경으로 승격되면서 서대문구 일부와 용산구 일대가 그쪽으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양주 일부로 남았다는 설이 있고 남양주 삼패동까지 남경 직할지였다는 설도 있다.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때 지금 종로 일대를 수도로 하고, 1395년 1395년 6월 6일에 한양부를 옛 수도인 개성부를 따라 한성부로 개칭하면서 양주군을 한양에서 분리시키며 한양도성 바깥에 있는 지역은 부원현(富原縣)양주군으로 편입시켰다. 현 용산구 둔지산을 경계로 서쪽은 부원현(富原縣)에, 동쪽은 양주군이 되었고, 양주군 관아는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 일대 또는 양주시 고읍동 일대에 두었다. 1413년에 부원현이 고양현으로 통폐합되었다.

1424년(세종 6년)에 이르면 한성부의 인구가 증가하고, 공신들에게 나눠 줄 땅이 모자라져 흥인지문남소문[4] 바깥 지역을 한성부에 편입하고 동부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 남부 정심방(貞心坊)과 예성방(禮成坊) 성신방(誠身坊)으로 편제했다. 이것이 성저십리의 시초이다.

당시 편입된 지역은 둔지산 동쪽의 현 용산구 이태원동부터 성동구 성수동까지, 북쪽으로는 강북구 수유동에 이르렀고, 신당동, 행당동 이남 지역은 남부에, 왕십리 이북 지역은 동부에 들어갔다. 1461년 2월 27일에 동쪽으로 큰고개(; 대현, 현재 성북구 [[길음동 미아리고개#)와 송계원(松溪院, 현 중랑구 묵동)까지 서쪽으로 버들곶나루(楊花津; 양화진) 및 갈머리(乫頭)-잠두봉(蠶頭峰), 용두봉(龍頭峰), 현 마포구 봉원동 절두산-, 할미산(老姑山; 노고산), 불광천을 잇는 선까지 모두 성저십리에 편입되었다. 그렇게 편입된 지역 중 서부 지역은 서교(西郊), 동부 지역은 동교(東郊)라 부르기도 했다.

1426년(세종 8년)에 보고된 인구 통계에 의하면 도성 안의 인구는 103,328명이었으나 성저십리의 인구는 6,044명으로 전체의 5.5%에 불과하였다. 그럴만도 한 것이 세종 초기까지 사대문안도 다 개발되지 않아서 지금 장충동, 필동, 묵정동 일대가 숫제 개발되지 않은 숲이었다. 이는 계획도시 한성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육조거리와 종로, 보신각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거리에만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가 흔히 아는 북촌과 남촌 쪽이 개발되고, 배후지역인 성저십리의 인구도 증가했다. 그 와중에 연산군 재위 후기에는 격구사냥을 하겠답시고 성저십리의 가옥들을 죄다 철거하는 만행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후기 경신대기근 때에 다른 대도시에 구휼미를 보내다 한양 주변만 구휼미를 보내면서 다른 지방에서 한양으로 모여들어 사대문안 지역의 인구수용능력이 한계에 도달하여 현 서울역 주변지역과 현 창신동, 숭인동 일대부터 민락이 빽빽하게 들어서기 시작하며 성 밖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 1789년(정조 13년)에 성저십리 인구가 무려 76,782명으로 전체 인구의 40.6%까지 증가하였고, 대부분 경제활동에 종사하면서 서울 한양이 경제도시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1751년(영조 27년)에 동부 12개 방에서 연희방(燕喜坊)·천달방(泉達坊)·덕성방(德成坊)·서운방(瑞雲坊)·관덕방(觀德坊)·흥성방(興盛坊) 6개 방이 폐지되었고 남부 정심방(貞心坊), 예성방(禮成坊), 성신방(誠身坊)이 폐지되고 둔지방(屯芝坊, 둔지미방), 한강방(漢江坊), 두모방(豆毛坊, 두뭇개방)으로 다시 나누었다. 서부에서 신화방(神化坊)을 폐지하고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을 신설하여 8개 방에서 9개 방이 되었고, 북부 명통방(明通坊)을 폐지하여 북부에 10개 방에서 9개 방이 되었다. 1788년(정조 12년)에 북부에 연희방(延禧坊), 연은방(延恩坊), 상평방(常平坊)을 신설하여 9개 방에서 12개 방이 되었다.#

조선 조정이 한양(서울)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한양 외곽에 금표(禁票)를 여러 개 설치하였다. 영조 제위기간인 당시에 한강망원정 - 성산 - 모래내나루(沙川渡; 사천도) - 시위동(時威洞, 현 북가좌동) - 역촌동 돌곶이고개(石串峴; 석관현) - 관(영서역)터고개(關基峴; 관기현) - 아미산(峨嵋山) - 삼각산(三角山) 돋누리고개(豬噬峴; 저서현) - 삼각산 돋봉(猪噬峯; 저서봉, 현 수리봉) - 삼각산 보현봉 - 화계사 버덩이(菩洞; 보동, 현 강북구 수유동) - 벌리(伐里) - 장위(동) - 송계교(松溪橋, 현 중랑천 월릉교) - 중량포(中浪浦) - 살곶이다리(箭串橋; 전관교, 현 성동구 행당동) - 한강변 두뭇개(豆毛浦; 두모포, 현 두모교 북단)#1#2, 현재로 치면 한강(두모교 - 용산포구 - 마포 - 망원정) - 성산동 - 가좌 - 역촌동 - 대조동 - 불광동 - 북한산 - 수유리 - 우이천 - 벌리 - 장위리 - 옥수동(홍제천 - 불광천 - 북한산 - 우이천 - 중랑천)을 잇는 선이다. 그런데 자료마다 성저십리의 경계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서, 그 정확한 경계는 알기가 쉽지 않다. 다만 성저십리의 경계를 갈랐던 자연하천은 화계천, 우이천, 중랑천, 한강, 홍제천, 불광천이다.

조선전기 범위와 조선후기 범위, 그리고 구한말 범위가 각각 다르다. 조선전기 기준으로 마포-부암동-정릉-종암동-청량리-왕십리-한남동이 경계. 혹은 이들 지역을 성저오리(城底五里)라 칭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중반까지 남아있던 성저오리 경계표는 원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었다가 본래 자리에는 푯말만 남기고 경계표는 경복궁으로 옮겨졌다.[5] 이 성저오리는 현재 서울 도심인접생활권에 해당하며, 지역 범위로는 내부순환로 안쪽 영역에 가깝다.

아래 단락부터 조선초기나 구한말이 아닌, 조선후기를 기준으로 작성한다.

동부 경계는 우이천과 중랑천이라는 확실한 자연경계로 나뉘어져 있어서 자료마다 별 차이가 없지만 서부 경계는 자료마다 제각기 다르다. 보통은 홍제천과 불광천 사이에 있는 작은 산맥(분수계)으로 보기는 하지만, 심지어 1949년 당시 서울시 서부 경계 혹은 1911년 당시 경성부 서부 경계를 성저십리 서부 경계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수색동과 상암동도 성저십리 추정지역 안에 들어가게 된다... 네이버 지명사전에 수록된 동(洞) 역사 내용은 이 기준을 따른 듯 하다. 그런데 1911년 당시 경성부 경계는 일제에 의해 근대적인 방법으로 정밀하게 측량된 것이라서 오히려 이쪽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조선후기에 김정호가 발행한 <청구요람>에 따르면 한성부 서부 경계가 진관동 편입 이전의 서울시 서부 경계와 대체로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최완기 저 <한양>(교학사, 1997)에 따르면 영조 때 주민들의 요구로 성저십리 서부 경계가 서대문구에 있는 산맥(무악재/길마재?)에서 홍제천으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연은방, 연희방, 상평방이 신설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의 성저십리 서부 경계는 반송방까지였던 셈. 왜 이리 자료마다 제각각인지

1910년(1914년년 아님!) 당시 경성부 지도를 참조하면 구한말 한성부 경계의 보다 정확한 윤곽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구한말 갑오개혁 이후 지금의 중곡동 등 일부 지역이 추가로 한성부에 편입되는 등 변동 사항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조선후기의 경계로 추정할 수만은 없는 측면은 있다.

성저십리는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대중에게 인지도가 거의 없었으나 나무위키나 서울역사박물관 홍보물 등의 영향으로 지금은 약간 인지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9년에는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조선시대 성저십리 연구를 집대성한 단행본인 <조선시대 다스림으로 본 성저십리>를 발간했다. # 해당 단행본에 따르면, 18세기 중반 이전에는 성저십리는 행정상 애매한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저십리 주민들은 한성부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조세는 한성부 편입 이전 원 소속 군현(양주목, 고양군)에 납부했던 것. 흥미롭게도 흑석동은 한때 애매하게 성저십리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애매한 모습은 18세기 중반 이후로 성저십리가 한성부 5부 체계에 완전 편입되면서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을 이름에 계가 붙었다.(예: 안암동계, 여의도계) 이 때에 색인 계가 나중에 통합되어 동문외계(東門外契),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등이 되었다.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도 이러한 무허가 민락이 증가하여 주거환경이 악화되자 1930년대부터 성저십리 일부지역에서 오늘의 뉴타운과 비슷한 형태 계획적 도시개발이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곳이 현재 삼선교(동소문동)-돈암동(동선동)-보문동 지역과 이대 후문 일대 및 영등포역 인근(이곳은 공업지역으로 개발). 총 10여개가 넘는 지역이 개발예정이였으나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으로 위에서 언급한 돈암,대현,영등포지구만 완료되고 타 지구는 개발 도중 개발중단, 혹은 아예 첫 삽도 뜨지 못했다.

19세기에 수색동 일대가, 23부제 행정구역 개편과 동시에 양주군 고양주면 일부가 한성부에 편입되었다 (지금 광진구 중곡동 등).

1910년 10월 1일한성부경기도 경성부로 개편되었고 1911년에 방(坊)에서 면(面)으로 바뀌었고,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용산 일부(서울역 인근 포함)와 현 창신동, 숭인동 일대를 제외한 성저십리 전 지역이 경기도 고양에 모조리 편입되었지만, 1936년1949년에 차례로 서울(경성부)에 다시 편입되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성저십리 소속이던 효자동북한동이 서울에 편입되지 못하고 그대로 고양에 남았다.

사람들은 보통 조선시대 한양이라 하면, 대개 사대문안으로 국한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분명한 것은 인근 외곽지역이었던 성저십리 지역도 분명히 한양(한성부)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1994년 한양600주년 행사로 정부가 서울토박이를 물색하면서 내세운 지역적 조건에는 한양 사대문 안 뿐만 아니라 성저십리 지역도 포함되었다. 기사

3. 이모저모

3.1. 오늘날 부동산과의 연관성(?)

옛 성저십리는 오늘날 서울 도심지와 접근성, 근접성이 좋기에 몇몇 지역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강북이라고 말하는 지역과는 달리[6] 집값이 높은 편이다. 대표적인 지역으로 여의도, 마포(홍대, 공덕, 용강), 용산(통칭 동부이촌동인 이촌1동, 한남동 및 서빙고 일대.), 성동(왕십리, 옥수동, 성수동), 성북(성북동, 삼선교 일대의 일부 저택과 아파트.), 서대문(연희동), 동대문(청량리 미주아파트와 주변 재개발지역) 등이 있다. 물론 대표적인 부촌인 평창동, 성북동, 한남동 모두 성저십리 지역에 있다. 하지만 은평구나 강북구, 성북구의 장위-석관[7]과 같은 비교적 외곽지역은 집값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서울 강북 부동산 시장을 달구는 마용성[8]은 바로 이 성저십리에 있다.[9]

사실 한양도성과 사대문안, 성저십리의 원리는 지금도 이어져 현재 대한민국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의 개발원리가 철저하리 만큼 이것과 동일하다. 한양도성이 아파트 단지의 경계를 이루어 벽과 문으로 내부와 외부가 단절되고, 사대문안 내성에 주요 주거지와 필수 시설들이 들어가며,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거나 부족한 부분을 도성 주변에 외부에 공개되도록 배치하여 그 주변의 상업시설을 공유하기 위해 몰려 빼곡하게 들어선 빌라촌이 성저십리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대문안 내성인 > 내성 시설 관리자(상가나 보육시설 관리인) > 단지내 의무건축 임대거주자 > 성저십리 빌라촌 > 외부인으로 단지 내의 서열이 확립되고 그 서열에 따라 주변에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의 제약이 가해진다.

3.2. 인서울 대학교

인서울 주요 대학들이 성저십리 지역에 몰려있는 편이다. 신학문이 도입되던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사이에 건립된 고등교육기관의 전신이 대부분 한성부 사대문 안이나 성저십리 일대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아래의 대학 중 굵은 글씨광복 이전부터 현재 위치에 자리잡고 있던 학교들이다.

사대문 안에 있는 대학으로는

그리고 성저십리 바깥, 즉 당시에는 서울이 아니었던 곳에 위치한 인서울 대학으로는 서울대학교[25], 중앙대학교, 숭실대학교[26], 서울과학기술대학교[27], 서울교육대학교[28], 광운대학교[29], 삼육대학교 등이 있다.[30]

3.3. 서울토박이 거주지

서울토박이 상당수가 종로구 뿐만 아니라 도봉구, 성북구, 용산구, 서대문구, 마포구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하지만 여의도, 압구정 및 강남, 송파, 과천, 분당 등지로 이주한 서울토박이도 드물지 않다는 점은 유의해둘 것.

3.4. 서울시 분할론의 경우(?)

만일 서울시가 분할/축소될 경우 서울시의 경계를 어디로 유지하느냐에 정치적 입지는 물론 부동산 시세에도 큰 영향이 있는데, 만약 실현된다면 한양의 역사적 경계였던 이 성저십리까지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31] 이렇게 되면 기존 서울 강북 상당부분은 서울특별시로 남게 되고 노원/도봉/의정부는 양주시 편입, 중랑/광진/구리는 남양주시 편입 본격 구 양주군 부활, 은평/마포 서부는 고양시 편입, 한강 이남은 영등포광역시[32]강남광역시[33]로 분할될지도.

3.5. 기타

성저십리 지역의 명칭들은 현재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용산방은 오늘날 "용산(구)"으로, 두모방은 두모교(교량)으로, 숭신방과 인창방은 "숭인동"과 "창신동" 섞였다, "숭인초등학교"으로, 연희방은 "연희동", 서강방은 "서강대교", "서강대학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연방과 상방은 "은평(구)"로 살짝이나마 유추할 만한 흔적을 남겼다. 연세대학교의 교명에서 연은 연희동 내지는 연희방을 의미한다. 희대학교와 브란스의과대학이 합병된 학교이기 때문이다.

서울 상공에 지정된 비행금지공역(RK P73)[34]이 성저십리와 유사하다.

성저십리 지역을 논할 때 닭한마리라는 음식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지역을 자주 왕래하는 외국인들에게 매우 유명하다. 오히려 서울에서 태어나고 평생 자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저십리에 살지 않는다면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

2017년 지방직 9급 시험에 이 성저십리의 개념이 출제된 적이 있다.

3.6. 자료마다 제각각인 경계

성저십리 또는 옛 한성부의 구체적인 경계는, 구한말 이후를 기준으로 하자면 일제가 근대적인 측량법으로 제작한 지도로 정확한 경계를 따질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까지의 경계는 자료마다 제각각이다.

파일:attachment/성저십리/서울역사박물관지도.jpg
서울역사박물관에 걸려있는 지도. 이 문서 상단에 있는 지도는 이 지도를 많이 참조하였다. 그런데 여의도가 빠져있다는 점이 다른 점.

파일:attachment/성저십리/강남변천사책지도.jpg
서울특별시에서 발간한 강남 변천사 관련 단행본에 실린 지도. 은평구 일부와 마포구 일부 일대가 1911년에 경성부로 편입되었다고 나와있는데, 그 이전에 갑오개혁 이후 현재의 광진구 일부가 한성부 두모방에 편입된 내용이 누락된 오류가 있다(...). 그리고 지금의 강북구 북서부 지역에 대한 해명이 보이지 않는다.

파일:attachment/성저십리/구한말한성부.jpg
구한말 당시 한성부 지도. 출처 불명. 지금의 광진구 일부가 두모방에 편입되어 있는 상태이다. 여의도가 빠져있다.

파일:attachment/성저십리/경성부초기.jpg
1914년 대개편 이전의 초기 경성부 지도로, 출처 불명.

앞서 살폈다시피 상당수 자료에서 여의도가 빠져 있는데, "너나 가져라" 라는 의미에서 '너의 섬'이란 뜻으로 '여의도'란 이름이 붙었다는 (...)에 걸맞게 사실상 무주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신경 안 썼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네이버 지명사전에 인용된 자료에 따르면 여의도도 한성부의 일부로서 관리되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시흥군이나 양천에서 관리했다는 내용은 나와있지 않다. 애초에 이 곳은 '양말산'(현재의 국회 본관이 위치한 언덕)이라 부르던 곳으로, 왕실에서 관리하던 목장이 있었고 이들이 천민이라 남녀간에 내외하지 않고 함부로 손을 잡고 헐벗고 다니는 등 습속이 비천하여 그들을 성 안으로 이전시켰단 기록도 있다.

구한말부터 1914년 이전까지 강북구 북서부, 은평구 서부, 마포구 서부(상암동 등), 광진구 일부가 한성부에 추가 편입되었을 정황이 보인다. 하지만 광진구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추가 편입에 대한 내용이 거의 언급이 안 된 상태이다.

4. 당시 산하 행정구역

조선시대 내내 사대문안, 성저십리 막론하고 방(坊)이 수십 개 있었으며, 사대문안에 있는 방들은 각 방의 면적이 오늘날의 동과 맞먹을 정도. 성저십리 지역은 방이 6~8개 정도 있었다.[35]아래는 조선 후기 기준으로 한다.

4.1. 조선후기

정조 때 기준으로 한다
  • 숭신방: 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서부[36], 강북구 일부
  • 인창방: 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일대(장안동 제외), 성북구 동부[37]
  • 두모방: 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일부
  • 용산방: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상당부분
  • 한강방: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부 일부
  • 서강방: 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일부
  • 상평방: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외 북부지역, 은평구 일부, 고양시 효자동 및 북한동[38]
  • 연희방: 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일대, 마포구 일부(홍제천 동쪽), 영등포구 여의도
  • 연은방: 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일부, 은평구 일부
  • 반송방[39]: 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일부, 종로구 일부, 마포구 일부

4.2. 구한말

굵은 글씨 처리된 곳은 1895년에 한성부에 편입된 곳
  • 숭신방: 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서부, 강북구 일대
  • 인창방: 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일대, 성북구 동부
  • 두모방: 현 서울특별시 성동구 일부(중랑천 이동지역), 광진구 일부(중곡동, 군자동, 능동, 화양동 및 자양동 일부[40]), 중랑구 면목동[41]
  • 용산방: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일부, 여의도
  • 서강방: 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남부 일부[42]
  • 상평방: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외 북부지역[43], 은평구 일부, 고양시 효자동 및 북한동
  • 연희방: 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부분, 마포구 서부, 은평구 수색동, 증산동 일대.
  • 연은방: 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부 일부[44], 은평구 대부분. (진관동, 수색동, 증산동 제외)
  • 한강방: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대부분
  • 둔지방: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일부, 성동구 일부(중랑천 이서지역)

5. 한양 성저십리에 해당했던 현 서울특별시 지역

(조선말기 기준)[45][46]
구한말에 성저십리로 신규편입된 지역은 성저십리로서의 역사가 짧기에 여기에 포함하지 않는다.

6. 한양 성저십리에 포함되지 않았던[52] 현 서울특별시 지역

여기서 행정구역 명칭은 조선 후기가 기준. 부, 목, 군, 현은 1896년(구한말) 행정구역 대개편으로 전부 '군'으로 치환.

7. 옛 성저십리 지역내 주요 동네

8. 같이 보기



[1] 성저오리의 경계지역이었으나 성저십리 확장으로 성저십리 한복판으로 편입된 케이스다.[2] 사실 한성부가 완전히 경기도와 별개로 분리된 지역이라는 설과, 경기도가 한성부까지 간접적으로 관할했다는 설로 갈린다. 다만, 역으로 경기도도 포도청의 관할구역이었다.[3]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오는 정도전의 신도가(新都歌) 첫 구절 "녜ᄂᆞᆫ 양쥬 ᄭᅩ올히여(옛날에는 양주 고을이었다) 디위예 신도형승(新都形勝)이샷다(그 경계에 새 도읍의 형상이 빼어나도다)[4] 현재 남소문이라 부르는 광희문은 이때 없었고, 남소문은 지금의 반얀트리호텔 바로 옆에 있었다.[5] 도로건설로 인해 성저오리정계석표를 1970년에 경복궁으로 옮기고, 본래 위치에는 본 비석이 있었던 자리임을 밝히는 시멘트 푯말만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위치를 알리던 푯말도 어영부영 없어져 버렸다가 1995년 10월에 성북구에서 표석을 다시 세웠다. 95년에 세워진 표석은 성북구 정릉동 403-2번지 앞 길가에 위치한다. 성저오리정계석표 실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조: 국립중앙박물관 - 성저오리정계석표, 성북문화원 성북마을아카이브 - 성저오리정계석표, 네이버 블로그 문화유산 사진첩 - 사적 제 110호 성저오리 정계석표[6] 아예 성저십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도봉, 노원, 중랑과 성저십리에서도 최외곽에 속하는 은평구, 강북구 등이 있다.[7] 장위동과 석관동의 경우 성북 중심가의 생활권과는 거리가 멀고, 동대문의 이문과 강북의 미아와의 교류가 가장 강한 미아-이문으로 이어지는 생활권이다. 실제로 장위동과 석관동의 경우 미아사거리와 이문동 사이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8] 마포구, 용산구, 성동구[9] 특히 마용성의 경우는 한양도성 뿐만 아니라 강남3구와의 거리 또한 지척이라는 점 역시 강점이다.[10] 전신 중 하나인 연희전문학교가 현재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서울역 앞에 위치.[11] 1886년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 이화학당을 설립학 당시에는 정동에 위치하였다. 그러다가 1935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는 정동에 남고 이화여자전문학교는 현재의 신촌 캠퍼스로 이전했다. 현재 정동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가 있다.[12]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사대문 안인 수송동에 건립되었다. 현재 위치인 안암동으로 이전한 시기는 인촌 김성수가 재단을 인수한 후인 1934년.[13] 1936년 설립 당시에는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하였고, 1944년 현재 위치인 돈암동(동선동)으로 이전했다.[14] 신흥무관학교 시절을 포함하면 해방 전에 세워진 대학이지만 현재의 경희대학교 법인은 신흥무관학교와 그것이 승격된 신흥초급대학을 전신으로 삼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신흥초급대학을 미원 조영식이 인수한 해를 개교연도로 삼고 있어 경희대는 건대(1931년 민중병원으로 시작)와 달리 해방 이후에 설립된 대학으로 간주되곤 한다.[15] 1918년에 전신인 경성공립농업학교가 세워졌고, 1937년에 현재 서울시립대학교의 경농관, 박물관, 자작마루가 세워졌다.[16] 순헌황귀비가 1906년에 전신인 숙명여학교를 세울 당시에는 사대문 안 정동에 있었고, 현재 위치로 이전한 것은 1938년.[17] 1939년 설립됐던 전신 동아공과학원은 사대문 내부인 천도교회관(현. 수운회관) 자리에 있었다. 종로경찰서 뒤편. 현재 서울캠퍼스는 53년 휴전 이후 조성되었다.[18] 건국대학교 측에서 현재 전신으로 간주하는 민중병원이 개원한 1931년 최초 개교연도로 삼는다면 건대도 해방 이전에 설립된 대학이다. 그리고 이 민중병원은 개원 당시에는 종로2가에 있어 사대문안에 있었다. 건국대 현재 부지는 원래는 양주군 고양주면이었으나 갑오개혁 이후로 두모방으로 편입되었다.[19] 세종대학교는 광복 이전인 1940년부터 광복 이후 1962년까지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 명동 소재의 사대문 대학이었다. 1962년 서울시 중구 명동에서 서울시 광진구 군자동으로 이전하였다. 세종대학교의 현재 군자동 부지는 원래는 양주군 고양주면이었으나 갑오개혁 이후로 두모방으로 편입되었다.[20] 단, 상명대학교의 전신인 상명여자고등기예학교는 종로구 중학동에 위치했었고, 상명실천여학교 또한 종로구 사직동에 자리잡았다.[21] [[성균관|여기는 설립된 지[22] 1924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동숭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23] 파리외방전교회 소유의 현재 혜화동 수도원 부지와 본래 예수성심신학교였던 용산 원효로 부지를 트레이드해 혜화동 시대를 연 것은 광복 직전(5월)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광복 이전부터 사대문 안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혜화동으로 이전하면서 경성천주공교신학교로 개칭했다.[24] 다만 성심대학으로 승격 설립인가가 난 것은 광복 이후(1947년)다.[25] 신림동 관악캠퍼스 기준. 다만 본래는 지금의 서울대학교/연건캠퍼스(서울의대/치대/간호대) 인근에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모여 있었다. 괜히 대학로가 아니다.[26] 영락교회와 함께 사대문내 을지로 쪽에 있었다. 1957년 상도동(당시 영등포구)으로 이전하였다.[27] 1910년부터 1931년까지는 사대문 내부인 종로구에, 1931년부터 1980년까지는 성저십리 내부인 마포구에 위치해있었다. 1980년에 성저십리 밖인 현재의 캠퍼스로 옮겼다. 지금 서울과기대의 부지는 과거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와 그 후신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있던 곳이다.[28] 1977년 이전에는 현재의 덕수고등학교와 행당중학교 부지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저십리 내부인 성동구에 있었다.[29] 광운대의 경우 간발의 차이로 성저십리 지역에 포함되지 않은 케이스. 광운대 코앞 우이천만 건너가면 성북구 장위동, 옛 한성부 인창방 장위리다.[30] 중앙대, 숭실대 자리는 1936년 경성부 편입, 건국대, 세종대 자리는 1949년 서울시 편입, 나머지 인서울 대학들 자리는 1963년 서울시 편입.[31] 이때 마포구 상암동, 은평구 진관동, 성동구 성수동 등의 성저십리 자치구 소속이지만 성저십리가 아니었던 곳들은 분리시 생활권과 행정구역이 불일치해서 그거대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서울시에 존치될 것으로 보인다.[32] 다른 이름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기존의 경기 광명은 신설 영등포시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본격 구 시흥군 부활[33] 다만 강동구와 송파구 남부는 하남시와 성남시에 편입될 수도 있다. 본격 구 광주군 부활[34] 이곳에서 드론을 함부로 날렸다간 수방사가 출동한다(...). 수방사 사령부 작전처와 제1방공여단이 매의 눈으로 초소형 비행체의 불법 비행을 감시하기 때문. 무시하고 날렸다간 진짜로 대공포 날아온다.[35] 사대문안의 방은 동, 성저십리의 방은 면으로 보면 쉽다. 즉, 이 당시의 서울은 도농복합도시였다.[36] 지금의 성북(갑) 선거구 지역과 얼추 일치한다.[37] 지금의 성북(을) 선거구 지역과 얼추 일치한다.[38] 1755년 고양군 읍지에서는 고양군 하도면 청담리 소속으로 나와 있지만, 이 이후의 기록에는 한성부 성저십리 소속(훈창계)으로 나와있다. 조선후기 북한산성 축조 이후로 한성부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39] 면적이 상당히 좁았다. 그런데 반송방은 특이하게도 사대문안 일부 지역또한 포함되었다. 사대문안 지역까지 포함하자면 지금의 충정로 일대까지. 아까 그 경성부 초기 지도에서 도성내 5부 중 서부 관할지역이 반송방 지역이라고 보면 될 듯.[40] 구 노유동 영역[41] 양주군 고양주면이 1914년 대개편 때 고양군에 편입된 이유로는, 원래의 고양주면 영역의 상당부분이 이미 한성부 두모방에 편입된 상태인데, 옛 성저십리 지역이 고양군에 편입되면서 곁따라 넘어간 것이다.[42] 대략 현재 행정동 기준 서강동, 신수동 일대. 부군면 통폐합 직전 자료를 보면 그 외에도 특이하게 지금의 마포구 아현동이 서강면의 월경지로 포함되어 있었다.[43] 여기는 구제 실시 직후에는 서대문구였으나 70년대에 종로구로 이관되었다.[44] 대략 지금 법정동 기준으로 홍은동, 홍제동 정도.[45] 당연하지만 종로구, 중구에서 여기 서술되지 않은 동네의 경우 전부 다 사대문 안이다.[46] 지금은 명동, 남대문이 속한 중구 일대가 도심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종로구, 중구 일대 거의 대부분이 사대문이었긴 해도 종로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의외로 성저십리가 아닐 것 같은 강북구(미아,수유), 은평구(연신내,불광,수색) 일대까지 대부분 성저십리에 들어가 있다.[47] 우이천 이남. 현 수유동까지는 성저십리였고 우이동 일부의 우이천 이북 지역은 성저십리가 아닌 양주목이었다.[48] 상암동 중 월드컵로 이남(난지도 포함)은 성저십리가 아니고 고양군에 속했다.[49] 아래 송파구 항목과 비슷하게 조선 초기에는 여의도지역이 한강 남쪽보다는 북쪽에 더 가까왔다. 이후 물길의 변화로 지금과 같이 된 것.[50] 하지만 조선 건국 이전 여의도는 잉벌노→곡양→금주로 이어지는 영등포, 금천, 광명 일대와 동일한 행정구역이었다. 여의도의 옛 이름인 '잉화도'의 명칭 자체가 잉벌노에서 유래되었다.[51] 1973년에 서울시에 편입된 현 진관동(옛 진관내동, 진관외동, 구파발동) 제외. 앞의 지역은 양주목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녹번동, 불광동, 응암동만 성저십리였고 조선 후기에는 진관동을 제외한 은평구 전역이 성저십리로 편입된다.[52] 사대문안 지역인 종로구, 중구 대부분 지역은 제외[53] 1914년에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 대부분이 고양군에 편입.[54]난지도 지역[55] 위 지도에서도 보다시피 잠실 일대는 원래 본류였던 송파강(1970년대 잠실 개발로 매립되고 일부 흔적이 석촌호수가 됨)의 북쪽에 있던 강북이었다. 그러던 것이 대홍수로 신천강(지금의 본류)이라는 지류에 둘러싸인 잠실섬이 된 것.[56] 구파발 일대. 구한말까지는 신혈면이 양주에 속했으나 1906년에 고양군으로 이관되었다.[57] 1914년에 시흥군에 통폐합[58] 1914년에 부천군으로 개편[59] 1914년에 김포군에 통폐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