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15 20:34:39

연산군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북한의 행정 구역(延山郡)에 대한 내용은 연산군(황해북도) 문서를, 1914년까지 존재했던 충청남도의 행정 구역(連山郡)에 대한 내용은 논산시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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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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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0대 국왕
燕山君
연산군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존호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
(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군호 연산군(燕山君)
능묘 연산군묘(燕山君墓)[1]
본관 전주(全州)
융(㦕)
미상
출생지 한성 경복궁 자선당
사망지 교동현(喬桐縣) 화개산 주변 또는 그 외 2곳
배우자 폐비 신씨(廢妃 愼氏)
부왕 조선 성종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 尹氏)
아들 폐세자 이황(廢世子 李𩔇)
생몰 기간 음력1476년 11월 6일[2] ~ 1506년 11월 6일[3]
양력1476년 11월 22일 ~ 1506년 11월 20일
(29년 11개월 28일, 1만 954일.)
재위 기간 음력1494년 12월 25일 ~ 1506년 9월 2일
양력1495년 1월 21일 ~ 1506년 9월 18일
(11년 7개월 28일, 4,257일.)

1. 개요2. 생애
2.1. 출생부터 즉위 초반까지2.2.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두 차례의 사화2.3. 폐비 윤씨와 갑자사화
2.3.1. 어머니의 죽음을 안 시점2.3.2. 패륜(悖倫)2.3.3. 효자 연산?2.3.4. 새로운 가설2.3.5. 연산군의 광증(狂症)2.3.6. 종합해석
2.4. 그가 벌인 패악질
2.4.1. 흥청망청2.4.2. 성균관의 자리에 사냥터를 만들다.2.4.3. 돈 낭비2.4.4. 직언을 차단2.4.5. 언문사용 금지2.4.6. 방탕한 여색살이
2.5. 중종반정. 폭군의 몰락2.6. 가족사
2.6.1. 아내 신씨와의 관계2.6.2. 자녀
2.7. 가계
3. 이야깃거리4. 《연산군일기5. 사극 및 출판물6. 관련 문서7. 둘러보기(계보)

1. 개요

傳曰: "人君所畏者, 史而已。 《春秋》云: ‘爲親者諱。’ 爲史者但當記時政, 不宜書君上之事。 頃者史官, 君上之事, 則書之猶恐不及, 在下之事, 則諱而不書, 罪亦大矣。 今則已令史官, 不得書君上之事, 然不若無史之爲愈也。 人君行事, 不可拘於史也。
전교하기를,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서(史書) 뿐이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은휘(爲親)한다.’ 하였으니, 사관(史官)은 시정(時政)만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못하다. 근래 사관(史官)들은 임금의 일이라면 남김없이 기록하려 하면서 아랫사람의 일은 은휘하여 쓰지 않으니 죄가 또한 크다. 이제 이미 사관에게 임금의 일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나 아예 역사가 없는 것이 더욱 낫다. 임금의 행사는 역사에 구애될 수 없다.
연산군일기 #

조선의 제10대 임금. 폐위되었기에 묘호와 시호는 없고, 생전의 존호는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휘는 융(㦕). 성종의 장남, 어머니폐비 윤씨[4]다.

조선 역사 중에서 묘호(~조(祖) / ~종(宗))를 받지 못한 4명의 왕들 중 하나이나, 본인에게 딱히 별다른 권력이 없던 정종(공정왕)[5] 성인도 되기 전에 작은 아버지에게 강제로 내몰린 단종 (노산군),[6]정치적인 이유로 과대포장 되었다가 역풍을 맞았지만 선조에게 학대받았다는 이유가 있던 광해군과는 달리, 반론의 여지가 없는 폭군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7] 물론 한국사 전체로 따지면 연산군 못지않은 폭군이 몇 명 더 있긴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로는 연산군이 독보적인지라 한국에서는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연산군을 기점으로 조선이 이전의 건강함을 점점 잃어갔으며, 이후 즉위하는 조선 왕의 능력 부재로 인해 기묘사화을사사화, 문정왕후의 외척 세도를 거쳐, 결국에는 임진왜란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평가한다.

즉위 초기에는 그래도 일 좀 했다는 평가가 있다. 무오사화의 피바람이 있긴 했지만[8] 행정적으로 국가는 그럭저럭 운영해 나아갔다. 그러다가 그가 재위 10년째의 갑자사화 기간에 보인 잔혹함은 글로 묘사하기가 거북할 정도고, 이후 본격 막장 놀자판으로 막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후반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전체 재위 기간 중에는 오히려 평타 이상으로 집무했던 시기가 더 길었다는 것.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반정 세력이 편찬한 연산군일기에는 약간 의심되는 내용도 있는데, 가령 연산군에게 엿먹은 할머니 인수대비가 다음날 태연히 연화대에 구경을 한다는 내용이 있다. 방구석에 처박혀 떨어야 할 사람이 저러는 둥 정상적 심리 상태의 정황과 어긋나는 이상한 점이란 것인데, 전문이 이러한지라 반대로 연산군이 둘러댔다고 보기도 한다. 하여간 설령 왜곡된 부분이 있다 해도, '일기 기록은 전부 승자의 날조이며 연산군도 알고 보면 착했다'라고 봐서도 안 된다는 것에 주의하자.
"대비께서 연화대를 구경하려 하시니, 놀이하는 사람을 급히 대궐로 들여보내라. 옛 사람이 온실의 나무조차 말하지 않은 것[9]이 정말 이유가 있는 것이니, 이런 일들은 외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지 말라.

연산군으로 인해 신하들이 후대 왕에게 압력을 가하는 빌미[10]가 되었고, 무엇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복동생 중종은 이러한 신권(臣權)의 압박에 제대로 시달려야 했다.[11] 중종의 경우 형처럼 처용무라는 춤을 좋아해서 즐겨 추었는데, 신하들이 처용무(處容舞)가 연산군이 즐겨 추던 춤이라고 간언해 춤도 못 추게 했다.

당시의 군주 체제에 '폭군의 가이드 라인을 세운 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흑화한 이후, 그가 행한 패악질들은 '성군으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설령 그것이 상술한 것과 같은 자잘하고 미미한 취미 생활의 하나였다고(해당 임금의 입장에서는) 해도 반드시 금해야 할 금기로 치부되어 막았다.[12] 후세 왕들에게 반면교사가 된 셈.[13]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만 않았어도 폭군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단지 이런 걸로 연산군의 패악을 동정할 수는 없다. 당장 저지른 짓들만 보아도 향락, 여성 편력, 패륜, 무자비한 숙청, 돈지랄, 직언 차단 등이 있다.

2. 생애

2.1. 출생부터 즉위 초반까지

연산군 이륭은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새벽 1시 경(3경 5점) 경복궁 교태전에서 성종 이혈과 왕비 윤씨 사이에서 적장자로 태어났다. 역대 조선의 임금들 중 정통성이 확고한 임금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연산군은 정통성이 확고한 국왕 중 한 명이라 부를 만하다. 국왕이 첫 번째로 얻은 자식, 그것도 아들인데다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가 아닌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왕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연산군은 궁궐에서 태어난 첫 왕위 계승자이기도 한데, 그 때문에 승지였던 현석규와 임사홍이 궁궐에서 왕위 계승자가 태어난 것은 처음이라고[14] 성종에게 축하를 보낸 기록이 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사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연산군은 적어도 재위 초반, 아니 어떻게 보면 재위 중반까지는 나름 무난한 임금이었다. 맹꽁이 서당 같은 학습 만화에서는 연산군이 세자 시절 때 아버지 성종이 아껴 기르던 사슴이 자신의 손을 핥은 것에 화가 나 사슴을 폭행하자 이를 안 성종의 꾸지람을 받아 앙심을 품고 있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즉시 그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등 각종 사이코 짓을 했다는 야사가 있다. 그런데 이는 근거가 불확실한 이야기이며,[15] 세자 시절의 연산군은 양녕대군 같은 불량아도 아니었지만 아버지 성종처럼 대단한 모범생도 아닌 그저 평범한 세자였다. 세자 시절 대간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지만, 성종 대 대간의 행태를 보면 솔직히 그럴 만했다. 왕이 너그러운 걸 악용해서 왕에게 별 막말을 다 했으니. 교육의 수준이 다소 부진하다며 성종이 걱정하는 기록도 있긴 하나, 이후에도 세자 교육의 방향이나 수준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즉 성종보다 약간 느슨하게 교육을 받은 정도인데 성종 본인이 조선 역사를 통틀어도 유독 엄격하게 교육을 받았던 점을 고려하면 세자 시절 연산군의 학습 수준은 크게 특별한 편은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빈민을 구제한 기록도 있다.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을 완성시켰으며, 국방도 튼튼히 했다. 왜구를 격퇴했으며 건주야인(建州野人)[16]을 회유, 토벌하기도 했다. 신하들이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라고 하는 특이한 존호를 올렸지만, 연산군은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물리친 적이 있었다. 성종 말기의 느슨함을 휘어잡을 만큼 정치에 의욕도 있었고, 3명의 대비[17]들을 극진히 모셨으며,[18] 자기 자신이 나태해지는 걸 경계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 왕으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 시절부터 이미 연산군에겐 폭군의 자질이 싹트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긴 하다. 조선조 내내 군왕의 공식 업무들 중 굉장히 중요한 업무에 속했던 '경연(經筵)'을 점차 제대로 실시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 주요 근거이다. 당시 '경연'은 사전적 의미대로면 능력 / 덕망 있는 관리나 선비를 모시고 스승으로 삼아, 왕과 신료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일종의 과외 수업이었는데, 실제로는 일종의 '국무 회의'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미 즉위 초부터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나가지 않기 시작했으니, 이미 '연산군의 폭군 시작'이라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만으로 연산군이 폭군의 기미를 보였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부터 시작해서 조선 후반기까지의 왕들이 모두 경연을 선호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종대왕이나 영조, 정조 같은 공부벌레형 군주를 제외하면 대부분 싫어했다. 애초에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냐는 둘째치고, 보통 힘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장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부터가 경연을 싫어했다. 즉위 1년차부터 "내가 나이도 많으니 경연을 들을 필요는 없겠구나!"하다가 신하들에게 까이고 경연에 나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태종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19] 세조는 아예 폐지시켜 버린 전적이 있다.[20] 광해군은 정말로 경연을 싫어했다. 경연을 좋아했던 왕은 열 손가락에 꼽을 수준이다. 뭐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대 신하들에 비해 넘사벽급 지식을 지녔던 세종대왕영조, 정조는 경연장을 자신이 배우는 자리가 아닌 신하들에게 강의를 하는 자리로 변화시켜버렸긴 한데, 이건 상당히 특이한 경우고.

즉 연산군이 경연을 자주 하지 않은 게 칭찬 받을 일은 아니긴 해도,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 경연이 오로지 실무를 논하는 자리라면 문제가 됐겠지만, 경연은 유교적 가르침이나 역사 등을 논하며 배우는 자리로 실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고, 신하들이 임금을 가르치는 자리였기 때문에 고사(故事)나 경전의 훈시 등을 들며 임금의 행동을 은근히 비판하거나 압박하는 것도 가능한 자리였다.[21] 온갖 회의와 알현, 상소에 시달리면서 따로 잔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셈이니 조선 시대 임금들의 고질병이 스트레스성 질환인 종기와 등창이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고, 연산군이 경연을 싫어했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덤으로 사실 신하들이라고 모두 경연을 좋아한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경연을 싫어한 신하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횟수로만 따지면, 연산군은 경연을 갑자사화 바로 전 해인 연산 9년에 자그마치 122회나 열었다. 물론 이게 많이 줄인 것이긴 하고 갑자사화 후로는 폐지해 버렸지만 말이다. # 그리고 칭병(稱病)으로 경연을 안 했던 적이 많았다는 것일 뿐, 일단 나오면 열심이었다고 한다. 실제 연산군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진짜 아파서 경연을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자 시절부터 잔병치레를 자주 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병으로 인해 경연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 100% 거짓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여러 정황상 애초에 크게 건강하지도 못한 체질이어서 잔병치레도 많았고 공부에 큰 흥미를 보이지도 않았는데, 막상 공부하면 그럭저럭 하는 타입이었다고 봐야 할 듯. 실제로 연산군은 한시를 제법 잘 지었고, 신하들과 논쟁할 때는 경전을 적절하게 인용하기도 하는등의 모습을 보인다. 이로 미루어보아 무난한 수준의 공부는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꾀병을 부리고 놀자판을 벌인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연산 3년에는 사간원에서 "아니, 눈병이 나셨다며 경연 빼먹으신 분이 왜 연회에는 나가서 즐기십니까?"라고 아뢰자, "연회에 나가서 눈으로 먹냐?"라고 받아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연산군 일기》 22권, 연산 3년 3월 9일 신해 3번째 기사, 《연산군 일기》 권22 3년 3월 11일 계축 2번째 기사

어쨌든 경연 외에도 언행을 보면 꽤 괜찮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금과 노역을 피해 도첩도 없이 무단으로 승려가 되려 하는 자들을 공역에 배치해 정리하면서 "백성들이 중이 되는게 어찌 그들이 거친 밥과 나물국을 즐기기 때문이겠는가? 나라에서 1명도 빠짐없이 노역을 시켜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출가하는 것이니, 농사에 전력하게 하여 생계를 넉넉하게 만들 방법을 찾으라"라고 명하기도 했다. 이 때만 해도 백성들의 삶에 아주 무관심하지는 않았다는 것.

일본에서 원숭이를 선물로 보낸 일에 대해서도 '선왕(성종) 때 앵무새를 보낸 적이 있는데, 비용만 많이 들고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구리나 철과 같이 꼭 필요한 물건도 값을 대기 힘들어서 무역을 금지했는데 하물며 이런 동물은 오죽하겠는가? 도로 돌려보내고 잘 타이르도록 하라.'라는 개념있는 발언을 남긴 적도 있다.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 11월 14일 계미 1번째 기사)

평범한 것을 넘어 비범해보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연산군 2년, 초계군수 유인홍의 첩이 남자 종과 간통을 하다가 전처 소생의 딸에게 발각되어 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연산군은 직접 딸의 죽음을 자살이라 주장하는 유인홍에 대한 취조를 지시하고 심문 내용을 하달하는 등 조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심문 내용을 전해듣고선 단박에 허점을 찾아내는 등의 예리함을 보이며,#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명백한 타살이라는 점과 유인홍이 첩을 보호하기 위해 관련자들과 입을 맞추고 위증을 하려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등, 탁월한 탐정의 면모를 보여주었다.[22]

그러니 대체적으로 여기까지는 좋았다. 연산군은 즉위 후 4년까지는 정말 큰 문제는 없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23]를 실시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왜구와 야인의 침략에 대비해 병기를 증축하며, 악한 관리들을 색출해 벌주는 등. 어전 회의에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은 고쳐야 한다라 말한 적이 있어, 이때부터 슬슬 싹수가 보이긴 했지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연산군의 이 발언이 언급되는데, 훗날 피바람의 복선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연산군 일기》 권2 1년 1월 30일 갑인 1번째 기사, 《연산군 일기》 권2 1년 1월 30일 갑인 3번째 기사

재위 초중반까지의 연산은 대간과는 대립각을 세웠으나 주요 국정은 경험 풍부한 노신들의 자문을 존중하면서 큰 무리없이 이끌어나갔고 민생에도 나름대로 조심을 했기 때문에, 성종조부터 만개한 조선 중기의 전성기는 연산 중반까지 큰 변화없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공적인 국정 운영이 그럭저럭 정상적이었다는 거지, 사적으로 가면 가고 싶을 때 사냥 가고 지방에서 미녀 뽑고[24] 먹고 싶은 거 구해다 먹고 비싼 거 사들이고 하면서 마음대로 놀아났다. 그러나 자기 할일을 제대로 한다면 노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이 시기는 조선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연산군의 사치는 재위 중반기까지는 국정에 크게 문제가 되는 수준도 아니었고, 대신들의 아껴쓰라는 상소도 무오사화 뒤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이때를 생략하나, 《왕과 나》에서 나온 연산군은 이 시기를 조명해 주긴 한다. 덕분에, 연산군을 즉위 12년 내내 막장 짓을 한 왕으로 알고 있다가, 초반의 4년, 길게는 10년 동안 제법 정상적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꽤나 놀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몇몇 역덕후들과 전공자들이 그의 이러한 행적 때문에 연산군을 많이 아쉬워하는 편. 초기 치세만 괜찮게 유지했으면, 탕아적 기질이 있긴 했지만 공은 공 사는 사로 비교적 정국을 균형 있게 운영한 유능한 군주로 사서에 남았을 것이고, 이후의 조선이 가는 방향 역시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쉽게 말해 갑자사화 나기 전에 요절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히려 성종과 비교했을 때, 성종이 너무 대간에 잡혀서 왕 스스로의 결정을 하지 못한 것에 비하면, 이 때의 연산군은 젊어서 거칠기는 했으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나름의 자질도 있었고 왕 스스로의 결정을 밀고가는 뚝심도 있었기에 성종과 차별화된 또 다른 임금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

2.2.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두 차례의 사화

아버지인 성종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고작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따라서 성종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성종이 아닌 한명회로 대표되는 노회한 훈구 대신들이 국정을 총괄해 왔다.

그러다가 성종도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나이가 되었고 자기가 국정을 이끌려고 해보니 이미 훈구 대신들의 영향력이 너무 커버린 탓에 자기 힘으로 이 정국을 타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성종이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선택한 게 바로 삼사(또는 대간(臺諫))의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성종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삼사는 정권을 잡고 있었던 훈구 대신들의 치부를 하나하나 들춰내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비판을 이어갔다. 그리고 성종의 계산대로 삼사의 줄기찬 비판 덕분에 훈구 대신들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으며 한명회 같은 최고위 훈구 대신들도 세월을 거스르지 못하고 하나 둘 세상을 뜨면서 훈구 대신들 쪽에 쏠려 있던 권력의 중심추가 다시 평형을 되찾는 듯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시였다. 삼사의 힘이 성종의 통제권 바깥으로 나갈 만큼 커버린 것이다. 그래서 성종은 치세 기간 내내 훈구 대신 쪽이 더 강해진다 싶으면 삼사 쪽에 힘을 싣고, 삼사 쪽이 더 강해진다 싶으면 훈구 대신들에게 힘을 싣는 방식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이렇게 성종 시대 조선의 국정 운영은 국왕과 훈구 대신, 삼사[25]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연산군은 왕세자 시절부터 삼사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임금의 뜻에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것들'반대무새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리고 정말로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산군과 삼사는 지리한 대립을 이어갔으며 나중에는 훈구 대신들도 연산군의 편에 서서 삼사와 대치하는 정국이 펼쳐졌다.

그러한 와중에 터진 게 바로 조선 역사상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연산군은 대신들인 이극돈, 유자광 등의 말을 듣고[26] 사관 김일손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소문을 가지고 성종의 할아버지이자 연산군의 증조 할아버지인 세조의 명예를 더럽힐 만한 내용을 사초(史草)에 실었다는 보고를 받게 됐다. 무오사화의 '사'자를 '선비 사(士)'자 대신 '역사 사(史)'자를 쓰기도 하는데, 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초 때문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일손을 국문하던 도중 김일손의 스승이기도 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 등이 적발됐는데, 유자광은 주도적으로 이 조의제문세조단종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글인 것처럼 해석하여 연산군에게 보고를 했고 이는 왕실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되기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연산군은 이 사태를 삼사를 약화시키는데 아주 요긴하게 이용해 먹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가 터지기 전까지는 삼사와 아주 감정적인 대립을 이어왔지만 그래도 직접적인 처벌에 손을 대지는 않았었다. 아버지인 성종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어차피 국왕에게 반대 의견을 내라고 만든 조직이 삼사인데 자기 본분에 너무 충실하다고(?) 직접적인 처벌을 내리기에는 명분도 약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손을 비롯한 김종직의 제자들을 반역자로 여겨 엄벌에 처하려고 했던 연산군과 훈구 대신들의 방침에 삼사가 이보다 온건한 쪽의 처벌을 주장하며 반대 의견을 내놓자 연산군은 이를 삼사를 손 봐 줄 더 없이 좋은 명분으로 삼았다. '삼사가 김종직 일파를 감싸고 도는 것은 그들의 역심을 옹호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로 삼사에게 직접적인 숙청을 감행한 것이다. 그리고 연산군의 의도대로 그간 성종의 비호 아래 무럭무럭 커 나갔던 삼사는 처음으로 겪어보는 숙청에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됐으며 반대로 임금의 왕권은 그만큼 강화되었다.

성종이 균형을 애써 유교적인 방식으로 맞추려했다면, 연산군은 그냥 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이는 성공을 거둬, 성종 말기 사적인 주관을 개입시켜 대신들을 탄핵하는 폐단이 드러나며 왕의 인사권마저 간섭하기에 이른 삼사를 찍어누르는 데 성공했다. 그 덕에 대신과 왕의 권세는 강해졌으나 성종 시대의 유교적 유산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무오사화로 삼사를 제압한 지 얼마 후엔 삼사를 이루는 사림파에게도 온건하게 대하고, 훈구 대신들의 의견도 크게 수용하는 등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작새 깃털, 산호후추와 같은 진귀한 물품을 들일 것을 명하는 등 이때부터 연산군의 낭비벽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연산 9년, 대신들이 씀씀이를 줄일 것을 권고했고, 이에 대해 연산군은 대응하지 않거나 부정하고 넘어갔다.

무오사화는 하도 세가 드세져 다소 오만해지기까지 한 삼사 숙청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훈구 대신이나 궁중 분위기도 다소 '그동안 대간이 너무 나대긴했다.' 정도의 여론이었으나, 이보다 더 잔혹한 사화가 뒤이어 터지게 되는데 이게 바로 갑자사화다.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추구하던 국왕이었고 자신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능상(윗 사람을 능멸하다)'으로 규정하며 용납하지 않았다. 무오사화로 삼사(대간들)을 엿 먹인 후 견제 세력이 사라진 대신들의 권세가 강해지니, 이제는 이들도 토사구팽하면서 밟아놓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또는 그동안 줄기차게 삼사가 반대를 하는 바람에 자기 하고 싶은대로 왕권을 누리지 못했던 연산군이 삼사가 약해지자 지나친 사치, 방탕, 정무 태만 등을 일삼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삼사 손봐주기에 동참했던 훈구 대신들도 삼사와 손을 잡고 연산군의 행보를 막아서기 시작하자 연산군이 삼사와 훈구 대신 모두를 쓸어버리기 위해 일으킨 게 갑자사화라는 해석도 있다.

자세한 전개는 갑자사화 문서 참조. 정리하면, 연산군은 폐비 윤씨 사건을 빌미로 훈구파, 사림파를 막론하고 모두 억누르고, 수많은 신하들을 숙청해 신권을 완전히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므로 왕으로서 어머니를 신원(伸冤)시킬 권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처벌이 유례가 없을만큼 잔인하고 과도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 희생자 중에 유독 표연말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표연말이 무슨 송시열 급으로 드센 인물인 것도 아니고 타고난 공부 벌레일 뿐이라 성정도 순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연산군이 표연말을 패죽여버린 셈이라는 말도 나오고, 조선왕조오백년에서는 연산군의 악랄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연산군이 표연말을 관복도 안 벗기고 그냥 기둥에 묶어놓은 뒤 연산군 본인이 직접 작대기로 때려서 죽여버리는 것으로 나온다는 소리도 있으나, 이것은 무오사화 당시 김일손의 사초와 연관되어 벌어진 일로 갑자사화의 잔혹함과는 별 관련이 없다. 표연말은 대표적인 김종직의 문인으로, 조정 내 김종직 일파를 대표하는 중견 관료였다. 게다가 표연말이 정말 공부밖에 모르고 성정도 순한 사람이었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성종-연산군 초반까지 사림의 우두머리로 왕과 대립각을 세워왔던 인물로, 연산 초기 불사 문제 등으로 연산과 대간들이 대립할때도 대간의 선두에 있었다. 노사신에게 '나라를 망칠 간신'이라는 극언까지 퍼부으며 탄핵한게 바로 표연말이다. 게다가 연산이 노사신이 간신이 아니라며 옹호하자 "신은 전하께 실망을 금치 못하겠습니다"라는 발언까지 했다(연산군일기 7권, 연산1년 7월 20일). 이쯤되면 무오사화때 살아남았다면 그게 더 신기할 노릇이다.

후배 대간들이 조의제문세조에 대한 스캔들성 기사를 실록에 실은 죄로 죽었다면, 표연말과 다른 중견파들은 이를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죄로 죽었다. 이 과정에서도 연산군은 윤필상을 비롯한 다른 대신들을 시켜서 죄 줄 것을 청하게 하고 자신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절차를 거쳐서 숙청했다.

두 번의 사화를 거친 이후, 삼사와 훈구 대신들 모두 유명무실한 존재들로 전락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자신을 가로막을 수 없게 되자 연산군의 문제있는 행동은 더 심각해졌다. 연산군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를 기점으로 개인적인 관심사이자 취미였던 예술과 사냥을 비롯하여, 호색한 기질이 다분했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 엽색 행각이 최정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래 연산군은 처용무도 잘 추고 연기도 잘해서 사람들을 울릴 정도였으며, 시가 문학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것. 여러 모로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송휘종을 닮은 인물. 하지만, 연산군은 이러한 부류의 군왕들에게 나타나는 지적 그대로 보통 사람이 아니고 나라를 다스려야할 왕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조의제문》으로 사림 대간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폐비 윤씨 사건으로 훈구 대신들을 모두 날려버린 이후 절대 권력을 손아귀에 쥔 연산군은 막강해진 절대 권력으로 하라는 나랏일은 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놀아제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의 정치와 경제는 그 후 2년간 막장일로를 겪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연산군을 명나라의 창건자 홍무제 주원장과 비교하면서 대차게 깠다. 연산군과 홍무제 모두 신하들한테는 가혹하리만치 숙청과 피바람을 일으키면서 매섭게 대했지만 두 군주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홍무제는 그 강해진 권력을 건설적인 분야에 활용했던 반면, 연산군은 그저 자기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썼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연산군은 강해진 권력을 악용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앞장선 것이다.

2.3. 폐비 윤씨와 갑자사화

어제 사묘에 나아가 어머니를 뵙고(昨趨思廟拜慈親 작추사묘배자친)
술잔 올리며 눈물로 흠뻑 적셨네(奠爵難收淚滿茵 전작난수루만인)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으니(懇迫情懷難紀極 간박정회난기극)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라(英靈應有顧誠眞 영령응유고성진).
ㅡ 연산군이 쓴 "所懷(소회)"라는 시 #연산군의 다른 시

연산군에 대한 가장 큰 논란은 바로 폐비 윤씨와 관련된 부분이다.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뒤에 나오는 피 묻은 적삼 이야기도 얽혀 아주 요지경이다.

연산군은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했다. 갑자사화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미복을 입고 임사홍의 집에 들러 친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말을 듣게 된다. 이 부분의 기록은 없으나, 임사홍은 성종 대에 윤씨의 폐비 조치에 열렬히 반대했던 인물인 만큼, 임사홍의 설명은 주로 자신과 윤씨의 변호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연산군은 이를 알게 된 날, 바로 자기 손으로 아버지 성종후궁귀인 정씨귀인 엄씨를 살해하여 산야에 버렸다. 또한 폐비 윤씨가 폐비되는 데에 일조한 조모 인수대비의 궁에 칼을 들고 뛰어 들어가 결국 쇼크사 하도록 한다.

박치기로 들이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야사이다. 처용탈을 쓰고 칼을 휘둘렀다는 설도 있지만, 실록의 기록에는 그런 것 없이 칼을 들고 와서 인수대비더러,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물어, 인수대비가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라고 한다.[27]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직전에 계모정현왕후 윤씨에게 뛰어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때는 중전 신씨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2.3.1. 어머니의 죽음을 안 시점

사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에 친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종이 "백 년 동안 이 일을 입에도 꺼내지 말라!"고 신하들에게 신신당부했지만, 연산군이 세자로서 국사를 논의하는 장소에 참여할 때, 간간히 폐비 윤씨의 이야기가 낮게나마 거론된 적이 있었으며, 윤씨가 사사당했을 시 만 7세였으니, 어쩌면 어렸을 때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28]

실록에 의하면, 즉위 후 성종의 《행장록(行狀錄)》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왕이 승하하면, 왕의 삶과 가족 관계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행장을 명나라로 보내야 했다. 당연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 문서이자,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므로 연산군은 이를 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의 장인 중 한 명으로 윤기견이란 사람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자순대비의 아버지인) 윤호를 잘못 적은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신하 중 한 명이 "윤기견은 폐비 윤씨의 아버지"라 답하자 폐비 윤씨에 대해 어찌되었냐 되물었다. 이때 사사되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어머니가 따로 있다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더 자세한 걸 들으려고 질문했거나, 혹은 사사당했다는 것까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설령 폐비 윤씨와의 추억이 없다고 해도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인지라, 아버지와 신하에게서 어머니가 사사당했단 말을 들은 연산군의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다. 기록에 보면 왕이 그 날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인이 아닌 왕이 굶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요즘처럼 현대 의학이 발달하고, 모든 음식에 영양소가 풍부하던 때를 생각하면 안 된다. 옛날에는 조금 굶어도 픽픽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물론 왕족이므로 평상시에 일반 백성들보다는 건강히 먹었겠지만, 사회 풍조가 '굶는다'에 대해 그런 인식이 있는데 왕이 그러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왕들이 굶는 것을 내세워 시위하곤 했는데, 이는 조정을 크게 뒤흔드는 무기였다.[29]
며칠 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초라한 무덤을 손질하고 비석이나 세워주라 말한다. 이것이 회묘(懷墓)다. 그리고 외할머니 신씨와 외삼촌 윤구를 유배지에서 풀어준다. 나중에 추숭(追崇)을 하려 하자 대간들이 많이 반대했는데, 결국 성공했다. 하지만 관련자에 대한 처벌은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가 오히려 무덤 복원의 임무를 맡았다. 이때까진 폐비 윤씨가 성종에게 죄를 지어 사사당했다는 식으로만 이야기가 나왔으므로,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연산군과는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정비 소생이 아닌 왕자가 왕이 된 후에 자신의 생모를 추숭(追崇)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2.3.2. 패륜(悖倫)

기일(忌日)에 성관계를 한다든가 말들이 성관계를 하는 걸 보고 즐겼다는 류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연산군을 최악의 인물로 각인시킨 행위는 바로 적삼사건 이후에 벌인 행각들이다.

사실 효자 연산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연산군이 벌인 패악질에 대해서는 그냥 복수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많은데, 조선 시대의 윤리로는 아버지와 결혼한 서모(庶母), 즉 계모[30]에 대해서도 친모와 동일한 기준으로 대한 것을 보면, 연산군의 경우는 존속 살해에 해당하는 패륜을 벌였다. 물론 계모가 연산군을 사람 취급 안 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무슨 팥쥐 엄마 같은 나쁜 인간이었다면 모르지만, 그랬으면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남았을 텐데, 그렇지도 않다. 더군다나 조모인 인수대비에 대해서는…

일단 야밤에 폐비 윤씨를 모함했던 귀인 정씨귀인 엄씨를 잡아서 고문한 후, 그들의 소생, 즉 연산군 자신의 이복 동생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끌고 와서, 결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이들의 어머니인 귀인 정씨(귀인 엄씨는 아들이 없었다)라는 것을 숨긴 채 '죄인을 매질하라'고 명했다.[31] 그리고 다시 두 귀인을 매질로 살해하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서 유명한 패륜의 구절을 했다.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대사만 보면 별반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문제는 연산군이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채를 잡고 저런 말을 한 것이다.

이후 안양군에게 독촉을 해서 대비에게 권하니 대비가 부득이 허락을 해주었고, 이때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은 없습니까?"라고 말하니 대비가 놀라서 베 2필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는 참으로 불손한 말을 한다. 그 뒤,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귀인 엄씨귀인 정씨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서 산야(山野)에 버렸다고 한다.[32] 어미를 친 왕자는 말을 선물로 주었고, 둘 다 귀양을 보내어 사사했다. 하나는 패륜아니까 사형당하는 게 당연하고, 하나는 왕의 명을 거역했으니 역시 입장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 그럴 듯한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보통 패륜의 극단이자 동생들에 대한 친모 폭행 강요라는 측면에서 아예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린이용 역사책이나 고우영의 만화, 영화 《왕의 남자》나 이대근 주연작 《연산군》, 드라마 《임꺽정》에서는 분노한 연산군이 "손수 철퇴를 휘둘러 두 후궁을 박살내었다"고 처리하는데, 위의 이야기 자체가 실록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성인 대상 극화라도, 수위가 너무 높아서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잔혹함 때문에 창작물에서 그대로 내보내기도 어려웠던지 유인촌이 나온 《연산일기》에서는 곤장 강요로 대신하고 있고,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입을 틀어막고 불을 끄고 마구 치게 하는 것으로만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조선 왕조 실록》의 기록에 나름대로 충실했지만, 그래도 장면이 장면인지라 나중에 다른 군졸의 고문으로 사망한 걸로 그렸다.

신봉승의 《조선왕조 5백년》 원작에서는 두 아들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마구 때리고, 그나마 한 아들은 직접 살해한다. 그리고 바로 연산이 손수 병사들에게 현장에서 귀인 정씨귀인 엄씨를 나체로 만들게 하고는, 시체를 갈기갈기 형체도 없게 찢어 발겨버린다. 드라마 판에서는 차마 표현하기가 난감했는지, 그냥 잡혀가는 장면과 사망했다는 대사로만 처리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강요로 한 대 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은 명백한 야사이다. 인수대비는 실제 그 일이 있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긴 했으나, 지나친 충격으로 인해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보통 극화에서는, 머리로 받는 장면보다는, 두 후궁의 아들들에게 술을 따르게 한다든가, 윤씨의 죽음에 대해서 항의한다든가, 다들 보는 앞에서 후궁들을 손수 때려잡는다든가, 칼을 들고 대전에 난입한다든가 하는 장면 등으로 바꾸어서 나온다. 다만 2015년에 개봉한 영화 《간신(영화)》에서는, 정말로 인수대비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받아서 뒤쪽 벽에 처박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사실 연산군은 패륜 짓을 한 적이 없었으며, 귀인 엄씨귀인 정씨는 자결했고 인수대비는 평안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견강부회에 가깝다. 심지어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연산군의 사치는 권력자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다. 애당초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이 굶주리면 식사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등, 나름대로의 견제 장치가 많았다. 그렇기에 쓰레기가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500년간이나 왕조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중종반정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연산군이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큰어머니)를 범해 아이를 잉태하게 하여 그녀가 자살했다는 사건은 진짜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일단 정사엔 저 기록이 없다. 연산의 온갖 패드립을 다 적어놓은 《연산군 일기》에도 박씨가 그냥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다만 사람들이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덧붙여 놨다. 당시에도 일종의 카더라 취급을 받은 이야기인 듯. 아무튼 박씨가 연산군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치욕스럽게 여겨 자살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야사 관련 문헌들에서만 전해온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박원종의 누나이며, 사망할 당시 51세였다. 그 나이에 임신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그녀는 평생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었다. 현대까지 남아있는 월산대군의 후손들은 모두 월산대군의 서자들이 계승한 것이다. 지위 뿐만 아니라, 나이로도 박씨가 연산군의 어머니뻘이라는 걸 생각해보자면, 아무리 연산군이 막장이었다고 해도,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3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큰어머니 박씨를 건드렸을 가능성은 낮다. 게다가 박씨가 병에 걸려 위독하자, 외지에 나가 있던 박원종을 일부러 불러다가 간호하게 했다. 연산군이 정말 박씨를 능욕했다면 일부러 박원종을 부를 이유가 없다.

따라서 연산군이 박씨와 친하게 지내며 이런저런 신경을 써준 뿐인데, 이것을 황색 선전한 것이 박씨 능욕으로 발전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박씨에게 곡식과 면포 등의 물품을 여러 번 하사하였으며, 이에 대해 신하들이 지나치게 후한 행위라고 지적한 적도 있다. 세자의 교육 또한 박씨에게 맡겼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박씨가 초파일 때 다른 사대부 여인들과 함께 집에서 관등 행사를 하는 등 불교를 가까이 하자 신하들이 숭유억불에 따라 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연산군이 대군 부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며 거절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박원종이 사실은 연산군과 친한 누이의 덕을 봐서 출세한 면도 없지 않은 것을 보면, 누나의 명예를 위해 반정까지 일으켰을 가능성은 그렇게까지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연산군에 의해 출세하고, 연산군과 가까운 사이였던 박원종의 배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 실상은 연산군의 권력이 슬슬 무너져가는 조짐을 읽어내고, 미리 빠져나간 쪽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위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박원종 뿐만 아니라 중종반정을 일으킨 주요 공신들 중에는 본래 연산군과 가까운 관계였던 사람들이 많았다.[33]

다만 애초에 연산군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성관계를 강요하는 정신 나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고작 '사이가 좋은 정도'로 저런 소문이 나돌 리가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그냥 눈에 띄는 여자는 기분 내키는 대로 범하는 행태를 보이다보니 이걸 제대로 묘사하면 사극이 아니라 아예 AV가 될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까이 지내는 여성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이 누가 되었건 연산군과 성추문이 나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신봉승 씨가 쓴 소설판 《조선왕조 500년》에선 이런 야사를 사실로 받아들여서, 박씨와 연산군 간의 검열삭제 묘사를 상세히 해놓았다. 원래 야사이기도 하고, 이 소설에서는 연산군 연간에 박씨의 나이가 30대 후반이라고 하는 오류[34]도 있는 등 그냥 소설적 각색으로 보는 게 좋다.

2.3.3. 효자 연산?

애당초 연산군이 친어머니 폐비 윤씨와 헤어졌을 때는 3살이었다.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남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더군다나 왕실 법도상 왕자는 왕비가 직접 안고 업고 기르지도 않고,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고 하는 유모에 의해 길러진다. 그것도 모자라 잔병이 잦았던 연산군은 궁 밖 강희맹의 집에서 피접(避接) 생활을 했다.

이후 진실을 알게 된 후에 밥을 굶는다든가, 묘를 복원한다든가, 어머니의 지위를 다시 복권시키는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야사에는 어머니를 항상 그리워하여, 즉위 후 어느 날 자신의 어머니의 얼굴이 공민왕의 왕비였던 노국대장공주와 흡사하다는 말을 듣고, 전국에 남아 있던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실록에 따르면, 자기 어머니 기일에도 검열삭제를 하는 패륜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35] 이런 점에서, 연산에게 효심이 진짜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상당히 애매모호하게 되었다. 말년에 들어서는 일관성 없이 즉흥적으로 이랬다 저랬다 했던 것을 보면, 진심으로 우러나온 효심이라기보다는 반대 신료들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과 어머니에 대한 일시적인 그리움이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나타났다는 해석이 있다.[36]

2.3.4. 새로운 가설

근래는 연산군이 대간과 대신 모두를 숙청하여 절대 권력을 이루기 위해 어머니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설도 나온다. 아버지 성종이 신하들의 간언을 즐겨들었던 왕으로 호평받았지만 그 이면엔 신하들의 말에 꼼짝 못하는 듯한 모습도 있었기 때문에, 이를 후계자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리라는 것. 정사에서 실제로 폐비 윤씨에 대해 거론한 적은 많지 않으므로, 어디까지나 숙청의 빌미나 구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늘 자신과 성종을 쪼아댔던 삼사(三司)가 유독 그때만큼은 성종에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화가 났던 것일 수도 있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 너무 세력이 커져 왕마저 괴롭히는 삼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즉위 직후부터 삼사의 권한을 억누르려 했다. 실제 연산군은 미친 듯이 아무나 숙청한 게 아니라, 우선 사약을 직접 나른 이세좌를 숙청한 뒤, 그 후로 이세좌의 가문인 광주 이씨와 그와 연관 있는 대신 가문을 숙청하고, 그 다음에 대간들을 찍어 누르면서, 조정의 세력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연산군 일기》에는 연산군에 대한 긍정적 기사도 제법 있기 때문에, 연산군이 벌인 온갖 패륜이 모조리 거짓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많다. 설령 연산군이 절대 권력을 위해 저랬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보다시피 연산군이 벌인 수많은 행동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 절대 권력을 쥐려고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당화할 건덕지가 없는 셈이다. 고로 연산군의 최후까지를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해석하면서 '연산군은 신권 세력에게 왜곡되었다'고 떠드는 것은 심히 곤란하다. 게다가 이러한 가설을 제시한 임용한 교수도, 결과적으로 절대 권력을 장악한 연산군이 이를 이용해 제멋대로 놀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2.3.5. 연산군의 광증(狂症)

연산군은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던 나머지 폭정을 휘둘렀다는 말이 여러 번 제기되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설이기도 하다.

왕자 시절 계모정현왕후 윤씨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아들 진성대군 (후일의 중종)이 태어난 후엔 친아들에게 마음이 더 기울어 상대적으로 홀대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성종의 첫 아들이라고는 하나, 미워했던 며느리의 아들이니 인수대비의 냉대도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추측이다. 무엇보다도 성종은 연산군의 재능을 총애하고 신경을 많이 써서 특별한 나쁜 기사는 딱히 없다. 실록에 나오는 아버지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기사는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가 없었기에 조카인 연산군을 자기 아이처럼 돌봐줬을 가능성이 높은 월산대군 부인 박씨[37] 대한 야사 등을 비롯하여 유부녀들을 적지 않게 탐했다는 이야기와 장녹수가 연산군을 어린애 다루듯이 꾸짖고 나무라면 오히려 기뻐하고 좋아했다는 이야기에서 그로 인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있다. 갑자사화 이후로는 강박관념 등에 시달린 게 아닌가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여하간 연산군은 적어도 갑자사화 전까지는 이렇다 할 광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정사도 나름대로 잘하고, 백성들도 성종 대와 다르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연산군의 행동을 어릴 적의 울분의 분출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다만 갑자사화 이후에는 그것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산군 자체가 상당히 감성적이고 예술적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던지라…

그러나 이러한 광증은 앞서말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때문에 일어난 산물로 보는 견해도 많다. 피묻은 적삼이 등장하는 <금삼의 피>나 <장녹수>에서 볼 수 있듯이 극적 재미를 위한 요소 중 하나로 연산군의 광증을 짐짓 지어냈다는 것. 사실 관객들에게 흥미를 돋우는 것 중 하나가 스토리의 급작스러운 전환이니만큼 역사 소설가나 대하 드라마 작가 같은 입장에서는 이를 부각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연출의 측면에 있어서도 엄한 아버지의 훈육 속에서 자라던 유년기에 대한 보상 심리로 서서히 타락해가는 왕보다는 친모의 죽음으로 미쳐버리는 인물이 훨씬 매력 있어 보이는 것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2.3.6. 종합해석

폐비 윤씨의 일은 숙청을 단행하기 위한 빌미로 철저한 계획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이전의 행동들은 모두 왕권이 약했던 시기였다.[38] 이렇게 보면 어머니의 죽음을 처음 안 척 행동 → 어머니를 추숭 → 날뛰는 대간 잡기(무오사화)[39] → 수년간 눈치를 살핌 → 갑자사화 이 단계 모두가 권력과 정통성을 강화하는 책략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연산군의 폭정이 실제보다 어느 정도 과장됐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연산군 일기에 즉위 기간 내내 폭정이 적힌 것도 아니며 즉위 초반 국정을 돌본 기록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재위 후반 폭정을 저지른 건 엄연히 사실로 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이후 최초로 신하들이 주도한 쿠데타였다는 걸 생각해보자.

광해군과는 달리 연산군이 오늘날까지도 폭군이라고 욕먹으면서 재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광해군도 이런저런 과오(지나친 궁궐 증축, 대동법 반대, 옥사 남발, 패륜)가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적어도 연산군 만큼의 막장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광해군은 자신의 계모인 인목왕후를 폐하고,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 보낸 뒤 죽음에 이르게 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저질렀지만, 대신들의 아내를 빼앗고, 선왕의 후궁들의 시신을 갈가리 찢은 연산군이 저지른 패륜과 비교하면, 적어도 최소한의 실드를 쳐줄 건덕지는 있는 편이다.

2.4. 그가 벌인 패악질

의외로 간과되는 요소인데, 연산군의 폭정이 조선에 끼친 악영향과 후폭풍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크다.

정도전이 만들어둔 조선의 군신관계 행정 시스템을 마구 붕괴시키면서 연산군은 황제급 권력을 얻었으나, 자신이 가진 권력에 걸맞는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크거나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화를 연속해서 벌인 후 나사가 빠져버린 연산군의 폭정으로, 백성들은 극도로 높은 세율 때문에 1년 내내 농사지은 수확물을 모두 착취당하는 수준이라 산에 있는 나물과 풀로 간신히 연명했다.

심지어 그렇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까지 위협당했다. 산나물이 몸에 좋다는 말을 들은 연산군은 전국에 있는 산나물까지 채취하도록 하였는데, 백성들이 산나물이나 풀로 연명하는 것도 중지시키면서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게다가 이 산나물을 다 먹은 것도 아니라서 궁으로 가는 산나물과 약초 수십 가마니가 사용되지도 못하고 썩는 동안 많은 백성들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굶어죽었다고 하니, 그 막장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런 군주이다보니 연산군은 백성들에게조차 철저하게 증오받았다. 후에 중종반정으로 몰락하여 폐위되고 유배길에 오를 때 백성들이 앞다투어 손가락질하고 욕까지 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2.4.1. 흥청망청

전국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하여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해서 방탕한 향락에 빠졌다.[40] 이 중에서 가장 예쁘거나 노래를 잘 하는 자들을 뽑아 "흥청"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것이 "흥청망청"의 어원이 된다. 워낙 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던 왕인지라 흥청의 규모는 2,000명이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예쁘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여자를 뽑으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도저히 무리였기 때문에, 얼굴이 예쁘장하면 무조건 뽑았다.[41]

다만 성종 5년에 만들어진 '경국대전'에는 ‘여성 기생 150명, 춤추는 기생인 '연화대' 10명 등을 매 3년마다 각 고을의 관비 중에서 어리고 총민한 자들로 뽑아 올리도록 한다’는 조항이 있으며, * 연산군 사후인 영조 때 고쳐진 '속대전'에도 “왕실 연회 때에는 각 지방 고을에서 여성 기생 52명을 뽑아 올린다”는 조항이 있다. * 즉, 조선의 국왕이 조선의 여성 기생들을 한양으로 데려오는 건 연산군 시대에만 있었던 특별한 사례는 아니었다. 그 규모나 막장성이 특별했을 뿐...

이 많은 흥청들에게는 모두 집이 제공될 뿐더러, 가족의 납세와 노역도 면제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흥청들의 숙소로 사용된 건물은 놀랍게도 집현전이었다. 게다가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다가 선왕인 세조의 호불 정책으로 중건한 절을 아예 기생방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절이 바로 증조부 세조 시절 증건되었고, 현 국보 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던 원각사였다. 현재의 탑골공원이 원각사가 있던 자리다.[42]

지금으로 비교하면, 대통령이 무력으로 오랫동안 지켜온 헌법을 뒤엎고 스스로 독재자가 된 다음에, 국립 연구소와 서울 시내의 유서 깊은 종교 시설을 마음대로 점거하고, 유흥 주점 같은 룸살롱으로 만들어 버린 꼴이다. 그만큼 연산군이 학자들과 승려를 우습게 보았다는 증거다. 세조가 환생했으면 직접 철퇴로 때렸을 것 같다. 태조도...

또 최측근이자 궁궐 내관이었던 김처선이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선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는 임금은 없었다는 간언을 올리자, 분노하여 김처선의 양 팔을 칼로 직접 베어 죽였다.[43] 그 후 '처(處)'라는 글자의 사용까지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되어 '처서(處暑)'를 '조서'로, 처용무는 '풍두무(豊豆舞)'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2.4.2. 성균관의 자리에 사냥터를 만들다.

게다가 세종대왕이 즐겨 했던, 시국을 논하고 정쟁에 대한 토론도 하는 경연을 없애서 학문을 멀리 하고, 성균관을 폐쇄하고 학생들을 모두 몰아낸 다음에, 그곳을 놀당, 즉 놀이터로 삼았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대학교대통령 전용 골프장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자리는 실제로 골프장 자리이긴 하다 사간원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연산군의 패악질은 극에 달했다.

백성들에게 끼친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경기도 일대에 금산(禁山), 지금으로 치면 "그린벨트"와 비슷한 것을 정한 후, 그 안에 있는 민가를 쓸어버리고 사냥터를 만들게 하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백성들은 연산군을 더욱 증오하였고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통쾌하게 여겼다.

물론, 조선 시대 초기부터 금산은 자주 있었다. 개국 초기나 연산군 시절처럼, 왜구가 출몰하는 시기에는 배를 만드는 데 쓰는 소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금산을 시행하여 무분별한 벌목을 막았다. 하지만 연산군이 금산을 지정한 게 문제되는 건 이런 금산 조치가 적어도 국방 등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을 위해서 시행한 것이 아니라, 그저 연산군 개인의 유흥을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산에 출입 금지를 시키는 금산이 아닌 거주민들을 전부 쫓아내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 짓을 한 것이다. 이쯤 되면 정말 막장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정작 사냥은 몇 번 나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겁이 많아서 맹수들은 절대 사냥하지 않고, 잡아온 뒤에 우리 밖에서 쏘아 죽였다. 그가 사냥한 짐승은 노루토끼, 등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짐승들이다. 하지만, 국왕이 한번 사냥을 나가기만 해도, 몰이꾼들의 식량부터 해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므로 국가 재정은 충분히 거덜났다.

사실 조선의 왕들은 전 시대들의 왕들과 다르게 사냥을 나가고 싶어도, 이러한 경제적 비효율 문제와 이럴시간에 백성의 상소를 더 읽으라는 민본주의 정치 이념 때문에 제대로 사냥을 하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도 사냥을 좋아했지만, 신하들에게 간언사실상 잔소리을 많이 들어서 눈치를 항상 살펴야만 했다. 여담으로, 태종은 상왕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냥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때의 태종은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년이기에, 세종과 신하들이 눈감아준 것도 있었다.

2.4.3. 돈 낭비

여기에다 서총대(瑞葱臺)를 비롯한 토목 공사를 벌였고, 생일에는 '혀 요리' 같은 진미를 동원했으며, 주변 관료들과 백성들의 옷도 화려하게 입을 것을 명했다. 심지어 궁궐에서 일하는 공노비들도 옷을 화려하게 입도록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놀아 제끼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돈도 한 푼 안 주면서 뻔뻔하게 이런 무리한 명령을 했다는 것. 덕분에, 연산군 초기만 해도 살 만했던 백성들은 경제적으로나 뭐로나 헬게이트가 열리면서 완전히 죽을 맛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는데, 서총대를 비롯한 연산의 토목 공사는 사실 그리 큰 토목 공사도 아니었고, 백성들에 대한 세수 증가는 이미 세조 이후 성종 치세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며, 재정 악화 역시 딱히 연산군이 막장으로 놀지 않았더라도, 훈구파들의 세력 확대로 인해 성종 때부터 진행되어왔다는 견해다.

또한 연산군은 금표(禁標)를 지정해 농토를 마구 뺏었는데, 이는 대부분 훈구 대신들의 사유지를 연산군 자신의 사유지로 만든 것이라 백성들의 생활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즉 민생 자체에 딱히 심한 타격을 초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막장이 된 뒤 2년 동안 연산군이 마음대로 놀아 제끼면서 재정을 악화시킨 점은 있었으나, 성종이나 중종과 비교해볼 때 딱히 심각한 지출이나 징세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왕실의 방만한 재정 운용은 무오사화 이후 심화되어, 연산군 10년 내수사(內需司) 직계제를 통해 이에 필요한 비용을 수탈하는 제도가 확립된다. 애초 재정의 남용에 따른 부족분을 다음해, 그 다음해에 필요로 하는 공물을 앞당겨 조달하는 인납(引納), 무납(貿納) 등 공납 제도가 크게 어지러워진 것은 연산군 때부터의 일이며, 연산군 7년에 이를 현실화한다는 미명 하에 실시된 공안 상정(신유공안)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부담되는 공납의 부담은 크게 증가했다.

이미 16세기 들어 조세 제도에서 공납의 비중이 커져만 가던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가 백성들에게 심각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란 건 당연지사다. 예를 들어, 경기도에서 1년에 진상해야 할 물고기 7,518마리 중 4,800마리가 이러한 별진상으로 늘어난 품목들이었다. 선조 시대의 율곡 이이가 만언봉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 공물 추가 분정은 바로 연산군의 이러한 깽판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산군 일기연산군 11년 11월 15일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적자 장부는 없애버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2.4.4. 직언을 차단

신하들 단속에 매우 난리를 쳤는데, "입은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내용의 신언패(愼言牌)[44]를 차게 하고, 총애하는 흥청의 나들이나 연산군의 가마를 메는 데 신하들을 동원시켰다.[45] 폐위 몇 달 전부터는 아예 사모 앞뒤로 "충", "성"을 수놓게 하였다.

2.4.5. 언문사용 금지

연산군의 악행을 비방하는 투서가 나돌았는데, 그것이 언문, 즉 한글로 쓰여있었다는 이유로 훈민정음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 구결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웠다. 종종 조선시대 양반들은 쭉 한자를 썼으니 한글을 천시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훈민정음은 선왕이자 위대한 성군인 세종대왕이 만든 위대한 업적인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세종대왕은 연산군의 고조부이다. 게다가 자신이 존경하던 증조부이자 세종대왕의 아들인 세조 또한 훈민정음을 더 정교하고 간단하게 만드는 언어법을 즉위 1년만에 만들었고 널리 보급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런 직계 조상이 만든 언문 구결을 모조리 불태웠다는 것은 어찌보면 패륜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다시 세조가 철퇴를 든다...

하지만 정작 뒤에 나오는 흥청들의 음악 교본은 모두 언문, 즉 한글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연산군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백성들에게도 한글 사용이 제대로 정착된 현실 때문에 흐지부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므로 "한글의 암흑기"까지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한글의 암흑기는 일제강점기이다.

또한 언문이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상대로한 글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연산군에 대한 반감이 백성들에게까지 퍼졌거나, 백성들까지 끌어들여서 반(反) 연산군 활동을 하려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한 국가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개인의 감정으로 고조부의 업적을 제대로 능욕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까여도 할 말이 없다.

2.4.6. 방탕한 여색살이

왕의 음탕이 날로 심하여, 매양 족친 및 선왕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장녹수가 아끼는 궁인에게 누구의 아내인지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두었다가 이어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 혹 4, 5일이 지나도록 나가지 못한 사람으로서, 좌의정 박모의 아내, 남천군 이모의 아내, 봉사 변모의 아내 (중략) 같은 이들이 다 (왕과) 추문이 있었다.
ㅡ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1년(1505년) 4월 12일.
왕이 박씨[46]로 하여금 그 집에서 세자를 봉양하게 하다가 세자가 장성하여 경복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면서는, 왕이 박씨에게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하고,[47] 드디어 간통을 한 다음 은으로 승평부 대부인이란 도장을 만들어 주었다.[48] 어느 날 밤 왕이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을 보고는 밉게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한 길이나 되는 쇠막대기를 만들어 월산대군의 묘 가운데 꽂게 하였는데 우레(천둥)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ㅡ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2년(1506년) 6월 6일.

연산군은 색(色)도 밝혔는데 이게 중증이라, 기생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신하들의 아내까지 은밀히 불러다가 간음했다. 실록에는 연산군에게 아내를 바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49] 거기다가 이복 누이들근친상간까지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50] 심지어 갑자사화 후 친모(폐비 윤씨)의 상중에도 성관계, 심심하면 말의 등에서도 성관계를 하는 등, 하드코어의 극치를 달렸다.

그런데 색욕에 비해 정력이 딸렸는지, 정력에 좋다고 알려진 식재료인 장어마늘을 넣고 백숙을 만들어 즐겨먹었으며,[51] 거기에 그치지 않아 약을 엄청나게 복용했다고 전해진다. 앞서 설명한대로 연산군은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그래서 본인도 이걸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는데 저 정도로 색을 밝히면 몸이 남아날리가...

육체적인 성욕의 해소보다는 정신적인 공허에서 비롯된 성적인 자극으로 채우려고 성에 탐닉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저 시점에선 정신 의학이란 개념 자체가 지구상에 없던 시기인 관계로, 후대의 인물인 사도세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질환이 있다는 걸 알고 고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설령 이 당시에 연산군의 잦은 여색이 정신병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연산군의 방탕한 색정증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태생적인 기질에,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음으로써 생긴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심리적 의존증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그 증거로, 장녹수를 비롯해 연산군이 홀딱 빠져있던 여성상을 보면 죄다 여왕님 기질이 있는 연상의 여성이었으며, 장녹수 역시 연산군을 아이 다루듯 꾸짖거나 혼을 내는 등 전형적인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죽은 폐비 윤씨를 도로 되살릴 수도 없는 일이니, 연산군의 색정증도 폐비 윤씨가 사사된 순간부터 이미 고칠 가능성이 없는 병이지 않았을싶다.

물론 실제로 그런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해도 하다 못해 왕비 혹은 후궁들, 궁녀들과 해결하는 등의 합법적인 방법도 존재하는데 뒷처리도 안 하면서 궁 밖에 멀쩡히 사는 신하의 부인들을 일부러 불러들여 겁탈한다는 것은 왕으로서 선을 넘어버렸다.[52] 여성의 육체적 정절을 현재보다 훨씬 더 중시했던 당시 조선 사회를 고려해볼 때 피해자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는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각 군주 당 평균 600명 ~ 700명 가량 되던 궁녀의 수가, 이 시기에만 유일하게 1,000명을 돌파했다고 한다.[53] 물론, 궁녀들 대부분은 노비였으니[54] 궁녀를 뽑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궁녀 유지비는 그 자체로 백성들 등골을 빼먹는 행위였다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연산군의 엽색 행각을 기록한 연산군일기의 기록이나 전해 내려오는 야사를 보면 구체적인 증언이나 정황을 적은 것도 있지만 '이런 소문이 있었다' 또는 그러한 상황을 연상케 하는 문구를 적어두고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듯한 서술, 그리고 직접 보고 들은 것만 기록해야 하는 사관이 알 수 없는 내용도 보이기 때문에 읽을 때 주의를 요하는 기록도 있다. 김일손이 왜 죽었는지 다시 떠올려 보자 무엇보다도 연산군 본인이 자신의 사생활과 관계된 부분은 사관들이 기록을 못하도록 재위 말년에는 직접 막기 때문에 사관이 직접 보고 적은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전해듣고 기록한 것인지 정확히 구분이 어려운 내용이 있다.

앞서 '패륜' 문단에서 설명했지만,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의 누나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연산군이 겁탈해 임신시키는 바람에 박씨가 음독 자살했다는 야사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연산군과 중종처럼 당시 왕자들이 10대의 나이에 혼인했고 배우자의 나이도 대개 또래였다는 점, 월산대군 또한 박씨와 결혼할 때의 나이가 13세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박씨의 나이도 동갑내기이거나 한 살 연상 정도였을 것이다. 즉, 연산군일기에서 명시하고 있는 시간을 감안해 보면 당시 박씨의 나이는 약 50대 정도로 추정되는데 과연 연산군이 50대의 여성에게 혹했을까 하는 의문도 있을 뿐더러 이 나이대의 여성은 대개 아이를 갖기 어려운 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

무엇보다도 정사(正史)에서는 박씨가 그냥 죽었다고 기록되었을 뿐 자살을 했다는 언급은 없다. 그저 '사람들이 연산군과 그렇고 그런 관계로 지내다 애를 갖자 자살했다고 수군거렸다'는 후문이 달렸을 뿐이다. 그리고 연산군과 박씨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기록은 위의 연산군일기 12년 6월 6일 기사와 중종실록의 박원종 졸기가 유이하다. 그런데 월산대군 무덤에 긴 쇠막대기를 꽂았을 뿐인데 천둥 치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는 비현실적인 구절에서부터 이 기사의 서술을 신뢰하기가 어렵다. 무덤 속에 뭐가 있으면 천둥 소리가 날까. 그리고 연산군이 박씨와 동침했는데 꿈에 월산대군을 봤다는 부분 역시 사관이 연산군의 꿈 속에 들어갔다 나왔거나 연산군이 자기 입으로 사관에게 말해줬다는 수준의 명확한 출처가 나오지 않는 이상 실제 사실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박원종졸기에서는 "박원종의 맏누나인 (박씨)는 월산대군 이정의 아내로, 폐주(연산군)가 간통하여 늘 궁중에 있었는데, 폐주가 특별히 원종에게 '숭정(崇政)'이라는 품계로 올려 주니(이를 '가자'라고 한다) 박원종이 분히 여겨 그 누나에게 말하기를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 하였다."라고 직접 명시했다. 음독 자살설은 아마도 이 구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는 연산군 정권의 핵심 인사였다는 전력이 있는 박원종에 대한 변호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구절이라는 해석이 있다.

쉽게 말해, 연산군이 왕위에 있었던 기간 동안 그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려온 사람이었던 박원종이 자기를 각별히 신임했던 임금을 배신하고 폐위시킨 것에 대한 논리적인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연산군이 박원종의 누나를 겁탈하고 박원종한테는 마치 그에 대한 '특별 대우'라도 하듯 승진을 시켜줬는데, 박원종은 자기 친누나한테 죽으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는 일종의 해명 또는 변명을 붙였다는 것이다. * 실제로 박원종 졸기의 문맥도 이러한 점 때문에 박원종중종반정을 결심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리 부끄러워 했다면서도 연산군이 직책을 내려주는 족족 받아먹었다는 건 함정. 그리고 정작 자기가 최고 실세가 된 뒤로는 연산군의 기생들을 자기가 많이 차지해 첩으로 삼고 아예 별실까지 지어 같이 살았다는 것도 함정

그리고 연산군이 신하들의 아내들과 추문이 있었다는 기록도 나중에 중종 시대에 가선 카더라 통신으로 판명이 난다. 중종 12년(1517년) 7월 20일 예조에서 "이 사람들은 연산군 때에 궁중에 출입하면서 추행(醜行)이 있었습니다. 모두 사특하고 음란한 사람들이니 대궐 안에 출입해서는 안 됩니다. 멀리 외방으로 찬축해서 척속(戚屬)을 영영 끊어 버리시고 그 남편들인 윤순·남천군도 모두 어리석고 비루한 자들이어서 부도덕한 여자와 그대로 살고 있으니, 아울러 자격을 박탈하여 조정에 끼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주청한 적이 있다.

특히 작첩(爵牒)[55]을 빼앗았다 다시 돌려줬다는 기록과 '성 밖으로 내쫓았다'는 말이 나중에 나오는 걸로 보아 실제 제재가 있긴 있었던 거 같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4개월 가까이 지난 뒤인 11월 4일 중종이 직접 이 추문을 카더라로 규정하며 선처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중종은 "문성정(文城正) 이상(李湘)이 자기 어머니의 일을 얘기한 걸 보니 과연 억울한 데가 없진 않다. 이 부인 뿐 아니라, 그와 비슷한 네 사람이 연산군과 추행한 일이 있다고는 하나 그게 누가 직접 본 일이었던가? 전파된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화기(和氣)를 상하여 재변을 가져올 수 있다. 성 밖으로 내치기는 하였으나 어찌 틀림없는 일이라 해서 그랬겠는가?"라며 그들을 처벌한 일을 "당초에 잘 분별하지 못한 것"이라며 실책을 인정하기도 했다. 중종 12년 11월 4일 병자 2번째 기사 마치 연산군과 장녹수의 범행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다 지켜본 듯한 사관의 서술과는 정반대의 양상이다.

그리고 중종 15년(1520년) 5월 11일자 기사를 보면 '이들이 연산군과 음탕한 짓을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 여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일'이라는 이유로 이 부인들이 선처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특히 박숭질이라는 인물의 아내 정씨는 아예 당시 기록에 "정씨 등은 연산군 때에 궁금(군주가 사는 궁궐)에 드나들어 자못 추문이 있었고, 정씨가 더욱 심하였는데"라고 적혀 있을 정도여서 대간들이 이후에도 아예 거의 콕 찝다시피 하며 끈질기게 작첩을 다시 뺏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도 중종 역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뜬소문이다"라는 이유로 끈질기게 허락해주지 않았다는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한다. 나중에는 남곤도 "그 일은 확실히 알 수 없다"면서 중종의 편을 드는 장면도 나온다. *

여담으로, 남천군 이쟁의 아내가 아들과 남편의 탄원으로 명예회복을 하는 과정에서 연산군의 성적 취향에 대하여 승지가 흥미로운 언급을 하는 부분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이야깃거리'에 조금 더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2.5. 중종반정. 폭군의 몰락

숙청할 대상이 전부 숙청되어 더 이상 숙청할 대상이 없어진 연산군은, 급기야 어느 정도는 자신의 향락을 말리던 박원종과 서자 출신으로 연산군을 배신할 이유가 없었던 유자광에게까지 이유 없는 짜증과 협박을 가했고, 토사구팽의 위험을 느낀 두 사람과 주위 인물들이 반정을 모의하기에 이른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당시, 무오사화와는 달리 무자비한 연좌제를 적용하여 많은 무고한 이들을 죽였다. 그 결과 박원종이 문제가 아니라, 박원종과 가까웠던 사람들이거나 박원종에게 명함이라도 전한 사람들에게는 앉아서 죽느냐, 서서 살 길을 찾느냐의 선택 외에는 없었다.

다만, 공포정치를 그만둘 수 없었던 연산군은 점차 일이 터졌을 때 주동자는 강하게 처벌하고 단순 가담자는 매우 가벼운 처벌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주동자는 죽은 사람으로 해버리고 나머지는 빠져나가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 결국 당시 대신들은 그때 이후로 일이 터졌을 때, "전 단순 가담자일 뿐이고, 주동자는 (이미 사화로 인해 희생당한) 그 사람입니다!!"라고 발뺌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연산군도 '모든 일의 주동자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니 이게 말이되느냐'는 식으로 한번 지적은 했으나, 자신이 의도한 바여서 그런지 언급만 하고 넘기는 분위기였다. 박원종에 대해서도 몇 차례 말로 꾸짖었을 뿐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은 전제군주에 준하는 권력을 누리며 공포정치를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왕의 마음이 돌변할지는 모르는 일이었고, 박원종 등이 위협을 느낄 이유는 충분했다.

게다가 민심이 매우 좋지 못했던 것도 문제였다. 당시 백성들은 비록 신하들처럼 무고하게 끌려나가 잔인하게 죽거나 무덤이 파헤쳐져 뼈가 부숴지는 일은 당하지 않았으나, 각종 진상품 등을 대느라 허덕이고 있었고 금표 제도 등으로 민심이 크게 흉흉한 상황이었다. 즉, 누가 일어서든 백성들은 손쉽게 거기에 동조할듯한 분위기였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연산군의 측근이었던 박원종과 주변 신하들은 '반정 공신'이 아니라 '폭군에게 빌붙어먹던 일족들'이 되어 처형당할 판이었다. 연산군의 몰락이 시간문제라고 본 신하들은 연산군을 등지고 선수를 치기로 한다.

유자광의 경우, 무오사화김종직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로 임사홍의 아들이 옥사한 후, 임사홍이 의도적으로 유자광을 배척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도 이유가 되었다. 여진족 토벌과 이시애의 난 진압 등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유자광과 고위급 무관인 박원종의 반정 합류는 반정 성공에 큰 힘이 되었다. 이후, 성희안[56], 박원종, 유순정, 신윤무, 유자광 등이 조선 왕조 최초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왕위에 올렸다.

일반적으로 조야(朝野)는 중종반정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으나, 그래도 반발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당장 성종 대부터 조정의 고관을 역임하고 중종반정의 공신 중의 하나였고, 당시 '조선 제일의 학식을 갖춘 이'라 칭해지면서 사림 / 훈구 가리지 않고 존경받던 채수는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저술했는데, 여기서는 중종반정을 가열차게 비판하고 있다. 때문에 채수는 탄핵당해 말년에 목이 날아갈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중종반정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연산군을 옹호하는 여론이 많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산군은 이미 그 당시에도 조야를 막론하고 폭군이라는 평이 대세였다. 중종반정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은, 연산군 본인에 대한 동정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힘으로 군왕을 폐하는 반정 자체에 대한 반발이었다. 《설공찬전》을 통해 조선 사회에 핵폭탄을 날린 채수만 해도, 연산군을 동정했다기보다는 성종의 유신(遺臣)으로서 연산군이 폐위당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강했다고 보고 있다.

왕(王)에서 군(君)으로 강등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57] 유배를 가서 몇 달 만에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사망 당시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어 독살설[58]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화병으로 죽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야말로 절대 왕권으로 흥청망청 놀고 먹으면서 제멋대로 즐기던 양반이, 한순간에 몰락하고 초라한 유배 생활을 해야 하는 본인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병을 얻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종반정 후 연산군의 어린 자식들도 대부분 사사되거나 비참한 미래를 맞이해야 했다. 이 사실이 연산군에게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었다면 그에 대한 정신적 충격 또한 사망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한편 반정 세력은 명나라에 보내는 조서에 사실대로 적지 않고 "연산군이 병으로 동생 중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희대의 사기를 펼쳤다. 그 직후 연산군이 급사했기에 독살설이 나돈 것이다. 가끔씩 명나라 사신들이 "연산군에게 문안을 드리고 싶다"고 요청하여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히는 일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연산군이 사람 기척만 들려도 발작을 해서 도무지 뵐 수 없다"고 사기를 쳤다. 조선 조정의 설명을 곧이 곧대로 믿은 명나라나, 끝까지 속인 조선 조정 모두 흠좀무. 다만, 하다못해 조선에 오가는 상인 몇명한테만 알아보고 오라고 시켜도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정도로 조선 팔도 백성들에겐 그렇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가 알고도 모른척 해준거라는 주장도 있다.

중종은 끝까지 연산군이 살아있다고 하기로 했는지, 연산군이 세상을 떠난 지 장장 30년이나 지난 중종 30년에도, "사신이 오면 '연산군이 지금은 창덕궁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기록이 나온다. 연산군이 쫓겨난 것은 그렇다치고 죽고난 다음에는 죽었다고 통보를 하는 것이 옳은데 하필 연산군이 교동으로 간지 얼마 안되어 금방 죽어버리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 실록에도 이를 지적하는 내용이 있다.

일단 중국의 실록인 명사(明史)엔 이렇게 적혀 있다.
정덕(正德) 2년 융(㦕)이 세자 황(𩔇)이 어린 나이로 죽은 것을[59] 몹시 슬퍼하다가 병을 얻었으므로 국사를 아우인 이역(李懌)에게 넘겨주겠다고 주청해 왔고, 그 나라 사람들 역시 이역(懌, 중종의 이름)을 왕으로 봉하여 주기를 주청해 왔다.

예부에서 이를 의논하여 역에게 국사만을 맡게 하고, 융이 졸하기를 기다렸다가 국왕으로 봉해주기로 하였다. 앞서 배신(陪臣)[60] 노공필(盧公弼) 등이 조공하기 위해 수도(경사 / 京師)에 와서 역을 봉해주기를 거듭 주청하였었는데 조정의 의논으로 윤허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12월에 융의 대비(母妃)가 "역은 나이도 들었고 현명하니 중임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주하였다.

이에 예부에서, “융은 고질병(痼疾)으로 왕위를 사퇴하였고, 역은 친동생으로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이미 명백한 사실이니, 우애를 지키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의 모든 신민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들의 청원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황제는 이에 융의 선위를 윤허하고, 내관을 파견하여 국왕 책봉의 칙명과 아울러 그 비 윤씨(장경왕후)의 고명을 내렸다.
명사》 권320, 열전제208 外國一 朝鮮
파일:연산군묘.jpg
연산군의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폐위된 군주라서, 능의 형식이 아니라 그냥 조촐한 묘로 되어있다. 살아서는 최강의 권력을 누렸지만, 죽어서는 가장 초라한 묘에 안장된 셈이다. 자세한 사항은 연산군묘 문서를 참조.

조선 왕조 최초로 폭군으로 전락하여 폐위된 임금이었기 때문에, 재위를 했던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묘 신위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모셔지지 않았다. 결국 광해군과 함께, 종묘 신위 명단에서 제외되어 종묘에도 모셔지지 못한 두 명 뿐인 임금으로 남았다.

폐위되면서 왕자 시절 군호로 격하된 광해군과 달리, 연산군은 원자 – 세자의 정통을 밟아 왕위에 오른 경우이므로, 폐위 이전까지는 연산이라는 호칭 자체가 없었고, 폐위된 이후에야 연산군으로 봉해진다. 간혹 사극에서 폐위되기도 전에 연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고증 오류이다.

2.6. 가족사

2.6.1. 아내 신씨와의 관계

아내 폐비 신씨신수근의 여동생으로 후덕하고 엄정하기로 유명하였고, 남편의 폭주를 막아보려고 여러 번 간언하지만 실패했다. 그래도 조강지처인지 연산군은 그녀를 내치지도 않았고, 그녀의 후덕함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기도 했다. 또한 신하들에게 왕인 자신을 높일 때는 반드시 중전 또한 같이 높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 #

게다가 신씨는 서슬 퍼런 갑자사화 때 연산군을 거스르고도 뒤탈이 없었던 거의 유일무이한 인물이기도 했다. 연산군이 손에 검을 들고 자순대비에게로 찾아가 얼른 밖으로 나오라며 협박을 하자 신씨가 울면서 연산군을 막아섰는데, 놀랍게도 그 연산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검을 칼집에 꽂고 자순대비의 거처를 떠나버려 자순대비가 화를 면했다고 한다.

중종반정 후 연산군과 신씨는 유배될 때 각각 다른 곳에서 보내져 지내게 되었고 끝내 두 번 다시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이 역질[61]로 죽자 교동수직장[62] 김양필, 군관 구세장은 이 사실을 중종에게 보고하면서, "죽을 때 다른 특별한 말은 없었고, 그냥 중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만 남겼습니다"라고 말했다. * 어떻게 보면 나름대로 인간적인 유언이다. 그런데 신씨 또한 폐출되면서 연산군과 함께 가게 해달라면서 울며 매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연산군의 무덤은 처음에는 강화도에 있었지만, 부인 신씨가 간청하여 몇 년 뒤 오늘의 위치로 이장했고, 신씨 역시 사망한 후 연산군의 옆에 묻히게 되었으니, 결국 유언은 이루어진 셈이다. 장례는 왕의 지위가 취소되었으므로 왕자(대군)의 예로 치러졌다. 이러한 신씨의 정성이 정말로 연산군을 아내로서 사랑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신씨가 답답할 정도로 착했던 것인지는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신씨를 아낀 대목이 부분부분 등장한다. 신씨가 왕대비와 선릉에 친제[63]하러 갔다고 연산군이 교외나 제천정에 나가 직접 맞이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 * 신씨가 친잠례를 했다는 이유로 교서를 반포한 적도 있다.*

다른 기록에는 자기가 보기에 신씨는 너무 어질고 덕이 많은 사람인데 자기가 말하지 않으면 남들이 모른다고 안타까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신씨의 어진 덕을 알리기 위해 옥책을 내리겠다며 옥책문에 들어갈 어질고 아름다운 내용을 조목조목 밝히며 명하는가 하면 *, 그 다음 날에 바로 옥책을 내린다는 전교를 내렸다. *

며칠 뒤에는 옥책을 직접 내리고 싶은데 이미 즉위한 중전에게 내리는 예법이 없어 절차를 신하와 의논했었다. 그러면서 내외명부를 모조리 불러 보게 하려다가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까였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 아예 중전의 덕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국고가 텅텅 비었을 때인데다, 옥책 내린지 한 달 정도밖에 안 지났을 때라고 *

2.6.2. 자녀

또, 연산군은 기록으로만 살펴보면 적지 않은 후궁을 두었던 데다 섹스 중독 기질로 인해 다산으로 유명한 태종 이방원이나 친아버지인 성종 이혈에 맞먹을 정도로 많은 자식을 보았을 거 같은데 이 두 사람에 비하면 연산군의 자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연산군은 유일한 정실 부인이었던 신씨와의 사이에서 (요절한 자식을 포함하여) 7명 정도의 자식을 얻었다고 하며, 연산군의 후궁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역사 책마다 다른 편이라 단언을 내릴 순 없지만, 가장 많은 경우를 가정하면 약 20명 가량인데 그 20명의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연산군이 신씨 한 명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보다 겨우 1~2명 많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연산군의 후궁들 중 연산군의 아이를 가진 후궁은 별로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이 38년 동안 살면서 총 28명의 자식을 보았는데, 이 중 3명만 의 정실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이었고, 나머지 25명은 모두 후궁들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는 점과 대조적인 대목이기도 한데, 장녹수에게 빠져 조강지처인 신씨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거 같은 기존의 이미지와 비교하면 의외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검열삭제를 안 하기로 유명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종이었던 장녹수는 당시 30대였고 유부녀였으나, 엄청난 동안과 애교로 연산군을 녹여서 가지고 놀았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의 후궁 노릇을 하면서 권세를 누리다가 중종반정 이후 처형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총애를 받았다면서도 의외로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아이는 영수옹주 한 명 또는 아들도 있었다고는 하는데 단명했던 걸로 전해진다.

연산군의 아들은 태어나자 마자 세상을 뜬 장남과 이 죽은 아이의 부모인 연산군과 신씨는 당시 지금 나이로 고3이었다고 순서로는 둘째이지만 형이 태어나자 마자 죽은 바람에 한때 세자 자리에 올랐던 폐세자 이황, 창녕대군 이성, 양평군 이인, 이영수, 이인수가 있고, 딸은 휘신공주와 요절한 적녀, 정식책봉되지 않은 옹주가 3명 있었다고 한다.

아들인 이인수가 한자 표기는 다른 두 명으로 나타나는데, 이에 관하여 의견이 갈린다. 잘못 기록된 한 명으로 보면 6남 2녀, 한글 표기가 같은 두 명으로 보면 7남 2녀다.

폐세자 이황을 포함한 연산군의 아들 3명은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 반정 공신들에 의해 사약을 받았다. 반정 당시 세자 이황은 10살이었는데, 학구열이 높아서, 마치 할아버지 성종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야사에 따르면 중전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64]박원종으로부터 반정에 참여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임금은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까 기대를 걸어보자”며 참여하지 않아 결국 역적으로 몰려 제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작 10살짜리의 어린애가 어떻게 성장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고[65], 이황 본인 또한 어린애라서 그런지 철이 없는 편이었는데, 중종반정 다음날 은둔지에서 먹는 식사에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꿩 고기가 빠져있자, 상궁에게 "꿩 고기는 어딨느냐?"며 반찬 투정을 하기도 했다. 덕분에 궁녀들이 "불쌍하신 분… 앞으론 피죽도 못 드실 텐데…"라고 말하다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그랬던 폐세자 이황이 그나마 연산군의 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창녕대군과 양평군은 각각 겨우 5살과 9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연산군 폐위 이후 몇 달 만에 사사되었다. 연산군의 막장 포스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반정 공신들의 조치 역시 엄연한 불법이다. 조선의 법도는 설령 역적의 자손이라 해도 16세 미만의 경우는 사형을 금하고, 노비로 만드는 것이 최고형이었다.

중종도 어린 조카들을 죽이라는 반정 공신들의 요구에, 처음에는 "어린 애들이 무슨 죽일 죄를 지었으며 장차 위협이 될 가능성도 낮고 인정상으로도 못할 짓이다"라는 이유로 거부했지만, 요구가 계속되자[66] 결국 모두 죽이고 말았다. 그나마 중종은 폐세자 이황의 장례나 제대로 치러주라고 명령했지만, 이 또한 묵살당했다.[67] 이때 중종실록 기록을 보면, 즉위 초기 중종이 얼마나 무력한 임금이었는지 제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일 때문인지 중종은 신하들에게는 아수라가 따로없는 자였다.[68]

그런데 양평군 이인의 이름은 중종 8년에 다시 등장하는데 '만손'이라는 이름의 10대 소년이 스스로 양평군을 자처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남학동에서 성장하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자신의 종인 '보동'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아이를 대신 내어 놓고 자신을 보자기로 덮어 다른 곳으로 빼돌린 후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평군을 어릴 적부터 키웠던 '이손'이라는 인물이 증인으로 나타나면서 만손의 사건은 자작극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손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양평군의 신체적인 특징과 만손의 특징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만손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만손은 처형되었다.

시집간 딸들은 출가외인으로 간주, 손대지 않았다. 서인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어차피 공주는 출가외인인지라 신분에 큰 변화는 없었고, 게다가 삼불거(三不去)중 하나로 부인을 내쫒아도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 내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69]

큰 딸 휘신공주는 구문경에게 시집가서 아들 구엄을 낳았는데, 구엄이 연산군을 시봉(侍奉)했고, 지금도 구엄의 후손들이 연산군의 묘를 돌보고 있다.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 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구엄이 사망한 후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는데, 이동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 되는 이필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인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

생모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둘째 딸 옹주는 신거흥에게 시집가서 4남 4녀를 낳았다.

다른 딸 2명 역시 역시 생모가 알려지지 않은 후궁 소생들이었는데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일찍 죽었다.

한편 연산군의 후궁들은 처형된 장녹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신들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2.7. 가계

  • 자녀
성종 폐비 윤씨
연산군 (제10대)
부인 4명
자녀 4남 2녀
폐비 신씨 숙의 이씨 장녹수 (미상)
폐세자 이황 양평군 이인 돈수
창녕 대군
휘신공주

3. 이야깃거리

  • 반정 공신들이 반정 명분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들 중 일부는 날조되었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를 대표적으로 다루는 도서로 '연산군을 위한 변명'과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이라는 책도 있다.[70] 더욱이 반정 공신들 대부분은 연산군의 체제에서 이득을 누린 관료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아까 서술하였듯 박원종이 있다. 태종실록에서 제1차 왕자의 난정도전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인 것처럼 서술한 점에서 알 수 있듯 역사는 승자가 기록한다는 점을 보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주장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연산군이 막장 테크를 탄 것은 사실이다.

    비슷하게 정치적 다툼으로 아버지를 잃었지만 성군이 된 정조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자세히 따지고 보면 둘의 상황은 상당히 다르다.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정조는 연산군보다 나이가 많았고, 영조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립서비스를 하며[71]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의 정당성에 대해 여러 차례 훈계를 했다. 반면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해서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도, 어디까지나 대신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구실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정조 역시 자신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아버지의 죽음에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인물들은 연산군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숙청하기도 했다.
  • 어린이용 위인전이나 역사 만화에서는 사치스러운 폭군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같은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인조 때 이덕형[72]의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의하면 이덕형이 100살이 된 노인[73]을 만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노인은 어린 시절 한양에 갔다가 연산군을 보았다고 한다. 그 노인의 회상에 의하면, "얼굴이 희고 마른 체형에 키가 컸으며, 눈에서는 붉은 빛이 돌았다"고 한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었는지, 실록에는 전라도 부안의 한 백성이, "우리 왕은 허리가 가늘어서 저 모양 저 꼴이다"란 식의 말을 한 게 들통나 잡혀간 이야기도 있다.
  • 외모가 어머니 폐비 윤씨를 많이 닮아, 조선 왕실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우람한 체형이 아닌 왕이 나왔다는 묘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이전의 조선의 국왕들은 대체로 체구가 우람한 편이었다고 한다. 요절한 단종은 제외하고라도, 이성계이방원, 심지어 재위 기간이 짧았기에 병약한 이미지로 생각되곤 하는 문종도 실제로는 풍채가 당당하였다고 한다.
    이성계 어진만 봐도 전장을 누비던 장군 출신이라 그런지 미화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어깨가 떡 벌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당시 신하들에게 "왕의 풍채가 없고 여자 같다"는 뒷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대놓고 했다간 참수 다만 키는 아버지인 성종을 닮아 컸다고 하며[74] 성격은 선조들을 닮아서 무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몸이 허약한 편이라 눈병을 자주 앓았고, 얼굴에 종기가 있어 떨어지지 않았으며 잔병치레도 심했다고 한다. 다만 경연 빠지려고 일부러 아픈 척한 적도 많았다. 상술했듯, 연산군 뿐만 아니라 조선의 국왕들 대부분은 경연에 나가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갖은 핑계를 대서 안 나가려고 하긴 했다
  • 한편 심각한 치통을 앓았다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이러한 치통이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됐다. 보기
  • 위에서도 말했듯, 예술에 재능이 있었기에 직접 지은 시도 많이 남아 있으며[75], 춤도 잘 췄는데 특히 처용무가 주특기였다. 궁중에서 처용의 분장까지 하고 춤을 추었을 정도였으며, 말을 타고 마상에서 처용무를 추는 묘기를 부린 기록도 남아 있다. 또한 연기력도 뛰어나서 직접 죽은 사람이 통곡하는 모습을 연기하면, 주변의 흥청들이 모두 따라 울어 연회장이 순식간에 눈물 바다가 될 정도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군주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취미 활동을 잘하기 전에 정치를 잘해야 했다는 것이다. 취미를 갖고 있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본업에 충실하면서 틈틈히 짬을 내 취미 생활을 했어야 옳았다.
  • 연산군 대에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다. 이는 훗날 동아시아 생산량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치며 훗날 세계사조차 바꾼다(!) 조선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 상당한 미식가로, 귀한 식재료를 전국 팔도에서 쥐어짜내 공수하는 걸로도 모자라, 심지어 중국에서 수입하여 먹기까지 했다. 가령 실록을 보면 중국에 가는 사신들에게 중국의 귀한 과일인 여지용안을 구해오게 한 (연산 11년 4월 6일 신유 1번째기사) 기록도 있다. 이 탓에 후대 왕들은 뭐 맛있는 것만 먹으려고 하면, 신하들에게 '연산이다! 연산이 했던 짓이다!' 하고 탄핵받았다.
  • 임해군이 왕이 되면 이런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가 있다. 실제로 임해군의 성격이나 행적을 보면 이렇게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 연산군 집권 초중반기는 실존 인물인 홍길동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후 홍길동전 등 홍길동이 '의적'이란 이미지를 얻게 된 것에는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도 작용했다는 추측이 있다. 다만, 홍길동이 활동하다가 잡혔을 때까지 연산군은 아직 그럭저럭 정치를 잘 하고 있을 시기였다.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0년 5월 12일자 기사를 보면 코끼리 발을 사들이라고 연산군이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미식가 기질을 볼 때 정말 먹으려고 했는지, 아니면 약재로 사용하려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 '섹스 중독' 문단에 한 번 짚고 넘어가긴 했지만 연산군과 추문이 있었다고 기록된 여러 종친이나 신하들의 부인 중에 남천군 이쟁의 아내도 있었다. 그러나 중종 정권이 출범하고 중종이 반정 의 그늘로부터 벗어난지 꽤 시간이 지난 후 남천군 부부의 아들인 문성정(文城正) 이상(李湘)이 나중에 중종에게 그 추문은 사실이 아니라며 탄원을 하였다.
    이에 사헌부는 "이 일은 밝히기 어려우며 시끄러이 전파된 지 이미 오래므로 쉽게 직첩(職牒)을 줄 수 없으니, 조정과 의논하여 처리해야 마땅합니다"라는 의견을 중종에게 올렸고 중종은 조정에 이 주제로 회의를 해서 결과를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때 이상은 승지에게 "우리 어머니는 몸이 매우 비대하고 나이도 늙었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승지는 이상이 자리를 뜨자 "폐조(연산군)가 간통하기 좋아한 사람은 거의 비대하였다더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맥상 '비대하다'라는 말은 말 그대로 '뚱뚱하다'라는 뜻으로 보이는데... 중종실록 39권, 중종 15년 4월 12일 기사 3번째 기사

4.연산군일기

조선 왕조 건국 이래 최초로 반정으로 축출되어 왕권을 상실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에, 광해군과 함께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행적 기록을 담은 실록호칭도 실록이 아닌 일기로 격하되었다. 그래서 연산군과 광해군의 행적 기록은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실록이 아닌 일기로 부른다.[76]

5. 사극 및 출판물

희빈 장씨, 이순신, 사도세자 등과 더불어 잊을만하면 재탕, 삼탕해주는 사극주인공.

진짜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최종보스급으로 비중이 높은 경우도 많다. 1980년대 이전에도 미디어 믹스가 자주 이루어진 인물이었는데, 연산군의 유난한 막장 행보가 군사 독재 정권의 잔혹한 행위를 좀 더 나아보이게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다소 견강부회적인 분석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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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왕과 나》의 정태우, 아랫줄 왼쪽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 오른쪽은 《왕과 비》의 안재모)

역대 연산군 배우들. 출연 당시 나이는 만나이.

보다시피 이대근과 정진영 등을 빼고는 2,30대 배우가 대부분 담당하였으나[78] 이상하게 연산군은 40대배우가 많이 담당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이는 한국영화 역대 최고의 흥행작중 하나인 왕의 남자의 정진영의 잔상인듯 하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로 주로 30대 중후반 배우들이 연산군을 많이 연기하게 된다. 워낙 나대면서 이 명 저 명 다 내려서 그만큼 대사량이 많고 감정선도 오락가락하는 인물이라 연기력이 왠만큼 절륜하지 않는 이상 연기하기 굉장히 힘든 배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기경력이 비교적 적고 발연기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한 아이돌들을 비롯한 20대 배우들보다는 더 절륜하고 풍부한 30,40대 배우들이 더 많이 맡게 되는 듯 하다.

신상옥이 감독한 《연산군》과 그 속편 《폭군연산》은 당대에 보기 힘든 해석으로 유명하다. 포인트는 연산군이 모든 잘못을 깨닫고 정치를 원상태로 돌리려고 하는데… 다음 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한국 영화로서는 정말 이례적으로 상영 시간이 3시간을 넘긴다.

그러나 신상옥 본인은 《연산군》과 《폭군연산》을 흑역사로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연산군》은 신정 프로에 맞춰서 서둘러 제작 하느라 제작 기간이 불과 2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고, 《폭군연산》 역시 흥행업자들의 독촉으로 서둘러 만드느라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북한에 있을 때 신상옥 감독은 서울에 있던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 《연산군》과 《폭군연산》의 오리지널 네가를 소각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오리지널 네가를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후에 신상옥 감독은 귀국한 후에 한국영상 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연산군》과 《폭군연산》의 오리지널 네가를 반출해 가서는 각각 14분, 54분씩 삭제 재편집을 해서 가져다 놓았다. 심지어 《폭군연산》은 반출해간 네가가 유일본 이었던지라, 《폭군연산》의 사라진 54분은 이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신봉승이 자주 다루는 시대가 세조 ~ 연산군까지이다.

인수대비의 일생의 마침표를 찍는 비극으로 그리고 있는데, 실제로 《조선왕조 5백년》 최고의 인기작인 《설중매》의 후반부가 바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임영규 – 연산군, 이미숙장녹수, 고두심인수대비인데, 원작 소설은 대단히 잔인하고 검열삭제가 난무하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검열삭제 묘사가 제대로 나오고, 귀인 엄씨귀인 정씨를 처단하고 시체를 훼손하는 이야기 역시, 아들들에게 직접 때려 죽이게 하고, 완전히 나체로 만들어 현장에서 찢어버리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에 비해 드라마판은 가급적 수위를 낮추었다.

드라마적으로 해석하면, 출생의 비밀과 성격적 결함, 예술가적 기질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사, 그리고 최후의 파멸 등을 겸비한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많은 사극에서 당대 유명 남자 배우들이 연산군을 연기했는데, 그 중 유인촌, 유동근, 이민우의 포스가 절륜하다. 특히 유인촌은 연극인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햄릿 연기[79]칼리굴라의 연기를 그대로 보여준다.[80] 그 외에 대부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연기했는데, 현재까지 대중적인 연산군 연기의 최고봉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으로, 광기와 애정 갈구가 혼재된 연산군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해 냈다. 임영규의 경우에는 현실에서도 약간 그런 성격이란 말이 있다. 아래는 정진영의 씨네21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나는 이성이 발달한 사람이라 영화를 찍으면서 눈치를 본다.
달마야 놀자를 찍을 때는 스님들 눈치를 봤고
와일드 카드를 찍을 때는 형사들 눈치를 봤다.
황산벌김해 김씨 문중 눈치를 봤다.
그런데 연산군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더라.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었던 거다."
ㅡ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으로 열연한 배우 정진영, 《씨네21》 인터뷰 중에서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 《이》에서는 공길에 의해 남색사디즘에 눈을 뜨는 것으로 그려진다. 폭정보다는 장녹수와 공길 사이에서의 삼각 관계가 부각되는 게 특징.

한편 《왕과 비》에서 연산군을 맡았던 안재모의 연기도 이들에 못지않게 뛰어났다.

당시 연산군에 캐스팅 될 때만 하더라도, 전작 《용의 눈물》의 반듯하고 어진 세종대왕 (충녕) 이미지가 남아있던 터라, 미스 캐스팅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폭군 역을 절륜하게 소화하여 큰 호평을 얻었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과 최악의 폭군을, 그것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모두 연기한 셈. 특히 폐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지독한 냉대로 인해 점차 사이코패스 반항아가 되어 항상 할머니한테 엿 날릴 궁리를 주로 하며[81], 나중에 갑자사화 이후로는 서로 나 죽고 너 죽자 식으로 달려들며 대립한다. 마지막에 폐위되면서까지도 "할머니 소원대로 폐주가 되었습니다!"라고 광기를 부리면서 외쳐대는 것은 덤. 극 중 인수대비와 연산군의 치열한 대립은 워낙 살벌했던지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등골을 서늘게 만들 정도다. 덕분에 중반까지 부진하던 《왕과 비》가 연산군의 등장으로 시청률이 크게 상승하는 뒷심을 발휘하여 유종의 미를 거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안재모가 연기한 연산군의 경우, 자기복제가 심한[82] 정하연 작가 특성상 전작이었던 장녹수의 유동근이 연기했던 연산군과 겹치는 대사와 장면이 많았다. 자칫 어설프게 연기했다가는 유동근 복제판이 되었을수도 있었지만, 안재모의 절륜한 연기덕분에 이 둘의 연산군은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고, 덕분에 전혀 복제판으로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대하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출연했던 4명이 연산군 출신이다.
  • 태종(유동근) = 《장녹수》의 연산군 역
  • 양녕대군(이민우) = 《한명회》의 연산군 역
  • 충녕대군(세종, 안재모) = 《왕과 비》의 연산군 역
  • 방번(무안대군, 정태우) = 《왕과 나》의 연산군 역

과거에 단종을 3번이나 맡았던 정태우는 처음으로 연산군 역에 도전하여, 당시 막장가도를 달리던 《왕과 나》를 연기력으로 살려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왕과 나》 후반부는 '왕과 나'가 아니고 '연산군'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덧붙여 신상옥판 《연산군》과 같은 결말을 맞는다. 김처선이 죽은 후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다음날부터 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83]하는데, 그날 밤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반정군이 들이닥치자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며 몇몇 중신에게 "네가 왕좌에 앉으려 하느냐?"고 패기 넘치게 따진다. 그러나 반정군이 진성대군을 옹립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는 표정이 순식간에 누그러진다. 진성대군이라면 양위 받을 자격이 있다며, 순순히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다.[84] 또한 정현왕후 및 인수대비와의 관계도 다른 사극에서의 평면적인 적대관계가 아니라 상당히 입체적으로 나온다. 작중 연산군의 반발감도 단순한 증오가 아니라 왜 자신을 좀 더 아껴주지 않았냐는 애정 갈구에 더 가깝다. 친아들이 아닌데도 따뜻하게 대해주는 정현왕후에 대한 연산군의 심정은 복잡미묘하다. 연산군이 인수대왕대비전에 난입하여 패륜을 저질렀을 때만은 정현왕후가 참다 못해 대왕대비에게 사죄하라며 이를 듣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회초리를 들겠다고 단호히 충고했는데 이때 연산군이 심경을 털어놓는다. 술을 퍼마시며 반항적이던 눈빛이 갑자기 울먹이는 눈빛으로 변하고 "대비마마, 어찌 진즉 소자에게 이리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어찌 소자가 잘못하였을 때 질책하고 회초리를 쳐주지 않으셨사옵니까? 소자, 대비마마께오서 귀하게 키워주셨사오나, 친자식이 아니어서 회초리 한 번 맞아보지 못한 것이 더 한스러웠다는 것을 어찌 모르셨사옵니까? 소자는 진성대군이 참으로 부럽사옵니다." 이에 정현왕후도 차마 더 뭐라 하지는 못하고 연산군을 안쓰럽게 본다. 그리고 이 쪽은 실록의 기록과는 다르게 특이하게도 꼬꼬마 원자 시절부터 자신의 생모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생모가 사사되었다는 사실까지도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것.[85]

훗날 정태우MBC 놀러와에 출연해서 본래 사극 속 왕은 말 수가 없고 근엄해서 대사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인데, 연산군은 자신이 맡았던 배역 중 가장 말 수가 많았던 왕이라 그 만큼 대사량이 많아 연기하기 많이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본인은 이 연산군 연기를 통해 그동안 남아있던 단종 이미지를 벗을 수 있게 되어 연산군 배역에 애착이 많이 가는 듯.

이민우는 《한명회》 끝 부분에 잠깐 나와 비중은 적었지만, 한명회가 죽은 후 갑자사화를 벌여 부관참시를 하는 장면이 아주 강렬했다. 특히 을 두들기며 ‘닥치시오!’ 하고 외치는 장면은 인터넷이 발달한 현재라면 플짤감이다. 참고로, 링크된 영상에서 노사신이 앉아 있는 건 노사신이 갑자사화 이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는 고증오류다. 또한 극중에서 홍귀달이 폐비 윤씨의 신원에 반대하다 유배간 걸로 묘사되었지만, 홍귀달은 갑자사화 당시 경기도 관찰사 자리에 있었으며, 손녀를 입궐 시키라는 명을 거역한 죄로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교살 되었기 때문에, 이 역시 고증 오류다.

2015년 영화 간신에서는 김강우가 연산군 역을 맡았는데, 작정하고 19금 영화로 나온 만큼 예술가적이거나 깊은 효심이 있었다는 미화는 싹 걷어내고, 연산군 영상물 중에서 가장 포악하고 광기어린 연산군을 구현해냈다. 잔혹한 살육행각과 섹스 중독적 엽색행각[86], 격한 감수성과 합쳐진 광기, 한편으론 치세 초반에는 왕으로서 제법 제대로 통치했었다는 것이 납득될 통찰력도 보여준다. 덕분에 폭군으로서는 가장 실제 역사기록에 가까운 연산군 묘사로 꼽힌다. 이런 모습을 열연했던 덕분인지, 극장가에선 잔혹성과 선정성에 호불호가 갈려서 큰 재미는 못봤지만 2차 판권에서 대박을 쳤으며, 김강우의 연산군 연기 자체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2017년에는 연산군을 다룬 드라마가 2개나 방영되었는데 그중 MBC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김지석이 연산군 역을 맡아 "양반이든 천민이든 여자든 남자든 다 똑같은 인간이다. 유일하게 다른 이가 있다면, 하늘님의 자식인 왕 하나 뿐이다. 왕 외의 모든 이들은 왕의 종일 뿐이다." 라며 전제 왕권이라는 미망을 좆아 광기에 휩싸이는 연산군 역을 잘 연기했다. 해당 문서 참조. 김지석은 이 연기로 2017년 제10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와 MBC 연기대상에서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KBS 2TV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선 이동건이 연산군 역을 맡아 호연을 펼쳤다. 그런데 팬층 사이에서는 '이 드라마는 중종단경왕후 신씨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가 아니라 연산군을 미화하려고 만든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진 주인공은 연산군이다'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연산군의 비중이 크고, 가장 서사가 탄탄한 캐릭터로 그려져 있다.

잘못된 성격을 타고난 건 아니었지만, 어머니 폐비 윤씨 때문에 연산군을 왕위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아버지 성종이 죽기 직전 자신에게 '진성대군이 성인이 되거든 왕위를 양보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유언을 적은 비밀 유언장까지 만들어 어딘가에 감춰뒀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 '어머니가 폐비란 이유로 모든 걸 진성에게 빼앗기고 살았는데,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왕위까지 진성에게 양보하란 말이냐!'는 이유로 진성대군을 호시탐탐 의심하고 괴롭히다 끝내 진성대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는 설정이 붙었다. 그리고 연산군이 광기 어릴 정도로 권력을 추구했던 이유도 아버지의 그 비밀 유언장 때문에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왕권을 갖고자 했기 때문으로 나온다.

게다가 나중에는 주인공인 신채경을 두고 진성대군과 연적 관계로까지 얽히게 되는데, 연산군은 신채경의 고모부인데. 드라마를 보면 어째 채경이가 진성대군보다 연산군과 함께 있는 장면이 더 많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고

유배를 가던 도중 박원종 일파가 보낸 자객들의 습격을 받고 그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 끝내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임종 직전 자신을 보러 온 진성대군에게 사죄하면서 눈을 감으려던 찰나,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아버지의 환상을 보며 "드디어 아바 마마께서 내게 손을 내미셨다"는 유언을 남기고 절명한다.

한국 사극의 연산군 하면, 드라마 작가 정하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정하연 작가는 《장녹수》, 《왕과 비》, 《인수대비》 등의 집필을 맡아서, 연산군 시대를 다룬 드라마만 3개를 집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신동준 著, 지식산업사)에서 그에 대한 재조명을 추구했다지만, 실은 극단적인 옹호로 일관하고 역사학계의 연구는 거의 무시했다.(그래서 불쏘시개 목록에도 올랐다.)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김범 著, 글항아리)이 연산군의 면모를 아는 데에는 훨씬 낫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얼굴에 거의 항상 반창고를 붙이고 다닌다. 위에도 언급한바 있지만, 연산군은 얼굴에 자주 종기가 나는 등 잔병치례가 많은 편이었는데, 이걸 표현한 것이다. 나중에 8권(중종), 15권(경종, 영조), 18권(헌종, 철종), 20권(망국)에서 엑스트라로 나왔을 때도 빼먹지 않고 붙이고 나왔다. 이 책에서는 이 문서에 적혀있는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즉위 4년까지 군주로서 견실하게 나라 일을 한 모습을 재조명했지만, 후에 왕권 강화 한답시고 연이은 사화를 일으켜 엄청나게 비대해진 대간과 훈구 대신들을 찍어 누르고, 그 강해진 왕권으로 국가 업무에 대한 비전 없이, 그저 자기 맘대로 흥청망청 놀고먹고 백성들까지 괴롭힌 것을 비판하면서, 그저 폭군에 지나지 않았음을 피력하며, 그 후 조선에서 연산 같은 왕은 더 이상 나오지도, 나올 수도 없었다는 총평을 내리고 있다. 그야말로 반면교사가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준 인물. 선조, 인조, 고종 등과 함께 가장 통렬한 비판을 받은 군주들 중 한 명이다.

대체역사물로는 봉황의 비상, 이순신의 나라를 쓴 슈타인호프 작가가 명군이 되어보세!를 연재했다. 해당 문서 참고.

중종이 여성으로 치환되어 나오는 가상의 역사물 조선공주실록에서는 성종의 외사촌 형제인 한건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호적상) 이복여동생인 진성공주를 여자로서 사랑하고 있다.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계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
조선의 역대 국왕
9대 성종 이혈 10대 연산군 이륭 11대 중종 이역
조선의 역대 왕세자
예종 이황 연산군 이륭 이황


[1] 폐위되었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묘'로 불린다.[2] 《성종 실록》에는 11월 6일 밤 3경 5점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고, 《연산군일기 총서》에는 11월 7일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3] 《성종 실록》의 출생일 기록을 따른다면, 연산군은 자신의 생일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4] 성종은 윤비를 폐출할 때 원자 연산군도 같이 폐출할까 했지만 연산이 불쌍해서 차마 거기까지 가지 못했는데, 이것이 실수였다.[5] 다만 정종은 본인이 동생인 태종을 양아들 드립까지 치면서 세제가 아닌 세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양보한 이후에도 태종과 조선판 만우절(첫 눈이 내린 날)에 술내기 장난을 하는 등, 강제로 내몰린 다른 왕과는 차이가 있다. 저 장난이란 첫 눈을 담은 상자를 누가 먼저 하인으로 보내느냐로 한 턱 쏘기 내기를 한 것. 첫 눈 상자를 전하려 오는 상대방의 하인을 도착하기 전에 사로잡으면, 오히려 잡힌 쪽이 한 턱을 내야 했다.[6] 정종단종은 그래도 숙종 대에 가서 묘호를 받았다.[7] 실록을 보면 알겠지만, 연산군일기광해군일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잔인한 내용이 담겨 있다.[8] 다만 이는 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삼사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고, 연산군이 이 기회를 제대로 포착했었던 것이다. 그 뒤의 2라운드가 문제였지.[9] 한무제 때의 고사. 당시의 명신(名臣) 공광(孔光)은 조정의 일을 누설하지 않아서 휴가 중에 형제나 처자와 한담할 때에도 끝내 조정의 정사(政事)를 말하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공광에게 “온실성 (궁전) 중(溫室省中)의 나무는 다 무슨 나무인가?”라고 물었으나 공광이 그것조차 답하지 않고 다른 말로 돌렸다는 데서 나온 고사다.[10] 쉽게 말해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다 보면 제2의 연산군이 되어 폐위될 수 있다는 협박.[11] 왕이 되자마자 왕비 신씨폐비 신씨의 조카라는 이유로 강제로 폐비당했고, 연산군의 아들들을 죽이는 것도 반대했으나 신하들에게 거의 묵살당하는 등 중종은 즉위 초반에는 정말로 힘을 못 썼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반정의 주요 핵심 인물들이 주르르 자연사해 버리고 중종의 치세가 길어지면서 중종의 왕권은 차츰 강해진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도 중종 자신이 신하들의 눈치를 너무 보았고, 조광조김안로 등 특정 인물에게 힘을 몰아주었다가 제거해버리기를 반복하면서 정치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자세한 사항은 중종 문서 참고.[12] 왕들이 이런 것을 취미로 즐기려고 시도하면 신하들이 득달같이 "전하도 연산군이 되시려고 그러세요!?"라고 반발하고 나서니 불가능했다.[13]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이는 왕권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일단 왕으로서의 권한으로 일을 해보려고 하면 연산군을 사례로 들어 신하들이 공격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정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당했고, 그럴수록 신하들은 자신의 권한을 강화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떻게든 견제하려고 하면 "이건 연산군이나 했던 일입니다!"라고 반항하는데 뭐라 반박하기도 까다롭기 때문.[14] 사실 단종이 있었지만 단종은 당시 '노산군'이라 부르며 왕 취급을 못 받는 상황이었다. 복권되어 '단종'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숙종에 이르러서다. 재미있게도 숙종 또한 연산군 만큼이나 정통성이 확고해 그 기반으로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임금이었다.[15] 이는 바꿔 말하면 그만큼 후세대에 폭군으로서의 연산군의 이미지가 고착화 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듯 하다. 덤으로 사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슴이 의외로 힘 세고 사나운 동물이라 성인 남성도 쉽게 이기기 어렵다.[16] 여진족의 일파중 하나.[17] 할머니이자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왕대비, 작은할머니이자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계모인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18] 심지어 인수대왕대비를 위해서 불교식 의례를 시행한 적도 있었다.[19] 태종은 조선 왕조 역대 임금들 가운데 유일한 장원 급제를 한 유능한 왕이다. 젊을 적 고려의 과거에 급제했기 때문. 다시 말해 엘리트 인텔리 출신 왕이다. 실제로 그는 경연 중 일반 신료들도 모르던 비사를 예로 들어 모두를 데꿀멍시킨 일도 있다.[20] 이때 경연을 폐지시켜 버린 사유가 내가 나이 30 넘어서 배울만큼 배웠는데 뭔 놈의 공부냐라는 것이었다.[21] 다시 말해 경연은 오늘날로 말하면 왕의 개인 교습 시간이었다. 아울러 평가 기능까지 존재했으니 왕의 입장에선 나가고 싶지 않은 곳이긴 하다.[22] 다만 여기서 유인홍과 그 첩이 입을 맞추기 위해 언문 편지로 소통하기도 했는데, 이는 후일 연산군이 능상, 즉 왕을 능멸하는 행위라는 구실을 붙여서 언문 사용을 금지하는 명을 내리는 구실 중 하나로 작용한다.[23] 세종대왕 때 유명해졌는데, 장래가 유망하지만 나이가 어리거나 젊은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 등에서 학문을 닦게 해주는 것.[24] 단 이때까지는 양민 여자를 마구 잡아들이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25] 각각 훈구와 사림이라 하나, 훈구 공신 가문 내에서도 대간인 이들이 같은 대신에 있는 훈구 세력을 탄핵한 걸 보면, 훈구와 사림보단 대간과 대신의 싸움이 사화라고 보는 게 옳다. 물론 양쪽 세력의 주축에 특정 파벌이 있긴 했다.[26] 이극돈은 훈구파가 아니고, 유자광은 훈구파에 끼워넣을 수는 있는데 훈구파 하면 생각할 '기존 정치 권력'이라는 이미지와는 안드로메다 차이였다.[27] 따지고 보면 이쪽이 훨씬 더 공포스럽다. 직접적인 폭력이 아닌 정신적인 말살에 가까우니까.[28] 다만, 자신의 어머니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은 것은 몰랐을 것이다.[29] 왕의 식사가 얼마나 중요하냐면, 중대 단위의 인력이 투입될 정도였다. 게다가 왕이 굶어서 건강이라도 나빠지면... 유교적으로 보면 왕의 심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 신하들로서는 당연한 도리이자 충성의 척도였고, 현실적으로 접근해도 최고 권력자가 앓아 누으면 국정이 마비되거나 혼란이 올 수 있었다. 더군다나 시위 형식의 단식 투쟁일 경우 신하들에게 '늬들이 이러이러하니까 내가 나라 앞날이 걱정돼서 밥이 안 넘어가서 굶는 거임'하는 식의 명분을 직,간접적으로 알리므로, 원인 제공자로 지목당한 신하(들)는 역적으로 몰리기 싫다면 무조건 엎드리며 제발 식사 좀 하시라고 빌 수 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고 맞이한 첫날 아침 식사가 물에 만 밥 한 그릇이 전부임이 기록되어 있는데, 왕이 식사를 거르거나 간소하게 먹은 걸 괜히 기록한 게 아니다. 이성계는 딱히 시위 목적으로 저렇게 먹은 게 아닌데도 그렇다.[30] 단순한 계모가 아니다. 어머니가 정실인 적자 기준으로 계모는 아버지가 들인 새 정실 부인을 말하는 것이지만 서모는 첩을 말한다. 즉 아버지의 정실이건 첩이건 간에 일단은 어머니로서의 예를 다해야 하는 것. 이걸 굳이 지적하는 이유는 문제의 두 귀인들은 일단 부왕 성종의 첩이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패륜이 아니라는 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31] 연산군 일기 52권(10년 3월 20일)에 의하면, 안양군은 사방이 어두워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매질했고, 봉안군은 어떻게 했는지 눈치를 채고, 차마 매질하지 못했다고 한다.[32] 원문 王捽㤚、㦀髮、至仁粹大妃寢殿、開戶辱之曰: “此大妃愛孫、所進觴可一嘗。” 督㤚進爵、大妃不得已許之。王又曰: “愛孫其無賜乎?” 大妃驚、遽取布二匹賜之。王曰: “大妃何殺我母?” 多有不遜之辭。 後令內需司取嚴、鄭屍、裂而醢之、散棄山野。[33] 이런 아이러니로 인한 정치적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박원종 등 공신들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반정 공신의 명단을 크게 확대한 것이었다. 그 결과, 연산군 시절 연산군과 짝짜꿍했던 관료들 중 상당수가 반정 공신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논란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는 기묘사화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4] 연산군 즉위 때 박씨는 이미 40대였다.[35] 《연산군 일기》 12년 8월 15일 기사 - 왕이 후원에서 나인들을 거느리고 종일 희롱하고 놀며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이날은 바로 폐비 윤씨의 기일이었다. 왕은 또 발가벗고 교합하기를 즐겨, 비록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도 피하지 않았다.[3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이 가설을 택했다.[37] 백부의 부인이니 연산군에게는 어머니뻘이다.[38] 허나 연산군의 왕권이 약했다기 보다는 성종이 밀어준 대간의 세력이 비정상적으로 컸다. 연산군의 왕권은 폐비의 자식이긴 해도 정통성은 확실했기에 후대의 왕들 보다 훨씬 강했다.[39] 실록을 보면, 대간에게 시달린 건 대신들도 있었기에, 재상, 육조 판서 등은 연산군의 숙청에 동참했다. 사실 성종 말 - 연산군 초 막나가는 대간의 행태는 정도를 한참 벗어났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여서, 연산군이 대간만 적당히 제압하고 즉위 초기의 모습을 견지했다면 현재의 평가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 무오사화만 해도 김종직과 김일손이 세조 이후의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직접적으로 부정한 사건이라, 이 사화만큼은 폭정이라고 하기 애매하다. 오히려 당시 왕실의 정통성을 카더라 통신까지 실록에 적어가며 부정하고 나선 김일손을 생각해 보면 되려 왕실의 입장에서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무오사화 이후에 연산군이 대간들과 사림들을 적당히 눌러놓은 선에서 만족하고 즉위 초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면 17세기 유럽의 절대 군주 정도로 평가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40] 이때 미녀들 중에서 임신부도 섞여 들어왔는데, 그걸 보고 하는 짓이 정말 막장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녀들이 아기를 낳으면, 당장 아기를 빼앗아서 몰래 생매장시켰다고 전해진다.[41] 이 과정에서 자식이 있는 유부녀도 강제로 뽑았다는 말도 있다. 비록 드라마이긴 하지만, 대장금에서 장금의 스승인 의녀 장덕의 어머니도 강제로 차출되어 끌려갔다는 설정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실록에서 이와 같은 기록이 보인다. # # 앞 기사는 생원 황윤현의 첩을 빼앗아 후궁으로 삼았는데, 그 첩이 윤현을 그리워하자 처벌하려 했다는 기사이며, 뒷 기사에는 자색이 빼어난 여인들은 천하의 공물이니 곧 왕의 소유이므로 사사로이 취하는 것을 금했다는 연산군의 전교가 기록되어 있다.[42] 3.1 운동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43] 야사에는, 연산의 분노에도 눈물로 간언을 계속하는 김처선에게, 연산은 활을 가져오게 하여, 손수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가 꽤나 유명하다. 근데 이건 사실 확실하진 않아서 다른 이야기도 많다. 자세한 건 김처선 문서 참고.[44] 중국 5대10국시대의 정치인 풍도(馮道)의 설시(舌詩)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설시의 내용은 풍도 문서 참조.[45] 이것을 보면 연산군이 신하들을 얼마나 막 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46]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부인. 그러니까 연산군의 큰어머니이다. 중종반정을 이끈 핵심 인물인 박원종의 누나이기도 하다.[47] 쉽게 말해 궁에 들이기 전에 세자를 보살피게하다가, 세자가 커서 경복궁에서 살게 되자 세자를 돌보라는 핑계로 궁에 들여왔다는 소리다.[48] 야사에서는 강간당하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고 되어 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이다. 그 재취 부인 박씨를 세자를 보호한다고 핑계대고 궁중에 불러들여 강제로 더럽히고는 그 관복을 특별히 높이고, 은으로 도장을 만들어 비빈의 계급으로 대우하게 하고 또 사은하게 하니, 박씨가 부끄러워서 스스로 죽었다. ㅡ 《동각잡기》 본조선원보록 2"[49]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이런 상황이 조용히 숨죽이던 신하들까지 등돌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패널인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고, 참석하면 아내가 왕에게 범해지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결과적으로 숨죽이고 있던 신하들도 서서히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당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내 아내가 모욕을 당하면 참을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자고로 치정살인의 상당수가 오쟁이진 남편들의 복수혈극이다. 일단 눈 뒤집어진 남편들에게는 사형이고 뭐고 먹힐 턱이 없다. 게다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 이전까지 아내를 빼앗긴 남자가 복수를 포기하는 것은 사회적 매장은 기본에 바보 취급이 옵션이었으니, 사형당하고 영웅될지 비참하게 살아갈지 양자택일인 셈이다. 실제로 연산군 폐출에 가담한 이들은 그나마 명예는 찾지만, 그렇지 않은 오쟁이 남편들은 중종 즉위 이후에도 경멸당했다.[50] 사실 연산군의 평소 행실을 볼 때, 강간일 가능성이 높다.[51] 자칭 요리 평론가라는 어느 일뽕은 한국은 장어를 약재로만 썼고 식용으로 안 쓰다가 일본의 영향으로 식재료 활용을 했다는 주장을 우겼는데, 연산군이 장어백숙을 먹었다는 기록으로 인해 단번에 반박이 가능했다.[52] 다만, 조선 시대 국왕은 현대의 성관계처럼 성욕 해결이 아닌 왕손을 남기기 위한 과정이었기 때문에 사극에서 나오는 것처럼 결코 왕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즉, 연산군이 단순히 갑자기 성욕이 돈다고 해서 바로 중궁전에 가거나 궁녀를 부를 수가 없다는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하의 부인들을 겁탈하고 행차 도중 지나가는 여성을 불러다가 간음한 것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정상적인 국왕이라면 상상도 못할 강간과 난행을 일삼았던 연산군의 경우 원할 때 바로 궁녀를 부르는 것 따위는 별 문제 없었을 것이다. 신하의 부인을 겁탈하는 것도 뭐라 못하고 있는데, 어떤 신하가 고작 아무때나 궁녀를 부르는 것 정도로 반대할까?[53] 더 심각한 건, 원래 궁녀들은 왕의 승은을 입는 경우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처녀로 늙어 죽어야 했다. 그러나 희대의 폭군이신 연산군께서는, 그냥 예쁘면 유부녀건 과부이건 닥치는 대로 뽑아버렸다.[54] 평민이나 양반의 딸들은 대부분 관리직이나 고위직을 맡았다. 대체로 부모들은 자신들의 딸을 궁녀로 보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왕이라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55] 고려-조선시대 때 종친이나 나라에 공을 세워 봉작(封爵)을 받은 공신들 또는 왕비 및 후궁이나 문무백관의 아내들에게 작위를 부여한 첩지를 말함.[56] 연산군에게 간언을 했다가 파면 당해서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57] 상세한 위치는 기록에 없으며, 현재 신골, 연산골, 읍내리 세 곳이 연산군의 유배지로 추정되고 있다. 연산군 뿐 아니라 희종, 임해군, 영창대군, 광해군 등 많은 왕족들이 교동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58] 연산군 사망 원인이 말라리아라고 하는데, 연산군이 사망한 건 늦가을이다. 일반적으로 말라리아는 더울 때 걸리는 병이다. 다만 강화도는 기후가 온화하고 모기가 많기로 유명한 동네라 가을에 걸릴 수도 있는 것이고, 잠복 후 뒤늦게 발병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도 전방지역인 강화, 파주, 연천지역 거주민들과 군복무장병들은 공식적으로는연중 내내 헌혈에 제약이 있다.[59] 그런데 세자를 죽인 것은 반정 공신들이다 참 구실을 대도 그런 구실을[60] 신하의 신하라는 뜻. 당시 공식적으로는 조선 국왕은 명 황제의 신하이므로, 조선의 신하는 명 입장에서는 명 황제 신하의 신하, 즉 배신이다.[61] 천연두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 전염병.[62] 喬桐守直將. '수직'(直將)이라는 말은 건물이나 물건 등을 맡아서 지킨다는 뜻이고 교동은 연산군이 유배된 곳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將'은 우두머리란 뜻인 걸 보면 교동으로 유배된 연산군을 감시하고 유배지를 지키는 사람들의 지휘관이었던 것 같다.[63] 친히 제사를 지낸다는 뜻.[64] 연산군의 측근이자 처남인 신수근 역시, 갈수록 막장이 되어가는 연산군에게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물론 야사지만, 측근이 이렇게 진절머리를 낼 정도라면, 쫓겨나기 전의 연산군이 얼마나 답이 없는 막장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65] 연산군 또한 어릴 때는 나름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66] 삼정승을 비롯하여 반정 공신이자 당시 조정의 1품 고관들이 모두 중종 앞으로 몰려가, 사실상 강제로 연산군의 아들들을 죽이라는 전교를 받아냈다.[67] 중종이 "결국 니들 말대로 폐세자 이황을 사사시켰는데, 장례나 제대로 치러주지?" 라고 하자, 신하들의 대답이 "서인(庶人)으로 죽은 죄인에게 장례는 무슨. 관곽이나 갖춰서 묻어 주는 것만으로도 후한 조치거든요?" 라는 식이었다. 신하들이 왕의 의견을 대놓고 쌩깐 셈이다.[68] 중종은 백성들에게는 너그러운 왕이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연산군의 자식들을 동정했을 수도 있다.[69] 사실 조선시대 아내가 실질적으로 쫓겨날 수 있는 사유는 직접적인 간통, 시부모에 대한 악질적인 불효,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 등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다만 여성 인권이 조선 후기 시궁창으로 변하면서, 적당한 돈만 쥐어 주고 합의(라고 쓰고 강제라고 읽는) 이혼당하는 일이 급증하게 된다.[70] '연산군 그 허상과 실상'은 절판되어 구하기가 어렵다.[71] 영조사도세자를 살해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그 과정이 우발적인 것도 아니다. 안 그러고서야 7일이나 가둬놓고 사망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기가 무섭게 시호를 내렸겠나?[72] '오성과 한음'의 이덕형과는 무관한 동명이인. 다만 죽창 이덕형이 한음 이덕형보다 5살 어린 동시대 인물이긴 하다. 여담으로 인조반정 공신이며 당시로는 80살까지 사는 등 굉장히 장수했다.[73] 정확히는 97세의 노인. 《죽창한화》는 이덕형이 젊어서부터 1645년에 졸하기까지 짬짬이 쓴 글이다. 연산군 내용이 실린 부분은 이덕형이 임진왜란 다음 해인 계사년에 피난지에서 만난 노인의 증언을 수록한 것이다. 연산군을 본 노인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도성에서 연산군이 행차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며 그 일을 토대로 이덕형에게 얘기해주었다.[74] 폐비 윤씨성종에게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키가 크십니까?"라고 묻자, 성종이 "나보다 더 큰 사람도 있소"라며, 당시 조정 대신 중 장신 축에 들었던 허종이라는 신하를 불러 비교해보았다고 한다. 실록을 포함한 기록에는 허종이 기골이 장대하다라는 표현만 있고 구체적인 키는 묘사되지 않는데, 조선 후기 인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11척 5촌(十一尺五寸)으로 나온다. 당시 척으로 환산해도 2m가 족히 넘는다. 현재도 농구 선수로 입신하기에 딱 좋을 법한 큰 키인데 평균 키가 더 작은 당시 조선의 기준으로는 아마 초대형 거인 수준이었을 것이다.[75] 인생여초로 회합불다시(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 인생은 풀잎 위에 맺힌 이슬과도 같아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 연산군이 폐위 직전에 쓴 시라고 하는데 상당한 수준의 시조다.[76] 폭군은 아니지만, 계유정난으로 축출된 단종 역시 이전에는 실록이 아닌 《노산군일기》로 격하되어 불렸다가, 숙종이 추존(追尊)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에서 《단종실록》으로 승격되었다. 사실상 실록이 아닌 일기라는 호칭을 가진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 뿐이다.[77] 역대 최연소 성인 연산군이었지만 고증에 가장 부합하는 나이었으며 연기력도 손색없이 해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출연해 성인 역을 수행해 그해 연기대상에서 아역상을 수상한다.[78] 본래 연산군은 19살에 즉위해서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물인만큼, 20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연령고증에 부합하는 편이다.[79] 연극에서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비밀을 안 이후에, 햄릿의 아버지 유령과 같은 폐비의 유령 때문에 고뇌한다. 완전히 햄릿 짝퉁 연산군...[80] 이 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 김진아와 공연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산일기》다. 유인촌 최고의 걸작이다.[81] 오죽하면 최측근인 임사홍김자원 마저도 인수대비는 오래 살지 못할테니 조금만 기다리자고 말릴 정도. 하지만 연산군 본인은 할머니가 죽기 전에 모든 복수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인수대비는 죽기 전에 못볼 꼴을 다보면서 죽게된다. 심지어 죽고나서도 빈전에 올리는 술에다가 침까지 내뱉는 건 덤.[82] 정하연 작가는 훗날 2011년 JTBC에서 방영했던 인수대비를 집필할 때도 왕과 비 대사를 그대로 복붙해버린다. 극 중 연산군은 진태현이 연기했는데, 안타깝게도 진태현이 연기했던 연산군은 안재모가 연기했던 연산군의 어설픈 복제판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시청자들로부터 안재모의 연기와 비교당하면서 혹평을 얻기도 했다.[83] 장녹수는 그 결심이 오래 가지는 못할 거라고 봤다.[84] 작중에서 연산군의 폭정을 부추기는 사이코패스 간신배 김자원의 협잡으로 '폭군을 몰아내고 안양군을 옹립하자'는 벽보가 나돌자 "진성대군도 아니고, 안양군 따위를 옹립한다고?"라며 연산군이 분노했던 장면이 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진성대군을 내심 인정하는 모습이 보이긴 했다.[85] 실제로 폐비 윤씨가 사사당하고 나서 성종은 폐비의 폐자도 꺼내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며 그 때문에 연산군은 한동안 계모인 정현왕후를 자신의 친모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갓 태어났을 때도 오랫동안 피접을 나가 봉보부인에 의해 길러졌기 때문에 아예 생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있었다.[86] 영화 결말부에서 중종반정때 도망가던 중 임숭재의 함정으로 돼지우리에 빠졌는데, 임숭재마저 자신을 배신했다는 절망과 광기가 뒤섞인채로 기어코 암퇘지와 수간을 해버린다(...). 이 모습을 본 유지광은 "마지막 성은은 돼지가 입었구만?"하고 질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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