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21:01:22

아침 이슬

[[김민기(가수)|{{{#ffffff 김민기}}}]]의 작품 목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김민기 1집 (1971年)
친구 아하 누가 그렇게 바람과 나
저 부는 바람 꽃 피우는 아이
아침 이슬 그날 종이연
눈길(연주곡) 세노야* 4월**
김민기 전집 1 (1993年)
가을편지 내 나라 내 겨레 두리번 거린다
꽃 피우는 아이 아침 이슬(연주곡) 아침 이슬
잃어버린 말 아름다운 사람 그날
친구 잘가오 Morgentau
김민기 전집 2 (1993年)
새벽길 나비
혼혈아(종이연) 그사이 고향 가는 길
철망 앞에서 눈산 차돌 이내몸
아무도 아무데도 바다 눈길(연주곡)
김민기 전집 3 (1993年)
상록수 기지촌 가뭄
식구생각 서울로 가는 길 늙은 군인의 노래
강변에서 주여, 이제는 여기에 소금땀 흘리흘리
밤뱃놀이
김민기 전집 4 (1993年)
봉우리 아하 누가 그렇게 백구
작은 연못(연주곡) 날개만 있다면 작은 연못
인형 고무줄 놀이 천리길
아침(연주곡)
이외에 나무위키에 등재된 김민기의 작품들(주로 희곡계열)
지하철 1호선 공장의 불빛 이 세상 어딘가에
소리굿 아구
*갈색 재킷 버전에서 꽃 피우는 아이가 빠지고 들어간 곡. }}}

1. 개요2. 가사3. 해석
3.1. 역사적 측면에서3.2. 북한의 금지곡3.3. 음악적 측면에서
4. Morgentau5. 관련 문서

1. 개요

김민기의 버전
양희은의 버전
1971년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대표적인 민중가요. 김민기의 1971년 1집 앨범에 수록되었으며, 같은 해 동일한 곡을 김민기가 편곡하여 양희은이 부른 아침 이슬이 대중들에게 더 유명하다. 김민기의 버전은 피아노, 양희은의 버전은 기타 반주가 깔린다.

2. 가사

긴 밤 지새우고[1]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3. 해석

3.1. 역사적 측면에서

이 노래는 1973년 정부가 건전가요로 지정했으나, 1975년 금지곡이 되었다. 당시 약 2천여 곡의 노래들을 사회 통념 위반, 근로 풍토 저하 따위의 황당한 이유로 금지했는데, 아침 이슬만큼은 그런 근거조차도 없이 금지된 유일한 노래이다! 이후 세간에 알려진 아침 이슬의 금지곡 선정 이유는 '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른다'는 가사가 불순하다라는 이유이다. 왜 하필이면, '불길하게 묘지 위에 떠오르냐?' 그것 때문에 금지곡으로 지정당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음악평론가 강헌의 증언에 의하면, 이 구절은 김민기가 어느 날 술을 마시고 공동묘지 근처에서 자다가 아침에 햇빛을 받으면서 깨어났을 때의 경험을 그저 가사로 옮긴 것일 뿐이었다고 한다.

해석에 따라 '묘지는 당시 민주 항쟁으로 죽어간 이들을 뜻하고 그 위에 떠오르는 태양은 일출의 이미지, 즉 새로운 아침, 새 시대, 새 희망을 뜻한다'거나, 보다 과격하게는 '위대한 인민 지도자(태양)가 혁명파 인민들의 시체(묘지)들을 넘고 공산주의 락원(붉게)을 세운다(떠오른다)'고[2] 굳이 억지스럽게 말을 엮을 수는 있겠으나, 이것은 그야말로 군사 독재 시대 특유의 레드 컴플렉스에 찌든 억지나 다름없다. 그럼 태양이 붉게 타오르지 퍼렇게 공중제비라도 도나

보통 사형수들의 형이 집행되었을 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표현한다. 때문에 "아침 이슬"이라는 노래 제목과 가사에서 사용되는 예가 극히 드문 "묘지"라는 단어를 쓴 점으로 볼 때, 금지곡 선정위원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불순한 의도로 곡을 만들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가사가 추상적이고 비유적이지만 억압과 해방의 뉘앙스가 느껴지고, 선율도 거룩하고 엄숙하기에 폭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유신 집권층에서는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본능적으로 거부감과 공포를 느껴 별다른 이유도 제시하지 못하고 금지곡으로 지정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작곡 작사가 김민기가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밝히길, 원래 아침 이슬이라는 곡을 구상할 때에는 영감이 오지 않아 막혀있었다고 한다. 그것의 원래 가사는 '그의 시련일지라'였는데,[3] 이것을 어찌어찌 '나의 시련일지라'로 바꾸어 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바꾸어보니 훨씬 더 감정의 이입이 잘 되고, 당시의 시대상을 마주한 '나'의 기분을 잘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가사가 잘 써지기 시작하고, 아침 이슬이 탄생했다.

실제로 1971년 김민기 앨범의 원곡은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듯한 창법으로 노래되며, 이는 같은 해 양희은이 노래한 직설적이고 곧은 발성의 아침 이슬과 사뭇 다르다. 이 앨범에 참여한 정성조 쿼텟이 클래식 풍의 편곡을 선보였기 때문에 보다 세련된 면이 있다.[4]

따라서 '붉은 태양이 김일성의 공산주의 혁명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우익측의 아전인수식 해석에 가깝고, 굳이 좌익적인 해석을 붙인다면 '독재의 탄압 아래 신음하는 민중이 언젠가는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해석이 타당하다. 실제로 집회에 참석한 군중들 사이에서 아침 이슬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정말 뭔가 처연하고 장중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기분이 든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신촌 로터리 부근에 운집한 100만 명의 군중들이 유일하게 다 같이 아는 노래가 애국가와 아침 이슬밖에 없었다고 할만큼 대중적인 민중가요가 되었다. 당시 군중들의 연령대가 10대 중고등학생부터 40대 장년층까지 다양했으니, 다 같이 아는 노래가 드물었을 수밖에 없다. 신촌 로터리부터 시청 앞까지 늘어선 100만명의 군중이 동시에 아침 이슬을 합창할 수는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돌림노래가 되었는데, 그 광경이 진히 장관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2016년 11월 26일 박근혜 즉각 퇴진 5차 범국민행동광화문 광장에 운집한 100만 인파가 양희은과 함께 아침 이슬을 다시 부르기도 했다.양희은의 노래 영상 떼창이 표현된 영상

이수만이 아침 이슬을 불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을 뻔한 적도 있다.

3.2. 북한의 금지곡

1990년대 중반 북한 정권이 악용을 위해 의도적으로 수입하였으나, (정권 입장에서) 역효과가 나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6년부터 금지곡이 되었다.
금지곡 지정 이전에는 청년층, 학생들 사이에서 전국적으로 널리 불렸다. 탈북자 출신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북한에서 군 생활 당시 훈련받을 때도 이 노래를 합창했다고 밝힌 바 있다. 남한 노래라는 사실은 남한에 오고 나서야 알았다고 하며, 북한에서는 대남선전용으로 제작한 노래라고 알려졌다고 한다. 실제로 대남선전용 음악단인 칠보산음악단에서 부른 적도 있다.
2010년대 초에는 남한 노래 중에서도 아침 이슬을 부르다 당국에 걸리면 강제노동형에 처해진다고 하며, 2020년 반동사상문화배격법 시행 이후에는 철저히 탄압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청년, 학생에게 인기 있는 다른 노래는 상등병의 편지가 있다.

3.3. 음악적 측면에서

모든 민중가요들이 마찬가지긴 하지만, 아침 이슬 역시 가사의 의미와 시대적 배경을 제외하고 봐도 음악적으로 매우 훌륭한 명곡이다. 김민기의 중후한 중저음으로 풀어내는 담담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서글프고 숙연한 아침 이슬과, 양희은의 힘찬 목소리로 풀어내는 가슴이 뜨겁게 달궈지는 힘찬 아침 이슬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고, 수많은 후배 가수들과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로 풀어낸 아침 이슬까지, 누가 불러도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아오르며,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야말로 한국 가요사에 길이길이 남을 걸작 가요.

가사의 해석을 떠나 작곡적인 측면에서는 혁명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유행을 노리는 전형적인 노래 구조인 A-A'-B-A 구조[5]에서 벗어나 A-A'-B-C 라는 새로운 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C장조임에도 불구하고 4도인 F음(파)으로 불안정하게 시작하고, 클라이맥스(B) 이후에 메인 테마(A)로 돌아오지 않고 또 다른 새로운 테마(C)로 진전하며 끝나버린다.[6] 이는 메인 테마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킴으로써 앨범 판매를 부추기는 A-A-B-A의 구조가 아니었기에, 1971년 처음 이 곡이 김민기의 앨범에 발표되었을 때에는 비명도 못 지르고 3천 장의 앨범도 판매하지 못한 채 시장에서 묻혔다.

하지만 이 메인 테마로 돌아오지 않는 파격적인 구조는 광야로 떠나는 가사와 절묘하게 맞물려서 당시 한국 운동권들의 주요 이데올로기였던 혁명적 낭만주의가 가장 수용하기 쉬운 민중가요로써의 아침 이슬을 탄생시켰으며, 여기에는 양희은의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가 큰 요소로 작용하였다. 아침 이슬이 운동권 집회에서 널리 불려지고 유신 정부의 금지곡 지정이 겹치면서 대표적인 민중 가요에 등극했다. 시대를 막론, 반주에 맞춰 비슷한 감정과 고동을 느끼며 떼창하는 모습은 대한민국의 명예 국가(國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참고로 양희은 버전 '아침 이슬'의 멜로디 라인은 시각 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12현 기타로, 코드 라인은 원곡자 김민기가 클래식 기타로 쳤다.

4. Morgentau


Die Nacht war schlaflos lang
Mein Herz schlägt schwer und bang
Bedeckt mit lauter Sorgen
Wie frischer Morgentau
Wie Perlen groß und licht
in Ketten dicht an dicht
Ich schleppe mich den Berg hinauf
Zu lächeln gelingt mir noch nicht.

Wie so mild das Morgenrot
Dort über'm Friedhof ruht
Die Gewalt der Mittagsglut
wird mein Wegbegleiter sein
Ich recke mich und seh
ins weite Land hinab
Ich streife alle Sorgen ab,
erhebe mich und geh.
밤은 잠 못 들도록 길고
나의 심장은 긴장에 찬 무거운 박동을 낸다
걱정에 쌓인 채
마치 신선한 아침 이슬처럼
진주처럼 크고 빛나는
서로 가까이 엮여
난 스스로를 산으로 끌고 간다
아직 난 웃을 수 없다

이 새벽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공동묘지 위에서 쉬며
폭력적인 한낮의 더위는
나의 동반자가 되리라
나는 몸을 뻗어 바라본다
저 아래 드넓은 땅을
모든 걱정 떨치고
일어나 향한다

2004년 <Past life of 김민기>에 수록된 독일어 버전 아침 이슬. 김민기의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원래 독일의 원작을 번안한 작품인데, 한국에서 이것이 초히트를 치고 기어이 2000회까지 공연하게 됐다.[7] 이를 본 독일 원작의 공연팀인 독일 그립스 극장의 단원들이 김민기의 지하철 1호선 2000회째 공연을 축하하기 위해 직접 내한하여 건네준 선물이다. 원작자 폴커 리트비히가 직접 아침 이슬의 가사를 독어로 번역했다고. 원작 공연팀이 내한해서 직접 불렀을 때의 영상이 남아있는데, 옆에서 쭈그려 앉아 겸연쩍은듯 얼굴을 가린 김민기의 모습이 압권.

5. 관련 문서



[1] 북한에서는 지새우[2] 이도 애매한 해석인 것이, 묘지는 부정적인 시어이고, 태양이 떠올라서 한낮이 되었을 때 시련이 찾아오므로 이 가사에서는 태양 역시 부정적인 시어이다.[3] 여기서 '그'는 예수 또는 석가로 대유되는 성인 또는 초월적 존재를 말한다고 한다.[4] 음악평론가 강헌의 평론에 따르면, 대중들에게 아침 이슬을 선동적인 분위기의 민중가요로써 각인시킨 것은 이미자로 대표되는 1960년대 기존 여성 보컬의 우수에 젖은 목소리에서 과감히 탈피해 비브라토를 극도로 절제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노래한 양희은의 아침 이슬이라고 한다.[5] 1970년대의 트로트에서부터 오늘날 한국 발라드에도 주로 사용되는 구조인 메인 테마(A)-변형 테마(A')-클라이맥스(B)-메인 테마(A)의 구조이다.[6] 심지어 2절도 클라이맥스(B)부터 반복하지, 결코 메인 테마(A)로 돌아오지 않는다. 안드로메다행[7] 결국 2008년에 4000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 최다 공연 뮤지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