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생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이수만(194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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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1년 | |
이름 | 이수만 | |
분야 | 가수 | |
은관문화훈장(2등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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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762ff><colcolor=#fff> A2O 엔터테인먼트 설립자 이수만 李秀滿 | Lee Soo-man | |
출생 | 1952년 6월 18일 ([age(1952-06-18)]세) |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출장소[1] | |
등록기준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
거주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2] |
본관 | 전주 이씨[3]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A형 |
가족 | 큰형 이수완, 작은형 이수영[4] |
배우자 김은진(2014년 사별)[5] 장남 이현규(1994년생), 차남 이명규(1996년생)[6] 조카 써니 | |
학력 | 서울청운국민학교 (졸업) 경복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46회 / 졸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공학[7] / 학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 (컴퓨터공학 / 석사[8]) |
병역 | 병역면제[9] |
종교 | 개신교 |
경력 | 現 A2O엔터테인먼트 대표 (2024년 5월 ~ 현재) 現 블루밍그레이스 대표 (2023년 3월 ~ 현재) 現 리폴룩스 대표 (2019년 ~ 현재) 現 컬쳐테크놀로지그룹아시아 대표 (2015년 ~ 현재) 現 라이크기획 대표 (1997년 ~ 현재) 現 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부 초빙석학교수 |
前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 (1995년 ~ 2023년 2월) 前 SM엔터테인먼트 이사 (1995년 ~ 2010년)[10] 前 SM기획[11] 대표 (1989년 ~ 1994년) | |
데뷔 | 1972년 4월과 5월 1집 'Oasis Folk Festival Vol.1' (데뷔일로부터 [dday(1972-07-10)]일, [age(1972-07-10)]주년) |
별명 | COWMAN[12], 수만리, 수만 아버지, 수만 쌤, 수만 할배[13], 큐티 수만, 수만 공주님, 앙큼 수만이, 꽃보다 수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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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출신 프로듀서, 기업인, 교수.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의 창업주이자 초대 前 총괄 프로듀서이며, 현재는 A2O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이자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2. 생애
오늘날엔 SM엔터테인먼트 설립자로 유명하지만, 이수만과 동년배이거나 이수만보다 나이가 많은 노년층에선 그가 1970년대부터 가수 겸 MC로도 활약했기 때문에 방송인으로도 친숙하다.[14] 방송인 시절엔 이문세, 유열과 같이 이른바 '마삼트리오'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수만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어는 가수도 MC도 경영자도 아닌 프로듀서일 것이다. 실제 1990년대부터 2020년대 aespa까지 승승장구했던 SM 소속 아이돌 가수들 상당수는 이수만 프로듀싱의 결과물이다.SM엔터테인먼트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K-POP 장르를 개척한 장본인으로[15] 이수만이 SM 소속 1세대 인기 아이돌들을 키워내면서 대중음악의 트렌드를 선도하자 다른 기획사들도 이를 모방해 여러 인기 아이돌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DSP엔터테인먼트 사장 이호연이 H.O.T.의 성공을 보고 강성훈, 은지원의 듀엣 그룹에 급하게 고지용, 이재진, 김재덕, 장수원 4명을 추가 영입해 젝스키스를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걸그룹도 S.E.S.가 청순 컨셉으로 데뷔와 동시에 신드롬을 일으키자, 김준희를 중심으로 제작 예정이었던 힙합 걸그룹을 청순 컨셉으로 전면 수정해 핑클을 만든 일화도 있다.
사족으로, 아이돌 1~2세대 시절까지만 해도[16] DSP는 'SM 아이돌에 +1' 전략으로 각각 젝스키스(vs H.O.T.), 핑클(vs S.E.S.), 클릭비(vs 신화)를 배출하며 라이벌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 둘의 라이벌 관계는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됐고,[17] 이호연 사장이 2010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DSP는 크게 쇠퇴했다. 이후 이수만의 라이벌은 2000년대부터 두각을 나타낸 JYP엔터테인먼트의 박진영과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이 차지하며, 2010년대 후반 방시혁의 하이브 등장 이전까진 본격적인 3대 대형 기획사 체제가 완성된다.
오늘날 케이팝의 해외시장을 개척한 선구자이다. 1997년 자신의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해외 진출을 선언하고, 1998년 H.O.T.의 베스트 앨범을 한국 가수 최초로 중국에서 정식 발매했다. S.E.S.는 군 문제가 있는 H.O.T.보다 더 본격적인 해외 활동을 시도했다. 재미교포[18] 출신의 유진, 재일교포 출신의 슈, 중국어를 담당할 예정이었지만 학업을 사유로 탈퇴한 소이 등의 구성으로 한국 그룹 최초로 제작 당시부터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다국적 멤버를 구성하는 시도를 S.E.S.를 통해서 실현했다. 허나 소이의 탈퇴로 중국 진출은 못했고[19] 일본어가 가능한 슈 덕분에 일본 진출을 하였고, 예상치 못한 대만 내 인기로 해외 개척을 했다. 이후 일본 진출을 염두에 둔 보아나 중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중국인 멤버까지 도입했던 SUPER JUNIOR 등의 아이돌은 이수만이 기획하기 전, 과거 한국에는 볼 수 없는 형태의 가수들이었다. 여러모로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지금의 철저한 기획형 아이돌 전성기를 이끄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친 프로듀서라 할 수 있다.
2021년부터 이수만은 자신의 SM 지분을 매각하기 위해 여러 회사들과 협상을 이어갔다. 이수만은 70대의 고령으로 상속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20] 하지만 2년 가량 협상만 했을 뿐 주식을 팔지는 않아서 이수만 자신의 재산 가치를 알아보는데 다른 회사들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비난도 있었다.[21]
2023년 2월, 자신의 처이질(妻姨姪)이 포함된 당시 SM 경영진의 반격으로 경영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HYBE에 자신의 SM 주식을 급하게 매각하면서[22] 최대주주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회사 경영권도 자신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하이브 대신 SM 경영진과 손을 잡은 카카오가 차지하게 되면서 자신이 설립하고 키워온 SM엔터테인먼트에서 불명예 퇴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SM에서 물러난 후에는 최측근 유영진과 함께 홍콩 공항에서 목격되기도 했고, SM 말년 시절 큰 관심을 보였던 나무심기 행보(이수만 나무심기 의욕 여전해, 몽골에 1억원 기부, SM 떠난 이수만, 나무 심기는 계속…100만 달러 펀드 조성)를 이어가는 등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블루밍그레이스'라는 개인 투자 회사를 설립하고 중국 드론 기업 '이항(EHang)', 비만 치료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하는 바이오회사 '프로젠'에 연이어 투자하며 뉴스에 오르고 있다.
2024년 5월 3일, 'A2O엔터테인먼트(A2OEntertainment)' 상표를 출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수만이 다시 K팝 프로듀싱에 복귀할 것인지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모아졌다.#
3. 가수 활동
1972년 밴드 '4월과 5월'의 멤버로 데뷔하였으나 건강 이상으로 중도 탈퇴하였다. # 경복고등학교(46회)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공학과[23]를 졸업했다.인디 시절에는 농생대 소속 동아리인 '샌드페블즈' 초창기 멤버로서 활동하는 등 정통 락을 기반으로 음악을 갈고 닦았다. 때문에 당시 세대에선 "이수만이 샌드페블즈 멤버였는데, 왜 대학가요제는 나가지 않았나?"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다만 이건 오해로, 1977년 첫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샌드페블즈는 기수로 6기였다. 이수만은 2기. 그리고 바로 윗선배(1기)가 김동만인데 이 사람의 아들이 지금 톡식의 김정우. 그리고, 박진영의 외숙부인 윤장배 전북대 농업생명과학대학 동물소재공학과 교수. 어쨌든 이수만은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MC를 맡은데 이어 1998년까지 총 8회로 이효리에 이은 최다 MC로 활약했다.
1978년 유신 정권 시절 밤무대에서 금지곡인 아침 이슬을 불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을 뻔한 적도 있었다. 애초에 이수만은 아침 이슬을 만든 김민기와 동아리 활동도 함께 한 서울대 후배이기도 해서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이끌던 학전이 폐관할 당시 1억원 이상을 쾌척하기도 했으며, 2024년 7월 김민기가 사망하자 발인식 하루 전인 23일 조문객 식사비용하라며 조의금으로 5000만원을 건네기도 했지만 유족 측이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며 받진 않았다.
1980년 발매된 하드록 밴드 '이수만과 365일' 1집. 이 앨범은 이수만이 직접 작사/작곡/보컬을 맡아 정통 록을 확실하게 시도했다. 생각보다 좋은 노래들이 상당수 수록되어 있지만 이수만의 보컬톤이 노래들이랑 좀 안 어울리기도 해서인지 상업적으로 큰 두각은 나타내지 못했다.
라디오 DJ를 하기도 했었는데, TBC의 비바 팝스(일레븐 팝스)를 제외하고는 MBC가 주 활동무대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진행을 맡기도 했고[24] 1980년대 후반에는 '젊음의 음악캠프'를 맡았으며 이는 '팝스 투나잇'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젊음의 음악캠프 이수만과 함께'가 된다. 어디서 많이 본 단어가 느껴졌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이수만의 뒤를 이어 배철수가 30여년간 계속 맡아온 그 프로그램의 전신이다.[25][26]
당시 MBC 라디오의 가수출신 DJ로 "별이 빛나는 밤에" 이문세, "젊음의 음악캠프" 유열과 함께 마상트리오(馬相 Trio)[27]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015년 12월 4일 응답하라 1988 9화에서 이문세가 이수만의 곡을 소개하면서 대놓고 「마상트리오」 인증을 했다. 참고로 이문세는 2015년에도 이수만, 유열과 가족동석 식사를 하는 등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앞의 두 사람만큼은 아니었지만, 이수만도 당시 꽤 인지도가 있는 가수였다. 그러나 점차 연예 활동에 한계를 느꼈고, 포크 음악/록 음악 가수로서 최정상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상실감과 당시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에 대한 실망감 등이 겁쳐 여러 요소가 작용한 가운데, 문득 해외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는 자유여행이 불가한 시절이라 유학 외엔 마땅한 방법이 없다보니 대학원 유학길을 모색, 연예 활동으로 벌어놓은 돈을 달러로 바꾸니 당시 돈으로 약 5만 달러가 나왔고, 부모님께 절반을 드리고 남은 2만 5,000달러를 학자금으로 가지고 1981년 미국에 간다.[28]
처음 유학을 갔을 당시만 해도 연예계보단 컴퓨터공학쪽을 공부하고 돌아와 교육자를 하겠다는 막연한 꿈을 품고 갔지만, 유학 와중 마침 그 시절 미국에서 방영되기 시작하던 MTV를 접하게 되고, 오디오 음악을 넘어 비주얼 음악이란 새로운 음악의 시대가 도래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MTV에서 나오는 틴에이져 아이돌들과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을 보며 '왜 한국에선 저렇게 외국에서 인기를 끌만한 가수를 만들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85년 귀국하여 다시 일을 하며 기획사 설립 자금을 모아, 1989년 설립한 것이 SM기획[29]이었다. 이수만 "미래 한류는 한중일 합작".
대한민국 최초로 테크노음악, 즉 오늘날에는 컴퓨터 음악인 MIDI로 불리는 프로듀싱 방식을 들여왔다. 이때부터 화려하고 아티스틱한 앨범 패키징을 선호했다.
본인부터 1989년 10집 뉴에이지 이후 아예 음악 활동을 끊었으니 현역 가수 활동은 더이상 미련은 없는 듯. 그래도 별이 빛나는 밤에 1만회 특집에서는 랩을 이문세와 같이 하기도 했다. 별밤 40주년 기념 특집방송에서 주철환 전 MBC PD(현 JTBC 콘텐츠본부장)와 샤이니가 같이 출연했을 때 기념삼아 틀어줬다. 별밤 홈페이지에 동영상으로 제공되니 그 현란한 래핑을 확인해보자.
또한, 이 시기 주스 따봉의 모델을 맡기도 했는데 30여년이 흘러 유튜브시대가 되자 당시의 CF가 발굴되면서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해당 영상을 보면 포르투갈 사람인지 브라질 사람인지 외국인들의 댓글이 많은데 남미의 K-POP 팬들이라면 이수만이 가수였다는 건 몰라도 SM엔터 사장이었다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다. 의외로 멕시코부터 아르헨티나까지 라틴아메리카의 젊은층은 K컬쳐에 대한 이해도가 꽤 높은 편이기도 하고.
4. 프로듀서
음악 활동을 접을 무렵 MC로 진출해 방송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이때부터 가수 현진영의 2집 제작을 총지휘하는 등 매니지먼트 사업 행보가 시작됐다. 이후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수많은 아이돌 그룹들을 배출하였고 자신이 제작한 아이돌 그룹을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국내 최고의 연예 기획사로 성장하게 된다.보아와 동방신기의 일본 현지화를 통해 대성공을 거두고 SUPER JUNIOR-M을 통해 한국 아이돌 그룹 최초로 중국 현지화를 시도했다. 정형화된 아이돌 구성을 굳히면서도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한 것도 큰 특징인데 샤이니와 f(x)의 경우 천편일률적인 아이돌 그룹과는 다르다는 게 그룹 콘셉트였고 대중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아이돌 그룹의 음악이 음악적으로 평가될 발판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또한 유튜브를 통한 해외 시장 공략으로 일찍이 눈을 돌린 것도 이수만과 SM이었는데 하술할 SM의 파리 콘서트 이후 국내 기획사들이 유튜브를 중요시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각종 음악방송도 순위 집계에 유튜브 점수를 반영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류 3단계론을 제시하였다. 한류 1단계는 H.O.T., S.E.S.를 시작으로 보아와 동방신기와 같은 한국 가수의 해외 시장 진출, 2단계는 SUPER JUNIOR, f(x)처럼 외국인 멤버를 그룹에 넣어 현지에서의 한류에 대한 반발을 최소화하고 한류를 이어가는 것이고 마지막 3단계는 철저한 현지 가수 육성 단계다. 현지 회사와의 합작을 통해 시장을 공략하고 현지 시장에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토대로 한류 1, 2단계 가수들까지 해외로 계속 진출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인데 전세계 현지화팀 데뷔 프로젝트인 NCT 프로젝트가 이에 해당한다. #1 #2
2000년대 당시만 해도 한류 3단계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이 주를 이루다가, 2010년대 초중반까진 한중 합작 컨텐트 제작사가 늘어나고 한국의 컨텐츠 제작자들이 중국으로 넘어가 현지 회사와 제작 초기부터 참여하는 등 이수만의 안목이 얼추 맞아들어 가기는 했다. 이수만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의 자본력을 이길 수 있는 회사와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30] 중국 시장이 자라나는 초기에 적극적으로 들어가 중국 컨텐츠 제작에 한국이 참여하는 식으로 수익을 내게 되면 한국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턴 이러한 판단이 완벽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드러났는데, 중국인 멤버를 가장 먼저, 그리고 본격적으로 채용한 SM의 경우 정작 중국인 멤버들은 한국에서의 활동을 그저 인지도 쌓는 발판으로만 이용하다가[31] 중국 본토로 넘어가 버리곤 했고,[32] 2010년대 이후 붉어진 홍콩 민주화 운동 같은 정치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중국 정부 편에 서는 일도 늘어났다. 사실 중국 본토로 가는건 중국인 멤버 입장에선 한국에서 그룹 활동을 하는 것보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혼자 활동하는 것이 수익 면에서 좋기 때문에 그룹에 대한 의리가 남아있거나[33] 한국에서 독보적 인기가 있는게 아니라면 한국에 굳이 남아있을 아니 애초에 영주권 취득한 게 아닌 딴에야 일거리가 없으면 거주할 수조차 없는게 어찌보면 당연하다. 진짜 문제는 한국 아이돌들도 조심하는 정치적 문제에 눈치없이 얽혀들어 홍콩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거나, 이른바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는 아티스트들이 대거 늘어나면서 소속 그룹은 물론 기획사 자체의 이미지 하락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34]
이수만이 주장한 한류 3단계론에도 다소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났는데, 2020년대 들어 굳이 타국 현지화 없이 해외에서 막대한 수익과 인기를 거둬들이는 케이스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연예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굳이 외국인 멤버에 연연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겨나고 있다.[35] 이수만의 한류 3단계론은 2010년대 이전까지는 잘 맞아 떨어지는 플랜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 중후반부터 각종 SNS나 유튜브 등이 떠오르고, 그 여파로 국가 간의 문화 교류가 급속도로 빨라지면서 현지화 전략 없이 다이렉트로 해외에 매력을 어필하는 게 가능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이수만이 2000년대 주장한 한류 3단계론은 당시 기준으론 틀린 말은 아니나, 2010년대 이후 기술 혁명이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한류 3단계론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지론이라고 보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타국의 특수성, 국가 간 트러블 등으로 인해 SM이 이미지 타격을 받았다 해도 거대한 중국 시장에 K-POP의 위상을 퍼트리고 한류의 불씨를 계속 이어나갔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 박진영이 방송 출연에서 말했듯, 외국인 멤버가 K-POP을 하는 것도 한류고 외국에서 자체적으로 K-POP 그룹이 나타나는 것도 한류다. 이수만의 한류 3단계론을 통해 K-POP의 저변과 스펙트럼을 넓혀나가야 한다는 목적성을 제시했고, 지금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로 인해 진통을 겪는 과정이라 보는 것이 옳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SM의 해외 공략은 연이어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11년 6월 10일 프랑스 파리 콘서트를 통해 슈퍼주니어의 Sorry, Sorry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현지 팬덤이 형성되었고 대형 플래시몹과 서명문 통지를 통해 2012년 슈퍼주니어의 단독 콘서트 투어인 SUPER SHOW 4가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심지어 이 떡밥으로 광고도 찍었다. 그만큼 이 콘서트는 당시 연예면과 시사면 양쪽에서 화제가 되었으며[36] 뒤이어 2013년 10월 19일 베이징 콘서트에서는 7만 명의 관중을 모으면서 K-POP의 세계 시장으로의 가능성을 다시금 보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 멤버를 영입하는 전략을 토대로 중화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상술한 SUPER JUNIOR와 EXO. EXO의 경우 현지화 도중 중국인 또는 중화권 출신 멤버들이 탈퇴하는 바람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2020년에는 무한 확장 콘셉트로 활동하는 보이그룹 NCT와 SuperM을 통해 다시 현지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한편 2012년에는 EXO를 데뷔시키면서 아이돌 시장에 본격적으로 세계관 문화를 도입,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어쨌든 EXO도 성공시키면서[37] 트렌드를 이끌어간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2010년대 중후반부터는 나이도 있는지라 예전만큼의 감각은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평도 나온다. 당장 과거에 비해 중소기획사들의 발전 등으로 인해 K팝 시장의 경쟁력도 상향 평준화되었고 SMROOKIES를 통해 연습생들을 데뷔 전부터 공개하는 시스템도 구축했지만, 정작 루키즈를 통해 공개됐던 여자 연습생들은 이미지 소모만 크게 한 뒤 과반 이상이 데뷔하지 못한 채 SM을 퇴사하거나 연예계를 떠나는 부작용들이 나타난다. 또한 로테이션형 그룹 NCT는 데뷔 후 몇 년간 자리를 잡지 못했다. 다만 이 기간 동안 태연, 규현, 태민, 헨리 등 기존 그룹의 멤버들을 솔로 아티스트로 어느 정도 성공시키는 행보가 있었다.
2020년 데뷔한 aespa가 이수만이 선택한 것으로 알려진 Next Level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다시 한번 프로듀싱 능력이 주목을 받았다.
2022년 9월 15일 SM 측에 2022년 말 프로듀싱 계약 조기 종료를 통보했다. 훌륭한 후배 프로듀서들이 큰 어려움 없이 잘 꾸려나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현 상황에서 물러나라는 소액주주들의 의견 또한 대주주로서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이며 현 시점이 계약을 종료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는 의견을 피력했다고 밝혔다. SM 입장문, 9월 16일 추가 입장문. 이에 SM 내부는 경영진과 소속 아티스트들도 당혹스러워하는 등 뒤숭숭한 분위기라고 하며, 엔터업계에서는 이수만이 SM 콘텐츠의 완성도에 끼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인 만큼 SM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면 타격이 클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기사1, 기사2. 팬덤 측에선 "이수만이 나가니 시원섭섭하다"라는 반응과 함께 "나갈 사람이 드디어 나간다"며 반기는 반응도 혼재되어 있다. 여하튼 이수만이 떠난 SM이 어떠한 방식으로 돌아갈지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이다.
2023년 2월 3일, <SM 3.0: IP 전략> 발표회에서 이수만 프로듀서와 SM의 계약이 종료되었다고 공식화했다. 이성수·탁영준 SM 공동대표는 “SM과 총괄프로듀서로서의 계약은 종료되었지만, 여전히 주주로서 SM을 응원해주시는 이수만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라는 입장을 밝혔다.[38] 이후 2006년부터 SM 소속인 가수 겸 배우 김민종이 SM 전 직원에게 보낸 메일에서 “이수만 선생님을 위해, SM 가족을 위한다는 이성수·탁영준 공동대표는 공표된 말과는 달리 선생님(이수만)과의 모든 대화를 두절하고, 내부와는 어떤 상의도 없이 일방적인 발표와 작별을 고했다”, “저를 비롯한 SM 아티스트의 활동에는 (이수만) 선생님의 프로듀싱과 감각적 역량이 꼭 필요하다” 며 이와 같은 퇴진 공식화에 불만을 드러냈다. SM엔터테인먼트의 이사이자 대표적인 프로듀서인 유영진 또한 이수만 선생님이 없는 SM은 상상할 수 없다며 이수만 편에 설 것을 공식 천명하는 등 SM 내부 갈등이 격화되었다. 최종적으로 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 분쟁 항목에도 나와있듯 결국 카카오가 SM을 사실상 접수하게 되면서 이수만 측이 퇴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SM 경영권 분쟁이 끝난 후 2023년 3월 언론에 공개한 편지에 따르면 한국을 떠나 해외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또한 광야는 자신의 꿈이고, 글로벌 뮤직 세상에 대해 골몰하는 중이라고 언급함에 따라 KWANGYA로 대표되는 SM Culture Universe를 비롯한 자신의 세계관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유영진과 함께 홍콩 공항에서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그리고 2023년 7월, 중국 현지에서 10대 청소년 발굴 오디션을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최측근이자 중화권 정보통으로 알려진 김한구 대표 등이 이번 일정에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서 한동안은 중국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5. 비판 및 논란
자세한 내용은 이수만/비판 및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6. 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 분쟁
자세한 내용은 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 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7. 여담
2009년 6월에 샤토 무통 로쉴드로부터 와인 기사작위를 받았다. 와인 사업에 진출할 계획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진을 근거로 이수만이 프리메이슨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는 루머가 인터넷에 퍼지기도 했다.
- 실제 EMOS라는 브랜드의 와인을 만들었고, 소속 가수들의 특별한 행사 등이 있으면 선물로 보내주고 SM내 임직원들도 결혼이나 여러 이벤트 등지에서 EMOS 와인을 마실 수 있다고 한다. 마셔본 사람 말로는 생각보다 괜찮은 와인이라고 한다.
- 1세대 아이돌그룹 세대의 등장과 함께 아이돌의 가창력 논란이 일던 시절,[39] 방송에서 "H.O.T.를 가수가 아니라고 한다면 기꺼이 동의할 용의가 있다", "TV 엔터테이너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바라봐야 한다", "립싱크도 장르다"라는 주장과 함께 립싱크 옹호론을 펼쳐 PC통신 등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이수만은 칼럼이나 인터뷰로 구구절절 자신의 의견을 다시 펼치기도 했다.[40]
- SHINee, f(x)의 몇몇 앨범들이 음악적으로도 호평을 받으면서 프로듀서 이수만이 재평가받기도 했다. 실제로 '피노키오'의 기획안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이수만의 지시로 한번 엎고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
- 가수 홍서범과도 연이 있어 6살 어린 홍서범이 '수만이 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 세월호 참사 피해 당시 10억 원을 기부했다.
- 이수만 소유의 100평이 넘는 펜트하우스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도 본인 소유의 대저택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 소녀시대의 써니가 형의 딸, 즉 이수만의 조카다. 써니에게는 이수만이 작은 삼촌인 것. 또한 써니의 언니도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던 스타월드 소속의 슈가, 아유미 매니저를 한 적 있는 등 엔터 직종에서 일했다. 관계가 관계인 데다, 써니가 소녀시대에는 제일 늦게 들어가서 가장 짧은 연습생 기간을 거쳐 얼마 되지 않아 데뷔했기 때문에 당시 대중들 사이에선 낙하산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써니는 방송에서 "사실을 숨기고 오디션을 봤기 때문에 사장님은 몰랐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실 써니가 어릴 적엔 아버지 형제들이 떨어져 지내 교류가 많이 없었기에 회사에서도 삼촌이 아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는거 보면 사적으론 생각만큼 친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 기갑창세기 모스피다의 한국어 비디오판 오프닝 곡을 부른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중 하나였지만 아니라고 한다.
- 1986년에 서세원이 감독한 <납자루떼>라는 컬트적이고 괴상한 영화의 OST를 만들었던 흑역사가 있다. 1987년 이현세 원작의 만화를 영화화한 "지옥의 링"의 주제가도 그가 불렀다.
- 2011년 SM 파리 콘서트를 성공시킨 쯤 해서 KB투자증권의 TV CF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 미얀마의 민주화운동가 아웅산 수치 여사를 다룬 프랑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The Lady'의 미국 시사회에 참가, 뤽 베송 감독과 주연배우 양자경,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 사진을 찍었다. 애초에 이는 이수만이 힐러리에게 시사회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으로, 이 기묘한 인연은 힐러리가 한국에서 미얀마로 출국할 때, 이수만이 힐러리에게 'The Lady'의 DVD를 구해다 주어 성립한 것이다.
- 경영자 이수만보단 기획자 이수만이 아무래도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밴드 롤러코스터 출신의 SM프로듀서 Hitchhiker의 인터뷰에 따르면 SM에서 발표되는 모든 앨범의 타이틀곡은 이수만이 결정하고 앨범 수록곡의 가사 한 줄까지 들어보고 결정한다고 한다. 태티서의 Twinkle 역시 이수만과 A&R 팀 사이에서 수없이 많은 의견 교환으로 가사와 기타리프가 정해졌다고 한다.[41]
- 코갤에선 2000~2010년대 한동안 흰수만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SM 소속 가수의 팬들이 그의 생일에 축하와 함께 '이수만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는 리플을 줄줄이 단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는 당시 한국 연예계에서 이수만의 입지가 마치 원피스에서의 에드워드 뉴게이트와 흡사해서 지어진 별명이었다.
- 어째서인지 삼대장과 잘 엮인다. 가수 시절에는 이문세, 유열과 이른바 '마삼트리오' 삼대장이었고, 음반기획자가 된 이후에는 양현석, 박진영과 이른바 3대 기획사 수장으로 엮였다. 물론 방시혁의 하이브 등장으로 4대가 되긴 했다만. 지분을 매각한 2023년 이후에는 포지션이 애매해졌다.
흰수만 리타이어
- 2014년 9월 30일에 배우자인 김은진이 세상을 떠났는데, 사인은 소장암으로 판명되었다. 이사직을 맡고 있는 강타가 참여한 프로젝트 그룹 S의 '하고 싶은 거 다'가 이를 모티브로 제작한 곡.
- SM 1세대 가수 출신 현진영의 회고에 따르면 잔소리가 꽤 심했다고 한다. 식사할 때 젓가락과 숟가락을 동시에 든다고 잔소리를 들은 적도 있는데, 실제 당시 식사 예절에는 안 맞는 행동이긴 하다. 다만 바다가 데뷔 전 부모님의 병원비와 대학 진학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점, 현진영이 대마초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당시 현진영의 부모님까지 챙겼던 걸 보면 일단 자신의 사람에 대한 지원만큼은 확실한 듯. 나중에 현진영 본인이 직접 유튜브 방송에서 밝혔는데, 당시 기준 1억이 넘는 현진영 아버지의 신부전증 병원비까지 이수만이 대신 납부해 주었다고 한다. 심지어 TRAX처럼 수익이 나지 않는 팀이라도 뮤지컬, 드라마, OST 등 여러 활동에 참여시키고 오히려 개인수입을 인상시키는 등, 계약 관련으로 SM에게 소송을 걸지 않는 이상 욕을 먹더라도 무조건 안고 가는 편이다.
- 굳이 연예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 밑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어쨌든 거두어 준다.[42] 그 일례가 바로 현재 쏘스뮤직 대표로 있는 소성진이다. 신화의 매니저였던 소성진은 성실하고 일을 잘해서 이수만은 신화가 SM을 떠나자 소성진을 다른 연예인의 매니저로 옮겨주는 게 아니라 프로듀싱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직책으로 진급시켰다. 그리고 소성진이 이수만의 밑에서 떠나서 독립하려 하자 이수만은 소성진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 결과 소성진은 중소기획사에서 여자친구라는 히트치는 걸그룹도 키워냈다. 바람직한 청출어람인 셈이다. 덧붙여서 매니저로 출발한 정창환 역시 매니저, 콘서트 연출가, SM C&C 이사가 되었다. 능력 있는 스탭은 확실히 밀어준다.
- SM의 공채 사원으로 입사했던 민희진도 아트 디렉터로서 우수한 능력을 보여준 결과 본부장까지 승진했다. 민희진 본인이 2024년 4월 인터뷰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이수만 선생님이 본인에게 유급 휴직 이후 사장 자리까지 제의하는 등 SM에 남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SM을 나오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그렇게 나와서 취업한 하이브와 사이가 매우 안좋아졌다는 거지만.. 재미있는건 2024년 이 이슈가 세간의 화제가 된 이후 할 말 다 하는 성격의 민희진을 10년 넘게 데리고 있던 이수만의 역량이 일부 커뮤에서 재평가받기도 했다. 사족으로, 온갖 욕이 오가던(...) 기자회견에서 유일하게 이수만 씨라고 존칭으로 지칭되었다.
- 이런 사람 챙기기는 장단점은 있어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멤버들도 탈퇴시키지 않고 품고 가는 경우가 많다 보니 당연히 팬덤의 반응은 좋지 않다. SUPER JUNIOR 강인과 성민, NCT 루카스 등이 덕분에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팀의 이미지와 활동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실은 아니지만, 이수만 평전이 출시될 당시 자료 조사를 했던 작가의 주장으로는 동방신기 분열 당시 이수만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장에 무리가 왔고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나이가 60세인 걸 감안하면 고령의 나이에 극도의 스트레스가 당연히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씩 등장하는 이수만의 모습은 몸 관리가 상당히 잘 되어 있다. 어깨와 허리도 굽지 않고 배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에 주름만 늘어나 있다.
라이벌 기획사인 JYP엔터테인먼트의 수장 박진영이 SM엔터테인먼트에 오디션을 보러 갔다 떨어진 적이 있다고 방송에서 밝힌 바 있다. 당시 박진영은 본인의 자작곡 '날 떠나지마'로 오디션을 봤는데 박진영의 퍼포먼스를 보고 난 뒤 이수만은 "아아.. 아쉽네. 뭔가 좀 아닌 거 같다" 라는 심사평과 함께 그를 탈락시켰고 실망한 박진영은 힘없이 오디션장을 터덜터덜 걸어나가려는 찰나 이수만이 갑자기 뒤에서 "잠깐만!" 하고 박진영을 불러세우더니 "너 그 곡만 안 팔래?" 라고 물어봤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박진영이 "안 팔아요!" 라고 소리치고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이수만은 2020년 보아의 유튜브 채널에 직접 출연하여 이 에피소드에 대해 직접 언급하면서 "세상에 오디션을 한 번만 보러오는 사람이 어디 있냐?[43] 박진영은 본인이 다시 안 온 것이다. 지금이라도 오디션 다시 보러오면 내가 받아줄 의향이 있다." 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박진영의 외숙부인 윤장배 전북대 농업생명과학대학 동물소재공학과 교수는 샌드페블즈 창립멤버로 그 다음 2기가 되는 이수만으로서는 박진영을 선배 조카로도 볼 수 있다.
- SM엔터테인먼트의 믹싱, 녹음 엔지니어인 구종필 기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실제로 믹싱 작업에서도 이수만이 직접 듣고 총괄한다고 한다. 전문 믹싱 엔지니어만큼 잘 알아서 깐깐하다고. 과거에 한 방송 영상에서도 아시아인의 성대에서 나오는 배음이 서양인과 다르다는 식의 음향학적 얘기를 한 적도 있고 마스터링시 유의해야 할 점과 대역에 따른 소리의 차이, 그리고 SM 만의 믹싱 노하우 등을 이수만이 직접 이야기한 인터뷰 또한 존재한다. 실제로 음향학 공부를 했던 걸로 알려져 있다. 더군다나 업계 최고의 녹음실과 엔지니어, 작곡가들과 함께 '좋은 소리'가 뭔지 항상 들었던 사람이라... 이성수 이사, 프로듀서 히치하이커의 발언들을 봐도 이수만이 실제적으로 음악 기획과 프로듀싱에 있어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참고로 구종필 엔지니어가 믹스를 했던 뮤지션들은 김동률, 이승환, 윤도현밴드, 윤하, 빅마마 등이 있었고 영화 '왕의 남자', '괴물', '장화,홍련' 등의 믹스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후반부터 SM전속 믹싱, 녹음 엔지니어가 되었다.
- IT 분야에 관심이 굉장히 많다. 본인이 경복고-서울대 출신의 고학력자이기도 하며, 홍종화 같은 뮤지션을 발굴하여 당시에 전자음악을 하겠다며 CPU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SM 내부에 IT 관련 부서 인력이 상당하며 클라우드 도입이라던가 Vyrl ,에브리싱 등의 앱개발 등 엔터테인먼트 업체로서는 보기 드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문화 콘텐츠 포럼에서도 'AI 스피커'라고 할 수 있는 챗봇과 로봇을 통해서, AI가 우리의 생활 속에 밀접하게 자리잡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며 여전한 IT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에 이미 "로봇과 셀레브리티가 오는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고 SM 내 유명 연예인들과 A.I 컨텐츠 제공에서도 사업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한국경제의 인터뷰에 따르면 셀레브리티와 로봇이 오는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자세한 전문은 여기로. 또한 온라인을 통한 공연 스트리밍에도 관심이 많아서, 문화기술 개발 목적으로 홀로그램 콘서트를 계획하기도 했으며 네이버와의 합작으로 온라인 콘서트 플랫폼인 Beyond LIVE를 열기도 했으며 이를 일본 a-nation[44]에 역수출하기도 했다.
- SM 출신 연예인들이 자주 하는 성대모사 대상 중 한 명이었다.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흉내내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2020년대 들어선 연령대도 있고 경영권 분쟁으로 SM 최대 주주에서 물러나서인지 잘 보기 힘들다.
- 2017년 스웨덴에 '에코 뮤직 라이츠' 라는 퍼블리싱 회사를 설립하고 회사 CEO로 전 유니버셜 유럽 총괄 부사장 펠레 리델을 영입했다. 점차 늘어가는 K-POP의 수요를 예측하고 그간 세계적인 음반사를 통한 퍼블리싱보다는 보다 직접적으로 접근하고 활동할 것으로 보인다. 프로듀서→유니버셜→SM 단계보다는 프로듀서→SM 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보는 것 같다. 물론 경제적으로 해외 대형 퍼블리셔 수수료 절감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이수만의 사업적 안목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크리스브라운, 갈란티스 같은 팝뮤지션들과 아무로 나미에, E-girls 등 제이팝 아티스트들의 곡들도 퍼블리싱하고 있다. Ekko 뮤직 라이츠를 통한 퍼블리싱으로 K-POP 아티스트인 TWICE, 빅스의 곡들도 발표되었다.
- 사실상 EXO 이후 3~3.5세대 아이돌 판에서는 이제 프로듀서보다 일선에서 물러난 한 기획사의 수장으로서의 이미지가 컸는데, 2017년 9월 14일자 방송된 해피투게더에서 소속 걸그룹 레드벨벳이 2017년 크게 히트 친 여름 미니 앨범 'The Red Summer'의 모든 프로듀싱을 이수만이 담당했음[45]을 밝히면서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다. 전작인 레드벨벳의 네 번째 미니 앨범 'Rookie'는 레드벨벳 특유의 컨셉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이전보다 저조한 성적으로 아쉬움을 샀는데, '빨간 맛'이 여름은 물론이고 2017년을 대표하는 곡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기 때문. 고령의 나이로 현 가요계의 한 계절을 휩쓸었으니 물밑에 가려진 그의 실력과 센스를 다시 한 번 입증한 셈이다. Zimzalabim 등 몇몇 곡이 선곡 미스라는 평을 받으며 감이 떨어졌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어김없이 'Psycho' 등 후속 활동에서 죽지 않은 프로듀싱 능력을 보여주며 다시금 대중들에게 인정받았다.
- 2019년 10월 대한민국 국회는 'SM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의혹’에 대해 질의하기 위해 여야 합의로 이수만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했고, 출석을 요구했으나 미국 해외출장으로 국감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 지난 2016년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국감에도 참고인으로 채택됐으나 외국 출장으로 불출석했다. 덕분에 2019년 설리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수만이 생전 설리와 사이가 딱히 좋지 않았다는건 아니다.
- 2020년 1월, 중국 청두TV의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해 중국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다고 언급하였다. #
- 2000년대 중반에 보아를 통해 미국 진출을 시도했다가 JYJ와 에이벡스 문제 등 때문에 활동이 중단되고 한동안 미국 시장에 관심이 없어진듯 보였으나, 2010년대 후반 이후 방탄소년단의 빌보드 1위와 미국 시장 성공 등에 자극을 받았는지 2018년을 기점으로 한동안 미국 진출에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병/미국 진출 참조.
- 2005년 한류스타 병역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줘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연예계 병역비리 논란들 때문에 이 얘기를 했다가 비난 여론이 일었는데, 개나 소나 해주자는 게 아니라 해외에서 K-POP을 알리는 데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주자는 얘기였다. "오피니언 리더[46]들로 위원회를 구성해 10명 정도 선에서 군 복무를 면제해주는 것도 한 방안이다. 모든 연예인이 국내 1등보다는 해외에서 1등 할 수 있게 토양을 만들어 줘야 할 때다."라고 답변했었다. 당시 동방신기가 오리콘 차트에서 7위를 기록했고, 중국 진출을 앞두고 있었는데 하필 군대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H.O.T.의 중국 진출도 당시 박지원과 김한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47]의 푸시가 있었기 때문에 멀티 여권으로 가능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쉬웠던 모양. 이 당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48] 이후 약 15년이 지난 2020년 방탄소년단의 Dynamite가 빌보드 차트 Hot 100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1위를 달성하자,[49] 다시 한 번 군대 문제에 대한 병역혜택을 줘야 한다는 얘기가 거론되었고 실제로 SM을 포함한 여러 엔터사들이 모여 병례특례법과 관련해 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 모임은 유례없는 신기록을 세운 방탄소년단의 소속사 빅히트는 참석하지 않은 자리에서 진행되었고, 덕분에 일각에서 방탄소년단이 차린 밥상에 이수만과 기타 엔터사들이 숟가락을 얹는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
- aespa 멤버들 앞에서 ae-수만을 만들어야겠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 2021년 3월, 부인 사별 후 연인이 된 것으로 알려진 미국 A뉴스의 한국지국장인 한국인 여성 기자[50] J씨(52)[51]에게 청담동 고급 빌라를 증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빌라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전용면적 196.42㎡ 규모 상지리츠빌 카일룸 3차 아파트로 당시 기준 약 49억 원 정도 시세로 알려졌다. # 이에 대해 SM 측은 "회사와 관련 없는 개인적 사안으로, 확인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 이수만은 aespa 세계관에 등장하는 주요단어 KWANGYA와 nævis의 상표권 등록을 마쳤다. 여전히 호불호가 나뉘는 설정이지만 SM이 aespa 세계관에 진심임을 알 수 있는 대목. 이수만이 춘 넥스트레벨 디귿춤은 그 표정이 워낙 절묘해서 짤방으로 남기도 했다.
- 휴대전화는 iPhone 13 Pro, 컴퓨터는 MacBook Pro 16인치(2019)를 사용한다. 그러나 조카인 써니는 갤럭시 유저로 갤럭시 S20 Ultra → 갤럭시 Z 폴드3 유저이다.
[1] 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6.25 전쟁 당시 이수만의 부모님이 잠시 부산광역시 동래구로 피난을 왔을 때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종로구 부암동에서 자랐다. #[2] #[3] 효령대군파 44세손 '秀'자 항렬. 두 아들은 45세손 '揆'자 항렬이다.[4] 작은형 이수영이 소녀시대의 써니의 아버지이다. 즉, 이수만은 써니의 작은아버지인 것이다. 다만 써니 왈 어릴 적엔 집안간 교류가 많이 없어서 본인도 이수만과 큰 친분은 없었다고 한다.[5] 2014년에 소장암 재발로 별세했다. 언론에는 김지혜라는 이름도 알려져있는데, 아마 개명을 한 것으로 보인다.[6] 이경규의 아명과 동명이인으로 본관도 항렬도 동일하다. 이경규가 개명한 이유가 사촌 형제와 이름이 같아서였다는 걸 생각하면 해당 사촌 형제와 한자까지 같은 완전한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7] 농업기계학 전공[8] 1985년 Master of Science degree 취득 #[9] 선천성 질환으로 면제. 1999년 당시 YTN 뉴스 초대석에 나와 몸속에 장기가 서로 붙는 이상질환으로, 원래 힘든 일을 못한다고 했다. 이런 질환으로 면제되었다고 밝힘.[10] SM엔터테인먼트가 코스닥에 상장한 2000년 ~ 2010년은 등기이사[11] SM엔터테인먼트의 전신[12] 실제로 이수만이 미국에 있을 때 만들어진 별명. '수'와 발음이 비슷한 '소'의 영어인 COW와 MAN이 합쳐진 것이다. 이는 SMCU 에피소드 영상의 주요 기법인 CAWMAN을 작명하는 데 영향을 준다.[13] 나이에 비해 트렌디한 감각과 젊어보이는 외모로 인해 K-POP팬들 사이에서 60대까지 수만 아재로 불렀지만 엄연한 노인 나이대인 70대부터 할배로 부르기 시작했다.[14] 워낙 오래 전부터 연예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원로급 방송인들과도 의외의 친분이 있는 경우가 제법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꽃보다 할배 대만 편인데 이수만의 조카이자 소녀시대의 멤버인 써니가 스케줄 때문에 대만을 떠나야 할 상황이 되자, 당시 출연한 할배들이 대뜸 "우리가 책임질 테니 수만이한테 전화 걸어!"라고 말하기도 했다.[15] 보통 1990년대부터 시작된 K-팝 아이돌 음악의 시초로 서태지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편이다. 서태지가 서태지와 아이들로 K팝 아이돌상의 원조격 모델을 제시했다면, 거기서 영감을 얻어 이 모델의 수익이 지속되도록 사업화시킨 건 SM을 설립한 기획자 이수만이 시초라는 식. 기업 모델을 확립하고, SM을 엔터사 최초로 주식시장에 상장시켜 엔터업의 외형을 확대하기도 했다.[16] 사실 DSP는 1세대가 리즈 시절이었고, 2세대부턴 이미 빅뱅, 원더걸스 등을 내세운 YG, JYP한테도 역전당해 격차가 꽤 벌어지긴 했다. 애초에 1~1.5세대 시절부터도 비, 세븐, god, 지누션, 원타임 등처럼 박진영, 양현석은 프로듀서로 이미 잘나가고 있긴 했다. 다만, 대형 기획사로 확고히 선 건 빅뱅과 원더걸스의 성공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17] H.O.T.와 젝스키스 관계도 H.O.T.가 확고한 1인자, 젝스키스가 이에 대항하는 1.5인자의 위치였다. S.E.S.와 핑클도 대중적 인기 자체는 엇비슷했지만, 당시 가수의 성공 척도랄 수 있는 음반 판매량에선 핑클이 밀렸다. 대신 핑클은 약간 신비주의 컨셉으로 예능도 잘 안나오던 S.E.S.랑 달리 온갖 예능을 가리지 않고 다 나오며 인지도로 승부해 CF도 따던 개그테이너 걸그룹으로 활약했다. 카라 선배답다? 카라는 생계형 아이돌 소리 들을 정도로 출발은 위태로웠지만 이후에는 흥행 성적을 내고 일본 진출로 성공한 케이스. 그리고 카라를 끝으로 DSP는 이후 사실상 업계 주류에서 밀려나게 된다.[18] 정확히는 한국에서 12살까지 살다 부모님 따라 괌으로 이민 간 케이스.[19] 이시기 중국은 베이비복스가 1세대 걸그룹 중에선 가장 인기가 있었다.[20] 이수만은 두 명의 자녀가 있지만 SM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뜻을 측근들에게 밝힌 바 있었다. (여담으로 장남 이현규는 과거 SM에서 작사가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총괄 프로듀서의 역량이 중요한 엔터업에선 합리적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어찌됐든 회사를 위해선 장기적으로 호평받을 수 있는 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술된 경영권 분쟁으로 소속사 직원들과 갈등을 벌이다 본인이 쫓겨나서 빛이 바랬다.[21] 실제 이때 접촉한 기업들로 당시 언론에선 CJ ENM, 카카오, 네이버 등이 거론되었는데, 결론적으로 이때 팔지도 않을거면서 협상 테이블에서 자신들을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했는지, 그 중 빡친 카카오가 인수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감방행, 결국 SM을 반강제적으로 인수하는데 성공한다.[22] 다 판 건 아니고 3.68%의 지분을 남겨 두었다가 2024년 2월 28일에 풋옵션을 행사하여 HYBE에 모두 매각했다.[23] 現 농업생명과학대학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 바이오시스템공학전공으로 당시 농공학과는 농업토목전공과 농업기계전공으로 나뉘어 있었다.[24] 12대 별밤지기, 이문세가 14대였다. 재밌는 점은 25대 별밤지기가 강타, SM이라는 한 회사의 대표와 이사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경력을 나란히 가진 이례적인 케이스라서 잠깐 화제가 되었었다.[25] 실제로 2013년 배철수가 진행 도중 이수만 선배라고 이전 진행자를 언급하기도 했다.[26] 참고로 이수만 이전에는 강석과 손석희, 김자옥이 맡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지금과 다르게 정오의 희망곡처럼 지역별로 자체방송을 내보냈다.[27] 얼굴형이 긴 탓에 말의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마상트리오가 됐다. 긴 얼굴의 3인방이라고 해서 마삼트리오(馬三 Trio)라고도 부른다. 제1회 MBC 강변가요제 금상을 탔던 홍삼트리오의 이름에서 파생되기도 했다.[28] 참고로 1983년 부인을 만나, 1984년 결혼까지 한다.[29] 현 SM엔터테인먼트의 전신. 참고로 SM엔터테인먼트는 1995년에 자본금 5천만원으로 새로 설립한 것으로, 단순히 사명 변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두 회사의 법인격이 다르다. 공식 홈페이지의 History에도 1995년 설립을 명시하고 있으며 SM의 창립기념일 역시 1995년 기준이다. 1세대 아이돌 그룹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도 SM엔터테인먼트 시절.[30] 미국의 경우 주류 인종이 다르기 때문에 메이저 시장까지 뚫긴 어려움이 많다고 봤다. 근데 BTS가 똭.. 다만 BTS 성공 이후에도 북미 시장에서 K팝은 선두권의 매니아 영역은 맞지만, BTS 정도를 제외하면 빌보드 핫 100 1위는 없고, 그래미 주요상 수상도 아직은 없어서 완전히 주류화되었다고 보기엔 여전히 한계도 있다. 애초에 영어 쓰는 나라도 아닌데 이정도까지 온게 대단한거기도 하지만.[31] SM은 중국에서도 유명하기 때문에, SM 그룹으로 아이돌 스타가 되면 특히 중국인 멤버라면 중국에도 팬덤이 자연적으로 생기는 경우가 많다.[32] 다만 계약이 끝나고 넘어가는 경우는 감정적 선동과 별개로 법적 문제는 없다. 진짜 문제는 그전에 계약을 깨고 나가는 케이스. 유독 2010년대 SM이 이 문제로 탈이 많았다.[33] 실제 탈퇴 문제가 붉어진 그룹들을 보면 팀내 유대도 끈끈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34] 첨엔 진짜 눈치없이 떠들다(사실 중국인 입장에선 그걸 표방하는 게 애국이라고 착각할 여지도 충분하다. 예전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마냥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우니깐.) 문제가 되자 소속사에서 교육을 한 건지 어짼건지 2020년대 기준으론 중국인 멤버들 중 크게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경우는 드무나, 아무래도 중국이 권위주의 정부다보니 침묵도 정부에 반대하는 것처럼 비쳐 인터넷판 홍위병 짓하며 정부 행보를 공개 지지하라는 식의 댓글 부대들도 있는 모양.[35] 다만 현지화까진 아니더라도 2단계식의 외국인 멤버 영입 자체는 여전히 해당 나라에서 홍보 효과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마냥 무시하기도 어려운 요소다. 트와이스가 일본에서 뜬 주요 이유 중 하나도 일본인 멤버가 있었기 때문이고, 태국에서 블랙핑크가 뜬 것 역시 마찬가지. 중국인 멤버들이 있는 세븐틴만 하더라도 그 많은 앨범 판매량 중 상당수는 중국 시장이 구매하고 있다. 외국인 멤버없이 글로벌 스타가 된 BTS가 오히려 약간 특이한 케이스.[36]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37] 사실 처음 EXO-K, M으로 나뉘어 멤버들이 한국, 중국에서 따로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쏟아부은 비용 대비 크게 성공하진 못했으나, 이에 자극을 받았는지 양쪽 멤버 모두가 뭉친 EXO로 합치면서 내놓은 곡 '으르렁'이 히트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38] 사실 이 발표 전 이성수 공동대표가 이수만에게 '더이상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미리 연락을 했다고 한다. 이후부턴 후술되어있듯 사실상 남남이 되었으니 이 발표 역시 일종의 립서비스였던 것.[39] 당시 노래를 못하는 아이돌의 존재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커서, 음악방송들은 자체적으로 립싱크하는 무대에 립싱크 중이라고 마크를 달거나 아예 립싱크를 없애고 강제 라이브를 시킬 정도였다. 유튜브에 공개된 90년대 말~00년대 초반 음악방송은 대부분 이런 형태이다.[40] 사족으로, 2010년대 박진영은 핸드마이크 들고 노래하면서 춤 추는, 생라이브가 가능한 아이돌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아이돌 시장의 실력도 전반적으로 상향 평준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1] 물론 경영권 분쟁으로 쪼개진 지금 와서 보면 이수만의 너무 깊은 개입에 불만을 가진 내부 직원들도 있었던 모양.[42] 후일담으로 박명수의 라디오쇼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이수만이 정말 대우를 잘 해줬다고 한다. 현재도 SM과 박명수의 관계는 원만한 편이다.[43] 그 당시에는 오디션에 떨어졌어도 다시 재도전을 하러 와서 합격하는 케이스도 많았다고 한다. 물론, 재도전을 안하는 케이스도 많긴 했다. 결국 케바케.[44] 일본은 일찍부터 소니의 Livespire 등 콘서트 실황 중계 시스템이 발달해 있다.[45] 멜로디라인과 리듬을 비롯한 믹싱 작업은 물론이고 안무까지 맡았다고 한다.[46] 문화평론가, 소속사 대표, 문화부장관 등의 연예계에 정통한 사람들로 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의미였다.[47] 김대중 정부 당시에는 문화관광부 장관이였다.[48] 가끔 스티브유가 이 때 얘기를 하긴 하는데, 스티브유는 국내에서나 유명했던 가수지, 해외에서는 듣보잡이였다. 그래서 한류가수라고 뻥 쳤다가 욕 먹었던 것이다.[49] 종전 기록은 싸이 강남스타일의 2위.[50] 국내 기자일 경우 김영란법이 적용되지만, 한국지부 외신기자는 해당되지 않는다.[51] 한국인으로 미국 유수 언론사의 한국지국장에 오른 사례가 매우 드물어 국내 방송에 다수 출연한 나름 유명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