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2:59:42

조영남

<colbgcolor=#595959><colcolor=#fff> 조영남
趙英男 | Cho Yeong Nam
파일:조영남1.jpg
출생 1945년 5월 13일[음력] ([age(1945-05-13)]세)
황해도 평산군
(現 황해북도 평산군)
출신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두리
본관 배천 조씨[2]
신체 167cm[3], O형
학력 삽교초등학교 (졸업)
삽교중학교 (졸업)
강문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성악 / 중퇴)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 / 명예학사)
트리니티 신학대학교 (신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본부 병장 만기전역 [4]
데뷔 1968년 노래 '딜라일라'
종교 개신교[5]
가족 8남 1녀 중 7남
아버지 조승철 어머니 김정신
동생 조영수[6](1947년생)
슬하 2남 1녀[7]

1. 개요2. 생애
2.1. 데뷔 전2.2. 무명가수에서 데뷔까지2.3. 결혼과 전성기2.4. 은퇴 이후
3. 논란 및 사건사고4. 음악적 평가
4.1. 가창력에 관하여4.2. 작곡과 음악성에 관하여
5. 기타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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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가수.

1968년 말 데뷔해 한국 대중음악과 성악을 가요에 접목시켜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8].

사실 본업인 음악 뿐 아니라 작가, 화가, 방송 MC, 라디오 DJ 등 다방면으로 활동해 왔다. 솔비구혜선, 홍서범 등도 종합 예술인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들보다 앞선 세대 인물로는 그가 원조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현재는 성희롱, 친일 선언, 그림 대작 등[9] 각종 사건사고로 인한 여러가지 구설수로 인해 평판이 상당히 안 좋은 연예인 중 하나이다.

황해도 출신이라 분단의 아픔과 지역감정의 대립 등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역감정으로 갈라서기 시작한 경상도전라도의 화합을 담고있는 화개장터라는 곡을 불렀다. 참고로 그는 작곡만 했고 작사는 친구인 김한길문화관광부장관이 했다.

2. 생애

2.1. 데뷔 전

1945년 5월 13일(음력 1945년 4월 2일), 황해도 평산군[10]에서 태어나, 1.4 후퇴의 피난 행렬에 섞여[11]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이주했다.[12]

조영남은 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해 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13], 한양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1963년에 한양대학교를 자퇴하였는데, 자퇴의 이유가 재밌다. 2013년 10월에 방송된 SBS '좋은 아침'에 조영남은 한양대 성악과 후배 김승일과 함께 출연하여, 한양대를 자퇴한 이유를 설명하며 "2학년이 됐는데 신입생 여자 아이들 중에 정말 예쁜 여자가 들어왔었다. 그 여자가 한양대학교에 오는 걸 매일 몰래 봤다. 걔가 입학한 후로 온 정신은 '그 애와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였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내가 사회를 보면서 걔를 의식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약혼자가 있는 여자였다. 학교에서 그 여자와 내가 데이트 한다는 소문이 났고 약혼자가 날 찾아오기까지 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조영남은 "학교에 퍼진 소문 때문에 자퇴하게 됐다. 다시 공부해서 서울대에 갔고 그 여자는 파혼했다"고 말했다.#

그 뒤 2015년 10월 방송된 MBN '속풀이쇼 동치미'에 출연해서는 한양대 자퇴에 대해 "잘렸다"는 말을 하였다. 즉 이날 방송에서 조영남은 "내가 한양대학교에 다니다 뜨거운 연애를 하고 잘린 적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출연진들이 "연애를 한다고 학교를 잘리냐?"며 의아해했고, 조영남은 "약혼한 여자와 눈이 맞은 거였다. 그 때는 내가 전액장학금을 받는 학생이었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데 예쁜 걸 어떻게 하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자퇴서를 냈다. 이후 공부를 해서 다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

이후 1964년에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는데, 1968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대 성악과도 이후 자퇴하였다. 다만, 2000년대 들어 서울대학교 측에서 조영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서울대학교 자퇴의 이유에 대해 조영남은 2010년 9월 방송된 ‘황금어장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여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중 미8군 오디션을 보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깜짝 놀랄 만큼 수입이 좋아 더 이상 학교 다닐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자퇴했다”고 밝혔다. #

2.2. 무명가수에서 데뷔까지

조영남은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밤무대를 전전하다 주한미군이 운용하는 쇼룸에서 팝송을 부르다 성악을 그만두고 상업가수의 벌이가 좋은 것을 이유로 상업가수로 전환, 1968년에 '딜라일라'라는 번안곡으로 데뷔한다.[14]

이 딜라일라로 방송에 데뷔했는데, 파격적인 퍼포먼스[15]로 데뷔하자마자 굉장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본인도 본인 저서나 출연방송에서 본인은 거의 무명 시절은 없었던 편이라 회고하곤 한다.[16] 이후 텔레비전이 지금처럼 절대적인 대중매체가 되기 전 시절이었음에도 TV에 자주 나와 TV를 자주 못 보던 서민들도 가수 조영남을 아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 지금 젊은 층은 (조영남의) 히트곡이라고 하면 화개장터 외에는 아는 노래가 없지만, 조영남과 같은 세대거나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윗세대 어르신들의 경우 1970년대 유명하던 대중 클래식 가수였다고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1970년대 LP로만 음반을 발매하던 시절에 75,000장을 팔았다고 하니 1990년대 기준이면 밀리언셀러 못지 않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한 인기 가수인 것이다.

스타가 되어 돈을 많이 번 뒤에는 본인이 한때의 굶주림에 상업가수로 전향한 것을 후회했는지 동생인 조영수가 성악가가 되길 원하자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한다.

2.3. 결혼과 전성기

1971년, 군생활 도중 알게 된 배우 윤여정과 결혼한 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주도한 여의도 평화집회[17]에서 성악 쪽 담당자들을 수소문하고 직접 지휘한 후 빌리 그레이엄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수로 돌아오면서 활동도 왕성했지만, 집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끝내는 윤여정과도 갈라섰다. 스스로도 윤여정과 갈라섰을 때를 매우 반성하지만 진심으로 윤여정을 위한다면 윤여정의 ''조차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여론이 대다수다. 사실 조영남은 옛날부터 악명높은 바람둥이였는데 결혼하고도 그 버릇을 통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돈도 한 푼도 벌지 않았다. 오죽하면 쌀독에 쌀이 없던 날이 있던 날보다 많았다고 했을 정도다. 그래도 윤여정은 결혼생활동안 조영남에게 헌신적이었고, 1970~80년대 미국에서 두부 구하기가 어렵던 시절 두부를 좋아하던 조영남을 위해 직접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무릎팍도사 윤여정 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윤여정에게는 이게 엄청난 트라우마다. 실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조영남의 ''조차도 꺼내지 않았으며, 그 기세등등한 강호동유세윤도 몸 둘 바를 모른 채 진행을 했을 정도였다.[18] 물론, 조영남 본인도 직접 "그녀가 입을 열었다면 조영남이란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라며 잘못을 시인했다.[19] 그래놓고는 나중에는 윤여정이 못생겨서 같이 잘 수 없었다망언을 했다.

지금이야 양원경처럼 결혼 생활 내내 개막장 짓거리를 저질렀다거나, 송종국처럼 불륜(간통)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등의 예들처럼 어마무시한 사고를 친 것이 아닌 이상, (이혼에 대한) 인식은 제대로 잡혀서 이혼하고도 누구든 응원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저때 이혼이라는 건 여자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마약 복용 같은 수위 높은 사고를 저지른 후 브라운관에 복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동급으로 여겨졌을 만큼 사회에서 매장당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조영남과 이혼을 했던 윤여정 역시 그 때문에 매장당할 뻔했지만, 본인과 가까웠던 김수현 덕분에 생활연기인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다. 이러니까 조영남의 ''만 들어도 경기할 만큼 증오하는 것은 당연지사. 윤여정에게는 당장 지우고 싶은 악몽이 바로 그 때다. 그런데도 조영남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를 "첫번째 결혼시절"이라고 말한다. 윤여정, 그리고 아들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말과 함께 당시 세 가족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이용하여 미술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하여간 조영남은 이혼 후에도 정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엽색 행각을 벌였으며, 1980년대에는 자주 여성지에 이름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자신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자유 연애,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이라며 되도 않는 변명을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그냥 쓰레기 같은 할배. 이 사람 이상의 개막장은 임택근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조영남이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수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 특히 중장년층 어르신들에게 평판이 극도로 나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한테 이미지가 좋냐면 그것도 절대로 아니다.

2.4. 은퇴 이후

이혼 후에는 방송에 인생을 올인하여 체험 삶의 현장으로 대표되는 체험&다큐 형태의 방송을 주로 이끌었으며, 2006년부터 2016년 5월 16일까지는 MBC 표준FM의 오후4시 ~ 오후6시 라디오 프로그램 <지금은 라디오 시대> DJ를 맡았다.

보조 MC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미국에서 MC로 성공한 자니 윤을 불러와서 그를 메인 MC로 한 '자니윤 쇼'에 조영남이 보조MC를 맡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 잘 맞아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가수 활동은 공식적인 은퇴 앨범을 낸 만큼 사실상 접은 상태나, 프로그램의 PD들이 찾아와 사정을 하면 한두 곡 정도는 꼭 불러준다.[20] 하지만 은퇴했으니 개런티는 공짜나 기부한다는 조건으로 안 받고 있다.

한국 연예인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이자 재산가다. 그가 지금도 계속 거주하고 있는 청담동 고급 빌라는 연예인이 살고 있는 모든 집들 중 제일 비싸다고 하며, 공시지가만 50억 원 이상, 실거래가는 100억 원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사실 그 빌라는 조영남이 아주 오래 전에 구입한 것으로, 구입 당시에는 그리 고가가 아니었으나, 재건축만 2번을 거듭하다 보니 주변 시세와 맞물려 건물 가격이 폭등한 것. 게다가 집값이 너무 비싸다 보니 팔리지도 않는다고 한다.[21] 물론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실제로 정말 작정하고 돈을 모았으면 지금의 재산 따위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엄청난 갑부가 되었겠지만[22] 전술한 바람기를 바탕으로 한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들한테 돈을 거의 뿌리다시피 하면서 재산을 마치 물 쓰듯 홀라당 까먹기가 일상다반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기가 좋아서 을 매번 꾸준히 엄청 잘 벌어서 지금과 같이 이런 재산가가 된 것이다. 특히 위에 쓴 것처럼 재건축을 거듭할 때마다 그 집을 팔라는 요구가 심심하면 있어 왔지만, 본인은 그 집 자체가 좋아서 그걸 지키고 싶어 안 팔았다고 한다.[23]

은퇴 이후에는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주로 그리는 게 화투 그림을 크게 그린 그림이다. 아무튼 이 화가 타이틀로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고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명작 스캔들에서 미학 칼럼니스트 기믹으로 출연도 했다. 하지만 그 뒤 큰 사건을 또 일으키면서 그의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싸늘한 편이며, 방송 활동도 뜸해진 상황이다.

3. 논란 및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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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음악적 평가

4.1. 가창력에 관하여

조영남 - 선구자 (1982년)
조영남 - 화개장터 (1988년)

구수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한 우렁찬 발성이 그의 가창력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클래식 창법을 베이스로 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대중음악의 장점을 접목한 보컬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 조영남은 노래가 아닌 그냥 하는 말을 들어봐도 목소리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즉석에서 편곡이나 애드립을 하는데, 공연 직전에 갑자기 곡을 바꿀 일이 생기면 자기가 평소에 외우는 다른 곡의 악보를 급하게 자기 손으로 써서 밴드에게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음악적 감각이 약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애드립으로 노래 도중 엇박이나 음을 바꾸는 기교를 보여주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이탈할듯 말듯 하면서도 끝내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성악 공부로 인해 코드 진행, 멜로디와 화성에 대한 이해가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24] 이게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실제로 가창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많은 가수들도 콘서트 같은 공연에서 기교를 부리다가 조절을 못 해서 아예 음정이나 리듬이 3~4단계씩 확 빗나가 버리는 사례도 많다. 반대로 조영남이랑 비슷한 또래의 연예인들이 특별손님의 형식으로 조영남 공연에 출연해 조영남 모창을 위해 고의로 엇박을 넣었다가 마무리까지 박자를 못잡고 날려버리기도 했다. 조영남 식의 창법이 결코 쉬운 게 아닌 것이다. 조영남이 그 나이에도 흔들리지 않는 음감을 보유하고 있다는 증거다.

소싯적부터 그는 트로트 가수들의 가창력을 비판하기를 좋아했는데, 가창력에 있어서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 중론. 스탠더드 팝이 유행이었던 시절, 조영남은 미군들이 좋아할 만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로 꼽혔고 당시 미군들에게 American Voice로 선호받던 가수였다. '딜라일라'를 비롯한 번안곡이나 팝송 역시 성악을 베이스로 한 쩌렁쩌렁한 성량으로 힘차게 소화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톰 존스라고 불리웠고 실제로도 그에 손색이 없는 수준. 지금도 조영남과 비슷한 연배이거나 7080세대의 어르신들은 "조영남이가 노래 하나는 참 멋지게 불렀지." 라는 식으로 왕년의 조영남을 팝과 클래식에 뛰어났던 가수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25] 그러한 이유로 그가 진행하는 디너쇼는 아직까지 티켓파워가 있다.

이 덕에 매우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면서 성악의 길을 그만 두고 대중가수로서의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미군 부대에서 한 달간 벌어 들이는 수입이 당시 한 학기 대학 등록금과 맞먹는 수준이었고, 당대의 문화 아이콘으로 등극했었다고 한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지만 예술인들이 어지간해서는 먹고 살기 힘들 때였는데 본인의 수입은 당대 최고 수준이였기에, 가진 자의 여유로 동생들에게 많이 베풀어서 그들도 조영남을 많이들 따랐다고 한다. 당시에는 미 8군 부대에서 노래하는 것이 다른 그 어떤 무대보다도 높은 수입을 보장해줄 때였는데, 그 중에서도 조영남은 미군들로부터 가장 미국적인 목소리로 평가받는 인물이었으니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이미 스탠더드 팝의 시대는 끝났고 성악 특유의 톤을 진정성이 없다거나 작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현재의 풍토이기에 그런 점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은 나올 만하다. 예능용 멘션이긴 했지만, 본인도 자신의 창법이 대다수의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라 세련된 대중가요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26]

종래 조영남의 가창력 기반은 현란한 기교나 힘조절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잃지 않고 뚝심있게 음을 질러서 울리는 방식으로 감정의 흐름을 관객석 끝까지 온전하게 밀어붙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조영남은 순수하게 타고난 힘을 앞세운, 그야말로 뜨겁고 우렁찬 노래로 성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성악톤의 스탠다드 팝이라는 장르로 큰 인기를 얻은 원천이었다. 이처럼 성악톤을 이용하는 방식 자체는 힘있는 발성을 기본으로 해야 감동이 커지는데, 현재 나이가 든 조영남은 젊을 때보다야 확실히 힘이 약해져 그만의 노래맛이 떨어진 감이 있다.[27] 사실 이건 음악적 재능과는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다. 혹시나 조영남이 운동과 식이조절로 벌크업을 하고 힘을 키워서 젊었을 때의 파워를 유지하고자 노력했었다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렇게까지 죽어라 노력하지는 않았다.[28]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조영남이라는 인물이 일생에 걸쳐 크고 작은 사고를 치고 있지만, 가수라는 본업의 실력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없고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사람인 것도 사실이기에 연예계에서 롱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면 적당하다. 본인도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는 한다.

4.2. 작곡과 음악성에 관하여

작곡 능력은 당시 활발히 활동했던 싱어송라이터들에 비하면 평범한 편이다. 길옥윤 등의 당시 작곡가들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당한 적도 있고 본인도 곡은 쓰는데 영 생각만큼 안 나온다는 이야기를 자주 할 정도. 음악적으로도 번안곡 가수의 한계점 역시 많은 부분에서 보인다. 애초에 그의 히트곡 대부분은 자기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그대로 가져다가 가사만 한국어로 바꾼 것이다. 다만, 불멸의 히트곡 화개장터나 도시여 안녕, 지금 등 잘 알려진 곡은 이게 다다. 스테디셀러로써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곡도 있다.

클래식에 대한 조예는 깊을지 모르나 대중가요에 대한 이해는 꽤나 부족해서, 싱어로만 살기에는 본인의 재능이 아깝고 싱어송라이터를 겸하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로, 세시봉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뉴 웨이브' 의 한 축 내지는 아이콘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나마도 김민기, 송창식이라는 뛰어난 송라이터들 때문에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것. 김민기와 송창식, (그리고 평가는 이들에게 살짝 못미치지만) 양희은 등이 세시봉의 한계였던 번안곡, 포크에 한정된 음악성,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뛰어난 음악세계를 이루어 내는 데 성공했음을 고려한다면 그는 그야말로 '노래 잘하는 가수'에서 멈춘 셈이다.

5. 기타

에버랜드의 시설 중 하나였던 지구마을의 노래도 조영남이 불렀다. 지구마을 개장 당시 나눠줬던 지구마을 LP판을 보면 작사는 윤석중, 작곡은 김규환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가수로는 조영남이 참여했다고 표기되어 있어 밝혀졌다.[29]

보통 가수들이 세상을 떠나면 장례식에서 그 가수의 유명한 노래를 불러주는 게 관례인데, 조영남은 이것 때문에 난감하다고 토크쇼에서 말한 바 있다. 즉,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부를 노래는 보나마나 공전절후의 히트곡인 '화개장터'일 텐데 가사부터가 '구경 한번 와보세요'로 장례식 분위기 완전 엎어놓을 노래이다 보니... 더 웃긴 건 그보다 더한 가수도 있을 뻔했었다는 사실. 바로 즐거운 잔칫날(잔치잔치 벌렸네~ 로 시작하는 그 노래)로 유명한 블루벨스 중창단[30] 이야기다. 2001년 원로가수 고운봉 장례식에 왔던 원로 코미디언 남보원이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 그래서 이후 조영남은 자신의 장례식 때 불러달라는 곡을 직접 만들었다는데, 사실 '모란동백'은 조영남이 만든 노래가 아니다. 원래 있던 곡을 리메이크한 것. 그런데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는 본인이 만들었다고 개드립을 쳤다. 사실 꼭 본인이 만들었다고 한 것이 아니라 뉘앙스가 "나 죽으면 이거 꼭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른 노래임"으로 들리기는 했다.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 당한 적이 있으며, 마라톤 대회에서 같이 달린 사람들은 이게 몰래카메라인지 알고 쉬엄쉬엄 달렸을 때 본인 혼자만 죽어라 뛰었다. 응원하던 다른 연예인들(동기 및 코미디언들)이 응원 플래카드를 들고 그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 플래카드 앞에는 '필승'이란 격려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그 플래카드들을 뒤집자 '완전히 돌았군!' 같은 말들로 반전을 보여줬으며 물론 시청자들만 보게 만들었다.

결승선을 통과하여 축하하는 폭죽을 터뜨리면서 '몰래카메라에 속으셨습니다~' 현수막이 내걸렸는데, 본인은 숨이 가뻐서 헥헥거리느라 그걸 보지도 못했고 이경규와 다른 사람들이 저거 보라고 한 다음에야 그걸 보더니만 정말로 화가 나 이경규의 등짝을 때리면서 "야... 난 죽어라 달렸어!!"라고 호통쳤다.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이주일과 함께 나왔는데, 둘 다 타이즈를 입고 타이즈 안에 커다란 포탄을 넣고선 사타구니 쪽이 묵직하게 축 늘어진 것을 보여주며 웃기기도 했다.

이주일 문서에서 서술했지만, 이주일이 생전에 유일하게 외모로 우위(?)를 점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극장식당에 출연해 그의 얼굴을 본 어린아이가 울자 이주일이 한 촌철살인 멘트는 압권.

다른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조영남 노래를 코미디 뮤직비디오로 만든 것에서 도시로 온 시골 총각을 연기한 적이 있는데, 서울 와서 구두닦이로 일하는데 어느 꼬마아이가 운동화 닦아달라고 발을 내밀자 어이없다는 듯이 보다가 구두약 묻은 손으로 아이 볼을 꼬집는다. 그러다가 이를 본 아이 아빠가 화내면서 구두약을 조영남 얼굴에 된통 칠하는 보복을 당했으며, MBC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최병서배일집 같은 코미디언들과 코미디 연기도 한 바 있다.

위에도 잠깐씩 얘기가 나왔지만, 책을 여러 권 냈고, 잡지에 칼럼을 장기 기고하기도 했다. 글재주도 준수해서 맛깔스럽게 잘 쓰는 편이다. 단지 글 내용 중 검증되지 않은 내용에 본인 자랑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서 그렇지. 당연하지만, 저건 칼럼이 절대 아니다.

군복무는 육군본부[31]에서 했으며, 보직은 행정병이었다. 근데 웃긴 건 본인의 대학 동창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본인의 중대장으로 있는 바람에 되려 꿀이란 꿀은 죄다 빨고 편하게 군복무를 하다 왔다고 한다.[32]

의외의 사실로 건설안전 노래를 불렀다. 노가다를 하는 사람들은 아침마다 아주 지겹도록 듣는 노래 중 하나다.

2014년에 당시 26년 만에 신곡 통일바보를 발표했다.

일본에 조영남의 사생활 논란과 관련해 비슷한 행보를 보인 인물로 콘도 마사히코가 있는데, 이 사람도 조영남이 데뷔한 지 1년이 되는 해에 태어났다.

1980년대 중반 어느 티비 쇼에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후배 가수 이용과 같이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용의 히트곡 중 하나인 <사랑과 행복, 그리고 이별>이라는 곡을 듀엣으로 불렀다. 기합이 제대로 들어간 조영남이 열창을 시작하니 같이 부르던 이용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그대로 묻혔다.

2023년 10월 조영남 2024 앨범을 발표하였다.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한 부산엑스포라는 노래와 나처럼 살지 마세요 라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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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945년 4월 2일[2] 지금 위키백과에서는 배천 조씨로 나와있지만, 과거엔 한양 조씨로 나왔다. 실제로 한양조씨 대종회에도 참석했다.# 이 자리엔 조응천도 있었다.[3] 이경규와 같이 선 사진 상으로 이경규보다 확실히 작다.[4] 본부사령실에서 근무했다.[5] 모태신앙이라고 여러 개신교 계열 방송에서 밝힌 적이 있다.[6] 성악가교수. 2002 월드컵 폴란드전에서 애국가를 독창했다.[7] 전 배우자는 윤여정(이혼), 백은실(이혼). 두 아들은 전처 윤여정 소생이며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인이다. 딸은 재혼 후 1995년 입양했다.[8] 가요계에서 최초로 성악을 접목시킨 사람은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활동했던 현인이 시초라고 할 수 있다.[9] 대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현대 미술에서 작가의 역할이 독창적인 아이디어(화투라는 독특한 소재)의 창출에 있고, 여러 명의 조수를 동원해 작업을 분담하는 추세이기에 그림을 구입한 사람이 해당 작품이 조영남의 친작임을 상정할 근거가 없으며, 따라서 작품 생산에 있어서 다른 관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것이 사기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판결문에서나 법적 다툼의 맥락에서는 '대작'이라는 가치판단성 판단이 배제되어 있으며 '조영남 그림 대작' 등의 프레임은 조영남 개인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생산방식을 부정적 방향으로 이해함을 전제하기에 조영남의 구설이나 기타 개인적 논란과 상당히 맥이 다르다.[10] 북한 행정구역 기준 황해북도 평산군[11] 그가 불렀던 번안곡인 내 고향 충청도 가사 첫 구절이 '일사후퇴 때 피난 내려와'로 시작한다.[12] 조영남의 노래 중 '삽다리'라는 노래의 가사에 '내 고향 삽교를 아시나요'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을 말한다. 예산군 삽교면(현 삽교읍) 두리 642번지가 사실상의 고향이라고 한다.[13] 서울사대부고, 대광고 입시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고 무시험 입학이 가능한 강문고(現 용문고)에 입학했다. 10회 졸업생이며 동기생으로 백일섭이 있다. 예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혼자 상경해 큰 누나의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14] 원곡도 미국에서 유명한 명곡에 속한다. 톰 존스가 불렀다.[15] 딜라일라 이야기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라 상체 노출이 심한 토가와 비슷한 의상을 입고 나왔고 딜라일라 역할을 한 여배우까지 동원했다. 1960년대 후반이었으니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다. 보수적이던 당시 방송분위기에 상상도 못할 복장으로 거의 오페라 수준으로 공연을 하는데 당시로서는 심한 노출에 칼까지 들고 나와 퍼포먼스하며 노래를 불렀으니 당연히 큰 이슈가 되었다. 다음날 신문에도 그 퍼포먼스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곡이 원래 명곡이며 짧은 편이지만 후렴부 임팩트가 강해서 길지 않게 듣기에 훌륭하므로 퍼포먼스와 조화가 잘 맞아 인기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당시 그는 순수 성악 스타일로 짧은 시간에 감정을 많이 싣는 칸타타처럼 부른데다가 초기 번안가사도 최근에 고쳐진 가사에 비해 더 강한 편이었다. 과거 초기 방송분량을 들어보면 반주방식, 창법, 가사가 최근보다 훨씬 더 에너지 넘치게 강한 분위기로 불렀다는 걸 알 수 있다. 최근 버전은 반주도 가사도 약화시킨 상태에 (조영남의 중년 이후 생긴)'쪼'(버릇)가 추가된 창법이라 곡 전체의 느낌이 많이 순화된 버전이다. 말하자면 그의 데뷔는 대중음악 스타일로 성공한 톰 존스의 원곡과 달리, 성악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파격적이고 수준 높은 실험성이 돋보인 무대였다.[16] 방송 데뷔 전에도 미군부대 공연에서 돈 잘 받고 잘 나가던 가수였다.[17] 간단히 말해서, 부흥회다. 1970년대 초는 막 '세계최대의 교회'를 건립했던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포함해서 한국 대형교회들이 총집결해서 초대형 전도대회를 연이어 열었고, 1973년에는 100만 인파를 동원했던 최대의 흥행이었다. 현재 여의도공원 전체와 양쪽 도로까지 포함한 면적 전체가 당시엔 아무 것도 없는 광장이었는데, 거기가 가득 찼었다. 즉, 이걸 절대로 일반 집회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괜히 조영남이 뜬금없이 미국으로 날아가서 신학 학위를 받고 돌아오는게 아닌 것이다.[18] 과거에 윤여정이 딴지일보에서 참석한 인터뷰에서는 하는 수 없이 조영남을 C로 지칭했다. 조영남의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하면 'Cho Yeong Nam'이니까.[19] 파일:external/file2.instiz.net/ce87516b074962e76e81ed95bb5e06b5.jpg
이게 윤여정의 20대 시절의 모습인데 최고의 장희빈이라는 타이틀까지 있었던 당대 최고 스타였다. 젊은 사람들에게 윤여정은 그저 원로 배우지만, 젊을 때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인터넷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저 때에도 윤여정과 엮이는 결혼과 이혼 문제가 떠돌아다녔다. 실제로 조영남은 인기가 절정이던 배우를 지옥불로 떨어뜨렸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20] 사실 1990년대부터는 딜라일라를 방송에서 부른 적이 없었는데,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20여년 만에 옛날 회상을 하다가 갑자기 부르는 바람에 다시 주목받게 되어 그 후 수년간 계속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21] 조영남 본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팔 마음이 없다고 한다. 단, 재건축 하던 시기에는 팔라는 요구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22] 1960년대 말 ~ 1970년대는 우리나라 경제가 고도 성장을 거듭하며 흥하던 때라 적은 숫자의 인기 연예인이 버는 돈이 상상을 초월했다. 현재 가치로 계산하면 연간 수십억에서 백억 이상이었으며, 게다가 금융실명제도 없었고 오로지 현금 거래였다. 제작자들이 돈을 보따리로 들고 와서 줄을 서던 때로, 최민수의 부친이자 1960/70년대 최고의 영화배우 최무룡신성일 쯤 돼도 본인이 얼마나 버는지도 몰랐던 시대다.[23] 대신 재건축 공사를 하면서 처음 지어질 때 크기보다 2배 이상 공간이 커진 거라 확장하는 추가 비용이 크게 필요해 당시 나이와 체력에 비해 행사와 방송 출연을 하도 많이 하느라 몸고생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도 목숨 걸고 지켰다고 한다.[24] 다만, 제시와 합동 공연을 했을 때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장르에다가 빠른 랩이 많이 들어간 곡이 나오는 바람에 연습 중에 리듬이 안 맞아 마찰과 곤혹스러운 상황을 겪었다.[25] 일례로 과거 신해철이 음악인이 되고자 했을 때 집안 어르신들이 노래를 하려면 조영남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26] 이 때문에 이용의 불후의 히트곡 '잊혀진 계절'을 거절했다고 한다.[27] 물론 최근의 조영남도 타고난 힘을 전부 잃지는 않았다. 힘있게 음을 질러서 관객들을 감동시키는 방법은 기교를 앞세운 창법보다도 더욱 어렵다. 천부적 재능의 영역으로 기교가 딸리는 사람이 기교를 익히는 것이, 힘이 딸리는 사람이 힘을 키우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양희은도 조영남의 가창력을 평가하면서 "내가 저 나이대가 되었을 때에도 저렇게 힘차게 노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술회한 바 있다.[28]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성악인들은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든 원래 힘을 유지하려고 사력을 다한다. 그래도 힘이 조금씩 떨어지기 때문에 클래식 무대 출연 회수를 줄이다가, 더는 가망이 없을 때 정식 성악가수 세계에서 물러나, 전문 교육자가 되거나, 대중음악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조수미처럼 알아주는 레전드도, 40대가 되면서 조금씩 정통 클래식 무대 출연을 줄이고 클래식+대중음악 혼합무대 출연을 늘리고(이건 그녀 본인의 소신과도 관계가 있지만) 있는데, 아직 정통 클래식 무대도 서고 있어 현역 은퇴는 아니기 때문에 50대의 나이에도 매일같이 근력 운동이나 유산소 운동을 하여 최대한 힘을 유지하려고 꾸준히 노력한다. 그만큼 성악은 힘이 중요하다. 사실 중년~노년기에 특별한 체력관리 없이는 아무리 천재적 기교와 음악 재능이 있어도 한 번의 정통 클래식 무대조차 소화할 수 없다.[29]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를 돌고 돌면 별처럼 많은 형제“ 이 곡은 조영남이 부른 게 아니라 이름이 없다는 어린이 합창단이 부른 것이다. 조영남이 부른 건 개장당시 주던 세계 각국 음악이었으며 기구에서 재생된 음악이 아니다. 또 지구마을 음악이 리뉴얼을 거치면서 가사는 안 바뀌었지만 다른 합창단을 고용하여 다시 녹음했으며 가사 없이 부르는 버전도 추가됐다.[30] 하나 블루벨스 중창단 멤버 중 현양, 김천악, 박일호는 모두 이미 타계했고, 서양훈만 2023년 기준으로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31] 이 당시에는 계룡시가 아니라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었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와 3군본부가 모두 한 자리에 있었다.[32] 참고로 조영남의 동창분은 중대장을 마지막으로 대위 전역하고 7급 지방직(서울시) 공무원이 되었다고 하며, 용산구청에서 근무하고 4급 공무원까지 20년 정도 복무하고 정년퇴임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조영남과 가끔씩 만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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