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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D1F54><colcolor=#fff> 임택근 任宅根 | Yim Teckun | |
출생 | 1932년 12월 1일[1] |
경기도 경성부 수송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 |
사망 | 2020년 1월 11일 (향년 87세)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 |
본관 | 풍천 임씨 (豊川 任氏)[2] |
학력 | 경성수송국민학교 (졸업) 휘문중학교 (졸업 / 42회) 연희대학교 문과대학 (정치외교학 51 / 학사) |
종교 | 가톨릭[3] (세례명: 사도요한) |
가족관계 | 부인 여양 오씨(1941년생) 동생 임양근 장남 임재범 외조카 성 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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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아나운서이다. 오늘날 네티즌들에겐 임재범과 손지창의 생부로 더 유명한데, 물론 후술되어있듯 본인의 잘못으로 족보가 심하게 꼬인 케이스라 자식들과도 거의 의절해 안 좋은 의미로 유명하다.2. 생애
2.1. 약력
1932년 12월 1일 경기도 경성부 수송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서 아버지 임긍순(任兢淳, 1895 ~ 1962. 9. 4)과 어머니 청풍 김씨(1895 ~ 1970. 11. 17) 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수송국민학교, 휘문중학교(42회), 연희대학교(現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51학번)를 졸업하였다.연희대학교 1학년 재학 중이던 1951년, 서울중앙방송국(現 한국방송공사) 아나운서로 입사하여 방송계에 발을 들였는데, 당시 중앙방송국 아나운서 지원 자격은 대학교 졸업 이상이어야 했다. 이제 막 문맹에서 벗어난 이들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시절이었고, 학교에 다니는 유소년들도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태반이 부모 일을 돕거나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가던 시절이었고, 그런 점에서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는 당대의 엄청난 엘리트였다. 때문에 임택근은 당연히 자격 미달이었지만,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방송국에 쳐들어가 당시 방송국장 노창성[4]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제발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달라"며 몇날 며칠에 걸쳐 떼를 쓴 끝에 노창성이 예외적으로 아나운서 시험 자격을 주었고, 그 결과 그는 시험에 합격하여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나운서가 된 임택근은 <스무고개>와 <노래자랑>[5] 등 당대의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유명해졌으며, 이후 올림픽 중계방송을 맡으면서 스포츠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물론 당연히 초창기 TV 프로그램에도 여럿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4년 MBC로 이직하면서 방송부장, 이사 등 고위급 직책을 맡았고, 동시에 올림픽 중계방송 등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여럿 진행하다 1969년 MBC TV 개국 후 아침 토크 프로그램 임택근 모닝쇼를 1년 정도 진행했다. 이는 한국 TV 프로그램 명칭에 진행자 이름이 들어간 최초 사례다.
그렇게 오랜 기간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을 진행하면서 얻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1971년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후보 김상현에 밀려 36%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며 낙선하였다.
임택근은 방송인 시절부터 김상현과 상당히 친한 사이여서 선거 때 서로 비방하지 말고 페어플레이 하자며 약속하였고, 합동 연설회 때 서로 손을 맞잡고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선거운동 하겠다!" 라며 선언하여 유권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이는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역대급 친화력을 자랑하면서 적이 없다시피 했던 김상현[6]의 성격 덕분이기도 했다.
이후 다시 MBC로 복귀하여 상무이사, 전무이사를 지내고 1980년 MBC-경향신문 사장이던 이환의가 경질되고 이진희가 후임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사장 직무대행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신임 사장 이진희는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새 시대를 맞이하여 방송국과 신문사 내 구시대 인물을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대다수의 중역들에게 사직을 요구했고, 임택근을 비롯한 간부들이 제출한 사표가 전부 에누리없이 수리되면서 회사에서 짐을 싸야 했다. 그렇게 그는 방송계를 떠났다.
퇴사 후 1982년부터 대한교육보험 상무를 지내다 1985년 한국종합광고를 세운 바 있고, 1989년부터 4년 동안 초대 방송문화진흥회 감사를 거쳐 1993~1997년 용산케이블TV 회장, 2002년 누리비전 회장, 2004년 코스모스악기 상임고문까지 맡는 등 기업인으로서의 행보를 보였다. 1990년대 중반에 다시 정계에 발을 걸치기도 했다. 물론 1년 남짓 활동한 수준이기는 하다. 심지어 1993년 남서울로터리클럽 회장을 비롯, 한국복지재단 이사와 연세대학교 동문회 운영부회장, 마칭밴드협회 상임고문 등을 역임해가며 각종 사회 활동도 했다.
그 와중에도 1990년 KBS1 <노래에 사랑싣고>의 MC로 20년 만에 마이크를 잡기도 했으며, 2002 한일 월드컵 때 MBC 라디오 중계 캐스터로 복귀했다. 1997년부터 4년여 간 제3대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도 역임했다가 이후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운동 부족으로 몸무게가 99kg이었으나 매일 저녁 동네 한바퀴 걷기와 복부 타격 1,000회 등의 꾸준한 운동 및 식사 조절로 80kg까지 감량할 정도로 건강에 신경을 썼다.
2.2. 부상과 사망
2008년, 진해군항제 초청 당시 버스에서 하차 도중 발을 헛디뎌 경추 6, 7번이 눌려 목을 심하게 접지르는 사고를 당했고, 초기 2번 병원에 갈 때는 "물리치료만 받으면 된다"는 답변만 들었다. 이후 서울에서 침술 치료를 받다가 목 통증이 걱정되어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MRI 검사를 거쳐 수술한 후, 하반신 마비를 입어 이후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다.2020년 1월 11일 오후 8시경, 향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019년 10월에 심장질환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11월에는 뇌경색 진단을 받은 뒤 12월에 다시 폐렴으로 인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고 한다. 상주는 임재범이며, 손지창 - 오연수 부부도 빈소를 지켰다. # 임재범과 손지창 둘 모두 호적 정리 후 임택근과는 의절했지만, 그래도 혈연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평이 있다.
보통 네티즌들은 어떤 특정 유명인이 사망하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와 같은 추모의 반응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임택근에 대해서는 그런 말은 거의 없고 살아생전의 부도덕한 사생활을 비난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3. 여성 편력과 패륜 행위
2011년 12월 6일자 KBS2 《김승우의 승승장구》 임재범 편 및 2012년 7월 10일자 tvN 《백지연의 피플 INSIDE》를 통해 여성편력 논란 등의 어둠이 드러나면서 당대에 그의 방송을 보고 들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임재범과 손지창이 알고 보니 임택근의 혼외자식, 즉 서로 이복형제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2001년 1월 25일 《연합뉴스》 기사에서 처음 다뤄졌다.임재범 문서의 가족사 문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첫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자 임택근이 바람을 피워 얻은 자식이 바로 임재범과 손지창인 것. 더 가관인 것은 바람도 한번만 피운 벗이 아니라 임재범의 모친은 2번째 여성, 손지창의 모친은 3번째 여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또 한번 더 꼬이는 것이, 임재범은 임택근의 2번째 부인의 슬하로 호적에 올라있었다. 즉, 임재범의 친모인 임택근의 2번째 여성과 임택근의 2번째 부인이 서로 다르다는 것.(...) 이딴 출생의 비밀은 어지간한 막장 드라마에도 나오기 힘들 듯. 더군다나 손지창의 경우 여기저기 마구 떠넘겨지다 결국 마지막으로 떠넘겨진 사람이 손윗동서인데, 손지창이 임씨가 아니라 손씨인 것은 그 손윗동서(손지창 입장에선 이모부)의 성씨가 손씨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절에는 가부장제가 여전히 강하던 시절이었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현재에 비해 많이 떨어졌으며, 거듭된 혼란과 전쟁 등의 난리통으로 성비가 엉망이었기 때문에 권력이나 재산이 있는 남자들이 첩을 두고 두 집, 세 집 살림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의 시대상이 그랬다고 한들 씨를 뿌린 아버지로서 첩의 자식들이 본가로부터 눈칫밥을 먹고 자라는 상황이 되더라도, 아버지로서 책임감으로 자식을 거두고 돌봐주면서 최소한의 도리를 해야 되는 것은 이때도 상식인 시대였다. 첩을 두더라도 남편과 아버지로서 책임은 져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택근은 자신이 싸질러놓은 자식들을 전혀 책임지지 않았다.
임택근은 그렇게 바람을 피워 가며 첫째 자식 임재범을 낳아 놓고도 뻔뻔스럽게도 그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아, 임재범은 호적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숨겨져서 자랐다. 그렇게 고아원에서 자라도록 방치하다가 나중에 첫 부인과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재혼한 뒤에는 결국 호적에 올려주기는 했지만, 임재범의 생모가 아닌 자신의 2번째 부인의 아들로 호적에 올리는 웃지 못할 촌극을 저질렀다. 손지창에게는 한술 더 떠 아예 태어날 때부터 모른 척해서 엄마의 친언니인 이모 부부의 가정에서 자라도록 만들었다. 손지창 혼자 성씨가 다른 이유도 이모부의 성씨를 따랐기 때문이다.
후에 손지창이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자신의 생부가 누구인지 알게 된 후,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인 임택근에게 첫 등록금을 지원해 달라고 찾아갔으나 임택근은 그마저도 거부했다고 한다. 손지창 본인의 발언에 의하면 정말 자신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등록금을 달라고 찾아갔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래도 아버지로서 아들의 첫 학기 등록금만큼은 내주는 것으로 최소한의 도리는 해 주지 않겠는가 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생부를 알려준 건 이모 부부. 손지창은 "어느 날인가부터 엄마, 아빠[7]가 '사실 너에게는 진짜 부모님이 따로 있다'고 알려줬다"고 하며, 형과 누나들이 사실 사촌형누나라고 말해주는 순간 너무 놀랐다고 한다. 평생 자신이 화목한 집안의 막내아들이라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
그런데 정작 둘이 대면한 자리에서는 임택근이 수백만 원짜리 시계를 찬 상태로 "나도 어렵다"며 뻔뻔한 태도로 거절했고, 이에 손지창이 끝끝내 분노하여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크게 화를 내자 임택근이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돈을 주겠다고 급하게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 더러운 꼴에 환멸을 느낀 손지창은 두 번 다시 아버지를 찾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임택근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손지창을 끝까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여성편력과 사생아에 대한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2001년 2월 7일자 KBS2 《연예가 중계》를 통해 '임재범의 결혼식장에서 3부자가 다시 만난다'는 식으로 보도된 바 있다.
당시 방송상으로는 손지창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부자관계를 회복해서 서로 왕래하며 지내기로 했다는 식으로 보도되었으나, 훗날 손지창은 "그건 임택근과 친분이 두터운 방송사 고위 관계자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찍은 것이며,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할 생각도 없고 다시 보고 싶지도 않다"고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사실 앞에 나온 임택근의 방송 경력만 보면 알겠지만, 해당 시점에서 임택근과 같이 직장생활을 한 후배들이 주요 방송사의 임원직을 역임했을 시점이었다.
임택근 본인부터가 은퇴한 방송인임에도 워낙 뒷배가 세서 2000년대 초반까지도 방송계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인 2002 한일 월드컵 때 한국 국가대표팀 경기의 라디오 중계 때 초대 캐스터로 나왔던 것이 그 예. 그들이 자신들의 선배인 임택근의 체면을 생각해서 손지창에게 반 협박으로 어거지 화해를 시킨 것. 어쨌든 연예인으로 방송활동을 해야 하는 손지창의 입장에서는 고위 간부급 방송국 임직원들이 까라고 하면 깔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 울며겨자먹기로 한 수순이었다.
손지창, 임재범 모두 영상에도 나오듯이 아버지라고 해도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
이후 그의 추악한 행실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많은 질타를 받았음에도 사과는커녕 오히려 "두 아들을 둬서 행복하다, 두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윤리관이 심히 의심되는 발언을 일삼는 등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 결국 그 두 아들들은 끝내 반성하지 않는 생부를 외면하고, 각자의 2세를 위해 호적을 정리한 뒤 생부와 법적으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편의상 호적을 정리하고 법적으로 떨어져 나간다고 표현했지만 손지창과 임재범은 임택근이 호적에 올리지 않은 덕에 오히려 생부와 손쉽게 절연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자식 생각한답시고 임택근이 호적에 그 둘을 올렸다면, 대한민국 법 체계에서는 한 번 부모-자식 관계로 등록될 시 이를 말소할 수 있게 하는 법률조항이 없어 아무리 민·형사소송을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법적인 관계를 끊는데 쓸데없는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호적상 아버지가 없으므로 기록상 임택근과 이미 남남이기 때문에, 그냥 법적 조치고 뭐고 없이 한평생 만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심지어 임택근이 버스에서 넘어져서 반신불수가 되는 사고를 당한 뒤에도 임재범에게 "아버지가 지금 굉장히 힘들고 어려우며 몸과 마음도 많이 망가진 것은 알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라고 싸늘한 냉대를 듣는 등 뿌린 대로 거두고 있다.
언론학자 김민환(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명예교수)의 책 <아나운서 임택근>의 말미에 손지창과의 관계가 언급되어 있지만, 위 방송 프로그램 등 일부 매체에서 다룬 내용은 대부분 생략되었고 극도로 순화된 서술만 있다.
임택근의 중앙방송국 3년 선배인 장기범은 임택근과 같은 시기에 방송인으로 활동하면서 생전 불의를 참지 못하는 꼿꼿하고 강직한 선비 기질과 바른 언행, 몸가짐[8]으로 사후에도 언론계에서 끊임없이 존경받으며 임택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임택근의 경우 상술한 사생활은 차치하더라도 아나운서 시절부터 당대 정권과 밀착하여 이승만, 박정희와도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승승장구한 반면, 언론은 진실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정권의 입맛을 맞추는 보도 따위는 거부했던 장기범은 높으신 분들에게 밉보이면서 지방 방송국장 등 한직만 전전하다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서로 어떤 삶을 살았을지 몰라도, 장기범은 현재도 의롭고 모범적인 방송인으로 종종 기억되는데 반해, 임택근은 한국아나운서클럽 등 방송/아나운서계에서의 원로 대접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겐 사실상 잊힌 퇴물이 되었으며, 그나마 회자되는 것도 상술된 자식 문제나 독재정권 빌붙기 등의 행태로 극히 부정적인 이미지로나 거론되는 수준이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구 을) | [[민주공화당|]] | 37,210 (36.54%) | 낙선 (2위) |
5. 여담
임택근(우)과 임양근(좌)
둘째 남동생 임양근(任亮根, 1941~2011?)은 1967년 동양방송 아나운서 4기로 입사하여 1970년대에 형과 같이 아나운서로 활동했다.[9] 하지만 임양근은 형과는 다르게 김보애와 열애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10] 외에는 사생활 논란은 전혀 없어 못된 형과 착한 아우 사례에 해당된다.[11]
- 전 주한미국대사 성 김(한국명 김성용)의 외삼촌으로, 임택근의 누나 임현자의 아들이 성 김이다. 참고로 임택근의 자형이자 성 김의 아버지인 김기완은 전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고 한다.
- 어머니 청풍 김씨는 김진달(金鎭達, 초명 김진룡(金鎭龍), 1870 ~ ?)의 딸이다. 김진달은 1891년(고종 28) 증광 진사시에 3등 30위로 입격하고 이듬해인 1892년 제2회 별시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해 비서감 승(秘書監丞)에 올랐다. 김진달의 아버지 김규식(金奎軾, 1838 ~ 1896) 또한 진사시에 입격하고 1870년(고종 7) 정시 문과에 병과 16위로 급제한 문과 출신자이다. 병조 참판(종2품)에 오르고 갑오개혁 뒤에는 인천부 관찰사(仁川府觀察使)와 충주부 관찰사(忠州府觀察使) 등을 지냈으나, 충주부 관찰사 재직 중에 단발령 강행에 앞장선 것으로 보수적인 지식인들의 증오를 사다가 1896년 2월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진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참고로 독립유공자 엄항섭은 어머니 청풍 김씨의 고종사촌동생이다.
5.16 군사정변 당시 5월 18일에 있었던 육사 생도들의 거리 가두행진을 중계방송하기도 했었다.[12] 중계차를 타고 가다가 그 열기에 흥분해 중계차에서 뛰어내려 군인들과 함께 걸으면서 중계를 했다고. 임택근 본인은 이날을 "내 일생에 가장 바쁘고 보람 느꼈던 날"이라고 회고했다.# 독재정권의 앞잡이다운 회고나 다름없는 셈.
6. 참고 자료
- 저서
- 방송에 꿈을싣고 보람을 싣고 - 문학사상사. 1991.
- 외부 자료
- 아나운서 임택근 - 김민환 저. 나남. 2008.
- 2005년 10월 11일자 <서울신문> 기사
- 《여성동아》 2011년 12월호 인터뷰 기사
[1] 주민등록상 생일은 1931년 11월 11일이다.[2] 죽애공파(竹崖公派) 29세손 ○근(○根) 항렬이다. 죽애공파종회 부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족보)[3]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다고 한다.[4] 앙드레 김 이전에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린 노라노(본명 노명자)의 부친.[5] 이 중, <노래자랑>은 여러 개편과정을 거쳐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프로그램이 되었다.[6] 그는 당시 여당의 초 강경파 의원이던 차지철과도 허물없이 지낼 정도였다.[7] 지금도 손지창은 이모와 이모부를 부모로 여기며 호칭도 그렇게 부른다. 사실 생부의 존재는 그 전부터도 약간 눈치는 채고 있어서, 가끔 부모(이모, 이모부)가 어쩌다 한 번씩 단둘이 무거운 분위기로 들어가 방에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어 그 때마다 분위기가 이상했고, 그래서 긴가민가한 느낌이 있었는데 결국 이모 부부에게 직접 진실을 듣고 나니 한편으로는 '역시나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생각에 납득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끈끈한 우애가 현재도 이어져 부인 오연수도 그들을 시부모로 부르며 모신다고 한다.[8] 게다가 장기범은 생전 방송계 최고의 주당으로 유명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지만, 술 때문에 사고를 친 적은 한번도 없고 현직으로 근무하던 34년간 무결근 무지각이란 기록을 세운 바른 생활 사나이였다.[9] 2000년대 중반에 알래스카에서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10] 김보애의 자서전에서 언급된 내용이다.[11] 사실 임양근은 아나운서 생활을 그리 오래 못하고 일반인으로 돌아가면서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형과 같은 악행 유무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12] 참고로 이 가두행진을 주도하고 벌인 사람은 다름 아닌 전두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