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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 車智澈 | Cha Ji-chul | |||
<colbgcolor=#083388><colcolor=#fff> 출생 | 1934년 11월 6일 | ||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오천리[8][9] | |||
사망 | 1979년 10월 26일 (향년 44세)[10] | ||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11] | |||
본관 | 연안 차씨[12] | ||
호 | 용천(龍川) | ||
재임기간 |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 ||
1974년 8월 22일 ~ 1979년 10월 2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83388><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차수찬[13], 어머니 김대안 | |
형제자매 | 3남 3녀 중 차남[14] 이복남동생 차상철 의부누나 3명[15] | ||
배우자 | 송희성 (이혼) 윤보영 (재혼) | ||
자녀 | 슬하 3녀 | ||
학력 | 오천공립국민학교[16] (졸업) 용산중학교 (졸업) 용산고등학교 (졸업) 국학대학[17][18] (정치학 / 학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법학 / 석사[19]) 한양대학교 대학원 (법학 / 박사[20]) | ||
종교 | 개신교(예장통합)[21] | ||
의원 선수 | 4 | ||
의원 대수 | 6, 7, 8, 9 | ||
군사 경력 | |||
임관 | 갑종간부후보생 (74기)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54년 1월 ~ 1962년 8월 21일 | |||
병과 | 포병 | ||
최종 계급 | 중령 (대한민국 육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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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제4공화국 박정희 유신정권에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경호실장을 역임하였으며 당대 정권의 실세로 통했다. 10.26 사건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되어 생을 마감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차지철/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가족
3.1. 부인
군인 시절 만난 이화여대 국문과 출신 송희성[22]과 초선의원 시절 결혼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이혼했다. 차지철의 측근들은 이 이혼이 송희성의 복잡한 남성 문제 및 시어머니 부양 거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신빙성이 부족하다.[23] 이후 송희성은 고향 인근인 광주 옥천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했고 광주YWCA 이사로 활동하던 중 남편인 전남대학교 교수 노희관[24]과 함께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수감되기도 했으며 차지철과의 관계를 평생 감추려고 했다. 이후 전남도의원을 거쳐 오월민주여성회 회장, 5·18기념재단 이사, 한국여성지도자연합 광주·전남회장 등을 지냈으며 2022년 사망했다.두 번째 부인 윤보영[25]은 피아노 연주자라고 알려져 있으며, 차지철과의 사이에서 딸 3명을 두었다. 1981년 친부모, 자녀들과 오빠 윤순웅 씨가 있던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이후 사기 사건에 연루되는 등 구설수에 오르다 1997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세 딸들은 미국에서 호화 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그 돈은 차지철이 빼돌린 재산일 가능성이 많다.(하지만 증거는 없다) 그것도 모자라 국가유공자 가족 신청을 했으나 미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패소했다.
3.2. 모친
1990년, 서울신문사 여성월간지 <QUEEN>에서 차지철의 어머니인 김대안(1898. 12. 06 ~ 1998. 12. 23) 씨가 살아있다고 하여 보도한 바 있다.링크 당시 아흔 둘이던 차지철의 모친은 홀로 가난 속에 병마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차지철이 어릴 적부터 나가던 교회 목사가 그나마 경제적 도움을 줘가면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차지철의 모친 김대안은 원래 주막을 차리고 주모 일을 했었다. 그러다가 '지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했으나 딸만 3명 낳은 뒤 이혼했다. 이후 옆 마을에서 차씨 성을 가진 남자 차수찬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들이 차지철이다.# 차지철의 이름에 '지' 라는 글자가 들어간 이유는 지씨의 아내였다가 차씨의 아내가 된 차지철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차지철은 어머니에게만은 엄청난 효자였는데, 어린 시절이 불우했기에 믿을 사람이라곤 어머니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배다른 형제들에게 무시당하고 맞고 살았는데, 그가 출세하자 이 형제들이 꼬리 흔들며 찾아왔지만 차지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형제? 나에겐 어머님밖에 피붙이가 없는데 뭔 개소리냐? 다시 찾아오면 그땐 제대로 살아남기 어려울 테니 얼씬도 하지마라."라고 하며 문 앞에서 내쫓았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효자였는지는 노태우 회고록에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어느날 박정희의 여름 휴가에 차지철과 함께 대동한 노태우는 박정희 가족들과 함께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박정희가 차지철 보고 물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자 차지철은 즉각 거부했다. 박정희가 다시 강권하자 차지철은 마지못해 바닷물에 종아리를 담궜으나 파도가 얕게 치자 즉시 질겁하며 달려나갔다. 거의 공수병 환자 같은 모습에 의아해진 박정희가 이유를 묻자 차지철이 "어머니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대답했고, 그 뒤로 박정희는 차지철에게 수영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차지철은 박정희를 거의 신처럼 떠받들었는데, 그런 박정희의 권유조차 어머니의 말보다는 후순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골프장 오픈 기념 행사로 초청이 되어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일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대로 차를 돌려 돌아간 일도 있었다. 어머니가 땡볕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데 자기가 놀러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26] 실제로 차지철은 죽을 때까지 골프를 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외에도 전 중앙정보부장이자 나중에 비서실장을 지내는 김계원의 모친이 편찮아서 안절부절 못할 때, 박정희에게 대신 보고하고 헬리콥터까지 빌려주는 등 "어머니"가 관련된 문제에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친절하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차지철이 살아있을 시절에는 어머니도 호강을 누렸다.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서 집에 에스컬레이터[27]를 달아줬을 정도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다 보니 김대안 할머니는 당시 이 월간지 인터뷰에서도 "내 아들이 남에게 죽일 놈 욕을 먹는 거 알지. 하지만 나에겐 하나뿐인 아들이었어. 그리고 이 에미에겐 지극정성하던 효자였고."이라며 아들을 그리워했었다. 그러나 차지철이 어머니를 위하여 마련한 큼직한 집이나 차와 돈은 어머니가 생전에 죄다 사기당하여 모조리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어머니의 지인들은 차지철이 믿던 그 목사야말로 사기꾼이라며 비난했다. 차지철이 그나마 어머니를 위하여 준비한 재산을 야금야금 다 먹었다고 비난했는데 당시 이 월간지에서 인터뷰하려고 하자 피했을 정도다.
참고로 당시 이 월간지에 나온 어머니는 달동네에서 볼 법한 허름한 집에서 텔레비전도 없이 이부자리와 정말 간단한 주방살림과 전자제품이라곤, 커피 포트 하나 뿐인 극빈층 신세였다. 치아도 모두 잃어 틀니를 사용하던 상황이었는데, 하필 취재 시기가 틀니가 안 맞아서 새 틀니를 맞추고 기다리던 시기라, 틀니조차 없어서 밥도 못먹고 커피 포트로 쑨 죽만 겨우 먹을 수 있던 비참한 신세였다. 지인들은 이런 할머니에게 그 목사가 경제적 도움이라고 주는 돈이 겨우 하찮은 용돈이나 던져주는 수준이라고 비난했다. 차지철 본인이 생전에 박정희의 채홍사 명령도 거절할 정도의 독실한 개신교인이었음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씁쓸해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결국 김대안 할머니는 1998년 12월 23일 경기도 하남시 영락노인복지센터 양로원에서 만 100세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28]
사망 당시의 기사를 보면, 1981년 즈음 차지철의 아내, 즉 며느리가 3명의 손녀와 함께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버려, 오랫동안 홀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링크 이후로 차지철의 친구들과 그 옛 부하들로부터 생활비와 병원비를 지원받았던 흔적이 포착된다. 98년 사망 당시, 그녀의 장례를 위해 가족들을 백방으로 찾았는데, 미국으로 건너간 며느리는 이미 2년 전에 죽은 상태였다. 또한 3명의 손녀들 중 첫째 손녀는 일찍이 사망을 했고, 귀국하려 했던 셋째 손녀도 건강 문제로 빈소를 찾지 않았다. 유일하게 빈소를 찾은 사람은 둘째 손녀 뿐이었다.
4. 김재규와의 관계
차지철은 박정희 시대 말기에 박정희 다음으로 가장 큰 권력을 차지해 횡포를 부리다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연회장에서 김재규에게 피살되었다.김재규 본인은 자신은 처음부터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부정적이었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29] 10.26을 저질렀다고 법정에서 진술했지만, 한편으론 차지철한테 빡친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총을 갈긴 다음에 이왕 이렇게 된 거 민주화의 영웅 코스프레로 이미지 세탁까지 할 겸 박정희도 쏘았다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주장은 주로 김재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로 아래에 서술되는 차지철과 김재규의 개인적인 원한관계에 주목한다.
하지만 김재규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도 차지철의 횡포가 김재규의 결심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이쪽에서는 차지철의 횡포를 그대로 묵인하는 박정희한테 실망한 김재규가 거사를 단행했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실제 김재규는 박정희가 정권 말기에 총기를 잃었다는 증언을 했다.
현대사 연구자들이나 언론인들 중에도 핵심 측근들간 의 충성 경쟁[30]을 유도해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던 박정희가 유신정권 말기에 가면 차지철만 편애할 정도로 합리적인 사고력을 상실했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31][32]
차지철, 김재규는 각각 유신정권 말기를 지탱하던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우두머리였고, 둘 다 엄청난 권력자였지만 사이는 견원지간이었다. 결국 차지철에게 밀려난 김재규가 10월 26일에 일을 저지른 셈이다.
둘이 이리도 사이가 나빠진 원인은 바로 개인적인 관계 때문이다. 먼저 차지철은 김재규보다 8살이 어리다.[33] 또한 김재규는 일제강점기일 때 전문학교까지 졸업하고,[34] 광복 뒤에 박정희와 본인의 고향인 구미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육군사관학교 2기[35]로 들어갔다. 반면 차지철은 서자였고, 공부는 곧잘 했지만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 못해서 태권도를 비롯한 무술 실력 덕분에 포병 간부 시험에 합격했다. 물론 그도 정식 장교였으나 육군사관학교 입학에 실패한 경험과 육사가 주는 상징성을 가지지 못한 탓에 많은 열등감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박정희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으면서 자기와 동급이거나[36] 더 높은 위치,[37] 심지어 군에 더 오래 머문 사람들[38][39]을 하대했다.[40]
김재규를 매우 싫어한 까닭은 또 있다. 차지철은 박정희 옆에서 5.16 군사정변을 주도했고, 정권 극초창기부터 박정희의 수족처럼 일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군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비치다가 혁명 반대론자로 몰려서 감옥에 갇혔지만 박정희가 직권을 쓴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이후 6관구사령관,[41] 방첩부대장[42], 3군단장을 지내다 중장으로 군 생활을 마친후 바로 유신정우회 1기 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까지 올라간 남자가 김재규다. 혁명을 반대한 사람이 박정희와 동기에 고향 후배라는 이유로 개처럼 일한 자신하고 직급이 같은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차지철을 무척 자극했다.
김재규에게도 차지철은 고까운 놈이었다. 일단 정통파 장교인 육사 출신도 아니고, 중장까지 올라간 본인과는 다르게 영관급인 중령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더군다나 차지철은 말이 중령이지 실제로는 중령 진급과 동시에 제대했고 실제로도 특전사 지역대장 정도가 최종보직이었으니 장교의 기본덕목인 '지휘통솔'이라는 걸 제대로 해 본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인간이 일찌감치 정치에 뛰어든 주제에 다른 군 장성 출신을 무시하고, 과격한 행실이나 일삼았기 때문이다. 차지철은 육영수가 총에 맞아 숨진 뒤부터 자신이 소속된 경호실을 강화하여 또 다른 군벌 집단처럼 만들었다. 게다가 정보 수집과 공작 활동은 중앙정보부 관할이지만, 차지철은 국가 예산을 동원해 경호실 산하에 또 다른 정보 기구를 만들어서 정보를 수집했다. 박정희는 말년에 차지철을 중정보다 많이 믿었다. 평소부터 주먹질을 일삼던 차지철이 쓴소리를 들었지만, 경호실장을 맡은 뒤부터 박정희에게 아부하면서, 자기 권력까지 키워 전횡을 휘둘렀다. 남들을 얕잡는 짓거리 때문에 차지철은 더욱 인망을 잃었다.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차지철보다 나이도 많고, 군 계급도 높지만, 차지철은 김재규를 그냥 "김 부장!"으로 불렀다.[43]
또한 박정희는 김재규를 매우 아껴 막내동생처럼 여길 정도로 사적으로는 가까운 사이였다. 이에 대해선 김종필, 김계원 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모든 인물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군인 시절에는 박정희, 김계원, 김재규가 삼형제처럼 어울려 다녔으며, 좀 처럼 사람들에게 말을 놓지 않는 박정희가 김재규에게는 "재규."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계원에 따르면 그게 오히려 문제가 되어 김재규를 질타할 때는 더욱 혹독했고, 김재규의 감정을 자극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에 반해 차지철에게는 존대를 하며 거리를 두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차지철이 충성 경쟁에 열을 올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박정희는 사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인 김재규에겐 채찍질을, 그리고 정치적 수족이었으나 사적으로 거리가 있는 차지철에겐 당근을 주며 균형을 맞추고자 하였으나 김재규는 오히려 친밀한 사이인 자신에게 채찍이 다가오니 반감이 배가되는,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킨 셈이다.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63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전국구 | [[민주공화당|]] | 3,112,985 (33.47%) | 당선 (22번) | 초선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경기 5[44] | 56,683 (71.43%) | 당선 (1위) | 재선 |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경기 6[45] | 54,021 (57.79%) | 3선 | ||
1973 | 제9대 국회의원 선거 | 경기 4[46] | 53,586 (35.70%) | 4선[47] |
역대 선거 벽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6대 총선 (민주공화당 전국구 22번) | 7대 총선 (경기 5) | |
8대 총선 (경기 6) | 9대 총선 (경기 4) | }}}}}}}}} |
6.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1 - 1963 | 정계 입문 |
[[민주공화당|]] | 1963 - 1974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4 - 1979 | 탈당[48] 사망 |
7. 사진
▲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와 차지철. 뒤에 박종규와 이낙선도 있다. |
▲ 1972년 5월 23일 군부대에 격려금 전달. |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포스터. 김두한과 차지철.[49][50][51] |
▲ 1975년 건군 27주년 국군의 날 행사 단상의 박정희와 차지철. 차지철은 경호실장임에도 지휘봉(!)을 들고 대통령 바로 뒤에서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다. |
8. 대중매체에서
8.1. 드라마
-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과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이대근이 연기했다. 이 때의 연기가 강렬해서 이후 박정희 시대를 다룬 드라마에서 차지철의 모습은 정형화된 감이 있다. 5.16 군사정변 당시 갖고있는 소총의 개머리로 헌병의 얼굴을 가격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외무위원장이라고 깝치자 이에 반발한 야당 국회의원과 청문회장에서 싸우기도 했다. 정인숙 살해사건 발생 이후 국회에서 야당의원이 이를 비판하자 단상으로 뛰어들어가서 몸싸움을 하기도 하고 경호실장이 된 뒤에는 교회에 가서 십자가에 무릎꿇고 "주여! 청와대 안에서는 각하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명대사까지 하기도 했다. 말년에 김재규(박근형 분)에게 "김 부장"이라며 박정희 대통령 옆에 앉아 박정희와 같이 김재규를 여러 번 질책하면서 김재규의 부아를 제대로 돋구었고 결국 10.26 사건 때 "이 새끼 너 건방져!"라는 말을 듣고 저격당했다. 현대사 정통 정치 드라마의 딱딱한 분위기를 전환할만한 개그 캐릭터로서의 활약 역시 두드러졌다.[53]
-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배우 정한헌[54]이 연기했다. 다만 현대극에서는 친근하면서도 능글맞은 아저씨를 주로 연기하는 정한헌이 차지철을 연기하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는 평이 있다.
- 2004년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배우 정흥채[55]가 연기했다. 박정희 사진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를 찬양하는 대사는 백미다. 극중 무식한 행동대장 기믹이어서 알게 모르게 개그 캐릭터화. 박종규와 대화 장면은 덤 앤 더머 그 자체다. 박정희가 한숨을 쉬고 계신다며 '각하가 너무 불쌍합니다' 눈물을 흘리고, 야당의 반대로 국회에서의 표결이 지연되자 의장실의 비품을 부수며 화를 낸 뒤 같은 당 의원들을 규합해 의장석을 무력으로 점령해 가결시킨다. 가결시키면서 맑은 눈으로 뿌듯해 하는 표정도 일품이었으며, 야당 의원들이 박정희와 여당을 공격하는 발언을 하면 책상 위를 점프해 넘어가면서 양복 자켓을 벗어 내리꽃기도 한다. 그리고 57회에서 스스로 정치학 박사라고 언급했었다. 대학 입학 후 사무실에서 걸어가면서 책을 보자 박종규가 '공부를 하려면 책상에서 해야지 정신 사납다. 그리고 너 학교에도 안 나간다면서?'며 일갈하자 '책상에만 앉으면 잠이 와서요. 근데 책 내용이 눈에 안 들어오네요'하면서 또 개그 캐릭화됐고 어찌어찌 학교를 마쳤다. 김두한이 똥물을 뿌릴 때 튄 똥에 맞는 봉변을 당할 정도. 드라마가 조기 종영하는 바람에 죽는 장면은 안 나왔다.
각하, 맞습니다. 캄보디아에서도 3백만 명을 죽였다는데 우리가 백만이나 2백만 정도 희생시키는 거야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은 지가 얼마나 됐습니까? 이제서야 겨우 먹고 살 만해지니까 정신 못 차리고 데모나 하는 자식들. 초장부터 세게 밟아버려야 합니다.
-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정호근이 연기했다. 저격당하기 전 "이 따위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말을 들었다. <제4공화국>에서 나온 말은 당시 김재규가 차지철을 쏠 때 한 말로 소수설이고 <제5공화국>에서는 공식 수사 기록인 다수설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공식 수사 기록과 사건의 목격자인 심수봉 씨나 김계원 씨의 증언 중 서로 다른 내용이 조금 존재한다. 공식 수사 기록은 최근에 당시 수사 기관의 강압적인 압력에 의해 나온 거짓 진술임이 드러나면서 심수봉의 말이 사실로 확인되었다.신재순과 중앙일보의 인터뷰
- 2011년 MBC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는 배우 전광렬이 연기했다. 등장 인물인 장철환은 차지철을 모티브로 만든 가상 인물인데 권력에 집착하는 다혈질적인 인물상은 차지철과 매우 흡사하다.[56]
8.2. 영화
이건 각하의 명령이야! 아, 그까짓 것들 그냥 탱크로 밀어버리면 돼! 3만명쯤 없어지면 나라가 조용해 질 거라구!
* 1994년 개봉한 영화 <증발>에서는 '김영철'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배우 김동현이 연기했다. 스틸컷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상대는 드라마 KBS <다큐멘터리 극장>에서 차지철 역을 맡은 김희라다.[57]- 2004년 개봉한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는 배우 손병호가 연기했다. 작중에는 '장혁수(장 실장)'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작중 김재규보다 비중있게 나오며 주인공 아들과 박지만이 싸웠을 때 화가 치밀어 주인공 머리에 총을 겨눈다.
- 2005년 개봉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배우 정원중이 연기했다. 상의는 화려한 제복을 입었는데 정작 바지는 입지 않은 채 '각하'에게 전화를 받는 모습이나[58] 명색이 경호실장이라면서 혼자 살아보려고 추태를 보이는 모습이 포인트로 쪼인트를 현란하고 맛깔나게 깐다. 찌질한 차지철의 묘사로는 본작에서의 묘사가 원탑으로, 김재규가 총 가지러 간 사이에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총에 맞아 절단된 손가락을 주머니에 챙겨놓고 나와서 경호원! 경호원! 하고 우렁차게 소리지르다가 신재순과 심수봉에게 "아이 씨발 조용히 좀 해요"라고 욕을 먹고는 쫄아서 모기만하게 경호원... 경호원... 하다가 돌아온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죽는다. 이후 꿈틀꿈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역사대로 사망. 당시 박정희 시해의 주범으로 의심받은 묘사는 아무래도 찌질한 모습이 주다보니까 안나오고, 나중에 벙커에서 신현확 부총리에게 "그 돼지같은 경호실장은 뭐 했대요?"라는 사후 디스를 먹고 언급이 종료.
야! 저 새끼 군법 재판 넘겨! 어! 경호실장한테 총기를 휘두르고 말이야! 총살감이야 저거! 이거 쿠데타야 쿠데타!! 어디서 함부로 총을 들이밀어?! 어! 선배가 되가지고 말이야! 어? 야 우리도 저 남산 쳐 들어가자! 안되겠다! 어? 돈까스 맛 좀 한번 보자! 하하하!
- 2020년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배우 이희준[59]이 연기했다. '곽상천'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특히 김규평[60] 역을 맡은 이병헌과의 다툼을 그린 장면이나 부마사태 강경 진압을 주장하는 장면은 백미. 하지만 10.26 사태 때 결국 박통과 함께 궁정동에서 김규평의 총을 맞고 죽는다.
8.3. 만화
- 지니스쿨의 한국사백과 근현대사 - 5.16과 유신시대 에피소드 - "유신시대 총성에 무너지다"편에서 등장하며 실제 모습보다는 뚱뚱하면서도 약간 오카마스러운 외모를 가졌으며 성격도 흔히떠올리는 독불장군이나 다혈질 성향보다는 교활함과 거만함이 더 돋보인다. 여기서도 박정희의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국민들의 목숨은 벌레처럼 가볍게 여기는건 동일
9. 기타
- 교보생명[61]이 광화문 사옥을 건설하려 할 때, 층수를 낮추라고 압박을 주었다. 그러자 오히려 대산 신용호 창업주가 "그럴 바에 할복 자살하겠다."고 하여 역관광 당하였다. #
- 을지로 롯데호텔 서울 건설에서 40층 이상 지으려 하자 청와대가 내려다 보인다고 안 된다고 하였다. 결국 김종필 국무총리의 권한으로 37층까지 건설하였다는 타협 합의를 내보였다. #
- 개신교 신자로서 여성 관계에 있어서는 대단히 깨끗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 당시 정치인들은 외도가 일반적이었고 정부를 두는 경우도 있었지만 차지철은 아내만 바라볼 뿐 다른 여성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모종의 이유로 6개월 만에 이혼했던 전처가 있기는 했다. 차지철 측의 주장으로는 시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다거나 혹은 사생활 문제가 있었다고 하나 이혼의 진짜 사유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을 것이다.
- 차지철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차지철이 청탁을 들은 척 안 했다며 차지철의 지인에 대한 청탁이 들어오자 기도만 해주고 그냥 보냈다고 하나 차지철의 금전 문제가 깨끗했다는 측근들의 주장은 상당히 가려들어야 한다. 이렇게 차지철이 청렴했다는 주장은 경호실에서 차지철을 보좌했던 부하들이나 측근들이 소스인데 신빙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차지철이 죽은 뒤 미국으로 이민간 후처는 거기서 2천만 달러짜리 저택을 소유하였으며 아내뿐만 아니라 처남도 비슷하였다. 심지어 차지철 사망 직후에 차지철의 아내가 사기를 당했는데 액수가 14억원이었다.[62] 피아노 연주자였던 차지철의 후처가 이유없이 이를 소유했다면 출처는 차지철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 청렴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거기다가 그렇게 사기당하고 경황없는 와중에 재산도 다 챙기지 못했을 텐데도 미국에 2천만 달러짜리 저택을 구입한 것을 보면 더 많은 자금을 보유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위의 청탁에 관련된 일화도 차지철이 그 선배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이 그리 크지 않아서 들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이후락, 박종규 등의 비리 규모는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차지철이 상대적으로 청렴하다고 평가 받는 부분도 있다.[63]
- 옆에 있는 사람의 손목을 잡고 "주여"하면서 기도를 하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심지어 국민의 95% 이상이 불교 신도인 태국을 방문했을 때 불상을 보고 우상숭배 운운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건 한 나라의 주요 인사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대단히 무례한 결례이며 태국에서 불교는 국교나 다름없다. 또한 한국에서도 불상은 매우 흔하게 볼 수 있었고 박정희 집권 기간에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무개념한 발언이기도 했다.
작사가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위 사진의 EP 음반에 담긴 '조국의 찬가'와 '민족의 노래'가 차지철 작사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대학 학력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누군가가 작사를 대신 해주고 차지철은 이름만 올렸을 수도 있다. 둘 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건전가요 수준의 노래들이지만 박정희와 차지철 사후 이 노래들을 누가 불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며 작곡가 김희조에게도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되었다. 두 곡 중에서 '조국의 찬가'는 이곳에서, '민족의 노래'는 여기서 들어볼 수 있다. 두 영상 자료는 1970년대 초반쯤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영상물인데 조국의 찬가는 영상 맨 앞, 민족의 찬가는 영상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들어볼 수 있다.- 차지철에 대한 평가는 좌우 막론하고 매우 나쁘다.[64] 박정희 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박정희에게 아부하면서 전횡을 일삼은 사람이 좋게 보일리 없으며 박정희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는 악영향을 준 간신 취급을 한다. 차이점이라면 이런 사람을 매우 총애하며 감싸던 사람도 부정적으로 보는지 아니면 윗선을 현혹시켜 권력에 빌붙은 간신이라고 보는지 정도. 해당 정권에 부정적인 쪽에서는 당연히 끼리끼리 같은 놈들이라고 욕하고 해당 정권과 지도자에 긍정적인 쪽에서는 주군을 망친 간신으로 엇갈리는 견해는 마오쩌둥과 4인방,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과 이기붕 또는 곽영주의 평가를 두고도 유사하다. 권력 구도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품성 문제를 넘어 차지철의 득세 자체가 박정희 정권의 말기적 징후 중 하나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박정희의 이른바 2인자 박치기는 정권 내에서 박정희를 독단으로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실세 2인자의 출현을 막는 기능을 하는 동시에 정권의 핵심 인물들간에 균형을 유지해주는 절묘한 순기능도 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차지철이 사실상 2인자로 대두하면서 이런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으며 이는 당시 박정희가 여전히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정국에 대한 통제력과 통찰력을 상실했음[65]을 보여주는 근거로 여길 만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는 이승만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승만도 이러한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했지만 80대에 접어들어 평소 자주 접견하는 주변의 고위 인사들을 무조건 신임하게 되었고 자유당 고위 인사들,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66]은 부부통령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로 대통령의 총애를 마패로 삼아 각종 물의를 일으켜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차지철의 경우 정권 내에서 자신의 능력과 업적 등을 크게 인정받아서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구축한 인물이 아니라 철저히 박정희에게 아부를 떨어 생긴 친위 세력이었고 세대 측면에서 봐도 박정희에 비하면 한 세대(거의 20년), 김재규나 김종필 등에 비해도 반 세대(10년) 가까이 젊은 인물이었음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 초중기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실세 1920년대생(50대) 세대를 거르고 1930년대생(40대) 세대인 차지철이 2인자로 부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당성과 전문성을 가진 정부 조직 대신 개인적인 지인만을 신뢰하여 부당한 정치 개입을 허용하였다가 국익에 해를 끼친 사례는 가까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할 경우 정말 운좋게 그 심복이 재능과 인격을 겸비한 인물이 아니라면 당연히 국가에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 애초에 훌륭한 재능과 인격을 겸비할 정도의 인물이면 어느 개인에게 아부하기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을 통해 뜻을 펼치려고 할 것이다. 하다못해 정치적인 면을 배제하고 업무 능력 면으로 봐도 칭찬할 거리가 없다. 박정희의 마음에나 들었을 뿐 업적을 남긴 바도 없고 최후에도 대통령을 지키는 대통령경호실장이라는 자가 호위 대상이 위기에 쳐했는데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느 면으로 봐도 좋은 평가가 드문 것.
- 성격은 매우 개차반이었다. 차지철이 4선 의원인데 국회의원 시절 다른 의원들을 주먹으로 때리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같은 시기의 국회의원 중에서 무려 김두한이 있었다. 김두한의 입장에서 보면 본인은 싸움의 신(神)인데도 불구하고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데 차지철같은 애송이가 자꾸 무고한 의원들을 주먹으로 패고 있으니 기분이 되게 나빴다. 하루는 김두한이 상의를 원전히 탈의한 후 차지철 바로 앞에 우뚝 서더니 "차의원이 그렇게 힘이 쎄다며? 그럼 힘 없는 다른 의원들은 건드리지 말고 나와 맞붙는 것은 어떠한가?"라고 일침을 날렸다. 이에 차지철은 김두한 앞에서 아무 소리도 못 했다.[67] 박정희가 이걸 알았는지 훗날 차지철은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경호실장으로 발령나게 된다.
- 유신이전에 국회의원 시절에는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동갑내기 야당 국회의원인 김상현과 친구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 1975년에 진도군수가 청와대에 진돗개를 선물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진도’라 부르며 정성 들여 키웠다. 진도는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공격적이었다. 1978년 어느 날 본관 2층으로 올라가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달려든 진도에게 엉덩이를 물려 박정희의 신당동 사저로 ‘격리 조치’되었다. 진도가 차지철을 물어뜯을 때 주위에서 이를 발견해, 재빨리 떼어놓지 않았다면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성깔대로 엉덩이가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는 아주 선명하다. 차지철은 병상에 쉬게하고 다른 경호실장을 임명했다면 현대사는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 차지철의 딸이 국가유공자 등록 소송을 했다.기사 1심에서 법원은 차지철의 딸이 국적을 포기했으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으나 항소를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국적과 별개로 간신배가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 모에화가 등장했다.
- 배우 이순재와 동갑이며 같은 한날에 출생했다.
- 배우 임원희와 매우 닮았다.[68]
- 고인드립으로 총을 맞고 죽었다는 것과 맞물려 김재규의 말을 "너 GunBang져!"라고 하는 드립이 있다.
- 전두환과의 관계에서 전두환은 차지철보다 3살이 많았다. 전두환과 차지철은 군인 시절 공수특전단에서 함께한 바 있으며 1960년 레인저 스쿨 입교 동기이기도 하다. 차지철은 정규 육사 출신을 질투하고 있었고 전두환에게 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이며 전두환도 정규 육사 11기라는 자부심 때문에 포병 간부라는 뒷문으로 장교가 된 차지철에게 고까움을 느낄 법 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겉으로는 좋았다고 한다. 차지철은 중령으로 예편해 장성에 대한 열등감이 컸으며 육사 12기 시험에서 떨어졌던 사실도 쉬쉬했고 육사 출신을 싫어했는데 그런 차지철 밑에서 전두환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맡았다. 전두환이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 김성익에게 했던 공식 구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1년에 2번 전두환을 청와대에 초청하고 장성 진급 때는 승용차를 하사하는 등 가까이 대했다. 이 때문에 청와대 돌아가는 내막을 잘 아는 전두환은 차지철과의 관계에 있어 능수능란하게 처신했다. 차지철이 국회 내무위원장으로 있을 때 업무 차 찾아갈 때마다 "충성! 중령 전두환, 내무위원장님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 하는 신고를 하여 흡족하게 했다. 특히 차지철이 자신의 위세를 보이기 위해 매주 실시한 국기하강식에서 준장 계급장을 단 전두환이 제병지휘관이 돼 ‘경호실장을 향하여 받들어 총!’ 구령을 하며 차지철 앞에서 열병식을 지휘하곤 했다. 전두환은 하나회 회장 자격으로 장성으로 진급한 하나회 후배들을 차지철에게 소개시켰고 차지철은 이들에게 지휘봉과 금일봉을 수여하였다. 하지만 10.26 사건 이후 차지철에 대한 여론이 나쁘자 전두환은 차지철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매장하는 것을 취소하였고 차지철 유해는 차지철의 어머니가 다니던 영락교회 묘지에 묻히게 된다. 또한 전두환마저도 박정희가 저격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범인을 차지철로 의심하였다고 하니 속으로는 전횡을 일삼는 차지철에게 불만을 품었을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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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경기 제6선거구의 제8대 국회의원이다.[A] [3] 경기 제5선거구의 제7대 국회의원이다.[B] 경기 제4선거구의 제9대 국회의원이다.[B] [A] [A] [8] #[9] 네이버 프로필에는 서울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다.[10] 45세의 생일을 열흘 앞두고 암살당했다.[1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97[12] 48세손 口철(澈) 항렬.[13] 차윤염이라는 설도 있다.[14] 아버지 기준.[15] 큰누나는 일찍 죽고 2명은 미국으로 갔다.[16] 現 마장초등학교[17] 현 고려대학교[18] 원래 국민대학교 출신으로 알려졌고 네이버 프로필에도 그렇게 나와있으나 국학대학 출신이 맞다. 1991년도 중앙일보 기사에도 국학대학 출신이라고 나온다. 아마 이름이 비슷해서 생긴 실수인 듯. 참고로 국학대학은 1947년에 개교한 사립 대학으로, 1967년에 수도의과대학에 인수 및 통합되어 우석대학교가 되었고 1971년에는 고려대학교와 통합이 되었다. 고려대학교 메디사이언스파크가 당시 국학대학의 부지였다. 넓은 의미에서 고려대학교 동문이라고 볼 수 있다.[19] 석사 학위 논문: 大統領制의 槪觀的 考察 : 特히 美國에 있어서 그 成立과 運用을 中心으로 (1966)[20] 박사 학위 논문: 韓國의 安全保障에 關한 硏究 : 地域的 集團安全保障制度를 中心으로 (1970)[21] 생전 영락교회 안수집사였다.[22] 1937~2022. 해남고려병원 창립자이자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독립운동가 송봉해의 딸이다.[23] 1990년대 유신 특집을 기획하며 차지철 측근들을 인용해 기사를 낸 중앙일보는 1991년 송희성이 낸 소송에서 패소해 거액을 배상한 바 있다.[24] 1934~2021.[25] 1947~1997.[26] 해당 골프장이 고향 이천시에 있었다고 한다.[27] 엘리베이터였다는 말도 있다.[28] 여담으로 1997년 9월에 당시 정권 말기였던, 김영삼 대통령 부부가 추석을 맞아 영락노인복지센터를 방문했다가 김대안 할머니를 만났다고 하며, 같은 해 <여성동아> 10월호에서도 그간의 근황이 또 나왔다.[29] 10.26 사건에 대해 잠깐 다뤘던 검정 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 여행에서의 대사 또한 이제부터 이 나라에 민주화가 올 것이다. 나는 내 생명과 민주화를 맞바꿨다 였다.[30] 소위 2인자 박치기[31] 박정희는 5.16 직후부터 1970년대 초반 유신 초기까지는 2인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절묘한 용인술을 보여주었다. 분야를 나줘서 여러 측근들에게 골고루 힘을 실어주면서 누구 한 명이 튀어 나온다 싶으면 바로 반대쪽에 힘을 실어주면서 제거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충성 경쟁을 유도했다. 공화당 4인방(= 김성곤, 백남억, 길재호, 김진만)을 키워서 김종필계를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키고, 그 뒤엔 다시 김종필계를 키워서 4인방을 정계에서 축출한게 대표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김종필, 김재춘, 박종규, 이후락, 김형욱, 윤필용, 강창성, 김재규, 김성곤,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신직수, 김정렴, 김계원, 김현옥, 오치성 등 수많은 인사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몇 년간 권세를 누리다가 다시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런 충성 경쟁에서 제대로 살아남은건 굽히는 처신을 하던 김종필뿐이다.[32] 특히 김정렴이 대통령비서실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차지철의 횡포가 더 심해졌다.[33] 다만 김재규는 1924년생이라는 설이 있다.[34] 일제강점기의 전문학교는 오늘날의 4년제 대학에 준하는 교육수준을 지니며, 해방 이후 전문학교 졸업자는 대학 졸업자로 소급 인정 받았다.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 때 전문학교 졸업자는 전체 인구의 1% 내외에 불과한 초엘리트 그룹에 속했다.[35] 박정희와 동기였다.[36] 이때 경호실장은 장관급이었다.[37] 이때 김재규를 엄청 갈궜다. 중앙정보부장은 경호실장보다도 직급이 높았던 부총리급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직속상관인 김계원 비서실장조차 권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다녔다.[38] 차지철은 예비역 포병 중령 출신이지만 박정희 때는 군부정권이었기 때문에 정부 요직에 장성 출신이 수두룩하였다. 김재규는 제6관구사령관, 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지낸 예비역 중장 출신이고, 10.26 때 동석했던 김계원도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예비역 대장이다. 군 출신들은 특유의 계급문화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직급이 같다고 할지라도 군시절의 기수나 계급이 자신보다 높을 경우엔 선배 대우를 해주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현재도 이럴진데 하물며 군이 가장 힘있는 집단이었던 70년대야 말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이는 명백한 차지철의 잘못이다.[39] 영화 남산의 부장들 한정이나, 차지철과 전두환을 각각 모티브로 한 곽상천과 전두혁의 대화에서 곽상천은 전두혁을 "전 장군"이라 불렀다. 실제로도 전두환은 차지철보다 세 살 많고 계급도 두 계급이나 위였다.[40] 그러나 그 육사도 4년제 교육을 받은 11기가 이전 기수를 은근히 무시했던 것은 유명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속 선배조차 무시했는데 갑종, 육군종합학교, 간부시험 출신들은 말할것도 없다. 단 차지철이 군생활을 한참하며 쿠데타에 가담할 시기엔 아직 육사 11기가 위세를 떨치기 전이지만, 어쨌든 김재규를 포함한 육사 출신들에게 괜한 몽니를 부리는 것보다는 자기가 신처럼 받들던, 심지어 육사 출신이던 박정희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존중해줬더라면 총 맞아 죽었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을 것이다.[41] 현 수도군단.[42] 보안사령관[43] 사실 독재정권에서 권력은 독재자와의 거리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지만,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경호실장인 차지철보다 더 높은 위치였는데, 당시 경호실장은 장관급 위치였지만, 중앙정보부장은 부총리급으로 다른 장관들보다 한 끗 높은 위치였다.[44] 광주군·이천군[45] 광주군·이천군[46] 여주군·광주군·이천군[47] 신민당 오세응 후보와 동반 당선
1974.8.20: 의원직 사퇴(대통령경호실장 임명)[48] 대통령경호실장 임명으로 인한 자동 탈당[49] 당시 제7대 국회의원 선거(1967년)로, 둘이 직접 맞붙은 것은 아니었다. 김두한은 수원, 차지철은 광주 · 이천에서 유세 활동을 했다. 참고로 이 선거에서 김두한은 45% 득표했지만 낙선되었고, 차지철은 당선됐다.[50] 여담으로 김두한과 차지철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대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김두한은 "당신 힘이 장사라면서, 나하고 한 번 붙어볼까?"라고 했다고 한다. 차지철은 국회의원 시절에도 안하무인으로 악명높았지만, 아예 전국구로 이름을 날렸던 깡패 출신인 김두한 앞에선 함부로 힘자랑을 못 했다고 한다. 사실 김두한도 깡패 출신답게 국회에서 폭행을 자주 하기도 했다.[51] 드라마《영웅시대》에서 차지철과 김두한이 만나게 된다. 당시 국회 오물 투척 사건에서 김두한이 들고 온 똥물이 든 통을 가지고 오는데, 차지철이 "이게 뭐냐?"고 묻는다. 이 때 차지철이 한 대사는 야인시대에서 박순천 의원이 한 대사다. 김두한이 국회에서 똥 물을 뿌렸을 때, 차지철에게 튀었는데 차지철이 냄새를 맡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김두한에게 폭언을 한다.[52]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조영규 역,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장순석 역.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 역할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53] 석유 파동 때 대한민국에서 석유가 나오자 박정희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겁을 먹으면서 기름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애드리브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재밌게 연기했다.[54]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권정달 역.[55] 1996년 SBS 드라마 <임꺽정>에서는 임꺽정 역.[56] 다만 차지철은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권력욕은 강했어도 그렇게까지 외향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우락부락한 성격으로 나오는 건 각색이다.[57] 김희라는 증발에서 박진욱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김형욱 역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박진욱은 김영철에게 사살당한다.[58] 이건 김계원을 그만큼 개무시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59] 당초 이희준이 캐스팅되었을 때 외모가 닮지 않아 미스캐스팅이라는 지적이 있었으나 무려 25kg 증량을 하고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선보이면서 그런 주장을 들어가게 만들었다.[60]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61] 당시 대한교육보험.[62] 당시 막 분양된 40여 평형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약 3천만원이었다. 14억원이면 지금도 거금이지만 그 때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금액이다. 2017년 시점으로 환산하면 수백억 대다.[63] 의외로 꽤 많은 3, 4공화국을 다룬 책이나 인사들의 인터뷰에서 그가 청렴하다고 기술되긴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당시 5.16세력들의 비리는 엄청났다. 박정희는 '적당히 하시오'라고 지나가는 식으로 경고하다가 이들을 비리로 날려버리는 방법도 즐겨 사용했다.[64] 당대에도 평가가 좋지는 않았는데 오죽하면 박정희의 암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정부 인사들이 가장 먼저 의심한게 차지철이었다.[65] 이 시기에 박정희는 권력 구도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정권 내부에서의 정치적 감각을 상실했음.[66] 지금의 대통령경호처장 격이었다.[67] 참고로 김두한은 차지철보다 16살이나 연상이었고 당시는 김두한이 65년 용산구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로 당선되어 6대 국회에 재입성한 시점이었으므로 47세이던 시점이었다. 30대 초반의 팔팔한 나이이던 차지철이 40대 후반에 가깝던 김두한 앞에서 꼼짝도 못한 것이다. 차지철은 체구는 땅땅한데 비해 그리 큰 키가 아니지만 김두한은 당시 상당한 장신이던 176cm에 어께도 떡 벌어진 거구인데다, 주먹 하나로 조선 팔도를 주름잡던 깡패 출신이니 상대가 될리 만무하다.[68]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매체에 나오는 차지철 배역을 임원희에게 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1974.8.20: 의원직 사퇴(대통령경호실장 임명)[48] 대통령경호실장 임명으로 인한 자동 탈당[49] 당시 제7대 국회의원 선거(1967년)로, 둘이 직접 맞붙은 것은 아니었다. 김두한은 수원, 차지철은 광주 · 이천에서 유세 활동을 했다. 참고로 이 선거에서 김두한은 45% 득표했지만 낙선되었고, 차지철은 당선됐다.[50] 여담으로 김두한과 차지철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대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김두한은 "당신 힘이 장사라면서, 나하고 한 번 붙어볼까?"라고 했다고 한다. 차지철은 국회의원 시절에도 안하무인으로 악명높았지만, 아예 전국구로 이름을 날렸던 깡패 출신인 김두한 앞에선 함부로 힘자랑을 못 했다고 한다. 사실 김두한도 깡패 출신답게 국회에서 폭행을 자주 하기도 했다.[51] 드라마《영웅시대》에서 차지철과 김두한이 만나게 된다. 당시 국회 오물 투척 사건에서 김두한이 들고 온 똥물이 든 통을 가지고 오는데, 차지철이 "이게 뭐냐?"고 묻는다. 이 때 차지철이 한 대사는 야인시대에서 박순천 의원이 한 대사다. 김두한이 국회에서 똥 물을 뿌렸을 때, 차지철에게 튀었는데 차지철이 냄새를 맡자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김두한에게 폭언을 한다.[52]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조영규 역,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장순석 역.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 역할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53] 석유 파동 때 대한민국에서 석유가 나오자 박정희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겁을 먹으면서 기름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애드리브가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재밌게 연기했다.[54]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권정달 역.[55] 1996년 SBS 드라마 <임꺽정>에서는 임꺽정 역.[56] 다만 차지철은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권력욕은 강했어도 그렇게까지 외향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우락부락한 성격으로 나오는 건 각색이다.[57] 김희라는 증발에서 박진욱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김형욱 역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박진욱은 김영철에게 사살당한다.[58] 이건 김계원을 그만큼 개무시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59] 당초 이희준이 캐스팅되었을 때 외모가 닮지 않아 미스캐스팅이라는 지적이 있었으나 무려 25kg 증량을 하고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선보이면서 그런 주장을 들어가게 만들었다.[60] 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61] 당시 대한교육보험.[62] 당시 막 분양된 40여 평형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약 3천만원이었다. 14억원이면 지금도 거금이지만 그 때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금액이다. 2017년 시점으로 환산하면 수백억 대다.[63] 의외로 꽤 많은 3, 4공화국을 다룬 책이나 인사들의 인터뷰에서 그가 청렴하다고 기술되긴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당시 5.16세력들의 비리는 엄청났다. 박정희는 '적당히 하시오'라고 지나가는 식으로 경고하다가 이들을 비리로 날려버리는 방법도 즐겨 사용했다.[64] 당대에도 평가가 좋지는 않았는데 오죽하면 박정희의 암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정부 인사들이 가장 먼저 의심한게 차지철이었다.[65] 이 시기에 박정희는 권력 구도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정권 내부에서의 정치적 감각을 상실했음.[66] 지금의 대통령경호처장 격이었다.[67] 참고로 김두한은 차지철보다 16살이나 연상이었고 당시는 김두한이 65년 용산구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로 당선되어 6대 국회에 재입성한 시점이었으므로 47세이던 시점이었다. 30대 초반의 팔팔한 나이이던 차지철이 40대 후반에 가깝던 김두한 앞에서 꼼짝도 못한 것이다. 차지철은 체구는 땅땅한데 비해 그리 큰 키가 아니지만 김두한은 당시 상당한 장신이던 176cm에 어께도 떡 벌어진 거구인데다, 주먹 하나로 조선 팔도를 주름잡던 깡패 출신이니 상대가 될리 만무하다.[68]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매체에 나오는 차지철 배역을 임원희에게 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