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1 13:44:04

차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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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경호실장
제3공화국 (1963 ~ 1972) 제4공화국 (1972 ~ 1980)
제2대
박종규
제3대
차지철
제4대
정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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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智澈
1. 개요2. 일대기
2.1. 군인2.2. 국회의원2.3. 대통령경호실장2.4. 월권2.5. 기업 압박2.6. 정치 개입2.7. 최태민 옹호2.8. 최후
3. 사생활
3.1. 여성문제3.2. 부패
4. 트리비아5. 가족
5.1. 부인5.2. 모친
6. 김재규와의 악연7. 전두환과의 관계8. 평가9. 사진10. 창작물11. 여담

1. 개요

대한민국군인, 정치가. 경기도 이천 출신. 종교개신교(장로회)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대통령경호실장을 역임하였다(1974~1979).

2. 일대기

2.1. 군인

어머니가 소실이어서 서자로 태어났다. 이로 인해 정실 소생인 형제들에게 설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용산고등학교[1] 졸업육군사관학교 제12기로 들어가려고 시험을 쳤으나 낙방했다.[2]

비록 육사 입학은 실패했지만,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 널리 알려진 무식한 이미지와 달리 공부를 꽤 잘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무술실력도 상당하여 태권도 합기도 각각 5단, 검도 3단의 실력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우락부락한 대통령경호실장 시절과는 달리 학창 시절에는 의외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 포병간부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포병간부후보생 출신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육사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3]가 상당했고 경호실장 시절 육사 출신 현역 중장 또는 소장을 경호실 차장으로 임명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항상 경호실 훈련 때 마치 총사령관인양 군복을 입고 아예 수경사령관 등의 장군들을 지휘하기도 했다. 1959년 공수특전단에 배치받았고, 이듬해인 1960년에 선진 특수훈련과 리더쉽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 유학 가서 미합중국 육군 기지인 포트 베닝레인저 스쿨에 입교했다.

이 레인저 스쿨 코스에서 같은 팀 소속 미 육군 교육생이 인종차별을 하자 말 그대로 반죽음까지 두들겨 팼는데[4], 이때 맨손으로 훨씬 덩치가 큰 미국인을 떡실신시킨 무술실력을 높이 산 미 육군측에서 교육생들한테 태권도를 시연해보이는 것으로 무마시켜줬다고 한다. 어차피 동맹국 육군 장교를 먼저 인종차별한 가해자 입장이라 미 육군도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었다.

외모가 주는 느낌과는 달리 아주 깔끔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항상 반질반질 광이 나는 전투화를 신고 다녔으며 입고 다니던 전투복이 주름지지 않도록 항상 신경쓰고 다녔다고. 방바닥에 먼지 하나 떨어지지 않도록 청소를 하는 깔끔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전역 이후에도 이 성격은 변하지 않아서 입고 다니는 양복이나 깔끔한 머리모양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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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박정희 소장,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

5.16 군사정변 때는 대위 계급으로 공수특전단에 근무[5]하고 있었으며, 쿠데타에 적극 참여했다.

2.2. 국회의원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의장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차장이 되었고. 박정희가 집권하자 1962년에 소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바로 예편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30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64년에는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고, 이후 한양대에서 2년만에 정치학 석사, 박사학위도 땄는데 이건 당시 엉망이었던 대학원 과정 + 정계인사에 학위를 남발하는 학계관행 덕이었다. 이후에는 국회 외무위원장, 내무위원장까지 맡으며 승승장구한다. 여담으로 외무위원장 맡을 때의 나이가 36세. 이것은 박정희의 빽이란 말도 있다.

이만섭KBS 1TV 인물현대사 차지철 편에서 권오석 등과 현역 정치인들을 폭행하는 등, 주먹으로 정치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차지철도 못 건드린 인물이 있었는데 그 인물은 바로, 조선의 알 카포네이자 주먹 하나로 조선을 평정했던 주먹황제 오야붕 김두한이었다. 막말로, 차지철이 김두한과 진짜로 붙었다면 개패듯이 처참하게 맞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4.19 혁명 학생운동 참여, 6대 국회에서 김두한의 비서로 지냈던 서용화는 국회 본회의장 안에서 갑자기 "당신 힘이 장사라며? 나하고 한 번 붙어볼까?”라며 웃통을 벗어던지는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김두한은 40대 후반, 차지철은 30대 초반. 게다가 김용채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하였다.

베트남 전쟁 파병 때 여당 내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 중의 한 명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미국이 참전의 대가로 들어주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여당 내에서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른바 쇼를 위해 박정희가 지시한 것.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박정희의 지시로 월남파병을 반대하기 위해 월남 전쟁을 연구하다가 심취해 필요 이상의 반대를 하다 박정희에게 찍힌다. 실제 그런 모습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참전의 정당성 문제를 떠나서 남베트남의 상황이 상당히 막장이기는 했다. 최소한 대한민국 국민이란 자각이 있던 우리나라완 달리 월남 국민이란 공통 정체성도 없는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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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신민당 신하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유기준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여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오세응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2.3. 대통령경호실장

1974년 문세광의 저격으로 육영수가 사망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피스톨 박 박종규 대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경호실장 임명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지역구는 정동성이 물려받았다,

사실 박종규나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전 국세청장 오정근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하였지만, 박정희의 의지로 결국 마흔살의 차지철이 내정되었다. 당시 신문기사는 차지철을 박정희의 친위 중의 친위라고 소개하고 있다.

차지철을 강력하게 추천한 것은 다름아닌 육영수였다고 한다. 여자 관계가 깨끗한데다 술담배도 하지 않으며, 우직하게 박정희한테만 충성하니까 경호실장으로 걸맞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물론, 그 판단 자체는 옳은 선택이었지만... 차지철은 다른 의미로 등용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2.4. 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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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경호실장 재직 당시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육군 준장 전두환, 행정차장보 육군 준장 노태우와 함께.[6]

경호실장이 된 뒤 위상을 높인다고 경호실장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했다. 심지어 현역 소장을 경호차장으로 두었으며 현역 육군 준장을 차장보에 임명하였다. 비상시에는 수도경비사령부도 지휘할 수 있게 법까지 개정하였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11·12대인 전두환과 13대 대통령인 노태우 둘 다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출신이다. 한 마디로 차지철보다 기수와 나이도 위인데다 한국전 참전 용사인 2성 장군인 육군 선배 장교들이 일개 예비역 포병 중령인 민간인 차지철에게 매일 군인 상관 대하듯이 거수경례를 해야 했다.


  • 여담으로 이때 대통령비서실장과 동일한 장관급으로 격상된 경호실은 수십년이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비서실에 경호실이 흡수되어 대통령실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차관급으로 격하되었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경호실을 독립시키면서 다시 장관급으로 격상되었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경호실이 국정농단에 가담하는 모습을 보이자 문재인 정부가 다시 차관급으로 돌려놓았다.

1974년 취임한 그는 1978년 이후 점점 더 엉뚱한 짓을 자주 벌였다.

경호실장 전용식당을 마련한 것이 첫째였다. 자신의 위세 과시를 위한 것이다. 음식은 특급호텔의 요리사가 출장 서비스를 하는 방식인데 처음에 대통령을 모신 데 이어 여야 유력 정치인, 언론인 등을 차례로 불러들였다. 군대 내 위화감을 부르기 딱 좋은 일인데, 그는 대통령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는 '경호원가'를 만들어 임무교대 때 부르도록 했다.

"이 나라 이 겨레 구원자 되신 /님의 뜻 받들고자 여기 모였네.......

차지철의 진면목은 그 다음에 더 잘 드러난다. 1975년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근혜는 비서관을 통해 "아버님께서 가사가 거북하니 부르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차지철은 그 다음날 득달같이 달려와 대통령의 재고를 요청했다. 묻지마 충성의 뚝심에 밀린 박정희도 "꼭 부르겠다면 향토예비군의 노래와 섞어 불러라"라며 타협안을 제시해야 했다.

1978년부터 시작된 경호실과 수경사의 합동국기하강식은 기행의 정점이었다. 차지철은 매주 월요일 아침 경복궁 연병장에서 국기하강식과 함께 분열식을 진행했다. 당시 로열박스에 앉은 차지철 주위로는 민주공화당 중진과 장관들 같은 거물들이 함께한 진풍경이었다.

비서실장이 김계원으로 교체된 1979년부터는 경호실에서 비서실 업무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때 김계원은 육군 대장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장직에서 해임되고 주 대만 한국대사를 거쳐 비서실장에 임명됐는데, 이것은 김계원이 부총리급인 중앙정보부장에서 장관급인 비서실장으로 좌천되어서 차지철이 김계원을 물로 보고 깝쳤다는 말이 있다.[7]

월권의 정점은 중앙정보부와의 갈등으로, 차지철은 경호실의 공금으로 대규모의 사설 정보팀을 운영했다. 중앙정보부장박정희에게 보고할 때도, 경호실장이 동석해야 한다라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김재규는 이런 월권 행위를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내가 중장 출신인데 어찌 저런 예비역 중령이랑 옥신각신하겠나"라고 분을 삭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차지철은 김재규박정희에게 무언가 말을 하면 중간에 잘라먹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지껄여서 김재규가 머리 끝까지 빡치게 만들었다.

또한 박정희를 지키겠다며 상식 밖의 일들을 벌여댔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한밤 중의 전차 시위였다. 경복궁에 주둔하던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전차 1개 중대를 갖다 놓고, 밤마다 출동시킨 것이다. 서울 시민들이 자고 있을 시간인 새벽 1시부터 3시까지 전차 여러 대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청와대 부근을 빙빙 돌았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동네에 난리가 났다. 인근 주민들이 처음엔 전쟁이 난 줄로 알고 불안해했을 정도였다.

이런 일을 한 이유가 궁금했던 기자가 차지철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누군가 묻자 차지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누구든지 대통령을 방해하는 자는 걸리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공공연히 알리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위압감을 심어줘 박정희는 불가침의 성역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시위였다는 이야기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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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실 산하 부대들을 창설한 뒤 특제 제복을 입혀 완벽하게 박정희의 친위대로 만들려고도 하였다.[9] 이들 경찰·군부대들의 101, 22, 33, 55, 88 등 같은 숫자가 두 번 쓰인 독특한 이름들을 지은 것도 차지철이다.

참고로 민주화 이후에도 이들 부대는 여전히 있다. 대통령경호처/지원부대 문서 참고. 특유의 화려한 복장 또한 다소 변화하긴 했지만 여전하다. 다만 현재는 복장이 보안사항이라 공식적인 루트로는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없다.[10] 운이 좋다면(?) 경호실 인근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박정희국군의 날 사열식을 본따 '국기 하강식'이라고 해서, ·차관 등을 초청해 대규모의 행사를 치렀다. 이 행사가 매우 유명해져, 장관이든 대장이든 초청을 받고 오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일화가 있다. 각하의 친위 중의 친위가 초청한다는데, 가지 않을 배짱이 있나? 유일하게 초청을 받고도 가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 사람은 김정렴 비서실장이었다.[11] 자신이라도 줏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육사 출신이 장성으로 진급하면 작전차장보 전두환에게 인사를 왔는데, 전두환은 꼭 이들을 차지철에게 데려가 인사를 시켰다.[12] 차지철은 이를 매번 흡족하게 여기며, 자기 이름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했다. 이건 일개 경호실장이 할 짓들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당시 차지철을 두고 부각하, 또는 부통령 이라고 비꼬는 말도 나왔다.

2.5. 기업 압박

  • 교보생명광화문 사옥을 건설하려 할 때 층수를 낮추라고 압박을 주었다. 그러자 오히려 대산 신용호 창업주가 그럴 바에 할복자살하겠다고 하여 역관광당하였다.
  • 을지로 롯데호텔 서울 건설에서 40층 이상 지으려 하자 청와대가 내려다 보인다고 안 된다고 하였다. 결국 김종필 국무총리의 권한으로 37층까지 건설하였다는 타협 합의를 내보였다.

2.6. 정치 개입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등에 개입하였다. 그리하여 이철승의 온건 노선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철승 체제의 유지를 목적으로 신도환에게 접근하였다. 또한 이택돈 등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밀월관계를 유지하였다.

민주공화당 내에서는 박찬종 등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13]

같은 해 3월, 제10대 국회가 개원하였을 때 민주공화당 이만섭 의원이 여당,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자 이를 자신의 계열인 민주공화당 모 의원으로부터 보고받고는 박정희에게 과장 보고하여 박정희가 이만섭을 제명하려고 하였다. 다만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14], 류혁인 정무수석비서관의 만류로 없던 일이 되었다.

2.7. 최태민 옹호

박정희는 당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던 박근혜최태민과 유착하여 잡음을 일으키자, 민정수석실에 조사를 의뢰했고, 이어 김재규가 수장이던 중앙정보부에도 조사를 시켰다. 김재규는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최태민의 비리를 담은 보고서를 박정희에게 올렸다. 박정희는 이런 보고서를 보고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자신의 집무실로 김재규최태민을 불러 친국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결과적으로 최태민박근혜로부터 떼어놓지 못했고, 김재규는 10.26 이후 항소이유서에 최태민 관련 비사를 적어 넣으면서 10.26 거사의 동기 중의 하나는 최태민-박근혜의 관계라고 밝혔다. 10.26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은 차지철이 최태민을 옹호했으며, 박근혜-최태민을 둘러싼 차지철-김재규 암투가 결과적으로 10.26의 원인의 하나라고 밝혔다. 김계원 회고

그리고 결국 박근혜최태민 일가에 의해 정치생명이 끝났다

2.8. 최후

(김재규가 부마항쟁을 박정희에게 보고한 뒤, 박정희가 강경진압을 지시하자)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읍니다.
- 김재규. 79고군형항제550호(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후) 항소이유보충서

김재규가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주장한 내용은 위와 같지만, 확인된 건 아니다. 만찬에서 공식적으로 입증된 대화는 이렇다.
대통령: 오늘 가보니 삽교천 공기는 좋고 공해도 없는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이요. 오늘 삽교천 준공식 광경을 왜 KBS TV에 보도하지 않지? 정보부장, 신민당 상황은 어떻소?
김재규: 공화당 발표 때문에 다 틀렸습니다. 사표 내겠다고 한 친구들이 다 강경으로 돌아섰습니다. 아무래도 당분간 정 대행체제의 출범은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주류가 강해져서 다소 시끄럽겠습니다.

여기에서 정 대행체제라는 것은 9월 7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이,‘김영삼이 불법으로 총재가 되었다’며 신민당 조일환 등 3명의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이 낸 “총재단집무집행정지가처분신청”을 정당한 사유로 받아들인 결과 김영삼의 총재직을 박탈하고 정운갑을 총재로 하는 대행체제를 출범시키라고 법원이 판결한 것을 의미했다.
차지철: 그까짓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전차로 싹 깔아뭉개 버리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일단 차지철이 막나가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박정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윗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비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뿐만 아니라, 비서실장이나 국무총리조차 자기 아랫사람인양 마구 대했다. 특히나 김재규는 박정희의 육사 동기임을 감안할 때, 기수를 매우 중요히 여기는 군부 출신으로서 이를 고깝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고름은 1979년 10월 26일 결국 차지철을 쏘고 박정희를 쏘는 10.26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터진다.

이 때 김재규 외에도 정-관-군 전반에서 차지철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사건 직후 박정희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처음엔 '차지철이 박정희를 살해했다'고 여긴 인사들이 많았다. 정승화 총장은 차지철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고 오판해서 수경사 병력을 동원해서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하게 했고, 육군본부에서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했을 당시 김치열 법무부 장관은 "그 놈의 새끼가 기고만장하며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는데 여기서 '그놈의 새끼'는 당연히 차지철을 지칭했다. 훗날 반란을 저지르는 전두환도 10.26 사건 직후 친구인 노태우에게 사적으로 암살을 알려주면서 차지철이 범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정도로 차지철의 전횡은 심각했다.

전직 중앙정보부장이자 미국으로 망명해서 박정희를 디스하던 김형욱의 납치 살해에도 차지철이 관여했다는 설도 있고, 다른 설에는 차지철이 아니라 김재규가 관여했다고 한다. 어쨌든 둘 중 한 명이 연루된 것은 확실하며, 10.26 직전인 그해 10월 8일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김형욱은 살해되었고, 이것을 본 김재규가 자신도 권력을 잃은 후 이렇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설도 있다.

어찌됐든 10월 26일 차지철은 박정희를 따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그날 저녁 안전가옥에서 만찬이 시작되었고, 궁정동에서 차지철은 김재규의 손에 최후를 맞는다. 좀 더 자세한 사건내용은 10.26 사건 항목 참조.

암살 직전 김재규는 "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15]라는 말을 던지고는 품속에 숨겨둔 PPK로 차지철의 팔을 쏘았다.

당시 차지철은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차고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박정희는 술자리에 총이 보이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일부러 차지철에게 총을 차고 오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6] 그리고 이것이 차지철과 박정희의 운명도 결정해 버렸다.

경호실장이라는 작자가 총기를 지참하지 않은 게 어이없긴 해도, 그나마 이건 박정희의 지시 때문이라고 이해해줄 여지가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경호실장이라는 인간이 총격이 시작되자 박정희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차지철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오른쪽 팔에 총을 맞았는데, 총 맞은 직후 바로 화장실로 도주해버렸다. 경호실장이 자기 목숨 위험하다고 경호대상인 박정희 앞에서 총 뽑는 자를 내버려두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물론 차지철은 전문 경호원도 아니었고 김재규가 그런 짓을 할 것인지는 상상조차도 못했기에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도망간 것이겠지만, 경호라는 임무를 맡은 직책을 부여받았으면 자신이 보호를 해야할 대상에 병기를 뽑아드는 대상에는 맨몸으로라도 제압하거나 저지해야 한다는 건 상식인데, 그것도 무려 청와대 경호실장이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게다가 총을 쏜 직후 김재규의 총이 격발불량을 일으켰고, 차지철은 위에서도 나오듯이 무술 유단자로 힘이 장사라 작정하고 덤비면 아무리 총을 들었다한들 그당시에 건강이 상당히 안좋았던 김재규가 버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차지철이 화장실로 도망간 사이 김재규는 박정희도 총으로 쏘았고, 그 직후 안전가옥 전체의 불이 꺼졌고,[17] 김재규도 PPK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다른 총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차지철은 그제서야 총에 맞은 팔을 움켜쥐며 (이미 김재규의 부하들이 다 죽이거나 무력화시킨) 경호원들을 찾는 추태를 보이다가, 김재규가 다른 총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차지철은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경호원, 경호원"하면서 문쪽으로 달려나갔다. 차지철이 흘리는 피가 오른쪽 벽 아래를 따라서 선을 그렸다고 한다. 차지철이 문으로 뛰어나가려는 찰나에 권총을 들고 들어오는 김재규와 마주쳤다. 김재규가 박선호로부터 받아든 38구경 리볼버 5연발권총에는 세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원래 다섯발이 장전되어 있었는데 박선호가 두발을 쏘았던 것이다.

차지철은 안쪽 병풍 옆에 있던 장식용 문갑을 방패처럼 치켜들고, "김 부장, 김 부장." 하며 애원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갑을 앞세우고 달려들었고, 김재규는 이에 가슴을 향해서 한 발을 발사했다고 한다.[18]

오른쪽 가슴 상부에서 들어간 총탄은 허파 부위를 지나 왼쪽 등 아래로 진행하다가 몸 속에 멈추었다. 차실장은 잡고 있던 문갑과 함께 뒤로 넘어졌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문갑 속에 있던 물건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그때 숨이 끊어지진 않았고 상황이 끝난 후에 중앙정보부 경비원이었던 김태원이 M16 소총으로 사망자들을 하나씩 확인사살할 때까지 살아있었다고도 한다.[19] 어쨋건 그렇게 차지철은 궁정동에서 총상으로 사망한다. 향년 만 44세, 45번째 생일을 약 한 달 앞둔 때였다.

차지철이 죽고난 뒤 체포된 김재규의 재판과정에서 대통령을 등에 업고 설치던 원성을 듣던 경호실장이라는 작자가 정작 대통령을 경호할 생각은커녕 화장실로 두고 도주한 것과 이유야 어찌됐든 총을 차고 있지 않은 것 때문에 차지철은 엄청나게 비판을 받는다. 이것 때문에 정부는 원래 차지철의 시신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려 했으나 취소하고, 결국 차지철 시신은 그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편 신재순은 1979.11.18.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대었을 때는 다음에는 나를 쏘겠구나 생각하고 후다닥 일어나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도 문 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바깥이 좀 조용해지자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하늘을 보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어서 일으키려고 손을 당기며 몇번 힘을 써보다가 포기하는 눈빛을 하면서. "난 못 일어날 같애'. 그러고는 다시 쓰러져 신음하는데 그 눈빛도 잊을 수가 없어요. 차실장이 고마운 것은, 그날 제가 대기실에서 면접을 볼 때 술을 못마신다고 했더니 그 분은 '옆에 깡통을 갖다놓을 터이니 거기에 부어버려라'고 말하더군요.'

결국 전부 목격자 진술 뿐이니,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3. 사생활

3.1. 여성문제

개신교 신자로서 여성관계에 있어서는 대단히 깨끗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 당시 정치인들은 외도가 일반적이었고 정부를 두는 경우도 있었지만, 차지철은 아내만 바라볼 뿐 다른 여성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처와는 모종의 이유로 6개월 만에 이혼했다. 차지철 측의 주장으로는 시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다거나, 혹은 사생활 문제가 있었다고 하나, 이혼 사유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기 때문에 확인할 방도는 없다.

3.2. 부패

차지철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차지철이 청탁을 들은 척 안했다며, 차지철의 지인에 대한 청탁이 들어오자, 기도만 해주고 그냥 보냈다고 하나, 차지철의 금전문제가 깨끗했다는 측근들의 주장은 상당히 가려들어야 한다. 이렇게 차지철이 청렴했다는 주장은 경호실에서 차지철을 보좌했던 부하들이나 측근들이 소스인데, 신빙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차지철이 죽은 뒤, 미국으로 이민간 후처는 거기서 2천만 달러 짜리 저택을 소유하였다. 아내뿐만 아니라 처남도 비슷하였다. 심지어 차지철 사망 직후에 차지철의 아내가 사기를 당했는데, 액수가 14억이었다. 당시 막 분양된 40여평형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약 3천만 원이었다. 14억 원이면 지금도 거금이지만, 그때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금액이다.[20] 피아노 연주자였던 차지철의 후처가 이유없이 이를 소유했다면, 출처는 차지철 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 청렴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거기다가 그렇게 사기당하고도 미국에 2천만 달러짜리 저택을 구입한 것을 보면, 더 많은 자금을 보유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위의 청탁에 관련된 일화도 차지철이 그 선배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기에게 떨어질 떡고물이 그리 크지 않아서 들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4. 트리비아

옆에 있는 사람의 손목을 잡고 "주여"하면서 기도를 하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에 태국을 방문했을 때 불상을 보고 우상숭배 운운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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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윗 짤방의 EP 음반에 담긴 '조국의 찬가'와 '민족의 노래'가 차지철 작사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대학 학력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누군가가 작사를 대신 해주고 차지철은 이름만 올렸을 수도 있다.

둘 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건전가요 수준의 노래들이지만, 박정희와 차지철 사후 이 노래들을 누가 불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작곡가 김희조에게도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되었다.

두 곡 중에서 '민족의 노래'는 여기서 들어볼 수 있다. 70년대 초반쯤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영상물인데, 이 영상의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곡이 그 곡이다.

1975년에 진도군수가 청와대에 진돗개를 선물했는데, 박정희는 '진도’라 부르며 정성 들여 키웠다. 진도는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공격적이었다. 1978년 어느 날 본관 2층으로 올라가던 경호실장이 달려든 진도에게 엉덩이를 물려 박정희의 신당동 사저로 ‘격리 조치’되었다 진도가 차지철을 물어뜯을 때 주위에서 재빨리 떼어놓지 않았다면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성깔대로 엉덩이가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는 아주 선명하다. 차지철은 병상에 쉬게하고 다른 경호실장을 임명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참고로 10.26 사건 당시 그의 마지막 향년이 바로 본인의 상사가 현대사의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거머쥐게 된 바로 그 시점의 나이와 같았다. 그리고 그 시점의 시작과 끝을 둘이 함께 하게 되었다.

5. 가족

5.1. 부인

초선의원 시절 결혼한 첫번째 결혼은 얼마 되지 않아 이혼으로 끝났다. 차지철이나 그 측근들은 이 이혼이 여자의 복잡한 남성문제 및 시어머니 부양 거부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신빙성이 부족하다. 1990년대 유신특집을 기획하며 차지철 측근들을 인용해 기사를 낸 중앙일보는 이 여성의 고소미에 걸려서 거액을 배상한 바 있다. 즉 법원이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누가 차지철의 부인과 감히 바람을 피울까?

두번째 부인은 피아노 연주자라고 알려져 있으며, 둘째 부인 사이에서 차지철은 딸을 세명을 두었다. 이들은 차지철이 사망한 후 전두환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이민가서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에서 호화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그 돈은 차지철이 빼돌린 재산일 가능성이 많다. 그것도 모자라 국가유공자 가족 신청을 했으나 미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패소 판결을 받았다.

5.2. 모친

1990년, 서울신문사 여성월간지 <QUEEN>에서 차지철의 어머니인 김대안(1898.12.06~1998.12.23) 씨가 살아있다고 하여 보도한 바 있다.링크 당시 아흔 둘이던 어머니는 홀로 가난 속에 병마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차지철이 어릴적부터 가던 교회 목사가 그나마 경제적 도움을 줘가면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차지철은 어머니에게만은 엄청난 효자였는데, 어린 시절이 불우했기에 믿을 사람이라곤 어머니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땐 배다른 형제들에게 무시당하고 맞고 살았는데, 그가 출세하자 이 형제들이 꼬리흔들며 찾아왔지만 차지철은 "형제? 나에겐 어머님 밖에 피붙이가 없는데 뭔 개소리냐? 다시 찾아오면 그 땐 제대로 살아남기 어려울테니 얼씬도 하지마라."라는 차가운 목소리로 문 앞에서 내쫓았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효자였는지는 노태우 회고록에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어느날 박정희의 여름 휴가에 차지철과 함께 대동한 노태우는 박정희 가족들과 함께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박정희가 차지철 보고 물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자 차지철은 즉각 거부했다. 박정희가 다시 강권하자 차지철은 마지못해 바닷물에 종아리를 담궜으나 파도가 얕게 치자 즉시 질겁하며 물밖으로 달려나갔다. 거의 공수병 환자같은 모습에 의아해진 박정희가 이유를 묻자 차지철이 "어머니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그리고 어느 골프장 오픈 기념 행사로 초청이 되어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일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대로 차를 돌려 돌아간 일도 있었다. 어머니가 땡볕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데 자기가 놀러 갈 수는 없다는 것.[22] 실제로 차지철은 죽을 때까지 골프를 치지 않았다.

그외에도 전 중앙정보부장이자 나중에 비서실장을 지내는 김계원의 모친이 편찮아서 안절부절 못할 때, 박정희에게 대신 보고하고 헬리콥터까지 빌려주는 등 "어머니"가 관련된 문제에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친절하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차지철이 살아있을 시절에는 어머니도 호강을 누렸다.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서 집에 에스컬레이터를 달아줬을 정도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다 보니 김대안 할머니는 당시 이 월간지 인터뷰에서도 "내 아들이 남에게 죽일 놈 욕을 먹는 거 알지. 하지만 나에겐 하나뿐인 아들이었어. 그리고 이 에미에겐 지극정성하던 효자였고."이라며 아들을 그리워했었다. 그러나 차지철이 어머니를 위하여 마련한 큼직한 집이나 차와 돈은 어머니가 생전에 죄다 사기당하여 모조리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어머니의 지인들은 차지철이 믿던 그 목사야말로 사기꾼이라며 비난했다. 차지철이 그나마 어머니를 위하여 준비한 재산을 야금야금 다 먹었다고 비난했는데 당시 이 월간지에서 인터뷰하려고 하자 피했을 정도.

참고로 당시 이 월간지에 나온 어머니는 달동네에서 볼 법한 허름한 집에서 텔레비전도 없이 이불자리와 정말 간단한 주방살림과 전자제품이라곤 커피 포트 하나 뿐인 극빈층 신세였다. 치아 상태도 말이 아니라 도 못먹고 커피 포트로 쑨 만 겨우 먹을 수 있던 비참한 신세였다. 지인들은 이런 할머니에게 그 목사가 경제적 도움이라고 주는 돈이 겨우 하찮은 용돈이나 던져주는 수준이라고 비난했다. 차지철 본인이 생전에 박정희의 채홍사 명령도 거절할 정도의 독실한 개신교인이었음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씁쓸해지기도 하는 대목. 결국 김대안 할머니는 1998년 12월 23일 경기도 하남시 영락노인복지센터 양로원에서 만 100세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23]

사망 당시의 기사를 보면, 81년 즈음에 차지철의 아내, 즉 며느리가 3명의 딸과 함께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버렸고, 차지철 외에 3명의 딸들도 일찍 사망하거나 혹은 미국으로 건너가버리는 바람에 오랫동안 홀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링크 이후로 차지철의 친구들과 그 옛 부하들로부터 생활비와 병원비를 지원받았던 흔적이 포착된다. 98년 사망 당시에는 미국으로 건너간 며느리는 이미 2년전에 죽은 상태였고, 손녀들은 끝내 빈소를 찾지 않은 듯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셋째 딸도 건강문제로 빈소를 찾지 않았다. 자식들 중에 빈소를 찾은 사람은 둘째 딸 뿐이었다.

6. 김재규와의 악연

차지철은 박정희 시대 말기에, 박정희 다음으로 가장 큰 권력을 차지해 횡포를 부리다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연회장에서 김재규에게 총살당했다. 김재규가 애초에 박정희의 강경진압을 고까워했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그랬다고 법정에서 진술했지만, 정설로 힘을 얻는 이야기는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분노하는 바람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덤으로 박정희도 쏘았다는 것이다.[24] 차지철, 김재규는 각각 유신정권 말기를 지탱하던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우두머리였고, 둘 다 엄청난 권력자였지만 사이는 견원지간이었다. 결국 차지철에게 밀려난 김재규가, 10월 26일에 일을 저지른 셈이다.

둘이 이리도 사이가 나빠진 원인은 바로 개인적인 관계 때문이다. 먼저 차지철은 김재규보다 8살이 어리다. 또한 김재규는 일제강점기일 때 대학교까지 마치고, 광복 뒤에 박정희와 본인의 고향인 구미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육군사관학교 2기(박정희와 동기)로 들어갔다. 반면 차지철은 서자였고, 공부는 곧잘 했지만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 못해서, 태권도를 비롯한 무술 실력 덕분에 포병간부시험에 합격했다. 알다시피 정식 장교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서, 차지철은 육사에게 엄청 열등감을 품었다. 그러다가 박정희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으면서 자기와 동급이거나[25] 더 높은 위치[26], 심지어 군에 더 오래 머문 사람들[27]을 하대했다. 김재규를 매우 싫어한 까닭은 또 있다. 차지철은 박정희 옆에서 5.16을 주도했고, 정권 극초창기부터 박정희의 수족처럼 일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군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비치다가, 혁명 반대론자로 몰려서 감옥에 갇혔다가, 박정희가 직권을 쓴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이후 6관구 사령관 (현 수도군단), 방첩부대장 (보안사령관), 3군단장을 지내다 중장으로 군 생활을 마친후 바로 유신정우회 1기 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까지 올라간 남자가 김재규다. 혁명을 반대한 사람이, 박정희와 동기에 고향후배라는 이유로 개처럼 일한 자신하고 직급이 같은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차지철을 무척 자극했다.

김재규에게도 차지철은 고까운 놈이었다. 일단 정통파 장교인 육사출신도 아니고, 중장까지 올라간 본인과는 다르게 영관급인 소령에서 군생활을 마치고, 일찌감치 정치에 뛰어든 주제에, 다른 군 장성 출신을 무시하고, 과격한 행실이나 일삼았기 때문이다. 차지철은 육영수가 총에 맞아 숨진 뒤부터, 자신이 소속된 경호실을 강화하여, 또 다른 군벌집단처럼 만들었다. 게다가 정보 수집과 공작 활동은 중앙정보부 관할이지만, 차지철은 국가 예산을 동원해 경호실 산하에 또 다른 정보기구를 만들어서 정보를 수집했다. 박정희는 말년에 차지철을 중정보다 많이 믿었다. 평소부터 주먹질을 일삼던 차지철이 워낙에 쓴소리를 들었지만, 경호실장을 맡은 뒤부터 박정희에게 아부하면서, 자기 권력까지 키워 전횡을 휘둘렀다. 남들을 얕잡는 짓거리 때문에 차지철은 더욱 인망을 잃었다.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차지철보다 나이도 많고, 군 계급도 높지만, 차지철은 김재규를 그냥 김 부장!으로 불렀다.

아무튼[28][29]

10월26일의 상황을 보자

차지철로부터 전화를 받은 김재규는 “바로 오늘”이라는 생각에 즉시 평소에 공을 들여온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후 4시 15분이었다.
정총장, 오늘 저녁 좀 만났으면 하오. 궁정동 안가 알지요. 18시 30분까지 궁정동 본관으로 좀 와 주시오.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곧바로 궁정동 안가, 별채 연회장에 가서 김계원 비서실장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에야 나타났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았다. 김계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야.기다렸다는 듯이 김재규가 내심을 털어놓았다.형님, 오늘 저녁 이놈을 해치우겠습니다. 뒷일은 형님이 책임져 주시오.

김계원이 고개를 끄덕여 이에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대통령이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는 뼈에 사무쳐 있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던진 이 말은, 김재규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불을 질렀을지 모른다. “오늘 해치우겠습니다. 뒷일을 책임져 주시오.” 이 엄청난 말에 김계원이 선뜻 동의한 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차지철만이 아니라 박대통령까지도 해치우겠다는 의도에 동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재규가 언젠가는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는 데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놀라는 동시에. “차지철만 죽이고 대통령을 살려두면 당신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요” “뒷일을 생각해보았던거요?” 이렇게 연속해서 물었을 것이다

7. 전두환과의 관계

전두환은 차지철보다 4살[30]이 많았다. 차지철은 정규 육사 출신을 질투하고 있었고, 분명히 전두환에게 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이며, 전두환도 4년제 정규 육사 1기라는 자부심 때문에 포병 간부라는 뒷문으로 장교가 된 차지철에게 고까움을 느낄 법 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사이는 겉으로는 좋았다고 한다.

대위 출신 중령으로 예편해 장성에 대한 열패감은 컸다 육사 12기 시험에서 떨어졌던 사실도 쉬쉬했고 그래서 육사 출신을 더욱 싫어했다. 전두환은 그의 밑에서 경호실 차장을 맡았다

육사11기 출신 전두환은 대위 시절 5.16에 참여해 육사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를 이끌어내는 공헌으로 그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전 대위 국회의원 출마하지 않겠나?""제가 어떻게 감히......왜? 하면 하는 거지 뭐아닙니다 저는 돈도 없고 군대에 저처럼 충성스런 사람이 몇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두환은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 김성익에게 했던 공식 구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1년에 두번 청와대에 초청하고 장성 진급때는 승용차를 하사했다. 반면 후배 격인 차지철은 국회의원이 된 이후 빠르게 출세했기에 이런 내막을 잘 아는 능수능란한 처신도 눈여겨볼 만 하다 차지철이 국회 내무위원장으로 있을 때 업무 차 찾아갈때마다 충성! 중령 전두환 내무위원장님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 하는 신고를 하여 흡족하게 했다 육사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를 잘 아니 고개를 숙인것일 것이다

특히 차지철이 자신의 위세를 보이기 위해 매주 실시한 국기하강식에서, 준장 계급장을 단 전두환이 제병지휘관이 돼 ‘경호실장을 향하여 받들어 총!’ 구령을 하며 차지철 앞에서 열병식을 지휘하곤 했다. 여기에 전두환은 하나회 회장 자격으로 장성으로 진급한 하나회 후배들을 차지철에게 소개시켰고, 위에서 말했듯이 차지철은 이들에게 지휘봉과 금일봉을 수여하였다

하지만 10.26사건 이후 차지철에 대한 여론이 나쁘자 전두환은 차지철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매장하는 것을 취소하였고, 차지철 유해는 국립묘지에 가지 못하고 영락교회 묘지에 묻히게 된다. 원래부터 육군 장성과 경호실장의 관계일 뿐이다. 이를 증명하듯, 전두환이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1979년 보안사령관에 임명된 뒤 중앙정보부와 경호실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파악해 이것을 보고하려 10월29일 박대통령과의 일정을 잡았다고 회고하였다

8. 평가

차지철에 대한 평가는 좌우 막론하고 매우 나쁘다. 박정희 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그 박정희에게 아부하면서 전횡을 일삼은 사람이 좋게보일리 없다. 박정희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는 악영향만 준 간신 취급을 받는다. 차이점이라면 그런 간신을 오냐오냐하던 사람도 똑같다고 보는지 아니면 윗선을 현혹시켜 권력에 빌붙은 간신이라고 보는지 정도. 이런 관점은 1공화국 시절 이승만이기붕을 두고도 유사하다.

그리고 권력구도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품성문제를 넘어) 차지철의 득세 자체가 박정희 정권의 말기적 징후 중 하나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박정희의 소위 '2인자 박치기'는 정권 내에서 박정희를 독단으로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실세 2인자의 출현을 막는 기능을 하는 동시에, 정권의 핵심인물들간에 균형을 유지해주는 절묘한 순기능도 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차지철이 사실상 2인자로 대두하면서 이런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으며, 이는 당시 박정희가 여전히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정국에 대한 통제력과 통찰력을 상실했음[31]을 보여주는 근거로 여길만 하다는 것이다.

또한, 차지철의 경우 정권 내에서 자신의 능력, 업적등을 크게 인정받아서 독자적인 자기 영역을 구축한 인물이 아니라 철저히 박정희에게 아부를 떨어 생긴 친위세력이었고, 세대 측면에서 봐도 박정희에 비하면 한 세대(거의 20년), 김재규나 김종필등에 비해도 반 세대(10년) 가까이 젊은 인물이었음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 초중기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실세 20년대생(50대) 세대를 거르고 30년대생(40대) 세대인 차지철이 2인자로 부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당성과 전문성을 가진 정부조직대신 개인적인 지인만을 신뢰하여 부당한 정치개입을 허용하였다가 국익에 해를 끼친 사례는 가까이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할 경우 정말 운좋게 그 '심복'이 재능과 인격을 겸비한 인물이 아니라면 당연히 국가에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훌륭한 재능과 인격을 겸비할 정도의 인물이면 독재자 개인에게 아부하기보다는 정당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할 것이고 말이다.

9.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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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와 차지철. 뒤에 박종규이낙선도 있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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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23일 군부대에 격려금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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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 포스터. [33]

10. 창작물

  • 제2공화국, 제3공화국제4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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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근이 열연하였다. 이때의 연기가 워낙 강렬해서 이후 박정희 시대를 다룬 드라마에서 차지철의 모습은 어느정도 정형화된 감이 있다. 5.16 군사정변 당시 갖고있는 소총의 개머리로 헌병의 얼굴을 가격했다. 국회에선 외무위원장이라고 깝치자 이에 반발한 야당 국회의원과 청문회장에서 대판 싸우기도 했다. 경호실장이 된 뒤에는 교회에 가서 십자가에 무릎꿇고 "주여! 청와대 안에서는 각하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명대사까지 하기도 했다. 그 후 말년에 김재규(박근형)에게 "김부장" 이라며 김재규의 부아를 아주 제대로 돋구게 하였고 결국 10.26 때 "이 새끼 너 건방져!"라는 말을 듣고 저격당했다. 이때 옥에티가 있는데, 카메라 앵글을 제때 조절 못해서 그런지 김재규가 총을 쏘기도 전에 차지철의 손목에 피가 보인다. 현대사 정통 정치 드라마의 딱딱한 특성상 분위기를 전환할만한 개그 캐릭터로서의 활약 역시 두드러졌다.
  • 코리아게이트(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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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한헌이 차지철을 연기하였다. 다만 현대극에서는 친근하면서도 능글맞은 아저씨를 주로 연기하는 정한헌이 차지철을 연기하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는 평이 있다.[34]
  • 영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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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임꺽정에서 임꺽정 역으로 연기한 정흥채씨가 연기하였고 박정희 사진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를 찬양하는 대사는 백미. 극중 무식한 행동대장 기믹이여서(실제도 그랬지만) 알게 모르게 개그 캐릭터화. 드라마가 조기종영하는 바람에 죽는 장면은 안 나왔다.
정호근이 연기했으며 저격당하기 전 "이 따위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말을 들었다. 제4공화국에서 나온 말은 당시 김재규가 차지철을 쏠 때 한 말로 소수설이고, 제5공화국에선 공식 수사기록인 다수설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공식 수사 기록과, 사건의 목격자인 심수봉 씨나 김계원 씨의 증언 중 서로 다른 내용이 조금 존재한다. 참고로 공식 수사기록은 최근에 당시 수사기관의 강압적인 압력에 의해 나온 거짓진술임이 드러나면서 심수봉의 말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신재순과 중앙일보의 인터뷰
  •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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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선 다른 작품들에서 개그 캐릭터를 자주 맡은 정원중이 치졸하고 유치한 모습을 연기했다. 상의는 화려한 제복을 입었는데 정작 바지는 입지 않은채 '각하'에게 전화를 받는 모습이나[35], 명색이 경호실장이라면서 혼자 살아보려고 추태를 보이는 모습이 포인트. --덤으로 쪼인트를 굉장히 현란하고 맛깔나게 깐다. 그리고 부총리에게 "그 돼지같은경호실장은 뭐 했대요?" 라는 사후디스를 먹고 언급이 종료.

* 효자동 이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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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조연 손병호가 연기했는데, 작중에는 '장혁수(장 실장)'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작중 김재규보다 더 비중있게 나오며, 주인공 아들과 박지만이 싸웠을 때 화가 치밀어 주인공 머리에 총을 겨눈다.
  • 남산의 부장들
곽상천이란 이름으로 나오며, 이희준이 연기한다. 작품이 김형욱 실종사건을 다루는 만큼, 사건 당시의 경호실장인 차지철이 나올 확률이 높다.

11.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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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의 등장인물인 장철환은 차지철을 모티브로 만든 가상 인물이다. 전광렬이 연기하였는데 권력에 집착하는 다혈질적인 인물상은 차지철과 매우 흡사하다.

김진태의 만화 시민 쾌걸에는 동명의 정보요원이 나오지만 이름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캐릭터이다.

모에화가 등장했다.

차지철의 딸이 국가유공자 등록 소송을 했다.기사 1심에서 법원은 차지철의 딸이 국적을 포기했으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으나 항소를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국적과 별개로 간신배가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이순재와 동갑이며 같은 한날에 출생했다.

이 인물과 매우 닮았다.
[1] 평준화 이전 서울에서 커트라인으로 5위안에 들던 고교였다. 경기고, 경복고, 서울고 바로 다음이었다. 현재로 비유하자면 상위권 외고 정도이며, 2018년 시점에서도 만만한 학교가 아니다.[2]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을 비롯한 하나회 창설 멤버들이 제11기, 박희도, 박준병, 박세직, 장기오가 제12기다.[3] 뒤에 나올 김재규와의 악연은 이 컴플렉스에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많다. 김재규는 육사출신 중장으로 전역한 군인출신이었고 그래서인지 차지철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 경호실과 중앙정보부라는 육영수 사후 유신정권의 가장 큰 무력집단의 수장들이었으니 더욱 그랬던 것도 있고.[4] 둔기로 두들겨 팬 게 아니냐고 의심을 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패놨다고 한다.[5] 오늘날과 달리, 1980년대까지 육군 특전사에는 보병 병과 외 포병이나 기갑 등 다른 전투병과 장교도 특전교육을 받고 특전사 전투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진급점수 확보 기회 등의 일환이었으나, 비보병 장교들은 병과 특성상 효율이 떨어져 현재는 지원 자체가 안된다. 전투병과 중 특전사 전투원이 되려면 보병 외엔 병과나 일부 극소수 공병(시설단), 통신 등 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포병이나 기갑같은 병과는 불가능하다.[6] 뒷줄 우측에 차규헌도 있다.[7] 오히려 김계원의 전임 비서실장인 김정렴에게는 깍듯이 대했다고 한다. 김정렴박정희가 총애하던 관료인데다가 성격이 강직하여 차지철에게 절대로 살랑댈 이유가 없었는지라 차지철이 부담스러워 했던 반면, 김계원중앙정보부장 시절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신민당에 대한 공작 부실로 박정희의 눈 밖에 나면서 한동안 주 대만 대사로 나가 있었던 점 등으로 인해 깝치는 게 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던 듯 하다.[8] 출처:중앙일보 2015. 08.12일자 기사 김종필의 '소이부답'.[9] 이 특제 제복이라는 것도 어이가 없는 것이, 바로 나치 독일정치깡패단 SA의 제복 디자인을 일부 차용한 것이다.[10] 참고로 사진 주소를 보면 알겠지만 해당 사진이 올라온 곳은 유용원의 군사세계다.[11]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차지철이 박정희 이외에 감히 개기지 못한 인물 중 한 명이 김정렴이기도 했다.[12] 물론 전두환도 겉으로는 이렇게 차지철에게 숙였지만, 속으로는 '나야말로 각하(박정희)의 친위 중의 친위인데 차지철 따위를 통해서 각하와 이어져야 하나'라며 불만이 많았다.[13] 박찬종이 90년대 한때 "무균질 정치인"이라는 닉네임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했지만, 결국 당내 (여당 야당 모두) 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사그라 든 것은 바로 70년대의 이런 행보를 대부분의 중진 정치인들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14] 이만섭이 5년제 대륜중학교 학생일 때 체육교사였다.[15] 본래 이 발언은 소수설이고 목격자 신재순의 증언에 따른 "각하, 차지철 저 버러지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는 발언이 다수설이었지만, 2011년 신재순씨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버러지 발언이 합동수사본부의 강압에 의하여 진술하였다고 털어놓았다.[16] 아마도 부인이 총격에 암살된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추정된다.[17] 이는 당시 직원이 총소리를 듣고는 전류가 터진 것으로 착각하고는 임시조치로 전원을 내려버렸기 때문이다.[18] 검사 결과에 따르면 피격 당시 차지철은 문갑을 들고 자세를 낮추고 있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19] 육군과학수사 연구소법의과장 정상우소령의 사체검안서에 따르면 앞서 김재규가 문갑을 든 그에게 쏜 제2탄이 치명상으로서, 혈흉에 의한 호흡부전과 심장부전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 20여분 뒤에 일어난 김태원의 사격은 이미 죽은 사람에게 쏜 확인사살이 된다.[20] 2017년 시점으로 환산하면 수십억~수백억 내외다.[21] 태국은 국민의 95%이상이 불교를 믿는 국가이다.[22] 어머니를 마주친게 가능했던 이유는 해당 골프장이 이천에 있던 골프장이었기 때문.[23] 여담으로 1997년 9월에 김영삼 대통령 부부추석을 맞아 영락노인복지센터를 방문했다가 김대안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24] 차지철을 죽이려는 계획은 잘 굴러갔지만, 박정희를 죽인 뒤가 문제였다 김재규는 본인이 일을 저지르고도 실제로 수하의 구두를 빌려 신고, 차에 타 육본으로 갔다. 이제와서 따져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지만, 김재규가 진정한 완전범죄를 저지를 속셈이었으면, 본인이 휘어잡은 중앙정보부로 들어가서 차지철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것이 현명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과도 관계가 좋았고, 차지철은 평판이 워낙에 나빴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재규의 사건 뒤 행동은 당황 그 자체였고, 육군본부로 가서 망했다. 무엇보다 김재규는 이런 행보가 후에 을 일으켰는지 생각해야 했었다.[25] 이때 경호실장은 장관급이었다.[26] 이때 김재규를 엄청 갈궜다. 중앙정보부장은 장관 급으로, 경호실장보다도 직급이 높았고, 직급은 장관급이지만, 실제 대우는 부총리급이었다.[27] 차지철은 예비역 포병 중령 출신이지만, 박정희 때는 군부정권이었기 때문에 정부요직에 장성 출신이 수두룩하였다. 김재규는 6관구 사령관, 보안사령관, 3군단장을 지낸 예비역 중장 출신이고, 10.26때 동석했던 김계원도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예비역 대장이다, 군 출신들은 특유의 계급문화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직급이 같다고 할지라도, 군시절의 기수나 계급이 자신보다 높을 경우엔 선배 대우를 해주는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현재도 이럴진데 하물며 군이 가장 힘있는 집단이었던 70년대야 말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이는 명백한 차지철의 잘못이다.[28] 지금으로 치면 국정원장이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밀린 꼴이다. 물론 이 당시 경호실장도 장관급이긴 했지만 정보부장은 부총리급이었다.[29] 물론 지금도 업무분야가 다른 만큼 상호존대가 원칙이다.[30] 전두환은 1931년생이지만, 실제는 1930년생이라고 한다.[31] 즉, 이 시기에 박정희는 권력구도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정권 내부에서의 정치적 감각을 상실했음.[32] 역대 대통령 중, 관련 유머가 거의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박정희와 김대중이다. 그 이유로 첫째, 두 사람 다 유머소재로 쓰기에는 재미가 없게 보였을 것이고, 둘째, 주요 유머생산계층이 당시 관련 지지자들이며(특히 김대중), 셋째, 수류탄을 찬 차지철 사진을 보고 유머 만들 생각이 저 멀리 달아났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33] 제7대 국회의원 선거(1967년) 당시. 둘이 직접 맞붙은 것은 아니었다(김두한은 수원, 차지철은 광주·이천). 참고로 이 선거에서 김두한은 낙선(그래도 45% 득표), 차지철은 당선됐다.[34]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권정달역을 맡았는데 오히려 권정달 역할이 잘 어울린다는 평.[35] 이건 김계원을 그만큼 개무시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