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7 01:13:48

김두한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월화의 검사의 한국 수출판인 '라스트 솔저'의 등장 인물에 대한 내용은 카에데(SNK)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드라마 야인시대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김두한(야인시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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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두한.jpg
이름 김두한(金斗漢)
본관 (신)안동 김씨
의송(義松)
생몰년도 1918년 5월 15일[2] ~ 1972년 11월 21일 (향년 54세)
사망지 서울 성북구 정릉동 자택
별명 잇뽕
종교 불교
신체 178cm[3], 90kg
학력 서울교동초등학교
정당 신민당[4]
가족 아버지 김좌진
배우자 이재희[5], 김부미[6], 김순옥[7], 박정인
아들 김경민, 김주택, 김현성, 김범상
김을동, 김영채[8]
외손자 송일국, 외손녀 송송이
진외증손자[9] 송대한, 송민국, 송만세

1. 개요2. 생애3. 평가4. 김좌진의 친자 논란
4.1. 김두한 출생의혹 관련 내용 및 반론
4.1.1. 김두한은 공식적으로 김좌진의 아들이 맞다4.1.2. 김두한의 출생 의혹이 생기는 과정4.1.3. 김두한 출생의 비밀과는 무관한 책인 김두한 회고록
4.1.3.1. 김두한 회고록의 여러 가지 오류
4.1.4. 김을동을 비롯한, 김두한의 후손이 친일파를 옹호했다?
4.2. 그 외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증거들
5. 김좌진의 또 다른 유족 문제6. 김두한을 둘러싼 수정 전쟁7. 기타8. 선거 이력9. 창작물에서

1. 개요

파일:31세_김두한.jpg
1949년 31세 당시 부친 김좌진의 추모회 당시 모습

일제강점기건달이자, 한국의 조직폭력배 1세대 두목 출신으로 정치깡패를 거쳐 국회의원이 된 인물. 독립운동가 김좌진서자이기도 하며, 혼란스러웠던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근현대사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2. 생애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두한/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

범의 새끼가 되라고 풀어 놓은 것이 늑대 새끼가 되어서 돌아왔구나. 에미는 뭘 하고 있는 게냐? 저놈을 내쫓고 문을 걸어잠그거라! 어서!!
-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김두한의 친할머니

애초에 김두한의 인기는 영화 장군의 아들이나 드라마 왕초, 야인시대, 무풍지대 등 창작물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특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을 일본패에게 팔려가 몸팔이로 연명하는 조선인 여자를 구해주고 다른 주먹패나 일제의 횡포로부터 조선 상인들을 보호하는 의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아버지와 방식이 다를 뿐 그 나름대로 일본과 싸웠다고 극중 의붓어머니인 오씨나 후견인인 최동열 기자가 직접 언급하는 등 거의 홍길동이나 전우치급 협객으로 미화된 부분이 매우 크다. 애초에 드라마 제목부터가 야인시대이다.

그러나 실제 김두한은 정계입문 이전에는 자신의 실리만을 따라 움직이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에, 당대의 주먹계에서 좀 알아주는 대단한 깡패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게다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독립운동은 고사하고 오히려 일제부역 행위를 자행한 기록까지 남아있다. 한 마디로 주먹으로 싸우는 거리의 독립군은 드라마의 각색일 뿐이고, 실제로는 독립군의 별로 죽은 아버지의 명예에 똥칠을 한 악질적인 인물었던 것. 사실 부친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기도 하고, 일제 때 나름대로 주먹질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독립유공자 서훈이 검토되었다고는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주먹질 좀 해서 친일 깡패 내지 일본인 깡패와 싸워봤다한들 그냥 질이 더 나쁜 깡패와 싸운 것일 뿐이고 항일깡패라고 자랑스러워할 정도도 아니여서 독립운동과 별 관계가 없다는 여론이 강했기 때문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무산되었기도 했다.

문제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가사에 이런 자의 이름이 당당하게 거론된다는 것이다.

다만 정계입문 뒤에는 단순히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보인 정치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물론 정계입문 초기에는 자유당에 입당하고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뒤에는 민주공화당에 입당하려 하는 등 처세주의적인 행보를 보인면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면서 자유당을 즉각 탈퇴하여 야당인사로 활동했고,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얼마 안 되어서 한일수교 반대에 참여한데다가 다시 국회의원이 된 뒤로는 의원직을 상실당하고 수감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일으켰고 이후로도 박정희 정권을 줄기차게 비판하면서 감옥에 있기까지 했으니 이 점에 있어서 이승만에게 부역했던 이정재임화수나 군부독재 정권으로부터 하청을 받아서 각목사건을 일으킨 김태촌, 용팔이 같은 어용깡패보다는 확실히 질이 나았기는 했다. 그러니까 깡패짓을 한 것과는 별개로 정계입문 뒤에는 기회주의적인 면모와는 거리가 있는 협객이라고 인정받을 면모는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승만과 박정희의 순한 양이 되는 것이 출세할 길이었기는 길이었으니까 말이다. 사실 역설적으로 김두한이 창작물의 소재로 널리 쓰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 때문이었기도 했다. 항일과 반공을 했다는 것이 자기 PR이 섞인 것이지만 어쨌든 김좌진 아들은 아들인 것이고 21세기 시점에서 본다면 자랑스러워할 일은 결코 아니었다. 어쨌든 소싯적에 빨갱이를 때려잡았던 것은 사실이고 자신도 이를 자랑했으니 심의기관 입장에서도 반공을 명분삼아 검열을 자행할 소지는 상대적으로 적었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나중에 와서는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대항하면서 자랑스러워할 만한 행적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니 그 만큼 흥미로운 소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3.1.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

김두한은 일제 측에 붙어서 부역을 하였다. 다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이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한 목록에도 김두한은 포함되지 않았다. 아마도 일제 부역자지 친일파는 아닌 것으로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친일인명사전의 경우에도 일제 부역과 친일파를 구분한다. 일제의 징역이나 징병을 피해 부역한 사람들이 제외된 것으로 추정. 김두한을 친일파 목록에 삽입하면 친일파 기준이 급하락 해버린다.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가 몇 배로 두꺼워질 것이다. 이 점은 김인호의 《태평양전쟁과 조선사회》(2014)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 시대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아닌데 일제 부역자로 분류될 민중들이 많다. 김인호, 《김좌진의 항일 인맥과 민족 이미지의 형성과 전개 -반도의 용정신대와 대한민청을 중심으로-》(숭실사학 2015, vol., no.34, 통권 34호 pp. 255-294 (40 pages))에선 김두한도 그런 인물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일제강점기 다른 한인 부역자들처럼 일제 부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인물로 설명된다.

대한민국에선 B·C급 전범 판정을 받은 조선인도 일본의 전쟁 책임 전가 행위에 따른 피해자로 분류한다.2차대전 조선인 전범은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당연히 위의 사전이나 보고서에서 제외되었다. 그런데 김두한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하면 형평성에 심각한 결함이 생기는 것도 문제.

4. 김좌진의 친자 논란

김두한이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의 진위여부는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처음으로 공개 지면을 통해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이 바로 도올 김용옥이라고 한다.

김을동에 따르면, 이 논란은 김용옥이 1990년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본격화되었다는 것. 다만, 김을동의 주장대로 김용옥이 이러한 내용을 최초로 주장한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거나 김용옥의 1990년 기고문 자체는 세월이 너무 지나 인터넷 상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에 가면 정기간행물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단 김용옥 본인이 작성한 글은, 그저 "개성출신 고아거짓말한 것이다" 라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사실은, 같은 해인 1990년 발표된 영화 장군의 아들의 시나리오 원안을 쓴 사람이 바로 김용옥이라는 것. 다만 김용옥 자신이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의 김두한이라는 인물은 영화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가감한 영화적 픽션이라고 밝히기는 했다.

그러나 어쨌거나 불씨가 당겨진 것은 사실이므로 이후 제법 논의가 되었고, 여러가지 사실들이 밝혀졌으나 여전히 논쟁 중에 있다.

4.1. 김두한 출생의혹 관련 내용 및 반론

4.1.1. 김두한은 공식적으로 김좌진의 아들이 맞다

정리하면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맞다[10]

의혹을 제기하는 측은 가장 결정적인 본가의 인정에 대해 "김두한이 무력으로 김좌진 본가에 압력을 넣었다"는 추측을 내세우는데, 당시 김두한의 사회적 권력으로는 김좌진 본가에게 실질적인 위협 비스무레한 행위는커녕 딸랑이질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므로 김좌진 본가측의 인정은 크게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가짜 아들설이 생겨난 원인이 뭐냐 하면 바로 "김두한 특유의 심한 허세" 때문에 회고록에서 심한 뻥을 쳐댔고, 아버지 김좌진과 관련된 진술에서도 과도한 자기포장을 했으니, 이를 읽은 90년대 이후 사람들이 다른 사실들과 교차검증하니 당연히 거짓말이고, 그게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진 것.

4.1.2. 김두한의 출생 의혹이 생기는 과정

김좌진의 배우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3명인데, 정실부인인 오숙근, 그리고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독립운동 동지로써 결혼한 나혜국, 그리고 김두한의 어머니 김계월이 있다. 자녀에 대해서는 김두한 외에 나혜국의 아들 김철한과 딸 김석출이 있다.

김좌진 - 김두한은 부자관계에 대한 근거는 일제시대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다.

김두한은 21세기 기준으로 무려 100년 전에 출생했던 인물이다. 실제로 그 부근에 출생했던 인물 중에 어릴 적부터 신문지상이나 일제 공식문서에 오르내리거나 공식 기록이 보존되어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 사람은 가족들이 자식으로 인정하고, 양반은 문중의 족보에 오르는 수준이 공식적인 혈통에 대한 증거로 남지만, 김두한은 김좌진의 남은 두 명의 부인인 오숙근, 나혜숙의 인정을 받은데다가, 많은 언론이나, 일제 공식문서, 안동 김씨 문중 등에서도 공식적으로 김두한을 인정했다.

김두한은 1918년생이고 대략 1930년 내외에 일제시대 여러 언론에 의해서 김좌진의 아들로 여러 기사에 나온다. 김좌진의 사망 이후,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나혜국 여사가 귀국하여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힘들게 생활하게 되었다. 이에 정실부인 오숙근은 자주 왕래를 하였고, 김두한은 오숙근과 나혜국 여사와 당시 왕래하였다. 일제시절 당시에 안동 김씨 가문이 김두한을 안동 김씨 자손으로 인정하였고, 이것에 관한 기사도 남아있다.

김좌진의 두 명의 정실부인 즉, 오숙근과 나혜국에 의해서, 딸 김석철, 아들 김철한과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호적에 올림으로써 이 세 명의 자녀는 확실히 김좌진의 자녀로 인정받았다. 게다가 일본 경찰에서도 김좌진의 자식으로 기록되어 요주의 인물이 된다. 이게 모두 해방 전후의 일이다. 또, 해방 이후에 김두한의 딸 김을동이 김좌진의 어머니와 본처인 오숙근여사와 같이 찍은 사진도 현재 존재한다.[11] 또 나혜국 여사는 김두한 사후인 1987년에도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 김철한 둘 뿐이다라고 언론에 인터뷰했다. 김두한이가 죽고 나서도 계속 협박했던 것일까?[12]

게다가 청산리 대첩 당시 김좌진의 부하였던 이범석이나 김구 등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김두한의 힘으로 윽박질러서 호적을 얻었다는 황당한 주장이 무색한 이유이다.[13]

즉 김두한은 보통 1930년 정도에 김좌진의 아들로 확실하게 인정받았고, 이후 김좌진의 호적에 오름으로써 아무리 늦춰 잡아도 해방 직후에는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받은 것이다. 게다가 70년대 김두한이 사망한 지 한참 이후에 1986년에 김좌진의 정실 자녀인 김한철의 친모 나혜국에게서도 김좌진의 자녀는 김두한과 김철한 뿐이다라는 인터뷰가 신문에 기사로 실린다.[14]

어쨌든 공식적으로 보면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인 것으로 확정된 상태다. 그것도 거의 80~90년전인 1930년대쯤 이미 공식 확정된 상태이다. 당연히 오래전 과거에 공식 확정된 사실이니, 구체적으로 각각의 경우 어떤 검증과정을 거쳐서 인정받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2018년 현재 별로 남아있지 않다.[15]

당시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인정했던 당시 인물은 다 사망했다. 김좌진의 독립운동 동지이자 부인인 나혜국 여사가 1986년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 김철한 둘 뿐이다라고 언론에 증언하였고, 사망한 것이 가장 마지막 증언이다.
공교롭게도 나혜국 여사가 사망한 이후 90년대 들어와서, 김용옥이 김두한의 출생의 의문 발언을 한다.
어쨌든, 나혜국 여사라는 강력한 증인이 살아있을 때 김용옥이 그런 황당한 의혹 제기를 했으면 나혜국 여사 쪽에 반박당했을 테고, 일부러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딱 시기를 맞추어서 김두한 출생의 증인들이 모두 사망하고 사라진 이후에 딱 맞춰서 그런 의혹을 제기하게 된다.
어쨌든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로 인정받는 상황에 대한 당시 증인들은 1980년대까지 다 사망했는데, 김두한의 출생에 대한 논란은 1990년 이후에나 생겼기 때문에, 이 논란에 생긴이후에 관련 증인 인터뷰를 따로 할수가 없었다.
즉, 김두한이 일제시대에 김좌진 장군 아들로 신문에 실리던 상황, 안동 김씨 인정받거나 가족에 인정받은 상황, 호적이 오를때 상황등에 대한 구체적 인터뷰는 2018년 현재는 없다. 애초에 의혹이 없는데, 의혹에 대한 인터뷰를 하는건 말이 안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관련 인터뷰는 몇 개 안 된다. 애초에 대한민국 어느 누구도 출생 의혹이 없는 상태에서, 관련자들이 출생 과정 기록에 대해 일일이 언론 인터뷰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즉, 김두한의 출생 의혹에 관한 핵심적인 증언이 많이 없는 이유는.. 출생에 관한 주요 핵심 증거와 증인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출생의혹이 뒤늦게 생긴 때문이다. 물론 나혜국 여사의 1986년 인터뷰 하나로도 김두한 출생에 대한 확인으로 확정적이지만.
어쨌든 의혹도 없는 상황에서, 김두한 출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을리가 없다. 김두한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고 결과가 없어지는건 아니다. 확실한 것은 한두명도 아닌 수많은 사람과 조직이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단지 현재에는 그 당시 그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별로 없을 뿐이다.[16]

4.1.3. 김두한 출생의 비밀과는 무관한 책인 김두한 회고록

사실 김두한이 뒷세계에서는 거물급이었고 비록 한국노총 위원장과 국회의원직을 역임했다고는 하지만 정계 거물급 인사로 크지는 못했던지라 역사적으로 족적이 크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그 덕택에 역사학계에서도 김두한의 관련 행적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거의 없고, 가십거리 취급을 받았다. 이승만, 박정희, 장면, 윤보선,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같은 거물급 인사를 연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그러다보니 김두한에 대해서 내려오는 저작물은 판타지액션에 가까운 여러 가지 픽션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픽션의 근거는 상당수가 김두한의 회고록에 근거한다. 즉, 김두한이 관한 여러 소설이나 영상매체의 근거가 되는 게 회고록이고 음모론의 가장 큰 지분 역시 김두한의 회고록이다. 김두한/창작물등에서 언급된 1963년에 출간된 자서전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 1969년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 김두한편" 등의 매체인데 문제는 둘 다 그 내용의 진위여부가 의심스럽고 믿기 힘들다는 점이 문제이다.[17] 그러나 내용이 과장이 심해서 김두한 회고록을 진지한 저작물로 보기 힘들다. 그냥 판타지 액션물 즉, 픽션으로 보는 게 맞다. 라디오 진행자였던 권오기는 이 내용에 대해서 허세쯤으로 인식하고 있다.[18]

1963년에 출간된 자서전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
1969년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 김두한편
당시 진행자였던 권오기의 인터뷰.[19]

이 회고록의 내용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이 각종 음모론의 큰 지분이다. 이외에 김용옥의 발언도 작은 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사실 회고록으로 음모론이 출발하는 건 넌센스 코미디에 가깝다. 가족이 아닌 제3자가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냐를 따지려면 유전자검사가 확실한 방법이지만, 당사자들은 서로 가족으로 생각하는데 제 3자들이 난리친다고 4촌 이내의 가족들끼리 유전자 검사가 행해질 이유는 없다.[20]

제3자의 입장에서 김두한의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결정이 틀렸다는 증명을 하려면, 김두한이 안동 김씨 가문, 언론, 조선총독부, 김좌진 장군의 부하, 독립운동가들, 김좌진의 정실부인 등에게서 인정받는 과정과 당시 판단 근거를 조사해서, 그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면 된다.

그런데 1930년 내외에 어린 김두한이 안동 김씨 일가에서 김좌진 친자로 인정된 여러 가지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2018년 현재로서 별로 없기 때문에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지 아닌지 정확히 따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이게 이상한 것이 아닌 게 이미 100여 년 전의 과거사건이며, 역사적으로 중요사건도 아니고, 당시에 김두한의 출생에 어떠한 의혹도 없기 때문에 이걸 자세히 조사한 기록도 없다. 김두한이 아닌 다른 사람 역시도 그 당시 가정상황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그나마 그 중에서 김두한이 어린시절에 대한 여러 기록이 자세한 편이다.

김두한의 출생 의혹은 1990년대 도올 김용옥으로 인해서 커진 것은 사실이고, 이 시기에는 별 다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특별히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은 이상은 제3자의 입장에서 김두한이 김좌진의 자손인지 아닌지 증거를 모은다는 게 거의 불가능이다. 김을동 나이 정도 되는 인물, 예를 들어, 박원순은 서류상 할아버지가 유전적으로도 할아버지 맞는가? 사실 유전자 검사하기 전엔 아무도 모른다. 전두환의 호적상 아버지가 유전적 아버지인 게 맞는가? 고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인가 신돈의 유전적 아들인가? 현대인은 아무도 그 진실을 모른다. 사실 유전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은 2018년에 사는 그 누구도 모른다. 즉, 김두한이 김좌진의 유전적 아들이 100% 맞는지는 원래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보통은 박원순이나 전두환의 가족관계상 아버지가 실제 아버지라고 보통 인정하는 게 맞다. 그게 공식적인 것이다.

즉, 출생의 의혹이 되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호적이나 각종 가문원, 친지들의 인정 같은걸로 혈통을 인정받는 것이다. 물론 박원순, 전두환의 조상들도 어떤 과정으로 가족과 친지들이 친자임을 인정해줬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찬가지로 100여년전 김두한의 출생에 관한 구체적인 정확한 기록이 없는게 원래 정상적이며 물론 김두한은 디테일한 구체적 기록은 없어도 큰 기록은 많다 구체적인 기록없어도, 공식적으로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이라고 인정받는 이유이다.

결국, 김두한이든 박원순이건 전두환이건, 일가친척들이 인정해주고 호적까지 올린 가족 사항은 기본으로 존중해줘야하고, 만약 그것에 반박할 증거가 있다면 반박하면 된다. 만약 혈통에 관해서 반박할 증거가 없다면 반박을 안 하면 된다. 증거 없으면 반박하더라도 의미없는 것이다. 100여 년이 지난 현재 혈통에 반박할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이런 이유로 만약 혈통에 반박 못 하겠으면 반박 안 하면 된다.

즉, 김두한이 90여 년 전부터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에 대한, 확고한 반대 증거가 없으면 기존의 과거의 판단을 존중하면 된다. 당시 증인들과 기록들이 세월에 밀려서 사라져서 증거가 없으면 증거가 없는 거다. 증거가 없으면 주장을 안 하면 된다.

근데 이런 상황에서, 뜬금없는 일이 생겼다. 김두한의 김좌진 장군의 아들 인정문제와 별 관련도 없는 김두한의 회고록을 꺼내와서 김두한의 출생에 대한 의문을 주장 음모론이 생긴것이다. 핵심적인 주장은 김두한 회고록이 내용이 앞뒤가 안맞으므로, 김두한의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 이런 김두한 관련 음모론의 대단한 착각을 살펴보면
  • 김두한 회고록은 1960년대 말에 나왔다.
  • 즉,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공식인정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김좌진의 아들로 김두한을 거론할 1930년대에 김두한의 회고록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 즉, 김두한을 친자로 인정했던 여러 사람들은 김두한 회고록을 근거로 김두한을 친자로 인정한게 아니다.
  • 김두한의 회고록은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된 과정과는 무관한 책이다.
  • 즉, 1. 김두한 회고록이 엉터리로 씌여졌다는것과.. 2.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라는건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결정을 반박하려면, 그 결정을 내릴 당시 자료와 판단과 정을 입수해서 반박하면 된다. 김두한 회고록은 그것과 무관한 것이다.

김두한 회고록으로 생긴 음모론이 주장이 웃긴 또 한 가지 이유를 보자면 사실 김두한 회고록에는 출생과정보다는 오히려 김두한이 조직폭력배 생활과 해방 이후 정치깡패 생활을 하는 내용이 상당부분이다. 물론 책 곳곳에서 상당한 오류가 발견되는데, 정말 웃긴 것은 조직폭력배, 정치깡패 관련 내용에도 오류가 당연히 많다는 점이다.
  • 1. 김두한이 회고록에 출생관련 오류가 많으니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란 근거이다라는 논리대로면
  • 2. 김두한 회고록에 정치깡패, 조폭 관련 내용에 오류가 많으니, 김두한은 조폭도 아니었고 정치깡패도 아니었다라는 희한한 결론이 나온다. 사실 그 누구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김두한 회고록에 자기 미화가 가득해서 굉장히 많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김두한의 회고록은 역사학계에서 정식 사료료 인정받지 않는다. 일제시대나 해방 이후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김두한의 회고록 책을 역사학의 근거자료로 쓰지 않는다. 믿을 만한 다른 자료를 근거자료로 쓰는 것이지, 내용 자체가 신뢰가 안 가는 자료를 쓸 이유가 없다. 김두한의 회고록은 그냥 논픽션이 아닌 픽션 수준으로 참고만 하라는것이다. 역사학 관계자들은 아무 책이나 역사 자료로 쓰지 않고, 김두한의 회고록은 역사학계에서 정식 사료로 사용되지 않는다. 즉 김두한의 회고록으로 근현대에 대한 판단을 하고 그걸로 논문 쓴다면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두한의 출생관련 역사적 학문적으로 주장를 하려면 김두한 회고록이 아닌 학계에서 인정받는 사료를 사용해야 한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 맞건 아니건, 판단을 하려면 김두한의 회고록으로 판단하는것은 신빙성이 없다.

김두한의 회고록과 마찬가지로 환단고기는 정식 역사자료로 인정받지 않으므로, 고조선 관련 역사를 연구할때는 환단고기를 배제하고 다른 믿을 만한 역사자료로 연구하는것이 역사학자의 연구방향이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서술 내용이 틀린 부분이 발견되엇다고 해서 고조선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정조의 어머니가 쓴 책 한중록은 몇몇 틀린 부분이 있어도 대부분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을 통해서 인정되었기에 정식 역사 자료로 인정받는다. 정조 시대 역사를 연구할 때 한중록을 사료로 써도 된다. 김두한의 출생에 관련 연구를 하고 싶으면... 김두한의 회고록은 배제하고 다른 자료를 가지고 연구하면 된다. 만약 결론을 내릴만한 자료가 없다면 그건 어쩔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김두한의 회고록이 잘못됐다고해서..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거나, 김두한이 깡패가 아니었다거나, 김두한이 정치폭력을 안했다거나 하는 결론을 내릴순 없다.

김두한의 회고록의 오류가 있다는 것이 현실에 뭔가를 증명하지 않는다. 마치 영화 장군의 아들이나 야인시대 같은 픽션이 실제 역사 사료와 다르다는 것으로 뭔가가 증명되지 않는 것과 같다.
4.1.3.1. 김두한 회고록의 여러 가지 오류
그래서 김두한의 회고록은 실제로 김두한의 출생의 진실과는 무관한 책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에서 마치 출생의 진실을 김두한의 회고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양 떠들고 있다.

사실 1960년대에 나온 김두한의 회고록은, 김두한의 회고와 증언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내용을 보면 김두한의 회고록은 여러 오류가 있다.
김두한 회고록의 핵심적인 내용은, 일제시대 조폭활동 해방 이후 정치관련 활동을 미화하는 것이 주 내용인데, 굉장한 미화가 많다.

스스로를 일본에 대항하는 협객으로 미화하는데, 특히 조폭활동하면서 몰래 독립운동을 하고 일제 시설을 폭파하는 등 활동을 했다거나, 해방 이후에 일어난 우익폭력 사건을 빨갱이를 대항하는 영웅으로 미화한다거나 등의 과대포장이 많다. 또 김두한 출생관련해서도 구석구석 미화와 오류가 있다. 김좌진이 사망했을 당시 김두한은 불과 12살 전후밖에 되지 않았으며, 김두한 회고록에 따르면 아버지를 만나본 것은 단 한 번뿐이니 애매한 구석이 상당수 존재할 수밖에 없기도하다. 무엇보다도 당시 김두한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제대로 된 내용을 기억할 리가 만무하며, 친부 논란을 떠나서 김좌진을 만났다는 것이 김두한 특유의 허세, 허풍일 가능성도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

이로 인해 김두한의 회고는 세부적인 면에서 사실과 다른 점들이 상당 부분 존재하는데, 심지어 김두한 본인조차도 이전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야기한 경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김두한은 청산리 대첩 때 자신이 7살이라고 했고 11살 되던 해에 아버지 김좌진이 죽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김두한은 1918년 생이고, 청산리 대첩은 1920년에 있었으며, 김좌진은 1930년에 죽었으므로 사실 관계가 엉망진창이다.

어린 나이에 얼굴도 못 본 아버지가 죽은 이야기를 50살 내외에 하는데 이게 몇 살 때 일인지 제대로 기억한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판단할 수있다.[21] 사실 21세기 기준으로 50세가 많은 나이 아니지만, 당시는 노인에 가까웠다. 게다가 김두한의 사망이 1972년이다. 회고록은 1963년, 1969년에 출간되었다. 게다가 사카린 밀수 사건 당시 정의감에 찬 김두한이 국회에 오물투척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폐인이 되어서 풀려난것이 1966년이다. 1966년 이후로 거의 폐인이 되어살다가 72년에 죽은걸 생각하면, 요즘 식으로 환산해서 생각하자면, 왕년에 잘나갔던 70~80세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라디오에서 찾아주니 왕년에 나 잘나갔어라면서 왕년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이다.

어쨌든 기억해야 할 것은 김두한이 자기 회고록을 정확히 써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1. 김두한 회고록은 역사논문이 아니었고, 김두한도 글을 잘 못읽던 사람이라 자료하나하나 검토해서 만들어지기 힘들 상황이라는 점이다. 특히 라디오는 즉석에서 거의 기억에 의존해서 증언한 것이며, 핵심내용은 일제시대 조폭생활을 미화, 해방 이후에 우익폭력활동을 미화한 내용이다. 즉, 자기 미화이자, 허세이다.
2. 이 책이 사실 출생과 관련해서 연관짓는게 좀 어색한 이유가, 애당초 김두한은 자기 출생을 증명할 이유가 없었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된게 1930년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김좌진의 아들로 잘 살았고 당대에 그 누구도 그걸 의심하는 사람도없었다. 즉, 회고록에 자기 출생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늘 하던대로 허세를 부린 것이라는게 더 합리적인 설명이다.

* 구체적인 회고록의 오류를 살펴보자
회고록 관련 음모론자들이 가장 의심하는 내용은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모친에 대한 기록이다. 일단 김두한의 회고록에 기록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김좌진이 아직 서울에 있을 때, 일본 경찰에게 쫓기는 일이 벌어졌다. 도피 중에 어느 집 담을 뛰어넘어 들어갔는데, 그 집은 옛 상궁 출신인 박 씨와 그의 딸 박계숙의 집이었다. 이후 박씨 모녀는 김좌진을 보살펴 주었고, 박계숙은 김좌진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 아이가 바로 김두한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 이야기는 미화, 과장되었다. 문제는 각종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 이 일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훗날 김두한의 출생 관련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단단히 일조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김좌진의 사망 이후 보도된 내용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당시 신문 보도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성립된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당한 사건은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다. 당연히 국내언론도 중요한 뉴스로 취급하였으며,[22] 자연스럽게 국내에 남아있는 유족의 동정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김좌진의 가족은 현재 길림성 모처에 있으며 칠십 노모와 아내, 그리고 아우인 김동진 씨이다. 다만, 서울 시외 모처에 김좌진의 서자[23] 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단, 이 기사 내용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기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일단 월간 말지에 해당 내용을 작성한 사람이 신문 이름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곧이어 조선일보 개성특파원 최문우가 김두한의 거처가 서울 시외가 아닌 개성이라는 것을 알아냈으며, 취재를 하였다. 이 결과가 1930년 3월 17일부터 2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이 기사에는 김두한의 어머니 김계월과 김두한의 어린 시절 사진이 실렸다.
“김좌진의 애첩이었던 김계월(26)의 몸에서 출생한 김두한(12)이란 아들에 대한 다른 소식들은 모두 잘못 전해진 것으로, 그들은 현재 개성에 있다. 김두한은 현재 개성 서본정(西本町) 254번지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머물고 있다.” (중략)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두한은 아침밥을 먹고 나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의 외할머니만 병들어 누워있었다." 『조선일보』1930년 3월 17일자)

나머지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김계월의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김상회라는 사람으로 명문 집안이었으나 구한말에 몰락하였다. 결국 집안이 파산하여 김계월은 15세 때(1916년) 서울의 다동권번(茶洞券番)이라는 기생집에 팔려 가게 되었다. 이 무렵 김좌진은 서울에 있었으므로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이후 3년 동안 동거했으나, 김좌진은 1918년에 김계월을 서울에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 이 때 김계월은 태중에 김두한을 가진 상태였다.

한편,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어머니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떠나면서 아들을 나으면 두한이, 딸을 낳으면 두옥이로 이름을 정하라 하셨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그렇다 치고, 김두한이 말한 자기 어머니 성씨가 실제와 다르다.

여기에 또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은, 김두한이 당시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해 증언한 내용. 김두한은 회고록에서는 이후 어머니와 할머니가 자신이 7살 되던 해에 “예비검속됐다”거나 “투옥됐다”고 증언할 뿐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보다 나중의 육성증언인 '노변야화'에서 “8살 때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 최문우가 개성으로 찾아갔을 때엔, 분명히 "12살 김두한이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라고 했으니 일차적인 모순이 발생.

위의 두 의문점은 결국 어떤 기회주의자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임을 사칭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생산해낸다. 사실 모든 의혹은 이 주장으로 모이긴 한다.

그런데 월간 말의 기사는 위의 모순점들이 다음과 같이 해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래 내용은 월간 말에 인용되어 실렸던 것을 약간 편집한 것으로, 원 출처에 대해서는 다른 용자가 추가 바람.
남편을 홀로 떠나보낸 김계월은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노모와 아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김좌진을 찾아갔다. 따라서 김두한이 자신이 6살 때 만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잘못 기억하여 연도가 틀리게 되었고, 그 때문에 이후의 사실까지도 연도가 죄다 실제와 다르게 된 것이다.

어쨌든 김계월은 노모의 건강이 악화되고, 김좌진으로서도 김계월 일가를 보살피기에 벅찼기 때문에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가 대략 1926년 즈음.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서울의 인사동에 거처를 정하였으나 역시 살아갈 길이 막막. 김계월은 다시 기생으로 일하려고 했으나 어쨌든 안동 김씨 가문의 첩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주위의 만류로 실천에 옮길 수도 없어 그저 친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결국 연고가 없어 알아볼 사람이 적은 개성으로 옮겨 기생 일을 다시 시작한 것. 그런데 개성에서의 기생생활도 만만치는 않았기에 결국 여기서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기생 2명과 함께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이때 어린 김두한은 외조모 아래 개성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김계월은 이후 다시 더 북쪽의 홍원으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결국 최문우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계월은 행방이 묘연하고 김두한과 외조모 둘만이 남아있었다.

이 길고 뻔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좌진의 이었던 김계월이 김두한을 낳았다. 그런데 김좌진은 이미 만주로 떠난 상태라 김계월로서는 김두한을 먹여살릴 방법이 없었고, 결국 집을 나가버렸다. 결국 어린 김두한은 외할머니와 둘만 남겨졌다.

어린 시절 집을 나간 기생 첩 출신 어머니, 그리고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이국에서 독립운동 중인, 얼굴도 모르는 위대한 아버지. 이런 사실에 대해 김두한이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연히 어리고 배운 것도 없는 김두한이 기초적인 사실을 근거로 그럴싸한 이야기들을 잔뜩 집어넣어 스스로를 높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김두한의 관련 증언들이 애매하고 사실관계가 다소 어긋나 있는 사실들은 모두 해명이 가능하며, 그가 왜 그런 식으로 꾸며내었는지 또한 설명이 된다.

또한, 김두한의 자서전에 어머니 성씨가 엉뚱하게 기재된 것은 어머니가 일찌감치 집을 나가 버린 탓에 어린 김두한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또, 그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과정 중에 대필작가가 대충 기재한 내용일 가능성도 있다. 김두한 본인은 어느 정도 글자를 쓰고 읽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의 구술에 의존해서 대필되었을 것이며, 사후 검토나 퇴고 또한 이뤄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여기에 더하여 몇 가지 의혹들이 더 있다.
  • 우리 김좌진 장군님이 기생 따위와...
    •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다.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어느 정도 능력 있는 남자들 중에 본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를 두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 김두한이 김옥균김좌진의 양아버지라고 말한 것. 그러나 김좌진은 1889년 생인데, 김옥균은 188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귀국하지 못했으므로 사실이 아니다.
    • 김두한의 흔하디 흔한 허풍, 허세. 본인과 아버지인 김좌진을 더욱 돋보이게끔 같은 가문인 김옥균을 끌어들여 거들먹거린 듯하다.
  • 김두한은 형평운동 중에 김좌진과 인연을 맺은 원노인 밑에서 컸다고 주장하는데, 김좌진과 형평운동의 관계는 밝혀진 바가 없으며 시간적으로도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 김두한의 흔하디 흔한 허풍, 허세 x 2. 원노인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긴 존재하였는데, 억지로 김좌진과 연결시키기 위해 형평운동 이야기를 꾸며냈을 가능성은 있다.
  • 그 외 김계월의 나이가 잘못되었다거나, 연도가 살짝 맞지 않는다거나, 김계월의 아버지라는 '김상희'라는 인물이 조선말 참판을 지낸 기록이 없다는 지적
    •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신문 기사에서 연도나 나이에서 약간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 정도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김계월의 어머니이자 김두한의 외조모로 배움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는 민간에서는 음력으로 생일을 따지고, 공식 기록이나 신문 등에서는 양력으로 따지던 시대이니 혼동이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사소한 오류점을 제외하면 정황 자체는 그럴싸하다. 참판 기록이 없다는 문제는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데, 조상 중 누구가 참판을 지냈다는 핑계로 참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
  • 김두한이 해방 이후인 1945년에서야 김좌진과 이혼했던 옛 본처 오숙근[24]의 아들로되어 본처 호적에 오를 수 있었다는 주장.
    • 이미 1930년부터 김두한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등장했다. 오히려 오숙근이 해방이 되고서 뒤늦게 자신과 김좌진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김두한의 존재를 이용했다는 것이 더 개연성 있는 이야기이다.[25]
  • 김좌진의 사망 보도 기사에는 양자인 김문한이 언급될 뿐이며, 김두한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등장한다.
    • 김문한은 김좌진의 조카뻘 되는 사람으로 김좌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에 장례 문제로 급하게 양자가 되었을 뿐 이 문제와 관련이 없다. 이후 김문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이 이야기는 아래에 적혀있다.
  • 총독부에서 고의적으로 김좌진의 명예를 폄훼하기 위해 김두한이라는 사생아를 만들어냈다는 주장
    • 이런 행위를 한 것은 매일신보로, 최초 보도한 것 역시 매일신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1925년 그 어머니 김계월이 어린 김두한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을 만난 것을 기사화한 것이다.(매일신보 1925년 9월 15일 「金佐鎭과 金桂月 八年만에 異域에 邂逅 오래동안 서로 그리우든 정랑정부가 서로 맛낫다」) 김두한의 회고와 비교하면 이 기사가 조작이 아니라 도리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 상봉 이야기는 유학자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에도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다른 신문에서도 보도되었는데, 이 당시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을 친일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리고 당시 김두한의 나이는 불과 12세로 총독부의 연극에 동참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또한 김두한과 그의 외조모는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불우한 생활을 했는데, 총독부의 연극에 동참했다면 왜 아무런 대가를 얻지 못한 것인지?
  • 굳이 총독부가 아니더라도 김두한의 외조모 혹은 기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다.
    • 뭐하러? 이 시점에 김좌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이국에서 사망한 불순한 독립운동가였다. 대체 그와 관계있다고 주장해서 얻을 게 무엇이겠는가?
  • 김좌진과 김두한은 전혀 닮지 않았다.
    •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는 개인의 주관으로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설령 닮지 않았다고 해도 친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인종이 다르면 몰라도

4.1.4. 김을동을 비롯한, 김두한의 후손이 친일파를 옹호했다?

사실 이런 논란이 객관적이거나 근거가있다기보다 감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이것인데, 김을동이 정치계에 투신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된 것이다. 김을동의 아들인 송일국이 연예인이 되고, 그의 아들들 또한 인기를 끌고 2019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26] 김두한이 심지어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였다가 극우파로 변신했다고 하기도한다. 기사

그러나 이것 역시 과대포장인것이, 김두한의 후손이 한두명이 아니다. 김두한이든 누구든 자손이 많으면, 자유한국당 지지자도있고, 민주당 정의당 지지자도 있을수 있는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손자·손녀, 역사교과서 놓고 좌우로 갈려[27] 김을동씨가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등의 정치인으로 활약했다면, 김두한의 아들이며 김을동의 이복동생이 김경민씨는 새누리당 반대쪽에서 활약하고 있다. 자손이 많다보면 각기 정치적 색깔이 다를 수 있으므로 비판할 대목이 있다면 그 개인들에게 하면 된다.

4.2. 그 외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증거들

그 외에도 1942년에 경성 종로경찰서에서 작성해 경성지방법원에 보낸 문서(京鍾警高秘 제1721호)에도 김좌진을 김두한의 아버지로 쓰고 있고, 중외일보 1930년 5월 20일 기사에는 "수일전 계동(桂洞) 김병목(金炳穆)씨 집에서 고 김좌진(金佐鎭)씨 유고 두한(斗漢)소년의 장래교육을 위하야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모여 회의를 열었다더라" 운운하여 어린 시절부터 문중 차원에서도 김좌진아들이란 걸 인정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 경찰의 내부문서에서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기록해놓고 감시하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의 논란은 무의미하다.

해방 이후 김두한이 안동김씨 김좌진 장군의 호적에 정식으로 올라갔으며, 김좌진 장군 밑에서 같이 독립군 활동을 하던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말하면서 구명운동을 했다. 김구 선생도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군이라 지칭하면서 걱정해주었다. 김구 선생도 거물이지만, 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을 이끌던 우익폭력계의 거물이고 이승만의 바로 아래급 거물이다. 일각에서는 김두한이 폭력으로 김좌진 문중을 위협해서 호적을 얻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는 과거 김좌진의 측근들이 김두한보다 더 거물이었으므로 함부로 굴 수가 없었다.

그 외에 백범 김구 같은 독립운동가의 글에서도 보인다.(1948년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 임하여 남하한 이북 동포에게 기(奇)함')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김두한이 사망한 1970년대 이후
  • 1986년 나혜국 여사[28]의 언론 인터뷰 : (제3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자)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과 김철한 뿐이다.
  • 1990년 MBC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에서는 김두한의 아들 김경민이 나혜국과 김철한을 찾아가 인사하며 서로 반가워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만약 가짜라면 김두한 아들이 갑자기 집에 찾아왔는데 그렇게 오래된 가족처럼 맞을 수가 없다. 이 분들이 전문 연기자도 아니고. 나혜국 - 김철한 쪽에서는 확실히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인정한다.[29]

5. 김좌진의 또 다른 유족 문제

한편 1989년, 김좌진의 딸이라 주장하는 새로운 인물이 갑툭튀하면서, 위의 가짜설과 엮여 논란이 심화되었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사실만을 간추리고 내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1988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김좌진의 유족으로 김강석 혹은 금(金)강석다이아몬드이라는 60세 중국 국적 여성이 김좌진의 딸임을 주장하여, 이 사실이 1989년 기사화되었다.[30]
    - 당시는 냉전이 막 끝난 상황으로 중국, 러시아 등지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의 유족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한 시점이므로 이 사람이 등장한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 그런데 저 위의 링크된 기사 내용으로만 보아도 의문스러운 점이 상당하다. 김좌진의 내연관계였다는 이 여인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사망한 상태이며, 김좌진의 부하였다는 양아버지 역시 사망한 상태. 게다가 이 여인은 문화대혁명 당시 이름을 바꾼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본인 신분에 뭔가 애매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31] 또한, 본인이 직접 국가보훈처에 먼저 연락을 취한 것도 따지고 보면 마뜩치 않은 부분.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이며 실제 이후로도 문제가 된 것은,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 또한, 기존에 알려진 김좌진 암살 내용과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 이후 소식은 알 수 없고, 1999년 중국에서 열린 김좌진 자택 복원 기념회에 한국의 유족들과 함께 참석한 것이 기사화되었다.
    - 위의 링크를 보면 알겠지만, 이 기사에서도 '장군의 딸로 알려진'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넌지시 돌려 말하고 있다.
  •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2005년, 김강석의 딸이자 김좌진의 외손녀라 주장하는 위연홍이라는 여성이 한국에 들어온 것이 기사로 간단하게 소개되었다.

참고로, 김좌진과의 관계를 주장한 사람은 김강석 이전에도 존재하였다. 김좌진의 양자 김문한의 아들이라는 주장 기사에 따르면, 신뢰하기도 적고 사실이라 해도 김문한 자체는 일시적으로 장례 문제로 양자 취급한 조카이므로, 유족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김을동도 말했듯이 바로 유전자 검사뿐. 그런데 김강석 쪽과 김두한 쪽을 비교대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관련성이 없다고 나오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가짜라고 주장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 따라서 제3의 유족이자 호적상으로나 기록상으로나 명백한 김좌진의 유족인 김두한의 남동생 김철한 쪽 유전자와의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자신이 먼저 유전자 검사를 제의했고, 위연홍은 잠적해 버렸다는 김을동의 주장에 대해, 김철한 쪽에서는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즉, 사실상 김을동의 주장을 수긍한 셈.

그러나 사실 김철한의 어머니이자 만주에서 김좌진과 혼인 이후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나혜국 여사가 이미 1986년 신문 인터뷰에서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과 김철한 뿐이다 라고 단정해서 말한것을 고려할 때, 김철한이라고 생각이 달랐겠는가.

그리고 MBC에서 1990년에 방송한 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에서는 김두한의 아들 김경민이 나혜국과 김철한을 찾아가 인사하며 서로 반가워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만약 가짜라면 김두한 아들이 갑자기 집에 찾아왔는데 그렇게 오래 된 가족처럼 맞을 수가 없다. 이 분들이 전문 연기자도 아니고. 나혜국 - 김철한 쪽에서는 확실히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인정한다.

김두한 생전에 김좌진 가문을 매수와 협박했다는 한심한 주장이 있다.
김두한이 1970년대 말년에 병고에 시달릴때 의지할데도없이 쓸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하물려 김두한이 죽은뒤 10년도 훨씬 지난 80년대말이나 1990년대초까지도 김두한을 무서워한다는게 말이될까? 게다가 김두한 패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악했던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고 그 후손이다. 특히 나혜국 여사는 일제시대 김좌진 장군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하였고, 김좌진 장군 사망 이후 일제치하 조선에 귀국한후 일제에 엄청나게 고초를 치렀다. 해방 이후 김두한이 김좌진 가문을 협박했다는 주장도 엉터리인것이 김좌진의 독립운동 동지가 해방 이후 거물인 이범석이며 나혜국 여사와도 독립운동 동지이다. 이범석은 해방 이후 김구와 함께 김두한 사형구형당시 구명운동을 한 인물이다. 김두한은 정치폭력배로 유명하지만, 김구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범석은 해방 이전 한국광복군의 참모장이었으며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즉,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란 칭호를 얻으려고 협박을 할만한 상대들이 아니다. 게다가 백번양보해서 가령 김두한이 김좌진 유족들을 협박한게 맞다고 치더라도 자신들을 협박한 상대가 이미 죽었는데 이미 죽은 상대를 계속 두려워한다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이다.

아무튼 이로 인해 인터넷에서는 국회의원이며 여당핵심 인사인 김을동이 실은 김좌진 장군의 가짜후손이며, 자신의 권력으로 진짜 자손인 위연홍을 몰아냈다는 주장이 떠도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위연홍이 오히려 의문점이 더 많다.
  • 김좌진 장군의 후손에 김을동만 있는게 아니다. 김좌진 장군의 자식에는 김두한도 있으며, 첫째 정실 부인의 자녀 그리고 세째부인 나혜국 여사의 자녀인 김철한쪽 후손도 있다. 즉, 위연홍이 만약 유전자 검사를 원했다면 왜 굳이 김을동만을 고집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결국 언론플레이를 위해서 유명인사인 김을동을 지목한게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 위연홍은 2005년 한국에 온 이후, 2006년세계일보 기자가 기사를 내면서 많은 후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김좌진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한 판결이 난 것이 2008년 3월인데, 김을동의 국회의원 초선 당선이 2008년 5월이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처럼 김을동이 국회의원으로서 압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기다.
  • 세계일보가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기사를 내면서 도움을 주었고, 김좌진 장군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과 홍성군 의회 지역유지들도 후원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안동김씨 문중과 연결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정 김좌진 장군의 후손이란 근거가 빈약했다면, 그 많은 자손 중에 한 명과 유전자 검사를 하면 된다. 근데 굳이 김을동이 안 만나줘서 유전자 검사를 못 한다김을동 탓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 그리고 위연홍이 실제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한국에 왔다면 굳이 김을동이 위연홍을 방해할 이유도 없다. 위연홍이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라고 인정받는다고 한들 도대체 김을동이 손해보는게 무엇이란 말인가. 김을동이 아무리 권력이 있다 해도 그걸 이용해서 위연홍을 몰아낼 이유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MBC 다큐 <백야 김좌진>에서 김경민이 김을동에게 김강석 - 위연홍 이야기를 하고 김을동은 고모(김강석)가 살아계실 때 한 번 모셔서 서울구경도 시켜드리고 족보도 보여드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미 방송에 나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회피하고 속인다면 오히려 김을동에게 독이 되면 됐지 득 될 것이 전혀 없다.

한 마디로 말해, 이걸로 김두한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쓰잘데기 없는 짓이다.

물론 개인이 쓴 저작물이라도 여러 사료로 교차검증해서 믿을 만한 자료이면 연구 논문의 근거로 쓰일수 있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일부 내용이 조작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의 교차검증에서 친정을 미화한 약간의 오류가 발견되는 정도였고 상당수의 내용이 교차검증에서 들어맞았다. 심지어 현대 의사들이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구체적이며 전문의가 아님에도 잘 묘사했다고 논문이 나올 정도여서 갈수록 존중받는 1차 사료이다. 반면 김두한의 회고록과 자서전 등은 역사적으로 존중받는 1차 사료가 아니다. 구체적인 자료로써 인용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두한 회고록이 엉터리 내용이 많다고 해서 그것을 김두한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는 근거로 쓰기에는 문제가 있다. 김두한의 회고록이 사료로써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해서 그 내용이 100% 허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김두한의 양대 저작물이 자신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해서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라는 점만 유념하기로 하자. 요약하자면 큰 줄기는 대략 맞는데 디테일이 꽤 뻥이나 오류가 많다.

6. 김두한을 둘러싼 수정 전쟁

사실 위의 구질구질한 친자설은 근대사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김두한을 까고 싶어져서 벌어지는 일에 불과하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김두한의 행적 중에서 어두운 부분은 왜곡, 축소, 은폐된 상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 위키백과의 김두한 항목을 한번 읽어보고 위의 내용들과 비교해 보자. 무엇이 문제인지 감이 올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한국어 위키백과 정도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미 오프라인으로 출간된 각종 백과사전과 인명사전은 어이가 가출할 정도의 상태. 예를 들어, 두산백과사전의 김두한 항목,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김두한 항목 등을 보자.

대놓고 '일제강점기 말에는 주먹의 힘으로 민족적·의협적인 행동을 하였다.'거나 ‘김좌진 장군의 아들임을 긍지로 삼아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하거나 조선인 상인을 보호하는 등의 협객으로도 행동하였다.' 따위의 헛소리를 적어놓았고, 김두한의 정치깡패로서 행적은 기록하지 않거나 "반공투쟁과정에서 살상행위를 서슴지 않아 미군정청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고 오키나와 미군부대에 수감되었다."[32]라는 식으로 요약적으로 기술하며, 노동운동이나 반탁운동에 종사했다는 식의 사실상 미화된 내용만이 기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의 잡쓰레기 인명사전들은 이 내용을 그대로 베껴 축약한 것이므로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그나마 어느 정도 김두한의 행적을 사실에 가깝게 기재한 것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김두한 항목 정도가 유일한 상황.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21세기 이후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은, 김두한의 행적이 대한민국흑역사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고 그의 행적을 미화하려는 자손들 또한 이 나라의 권력층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김두한의 행적을 살펴보다 보면 '그렇다면 김두한에게 지시한 것은 대체 누구인가?'라는 의문점에 마주칠 수밖에 없는데, 김두한은 여기에 대해 별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가 딱히 의리를 지켜 비밀을 유지했다기보다, 그저 자신이 역사적 인물들과 어느 정도 대등한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다 보니 자신의 위에서 자신에게 지시를 내렸던 사람에 대해선 언급할 필요성도 기회도 없었던 것. 그렇다고 해도 대체로 몇몇 이름이 나올 수 밖에 없는데, 이범석, 이승만끝판왕인 김 선생님이 등장한다.

그러는 한편, 김두한 본인 및 관련 행적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대부분의 내용들을 김두한의 자신의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상당한 문제. 참고로 RISS에서 올라와 있는 학위 논문 및 학술지 논문 중에서 김두한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논문은 미군정기 김두한의 "백색테러"와 대한민주청년동맹 딱 1편이다. 반도의용정신대대한민청을 다룬 논문을 포함해도 그 수는 3편밖에 되지 않고, 김두한 창작물 관련 논문을 넣어도 채 10편이 되지 않는다. 길고 아름다운 본 문서 및 김두한/창작물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김두한은 근 50년 가까이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아온 인물로 학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김두한 관련 논문 한두 편 쯤은 얼마든지 쉽게 뽑아낼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학자들의 연구 주제 선정이 너무 거시적인 부분에 치우쳐 김두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 당연히 역사학자 중 김두한을 제대로 다룬 사람은 전무하며, 한홍구가 한겨레21에 기고하던 역사 칼럼에서 김두한을 다루고 다른 칼럼들과 함께 묶어 단행본으로 출간한 정도가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역사학자가 아닌 경우로 확장하더라도 한성대학교 대학원의 범죄학 관련 교수인 조성권이 《한국조직범죄사 : 조직범죄와 정치권력》라는 저서에서 김두한을 다룬 것이 전부.

이로 인해 현재까지 김두한의 행적은, 1963년에 출간된 자서전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 김두한편"에 99% 근거하고 있는데, 문제는 둘 다 그 내용의 진위여부가 의심스럽고 믿기 힘들다는 점.[33] 무엇보다도 김두한이 과장, 거짓말, 왜곡, 은폐, 축소한 부분이 너무 많다는 문제이다. 노변야화 김두한편을 직접 보면 알겠지만, 진행자였던 권오기[34]가 김두한이 계속해서 허풍을 치자 '믿기 힘듭니다만', '계속해서 두들겨 팼다는 얘기 뿐이군요'라며 태클을 걸어올 지경이다. 사실, 김두한은 쓸데없이 말재주가 좋았다. 거짓말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리고 시정잡배의 뻔한 허세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다들 넋을 잃고 재밌어 했을 정도였으니...

특히 진행자였던 권오기가 2002년에 이에 대해 남긴 인터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진행자였던 권오기의 인터뷰. 일단 이 인터뷰는 필터링을 해서 읽을 필요가 있는데, 이 인터뷰가 2002년야인시대 인기를 등에 업고 동아일보사가 《노변야화 김두한편》을 《조선제일의 협객 김두한이오》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과정에서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가급적 김두한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로 이루어졌다. 또한, 언론사 사장과 장관까지 지낸 사람답게 표현 또한 점잖고 완곡하다는 것에 주의.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김두한이 거친 사람이지만 말재주가 뛰어나고 의외로 똑똑한 사람이라는 내용이다[35]. 또한, 김두한 회고록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의미있는 언급을 하였다.
"머리로는 ‘저게 거짓말이다’ 싶은데도 믿게 되고. 적어도 ‘본인은 그걸 진실이라고 믿고 있구나’ 싶으니까요. 왜 여러 번 얘기하다 보면 본인 스스로도 과장됐거나 사실과 다르다는 걸 잊고 진짜라고 믿게 되잖아요. 그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어요.”

즉, 권오기 본인 역시 당시 김두한의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허풍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말재주가 워낙 뛰어난 탓에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김두한의 이야기가 이전에 모종의 과정, 즉 1963년의 자서전 집필 과정 도중 상당 부분 창작되고 매끈하게 다듬어져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 즉 관련 기록들이 김두한의 육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김두한의 이야기 자체가 왜곡된 부분이 너무나 많고 그의 말재주가 좋아 여기에 현혹되는 사람들까지 속출한 상황 때문에 현재 남은 김두한의 기록들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태클을 걸어야할지 난감할 지경이다. 무엇보다도 역사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교차검증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 김두한을 빠는 사람도 까는 사람도 김두한의 회고록에 의존할 뿐, 그 이상의 진실에는 가닿지 못하고 있다. 어쨌거나 김두한의 이야기 중 과장되거나 허위인 부분들에 대해서는 저 위에서 간략하게나마 일일이 설명했으니 따로 더 적지 않는다.

한편으로 본인의 모순투성이 행보가 단단히 한 몫을 하였다. 특히 말년에 진보계와 약간의 연결이 되었고,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국회 오물 투척사건으로 인해 신민당에 영입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미 야당에는 김두한과 함께 우익활동을 한 인사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점으로 인해 야당세력조차 김두한의 이전 행적에 대해 별다른 태클을 걸지 못하고 침묵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보수와 진보 모두 김두한의 이전 행적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는 것. 심지어 김두한에 어설프게 접근하다보면, '어라? 나중엔 반독재투쟁을 했네?', '어라? 나중에는 사회 약자들을 위해 꽤 진보적인 행적을 보이네?'라며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성까지 존재하는데, 김두한의 이런 야릇한 행보에 대해서는 역시 저 위에서 간략하나마 일일이 설명했으니 따로 더 적지 않는다.[36]

여기에 1970년대, 1980년대를 거치며 김두한 영화가 흥행을 거듭하고 아류 소설이나 만화들도 많이 판쳤기 때문에, 김두한의 주요한 과거 행적들은 아예 대중들에겐 어둠 속에 묻혀버린 상태가 되어버렸다.[37] 이런 틈을 타 김두한의 유족들과 친지들은 김두한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강조하고 각종 기념사업들을 벌였으며, 돈 몇 푼이나 벌려는 영화제작자들이 허접한 김두한 전기 영화들을 계속 제작함으로써 이러한 물결에 합류, 결국 오늘날 김두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공식 기록들은 잔뜩 왜곡된 채로 남아버린 것이다.

7. 기타

  • 김두한은 학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머리 자체는 매우 좋았다. 야인시대의 동영상을 써서 뭔가 웃기지만 실제 증언 김두한이 심영을 저격할 때 미행했는데 이 때 김두한은 머리를 교묘하게 써서 종로구중구의 정확하게 경계선인 광교에서 심영을 저격해 중구경찰서와 종로경찰서 중 어디가 담당구역인지 애매하게 만들어 놓았다.종로도 중구도 아닌 기적의 논리 또한 권모술수에도 매우 능해서 박정희가 집권하자마자 깡패들을 죄다 잡아죽였는데 김두한은 이정재, 임화수 등이 잡혀 죽는 와중에도 자기 조직을 반공청년단으로 바꿔버리고 박정희에게 협조하는 등 놀라운 처세술을 보여 살아남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김두한을 "머리, 언변은 좋은데 글을 잘 못 읽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 물론 머리가 좋았던 것과는 상관없이 정치운은 그리 잘 풀린건 아니었다. 자유당이나 민주공화당에 기웃거리기는 했다만 정작 자유당에 있었을대는 일방적인 거수기 노릇을 거부하고 스스로 박차고 나왔으며, 민주공화당에 기웃거리기도 했다가 결국 거부당하고 이후로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국회똥물투척사건에 나서면서 반 독재투쟁에 나선 인물로 조명받으면서 나름대로 거물급으로 성장하나 싶었지만 결국에는 3선에 실패하고 이후로 재기하기도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거물급 인사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볼때 반공을 하면서도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한 양심적인 야당인물로 명예롭게 포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살아생전은 몰라도 죽어서는 이런식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기는 하다.
  • 드라마대로 가족에게 정말로 소홀했던 건 사실이었던지, 김을동은 그가 죽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국가유공자 연금을 기부하게 된 걸 알았을 때 그제서야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고...
  • 천연두를 앓아서 곰보 자국이 심했다.
  • 지금이야 한국인의 체격이 서구화되고 영양 상태도 많이 개선되어 남성의 60%가 키 170cm를 넘는 세상이 되었다지만 김두한이 살아가던 저 당시에는 한국인의 평균신장이 그리 크지 않던 시기였으므로 상대적으로 보면 김두한은 어마어마한 거인이었다. 2018년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190cm같은 체격이었다. 당장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지휘관인 더글라스 맥아더의 경우만 해도 엄청난 거인으로 묘사되는데 그 맥아더의 키는 183cm였다.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을) 무소속 8,762 (28.63%) 당선 (1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을) 노농당 8,987 (23.93%) 낙선 (2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홍성) 무소속 9,593 (18.37%) 낙선 (2위)
1965 11.9 재보궐선거 (서울 용산 국회의원) 한국독립당 12,049 (28.4%) 당선 (1위)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수원) 신민당 21,770 (44.97%) 낙선 (2위)

9. 창작물에서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두한/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한일협정반대로 전임 서민호가 사임하면서 치른 보궐선거에서 당선[2]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시스템에 등록된 생년월일은 선거때마다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3] 실제로는 181로 나오는 뉴스나 기록들이 있지만 그 당시 인물들이나 김을동과 같이 섰을 때를 비교한다면 176cm에 가깝다. 다만 키가 비교된 사진들이 주로 50대 전후의 모습인데다 거북목 증세까지 보임을 감안해서 최전성기 때는 178-9cm였을 가능성이 높다. 나이를 먹으면 키가 2-3cm 줄어들기 때문. 1950년대생까지는 한국 성인 남성의 평균키가 164cm 안팎이었고 2019년 기준으로도 한국 성인 남성 평균키가 173cm정도인데다 서양에서도 성인 남성 평균키가 180cm가 안되는 나라들이 많기도 한데다 성인 남성 평균키가 가장 큰 나라도 그 평균키가 185cm 정도이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는 건장한걸 넘어 거구에 해당하는 체구다.[4] 최종정당[5] 1987년 사망[6] 1999년 사망[7]김을동이랑 동갑이다.[8] 두 번째 부인 김부미 사이에서 낳은 딸.[9] 딸의 손자를 이르는 말.[10]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게 안동 김씨 문중이나, 김좌진 후손들, 호적 등의 정설이고, 그 정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측에서 아니라는 근거를 못댄다면 일단 정설을 뒤엎을 수는 없다. 썰은 썰이고 정설을 엎을 증거가 나올 때까진 정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11] 음모론자에 의하면 김두한의 무력에 굴복해서 어쩔 수 없이 찍은 사진이라고 소설을 사실처럼 말하는 인터넷 자료들도 있다. 즉, 김두한이 1990년대에 이후에 자기가 김좌진 아들이 아니라는 음모론이 생길 것을 미리 예언하고 그 증거를 남겼다는 말인 셈이다. 사실 김두한은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 김좌진 아들로서 지위가 확고했기 때문에 힘으로 강제로 자기 딸을 데리고 사진을 찍어 증거로 남길 이유가 없었다. 김두한은 1930년대 이후로 생전에 단 한 번도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런 음모론이 생긴 건 1990년대 도올 김용옥이 거의 시초나 마찬가지인데, 자기 딸 김을동이 자기 사후에 김좌진 장군 자손 아니라는 의심받을까봐 증거를 남긴 거라는 식이면 너무 억지 주장이다.[12] 김두한의 협박설이 황당한 이유중의 하나가 나혜국 여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가 김좌진과 결혼한 대단한 여장부인걸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국내 귀국 후 일제에 감시당하며 살던 분이다. 안동 김씨 문중 또한 만만치 않다.[13] 이범석의 경우 우익폭력의 거물급 인사로서 당시 이승만 바로 아래 정도의 위상이었다. 특히 군부에 입김이 강한 인물로서 김두한이 아무리 폭력배 부하가 많아도 숙이고 들어갈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김두한은 이범석의 몇 단계 아래급 인사이다. 게다가 김좌진 장군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이 대단했고, 이범석 등의 친김좌진계 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데다가, 안동 김씨라는 문중이 영향력이 작지 않은데, 김두한이 안동 김씨 집안을 겁박해서 호적을 얻었다는건 너무 황당한 주장이다. 게다가 나혜국 여사는 김좌진 장군과 같이 독립운동하던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귀국 이후에도 일제의 괴롭힘을 당하던 분이다. 김두한 일당에게 호락호락 당할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유사시에 이범석 등 독립운동 동지들에게 얼마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14] 이것은 김두한이 김좌진의 자식이냐 아니냐가 아닌 제3의 아들이 나타났을 때 다른 아들이 없다는 의미로 인터뷰한 것으로 해석된다. 어쨌든 그 당시에 김두한을 김좌진의 자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예 없었을 때니까..[15] 김두한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일제시대 신문기사에 올랐는지, 일제시대 경찰이 어떤 자료로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판단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김좌진의 정실 부인들에게 인정받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안동 김씨 가문에서 인정받았고, 이범석 장군은 김좌진 장군에게 어떤 언질을 받았는지 등은 자세한 기록이 없다. 사실 없는 게 당연한 게 20세기 초반 출생인물 중에서 뭐 세세한 어린적 기록이 다 남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16] 고구려 건국자 고주몽은 자기의 아이를 가진 연인에게 증표를 남겨주었고, 자식이 나중에 찾아와서 결국 유리왕이 된다. 테세우스 로물루스 등 이런 식의 사례는 간간히 전해진다. 혹은 김좌진 장군이 조선의 본가와 가끔 연락했으므로, 자신의 남겨진 자식에 대한 전언을 했을수도 있다. 특히 부하인 이범석 장군이나 독립운동 동지이자 부인인 나혜국에게 조선에 김두한이란 자식이 하나 더 있다고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다. 혹은 안동 김씨 집안에서 김두한을 받아들일 당시에 김좌진 정실부인이 김좌진 측에 문의해봤을 수도 있다. 즉, 어 떤식으로 김두한이 안동 김씨 가문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2018년 우리가 알 수없는 게 당연한 것이고 그게 이상한 게 아니다.[17] 노변야화 김두한편 노변야화 김두한편[18] 진행자였던 권오기는 김두한의 허세에 '믿기 힘듭니다만', '계속해서 두들겨 팼다는 얘기 뿐이군요'라는 감탄사를 난발한다.[19] "머리로는 ‘저게 거짓말이다’ 싶은데도 믿게 되고. 적어도 ‘본인은 그걸 진실이라고 믿고 있구나’ 싶으니까요. 왜 여러 번 얘기하다 보면 본인 스스로도 과장됐거나 사실과 다르다는 걸 잊고 진짜라고 믿게 되잖아요. 그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어요.”[20] 그러나 안동 김씨뿐 아니라, 김좌진 장군의 후손들 중, 김두한쪽이 아닌 정실부인쪽에서도 김두한의 출생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적이 없다. 김두한의 김좌진의 맏아들이라고 100여 년에 가깝게 동일하게 인정받고 있으니, 안동 김씨 측에서 지금 와서 유전자 검사를 받는 등의 절차를 갑자기 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김좌진 장군이 사망했는데, 김좌진 장군의 자녀 중 김두한이 가짜라고 의혹을 보인다면 다른 자녀는 진짜인지 누가 알까? 당연히 김좌진이라는 원본이 없는 이상 김좌진 후손끼리 비교한다고 결론이 나오기는 힘들기도하다. 김철한 씨와 김을동 씨가 서로 유전자 검사를 해서 친인척이 아닌 걸로 나오면 그럼 누가 가짜일까?[21] 그러나 아동심리학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 연도 정도는 정확히 기억한다고 한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그 유명한 김좌진 장군인데, 50살이 되도록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 게 더 문제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정상적인 가정의 부자 관계일 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실제로 자기 나이 혹은 연도를 기억하는것 자체가 안정된 가정이 없으면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보통 어릴 때 학교에 진학하면 학년이 올라가기에 그나마 연도를 민감하게 알 수 있지만, 성장기에 거리에서 살면서 자란 경우 일단 스스로 얻어 먹고 사는 것 자체를 신경쓰느라 올해가 몇 년도인지 자기 나이가 몇인지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리에서 자라다가 음악가가 된 최성봉의 경우나, 홈리스 인터뷰를 보면, 거리에서 살때는 올해가 몇년인지 나이가 몇인지 조차도 잘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심지어 성인이어도 마찬가지인데 하물며 어린나이에 거리에서 살았으면 당시의 연도를 상세하게 기억하는게 오히려 이상할것이다. 최성봉 인터뷰. 게다가 김두한은 서자이기까지했으니 더욱...[22] 단지, 일제에 대한 쉴드로 '흉적김좌진 죽다'는 식의 타이틀을 붙이곤 하였다. 물론 내용은 대체적으로 중립을 가장한 친 김좌진.[23] 이 서자가 김두한이지만 동아일보에서는 그 서자의 행적까지 추적하지는 못하였다.[24] 오씨부인[25] 다만 김두환이 김좌진의 친자라 할지라도 기생과 관계하여 낳은 서자임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이야 그런 유교적 종법질서가 거의 퇴색했지만, 당시로써는 제법 큰 문제였을 것이다. 본처의 호적에 오르는 것은 그런 정통성 문제를 해결해 준다. 실제로 서자 출신의 왕들 역시 명목상으로는 본처 호적에 오름으로 하여 정통성 문제를 땜방했으며, 삼국지의 원소 역시 의붓어머니의 삼년상을 했으니 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오숙근이 얻는 것 역시 명백하다. 김두환은 서자가 아닌 적자로써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의붓어머니인 오숙근에게 이런저런 지원을 해줘야 했을 것이며, 국가유공자의 가족이라고 해서 지원 그런거 없었을 가난한 시대. 돈과 힘 그리고 자신에게 잘해줄 이유를 가진 의붓아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굳이 말할 것도 없으리라.[26] 한 기자의 쉴드 이 기자 역시 김두한에게 불리할 수 밖에 없는 반도의용정신대 문제나 해방 직후의 행적들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참고로, 위연홍의 주장을 그대로 기사화해서 김두한 가짜 아들설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이 기자가 소속한 세계일보이다.[27] 김좌진 장군의 손자 김경민씨가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김씨는 “지금 시대가 나라를 빼앗겼을 때와 같다”며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는 것만으로도 통탄한 일인데, 우리나라가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이렇게 김경민씨가 역사교과서가 국정화되면 친일을 미화할 것이라는 야당의 주자에 동조하고 있지만, 김좌진 장군의 손녀 새누리당 김을동 최고위원은 당내 ‘역사교과서 개선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정화에 앞장서고 있다. 김 최고위원은 지난 22일 “아직 형체도 없는 교과서를 친일 교과서라고 낙인 찍는 것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기형아가 될 것이라는 저주를 퍼붓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남매가 반대편으로 갈린 셈이다. 김경민씨는 김을동 최고위원의 이복동생이다[28] 김좌진의 두번째 아들 김철한의 어머니이자 만주에서 김좌진과 혼인 이후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부인.[29] 김경민씨는 이후 김을동과는 다르게 민족진영에서 활동해서 박근혜 정권 말기에 역사교과서 관련 반대 시위를 했다. 김을동과 김경민은 서로 정치적 방향이 다르지만 모두 김두한의 아들, 딸이 맞다.[30] 참고로 이 기사에 언급된 이문창이라는 역사가는 한국 최후의 아나키스트로 불리는 사람이다. 더 쉽게 말하면, 김두한과는 정치적 입장이 완전히 반대라는 것. 단, 김좌진은 무정부주의 성향이 있었으므로, 이 사람이 김좌진의 만주 행적을 연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31] 단, 문화대혁명 당시 민족주의자 성향의 조선족이 탄압받은 것은 사실이다.[32]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두한 항목[33] 일단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의 경우 출간된지 너무 오래된 탓에 오래전에 절판되었으나, 2003년야인시대의 인기 덕분에 "김두한 자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 2015년 현재에도 구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다소 불충분한 신뢰성을 고려하면 노변야화 김두한편을 참고하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이다. 게다가 그의 육성을 직접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34] 훗날 동아일보 대표이사까지 올랐고, 통일부 장관 겸 부총리까지 지냈다.[35] 당대에 김두한을 직접 경험한 다른 이들도 비슷하게 평가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두한에 대해 '머리랑 언변은 좋은데 글은 못 읽는 사람'이라고 언급했던 바 있다. 즉 '일자무식 깡패지만 머리가 좋고 달변가였다'는 평가는 당대 사람들의 김두한에 대한 보편적인 평가이자, 실제 김두한의 인물상에도 매우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36] 후대에 와서는 백 번 양보해서 김두한이 협객이었다 하더라도 어찌 되었건 깡패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기에, 그리고 그런 깡패 주제에 이승만박정희에 자꾸 개기고 대들었기에, 태평양 전쟁 시기에 징용 문제를 위해 일제에 부역한 일이 있기에 등 다양한 이유로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37] 타임머신이 있다면 한 번 타고 가서 1980년대의 3, 40대에게 "여운형이 누군지 아세요?" 하고 물어보자. 대부분 모를 것이며 극소수의 아는 사람들도 모르는 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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