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15:54:39

한홍구

한홍구
韓洪九 | Han Hong-gu
파일:2024012712484658064_l.jpg
<colbgcolor=#b8b8ad><colcolor=#000>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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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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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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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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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colbgcolor=white,#2d2f34>1959년 7월 16일 ([age(1959-07-16)]세)
서울특별시
본관 청주 한씨[1]
학력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 / 석사)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역사학 / 박사)
배우자 권재희(2020년 8월 28일 - 현재)
자녀 의붓아들 이태우(1993년생)[2]

1. 개요2. 생애3. 성향4. 비판 및 논란
4.1. 김일성 관련 발언4.2.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4.3. 이석기 관련 발언
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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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역사학자, 교수. 대한민국 근현대사 연구가 주 분야이다.

독립유공자 한기악의 손자이다.

2. 생애

1959년 7월 16일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구봉(久峰) 한만년(韓萬年, 1925. 10. 29. ~ 2004. 4. 30.)과 어머니 기계 유씨 유효숙(兪孝淑, 1930. 3. 24. ~ ) 사이에서 4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78학번)를 졸업하고 1988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사학 석사 학위[3]를 취득했다.

1999년 미국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Wounded nationalism : the Minsaengdan incident and Kim Il Sung in Eastern Manchuria(상처받은 민족주의 : 1930년대 간도에서의 민생단 사건과 김일성)」이라는 학위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 논문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나 훗날 북한 독재 권력 수립의 단초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민생단 사건에 대해 주로 논했다. 이후 2004년에 소설가 김연수가 해당 사건을 다룬 소설 《밤은 노래한다》를 집필하고 단행본을 출간했을 때, 한홍구가 이 소설에 대한 후기 형식으로 민생단 사건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2000년부터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성공회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한국현대사 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한씨 집안이 참으로 대단한데 일단 한홍구의 직계 14대조가 인열왕후 한씨의 백부이며 동국지리지를 쓴 실학적 역사학의 기초를 다진 한백겸이다. 그리고...

형제자매들은
  • 한성구 (서울대 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내과학 전공)
  • 한경구 (서울대 졸,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인류학 전공)
  • 한준구 (서울대 졸,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영상의학 전공)
  • 한승미 (서울대 졸,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문화인류학 전공)
  • 사촌 ㅡ 한민구 (서울대 졸, 서울대학교 교수, 전 공대 학장)

거기에 외할아버지는 한국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전 고려대 총장인 유진오 박사이며 외할머니의 아버지, 즉 유진오의 장인은 한국에서 제일 오래되었고 지금까지도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 고약의 창시자 이명래다. 또한 이모부는 박정희 정권기에 외무부 장관을 지냈던 박동진이다. 독립운동가들과도 인연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요인이자 김구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엄항섭은 외할머니의 사촌동생이다.[5] 구성원들이 하나같이 후덜덜하다. 혼자만 성공회대 교수인 건 운동권에서 활동한 데다 현대사 전공 및 연구를 하면서 높으신 분들한테 찍혀서 그나마 학풍이 자유로운 성공회대에 겨우 임용이 된 것. 일각에서는 한홍구의 아버지 한만년이 뉴데일리와 인터뷰한 것을 들어 그의 연구실적을 폄하하기도 한다. #

한홍구의 논문은 DBpia 역사학 이용수 Top 5%, 인문학일반 이용수 Top10%이다.# 단, 이건 피인용수가 아니라 논문 열람 숫자로, 게시판 게시글로 치면 조회수 같은 것이다. 이는 평가와 직결되는 요소는 아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을 역임했고, (사) 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위원회 상임이사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사』,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특강』, 『독설』, 유신』등이 있다.

유시민과 대학 동기 친구사이다. 대학시절 서울의 봄 당시 유시민 관련 회고글. #

2019년 2월부터 유튜버 활동을 시작했다. 채널명은 한홍구 TV, 역사 '통'.

2020년 8월 배우 권재희와 결혼했다.[6] 한홍구가 권재희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한 신원운동을 한 것을 계기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3. 성향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과 강한 평화주의 성향이 섞였다고 볼 수 있다. 본인도 스스로를 '진보적 역사학자'로 평한다.

한홍구 교수가 대중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바로 김일성에 대한 평가. 김일성은 20세기형 민족주의자라는 평을 남긴 적이 있다. 그리고 김일성의 일제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자체는 그 이후 6.25전쟁 주도, 우상화 및 독재 등 과오를 떠나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글을 남긴 적이 있다.[7]

태극기의 태극 및 건곤감이 문양은 사실 중국의 책인 「 주역 」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태극기나 인공기가 아닌 남북한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통일국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 저서 < 대한민국史 > 1권에서.

2001년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8.15 평화축전 기간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고향집을 방문해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평화 통일 이룩하자"라고 글을 남기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당한 사건이 일어난 무렵, 강정구 교수의 행동을 칭찬하며 진정한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남한 사람들은 북한의 김씨 왕조 체제를 찬양해야 하고, 북한사람들은 남한의 투표민주주의 체제를 찬양해야 한다는 글을 남긴 적이 있다. 그러나 이후 강정구 교수가 "광복 후 공산주의를 선택했어야 한다" 라거나 "미국이 6.25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 달 안에 전쟁은 끝나고 인명피해는 1만명 이하였을 것]"이라는 심히 종북주의자스러운 말을 남기자 한홍구 교수는 강정구 교수를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

그리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당시 전두환에게 한 평가를 보면 극단적인 평화주의 성향으로 보인다. 한홍구 교수는 아웅산 테러 사건 당시 전두환의 행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북한의 아웅산 테러 이후)
해설:
전두환 대통령은 버마에서 귀국하자마자 전방부대로 향합니다. 그리고 보복이라는 독단적인 행동을 할 경우 반역행위로 간주하겠다는 강경한 뜻을 군에 전달합니다. 그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한홍구:
"전쟁을 했을 때 피해가 두려웠던 거겠죠. 전두환은 군인입니다. 사실 지금 현재 제일 두려운 거는 민간에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깐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저도 겁 없이 여러가지 활동을 했지만 제가 평화운동을 하면서 제일 두려웠던 순간은 이명박 대통령이 전쟁기념관에 가서 전쟁이 무섭지 않다고 할 때 그리고 군대를 가 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청와대 지하 벙커에 모여갖고 전쟁을 논의하고 있을 때. 저는 민주진영이기 때문에 전두환을 그렇게 비판하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전두환이 집권 기간 동안 가장 잘한 일이 아웅산 사태를 평화적인 무드로 갖고갔고 더 이상 확산시키지 않은 부분은……지나놓고 보면은 그래도 전두환 정권에 점수를 줘야할 대목입니다.」
KBS 다큐멘터리 "아웅산 테러 그리고 2013" 中

당시 아웅산 묘소 테러는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으며[8]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강경자세를 보이던 레이건 대통령이 북한 폭격을 검토하고 주한미군을 증파했고 김일성은 아웅산 테러를 실시한 김정일을 비판하며제 아들 간수도 못하는 놈이 무슨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중국과 소련에게 중재를 해달라며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소련은 한국과 미국의 제한적 공습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주소련 미국대사관에 전달하였고, 진짜로 북한이 지도에서 지워질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만이 김일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에게 공습 반대의견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국의 군사력은 냉전의 한 축이었던 미국에게 비할 바 없었기에 김일성의 불안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는데, 전두환은 그 시점에서 전방 사단을 일일이 돌면서 "내 명령 없이 움직이면 반역자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군 장성들을 모아 같은 취지로 발언하면서 진정시켰다.[9] 그런 점에서, 실제로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국민감정이 외교에 미치는 영향이 커진 21세기 한국이었다면 진짜로 휴전협정 파기와 북한 진격까지 갈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제5공화국 정부가 북침을 하지 않았으니 북한으로서는 고마웠음은 틀림없지만, 그 시점에서 한반도 내에서의 남북간 전면전으로 퍼지는 것을 막고 대신 외교적으로 북한을 고립시키자는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한홍구의 말마따나 북한은 급한 불을 피한 대신 국제사회로부터 막장 국가로 낙인이 찍히다시피 했고 결국 2020년 현재 중국 및 일부 친북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국제적으로 거의 고립된 상태에 놓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한홍구의 저 발언도 군사적인 충돌도 일어날 수 있었던(그리고 그것이 누가 봐도 당연해 보였던) 급박한 상황에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 대신 끝까지 외교적인 대응 방법을 모색했던 전두환 정부의 선택에 점수를 주면서 더불어 민간에서는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기 위한 취지이기도 하다. 군사독재정권의 수괴이고 그 자신이 군인인 전두환도 전쟁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저렇게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애썼는데 정작 민주정부의 수장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전쟁이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냐는 뉘앙스라고 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강경한 군사 행동에 반대하는 경우 한국에서는 극우들에 의해 종북으로 몰리곤 하지만, 전쟁을 피하고 다른 해결책을 모의하자는 발상이나 주장이 무조건적으로 종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극우들의 주장처럼 한홍구를 '종북'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며, 극단적인 평화론자로 보면서 그에 대한 비판을 행해야 할 것이다. 강정구 교수를 칭찬하면서 "진정한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남한 사람들은 북한의 김씨 왕조 체제를 찬양해야 하고, 북한사람들은 남한의 투표민주주의 체제를 찬양해야 한다"한 발언은 어찌 생각하면 남북관계에 대한 이상주의적 접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한홍구는 동시에 "북한 내의 '친일파' 청산이 남쪽보다는 철저했을지 몰라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했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다 풀렸을 것이라는 장담은 할 수 없고, 이는 북한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링크
분명 친일파 청산의 좌절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잘못 끼운 첫 단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를 친일파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친일파만 제대로 청산하였으면 모든 문제가 다 풀렸을 것인가? 그렇다면 친일파 청산에서 남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했던 이북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한홍구는 식민지 체제 협력자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계열의 진보 학자들보다 훨씬 더 너그러운 견해를 보인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민족문제연구소등은 거의 항상 비시 프랑스 치하에서 친 나치 보도를 해 처형당한 언론인의 예를 들며 아주 강력히 비판하지만, 한홍구는 일제 하 합법 공간에서의 한계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에서 보천보 전투를 보도할때 동북항일연군을 비적이나 마적으로 표현한 것을 식민지 체제 협력 사례로 매도할 수 있지만, 한홍구는 그런 표현 하나하나까지 항일적으로 사용하면 신문 보도 자체가 이뤄질 수 없고, 오히려 이런 사건을 보도한 것 자체가 독자들에게 일제에 대한 자신감이나 저항 의식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그래도 중일전쟁 당시의 지원병 독려와 같은 몇몇 행위는 명백한 잘못이며, 광복 후 재발간시 이러한 잘못에 대해 확실히 사죄했으면 좀 더 바람직한 언론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일성이나 식민지 체제 협력자에게도 조금 너그러운 시선을 갖고 공은 인정하자는 태도로 미뤄보아, 한홍구는 민족주의와 평화주의의 틀 안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나 이념을 포용하자는 견해를 가진 것 같다.

4. 비판 및 논란

4.1. 김일성 관련 발언

문서 상단에 기재된 저러한 발언에 대해, TV 조선 기자가 "김일성이 얼마나 훌륭한 독립운동가인가에 관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한홍구는 이것이 허위 사실이라며 기자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2017년 7월 3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 부장판사 이흥권은 "칼럼에선 김일성에 대해 '민족의 태양, 형제들의 수령,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영웅' 등의 어휘를 사용했다"며 "중립적 용어 선택이라고 보긴 어렵기에 보도가 내용을 심하게 왜곡한 건 아니다"고 판시했으나, "김일성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강의했다고 허위로 보도했다"며 기자가 한홍구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4.2.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

한홍구 교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굉장히 비판한다. 한홍구, "제국주의의 베트남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민간인 학살의 과오를 범하고서도 사과하지 않는 나라"범국민적 사과운동이 필요하다고 까지 주장되고,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한국현대사)는 “한번 사과하고 끝날 일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우리는 일본처럼 어물쩍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외교적으로 과시했다는 점에서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사과를 하려면 우리가 어떤 고통을 줬는지 철저히 규명한 뒤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없었다. 대통령만의 사과가 아닌 범국민적 사과운동이 필요하다." 국군이 베트남인(베트콩으로 추정)에게 총을 겨눈 인형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조선인에게 총칼을 겨눈 일본군과 같은 것이라 주장한다.[10]
참혹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가 전공한 만주에서의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일본군은 간도가 피바다에 잠길 정도로 엄청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지요.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며 친해졌는데 그놈들이 뒤돌아서더니 수류탄을 까던지고 도망가더라는 이야기는 독립군 마을의 소년 열사 이야기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역사란 게 이렇게 모질게 재현되는 것인가요[11]

다만 한홍구의 주장은 상당히 어폐가 있는데 일본은 한국을 침공한것이고 한국은 남베트남을 지원하러가서 북베트남과 싸운것이다.

4.3. 이석기 관련 발언

한홍구는 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은 국가정보원이 당국의 정치적 위기를 덮어 감추려고 한 조작이라면서 이석기를 향한 지지를 여러 강연/글에서 계속 표현하였다. 자세한 것은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논란 문서 참조. 엄밀히 말하자면 내란음모가 무죄를 선고받았지 내란선동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5. 저서

  • 대한민국史: 2003, 한겨레출판[12]
  • 한홍구의 현대사 다시읽기: 2007, 노마드북스
  • 1%의 대한민국: 2008, 철수와영희. 강수돌, 김진숙, 이철기, 배경내, 윤구병과 공저.
  •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2008, 철수와영희. 전쟁없는세상, 박노자와 공저, 절판.
  • 특강,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2009, 한겨레출판
  • 감시사회: 2012, 철수와영희. 엄기호, 최철웅, 홍성수, 한상희와 공저, 절판.
  • 장물바구니, 정수장학회의 진실: 2012, 돌아온산, 절판
  • 지금 이 순간의 역사: 2013, 한겨레출판
  • 유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세대: 2014, 한겨레출판
  • 역사와 책임: 2015, 한겨레출판
  • 사법부,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2016, 돌베개
  • 광장, 민주주의를 외치다: 2017, 창비
  • 한일 우익 근대사 완전정복: 2020, 창비, 이영채와 공저.


[1] 문정공파(文靖公派)-판관공계(判官公系) 33세 구(九) 항렬.[2] 권재희가 사별한 전 남편 이하원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이다.[3] 석사 학위 논문 : 華北朝鮮(화북조선) 獨立同盟(독립동맹)의 조직과 활동(1988).[4] 한국의 전압을 110V에서 220V로 바꿀 것을 제안한 분이다.[5] 할아버지 한기악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인물들과 직간접적으로 연이 있다.[6] 한홍구와 권재희 둘 다 재혼이다. 두 사람 모두 이미 각각 아들이 한 명씩 있다.[7] 사실 김일성을 제외하고 봐도 진짜배기 독립영웅들이 독립 후 권력을 잡고는 극악무도한 독재자가 되는 것은 엄청나게 흔해빠진 일이다.[8]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항목에서도 보이듯 이건 남한에 대한 북한의 선전포고로도 부족한 한국판 진주만 공습,사라예보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차 대전때처럼 전세계가 미쳐돌아가던 시기도 아니고 가뜩이나 냉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베트남 전쟁,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등으로 인해 무한대의 군비경쟁을 벌이면서까지 체제경쟁이 가능한가에 대한 회의가 팽배한 시점에서, 한 나라의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 및 암살 시도는 그 국가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되는 것이 국제법이며, 더군다나 테러 장소로 택한 곳도 제3국, 하필 미얀마의 국부로 대접받는 아웅산 장군의 묘소였으니 미얀마 입장에서도 자국의 성역에서 이딴 테러 짓을 벌이는 북한을 결코 좋게 봐줄 수가 없다. 적국에 대한 참수작전을 벌여도 하필 그런 곳에서 한건 당시 북한의 최대 악수라고 볼 수 있다. 이건 마치 미 대통령이 중국의 자금성을 방문했는데 갑자기 대만이나 하다못해 인도도 아니고 갑자기 러시아의 요원이 나타나서 거길 폭파시키는거랑 똑같다.[9] 이 덕분에 전두환은 1988년 3월 영국서독 의원들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정식 추천되었는데 그 당시 전두환의 평화 수호를 위한 업적으로 제시된 것이 KAL기 폭파 사건과 이 아웅산 묘 테러 사건 때 전두환이 보여준 대처였다.#[10] 한홍구 "터널이 끝나는 곳에는 한국군이 베트콩으로 보이는 두 명의 베트남 사람들을 무릎 꿇려 놓고 총을 겨누고 있는 실물 크기의 인형을 세워놓았다. 이 인형들은 그 후 누군가가 부숴버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지만 참으로 부끄러운 물건이 아닐 수 없다. 입장을 바꿔놓고 일본이 과거 조선에 출병한 병사들의 훈련지에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기념관을 짓고 오늘의 일본의 번영을 가져온 초석이 된 사건이라고 찬양하면서 바지저고리를 입은 조선인에게 총이나 칼을 겨누고 있는 일본군을 세워 놓았다면 우리의 심경은 어떨까?[11] 한홍구, "마음까지 새까맣게 타버린 당신!"[12] 대한민국史 만화는 2004에 이끌리오에서 출간했으나 절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