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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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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명오(明五) / 월봉(月峰)
본관 청주 한씨[1]
출생 1898년 1월 14일[2]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월봉리
(現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월봉마을)[3]
사망 1941년 6월 20일[4] (향년 43세)
경기도 경성부 계동정 중앙학교 사택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학력 경성부 중앙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법과 / 졸업)
메이지대학 (중퇴)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묵현리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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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언론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동아일보조선일보 편집국장, 신간회 발기인 등을 역임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의 조부이기도 하다.

2. 생애

1898년 1월 14일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월봉리(現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월봉마을)에서 아버지 한정우(韓正愚, 1875. 3. 22 ~ 1898)[5]와 어머니 한양 조씨(1874. 4. 9 ~ 1933. 2. 29)[6] 사이에서 1남 1녀 중 유복자(!!)로 태어났다.[7]

그의 친가인 청주 한씨 문정공파(文靖公派)-판관공계(判官公系) 가문은 조선시대 고관을 여럿 배출한 집안이었고, 12대조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 1552. 4. 11 ~ 1615. 3. 7)은 광해군 시절 사회개혁안을 제시했던 실학파의 선구자로서 《동국지리지》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한기악의 직계 5대조인 병산(甹山) 한치응(韓致應, 1760. 9. 9 ~ 1824. 10. 12)부터 아버지 한정우에 이르기까지, 직계 5대가 연속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두루 고위 관직을 지냈다.[8] 그의 외가는 한양 조씨 고사공파(庫使公派) 집안으로, 어머니 한양 조씨는 정암 조광조의 13대손이었으며, 할머니 한양 조씨(1856 ~ ?)[9] 또한 조광조의 12대손으로 어머니와 할머니는 15촌 지간이었다.

어린 시절 일본 제국 육군이 고향 마을에 불을 질러 마을 사람들이 집을 잃자, 그의 증조모[10]는 저택을 헐어 마을 사람들에게 목재로 나눠주고 한성부로 이사를 하자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한기악은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한성부로 이사를 해야 했다.

5대 독자로서 혼인을 일찍 해야 했기에, 1911년 4살 연상의 아내 의령 남씨 남희정(南喜貞, 1894. 10. 27 ~ 1950. 6. 20)[11]과 결혼하였다. 이후 1914년 경성부 중앙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청년시절 미남자로 유명하였으며, 심성이 부드러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를 내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고, 언제나 예의 바르며 세심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집에서 손자가 들어올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는 할머니 한양 조씨를 생각하여 아무리 취해도 반드시 집에 들어갔을 정도로 효심도 지극했다고 한다.

191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뒤 나라 잃은 설움에 이승복(李昇馥)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만주, 연해주 등을 옮겨다니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이상설, 이회영, 신채호, 이동녕으로부터 학업을 계속하라는 권유를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변영로 등 중앙학교 동기생들이 이미 가있던 도쿄에서 메이지대학을 다녔으나, 1919년 이광수, 백관수와 함께 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을 준비하느라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로 잠입해 송진우 중앙학교 교장을 도와 독립선언서 제작에 참여했다.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자 이를 일본의 정치인 등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고, 기독청년회 회원으로서 임규(林圭)·심영택(沈英澤)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각계에 배포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중국인 벙어리로 위장하여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 후 상하이에서 이동녕·이시영·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13일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입법활동에 참여하였으며, 4월 22일 이시영 법무총장 밑의 법무부 위원 3인 가운데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분열상을 보고 분노를 느껴 단상으로 뛰어올라 "내가 비록 나이 어린 청년이나 당신네들이 국민을 이끌고 나가는 처지로서 이럴 줄 몰랐다"고 통곡을 한 뒤 1919년 말경 일본 제국 경찰의 체포를 무릅쓰고 귀국을 하였다.

그 후 일본의 문화통치 덕에 모교인 경성부 중앙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경기도 경성부 계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의 인촌 김성수 사랑채에 자주 출입하며 민족적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1920년 일본의 유화정책으로 민족신문의 발간까지 허용되자, 인촌 김성수를 도와 그해 4월 1일 동아일보의 창간에 참여하였다. 창간 당시의 동아일보에서 1921년 11월부터 편집기자, 편집국장 대리를 맡았고, 1921년에는 잠시 발행인 겸 편집인까지 역임하는 등 대활약했다.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1920년 7월에 조선청년회 연합기성회를 조직하여 오상근(吳祥根)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였고, 자신은 서무를 담당하면서 한국청년운동을 위한 핵심 기구를 설치·운영하도록 기초를 닦았다. 1921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여 정기총회에서 61인의 대표자 중 1인으로 뽑혔고, 기관지로 '공제(共濟)'를 발간했다.

1924년 7월부터는 동아일보의 정치부장, 경제부장 등을 맡았고, 1924년 12월부터 1925년 3월까지 편집국장 대리 등을 맡으면서 일제의 탄압 일변도 정책에 대해 규탄하는 기사를 많이 썼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단재 신채호의 글을 동아일보에 받아 《조선사 연구초》 등 단재의 주요 저작이 오늘날까지 남을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이 당시 언론인으로만 활동한 것은 아니고,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도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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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기자 야유회의 사진. 앞줄 가운데가 한기악이다.
한기악의 왼쪽이 류광렬, 한기악의 오른쪽이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김동환이다.

1925년에는 동아일보에서 퇴사해, 좀 더 행동지향적인 사람들이 모여 창간한 시대일보(時代日報)의 초대 편집국장을 맡았다. 여기서 벽초 홍명희 등과 일하였으며, 월간 '개벽' 잡지가 항일민족기사로 인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자, 송진우·민태원(閔泰瑗)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 당시 제3대 조선총독을 찾아가 항변해 해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12] 이렇게 언론인으로서 활동하는 한편, 1925년 10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선전부 이사에 선출되었고, 1927년 2월 13일부터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자활'의 발행인으로도 활동하였다. 1926년 3월에는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고, 이종린(李鍾麟)·박승철(朴勝喆)·최원순(崔元淳)·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민립대학 건립운동을 벌였다.

1927년 2월 15일에는 민족단일과 민족협동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인사를 망라한 민족유일전선으로서 신간회를 창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때 이상재·한용운·안재홍·홍명희·김준연·문일평(文一平)·신석우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1928년부터 조선일보사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필봉으로 민족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민족언론인 가운데 중견으로서 동지들을 이끌었으며, 불의에 굴하지 않고 부정과 싸우는 데 앞장섰다. 일본 헌병이 비행 폭로기사의 출처를 추궁하며 협박하면 이를 보기좋게 물리쳤고, 전남 하의도 소작쟁의에 관한 기사때문에 일본 앞잡이 박춘금이 일본인 경부를 대동하고 나타나 권총을 빼들고 위협하며 기사취소를 요구할 때에도 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빳빳이 세워두었다가 일갈 퇴치하기도 하였다.[13] 또한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주먹다짐을 하며 덤빌 때에도 미소로 물리치는 등 여러 일화를 남겼다. 우리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전》을 조선일보에 연재케 한 것도 한기악이었다.

1930년 10월부터는 조선일보의 경영난[14] 타개에 전념하고자 편집국장에서 물러나 업무이사가 되었다. 자신의 집에서 식사를 마련해 사원들에게 제공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기도 하였다. 이때 빚을 많이 얻어 집을 팔고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現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 998번지 안정사(安定寺 또는 安靜寺)[15] 근처의 조그마한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그 후 1935년부터는 인촌 김성수의 배려로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 학교의 감사로도 재직하였다. 일제의 압박이 어느때보다도 더 험하던 시대에 교육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지조를 잃지 않고 투쟁하였다.

그러다가 1941년 6월 20일 경기도 경성부 계동정 중앙학교 사택에서 패혈심장판막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3세.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후손



[1] 문정공파(文靖公派)-판관공계(判官公系) 31세 기(基) 항렬.[2] 음력 1897년 12월 22일.[3] #[4] 음력 5월 26일.[5] 자는 원중(元仲).[6] 조광조의 13대손으로, 하당(荷塘) 조종필(趙鍾弼, 1840 ~ 1915. 12. 4)의 외동딸이다.[7]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7권 281쪽에는 한정우가 1937년 5월 2일에 별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긴 하나, 차남 구봉(久峰) 한만년(韓萬年, 1925. 10. 29 ~ 2004. 4. 30)이 그의 수필집인 『일업일생(一業一生)』(일조각, 1984)에서 '선친께서는 4대 독자의 유복자로 뒤늦게 출생했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족보의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볼 수 있다.#[8] 5대조 한치응(韓致應, 1760. 9. 9 ~ 1824. 10. 12) : 1783년(정조 7) 생원-1784년(정조 8) 문과-종1품 판의금부사
고조부 한진정(韓鎭庭, 1799. 7. 29 ~ 1862. 8. 19) : 1827년(순조 27) 문과-정2품 형조판서
증조부 한돈원(韓敦源, 1820. 12. 27 ~ 1882. 7. 13) : 1846년(헌종 12) 진사-1858년(철종 9) 문과-정2품 공조판서
조부 한석동(韓晳東, 1856. 6. 3 ~ 1879. 7. 28) : 1874년(고종 11) 문과-정7품 승정원 가주서
아버지 한정우(韓正愚, 1875. 3. 22 ~ 1898) : 1891년(고종 28) 문과-정6품 홍문관 수찬.
[9] 조광조의 12대손으로, 조승교(趙升敎, 1822. 2. 16 ~ 1863. 4. 29)의 셋째 딸이다.[10] 증조부 한돈원(韓敦源, 1820. 12. 27 ~ 1882. 7. 13)은 첫째 부인 한양 조씨(1820 ~ 1877. 2. 4)를 비롯해 남평 문씨, 선산 김씨 등 총 3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한기악이 태어나기 전 이미 사망했으므로 한기악이 어렸을 때 증조모는 아마 남평 문씨 또는 선산 김씨 중 한 사람일 것이다.[11] 남만희(南晩熙)의 딸이다.[12] 그러나 '개벽'지는 그 다음 해인 1926년 폐간이 되고 말았다.[13] 고하 송진우도 박춘금 앞에서 창피를 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독한 인간이 박춘금이었으나, 그 앞에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취소는 못하겠다'며 일관하였다고 한다.[14] 당시 조선일보는 식당 외상값도 갚지 못할 만큼 금전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5] 신라 때이던 827년(흥덕왕 2) 창건된 뒤 조선 때 1395년(태조 4) 무학대사가 중창하면서 절 뒤뜰에 핀 푸른 연꽃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것을 보고 절의 이름을 청련사(靑蓮寺)로 바꾸었다. 그럼에도 이후 안정사와 청련사 두 개의 이름을 혼용했다고 하는데, 2008년 소속 종파인 한국불교태고종대한불교조계종과의 분규 끝에 토지가 매각되어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16] 1953년 9월 1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서 설립된 출판사. 처음 출판된 책은 대표 한만년의 장인(丈人)인 유진오가 저술한 《헌법해의》였다. 1997년 5월 1일 주식회사로 전환되었다. 1975년부터 매년 월봉저작상을 시상하고 있다.[17] 한경구의 부인은 광산 김씨 김동환(金東煥)의 딸 김시연(金時姸, 1959. 11. 27 ~ )인데, 현재 일조각 사장을 맡고 있다.[18] 2차 시험에서 평균 70.94점을 득점했다.[19] 부인 연안 김씨 김수경(金秀瓊, 1961. 10. 4 ~ )은 김덕주 전 대법원장의 딸이다.[20] 윤석균(尹錫畇)의 아들이다.